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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정씨 화이팅 원문보기 글쓴이: 정철중(2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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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참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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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적 증참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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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종 8도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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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 선릉참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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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휴 창의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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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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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종 청양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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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 나주목사 정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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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신 소격참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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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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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립 원주이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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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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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광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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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득천 사도주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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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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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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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섭 현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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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철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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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원 진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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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린 병조참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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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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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천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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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길 통덕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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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수 文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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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태 창의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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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환 창의순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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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의순절 용대 창원황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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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호 유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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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영남 영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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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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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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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호 국가유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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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배 국가유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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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 부 | 성 명 | 주요 직책 ‧ 행장 |
5 | 지하 (之夏) | 정계우(鄭繼禹) | 진사, 증승정원좌승지(贈承政院左承旨) |
6 | 계우 (繼禹) | 정윤적(鄭允績) |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
7 | 윤적 (允績) | 정만종(鄭萬鍾) (조계 棗溪) ( ? ~ 1549) | 눌재 박상 문하에서 공부했고 그 기재를 매우 아꼈다 受業訥齋朴先生*門 甚器之
중종계유(1513년) 진사, 병자(1516년) 문과 제3인
승문원주서(隸槐院注書), 1522년 검열(檢閱), 대교(待敎), 의정부낭관(政府郞), 사가호당(賜假湖堂 - 독서당에 뽑힘) 삼사아장(三司亞長 -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근무) 질정관으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오다(以質政官赴京) 형조·호조·예조·병조 등 4조 참판(爲刑戶禮兵四曹參判) 지신사(知申事-도승지), 대사간(大司諫), 대사성(大司成), 진위사로 명나라 북경에 다녀오다(以陳慰使朝京), 외직으로 능성현령, 한성좌윤, 8도 관찰사(外補 綾城縣令, 漢城左尹, 八道觀察使) 명조 기유년(1549년) 5월 2일 경상도 대구감영 임소에서 졸(明宗己酉五月二日卒于嶺營任所)
* 정만종(鄭萬鍾)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1516년(중종 11)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20년 경연기사관(經筵記事官)으로 사관의 올바른 임무수행을 건의하였다. 이어 사서·정언을 거쳐 경상도도사가 되었는데, 이 때 6품에서 5품으로의 승진이 너무 빨랐다 하여 사헌부의 반대를 받기도 하였다.
1527년 지평·문학을 역임한 뒤 헌납이 되어 정병(正兵)의 입역(立役) 과다의 폐단을 지적하였다. 2년 후 능성현령으로 나가 직무를 태만히 한다 하여 치죄당하기도 하였다. 이어 장령·집의 등 언관을 거치면서 행신(幸臣)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공격하기도 하고, 향촌교육의 내실화를 건의하는 등의 언론활동을 폈다.
1536년부터 사간·응교·집의·전한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뒤, 승정원우부승지·형조참판을 거쳤다. 1539년 예조참판으로 진위사(陳慰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성부좌윤·호조참판을 지낸 뒤 충청도관찰사로 나가 선치하였고, 곧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평안도의 양전(量田)을 순찰하기도 하였다.
이어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1547년(명종 2)에는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보임되었다가 1550년에 부총관으로 동지춘추관사를 겸하여 『중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함경도관찰사·경상도관찰사 등 외직을 역임하였다
* 보우(普雨) : 1509(중종 4)∼1565(명종 20). 조선 중기의 승려
호는 허응(虛應) 또는 나암(懶庵). 법명은 보우(普雨). 문정대비(文定大妃)의 외호 아래, 도첩제도(度牒制度)와 승과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키는 등 억불정책 속에서 불교 중흥을 위해 힘썼다.\ 15세에 금강산 마하연암(摩訶衍庵)으로 출가한 뒤,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에서 6년 동안 정진하면서 대장경과 『주역』을 공부하였다. 경기도 용문사(龍門寺)의 지행(智行)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유학자들과도 깊이 사귀었다. 특히 재상 정만종(鄭萬鍾)과의 교유에 의해 문정대비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었다.
* 눌재(訥齋) 박상(朴祥) : 1474 ~ 1530, 나주목사
박상은 평생을 강직하고 바른 처신으로 청백탁이(淸白卓異)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문이 아주 뛰어나 성현·신광한·황정욱 등과 함께 서거정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되고 있다.
박상은 1,100여 수의 방대한 시를 남겼는데, 직접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은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정만종 등도 모두 일당백의 대 시인들이다. |
8 | 만종 (萬鍾) | 정함(鄭涵) | 진사, 선릉참봉(宣陵參奉) |
8 | 만종 (萬鍾) | 정엄(鄭淹) 名臣 旌閭 | 생원 장원, 진사, 명종13년(1558년) 무오 명경(明經) 문과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 한림호당에 뽑힘(選 翰林湖堂), 검열(檢閱), 사인전랑(舍人銓郞), 삼사아장(三司亞長), 동부승지(同副承旨), 사헌부 장령 때에 무고당한 류연을 변호했다(掌令 時 辨柳淵被誣), 1570년 부수찬(副修撰)
미암 류희춘, 율곡 이이, 월정 윤근수, 약포 이해수 제공과 같이 이금에게 글을 올려 윤임, 류관, 유인숙의 억울함을 풀어줄 것은 말하고, 호자, 이기, 정언각, 임백령 등 제 간신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아뢰었다
與柳眉岩希春李栗谷耳尹月汀根壽李藥圃海壽諸公上箚請伸尹任柳灌柳仁淑之寃 削許磁李芑鄭彦慤鄭順朋林百齡 諸奸之勳爵
수찬(俄陞修撰), 1571 여산부사(礪山府使), 치적을 적은 새서를(임금의 도장) 찍어 통정대부 승자(以治蹟璽書陞通政), 1573 남원부사(南原府使), 1574년 나주목사(羅州牧使) 3읍 거사비(三邑去思碑) 증대사헌 양관제학(贈大司憲 兩館提學)
효성이 출중하여 정려을 명하였다. 「삼강록」에 실렸다 김평묵이 묘갈문을 쓰고, 성재 류중교가 묘지를 짓고, 회당 윤응선이 묘표를 썼다. 후종손 규종이 정려중수기를 지었다
以孝命旌閭 金平默撰碣銘 事見 「三綱錄」 省齋柳重敎撰墓誌 晦堂 尹應善撰墓表 後從孫圭宗撰旌閭重修記
* 류연(柳淵)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정숙(靜淑)이다. 조선 세종 때 집현전학사와 왕자사부(王子師傅)를 지낸 유귀산(柳龜山)의 아들로, 전라북도 정읍에서 출생하였다.
문종(재위 1450∼1452) 때 음사(蔭仕)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이 되었고, 그 후 송화현감(松禾縣監)을 지냈다. 세조(재위 1455~1468) 때 조봉대부(朝奉大夫)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으나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구미동(龜尾洞, 현 정읍시 수성동 구미동마을)에 은거하였다(두산백과)
* 정엄(鄭淹, 1528-1580) : 南道 인물(109) 한국매일
정엄(1528-1580)은 조선중기의 문신, 자는 문중(文中), 호는 양촌(楊村), 본관은 광주(光州), 팔도관찰사 조계(棗溪) 만종(萬鍾)의 아들이다. 남구 양림동 출신으로 1552년(명종 7)에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58년(명종 13)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로 임명되어, 호당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다.
1562년(명종 17)에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어 동부승지 허엽을 파직케 하고, 이듬해에 예조정랑, 병조 좌랑, 사간원 정언을 거쳐 1564년 사헌부 지평에 임명되어, 개성부 유생들이 음사를 소각한 일로 청금(靑衿)들이 죄 없이 구류되어 방면 하도록 주청하여 방면케 하였다.
1566년(명종 21)에 병조 정랑거처 사간원 헌납이 되어 "대간의 직은 책임이 가볍지 않아서 서정(庶政)의 잘잘못을 일에 따라 모두 말해야 하는 것인데, 신들은 모두 무상한 사람들로 중한 지위에 있으면서 자리만 지키고 녹만 먹을 뿐 직책을 다하지 못하여, 옥당의 비난을 입고 있으니 하루도 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을 체직하기를 청하였다. "답하기를, "별로 잘못한 것이 없으니 사퇴하지 말라."하였다.
1569년(선조 2)에 사헌부 장령과 홍문관 수찬을 거쳐, 외직으로 여산군수에 임명되어 강직한 목민관으로 전라감사의 추천이 있었다. 1571년(선조 4)에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홍문관 교리를 거쳐 종시부 첨정 지제교로 명종실록 편찬에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
뒤에 남원부사가 되어 따뜻하게 민중들을 돌보고 자상하게 행정을 하되, 문서를 처리하는 경우에 있어서는 모두를 친히 살펴 집행하고, 민원을 막는 폐단이 없으므로, 백성들이 매우 좋게 여겼다는 전라감사의 보고가 있었고, 전라 순무 어사(全羅巡撫御史) 신응시(辛應時)의 서장(書狀)에, "남원(南原)은 사람이 많고 땅이 넓어서 예전부터 다스리기 어렵다고 하는데, 부사(府使) 정엄(鄭淹)은 목소리와 낯빛을 사납게 하지 않아도 아전이 두려워하고 백성이 따라서 부임한 지 오래지 않아 온 경내가 편안합니다. 몇 해 동안 유임시키고 경관(京官)으로 차출하지 말기를 바라니, 어리석고 천한 백성이 사체(事體)를 모르는 것이기는 하나 그 성심으로 사랑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하였다.
1574년(선조 7)에 모친 봉양을 위하여 나주목사가 되어 선정을 배 풀면서 어머님의 병을 자신의 아픔보다 더 아파하며 정성껏 간병하였으나 돌아가시자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장사를 치른 뒤 죽었다는 갸륵한 효성에 나라에서 모두의 귀감으로 삼고자 1611년(광해 3)에 사헌부 대사헌에 증직하고, 효자정려를 명하여 양림동에 정려를 세웠다. 이 정려는 퇴락 되어 1975년 후손들이 석조(石造)로 다시 세웠다.
이 정려비각에는 주인의 심부름을 사람 이상 잘하였던 충견상(忠犬像)이 있다. 양촌 공이 개의 목에 문서와 전대를 걸어 주며 말하면 밥을 사 먹고, 만약 밥값을 너무 많이 가져가면 떠나지 않는 등 상상을 초월할 만큼 영리한 개였다. 어느 해 급한 일이 있어 임신 2개월로 산기가 있는 이 개를 한양으로 심부름 보냈다.
한양을 갔다오다가 전주 근교에 새끼 9마리를 낳고 한 마리씩 물어 나르다 마지막 새끼를 물고 오다 지쳐 죽고 말았다. 양촌이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석공을 시켜 견상(犬像)을 조각해 집뜰에 두고 추모했다 한다. 양촌 공이 죽자 그의 후손들은 양촌 공의 정려각을 세우고, 그 견상을 정려각 앞에 세워 양촌 공과 그 개를 기렸다는 것이다.
「사람 몹쓸 것은 개만도 못하다」는 비유도 있는 것처럼 여기에 실린 전설은 어쩌면 인간보다 더 나은 개의 충성심과 의리를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좋은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
9 | 涵 | 정대휴(鄭大休) (悔軒) 倡義 殉節 孝 | 생원, 경기전참봉(慶基展參奉)
임진왜란시 완산에서 순절하여 우승지에 증직되었다. 전쟁터에 나갈 때 유서를 남겨 종제 대신에게 조상봉사를 부탁하였다.
壬辰之亂 殉于完山 贈左承旨 臨行時遺書從弟大伸移住奉仕
< 전랑공 출전시 유서(1864년 정면수 공 필사) >
집 오가며 어른모시니 근황은 어떠하시냐! 멀리 있으니 그리움이 밀려온다. 나라가 장졸을 모집하고 형은 장차 전쟁터에 나갈 터인데, 생사가 어떠할지 알 수가 없구나! 죽어도 무슨 여한이 있겠냐마는 특별한 것은, 숙부(정대휴공 부친)께서 연로하시고 너 역시 자식이 없으니 반드시 피란하여야 한다. 십분 명심하여라!
나는 비록 아내를 얻어 인연 맺어 살았지만 여러 달 봉양을 고심했는데, 너에게 조상께 술 올리고 제사모시고 부모님 양친하여 줄 것을 부탁한다. 형수는 의당 가사에 대하여 너에게 전적으로 의지할 것인데 핍별하지 말고 잘 돌보아다오!
만약 형에게 불행이 오면 집안의 재산과 논밭 노비는 이를 재산으로 하여 조상봉사를 일여할지니 형은 천만다행으로 여긴다. 후일 집안에 분쟁이 생기면 이 문서로서 해결해라!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 없구나. 이만 그친다
임진(1592년) 8월 11일 완산에서 종형 씀
< 殿郞公出戰時遺書 >
通來侍況差何遙慕實深 兄爲國事願兵將赴戰所 未知死生雖死何恨就中 叔父年深 君亦無子避亂一事十分愼之 我今雖得妾子緣閱月餘長養可慮願君愼酒敬奉養親及兄妾宜吾家事專恃於君勿以逼別善處如已事兄若不幸家財田民以爲已物 祖上奉祀一如兄所爲千萬幸甚他日門中如有爭端以此爲遺臨紙不覺淚下只此不備姑惟照下 壬辰八月十一日 從兄 大休於完山草 |
9 | 엄(淹) | 정대신(鄭大伸) ( ? ~ 1610) | 소격서참봉(昭格署參奉) |
11 | 황(韹) | 정시립(鄭時立) 卓而 (1618 ~ 1645)
配原州李氏 (1621~1660) 孝婦 烈婦 | 배 원주이씨(配 原州李氏)
아들 필수가 부친이 양진강의 독해로 죽음을 당하여 탄원함에 대하여, 부인 원주이씨가 5년간 26회에 걸쳐 송사로 호소한 끝에 마침내 그 원수를 갚게 되니 오호 열부로다. 많은 선비가 상언하였으나 오래된 일이라 하여 정포지전을 입지 못하니 통한이다. 팔세손 인직이 가장을 쓰고, 중암 김평묵이 열녀전을 짓고 승지 송태헌이 묘표를 썼다.
子必壽謹按府君慘遭梁振剛毒害 而原州李氏五年號訴凡二十六訟庭竟復其讐 手書顚末曰復讐傳 嗚呼烈哉 多士上言以事在久遠未蒙旌褒之典痛恨 八世孫寅直述家狀 重菴金平默著烈女傳 承旨宋台憲撰墓表
* 김평묵(金平默) : 1819년(순조 19) ~ 1891년(고종 28)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 세거지는 경기도 포천. 아버지는 성양(聖養)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 송태헌(宋台憲) : 1857(철종 8)∼?. 조선 말기의 문신.
본관은 은진(恩津). 겸수(謙洙)의 손자, 병두(秉斗)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성주이씨(星州李氏)로 교인(敎寅)의 딸이다.
1885년(고종 22)에 증광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이 해 9월에는 홍문관수찬이 되고, 1890년에 부교리를 거쳐, 이듬해에는 부응교가 되었다.
1894년 교리로 있으면서 동학농민전쟁 발발을 초래한 책임을 물어 당시 전라감사였던 김문현(金文鉉)에 대한 처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계문(啓文)을 삼사(三司) 합동으로 자주 올리기도 하였다 |
13 | 필수 (必壽) | 정계광(鄭啓光) (觀漸堂) (1654 ~ 1721) 유림 | 박현석에게서 배웠다. 문장과 학문 행의가 높아 세상의 칭송을 받았다. 종후손 용학이 묘표를 썼다
朴玄石門人 文學行誼著稱於世 從後孫 用學撰墓表 |
14 | 계광 (啓光) | 정득천(鄭得天) (1677 ~ 1740) 관직 | 음직으로 강릉참봉으로 관직을 시작(以蔭筮仕 康陵參奉) 1717년 천문학교수(天文學敎授) 1730년 예빈시봉사(禮賓寺奉事) 1734년 사도시주부(司䆃寺主簿) 1734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
종후손 용학이 묘표를 썼다 從後孫 用學撰墓表 |
15 | 명천 (明天) | 정항섭(鄭恒燮) (1709 ~ 1765) 관직 | 현감(縣監)
여선량이 쓴 만사에 덕행을 칭송하였다 呂善良撰輓詞稱德行 |
16 | 항철 (恒喆) | 정재원(鄭載遠) (德村) (1742 ~ 1801) 孝 學者 | 진사(進士)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문장이 현저해 당시 사람들에 이름을 드날렸다
孝友文章 擅名當世 |
16 | 항길 (恒吉) | 정재권(鄭載權) (晩星) (1741 ~ 1810) 孝 學者 | 효성이 지극하고 형제간 우애로우며 학문이 깊고 심오하여 호남의 선비와 벗들이 우러러 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孝友純至 學文沈邃 兩湖士友 莫不景仰 |
17 | 재원 (載遠) | 정석린(鄭錫麟) (商山) (1778 ~ 1864) 孝 學者 | 헌종1년(1835) 을미(乙未) 증광시(增廣試) 문과
183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1841년 군자시정(軍資寺正) 1841년 태안군수(泰安郡守), 치적으로 거사비(以治績 去思碑) 1843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 소를 올린 것이 곧바르고 직설적이어서 거슬려 배척하므로 관직을 물러났다 陳疏直切 忤視見斥 因屛不仕 忤視見斥 1857년 고령으로 병조참지 승자(壽陞 兵曹參知 : 兵曹參議)
문장에 능하고 덕과 신의가 높아 그 행적이 매우 아름다웠다. 종손 인직이 가장을 짓고 동강 김영한이 묘갈문을 쓰고 족손 문학박사 기호가 추념비문을 지었다
文章德義克趾先美 從孫寅直述家狀 東崗金寗漢撰碣銘 族孫 文學博士 琦鎬撰 追念碑 |
18 | 석린 (錫麟) | 정승수(鄭承洙) (1822 ~ 1867) | 생부 석의(錫儀) 어려서부터 문명이 뛰어났으나 여러 번 과거시험에 낙방하였다
早負文名 累擧不中 |
19 | 승수 (承洙) | 정인태(鄭寅泰) (1841 ~ 1896) 忠 倡義 殉節 | 고종 을미년(1895년)에 의병을 규합하여 보국하고자 하였으나 부끄럽게도 조정이 정책을 바꾸고 간사한 무리가 거짓 참언하여, 고종 병신년(1896년)에 피해를 입었다. 그해 나이 56세요 시론이 바르다 하였다
高宗乙未糾合義旅 欲爲報國 雪耻旋朝 奸人讒言 高宗丙申被害 得年五十六時論韙然
* 을미의병은 명성황후의 시해와 서원철폐, 단발령 시행 등의 급진정책에 대하여 친일내각 타도와 일본세력의 축출을 목적으로 전국적으로 창의하였다 |
19 | 기수 (基洙) | 정인협(鄭寅協) (默齋) (1858 ~ 1936) 孝 | 효성이 지극하고 덕행이 높아 세상 사람들이 추중하였다
孝友德行 爲世推重
- 13세 계광 - 14세 명천 - 15세 항철 - 16세 재원 - 17세 석의 - 18세 기수 |
19 | 희수 (禧洙) | 정인직(鄭寅直) (췌동, 贅東) (1862 ~ 1941) 유림 | 중암 김평묵 성재 류중교 양선생 문하에서 배웠다. 문장과 학문 행의가 드높아 세상의 스승으로 추앙받았다
受業于金重菴平默 柳省齋重敎兩先生門 文學行誼爲世師表
- 13세 계광 - 14세 명천 - 15세 항철 - 16세 재원 - 17세 석의 - 18세 희수 |
20 | 인태 (寅泰) | 정두환(鄭斗煥) (1857 ~ 1896) 忠 倡義 殉節 |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용기와 지혜가 남달랐다. 부친을 해한 자의 복수를 서약하고 의병을 일으켰다
天性至孝智勇過人 誓復父讐 起服擧義
* 부친과 같은 해에 순절
- 13세 계광 - 14세 명천 - 15세 항철 - 16세 재원 - 17세 석린 - 18세 승수 - 19세 인태 |
20 | 화기 (和璣) | 정제환(鄭濟煥) (1845 ~ 1877) 配 全州李氏 (1845 ~ 1903) 孝烈 | 배 전주이씨(配 全州李氏)
시부모께 효도하고 지아비 섬김에 특별히 극진하니 향리에서 칭송하였다
孝烈卓異 鄕里稱頌
- 13세 계광 - 14세 운천 - 15세 항길 - 16세 재권 - 17세 석원 - 18세 동수 - 19세 화기 |
21 | 두환 (斗煥) | 정용대(鄭用大) 重凡(毅菴) 1882 ~ 1909 倡義 殉節
配 昌原黃氏 (1882 ~ 1965) 烈婦 | 성품은 인자하고 효성스러웠다. 을사조약 후 비분강개하여 大節하였다. 1908년 의병을 일으켜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붙잡혀 의로서 굴하지 않았으며 저들의 회유에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고 적을 준엄히 꾸짖고 마침내 참화를 입으니, 조야에서 애통해 하였다. 바로 순종 기유년(1909) 일이다. 사후 69년이 지난 정사 년(1977년)에 나라에서 은전을 내리니 후손은 이를 영광으로 삼았다. 유고가 있다
* 1977년 건국훈장 국민장
賦性仁孝資質端重 乙巳條約後 慷慨有大節 純宗戊申(1908년) 倡義累建奇勳 及其被逮 抗義不屈 彼以百行誘服 而竟不少橈 罵敵峻嚴大義昭然 竟被慘禍 朝野嗟惜 純宗己酉也 厥後 六十九年 丁巳 以國恩典致祭 復其子孫 世皆榮之 有遺稿
< 1977년 독립유공자 공적서 일부 * 붙임 참조>
1907년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해 8월 1일 한국군 마저 강제 해산되기에 이르렀다. 한국군에서 정교를 지낸 정용대는 군대해산 이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스스로 창의좌군장(倡義左軍將)을 칭하고 무장한 수십 명 내지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과 접전하면서 적성·양주(楊州)·풍덕(豊德)·교하(交河)·통진(通津)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경기도 일대에서 활약하던 정용대는 경기도 일대의 의병소탕전을 전개한 일본 토벌대에 의하여 체포되어 1909년 10월 28일 경성지방 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순국하였다.
배 창원황씨(配 昌原黃氏)
유인은 남편, 시아버지, 시조부 3대가 순절하시므로 28세에 청상이 되었다. 기일에는 왜적이 누누이 샅샅이 조사하여 견디기 힘들므로 친척 집에서 친구들이 기제사를 모셨다. 그럼에도 자녀들은 바르고 의롭게 교육하니 가문의 명성을 세우고 규문의 사표가 되었다. 의열비를 세웠으며 족질인 정기호 문학박사가 글을 지어 새기었다
孺人以二十八歲靑孀 因夫舅祖三世殉節 爲倭賊所忌累累尋査殆人所難堪而友于宗黨 育子女敎以義方 樹立家聲爲一世閨門師範 有義烈碑 族姪 文學博士 琦鎬撰陰記 |
22 | 용무 (用武) | 정중호(鄭重鎬) (1932 ~ 2010) 忠 | 6.25 참전 국가유공자 1968년 향토예비군 창설 초대 소대장
- 13세 계광 - 14세 명천 - 15세 항철 - 16세 재원 - 17세 석린 - 18세 승수 - 19세 인태 - 20세 동환 - 21세 용무 |
23 | 중호 (重鎬) | 정영배(鄭永培) (1955 ~ ) 忠 | 1970년 군복무중, 최전방 군사분계선 수색정찰시 지뢰폭발 부상 국가유공자
- 13세 계광 - 14세 명천 - 15세 항철 - 16세 재원 - 17세 석린 - 18세 승수 - 19세 인태 - 20세 동환 - 21세 용무 - 22세 중호 |
* 눌재(訥齋) 박상(朴祥)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474년(성종 5년) 광주 서쪽 방하동(현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 사동 마을)에서 아버지 박지흥과 어머니 계성 서씨의 삼형제 중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충주,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1515년(중종 10년) 담양부사로 재임할 때 당시 여산군수였던 지지당 송흠과 좌부승지였던 돈후재 조원기와 함께 염근리로 선정되었고, 1524년(중종 19년) 충주목사로 재직 시에도 염근리로 선정되는 등 두 번이나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아버지 박지흥은 원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세조가 어린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자 출사를 포기하고 처가인 광주로 와서 은거하였다.
박상은 15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점필재 김종직의 칭찬을 들을 만큼 학문이 높았으나 25세 젊은 나이로 요절한 큰형인 박정에게서 글을 배웠다. 박상의 삼형제 중 막내인 육봉 박우는 도승지, 대사헌, 대사성 등을 지낸 명신으로, 광주·전남에서 조선시대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사암 박순을 아들로 두었다. 세인들은 이들 형제를‘송(宋)에는 부자 삼소(三蘇)가 있고, 동국(東國)에는 형제 삼박(三朴)이 있다’고 비유될 만큼 훌륭하고 명석한 형제들이었다.
박상은 1496년(연산 2년) 23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1년(연산 7년) 28세 때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교서관 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1506년 사간원 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 중종의 노여움을 사 하옥되었으나 성균관 유생들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겨우 풀려나왔다.
그러나 이후 1년 동안 이에 대한 논쟁이 그치지 않아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은 마음대로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논핵하자 곧 종묘서령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으로 나아갔다,
1511년(중종 5년) 홍문관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중종 10년)년 3월 초에 중종의 계비였던 장경왕후 윤비가 인종을 낳은 뒤 엿새 만에 산후병으로 죽자 당시 담양부사였던 박상은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과 함께 폐위된 중종비 신씨를 복위시키고, 당시 조강지처를 폐위시킨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의 행위는 의리를 저버리는 일이므로 마땅히 죄를 물어야 한다는 상소를 전북 순창군 강천사 입구에 있는 삼인대에서 올렸다.
폐비 신씨는 연산군의 처남이며, 좌의정을 지낸 신수근의 딸인데, 신수근은 1506년의 중종반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중종반정 공신 박원종 등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반정공신들은 신수근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들이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중종의 정비였던 단경왕후 신씨를 일주일 만에 폐위시키고 장경왕후 윤씨를 새 왕비로 맞아들였었다.
조정은 이 상소로 인하여 논쟁에 휩싸였다. 박상과 김정 등은 중벌에 처해질 분위기였으나 조광조의 간언으로 박상은 전라도 남평으로, 김정은 충청도 보은으로 귀양을 가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 이 신비복위 상소는 사림들의 의리정신을 일깨워 사림들이 다시 결집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훗날 기묘사화의 불씨가 되었다. 1519년(중종 14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때 박상은 어머니의 3년 복상 중이라 고향에 내려와 있었으므로 다행히 참화를 피하게 되었고, 당시 능주로 유배를 내려오던 정암 조광조를 광주 남문에서 만나 슬픔을 함께 나누었다고 전한다.
1516년 귀양에서 방면된 이후 순천부사, 상주·충주목사 등을 역임하다가 1526년 53세 때 기성의 기라성 같은 문신들이 참여하는 문과 중시(重試)에서 영예로운 장원을 차지하기도 했다. 이듬해 나주목사를 마지막으로 1529년(중종 24년) 병으로 사직하고 광주로 낙향하였다가 1530년(중종 25년) 57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박상은 평생을 강직하고 바른 처신으로 청백탁이(淸白卓異)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문이 아주 뛰어나 성현·신광한·황정욱 등과 함께 서거정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되고 있다.
박상은 1,100여 수의 방대한 시를 남겼는데, 직접 입문하여 가르침을 받은 면앙정 송순, 석천 임억령, 정만종 등도 모두 일당백의 대 시인들이다.
정조 임금은 박상의 시에 대해‘청아·고고하고 담박하여 저절로 한없는 맛이 있다. 그 고아하고 강건한 것은 후인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다.’라는 등 당대의 뛰어난 시인들의 장점을 다 갖춘 최고의 시인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광주 월봉서원에 고봉 기대승, 사암 박순 등과 제향되었으며, 1688년(숙종 14년)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광역시 서구 서창동에는 박상의 생가터와 재실, 그리고 묘소가 있고, 광산구 소촌동에 있는 송호영당에는 그의 영정이 있다.
[출처] 淸白吏,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생애|작성자 장성군 평생교육센터
* 김평묵(金平默) : 1819년(순조 19) ~ 1891년(고종 28)
본관은 청풍(淸風). 자는 치장(穉章), 호는 중암(重菴). 세거지는 경기도 포천. 아버지는 성양(聖養)이고, 어머니는 장수황씨(長水黃氏)이다. 이항로(李恒老)의 문인이다.
5세에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해 『십구사략(十九史略)』 및 『소학』을 읽고, 13세에 경서를 대략 이해하였다. 24세에 이항로를 찾아가 배우고, 또 홍직필(洪直弼)을 찾아 배우는 등 학업에 매우 전념하였다. 두 선생을 동시에 따른 관계로 학설은 넓고 온건하였다.
1852년(철종 3) 홍직필이 죽은 뒤로는 다시 이항로의 학설을 따라 심즉리(心卽理)의 설에 기울여졌다. 또한 같은 문하의 유중교(柳重敎)와는 대학의 명덕(明德)을 이로 보느냐, 기로 보느냐의 견해 차이로 당시에 큰 논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1874년에 스승의 『화서아언(華西雅言)』을 편집, 간행했으며, 1880년에 선공감가감(繕工監假監)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881년 위정척사(衛正斥邪)를 주장한 일로, 섬에 유배되기도 하였다. 1900년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되었으며, 미원서원(迷源書院) 및 보산서원(寶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중암선생문집』 및 별집 『중암고(重菴稿)』·『근사록부주(近思錄附註)』·『학통고(學統考)』·『천군편(天君編)』·『대곡문답(大谷問答)』·『치도사의(治道私議)』·『해상필어(海上筆語)』·『경장문답(更張問答)』·『붕사잡록(鵬舍雜錄)』·『해상록(海上錄)』·『삼강문답(三江問答)』·『구곡문답(龜谷問答)』·『벽산심설연원(壁山心說淵源)』·『척양대의(斥洋大義)』·『남정기문(南征記聞)』·『우촌수담(雨村手談)』·『노강수록(鷺江隨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 정용대(鄭用大)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중범(重凡), 호는 의암(毅庵). 양촌공파(陽村公派) 21세손으로 할아버지는 의병 정인태(鄭寅泰)이며, 아버지는 정두환(鄭斗煥)이다. 어머니는 풍천 임씨(豊川任氏)이다. 부인은 창원 황씨(昌原黃氏)로,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정용대(鄭用大)[1882~1910]는 경기도 양주시 남면 경신리에서 태어났다. 1907년(순종 1) 7월 24일 한일 신협약(韓日新協約)[정미7조약]이 체결되고, 이때 교환된 비밀 각서에 의하여 같은 해 8월 1일 한국군이 강제 해산되었다. 한국군에서 특무정교(特務正校)를 지낸 정용대는 군대 해산 후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거의 기치를 올리고 스스로 창의좌장군(倡義左將軍)이 되었다. 정용대는 무장한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적과 접전하면서 경기도 양주를 비롯하여 적성·풍덕·교하·통진 등지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또한 인근 일대에서 활약하던 다른 의병 부대와 연합 전선을 구축하여 의병 운동의 효과적인 전개를 모색하기도 하였다.
1908년(순종 2) 2월 27일 이은찬(李殷瓚) 의병 부대와 함께 양주군 석적면[현 양주시 광적면]에서, 3월 2일에는 양주군 회암면 율정리[현 양주시 율정동]에서 일본 헌병 및 경찰대와 교전하였다. 4월 12일 부하 신관수로 하여금 통진군 수곡리[현 김포시 통진읍]의 김화안으로부터 군자금 10원을 조달하게 하였다. 4월 23일에는 부하 이종근 외 18명으로 하여금 통진군 대패면[현 김포시 통진읍]에서 1만 5000냥의 군자금과 군도 한 자루를, 양릉면 곡촌[현 김포시 통진읍]에서 군도 두 자루를, 교하군[현 파주시 교하읍]에서 양총 7자루와 탄환 900발, 군도 4자루를 각각 확보하게 하여 전력을 크게 보완하였으며, 고을 사람 조운원 등과 연락하여 일본 헌병과 순사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하게 하였다.
1908년 5월 20일경에는 신관수로 하여금 교하군 문발리[현 파주시 교하읍] 민영도의 집에 들어가 총기 두 자루와 탄환 100발을 조달하게 하였다. 같은 해 6월에는 활동 영역을 넓혀 경기도 강화군에서 군자금과 군량미를 확보하게 하였다. 6월 8일 경기도 부평군 내면[현 인천광역시 계양구 계산동]을 습격하였으나 순사 3명과 수비대 13명의 공격을 받아 의병 4명이 체포되었으며, 무기 9정을 빼앗기고 패퇴하였다.
1909년에 들어서면서 소규모로 정예화하여 양주 일대에서 항일 유격전을 펼치자, 일본군은 300명의 병력을 양주에 집결시켜 집중 공세를 가해 왔다. 이때 양주에서 함께 항일 투쟁을 펼치던 의병장 윤인순(尹仁淳)이 3월 19일 적성에서 전사하였고, 이은찬도 3월 31일 서울에서 체포되었다. 정용대 의병장은 풍덕군[개성직할시 풍덕군]에서 진을 치고 “이은찬, 윤인순 두 대장을 잃었으나 우리 의병은 좌절한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희생하여 일본의 압박을 제거하고 국권 회복을 도모하여 반드시 그 뜻을 관철할 것”이라고 재천명하고 항일 투쟁을 계속하였다.
정용대 의병 부대는 한말 의병사에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군자금 모금으로 유명한데, 이종근(李宗根)·신관수(申寬秀)·박만안(朴萬安)·백영현(白永賢)·이학선(李學善) 등의 부하들로 하여금 각지에서 군자금을 조달하게 함으로써 효과적이고 지속적인 항일 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다. 정용대는 계속하여 김포와 적성 등지에서 군량미와 금품을 징발하면서 전투를 준비하다가 1909년(순종 3) 10월 28일 체포되었다.
정용대는 체포된 후 일본군의 심문에 당당하게 응하였는데, 이러한 태도는 심문을 받는 동안 할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중, 의로운 일을 하다가 붙잡혔으니 이미 죽을 각오를 하고 있다며, “살기를 도모하다가 대한의 흥황복조(興皇復朝)를 손상하면 도리어 신자(臣者)의 도리가 되지 않는다”고 한 구절에서 그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정용대는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고, 1910년 1월 26일 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