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과수폭포'를 보기 위해 관광객들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을 찾는다.
왜냐하면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걸쳐 있는 크고 작은 폭포 300여개가 펼쳐진 것이
'이과수폭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과수폭포는 원래 '파라과이'소유였다.
파라과이는 스페인으로부터 1811년 독립해 빠르게 발전 했다.
카를로스 안토니오 로페즈 대통령과 그의 아들 프란시스코 솔라즈 로페즈는 세습 독재 정권을
유지했다.
농지개혁과 공교육 강화,경제개발,강력한 보호무역과 관세 정책을 펴며'파라과이'를 남미 최대의 부국으로 올려 놓았그런데, 이웃 나라 우루과이에 내분이 일어나자 브라질이 개입했다.
파라과이는 이에 불만을 품고 브라질을 공격했다.
이 과정에서 손 놓고 있던 아르헨티나도 파라과이가 자기네 국경을 침범하자 발끈한다.
결국 권력을 쥐고 있던 우루과이의 친 브라질 세력과 아르헨티나,브라질이 3국 동맹을 맺는다.
파라과이는 '바다를 이루는 강'이란 뜻으로 내륙국이지만 하천이 발달하여 수
도 '아순시온'이 국제무역항으로 번영했다.
파라과이는 대서양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라플라타강 유역을 차지하려는 욕심을 냈다.
그러자 주변 나라는 영토 문제와 관세 문제로 수년 동안 마찰을 빚은 파라과이를 견제해야 했다.
결국 1864년 전쟁이 터졌다.
브라질ㆍ아르헨티나ㆍ우루과이가 동맹을 맺어 파라과이에 대항해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3국동맹 전쟁이라 부르는 이 전쟁에서 초기에는 국력이 강한 파라과이가 우세 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불리해졌다.
브라질이 적극적으로 전쟁에 나섰기 때문이다.
3국동맹군 20만 병력 가운데 브라질군이 16만명이었다.
1869년 동맹군에 의해 파라과이 수도 아순시온이 점령당했다.
항복이나 강화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이라고 명령할 정도로 강력하게 밀어 붙였던
로페스 대통령이 전사하면서 전쟁은 파라과이의 패배로 끝났다.
이 전쟁의 최대 비극은 1869년 8월16일 '아꼬스따 뉴 전투'다.
3500명의 어린이들을 어른처럼 보이게 하려고 수염까지 붙여 총모양의 막대기를 휘두르며
브라질 기병대와 싸우게 했다.
6시간 전투 결과는 당연히 전멸이었다.
전사자 중에는 6살 아이도 있었다.
오늘날 파라과이는 이 날을 '어린이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 전쟁 후 파라과이는 산업기반이 모두 파괴되었다.
이과수폭포는 물론 다른 영토도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뺏겼다.
인구의 절반 아니 3분의 1이 줄었다고도 한다.
특히 남성의 90%가 사라지자 노동력 부족으로 남미 최빈국으로 추락했다.
심각한 성비 불균형으로 남녀 성비가 1:4가 되는 기현상이 발생했다.
따라서 지금까지도 파라과이는 일부다처제가 암묵적으로 허용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남성들의 가부장적 남성우월주의 문화도 강해졌다.
브라질 역시 전쟁으로 진 빚 때문에 재정위기로 경제불황을 겪었다.
전쟁에 참가한 브라질 보병은 토지가 없는 가난한 사람,흑인,하류계층이었다.
전쟁에 참가한 흑인 노예는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전쟁이 끝난 후 브라질의 노예제도 역시 끝났다.
이 전쟁으로 득을 보게된 나라는 영국이다.
파라과이는 영국에 막대한 빚을 지게 되었고,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도 전쟁으로 인해 빚이 늘었다.
아르헨티나 교섭자들은 파라과이 영토를 둘로 나누어 각자 다스리자고 브라질에 요구했다.
그러나 브라질은 반대했다.
첫째, 영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다.
영국은 자기에게 막대한 빚을 진 국가가 사라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파라과이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서 완충지대로 계속 존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1864년에서 1870년까지 일어난 이 전쟁은 근대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쟁이었다.
그래도 파라과이는 패배 속에서도 높은 자존심과 긍지로 나라를 지켜왔다.
'파라과이의 눈물'이야기는 십대를 위한 여행기 《느려도괜찮아,남미잖아》책을 내며
이과수폭포 이야기를 쓸 때 꼭 넣으려고 했다.
한 국가가 바다와 면해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바다가 열어주는 도전과 가능성을 책을 읽을 십대들에게 꼭 전하고 싶었다ㆍ
볼리비아 역시 페루와의 전쟁으로 태평양으로 나가는 바다를 잃고 내륙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고 분량이 넘쳐 편집자가 삭제해 버렸다. 내내 아쉽다.
우리나라가 조선업 1위 국가가 될 수 있는 것도 3면이 바다인 반도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파라과이에는 1962년 우리나라와 수교 후 건너간 이민자들이 8천~1만여명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의류와 봉제업으로 성공한 사람도 많다.
어디서나 부지런하게 일하는 한국인이다.
열심히 일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도 좋지만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존경받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더 많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