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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어천서각공방 원문보기 글쓴이: 우광성
잡록 하 雜錄 下
【이곳부터는 보고 들은 것을 그대로 기록한 것이다】
1. 천자의 장인이 된 보육寶育
성골장군聖骨將軍의 아들 강충康忠은 마가갑摩岬 어귀에 살았는데,
강충의 아들인 보육寶育은 그곳에 초가집을 짓고 은거했다.
신라의 술사術士가 보고 “여기 살면 반드시 당唐나라 천자가 사위가 될 것이다”.라고 했다.
보육은 두 딸을 낳았는데, 둘째 딸의 이름을 진의辰義라 했다.
두 딸은 모두 얼굴이 예뻤는데, 둘째 딸이 더 아름답고 재주도 많았다.
진의의 나이 겨우 15세 때, 그 언니가 꿈을 꾸었는데,
오관산五冠山 꼭대기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니 오줌이 흘러 천하에 넘쳤다.
언니는 꿈에서 깨어 꿈속의 일을 동생 진의에게 말했는데,
진의는 “비단 치마를 줄 테니, 그 꿈을 저에게 파세요.”라고 언니에게 말했다.
그러자 언니가 승낙했다. 진의는 다시 언니에게꿈 이야기를 해달라고 하면서,
팔을 벌려 품안에 담아 넣기를 세 차례나 하면서 치마를 서로 주고받았는데,
잠시 후에 몸이 움직여 마치 얻은 것이 있는 듯하여 자못 자부하는 마음이 생겼다.
당唐나라 선종宣宗은 형兄 무종武宗이 자신을 싫어하자,
평민의 옷을 입고 몰래 천하를두루 돌아다니며 동방에까지 이르렀다.
계사년癸巳年 봄에 송악松岳에 이르러 마가갑 양자동養子洞에 당도하여
보육寶育의 집에서 유숙하는데, 두 딸을 보고 좋아하여터진 옷을 꿰매 달라고 하였다.
보육은 이 사람이 중국中國의 귀인임을 알고 마음으로 과연 술사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고,
즉시 큰딸로 하여금 옷을 꿰매라 하였더니,
큰딸은 겨우 문지방을 넘자마자 코피가 나서 당나라 선종이 있던 방으로 들어가지도 못했기에,
진의로 하여금 대신 들어가게 하였다.
드디어 잠자리에 시중을 들어 한 달쯤 있다가 임신한 것을 알게 되었다.
당나라 선종은 떠나가면서 “나는 당나라의 귀족이다.”라고 했다.
또 활과 화살을 주면서 “아들을낳거든 그 아들을 내게 보내라.”고 말했다.
과연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바로 왕융王隆이다.
뒤에 보육을 원덕대왕元德大王으로 추존하고, 그 딸 진의는 정화왕후貞和王后가 되었다.
고려高麗 태조太祖가 처음 궁예弓裔 장군이 되어 병사를 이끌고 정주貞州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아래에서 쉬면서 물가에 있는 여인을 보았는데 대단히 아름다웠다.
그래서 “뉘 댁의 딸이냐?”라고 물었다.
이에 그 여인은 “이 고을 장자 유천궁柳天弓의 딸입니다.”라고대답했다.
태조가 그 여인의 집에 이르자, 유천궁은 매우 성대하게 태조를 대접했다.
그리고 자신의 딸에게 태조를 모시고 자게 했다.
태조가 떠난 뒤로 서로 소식이 끊어져서 왕래를 하지 않았는데,
그 딸은 절개를 지켜 여승[尼]이 되었다.
태조가 이 소식을 듣고 불러왕후로 삼았다.
【진의가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들이 성장하여 바다를 따라 당나라로 들어가
아버지를 찾았었다. 아버지를 찾다가 해도海島에 이르러 바다 용에게 붙잡히게 되었다.
그 아들은 바다 이무기를 화살로 쏴 죽이고, 용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결국 당나라에 가지 못하고다시 돌아와 악남岳南에 살면서 아들 하나를 낳았다.
괴이한 스님이 와서는 그 아들의 이름을 왕건王建이라고 지어 주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태조太祖이다】.
2. 예언가 박진귀朴震龜
동래부사東萊府使 노협盧協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기 전에
헌릉침랑獻陵寢郞으로 있으면서, 이지무李枝茂와 재실齋室에서 함께 과거 공부를 하였다.
하루는 늙은 무인武人 박진귀朴震龜가 왔는데, 이 사람은 바로 노협의 친척 아재였다.
이에 노협이 “아재께서는 어디서 오셨습니까?”라고 물었다. 박진귀는 이렇게 대답했다.
“시절의 기운이 좋지 않으니, 머지않아 반드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
내가 한양에 들어가 보니 살기殺氣가 온 성에 가득했는데,
나라에서는 강화도[江都]를 최고의 방어막으로삼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강화도에 가 살펴보았는데, 강화도 역시 살기가 가득했다.
이에나는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라 생각하고서 한양으로 돌아왔다.
수구문水口門으로부터 한 가닥 살 길을 찾아 남한산성南漢山城에까지 이른다면,
남한산성 가운데서 온전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서문西門에서도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나라는 아마도 망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내가 말한 것을 잘 기억했다가 그대로 해야 할 것이다” .
또한 박진귀는 노협과 이지무의 글을 보고서 “노협이 먼저 과거에 급제하고,
이지무가 뒤에 과거에 급제하겠구나.”라고 하였다.
병자년丙子年에 한양과 강화도가 적에게 모두 함락 당했는데,
임금은 수구문으로 나와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지킬 수 있었고,
또 서문으로부터 나와 남한산성까지 들어갔다.
그뒤에 노협이 먼저 과거에 급제하고, 이지무가 뒤에 과거에 급제했다.
모두 박진귀의 말처럼 되었다.
3. 허적許積의 죽음을 예언한 기인奇人
상국相國 허적許積이 휴가를 얻어 충주忠州에 있을 때의 일이다.
하루는 키가9 척尺이나 되는 손님이 찾아왔는데, 그 생김새가 보통의 사람들과는 달랐다.
폐양자蔽陽子를 눌러쓰고 긴 검을 차고 있었으며, 무릎부터 발목까지 새끼줄로 동동 매어 있었다. 그런데 그 손님이 곧바로 허적이 있는 곳으로 들어와서 앉았는데, 전혀 예의禮儀를 갖추지 않았다. 그러고는 허적 상국을 오래도록 응시하니, 허적 상국의 얼굴빛이 흙빛으로 변했다.
그 손님은 다만 “나라의 은혜가 끝이 없으나, 그것은 당신의 명命이 아닙니다.”라고 했다.
이에 허적 상국은 손에 쥐고 있던 부채에 매달아 두었던 것을 떼서,
이를 손님에게 주면서, “이것으로 당신의 깊은 마음에 답례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손님은 말없이 오랫동안 한숨 쉬다가 떠났다.
허적 상국의 가족들과 조카들은 함께 앉아있으면서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손님이 떠나기를 기다린 이후에, 그 연유를
허적 상국에게 물었다. 이에 허적 상국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 산에 있는 집에서 이 손님을 만났는데, 이 손님은 기이한 인물이었다.
이 사람이 내 미래에 대해 대략 말해주면서 ‘그대는 마땅히 큰 재앙을 만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을 그대에게 말해 줄 터이니,
그대는 조심하게.’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 그 사람이 정말로 이곳에 와서 내게 말해준 것이다.
저 사람이무릎 아래를 새끼줄로 동동 묶은 것은 세상 살아가는
길이 험하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며, 폐양자를 눌러 쓴 것은
하늘의 해를 오래도록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것이었으며,
긴 검을 찬 것은 눈앞에 검이 이르렀다는 의미이다.그러니 내게 재앙이 곧닥칠 것이다.
그러나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니, 어떻게 이 몸이 쉽게 물러날 수있겠는가?”
그러고는 오랫동안 깊은 한숨을 쉬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정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결국 재앙이 허적 상국의 몸에 이르게되었다.
남샹 (龜)
4. 완장阮莊의 옥하관玉河館 시詩
황명皇明 정덕正德 계유년 (1513) 안남국安南國 사신使臣 완장阮莊 등이
북경에 사신으로 왔다가 돌아갈 때에 옥하관玉河館의 문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鳳凰異凡鳥 봉황은 보통의 새와는 달리
五彩耀垂衣 오색의 화려한 옷을 입었다네.
噦噦翔千仞 소리 내어 울며 천 길 하늘을 날면서
常懷覽德輝 언제나 어진 덕 보기만을 바란다네.
偶來集金闕 우연히 황금 궁궐에 와 모였다가
顧眄生凄悲 둘러보더니 처량한 슬픔 일어나네.
況復秋霜肅 하물며 가을 서리가 차가워
百卉日俱腓 온갖 초목 날로 시들어 가는 때이랴.
梧桐陰已薄 오동나무 그늘은 이미 성글어졌고
琅玕實亦稀 대나무 열매 또한 드물어졌구나.
簫韶又不奏 순임금 음악 또 연주하지 않으니
歎息將何依 장차 어디로 갈지 한탄스럽구나.
振翮凌雲去 날갯짓하며 구름 위로 날아올라
更傍南天飛 다시 남쪽 하늘로 날아가네.
5. 안남국과 서천국의 세태
만력 기유년 유태감劉太監이 책봉冊封과 관련된 일로 조선에 왔을 때,
그 문하의 관리인서명徐明이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내가 태사太史 황휘黃輝를 따라 안남국安南國에 사신으로 갔다.
안남국에도 글을 하는 사람이 있고 시를 짓는 사람들도 대단히 많다.
그러나 대부분 시의 수준이 깊지못해 조선의 돈후하고 전아함에는 미치지 못한다.
또한 안남국 사람들은 인심이 사나워곳곳마다 불화가 생기기에
사신들은 언제나 병사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스스로를 지킨다.
안남국에서 사신을 맞이하여 모시는 벼슬아치도 모두 엄하게 경계하며 대접했다.
풍토風土가 매우 나빠 장독毒에 걸리면 번번이 구토와 설사를 하였다.
사는 곳에는 뱀과 벌레도대단히 많다.
그러나 그들이 준 선물은 모두 금주金珠, 서향犀香, 취우翠羽, 명박明珀 등이었다.
당신의 나라에는 보배는 없으나 인재가 바로 보배이다.
당신 나라의 명삼明蔘 한 뿌리로 안남국의 큰 진주와 바꿀 수 있을 것이다”.
또 서명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유태감이 당신의 나라에서 받은 것도 7만 금이나 되니,
당신 나라 백성의 고혈膏血도 말랐을 것이다.”
전강田康이 또 이렇게 말했다.
“내가 젊었을 때 도독都督 뇌여림雷汝霖을 따라 서천국西天國에 갔었다.
가락관嘉關에서 출발하여 서번西番관 토로번土魯番을 지나 곤륜산崑崙山 밑으로 해서 갔다.
그 산을 바라보니높고, 크기가 마치 하늘의 반은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천국에 도착하니 장안長安에서 1만8천 리였다. 5개월이 걸려서야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의 서울은 사위성舍衛城이었다.
그 나라왕은 백반白飯의 자손이며 고관들은 모두 승복僧服을 입고 있었다.
한문자漢文字를 쓰지 않으며, 기후는 중국과 비슷하나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그 곳에는 금이나 옥, 구슬 등이 많으며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않았다.
그곳 사람들도 인삼을 귀하게 여겨, 삼 한 냥 값이 금 한 냥이었다.
주는 선물이 매우 풍성하였는데, 그곳 왕을 세우고 2개월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뇌여림 도독은 금과 구슬들을 많이 받았다고 탄핵을 받게 되었는데,
선물로 받은 것을 몰수하라는 왕명이 있어 황금 3천 냥과 명주明珠 열 말,
화완포火浣布 백 필을 관官에 납부하였다.
그럼에도뇌여림 도독의 집에서 미리 딴 곳에 숨겨 놓은 것이 또한 금 3천 냥과 명주 스무 말이었다. 이때문에 내관內官도 서천西天의 봉사奉使로 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계묘년에 그 나라 세자를
책봉하는데 태감太監은 3만 금을 바치고 가서 몇 십만 금을 얻어 가지고 왔”다.
일찍이 우통尤이 편찬한 「회암악부悔庵樂府」를 보니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二月常開仙艾花 2월 봄날엔 늘 선애화가 피기에
喜從句漏覓丹砂 즐거이 구루산에 가서 단사를 구하네.
伏波銅柱今何在 복파장군 구리 기둥 지금엔 어디 있나
只見飛鳶墮水涯 다만 물가에 내려앉는 솔개만 보이네.
漢使虛乘浪泊槎 한나라 사신 헛되어 낭박에서 노 저었고
珠崖棄後隔中華 주애군 버린 후 중화와 떨어지게 되었지.
遺民休抱亡陳恨 남은 백성이여, 망한 한 부여잡지 마시게
纔換黎家又莫家 여가가 되자마자 또 막가로 되었으니.
이것은 안남국에 대해 서술한 작품이다.
안남국은 동쪽의 흠주欽州에서 일어나 서쪽으로 강좌江左까지 뻗쳤고,
북쪽으로는 임안臨安에까지 이른다.
임안으로부터 몽蒙의 하련화탄河蓮花灘으로부터
안남국의 동도東都에 이르는 길은 4~5일 정도의 거리이다.
낭박浪泊은 안남국에 있는 서호西湖인데 복파장군 마원馬援이 날아가는
솔개가 점점이물가로 내려앉는 것을 본 곳이다.
여가黎家가 다스리던 말기에 왕이었던 리犁가 진일혼陳日焜에게 시해당하여
영락永樂연간에 토벌하여 그 땅을 군현郡縣으로 삼았다.
선덕宣德 연간에 다시 여리藜利에게 봉해 주었는데, 가정嘉靖 때에 막등용莫登庸에게 빼앗겼다.
안남국의 애산艾山에 선애仙艾란 꽃이 있는데 중춘仲春에 꽃을 피운다.
피가 내린 후에꽃잎에 물어 떨어지면 수많은 물고기가 그 꽃잎을 먹고서 용으로 변한다고 한다.
안남국에는 월왕성越王城 가운데 천사관天使館이 있다.
동월은 자신의 악부시樂府詩에서 또 이렇게 읊조렸다.
雙溪水色四時淸 쌍계의 물빛은 사계절 맑기만 하니
이것이 바로 빈동룡賓童龍이니 곧 천서국天西國을 말한다.
이 두 나라는 천지의 끝부분인 서남쪽에 있다.
한漢나라 이래로 중국中國과 동떨어져 있었는데,
우리 황조皇朝가 들어서면서 먼 지방까지 편안하게 하는 교화가 바다 밖에까지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여러 나라가 중국에서 보낸 신하에게 복종하면서 중국에서 보낸신하를 보기만 하면,
곧바로 백성들의 물건을 강제로 빼앗아
황제의 명을 욕되게 하는 죄를 짓게 된 것이다.
앞서 말한 황휘黃輝나 뇌여림雷汝霖 같은 이들은
안남국에서 뇌물 받는 것을 사양하지 않은 사람들이다.
6. 임진년 왜구 방어 실책에 대하여
임진壬辰의 난리가 일어나자 명明나라에서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출병했을 때,
명나라와조선을 오가면서 일을 맡은 사람 및 여러 장수가 3백7십여 명이나 된다.
절강浙江·섬서陝西·귀주貴州·운주雲州·면주緬州의 남북 군대를 징발한 것이
모두 22만 1천 5백여명이고, 식량으로 소비된 은이 약 5백 83만 2천여 냥이며,
쌀과 콩을 교역한 은이 또한 3백만 냥으로 실제로 쓴 본색(本色) 은과 쌀이 수십만 석이었다.
여러 장수에게 상으로 내린 은이 3만 냥이었고, 산동의 쌀이 이십만 석이었다.
일본 장수와 군사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다를 건너왔는데,
대장은 34명이었고 병사는 25만 명이었다.
천하의 풍기風氣는 서북쪽이 강건하고 굳세며,
동남쪽은 여리고 나약한 것이 자연의 이치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남쪽 오랑캐의 강인함이 북쪽 오랑캐에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임진의 난리 때에 바다를 건너왔던 왜구들은 불과 수십만이었다.
그러나 왜구가 우리나라 변방의 여러 진영鎭營에 이르자,
우리나라 병사들은 왜구들이 일으키는 바람만 보고서도 도망쳤다.
그래서 저 왜구가 강하지는 않았지만,
불과 열흘 한 달 사이에 우리나라 병사들이능히 대적하지 못한 것이다.
이것은 진실로 태평성대가 오래 지속되어 백성들이 병란兵亂에 대해 미처 알지 못했고,
또한 대포를 조작하는 기술에 대해서도 우리나라 병사들은 잘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갑자기 왜구가 들이닥치는 두려움 속에 어떻게 방어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렇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명나라가 우리 조선을 구원해주려 한 일에 대해서 말하자면,
산동 지방의 강인한 병사들을 제쳐두고 멀고먼 남쪽 고을 만 리 밖에 있는 군사들을 징발했으니,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계책이다.
또한 예로부터 병사를 잘 부리는 사람은 적의 동태를 잘 살피기에
전쟁에서 패하는 경우가 없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과 우리나라의 도순변사都巡邊使 신립申砬은
모두 적을 사로잡는 공을 세우려는 생각으로 다만 적의 동태만 알았지,
왜구의병사를 부리는 기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이로 인해 이여송은 혜음령惠陰嶺에서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고,
신립은 달천㺚川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진실로 개탄할 만하다.
왜구의 장점은 완벽하게 속이는 것에 있는데,
자신들의 병사를 여기저기 흩어 놓았다가싸우기로 약속한 땅에서 다시 뭉치는 것에 능했다.
그래서 한 무리의 병사들만 앞으로 나가게 하여 우리나라 병사를 속이고,
유격대들을 이곳저곳에 매복시켜 두었다가 부지불식간에 갑자기 뛰쳐나와
사방에서 대포를 쏟아대고 일시에 공격을 한다.
그래서 우리나라 병사들이 갑자기 왜적을 만나게 되어 어쩔 수 없이 싸움에서 패한 것이다.
뒷날 왜구를 방어하는 사람들은 먼저 왜구의 기미를 잘 살펴서 척후병斥兵을 멀리까지
나가게 하여 미리 수비하는 것에 힘쓴다면, 임진의 난리와 같은 낭패는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와 왜구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말한다면,
칼과 창, 총과 탄환은 비록 저 왜구가 더 강하다고 말할 수 있지만,
용맹하고 굳세게 번개처럼 분격하는 것은 왜구가 우리에게 미치지 못한다.
굳센 활과 날카로운 칼날이 또한 우리의 장점이다.
그러니 진실로 백번 싸우면 백 번 이길 기세가 우리에게 있다.
그런데 평소 규율과 훈련하는 방도가 없었고,
난리를 당하자 적의 동태를 살피고 적을 제압하는 계책도 잃어버렸으니,
전쟁에서 패한 것은 자초한 꼴이다. 명나라 군대까지 있었지만,
왜구 보기를 천하에 막강한 적으로 여겼으니 실로 가소로운 일이다.
예로부터 지금까지 북쪽 오랑캐는 늘 중원으로 치닫는 경우가 많았지만,
남쪽 오랑캐와섬나라 오랑캐가 어찌 중화를 넘볼 만한 세력이 있겠는가?
대개 그 풍기風氣의 강하고 약함이 절로 같지 않으니,
이기고 지는 것은 진실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지, 저들에게 있는것은 아니다.
곶 (花)
7. 유장군전 柳將軍傳
유 장군은 진주晉州 유씨柳氏로, 이름은 응수應秀이고 자는 인수仁이다.
큰 아버지 유세양柳世讓이 온성穩城에서 관직을 하였는데,
이때부터 북쪽 함흥咸興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장군의 얼굴은 옥과 같았고,
키가 크고 수염은 멋있었다. 타고난 자질이 독실篤實하고 용기와 지략이 많았으며,
강개하여 큰 절개도 있었다.
유 장군은 나이 27세에 무과에 합격했다.
변방을 다스릴 때 삼수군三水郡과 갑산군甲山郡의 변방 오랑캐들이 번성하여,
가을마다 조선을 침략하여 백성을 죽이고 약탈하여 변방 백성들의 걱정거리가 되었다.
유 장군은 황철마黃䮕馬를 타고 삼고창三股槍을 손에들고서
오랑캐를 만나면 곧바로 공격하여 오랑캐를 죽였다.
유 장군이 때때로 변방 산으로 사냥을 나갈 때면,
붉은 활과 흰 깃으로 물들어 유 장군의 풍채가 화려하게 빛났기에,
오랑캐는 유 장군을 비장군飛將軍이라 부르면서 두려워하며 피하느라
감히 가까이 다가오지 못했다. 이 때문에 변방이 편안해졌다.
그 뒤 변방의 오랑캐 추장이 강계江界 지역으로 옮겨갔는데,
강계 지역의 수장守將에게사로잡히게 되었다.
강계의 수장은 어디에서 옮겨왔는지 오랑캐 추장에게 물었는데,
오랑캐 추장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다.
“본래 삼수군과 갑산군의 경계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황철마를 타고 손에 삼고창을 든 장군 한 사람이 호랑이처럼 용맹하고 솔개처럼 재빨랐습니다.
그래서 그 장군이 두려워 그를 피해 이곳으로 옮겨온 것입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 소문을 듣고서 북관北關 관찰사觀察使에게 명하여,
그 장군을 찾아보게 했더니, 바로 유 장군이었다.
임금은 곧바로 역마驛馬를 보내 유 장군을 불러들여,
특별히 훈련원판관訓鍊院判官의 자리에 제수除授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을 보살펴야 한다고 임금께 아뢰고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아마도 유 장군이 벼슬살이에 마음이 없었던 모양이다.
유 장군은 한가롭게 시골집에 살면서 날마다 즐거워해 마치 이렇게 생을 마칠 것처럼 했다.
임진년壬辰年(1592) 섬 오랑캐 왜구가 조선을 침략하여,
조선의 임금이 서쪽으로 몽진蒙塵을 가 도성을 지키지 못했다.
또한 조선의 고을은 왜구가 온다는 소문만 듣고서도 모두무너졌다.
적장賊將 가등청정加藤淸正과 평행장平行長은 왜구를 이끌고 북쪽으로 공격해 갔다.
절도사節度使 이혼李渾이 수많은 병사들을 이끌고 왜구를 막았지만,
결국 패하고서 도망쳤다. 고을에서는 왜구의 칼날에 맞서지 못하였고,
감사監司도 또한 왜구에게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윤탁연尹卓然을 감사監司로 임명하고,
삼수군과 갑사군의 수령守令과함께 별해보別害堡에 병사를 주둔하니,
왜구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여 모든 길이 텅 비게 되었다.
이에 왜구는 안변安邊에서 길주吉州까지 각각 병사를 포진하며 성城에 주둔하여 수비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함흥咸興이 왜구의 활동 근거지가 되었다.
유 장군의 아버지인 유방柳坊이 이에 화를 내면서 “왜구의 세력이 여기에까지 이르렀는데,
한강 북쪽 스무 고을에 어찌 한 사람의 의사義士도 없는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동생인 유곤柳坤과 유성柳城을 데리고 산속 계곡으로 들어가면서,
유 장군과 유 장군의 동생인 유응춘柳應春으로 하여금 근처 고을에서 의병을 불러 모으게 했다.
그 당시 고을의 도적인 진대유陳大猷가 왜구에 가담했는데,
그의 딸을 왜장에게 시집보내고 왜장의 심복心腹이 되어, 의병의 상황을 몰래 알려주고 있었다.
또한 진대유는 “장군부자의 충의와 용맹함,
계략은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 두려워할만 합니다.
장군 부자가 있는 곳을 알려 줄 테니 그들을 해치십시오.”라고 했다.
왜구는 그 계책을 써서 밤에마을을 습격해 왔다.
장군 부자는 떠들썩한 소리를 듣고 처음에는 의병으로 생각했었다.
그런데 대포소리가 사방에서 울려대자 비로소 왜구가 온 것임을 알게 되었다.
어쩔 수 없이 부하 몇 사람과 왜구를 대적하여 온 힘을 쏟아 싸웠다.
결국 형제 세 사람은 모두 왜구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왜구는 항복하라고 권유했지만,
세 사람은 끝까지 왜구에게 욕을 하며 굴복하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유 장군이 이러한 변고變故를 듣고 슬피울며 돌아와,
동생인 유응춘과 왜구와는 결코 한 하늘 아래 살지 못하니,
반드시 군친君親의 원수를 갚겠다고 맹세했다.
그러고는 70여 사람을 이끌고 별해보에 있는 순찰사를 찾아뵙고
왜구를 소탕할 계책을갖추어 말했다. 이에 순찰사는 유 장군을 토적장討賊將으로 삼았다.
유 장군은 마침내 이희록李希祿 등과 함께 함흥咸興의 고천高川에 이르러,
며칠 동안에 병사 천여 사람을 모았다.
그러고는 먼저 왜구에 가담한 세 사람을 죽이고, 다음날 왜구 열다섯 사람을 만났는데,
그들을 모여 죽였다.
유 장군은 박중립朴中立, 정해택鄭海澤과 더불어 세 진영으로 나누어,
평원에 주둔하여왜구를 평정하면서 크게 병사를 펼치고 불을 피워,
기천岐川과 기곡岐谷 등의 지역을 위협했다.
유 장군은 기병騎兵과 보병步兵 수십 명을 이끌고 왜구들의 한 가운데로
진격하여 왜구34명의 목을 베니, 나머지 왜구들이 달아나 흩어졌다.
이에 여러 군대가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유 장군의 명성과 세력이 왜구에게 크게 떨쳐졌다.
모든 병사들은 물 건너편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유 장군이 진영陣營의 문에 서서 왜구를향해 화살을 하나씩 쏘았는데,
쏜 화살이 모두 왜구에게 적중했다. 유 장군에게는 삼봉三峯이라는 노비가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용맹하고 힘이 장사였다.
삼봉은 일찍이 장군을 따라다니면서, 곁에서 장군에게 화살을 주곤 했다.
유 장군이 화살을 쏘는 것이너무도 신속하여
삼봉은 유 장군이 쏘는 화살을 제때에 전해 주지 못할 정도였다.
왜장倭將 한 사람이 병사들을 이끌고 검을 뽑아들고 돌진해 왔는데,
유 장군이 부하인 장원침張元琛에게 활을 쏘게 했다. 장원침이 활을 한 번 쏘아 왜장을 죽였다.
유 장군이 타고 다니던 말이 왜구의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도, 장군은 당황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고, 싸움을 더욱 독려할 뿐이었다.
규찰관糾察官 한사익韓士益은 마을의 협객挾客인데, 유 장군의 명령을 어기자,
유 장군은 곧바로 목을 베어 병사들에게 보였다.
이에 군중軍中이 엄숙해졌고 용맹한 기상은 절로 배가 되었다.
마침내 승기勝氣를 타고 왜구를 무찌르며 나아가니, 왜구가 크게 패하여달아났다.
마침 해가 저물어 천지가 어두워져 끝까지 추격하지 못했다.
그래서 곧바로 병사를 거두어들였다.
이날 밤, 성城 가운데에서 곡하는 소리가 많이 들렸는데,
죽고 다친 왜구가 셀 수 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왜구의 기세는 크게 꺾이어,
유 장군을 볼 때마다 왜구는 곧바로두려워 달아나면서 싸움을 하지 않았다.
유 장군은 왜구의 목을 자른 것을 순찰사巡察使에게 보내니,
순찰사는 크게 기뻐하면서
“이 사람이 왜구를 무찌르는 데 능력이 있으니, 왜구를 토벌할 수 있겠구나.”라고 하였다.
그래서 갑산부사甲山府使 성윤문成允文을 장군으로 삼아
황초령黃草嶺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성윤문이 군대를 지휘 감독했다.
유 장군과 함흥판관咸興判官 백응상白應祥은 맞은편인 기천岐川에 주둔했다.
왜구가 수많은 병사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유 장군은 백응상과 함께 병사를 합쳐서 싸우러 나갔다. 그리고 왜구의 선봉先鋒을 꺾자, 왜구는 언덕이 무너지듯이 와르르 무너졌다.
우리 군대는 승기勝氣를 타고 왜구를 추격하여홍도洪島에까지 이르렀다.
이때 성윤문은 수많은 병사를 이끌고 와서 독산獨山 아래 주둔하고 있었는데,
왜구에게함락당하고 말았다.
유 장군의 동생인 유응춘은 성윤문의 부대에 있으면서 힘써 싸웠으나, 그 싸움에서 죽고 말았다.
성윤문은 흩어진 병사들을 모아 덕릉德陵 아래 산속으로 들어가서는
유 장군에게 강물의 북쪽에 진영을 치고 왜구를 방어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유장군은 이렇게 말했다.
“대군大軍이 막 패하였고, 적은 병사로는 수많은 왜구를 당해낼 수 없으니,
싸움을 해서는안 됩니다. 오늘 싸우기 위해, 왜구는 반드시 성을 비우고 왔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기이한 계책을 내어 성으로 쳐들어가면 성을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
그러나 같은 위장衛將이었던 박중립과 정해택이 유 장군의 계책을 따르지 않았고,
유 장군도 혼자서 성에 쳐들어갈 수 없었기에, 결국 이 계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뒷날 왜구가있었던 성안에 있다가 온 사람이 “왜구가 성을 나가 싸움을 하던 날,
성에 머물고 있었던왜구는 겨우 몇 십 명의 노인과 환자들뿐이었다”라. 고 하였다.
성윤문은 이미 험준한 곳에 주둔하여 스스로를 보호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명령을 하달하여 먼저 왜구를 공격하지 말라고 하였다.
이에 유 장군은 개탄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대장께서는 병사들을 껴안고 깊은 곳으로 들어갔으며,
또한 왜구와 싸우지 말라고 했으니, 나라의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서 유 장군은 홀로 수십 명의 기병騎兵과 함께 고을의 북쪽으로
나와 위협하고 노략질하는 왜구를 무찔러 죽였다.
이에 왜구는 유 장군을 멀리서 보고서도 도망쳤는데,
유장군은 추격하여 성 아래에 이르러 왜구의 용감한 장수 한 명의 목을 베고 돌아왔다.
그때성 위에 있었던 왜구들은 통곡할 뿐, 자신의 장수를 감히 구하려 하지 않았다.
성윤문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화를 내면서, “대장의 명령이 없었는데도,
멋대로 경거망동輕擧妄動하는구나. 비록 왜구의 장수 목을 베었지만,
어찌 공을 이룰 수 있겠는가?”라고했다.
그러고는 순찰사에게 유 장군을 형벌에 처하라고 요청하려다 그만두었다.
성윤문은 유 장군의 군사들이 왜구에게 빼앗아온 왜구의 칼과 말을 모두 빼앗아 돌아가 버렸다.
또한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유 장군의 명령을 듣지 못하게 했다.
유 장군은 어떻게 할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검을 어루만지며 개탄하면서 때때로 하늘을 우러러 보며 통곡할따름이었다.
마침내 이유일李惟一 등과 마음을 같이하여 힘을 모아 기회를 엿보고 지혜를 짜냈다.
위로는 공功을 질투하는 대장의 마음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아래로는 여러 군사들에게 왜구에게 대항할 의리를 독려했다.
결국 흉악한 왜구를 소탕하고 남관南關을 수복했다.
세상에서는 임진년 북방北方에 세 영웅이 있었다고들 하는데,
유 장군과 이유일李惟一, 한인제韓仁濟를 지칭하는 말이다.
조정에서는 유 장군의 공功을 인정하여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제수했고,
곧바로 삼수부사三水府使에 임명했다. 그러나 유 장군의 성품은 본래 강하고 곧아,
일을 처리할 때에는 그일에 매진하여 빠르기가 번개와 같았다.
벼슬자리에 올라서는 언제나 근후謹厚함과 자혜慈惠로움으로 다스리니,
변방의 백성들이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유 장군을 우러러 보았다.
어사의 관직을 수행할 때에도 청백리로 소문이 나서,
왕은 특별히 유 장군의 품계를올려주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서추西樞의 자리에 제수했다.
정유년丁酉年(1597) 왜구가 다시 조선을 침범하자,
임금은 장군을 별장別將 겸兼 영남좌방어사嶺南左防禦使로 임명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던 어의御衣를 벗어주고 말과 술을 하사했는데, 위로함이 지극하였다.
유 장군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감격하면서 죽음을 맹세하고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다.
이에 남관南關의 정예병사 백 명을 이끌고 울산蔚山에이르러,
군사들을 독려하여 증성甑城에서 왜구를 토벌했다.
이 싸움에서 유 장군은 7번싸워 연속 왜구를 물리쳤다.
세상에서 말하는 증성에서의7 번 승리가 바로 이것이다.
왜구는 싸움에서 지고 도망쳐 경주慶州에 머물러 있던 왜구와 합세하니,
병력의 기세가더욱 날카로워졌다. 유 장군은 마침내 병사를 진격시켜 경주의 화원花院에 이르러,
왜구를 만나 싸우기를 종일토록 하였다.
결국 왜구는 패하여 도망쳤고, 유 장군은 승기勝氣를타고 한 마리 말로 추격했는데,
위험한 곳까지 깊이 들어간 줄도 알지 못했다.
유 장군이타고 있던 말이 진흙탕에서 넘어지자,
왜구는 깃발을 돌려 곧바로 유 장군에게 돌격하였고,
사방에 숨어 있던 왜구의 복병들까지 한꺼번에 유 장군을 에워쌌다.
그런데 아직 조선의 군대는 오지 않았기에, 유 장군은 혼자서 왜구에게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이 하나도 빗나가지 않았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검을 꺼내어 싸웠는데, 검이 또 부러졌다.
이에 왜구는 숲의 까마귀가 사라지는 구름과 하나가 된 듯 모여들어
유 장군을 에워쌌고 탄환이 사방에서 마치 우박처럼 쏟아졌다.
유 장군은 결국 죽게 되었으니, 이때 유 장군의 나이는40이었다.
부장副將인 주응무朱應武가 추격하여 왜구들 속으로 진격했지만,
유 장군을구하지 못하고 힘이 다 빠져, 그 또한 죽고 말았다.
이보다 앞서 유 장군이 삼수三水에 있을 때에, 말을 한 마리 얻었는데,
날래기가 마치 나는 듯했다. 유 장군이 늘 싸움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이 말을 탔는데,
어느 절도사 한 사람이 유 장군을 속여 그 말을 자신이 갖고자 했다.
이에 유 장군은 화를 내며 “장수에게 중요한 것은 말인데,
너는 어찌 이와 같이 속이려 하느냐?”라고 했다.
그 사람은 대단히 부끄러워하면서도 화를 냈는데,
이 일로 인해 유 장군에게 서운한 마음이 대단히 깊어졌고,
유장군의 공功이 으뜸인 것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몰래 사람을 시켜 밤에 화살을쏘아 그 말을 죽여 버렸다.
그런데 이 싸움에서 유 장군이 탔던 말은 쇠약해져 있었기에,
진흙탕에 넘어지는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고, 결국 불행한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왜구들은 크게 기뻐하면서,“조선의 비장飛將이 죽었다.”고 하면서,
유 장군의 머리를 잘라 돌아가서는 왜구의 군중軍中에 보이며 서로 기뻐하였다.
왜구에게 잡혀 있던 우리나라 백성이 왜구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서는
서로 슬피 울면서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유 장군의 머리이다. 우리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탈출할 수 있다면,
반드시 조선의 부대部隊에 이 말을 전하여, 유 장군의 머리를 거두어 돌아가게 해야 한”다.
그러고는 몰래 훔쳐 웅덩이의 풀 속에 숨겨 두었다.
한 여인이 왜구의 틈 속에서 탈출해 와서는 우리 군대에 이러한 정황을 말해 주었다.
유장군의 부하들은 다만 유 장군의 죽은 몸뚱이만을 구해 장사 지냈는데,
이 여인의 말을 듣고서는 유 장군의 머리를 숨겨두었다는 장소로 가서 유 장군의 머리를 찾았다.
그런데 유장군의 얼굴이 마치 살아 있을 적의 모습과 같았다.
이에 유 장군의 머리를 가지고 돌아와함주咸州에 묻었다.
유 장군은 평소에 충의忠義로 여러 장군들을 독려했고, 또한 장군들과 이렇게 약속했었다.
“남아男兒로 태어나 나라를 위해 일하다가 죽게 된다면 행복한 일일 것이다.
내가 만약싸움에서 죽게 되면, 다른 사람[某]이 나를 대신해서 장군이 되고,
또 그 사람이 싸우다죽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이 대신 병사들을 거느려서,
반드시 왜구를 물리쳐 나라에 보답해야 한다.”그러자 여러 장군들이 감동하여 울며
“어찌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겠습니까.”라고 했다.
유 장군이 죽은 뒤, 여러 장군들이 경주의 화원花院에 이르러,
다시 왜구와 싸움을 하던날, 여러 장군들은 유 장군이 남긴 명령을 받들어 함께
박응숭朴應嵩을 추대하여 유 장군대신 병사들을 이끌고 남은 왜구를 소탕해 마침내
유 장군의 뜻을 이뤄주었다. 이처럼 유장군의 지략은 대단히 깊었으며 귀신같이 왜구를 헤아렸다.
유 장군은 한 마리 말을 타고 적은 병사로 막강한 왜구와 싸우면서도
한 번도 근심걱정을하지 않았다.
늘 싸움할 때에는 비록 화살과 돌이 비처럼 쏟아져도 떨쳐 일어나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사졸士卒들을 위해 앞장섰다. 그래서 유 장군의 보좌관이 거듭 유 장군에게 간청하기를,
“공께서는 주장主將인데, 나라를 위해 몸을 보호하지 않고 이처럼 경솔하게 돌진하십니까?”라 하니, 유 장군은 울면서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가 왜구에게 죽었는데도 아직 원수를 갚지 못했고,
나라의 은혜가 산처럼 큰데도그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다.
그러니 마땅히 한 번 죽어 신하된 자와 자식된 자의 직분을풀고자 한 것이다.
만약 내 목숨만을 아낀다면,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독려하여 충성을 바치게 할 수 있겠는가?”
유 장군의 이 말로 인해 사람들은 모두 감탄하고 복종하면서,
한 마음으로 뭉쳐 왜구를 물리치자고 서로 독려했다.
유 장군의 부인은 함흥咸興의 집에 살고 있었는데,
홀연 하루는 붉은 피 몇 바가지가 집안대들보를 타고 흘러내렸다.
유 장군이 싸우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날이 바로 대들보에서 피가 흘러내린 날이었다.
유 장군의 부하 중에 이만석李萬碩이란 사람이 있었는데, 함흥咸興에 살고 있었다.
유장군의 제삿날이 되었는데, 새벽에 문 밖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만석은 이상하게 생각하고서는 급히 나가 보았는데,
유 장군의 부하로 있으면서 싸우다가죽은 병사였다. 그 병사가 “사또가 오십니다.”라 말하니,
이만석은 허겁지겁 그 병사를따라갔다. 새벽빛이 희미한 가운데,
큰 군대가 들판에 포진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그 모습이 유 장군이 평소에 군대를 포진하는 모습과 같았다.
이만석은 놀라 황급히 달려가 유 장군을 찾아뵙고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유 장군은 전혀 슬퍼하는 기색氣色이없고, 울음을 그치라고 하면서 잘 지내느냐고 물었다.
그러고는 “네가 내 죽은 날을 기억하고, 꿩을 보내어 제사 음식으로 쓰게 했느냐?”고
유 장군이 물었다. 이만석은 “네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유 장군은 “나는 식성이 매우 까다로운데, 제삿밥이 깨끗하지 못했다.
오늘 내가 먹지 못하고 돌아가니 기운이 하나도 없구나.
너에게 술이 있느냐?”라고 물었다. 이만석은 “빚어 놓은 한 동이 술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유 장군은“그 술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이만석이 그 술을 가지고 오니,
유 장군은 바가지로 떠서술을 마시더니 병사들에게 술을 나누어 주라고 명령했다.
이만석은 “공께서는 지금 어디로 가십니까?”라고 물으니,
유 장군은 “나는 나랏일이 있어 멀리 가야 하니, 너는 잘 지내고 있어라.”라고 했다.
유 장군이 말을 마치자, 깃발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차츰 멀어져유 장군을 볼 수 없었다.
이만석은 곧바로 유 장군의 집에 가서 제삿밥을 가져다 살펴보니,
유 장군의 말처럼 과연밥에 머리카락 한 가닥이 있었다.
그 이후로 장군의 제삿날 집안사람이나 노비들이 만약 공경스럽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곧바로 재앙이 있었다고 한다.
조정에서는 유 장군의 충절忠節을 가상히 여겨 여러 차례 벼슬을 추사追賜하여,
마침내병판兵判에까지 이르렀다. 고을 사람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자,
임금은 그 사당에창의장군彰義將軍이라는 편액을 걸라고 명령했다.
유 장군의 아버지 유방柳坊은 아들 유 장군이 원종공신原從功臣이 되었기에,
은혜를 받아 삼품三品의 직분에 추증追贈되었다.
유 장군의 작은 아버지인 유곤柳坤과 유성柳城에대한 기록들은 모두 사라져 전해지는 것이 없다.
유 장군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유계남柳繼男이고 둘재 아들은 유찬남柳贊男인데,
뒤에 이름을 호瑚로 고쳤다. 큰아들 유계남은 자신 집안의 사수死綏하는 의리를
그대로 이어받아 무예로 이름을 날렸다.
무오년戊午年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김 장군金將軍의 부하로 있으면서 몸을 떨쳐힘껏 싸우다가
주장主將과 같은 날 순절殉節했다.
둘째 아들 유호柳瑚는 무과武科에 급제했다.
갑자년甲子年의 난리에 부원수副元帥의 막하에 있으면서 안현鞍峴에서 공을 세웠고,
그 공으로 인해 품계가 올라갔다. 여러 차례 지방 고을을 다스렸다.
그 이후의 자손중에는 크게 이름난 이들이 없다.
유 장군은 북쪽 지방 사람이다. 북쪽 지방은 궁벽한 곳으로 자손들도 출세할 만한 형세가없다.
그 당시의 사적事蹟이 당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으니, 군자들의 붓이라는 것 또한슬퍼할 만하구나.
예전 태사공太史公은 이렇게 말했다.
“여항閭巷의 사람으로 노력하여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높은 벼슬에 있는 사람에
게 달라붙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세에 자신의 이름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지금 유 장군의 일을 통해 살펴보면, 그 말이 더욱 맞구나.
유 장군의 정충精忠과 대절大節은 천지天地 간에 환하게 빛났는데,
다행히 어진 재상의 기림을 받아서 더 높은 벼슬자리에 올랐고, 제사를 받들 수 있게 되어,
유 장군의 이름이 세상에 빛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유 장군의 충절忠節은 진실로 유 장군이 타고난 것인데,
모두 사라져서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니,
어찌 그 사람이 드러나고 인멸되는 것이 사람들 때문이겠는가.
유 장군은 광릉참봉光陵參奉 유방柳坊의 아들이다.
유곤柳坤과 유성柳城은 유 장군의 작은 아버지이다.
아버지 유방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게 지내는 것으로
조정에까지 알려지게 되어 벼슬을 제수 받았다.
나라의 큰 난리를 당하여 크게 의병義兵을일으켰으니,
이것은 자신의 한 몸에 충과 효를 모두 온전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 유방이왜구에게 붙잡히게 되었는데,
두 동생과 함께 왜구에게 굴복하지 않다가 죽임을 당하였다.
그러니 또한 그 형제들의 절의節義도 모두 빛난다.
유 장군은 충효의 가문에서 나고 자라, 선조들의 절의節義의 행실을 그대로 이어받았다.
또한 이것이 그대로 유 장군의 아들에게도 전해졌다.
큰아들인 유계남은 심하深河의 싸움에서 순절殉節했고,
둘째 아들 유호는 안현鞍峴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으니, 이것이 바로 가학家學이다.
만일 한 집안의 다섯 사람의 절개와 삼대에 걸쳐 여섯 사람이 세운
충의忠義로 공을 세운것에 대해 말하자면,
각기 그 시대 상황에 맞게 행동한 그 행적은 비록 같지 않지만,
모두충절忠節을 행한 것은 선조나 후대나 차이가 없다.
그러나 그들의 행적이 모두 사라져서칭송받지 못했다.
만약 유 장군의 집안이 철령鐵嶺 북쪽의 멀고 먼 후미진 곳에 있지 않고,
이후의 자손들에게 높은 벼슬아치의 도움이 있었다면 그들의 뛰어나고 훌륭한 행적
이 어찌 이처럼 적막하게 되었겠는가.
이것이 바로 유 씨 집안의 적막함을 슬퍼하지 않고,
당대 여러 군자들에게 아쉬움을 표현하는 이유이다.
.... 우하영의 천일록 - 잡록 하 중에서 ...
별 (星)
첫댓글 천일록 잡록 하,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