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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13일 서울 한복판을 발로 밟다.
<서울의 시간을 그리다-이장희님, 서울, 문학의 도시를 걷다-허병식, 김성연님 참고>
11월 12일 답사기록...
새벽 3시 넘어 숙소인 동서울터미널 근처 구의동 현대아파트 213동 904호에 도착했다. 우여곡절 끝에 안전하게 도착한 것은 베스트 드라이버 효성샘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고 잠을 잤다. 아침 8시 30분 정도부터 답사를 시작했다.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출발출했다(태동, 효성샘과 나의 은어로 출발하자를 경쾌하게 일컫는 단어ㅋ). 동대문역사문화공원 역에서 내려서 도보 답사를 시작했다.
처음 답사 코스는 청계천이었다. 청계천은 이명박 서울시장이 자신의 대표공약으로 삼아 2년도 채 걸리지 않아 복원한 곳이다. 청계천의 원래 이름은 ‘개천’으로 하천의 범람이 걱정되는 곳이었다. 그래서인지 1760년 영조는 청계천 준설을 위한 공사를 악천후에도 지켜봤다고 한다. 지금의 이름은 북악산 계곡이름인 ‘청풍계’에서 따다 쓴 것이다. 현재 청풍계곡은 사라지고 청계천만 남아 있다.-.-;;ㅋ 일제강점기에 청계천은 군수 물자 수송을 위한 교통로라는 이름하에 복개하기로 결정됐다. 광복을 맞이하고도 일제의 복개정신(?)을 이어받아 계속 복개를 한다. 복개를 한 이유는 악취와 슬럼가가 사라지고 길까지 생긴다는 일석 삼조의 효과(?);; 대단하다-.-;; 현재의 청계천 바닥은 시멘트로 만들어져 있는 인공수로이다. 청계천 옆 도로와 바닥 밑으로는 하수관들이 있는데, 비가 와서 그 관들이 용량을 넘어서면 이 수문들이 열려 물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 수문이 열리면 오염 물질까지 함께 유입되어 때로 청계천의 생명체들이 집단 폐사하기도 한다고... 효성샘이 물에다 소금을 탔다는 이야기도 했다.ㅋㅋ
청계천에서 처음 찾아간 곳은‘평화시장’이었다. 청계천 평화시장...전태일 열사가 생각나는 곳이다. 그 역사의 장소에 도착했다. 허름한 평화시장 근처에 ‘두타’, ‘두산 건물’이 있었다. 평화시장은 옷감들이 많았다. 먼저 봤던 것보다 돌아다니면서 그 양을 더 느낄 수 있었다. 정말 많은 ㅋㅋ
우리 이것만은 지켜요!라는 해치의 모습은 이곳이 서울임을 알려준다. 평화시장 한 쪽을 넘어 걸어 가다보니 흥인지문이 보였다. 4대문 가운데 ‘지’를 붙인 것은 풍수지리의 영향임을 작년 수업 때 다뤘던 것 같다. 이 의문의 끝은 박경환 교수님께서 해결해주셨다.ㅎ
오간수교에서 청계천 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청계천에서 평화시장으로 돌아다니다 보니 이륜차가 정말 많았다. 좁은 도로는 오토바이가 적합했다. 평화시장을 돌아보다 청계천 쪽으로 갔다. 전태일 다리가 보이고 전태일 동상이 보인다. 그리고 도로에는 전태일의 마음을 그리워하는 이들의 문구가 적어져 있었다. 대학 1학년 때 읽었던 조정래의 전태일 평전...가난한 재단사,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자의 기본적인 인권을 주장했던...말이 아닌 몸으로 보여준 실천가...1970년 11월 13일 22세의 나이에 분신자살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아~ 이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현실은 오토바이 주차장이 되어버린 전태일 다리ㅠㅠ
을지로 3가를 돌아다니면서 인쇄, 출판업에 관련된 건물을 찾으려고 돌아다녔다. 가다가 복원된 수표교도 봤는데 허접(?)하다.ㅋㅋ 수표교는 1420년에 놓여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하기 위한 수표가 있었던 곳이다. 청계천 복개 공사로 철거하여 신영동으로 옮겼다가 지금 위치하고 있는 장충단 공원에 1965년 옮겨 겨우 자리를 잡았다. 새로 놓은 수표교는 나무가 잘 맞물려 있지도 않고, 교각도 안쓰럽고...결론은 아까도 말했지만 허접하다.ㅎㅎ
을지로에서는 안타깝게 인쇄, 출판업과 관련된 건물은 거의 보이지 않고, 조명 가게, 철물점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었다. 드는 생각은 이 많은 조명 가게가 장사가 될까? 였는데 밤에 청계천에서 열린 서울 등 축제를 보고...아~~~했다.ㅋㅋ 낮에는 조잡해보였다.-.-;;ㅋㅋ
종로 1, 2, 3, 4가 동주민센터를 향해 가다가 급보를 들었다. 효성샘 가문의 안타까운 비보...답사가 흔들렸다. 마음을 다 잡고 답사를 진행했다. 종로 1, 2, 3, 4 동주민센터는 그 공간규모가 전국의 어떤 곳보다 작은 곳인 것 같다.
동주민센터 옆 담장을 지나서 탑골 공원의 삼일문으로 들어갔다. 탑골공원 이름은 한 때 석탑의 영어 표현인 파고다를 사용해 ‘파고다 공원’으로 불리기도 했으나 지금은 다시 우리말로 쓴다. 북적거리는 과다 인구 밀집지 서울 한복판에 최초의 공원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일까? 배불정책을 폈던 조선시대에도 사대문 안에서 유일하게 버티어 오던 절, 원각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원각사는 세조가 서울 한복판 흥복사 터에 절을 지으며 생겨났다. 원각사라는 이름은 태종의 아들 효령대군이 외고 있던 원각경에 근거한다. 이 절은 조선시대 수난의 연속이었다. 연산군 때 기녀의 숙소로 쓰였다. 그 다음 왕인 중종이 즉위하자 관청 건물로 사용했는데 관청 책임자가 이유 없이 죽자 불교를 금한데 대한 벌이라 여겨 누구도 이 터에서 살기를 꺼려했다. 후에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민가가 들어섰는데 이내 큰불로 절터에 있던 민가 200 여 호가 모두 불타 돌로 만든 석탑과 사적비만 남은 빈터가 되어 버렸다. 이후 불법 가옥만 있던 곳을 고종 때 영국인 고문 브라운의 건의로 공원으로 꾸민다. 최초의 시민공원 탄생이다.(조선시대 서울의 땅은 원칙적으로 모두 국유지였는지라 당시 국가관을 비추어 보면, 시민 공원은 공공의 이익을 위한다는 의미로 큰 선전 효과가 있다.)
탑골공원은 시민공원, 원각사의 의미보다 독립의 함성이 들리는 곳으로 더 크게 느껴진다. 독립선언문이 적어져 있는 곳에서 한 컷, 보물 3호인 원각사비에서 한 컷, 실제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던 팔각정(황제가 민권을 인정한다는 상징)에서 한 컷, 국보 2호인 원각사지 10층 석탑 앞에서 한 컷을 찍었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은 고려시대 양식을 띈 조선 세조 때 작품이다. 원각사지 10층 석탑이 유리 보호각 안에 있어서 아쉬웠다. 문화재를 자연 채광으로 느낄 수 없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다양한 문양들은 인상 깊었다. <3․1 독립운동 기념터 종로 YMCA> 표지석을 찍었다. 표지석을 찍고 종각으로 이동했다.
점심을 먹어야했다. 배고픈 상태였다. 피마길에 있는 청진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피마길은 종로를 따라 남북 이면으로 난 작은 골목이다. ‘피마’는 ‘말을 피해가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말은 이동의 수단이지만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두려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물론 고관대작이 지나갈 때 인사 시간이 길어진다는 점도 피마길이 만들어진 이유 가운데 하나이다. 청진식당에서 먹은 오징어...양파가 거의 다 였다-.-;; 쓰린 속을 달래며 다시 출발출했다.ㅋ
보신각(=종각)은 타종의식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답사를 온 사람들이 싹 빠져 나가고 사진 찍기에 좋은 환경이 조성됐다. 보신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는데, 보신각 앞마당에 척화비를 세운 곳이 있었다. 보신각에서 청계천 출발 지점으로 이동했다. 청계광장 분수가 우리를 반겨줬다. 서울 등 축제가 보였다. 밤에 사람들이 바글바글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청계광장 분수 맞은편으로 뜬금없는 나선형 작품이 있었다. 왜 만들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뭔가 있겠지? 라고 자답했다.ㅋ 책을 보니 이 조형물은 KT에서 30억이 넘는 거액을 들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부부 조각가 올덴버그와 부르겐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이라고 한다. 안타까운 것은 청계광장의 작품은 올덴버그의 부인인 부르겐에 의해 대부분 디자인됐는데...그녀가 청계천을 와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헐~~~, 청계천에 풍수지리상으로 불의 형상을 한 조형물을 만든 것 자체도 놀랍다.-.-;;
좋은 의미로 이야기 해보자...ㅋ DNA의 이중나선 구조를 상징하는 붉은 색과 푸른 색 리본은 한국의 옷고름을 보고 힌트를 얻었고, 이 나선은 생명의 복원을 상징하며, 그 끝에서 샘물이 흘러나와 발원지를 이룬다는 의미...포스트모더니즘 작품을 어느 정도까지 인정해야 하는지 의문이 생긴다.ㅋㅋ
청계천의 자갈길에 대한 효성샘의 이야기도 있었다. 자갈길을 만들면서 자동차의 하중이 불균형하게 작용해서 도로가 울퉁불퉁하고 안 좋다고...유럽문화인 자갈길은 사실 자동차와 잘 맞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굳이 장점을 찾아낸다면 차량 감속의 효과, 빗물 투과율이 좋고, 열섬 방지 효과까지...모든 현상은 생각하기 나름이다.ㅋㅋ
광화문 거리를 향해서 출발출이다. 공식 명칭인‘세종로’는 광복 후에 나왔다.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육조가 있다고 하여 육조거리라고 했다. 육조는 이, 호, 예, 병, 형, 공조를 가리킨다. 이 대답은 효성샘이 해서 태동샘이 깜짝 놀랐다.ㅋㅋ
가다보니 기념비전이 보였다. ‘전(殿)’이라는 명칭으로 보아 중요한 건물임은 확실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냥 지나쳤다. 기념비전은 고종즉위 40년 칭경기념비를 모신 곳이었다. 우리 일행은 나 때문에 사진을 찍었다.ㅋㅋ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이순신 동상이었다.
경복궁을 등지고 있는 칼 든 장군 ㅋ 명백한 반역이다.ㅋ 거기에다 인상까지 쓰고 있다.ㅋ 더 명백한 반역이다.ㅋ 위압적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는 이순신의 눈빛이 짜증난다.ㅋ 동상 아래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거북선은 미니미로 만들어져 있다.ㅋ 이순신 동상의 크기는 6.5m로 원래 계획인 5m보다 커졌다. 유성룡의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에 대해 적기를, 말과 웃음이 적고 얼굴이 단아하여 근신하는 선비와 같다고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보고 있는 이순신 장군의 얼굴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만든 창작물이다.;; 이순신 장군 동상 주변의 ‘분수 12․23’은, 이순신 장군이 12척의 배를 가지고 23전 23승을 이끌어냈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명량해전임.ㅋ 해남과 진도 사이의 울돌목ㅋ 태동샘, 효성샘과 답사했던 곳이다. 물이 아주 빨라서 울리는 소리가 난다고 그 지역 사람들이 울돌목이라고 불렀다. 녹진 전망대에서 봤던 날이 기억난다. 이 때 나는 녹진이 신라말 6두품이었다고 뻥을 치고ㅋㅋ, 세종대왕 체험 현장을 지나서 세종대왕 동상을 바라봤다. 훈민정음 해례본을 들고 있는 세종대왕...혼천의, 앙부일구 등 세종 시절 문화재...오세훈님(?)의 이름도 보이고 ㅋ 앙부일구를 보고 시간을 알려주라는 효성샘의 질문에 역사전공자인 나는 손목시계를 보고;;ㅋㅋ 실제로 작동되는 해시계란다. 시계를 보면 현 시각과 30분가량 차이가 나는데 이는 현재 우리나라 표준시가 동경 135도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동경 135도로 경도가 정해진 것은 지리전공자들의 대답이 필요한 부분이다. 핵심만 말한다면 ‘편의’를 위해 이렇게 정했다. 이런 이유로 일본과 시차가 사라진 것이고...
광화문을 향해 가고 있는데 오른 쪽이 미국 대사관, 왼 쪽은 세종문화회관이었다. 미국대사관은 1961년 만들어졌다. 층고를 최소화하여 8층 건물이지만 높아 보이지 않는다. 건물 주변으로 2미터 간격으로 예쁜 가로등 모양을 한 고성능 카메라가 심어져 있다고 한다. 미국이 한국인을 생각하는 방식을 읽을 수 있다. 세종문화회관의 비천상이 내 눈에 들어왔다. 조각가 김영중이 1년 3개월에 걸쳐 만든 화강석 324조각의 부조작품이라고 한다. 세종문화회관의 벤치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정신없었다. 우리는 이곳에서 커피, 블루베리 스무디, 요거트(?) 등을 마시면서 광화문으로 걸어갔다. 가다보니 해치상이 있던 곳이 도로에 새겨져 있었다. 해치상과 관련하여 역사이야기를 진행했다. 해치는 정의를 상징하는 상상의 동물로 사헌부 관리들이 관복의 가슴에 새겼다고...
광화문에 도착하니 관광객들로 북적거렸다. 광화문을 지나가 경복궁으로 들어갔다. 잠시 조선총독부의 위치를 생각하고 말해줬다.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던 과거의 광화문도...효성샘은 국립고궁박물관 지하철역에서 우리와 이별했다. 태동샘과 나는 도로원표를 찾기 위해 다시 세종로를 걸었다. 가다보니 은행나무가 붕대에 감겨져 있었다. 은행나무들은 일제강점기 세종로를 한 중간에서 가르려는 의미로 심었다고 한다. 그것도 생명이 긴 은행나무로...왕조의 중심축선을 영원히 훼손하고 싶어서... 은행나무는 강제 이주됐다. 인간들의 헛된 상상과 욕심으로 애꿎은 나무만 고생하고 있다. 기념비전에 옛 도로원표가 있었지만 새 도로원표를 찾으러 갔다. 도로원표를 급 발견했다. 신한은행 소속의 한국금융사 박물관 앞에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열릴 때만 해도 거대한 축구공이 있었던 곳인데 축구공은 사라지고, 커다란 도로원표가 만들어졌다. 모습은 축구공의 기하학적 특성을 살려 20면체로 편 의미의 조형물이라 한다. 세계 여러 도시의 도달 거리가 적혀 있다.
걷다보니 덕수궁, 시청이 보였다. 프라자 호텔도 찍고... 종각역 가는 길에 청계천 마차를 봤다. 웃겼다.ㅋ
오후 세시에 소개팅이 잡혀 있어서 종각역에서 태동샘과 이별했다.ㅋ
소개팅녀와 함께 인사동과 삼청동 답사(?)를 진행했다.
토요일의 인사동은 사람들로 넘쳐났다. 지난 번 궁궐 답사 때 인사동 표지만 보고 지나쳤는데 그 중심에 서 있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인사동은 조선 초부터 그림을 관리하던 ‘도화서’가 있던 곳이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이 동네가 형성된 것은 아니다. 이 동네가 만들어진 것은 일제강점기 북촌의 양반들이 돈벌이가 없어지자 집안의 가보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래서 가까운 동네에 골동품 가게가 늘어났고, 그게 바로 북촌 아래 인사동이 된 것이다.
쌈지길을 그렇게 공부하고 갔건만 소개팅녀가 말해주기 전에는 이 곳이 어딘가 했다.ㅋ 건물 안에 도로를 놓은 느낌. 인사동은 문화지구 특별법으로 건축물을 18미터 이상 올릴 수 없다. 건물이 길이 되었다. 오르락 내리락...어느 새 4층 옥상...쌈지길의 천호선 대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관을 지냈던 사람이다. 이 건물은 파주에 있는‘딸기가 좋아’를 만든 건축가인 최문규님(연세대)이 설계한 것이다. 72개의 상점이 있다는데 순식간에 지나쳐서...결국 기억나지 않는 찾집들...가게들...들어가고 싶지만...낯설음을 극복 못한 소심한 1人, 오설록에서 따뜻한 차 한잔과 여유로운 대화...내가 꿈꾼 답사였다.ㅋ 차를 마시고 삼청동으로 이동했다.
‘길치’였던 두 사람... 헤매다보니 어느 순간 삼청동 길이었다. 예쁘고 낭만적인 거리들...소개팅녀는 말이 없어지고...알고 보니 배가 고프셨다는;;ㅋㅋ 삼청동 수제비집에서 약간 기다리고 난 후 감자전과 수제비를 먹었다. 맛은 전라도 어느 음식점에 들어가도 느낄 수 있는 수준...그렇지만 서울 사람들에게는 맛집ㅋ 식사를 하고 다시 삼청동 길을 걸었다. 걷는 도중 카페 앞에서 공연하는 사람 2명의 하모니를 느끼는...화려한 야경과 사람들, 그리고 음악...낭만이 물씬 풍겨나는 즐거운 길이었다. 헤어지기 전 핸드메이드 상품을 좋아하는 소개팅녀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지만 우리 인연은 여기서 일단 끝이었다. 약속(?)이 있었다는 ‘소개팅 만남의 식상한 문구’로 이별을 했다. 나 또한 붙잡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좋은 사람이었지만 나와는 맞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에... 소개팅녀를 바래다주고 홀로 길을 걸었다. 다시 태동샘에게 연락했다. 현주샘과 태동샘은 서울 등 축제를 전망 좋은 할리스 커피숍에서 보고 있었다. 등축제의 환한 빛과 우리의 즐거운 수다...살이 쏙 빠진 현주샘의 모습, 웃음 또한 더 많아진..ㅋㅋ 낯선 서울 땅에서 답사의 활력소가 된 시간이었다.^^ 우린 시간이 흘러 아쉽게 이별을 하고 각자의 집으로 떠났다. 현주샘은 멀리 수원까지..-.-;;
숙소로 돌아오는 길... 태동샘이 귤 한 망을 1000원에 샀다. 우리 둘은 야식이 급 땡겼다.ㅋ 태동샘과 나는 포장마차에 들어가서 떡볶이 한 접시, 튀김 한 접시, 오뎅 한 개, 꼬치구이 한 개를 급 흡입했다.ㅋㅋ 이렇게 먹고도 나는 gs편의점에서 ‘우유 속에 모카치노’와 과자를 사갔다는-.-;;ㅋㅋ 물론 먹지 못하고 잠에 들었지만...ㅋ
피곤한 하루여서 금방 잠에 들었다.ㅎㅎㅎ
11월 13일 답사기록...
어제 야식을 먹어서 얼굴이 팅팅 부은 모습이었다.ㅋ 어제 폭풍 도보답사로 인해 태동샘의 발에 물집이 3개, 나는 1개가 생겼다. 이런 상황 때문에 계획상 짐을 챙기려고 했지만, 오늘도 짐을 놔두고 출발출했다.
첫 코스인 명동일대 답사...명동은 조선시대의 ‘명례방’, 즉 ‘예가 밝은 동네’라는 이름에서 온 말이다. 명동대성당, 계성여자고등학교 표지판을 보고 명동에 왔음을 알게 됐다. 외국어로 써져 있는 음식점의 간판을 보고 이국적인 느낌을 받았다. 이국적인 간판에 빠져 있는 상황이어서 정작 목적지 중 하나인 NATURE REPUBLIC을 놓치고 말았다. 덤앤 더머 형제였던 나와 태동샘!
어제 야식을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침이 먹고 싶었던 우리는 ‘명동 돈가스’를 향해 무작정 명동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하동관’이라는 전통 한우 곰탕 집이 눈에 들어왔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아꼈다는 글을 보고 바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ㅋ NATURE REPUBLIC과 ‘명동 돈가스’를 향하다가 신한은행의 표지판을 보고 사진을 찍었다. ‘환전’이라는 글씨가 눈에 띄었다.
명동 3길에 있다던 ‘명동 돈가스’를 찾아내서 가게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영업 준비중이었다. 11시에 오픈이었다. 아직 1시간 정도 남아 있어서 명동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명동에 돈가스가 왜 잘 나가? 라는 나의 질문에 태동샘은 지리교사지만 역사로 그 이유를 설명했다. 명동에 일본인 상권이 들어와 있었으니까 일본 음식인 돈가스가 명물이 된 것이 아닐까? 라는 대답...
길을 헤매다가 명동예술극장을 보았다. 이 자리에는 1936년부터‘명치좌’라는 문화 예술 상영관이 있었다. 해방 후에는‘시공관’으로 불리기도 했다. 1957년 이래로 명동국립극장으로 이용되었고 국립극장이 1973년 장충동으로 이전하기까지 명동을 문화의 거리로 지켰다. 장충동의 새 부지로 이전하면서 정부는 이 건물을 대한투자금융에 매각했다. 이후 이 장소는 명동의 상업적 중심지로 거듭나서 전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자리로 이름을 남기기도 하였다. 물론 지금은 NATURE REPUBLIC이 최고로 비싼 자리이다. 평당 2억원이 넘고 실제 시세는 3억이 넘는다는-.-;; 문화광광부에서 인수해 2009년 리노베이션(기존 건축물을 헐지 않고 개보수해 사용하는 것)을 마치고 다시 명동예술극장이 문을 열게 됐다.
외국인들이 카메라에 담는 단골 피사체 중 하나인 ‘예수천국, 불신지옥’의 노방 전도의 모습도 보였다. 초~중딩 때 나도 이런 운동을 따라 해본 적이 있었다.
45년 만에 리모델링한 명동 파출소는 근처 명동성당을 고려한 붉은 벽돌과 삼각형 지붕 디자인을 한 건물이었다. 외국인이 가장 많이 찾는 파출소라고 한다. 이어서 NATURE REPUBLIC을 발견하게 되고 사진을 찍었다. 규모가 작았지만 위에 써져있는 이비인후과, 피부과 간판을 보고 이곳이 최고로 비싼 자리구나라고 생각했다. 비싼 자리의 도로를 보니 명동길 명예도로 유네스코 길 지정이라는 표지석이 있었다. 유네스코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고민을 하고 사진을 찍어댔다.
찾으려고 했던 NATURE REPUBLIC을 막상 찾아서 일종의 해방감을 느꼈는데 태동샘이 의문을 가졌다. 이 장소가 NATURE REPUBLIC은 맞는데 제일 비싼 자리일까? 규모나 위치를 보고 ‘지리 전문가’로서 탐구를 시작했다. 다시 검색을 해보고 위치를 찾기 시작했다. 명동을 쥐 잡듯이 찾다가 나에게도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아까 찍었던 NATURE REPUBLIC 위 간판에 산부인과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 이윤이 남지 않을 것 같은데? 이 정도의 생각...명동을 돌아보니 NATURE REPUBLIC 가게는 몇 개가 더 있었다. 돌아다니다가 우연하게 내가 NATURE REPUBLIC의 본점(?)을 발견하게 됐다. 보자마자 아 이 건물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규모와 위치...그리고 명동 밀리오레를 등에 업고 있는 것 같은 모습...창문이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의인 ‘이근석’(소매치기단이 뒤쫓던 경찰을 회칼로 찌르자, 이를 도와주기 위해 나섰다가 소매치기가 휘두른 칼에 복부를 맞고 24세에 죽은 의인)추모비를 공부하고 갔지만 기억은 한계가 있다.;;
NATURE REPUBLIC의 본점(?)을 찍고 시간의 여유가 있어서 명동대성당(서울대교구 주교좌)으로 발길을 옮겼다. 강점기에 ‘종현 천주교당’으로 불렸던 이 유서 깊은 건축물은 한국 천주교의 역사이자 민주화와 저항의 상징적 공간이다. ‘종현마루’라는 명칭은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 장수 양호가 보신각종을 현재의 명동성당 쪽의 진고개에 옮겨 단 후 북달재라는 이름을 바꾼 것이다. 조선 초 조정에 하소연하기 위한 창구 역할로 마치 신문고 같은 북이 있었다고 진고개를‘북고개’ 혹은 ‘북달재’라고 불렀다. 보신각종은 광해군 때 종각으로 옮겨졌다.
명동대성당은 1784년 명례방 종교집회에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된 것으로 시작됐다. 이후 1894년 코스트 신부가 성당 설계에 착수하였으며, 1898년 5월 29일, 한국 교회의 주보인 무염시태(원죄 없이 잉태하심)의 마리아를 주보로 하여 대성당을 축성, 봉헌하였다. 1900년부터는 기해․병인박해 때 순교한 분들의 일부 유해를 받아 현재까지 지하성당에 모시고 있다. 1942년에는 최초의 한국인 주임신부가 부임하였으며, 최초의 한국인 주교 노기남 주교의 수품식이 거행되었다. 1945년 현재의 이름인 명동대성당으로 바뀌었다. 최초의 순례 성당인 전주 전동 성당과의 비교도 좋을 듯하다. 명동대성당은 현재 사적 제 25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곳은 1880년대 이래 ‘성서활판소’가 설치되어 『경향잡지』, 『경향신문』등을 간행하기도 했다.
명동성당으로 가는 길에 가톨릭 회관이 보였다. 과거 성모병원으로 종로 YMCA 건물을 만든 김정수 교수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재명 의사(매국노 이완용을 암살하려고 했으나 실패하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 의거터 표지석을 그렇게 공부하고 갔지만 기억을 못했다.;; 드는 생각이라고는 회관에서 명동대성당을 찍으면 멋지게 나올 것 같다는 ‘겉만 보는 관점’... 안타깝게 공사중이었다.-.-;; 명동대성당에 오르면서 학생운동에 얼쩡거리던 학부시절이 떠올랐다.ㅋ 명동대성당에 올랐다. 중세 유럽에서 유행했던 고딕양식의 건축물이었다. 국내에 유일한 고딕 구조이다. 높이는 46.7m이다. 만들어질 당시에 경복궁을 정면으로 향하고 있어서 말이 많았다고 한다. 맨 위쪽의 십자가...시계의 모습...나를 돌아보게 했다. ‘탕자’의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모습을... 예수성심상이 두 팔을 벌려 ‘못된’나를 반겼다. 전주 전동 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어서 건축물 옆을 찍었다. 그런데 명동대성당은 카메라 렌즈에 건축물이 다 잡히지 않았다. 아쉬웠다...명동대성당에 즐비한 빌딩들도...그렇지만 우연히 보게 된 수녀님의 호탕한 웃음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미사를 드리기 위해 온 여러 신자들의 모습에서도 ‘신’을 발견했다. 결국 ‘신’은 사람의 마음들이 모인 것이니까!
명동대성당을 나와서 다시 명동을 걸었다. 처음 찍은 NATURE REPUBLIC 옆에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있었다. ‘명동 돈가스’에 도착했지만 NATURE REPUBLIC을 찾으면서 발견하게 된 근대 건축물의 모습을 담기 위해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근대 건축물뿐만 아니라 현대해상 명동사옥, 화교 소학교도 눈에 띄었다. 그러나 가장 관심을 가졌던 그 건축물은 바로 (구)조선은행이었다. 1912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유럽의 성을 떠올리게 하는 좌우대칭형의 위엄 있는 석조 건물로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에 대한 문화적, 경제적 지배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지금은 국가 중요문화재인 사적 제 280호로 지정됐고, 화폐금융박물관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덤앤 더머인 우리는 (구)조선은행 건물을 보고 현재는 이 건물에서 은행 업무를 보나? 라는 의문을 가졌다. 한국은행은 (구)조선은행 바로 뒤에 있었는데-.-;;ㅋㅋ 눈을 돌려 신세계백화점 본관을 찍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미쓰코시 백화점이 있었다. 1930년 10월 경성 최고 번화가인 혼마치 1정목(오늘날 충무로 1가)에 새롭게 개장한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점은 일본인 상권이던 진고개(명동성당이 있는 작은 고개의 옛 이름, 앞에서 다룸, ‘북달재’, ‘종현마루’라고도 했음)의 핵심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청계천을 경계로 하여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북촌과 일본인들이 활동하는 남촌으로 나뉘어 있던 당시 경성의 도시 구획에서 그 중심이 되는 곳이다. 길을 가다 아무 느낌 없이 찍었던 신세계백화점 앞의 건물...알고 보니 일제 강점기에 조선식산은행으로 쓰인 근대 건축물이었다. 눈 뜬 장님이 따로 없다.ㅋ 조선식산은행은 농촌 및 산업기관을 상대로 경제침략 구실을 담당하던 일제 강점기의 대표적 어용 금융 기구였다. 광복 후에는 한국산업은행이 되었는데, 은행이 본점을 여의도로 옮기면서 이 자리에 롯데 백화점이 들어서게 된다. 이곳은 나석주 열사가 폭탄을 투척한 장소이기도 하다.
‘명동 돈가스’를 가기 전 포스트 타워를 봤다. 사진으로 담을 수 없어서 태동샘의 사진을 참고한다. 2007년 11월에 완공된 포스트 타워(서울중앙우체국)는 보는 이를 압도할 만큼 웅장한 외양을 자랑한다. 이 자리에는 일제강점기 시절 ‘경성우편국’이 있었다.
포스트 타워를 끝으로 우린 ‘명동 돈가스’로 갔다. 2종류의 돈가스를 시켜서 먹었다. 가격은 25000원이었는데 치즈가 들어간 돈가스가 나의 미감을 자극했다. 숟가락이 왜 없냐는 나의 질문에 태동샘은 국은 그냥 마시는 거라고 알려줬다.ㅋㅋ
폭풍 흡입을 마치고 환구단(원구단)이 있는 웨스틴 조선호텔 쪽으로 갔다. 환구단은 사적 157호로 1897년 고종의 황제 즉위식과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옛 남별궁 터에 만들어졌다. 남별궁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 공주의 궁으로 작은 공주가 거처하는 마을이라 하여 일대가 소공동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그 남별궁 터에 환구단만 남아 화강암으로 된 기단 위에 3층 8각 지붕의 황궁우를 1899년에 축조했으며, 1902년 고종 즉위 40주년을 기념하는 석고단(돌북)을 황궁우 옆에 세웠다. 지금은 황궁우와 석고, 3개의 아치가 있는 석조 대문만이 보존되어 있다. 호텔 유리창 전면에 일부 남은 환구단과 정원이 있어 마치 호텔 정원처럼 보이지만 환구단이 호텔보다 먼저 있었다.
웨스틴 조선호텔에서 환구단을 지나면 길 건너에 시청 앞 광장이 보인다. 지금 서울특별시 신청사 건설이 한창이었다. 박원순님이 일찍 서울시장이 됐다면 이뤄지지 않았을 사업인데...아쉬움이 남는다.
이태원을 향해갔다. 왜 그곳에 가냐는 나의 질문에 태동샘은 여러 외국어 간판들, 이슬람 성원(서울 중앙 성원)이 있으니까...라고 답했다. 외국어로 된 간판들이 나의 눈길을 끌었다. 태동샘의 질문...이태원은 여관의 기능을 했나? ‘원’이 들어가니까...나는 대답을 못했다. 찾아보니 이태원은 조선시대까지 서울을 오가는 공무원들의 숙소가 자리 잡았던 조그만 마을이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을 겪으면서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각종 점포들이 모여들었고, 차츰 외국인들을 위한 쇼핑과 관광타운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매년 9월과 10월 사이에 이태원 지구촌 축제가 열린다고 한다.
스마트폰 위치 추적을 통해 이슬람 성원에 도착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함마드는 그 분의 사도입니다.”라는 문구가 이슬람 성원임을 알게 했다.
이슬람 패션(?)을 한 외국인들의 모습에서 이곳이 새로운 세상임을 느꼈다. 2012년 겨울방학에 갈 스페인에서는 내가 이방인이 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출입 시 반바지나 짧은 치마를 입은 여성분들을 위해 긴치마를 준비했다는 문구를 통해 이슬람식 배려를 느꼈다. 터키 음식점에서 주차금지 팻말을 협조해준 것도 눈에 띄었다. 본당(?)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그 곳은 남자 예배실이었다. 남자 예배실과 여자 예배실이 따로 있는 것을 통해 이곳을 차별적인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예배 도중 모르는 사이의 남자와 여자가 부딪칠 수 있음을 사전에 예방하는 일종의 ‘배려’였음을 알게 됐다.
프린스 술탄 이슬람 학교는 북적거렸다. 들어가지는 못했다. 타문화에 대한 ‘외부인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슬람 성원을 벗어나서 이태원 시장을 갈까? 고민하다가 결국 태동샘의 아지트(?)였던 노량진 수산시장으로 가게 됐다. 길을 가면서 봄에 가면 임용에 떨어진다는 사육신 묘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사육신이 일종의 역사바로세우기라는 나의 깊이 없는 설명도 곁들어지면서...ㅋ
노량진에 도착했다. 수산시장보다 태동샘이 노량진에서 시험 공부를 하면서 느꼈던 감정들을 공유하는 시간에 더 마음이 끌렸다. 마침 태동샘과 같이 스터디를 했던 구진수형님과 약속이 됐다. 노량진 고시촌을 걷는데 멀리 강남교회가 태동샘을 반기고 있었다. 오늘은 주일인데 태동샘은 답사를 하고 있었기에 마음이 더 끌렸다고 한다. 가는 도중 태동샘이 즐겨 찾은 주먹밥 집인 목단 분식으로 들어갔다. 주먹밥은 1500원으로 나는 햄야채, 태동샘은 김치참치를 선택해서 맛있게 먹었다. 얼큰한 국물도 태동샘이 뽑아서 건네줬다. 주먹밥을 거의 먹은 타이밍에 약속했던 형님이 오셔서 대화를 가볍게 나누고 차를 마시기 위해 자리를 옮겼다. 찻집에 들어갈 것이라는 나의 생각과 달리 ‘토스트 굽는 사람들’로 들어갔다. 토스트 향이 나의 폭풍 식탐을 자극했지만 자제하고 대추․생강차를 마셨다. 태동샘은 생레몬차로... 임고생 시절 레몬을 터트리면서 먹었다는...ㅋㅋ
대화를 마치고 나와 태동샘은 짐을 챙기기 위해 지하철 1호선을 타고...2호선으로 갈아타고...동서울터미널 근처에 위치한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나의 친동생 종익이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게 하고 우리는 짐을 챙겨서 동서울터미널로 갔다. 경험 많은 태동샘이 차표를 미리 예매하자고 했지만, 경험 적은 나는 나중에 예매하자고 했다. 결국 4시 30분에 갔지만 6시 30분 차량밖에 없었다는-.-;; 아~~2시간... 잠시 쉬고 저녁 식사로 우렁 된장국을 먹고 차에 탑승...광주로 왔다. 광주가는 길에 구운 오징어를 폭풍 흡입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광주...답사의 끝이었다.^^;
첫댓글 오호.. 한글 파일에는 사진을 넣으면 좋겠네^^;; 어마어마하군.ㅋㅋ
한글 파일에 사진을 넣겠음...수정 작업 후 다시 올리겠음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