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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발지론 제20권
8.5. 견(見)납식
≺시여도, 그 과보도 없다고 하는≻ 사≺견≻(邪見)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죽으면 단멸한다고 하는≻ 단≺견≻(斷見)과
≺무인무연(無因無緣) 등의≻ 사≺견≻과
≺칠사신(七士身) 등의≻ 상견(常見)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8만4천 대겁을 거쳐 괴로움을 다하게 된다는≻ 계≺금취견≻과
≺모든 이가 향수하는 것은 모두 무인무연이라는≻ 사≺견≻과
≺모든 고락 등은 자신이나 다른 이가 지었다는≻ 계≺금취견≻과
≺아(我)와 세간은 항상한다는≻ 상≺견≻과
≺유아ㆍ무아 등 자아에 관한≻ 여섯 가지의 견해와
≺오욕락과 초정려로부터 제4 정려까지를≻ 열반이라 여기는 다섯 가지의 ≺견해≻와
아홉 가지 만류(慢類)≺와 칠만의 관계≻와 ≺바람은 불지 않고 부증불감이라는 등의≻ 상견과
미혹하면 자(自)ㆍ타작(他作)을 집착하여도
깨달으면 이 두 가지는 실재하지 않는다는 것과
만(慢)을 갖춘 이와 득(得) 등을 설명하는 가타(伽他:게송)에 대해
원한다면 이 장에서 모두 설명하겠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시여도 없으며, 애락도 없으며, 제사도 없으며, 묘행이나 악행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因]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邪見]로 견집소단이다.
‘묘행이나 악행의 과보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결과[果]를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고소단이다.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화생(化生)의 유정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사견으로 견집소단이며, 혹은 결과를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고소단이다.
‘아비도 없으며, 어미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집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세간에 아라한이 없다.’고 하는 이것은 도를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도소단이다.
‘정지(正至:곧 열반을 말함)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멸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멸소단이다.
‘정행(正行:곧 학ㆍ무학을 말함)의 이 세상이나 저 세상도 없다. 즉 현법에서 스스로 통달하고 작증하고 구족하여 머무는 것을 알며, 나의 생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닦여졌으며, 지은 것은 이미 다 이루었고, 더 이상 후유(後有)를 받지 않는다고 참답게 아는 이가 없다.’고 하는,
이것은 도를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도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내지 살아 있는 목숨[命]은 죽은 이후 단괴하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이와 같은 사대종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신체는 죽을 때,
지신(地身)은 땅으로 돌아가고, 수신(水身)은 물로 돌아가고,
화신(火身)은 불로 돌아가고, 풍신(風身)은 바람으로 돌아가며,
감관의 작용[根]은 허공을 따라 돌며, 상여를 다섯 번째로 삼는다.
사람들이 그가 죽은 시체를 메고 가서 무덤더미에 버리게 되면,
아직 태워지지 않았으면 알아볼 수 있지만, 이미 태워졌으면 재와 그 밖의 비둘기 색의 뼈가지가 되고 만다.
어리석은 자만이 시여하는 것을 찬탄하는 것이지 지혜로운 이는 받는 것을 찬탄한다.
무언가 실재한다고 여러 가지를 논의하는 것은 모두 헛된 일이며, 허망한 말일 따름이다.
내지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나 살아 있는 것은 죽은 이후 단괴하여 존재하는 일이 없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단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무인무연(無因無緣)으로 유정은 더러움에 물들고, 비인비연(非因非緣)으로 유정은 더러움에 물들게 된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집소단이다.
‘무인무연으로 유정은 청정해지고, 비인비연으로 유정은 청정하게 된다.’고 하는,
이것은 도를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도소단이다.
‘무인무연으로 유정은 지(智)도 없고 견(見)도 없으며, 비인비연으로 유정은 지도 없고 견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집소단이다.
‘무인무연으로 유정은 지견을 갖게 되며, 비인비연으로 유정은 지견을 갖는다.’고 하는,
이것은 도를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도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힘도 없고, 정진도 없고, 힘과 정진도 없으며, 사(士:즉 士用, 사람의 힘이란 뜻으로 용맹을 의미함)도 없고, 위세도 없고, 사와 위세도 없으며, 자기가 짓는 일[自作]도 없고, 남이 짓는 일[他作]도 없고, 자기와 남이 짓는 일도 없다.
모든의 유정, 모든의 생, 일체의 종(種)에는 힘도 없고, 자재도 없고, 정진도 없고, 위세도 없지만,
정해진 운명[定:niyati]과 모든 요소와의 결합[合:sañgati]과 자연의 본성[性:bhāva]에 따라 전변하다가 육승생(六勝生) 중에서 여러 가지 괴로움과 즐거움을 향수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견해다.
이것이 만약 유루의 힘과 정진 등을 비방한 것이면,
바로 원인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집소단이다.
그러나 만약 무루의 힘과 정진 따위를 비방한 것이면,
바로 도를 비방한 그릇된 견해로 견도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악행을 짓거나 짓게 하거나, 삶거나 삶게 하거나, 해치거나 해치게 하거나, 모든 중생을 죽이거나, 주지 않는 것을 취하거나, 탐욕과 삿된 일을 행하거나, 알면서도 거짓말하거나, 고의로 여러 종류의 술을 마시거나, 담장에 구멍을 내고 묶어 놓은 것을 풀어 해쳐 거기에 숨겨져 있던 것을 모두 취하거나, 길을 끊거나, 마을을 해치거나, 도시를 해치거나, 나라의 명운에 해를 가하거나, 칼이나 전차의 바퀴로써 옹략(擁略)하거나, 살아 있는 중생을 절단ㆍ분해하고, 한데 모아 둥글게 쌓아 하나의 고깃덩이로 만든다고 할지라도, 이에 따르는 악도 없고 악의 연(緣)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갠지스강[殑伽:Gangā]의 남쪽에서 중생을 절단하고 치고 때리며, 갠지스강 북쪽에서 지혜를 베풀고 복을 닦더라도, 이에 따른 죄나 복이 없으며, 죄와 복의 연도 역시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보시 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로서 모든 유정을 포섭하더라도 이 모두에는 어떠한 복도 있지 않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그릇된 견해로 견집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이러한 칠사신(七士身)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며,
조화되어진 것이 아니라 조화이며, 해칠 수가 없으며, 항상 안주하는 것이니,
이사가(伊師迦:isikā:왕사성 근처의 산, 혹은 堅實한 나무의 이름)가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변하는 일이 없으며, 서로 간에 접촉하지도 않는다.
무엇이 일곱 가지인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과 고(苦)ㆍ낙(樂)ㆍ명(命)이다.
이러한 칠사신은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내지 마치 안주하여 움직이지 않는 이사가와 같으며, 혹은 죄로, 혹은 복으로, 혹은 죄와 복으로, 혹은 괴로움으로, 혹은 즐거움으로도, 혹은 괴로움과 즐거움으로도 전변하지 못하고, 또한 역시 서로서로 접촉하게 하여 장애하지도 않는다.
만약 어떤 사람[士夫]이 사람의 머리를 절단하더라도 이 또한 세간의 생류를 해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움직이는 것(이를테면 사람)이나 혹은 머물러 있는 것(이를테면 나무)이거나 간에 이와 같은 칠신 사이로는 비록 칼이 지나갈 수 있어도 그의 생명을 해치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해치는 것도 없고, 해침을 당하는 것도 없으며, 치는 것도 없고, 맞는 것도 없으며, 해치고 치는 표업도 없으며, 해침을 당하고 맞는 것[表處:즉 피동의 대상을 말함]도 없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십사억 육만 육백의 생문(生門)이 있으며,
오업(五業)ㆍ삼업ㆍ이업ㆍ업ㆍ반업(半業)이 있으며,
육십이 행적(行跡)ㆍ육십이 중겁이 있으며,
백삼십육의 지옥ㆍ백이십의 근(根)ㆍ삼십육 진계(塵界)가 있으며,
사만 구천의 용가(龍家)ㆍ사만 구천의 묘시조가(妙翅鳥家)ㆍ사만 구천의 이학가(異學家)ㆍ사만 구천의 활명가(活命家)ㆍ칠유상장(七有想臧)ㆍ칠무상장(七無想臧)ㆍ칠이계장(七離繫臧)ㆍ칠아소락(七阿素洛:asura)ㆍ칠필사차(七畢舍遮:Piśāca:아귀 중의 食肉鬼)ㆍ칠천(七天)ㆍ칠인(七人)ㆍ칠몽(七夢)ㆍ칠백몽ㆍ칠각(七覺)ㆍ칠백각ㆍ칠지(七池)ㆍ칠백지ㆍ칠험(七險)ㆍ칠백험ㆍ칠감(七減)ㆍ칠백감ㆍ칠증(七增)ㆍ칠백증이 있으며,
육승생류(六勝生類)와 팔대사지(八大士地)가 있다.
이와 같은 곳에서 어리석은 이든, 지혜로운 이든 팔만 사천의 대겁을 지나 왕래유전하게 되면, 바로 결정적으로 괴로움의 종극[邊際]을 얻게 되니, 마치 실꾸러미를 던져 실이 다 풀려지면 바로 멈추는 것과 같다.
여기서는 어떠한 사문이나 바라문도 나는 시라(尸羅:śila:戒)로써, 혹은 정진으로써, 혹은 범행으로써, 존재하는 업으로써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것이면 성숙하게 하고, 성숙한 것이면 감각[觸]하여 바로 변토(變吐)하게 한다고 말하는 일이 없다.
이와 같이 일정한 용기[斛]로써 생사고락이 다하는 때를 측량하여 증가가 있고, 감소가 있다고 시설할 수 없으며, 또한 역시 그렇다거나 그렇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견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모든 사부(士夫)와 보특가라 등의 모든 유정이 받는 모든 것은 과거에 지은 것을 원인으로 하지 않는 것이 없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모든 사부와 보특가라 등의 모든 유정이 받는 모든 것은 자재천의 변화를 원인으로 한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모든 사부와 보특가라가 받는 모든 것은 바로 무인무연이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한 그릇된 견해로 견집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스스로가 고락을 지은 것이며, 다른 이가 고락을 지은 것이며, 스스로와 다른 이가 고락을 지은 것이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자신이 받는 고락은 스스로가 지은 것이 아니고, 다른 이가 지은 것이 아니며, 원인이 없이 생겨난 것이다.’고 하는,
이것은 원인을 비방한 그릇된 견해로서 견집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아(我)와 세간은 항상하며 견고히 지속하는 무변의 이법(易法)으로서, 바로 안주하는 것이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진실이므로(원문에서는 諦故이나 이를 『바사』에서는 實義로 해석함), 머무르므로(원문에서는 住故이나, 『바사』에서는 이를 法爾로 해석함) 아(我)는 유아이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진실이므로, 머무르므로 아는 무아이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단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자아가 자아를 관찰하는 것으로, 눈과 색은 바로 자아이다.’고 하는,
이것은 유신견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자아가 무아를 관찰하는 것으로, 눈은 바로 자아이지만, 색은 여러 가지를 갖춘 것이다.’고 하,는
이것은 유신견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무아가 자아를 관찰하는 것으로, 색은 바로 자아이지만, 눈은 여러 가지를 갖춘 것이다.’고 하는,
이것은 유신견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이것은 자아이고, 이것은 유정이며, 명자(命者)ㆍ생자(生者)ㆍ양육자ㆍ보특가라ㆍ의생(意生)ㆍ유동(儒童)ㆍ하는 자[作者]ㆍ하게 하는 자[敎者]ㆍ생겨난 자[生者]ㆍ등생자(等生者)ㆍ일어난 자[起者]ㆍ등기자(等起者)ㆍ말하는 자[語者]ㆍ느끼는 자[覺者]ㆍ등영수자(等領受者)로서,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이가 아니며, 앞으로 존재하지 않을 자가 아니다.
그것은 그러그러한 처소에서 선악의 업을 조작하며, 그러그러한 처소에서 그 과보의 이숙을 받으며, 여기서의 온을 버리고 다른 온을 상속한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묘한 오욕(五欲)을 받는 것을 제일현법열반의 획득이라고 일컫는다.’고 하는,
이것은 열등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이라고 하는 견취(見取)로서 견고소단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욕악(欲惡)의 불선법을 떠나 유심유사로서 이생희락(離生喜樂)하는 초정려에 들어가 완전하게 머무는 것을 제일현법열반의 획득이라고 일컬으며, 심(尋)과 사(伺)가 사라져 고요하고, 내등정(內等淨)ㆍ심일취성(心一趣性)ㆍ무심무사로서 정생희락(定生喜樂)하는 제2정려에 들어가 완전하게 머무는 것을 제일현법열반의 획득이라고 일컫는다.
희를 떠나 사(捨)와 정념(正念)ㆍ정지(正智)에 머물며, 신수의 즐거움[身受樂]이 있어 성(聖)이 설명되어도 버린다는 생각으로 낙주(樂住)하는 제3정려에 들어가 완전하게 머무는 것을 제일현법열반의 획득이라고 일컬으며,
낙을 끊고 고(苦)를 끊고, 앞의 정려에서의 희와 우(憂)가 몰하고, 불고불락으로서 사(捨)와 염(念)이 청정한 제4정려에 들어가 완전하게 머무는 것을 제일현법열반의 획득이라고 일컫는다.’고 하는,
이것은 열등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이라고 하는 견취로서 견고소단이다.
아홉 가지의 만류(慢類)가 있으니,
말하자면 아승(我勝)ㆍ아등(我等)ㆍ아열(我劣)ㆍ유승아(有勝我)ㆍ유등아(有等我)ㆍ유열아(有劣我)ㆍ무승아(無勝我)ㆍ무등아ㆍ무열아가 그것이다.
여기서 아승이란 바로 견(見)에 의해 일어난 과만(過慢)이다.
아등이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만이다.
아열이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비만(卑慢)이다.
무승아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비만이다.
유등아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만이다.
유열아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과만이다.
유승아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만이다.
무등아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과만이다.
무열아란 바로 견에 의해 일어난 비만이다.
여러 유정들의 이와 같은 견해,
즉 ‘바람은 불지 않으며, 강은 흐르지 않으며, 불은 타지 않으며, 우유는 쏟아지지 않으며, 자궁은 잉태하지 않으며, 해와 달은 뜨지 않고 지지 않으며, 더러움과 청정함은 자성에 안주하여 증가하지도 않고 감소하지도 않는다.’고 하는,
이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계경 중에서 설명하였다.
중생은 ‘모든 고락을 내가 지었다.’고 집착한다.
또한 ‘다른 이가 지었다.’고 집착하는 것도 역시 그러하니,
각각은 참답게 관찰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바로 화살과 같은 것임을.
[문] 이 말에는 어떠한 뜻이 있는가?
[답] 여기서 중생이란 외도를 말하는데, 그들이 집착하기를, ‘모든 고락을 내가 짓고, 내가 낳았으며, 내가 변화시켰다.’고 하였다.
그래서 ‘중생은 모든 고락을 내가 지었다고 집착한다.’고 말한 것이다.
어떤 외도는 ‘모든 고락을 다른 이가 짓고, 다른 이가 낳았으며, 다른 이가 변화시켰다.’고 집착하였다.
그래서 ‘다른 이가 지었다고 집착하는 것도 역시 또한 그러하다.’고 말한 것이다.
‘각각’이란 하나하나를 말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화살’이란 큰 상처를 입히는 악견(惡見)을 말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러한 견해가 바로 화살과 같은 것임을 참답게 관찰하여 알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마땅히 이것은 화살≺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해야 할 것이니,
중생이 견고하게 집착하는 것을.
그와 같이 한다면, 내가 지었다거나 다른 이가 지었다고 하는
어떠한 견해도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화살과 같은 것이라고 관찰해야 할 것이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견해는 바로 진짜 독화살과 같아서 늙고 병들고 죽는 것으로 인도하는 것이기 때문에 참답게 관찰하여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중생이 견고하게 집착한다.’고 하는 것에서, 중생이란 외도를 말한다.
즉 그들은 견취에 대해 너무나도 견고히 집착하여 거기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이 관찰하여 안다면, 모든 고락을 내가 짓고, 내가 낳았으며, 내가 변화시켰다는 집착은 다시는 있을 수 없으며, 또한 모든 고락을 다른 이가 짓고, 다른 이가 낳았으며, 다른 이가 변화시켰다는 집착도 다시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니,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이라고 잘못 집착하였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만(慢)을 갖춘 중생은
만에 집착하고, 만에 속박되며,
견해에 있어서도 서로 어긋나니,
생사를 초월하지 못한다.
여기서 ‘만을 갖추었다.’고 하는 것은 일곱 가지의 만을 성취한 것을 나타내며, 중생은 외도를 말한다.
즉 그는 만에 대해 집착하고, 다양하고도 두루 집착하기 때문에 ‘만에 집착한다.’고 한 것이며,
속박되고, 다양하고도 두루 속박되기 때문에 ‘만에 속박된다.’고 말한 것이다.
‘견해에 있어서도 서로 어긋난다.’고 함은 단(斷)ㆍ상(常)의 견해로서 서로 어긋나는 것을 말하며,
‘생사를 초월하지 못한다.’고 함은 그러한 이는 끝없는 생사를 초월하여 열반을 얻지 못하는 것을 말한다.
획득한 것[得]과 획득할 것[當得]이 함께 갖추어진
열등한 학자[劣學]에게 있어서 계(戒)ㆍ금(禁)ㆍ욕(浴)과
범(梵)ㆍ고(苦)ㆍ사(事)가 첫 번째의 극단[邊]이며,
욕망을 청정한 것으로 향수하는 것이 두 번째 극단인데,
이를 참답게 보지 않음으로써 깊이 빠지고[極沈], 내닫게 된다[極走].
그러나 눈이 밝은 이는 이를 참답게 봄으로써 이것과 다르며,
그것에 대한 진(塵)과 만(慢)이 없으며,
그러한 길을 끊음으로써 괴로움의 종극[苦邊]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획득한 것’이란 이미 획득한 여러 온ㆍ계ㆍ처를 나타내며,
‘획득할 것’이란 아직 획득하지 않은 여러 온ㆍ계ㆍ처를 나타낸다.
‘함께 갖추어졌다.’고 하는 것은 이러한 두 가지의 획득이 탐ㆍ진ㆍ치의 번뇌[塵]와 함께 하고, 두루 함께 하고, 지극히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열등한 이’에는 두 가지의 뜻이 있으니,
첫 번째는 병자를 말하며, 두 번째는 외도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외도를 열등한 이라고 하였다.
즉 그들은 이와 같은 것을 배우는 자이기 때문에 열학(劣學)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모든 보특가라는 코끼리나 말ㆍ배ㆍ수레ㆍ가마를 타고, 활이나 몽둥이ㆍ갈고리ㆍ바퀴ㆍ그물망을 드는 법을 배우고, 글자[書]나 도장ㆍ계산ㆍ수 따위를 배워, 모든 것이 뛰어나게 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淨脫)과 출리(出離)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고 주장하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계(戒)라고 하는 것은,
어떤 여러 외도가 ‘모든 보특가라가 소나 사슴이나 개처럼 행동하는 계[狗戒]와 나체의 계[露形戒]를 수지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과 출리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여 그와 같은 계를 지키는 것이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금(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여러 외도가 ‘모든 보특가라가 까마귀가 지키는 금계[烏禁], 부엉이가 지키는 금계, 침묵의 금계 등을 수지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과 출리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여 그와 같은 금계를 지키는 것이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욕(浴)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외도가 ‘모든 보특가라가 마나사(摩捺娑:Mānasa)ㆍ북(北)마나사 등 갠지스강의 시원이 되는 세 연못에서 목욕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과 출리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여 그같이 목욕하는 것이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범(梵)이란 범행을 말하는 것으로,
어떤 외도가 ‘모든 보특가라가 범행을 수지하고 음욕을 멀리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과 출리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끝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여 그와 같은 범행을 수지하는 것이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고(苦)라고 하는 것은 고행을 말한다.
즉 어떤 외도가 ‘모든 보특가라가 여러 형태의 고행을 수지하게 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과 출리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여 그같이 고행하는 것이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사(事)라고 하는 것은 승사(承事)를 말한다.
즉 어떤 외도가 ‘모든 보특가라가 코끼리나 말ㆍ소를 조련하고, 해와 달, 별ㆍ화주(火珠)ㆍ약(藥) 등을 섬기게 되면, 이에 따라 바로 정탈과 출리를 얻어 괴로움과 즐거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여 그와 같은 것을 섬기는 것이니,
이것은 원인이 아닌 것을 원인으로 간주하는 계금취로서 견고소단이다.
그리고 첫 번째 극단이라 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이 바로 고행의 극단임을 말한다.
‘욕망을 청정한 것으로 향수한다.’고 하는 것은,
어떤 외도가 ‘여러 가지 욕망은 청정하고 뛰어난 것이므로 쾌히 수용하더라도 어떠한 과실도 없다.’는 견해를 주장하고 논의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열등한 법을 취하여 뛰어난 것이라고 하는 견취로서 견고소단이다.
그리고 ‘두 번째’라고 한 것이 이같이 주장하는 것은 바로 쾌락[樂行]의 극단임을 말한다.
‘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모든 외도가 앞의 두 가지 극단에 대해 참답게 관찰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깊이 빠진다.’고 함은, 그와 같은 외도는 보지 않음으로써,
어떤 부류는 애(愛)를 일으키기 때문에 깊이 빠진다고 말한 것이며,
어떤 부류는 견을 일으키기 때문에 ‘극심히 내닫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어떤 부류는 게으르기[懈怠] 때문에 깊이 빠진다고 말한 것이며,
어떤 부류는 경거망동[掉擧]하기 때문에 극심히 내닫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어떤 부류는 만(慢)을 일으키기 때문에 깊이 빠진다고 말한 것이며,
어떤 부류는 과만을 일으키기 때문에 극심히 내닫게 된다고 말한 것이다.
‘눈이 밝은 이는 참답게 본다.’고 하는 것에서, 눈이 밝은 자란 부처와 부처의 제자를 말하며,
‘본다.’고 하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두 가지 극단을 참답게 지견(知見)하는 것을 말한다.
‘다르다.’고 함은, 참답게 지견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양 극단에 깊이 빠지거나 극심히 내닫는 이와 같지 않음을 말한다.
즉 그들은 애와 견 등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에 대한 진(塵)이 없다.’고 하는 것은, 이미 획득하였거나 아직 획득하지 않은 온ㆍ계ㆍ처에 대해 탐ㆍ진ㆍ치의 번뇌를 일으키지 않는 것을 말하며,
‘그것에 대한 만이 없다.’고 하는 것은, 비록 두 가지의 극단을 모두 멀리하였더라도 그와 같은 마음에 의지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길을 끊었다.’고 하는 것은, 만약 이와 같이 하였을 경우 번뇌와 업과 괴로움의 세 가지 길을 끊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괴로움의 종극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것에서, 괴로움이란 오취온의 괴로움을 말하며, 종극[邊]이란 열반을 말한다.
곧 만약 세 가지의 길을 끊으면 바로 이러한 고온(苦蘊)의 종극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