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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_아비달마구사론_9. 파집아품(破執我品), 29-30권
아비달마구사론 제29권[2]
63)
보광에 의하면 앞의 「정품」 말미의 게송에서 ‘마땅히 해탈을 추구하여 게으르지 말아야 하리라’고 말한 것을, ‘이 같은 불타의 정법만이 해탈의 방편으로 그 밖에 달리 해탈의 방편이 없기 때문에 해탈을 구하는 자는 이러한 정법을 익히는 데 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이 같은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64)
이는 이하에서 논의하는 것처럼 독자부(犢子部) 혹은 승론(勝論)의 주장이다. 그렇지만 독자부의 경우 단순히 온을 떠난 개별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아니라 ‘온과 동일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온을 떠난 것도 아닌, 불가설의 자아[非卽非離蘊我]’를 주장하고 있다.
65)
색ㆍ성ㆍ향ㆍ미ㆍ촉의 5경은 안 등의 전5식에 의해 직접지각되며, 법경으로서 관행자(觀行者, 즉 瑜伽師)의 경계가 되는 것도 직접지각된다. 그리고 등무간멸(전찰나)의 의근은 무간생(후찰나)의 의근에 의해 어떤 매개물 없이 바로 요별된다.
66)
비록 습도나 광선 온도 등의 온갖 조건[衆緣]이 갖추어져 있다고 할지라도 그와는 별도의 조건 즉 씨앗이 없으면 싹이 생겨나지 않는 것처럼 비록 색 등의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겠다는 작의(作意) 등의 조건이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안근 등의 5색근이 존재하지 않으면 그에 대한 인식은 일어날 수 없다. 곧 5식의 작용은 5색근을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5식을 통해 5색근의 존재는 추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67)
즉 보특가라가 실체라면, 그것은 원인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만약 전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결국 무상한 것으로 상주의 실체가 아니어야 할 것이며,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그것은 바로 허공처럼 원인에 의해 생겨난 것이 아닌 무제약적 존재(무위)이기 때문에 외도가 주장하는 자아(atman)와 같은 것이 되고 만다.
68)
보특가라가 만약 무위 즉 무제약적 초월적 존재라면 현상의 어떠한 작용도 갖지 않을 것이고, 만약 작용이 없다고 한다면 실유의 보특가라를 주장한들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가 하는 논주 세친의 힐난.
69)
즉 독자부에서 설정한 보특가라는 온과는 독립된 개별적 실재라거나 혹은 그 취합물을 일시 그 같은 명칭으로 일컬은 것이 아니라 다만 현재에 신체 내부에 있으면서 지각하고 인식하는 행위의 주체로서 설정된 개념이라는 뜻.
70)
젖이나 낙(일종의 요구르트)은 색ㆍ향ㆍ미ㆍ촉 등을 떠나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화합물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것은 실유가 아니라 가유이다.
71)
만약 제온의 취집을 원인으로 하여 보특가라를 설정하였다고 한다면 보특가라도 역시 제온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 가유가 되어야 하며(경량부에 의하는 한 온은 가유이다. 본론 권제1, p.38 주77 참조), 이는 더 이상 독자부가 주장하는 보특가라가 아니다.(『구사론기』 권제29, 대정장41, p.440상) 참고로 본 「파아품」은 전적으로 경량부의 입장에서 논설되고 있다.
72)
그것이 땔감이든 불이든 현상계의 모든 물질은 견(堅)ㆍ습(濕)ㆍ난(煖)ㆍ동(動)을 본질로 하는 지ㆍ수ㆍ화 ㆍ풍의 4대종과 색(色)ㆍ향(香)ㆍ미(味)ㆍ촉(觸)의 4대소조생의 집적(8事俱生)이지만, 인연에 따라 그 세력이 나타나기도 하고 감추어지기도 한다.(본론 권제4, p.156 초 참조)
73)
전찰나의 젖을 연(緣)으로 하여 후찰나에 낙(요구르트)이 생겨나는 것처럼, 전찰나의 땔감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에 불이 생겨나게 된다는 뜻.
74)
즉 전찰나의 땔감을 연으로 하여 후찰나의 불이 생겨나듯이 자아(보특가라)가 제온을 연으로 하여 생겨나는 것이라고 할 경우, 여기에서는 다음의 세 뜻이 포함되어 있다. 첫째, 자아는 제온을 연으로 하여 생겨난 것이다. 둘째, 자아의 본질은 제온과는 다른 것이다. 셋째, 자아는 일찍이 없다가 지금 존재하므로 무상성을 성취해야 한다. 그럼에도 독자부에서는 자아를 온과 다른 것이 아니며, 또한 무상한 것도 아니라고 하였으므로 앞의 설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75)
만약 불과 땔감이 구생하는 것이라면 땔감은 땔감의 원인으로부터, 불은 불의 원인으로부터, 각기 자신의 과거 동류인으로부터 동시에 생겨난 것이며, 그럴 경우 불은 땔감을 원인으로 하여 생겨났다고 한 앞의 주장과는 모순되는 것이다.
76)
뜨거움을 난촉(火大의 자상)으로, 땔감을 그 밖의 7사(事)로 해석할 경우, 그것들은 각기 존재양태[體相]가 다르기 때문에 ‘땔감과 불이 다른 것이라면 땔감은 마땅히 뜨거워지지 않아야 한다’고 한 독자부의 힐난은 바로 그들 자신에게 적용되고 만다는 뜻.
77)
즉 물[水]이나 바람[風] 혹은 맛[味] 또한 난상(煖相)과 화합하면 뜨거운 물, 뜨거운 바람, 뜨거운 맛이 되는 것이다.
78)
나무 등이 탈 때를 땔감이라고도 하고 불이라고도 한다면, 다시 말해 불과 땔감이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한다면(개별적 존재라고 한다면 땔감은 뜨겁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무엇을 태워지는 것[所依]이라 하고, 무엇을 능히 타는 것[能依]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즉 불과 땔감은 능의와 소의의 개별적 관계가 아니듯이 보특가라와 제온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다는 뜻.
79)
여기서 ‘이염’은 소지(所知) 즉 알려지는 대상. 독자부에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법장(法藏)으로서 과거ㆍ현재ㆍ미래의 3세의 5온과 무위법과 바로 이 같은 불가설의 보특가라를 들고 있다. 즉 보특가라는 생사의 유위에서는 5온과의 일이(一異)를, 열반에서는 무위와의 일이를 설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제5의 불가설 법장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들이 설하는 5종의 소지도 역시 5종이 있다고 설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자아(보특가라)와 앞의 네 법장이 다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의 법장이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동일하다고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제5의 법장이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제5가 아닌 것은 바로 앞의 네 가지 법장인데, 제5라고도 제5가 아니라고도 설할 수 없는 것이라면 단지 앞의 네 가지 법장만을 설하여야 하지 제5의 법장을 별도로 설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 같은 독자부의 5법장설에 대한 논파는 『성실론』 권제3 「유아무아품」 제35(대정장32, p.260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80)
다시 말해 온이 존재하여야 능히 그 같은 경험의 주체로서의 자아를 알 수 있기 때문에 자아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의미에서 ‘보특가라는 제온을 근거로 하여 설정하였다고 말한다면’의 뜻.
81)
만약 안식 등이 꽃을 인식하면, ‘나는 꽃을 보았다’고 생각하므로 자아(보특가라)의 존재는 안 등의 6식을 통해 확인된다는 것이다.
82)
보특가라는 색상(色相)이 없기 때문에 색과 동일하다고 설할 수 없으며, 불가설이기 때문에 색과 다르다고도 설할 수 없다. 즉 독자부에서 말하는 보특가라는 보여지고 들려지고 인식되는 것과 같은 것도 아니며 다른 것도 아닌, 그 같은 인식을 통해 추리되는 존재이다.
83)
즉 젖 등이 색ㆍ향ㆍ미ㆍ촉의 4진(塵)과 동일한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색 등을 성취하지 않게 되는 과실이 있으며, 만약 색 등과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젖 등은 4진에 의해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과실을 범하게 된다.
84)
온갖 색은 안(眼) 등의 연(緣)을 요별의 근거로 삼기 때문에 안 등과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면, 꽃을 볼 경우 그것이 눈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힐난.
85)
존재성[有性] 즉 자상을 갖는 실체로서의 법(法, dharma)은 현량과 비량의 분별에 의해 설정된 것으로, 분별되지 않은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존재의 유무조차 논의할 수 없다.
86)
색을 요별하는 안식과 보특가라를 요별하는 안식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다.(그럴 경우 2心 不俱起의 원칙에 위배됨) 따라서 자아는 색과 달라야 하는 것이다.
87)
노란색과 푸른색은 각기 개별적인 것으로서, 전자가 인식될 때 후자는 인식되지 않으며, 후자가 인식될 때 전자는 인식되지 않는다.
88)
즉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과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의 경우도 역시 그러하여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이 바로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이라고도 설할 수 없으며, 색을 능히 요별하는 식과는 별도로 자아를 능히 요별하는 식이 존재한다고도 설할 수 없다고 한다면……의 뜻.
89)
이 때 ‘능히 요별하는 식’은 자아처럼 불가설이기 때문에 그것을 유위법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
90)
『잡아함경』 권제10 제262경(대정장2, p.66중), “색은 무상이다. 수ㆍ상ㆍ행ㆍ식은 무상이다. 일체행은 무상이다. 일체법은 무아이고, 열반은 적정이다.”;동 권제1 제24경(동, p.5중), “諸所有色……彼一切非我, 不異我, 不相在……如是受想行識…….”
91)
『잡아함경』 권제8 제214경(대정장2, p.54상). 즉 만약 안식이 ‘아’를 소연으로 하여 일어난다면, 안식은 안근과 색경과 ‘아’라고 하는 세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되어 경설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다
92)
『잡아함경』 권제9 제238경(대정장2, p.57하).
93)
『잡아함경』 권제1 제11경(대정장2, p.2상), “色無常. 若因若緣, 生諸色者, 彼亦無常. 無常因無常緣所有諸色 云何有常?”
94)
『중아함경』 권제58 『대구치라경(大拘絺羅經)』(대정장1, p.791중).
95)
『잡아함경』 권제43 제1171경(대정장2, p.313상). 즉 경에서는 제6의근도 자신의 소행처(所行處)와 경계가 있다고 하였지만, 의근은 실제적으로 법경만을 소연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전5근의 소연의 경계로 삼는다. 그렇다면 이 같은 예에 따라 전5근도 비록 자신의 소행처와 경계만을 수용한다고 하였을지라도 그 밖의 다른 대상을 소연으로 삼는 경우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뜻.
96)
5근은 색을 자성으로 하며 전5식은 무분별이기 때문에 견(見)이나 낙(樂) 등의 어떠한 판단도 일어나지 않는다.(‘견’이란 먼저 審慮하고 決度하는 것, 즉 제6의식 상응의 혜를 말한다. 본론 권제2, p.86) 그런데 경에서는 ‘즐거이 추구한다[樂求]’고 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안 등의 6근에 대해 설한 것이 아니라는 뜻.
97)
여기서 ‘통달되는 것[所達, abhijñeya]’은 무간도로서 혜에 의해 달성되며, ‘알려지는 것[所知, parijñeya]’은 해탈도로서 지(智)에 의해 알려진다. 즉 일체법은 모두 ‘혜’와 ‘지’에 의해 통달되고 알려지는 것으로, 그렇지 않은 그 밖의 것(이를테면 자아)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98)
『잡아함경』 권제13 권제306경(대정장2, p.87하). 여기서 유정(sattva, 존재자)ㆍ불열(nara)ㆍ의생(manuja, 마누로부터 태어난 자)ㆍ유동(māṇava, 마누에 소속된 善者)ㆍ양자(poṣa, 能食者로서 생명의 주체)ㆍ명자(jīva, 能活者, 생명의 원리로써 살아가는 자)ㆍ생자(jantu, 能生者)ㆍ보특가라(pudgala, 이기성에 근거한 개체자)는 모두 현상적 인간 일반을 나타내는 말이지만, 철학적 논의의 대상이 될 경우 영속적인 실체를 의미하는 형이상학적 용어가 된다. 즉 이것들은 모두 경험과 변화의 기체(基體)로서의 자아(혹은 영혼)를 의미한다.
99)
『잡아함경』 권제13 제219경(대정장2, p.91상), “一切者, 謂十二入處, 眼色耳聲鼻香舌味身觸意法, 是名一切.”
100)
앞의 경, “若復說言, 此非一切. 沙門瞿曇所說一切, 我今捨, 別立餘一切者, 彼但有言說. 問已不知, 增其疑惑. 所以者何? 非其境界故” 참조.
101)
『중아함경』 권제11 『빈비사라왕영불경(頻鞞娑邏王迎佛經)』(대정장1, p. 49중).
102)
『잡아함경』 권제45 제1202경(대정정2, p.327중).
103)
즉 그러한 경들은 모두 후세 사람들이 증광(增廣)한 것이라는 뜻.
104)
만약 보특가라가 의식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때 의식은 세 가지 연(緣)에 의해 낳아지게 되므로 경설에 위배된다. 즉 그 때 의식은 의근과 일체법(법경)과 보특가라를 소의와 소연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105)
『대집법문경』 권상. 본론 권제19, 주59) 참조.
106)
비아를 ‘아’로 헤아리는 것이 전도이지 ‘아’를 ‘아’로 헤아리는 것은 전도가 아니라는 뜻.
107)
『잡아함경』 권제2 제45경(대정장2, p.11중), “諸沙門婆羅門見有我者, 一切皆於此五受陰見我.”
108)
앞의 경 제46경(대정장2, p.11중), “沙門婆羅門 以宿命智自識種種宿命, 已識當識今識, 皆於此五受陰, 已識當識今識.”
109)
같은 경, “我過去所經, 如是色, 如是受, 如是想, 如是行, 如是識.(나는 과거세 이와 같은 색이었고, 이와 같은 수였고, 이와 같은 상이었고, 이와 같은 행이었고, 이와 같은 식이었다.)” 즉 기억의 주체로서 ‘나’를 설하고 있지 않는가 하는 경증. 이하 독자부의 논란과 이에 대한 세친의 해명이 논설되고 있다.
110)
즉 경에서 설한 ‘나’를 실유의 보특가라로 해석한다면, 이러한 경은 마땅히 유신견을 일으키게 하는 과실로 인해 존재 자체가 부정되어야 한다는 뜻.
111)
‘아’라고 하는 것은 곡물더미처럼 제온이 인연화합하여 생겨난 가법(假法)이기 때문에 단일하지 않으며, 흘러가는 강물처럼 상속하므로 부동의 영속체가 아니다.
112)
만약 지속의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찰나멸하는 일체법을 역시 또한 찰나멸하는 심ㆍ심소로써 능히 알 수 없으며, 설혹 안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인식 또한 찰나멸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참된 인식이라 할 수 없다. 따라서 부처 역시 일체지자라고 할 수 없다는 뜻.
113)
즉 독자부에서 설하는 보특가라는 상주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없고[非離蘊] 무상한 것이라고도 할 수 없는 것[非卽蘊]이다.
114)
즉 불이 단박에 일체의 세계를 태워 버리기 때문에 ‘일체를 집어 삼킨다’고 말한 것이 아니라 점차로 태우지만 마침내 일체의 세계를 태울 만한 공능을 지녔기 때문에 그같이 말한 것처럼 ‘일체지’라는 말도 다만 상속신상에 그 같은 공능을 지니고 있음을 말한다는 뜻.
115)
『잡아함경』 권제44 제1188경(대정장2, p.322상), “過去等正覺及未來諸佛 現在佛世尊能除衆生憂.” 즉 단박에 두루 일체지를 성취하는 것이라면 이처럼 3세에 각기 다른 부처가 존재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상속신에 근거하여 일체법을 알기 때문에 각각의 시간에 각각의 부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비달마구사론 제30권
1)
『잡아함경』 권제3 제73경 「중담경(重擔經)」(대정장2, p.19상). 여기서 중담 즉 무거운 짐(bhāra)이란 5온을 말하며, 무거운 짐을 취한다(bhārādāna)는 것은 당래의 애탐 등을, 버린다(bhāranikkhepana)는 것은 애탐 등의 영단(永斷)을, 무거운 짐을 진 자(bhārahāra)는 사부(士夫) 즉 푸루샤(puruṣa)를 말한다.
2)
즉 보특가라가 5온의 가명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바로 무거운 짐으로, 무거운 짐이 무거운 짐을 질 수는 없기 때문에 그 같은 법문은 실유의 보특가라를 고려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3)
보특가라(자아)는 능히 짐을 지는 자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짐을 취하는 것’ 역시 능히 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시켜서는 안 된다는 힐난.
4)
‘무거운 짐을 진 자’에서 짐과 진 자가 개별적인 존재라고 한다면, ‘무거운 짐(온)’과 그것을 ‘취하는 것(애)’도 개별적인 존재가 되어야 할 것으로, 무거운 짐이 바로 자신을 취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거운 짐을 취하는 것’을 경에서는 애(愛, 행온에 포섭됨)로 규정하였기 때문에 그것은 바로 5온에 포섭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무거운 짐을 진 자(보특가라)’ 역시 5온에 포섭되는 것으로 제온의 상속(짐을 진다는 경험)상에 일시 설정된 존재(假說, 또는 世俗)일 뿐이다.
5)
본론 권제29 주98)의 『인계경(人契經)』 후반부.
6)
『본사경(本事經)』 권제5(대정장17, p.687) 참조. 『대비바사론』 권제198(한글대장경125, p.515), “‘이 세상도 없고 저 세상도 없으며, 화생의 유정도 없다’고 하면, 이것은 원인을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견집소단이고, 혹은 결과를 비방하는 사견으로서 견고소단이기다 하다.……” 여기서 화생의 유정이 없다고 함은 그것이 받을 업을 부정하거나 혹은 받게 되는 화생을 부정하는 것을 말한다. 보광은 화생의 유정을 중유(中有)로 해석하고 있다. 여기서 독자부는 화생의 유정을 실유의 자아로 해석하여 그것이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7)
화생의 유정은 제온의 상속상에 가립되어 존재하는 것으로, 실유의 자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 같은 실유의 자아를 부정하는 것이 바로 사견이라고 한다면 그 같은 사견은 어떠한 도에 의해 끊어질 것인가? 사견은 견소단이지만, 실유의 자아는 현실의 괴로움의 결과도 원인도 아니기 때문에(다시 말해 4제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견소단이 아닌 것이다.
8)
『증일아함경』 권제3(대정장2, p.561상), “有一人出現於世 便有一人入道在於世間.”
9)
본론 권제29 주111) 참조.
10)
어떤 이가 제사나 문법에 관한 학문을 학습 성취함으로써 제사 지내는 이[能祠者, yājñikra]와 문법학자[記論者, vaiyākaraṇa]가 되고, 율의 내지는 병을 획득함으로써 필추(비구) 내지는 병자로 태어나는 것으로, 그것은 실유의 보특가라가 존재하여 이전과는 다른 온을 성취함으로써 그러한 존재로 태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11)
『잡아함경』 권제13 제335경 「제일의공경(第一義空經)」(대정장2, p.92하). 여기서 법가(dharma saketa, 혹은 俗數法) 5온의 상속상에 일시 설정된 자아를 말하는 것으로, 이 경은 본론 권제9(주30)에서도 인용되고 있다.
12)
『잡아함경』 권제15 제372경(대정장2, p.102중), “……수(受)를 연으로 하여 애(愛)가 있고, 애를 연으로 하여 취(取)가 있다. 세존이시여, 그렇다면 누가 취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파구나(頗求那)에게 고하기를, 나는 취하는 자가 있다고 설하지 않는다. 내가 만약 취하는 자가 있다고 설한다면 그대는 응당 ‘누가 취하는 것인가’라고 묻겠지만, 그대는 마땅히 무엇을 연으로 하여 취가 있는가에 대해 물어야 할 것이다.”
13)
불교에 있어 실유의 자아는 부정되기 때문에(독자부에 있어서도 자아는 非卽蘊인 동시에 非離蘊이다) 자아의 비유란 있을 수 없다.
14)
즉 명론(明論, vidyā vāda, 학문 일반) 등은 불상응행법의 하나인 ‘명(名)’ 등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능히 취하는 제사를 지내는 이나 문법학자의 색신과 달라야 하며, 이와 마찬가지로 소취(所取)의 오온(예컨대 병) 역시 능취의 자아(병자)와는 달라야 하는 것이다. 그럴 경우 보특가라는 오온과 비일비이(非一非異)라는 명제에 어긋나게 된다. 따라서 인용된 비유는 올바르지 않다.
15)
본론 권제20(p.911) 참조.
16)
각천(覺天)에 의하면 ‘색은 오로지 4대종으로 대종 이외에 조색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조색은 바로 대종의 차별일 뿐이다. 그리고 심소 역시 마음의 차별일 뿐이다.’(『대비바사론』 권제127, 한글대장경123, p.39-40) 즉 색ㆍ향ㆍ미ㆍ촉의 조색은 4대종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4대종 밖에 따로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온과 보특가라는 왜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것인가 하는 힐난. 그러나 후설하듯이 각천의 설은 유부 내의 이설(異說)이다.
17)
부처님께서는 세간의 상(常)ㆍ무상(無常), 변(邊)ㆍ무변(無邊), 신명(身命)의 일(一)ㆍ이(異), 여래 사후의 유무(有無)에 대해 침묵하시고 언급하지 않았다.(본론 권제19 주116 참조) 즉 그렇게 묻는 것은 바로 전도된 견해이기 때문이다.(『잡아함경』 권제24권 제962경, 대정장2, p.245하)
18)
용군(龍軍) 즉 나가세나(Nāgasena, 那先)는 기원전 2세기 무렵 후반에 활약한 논사로, 북인도의 희랍왕국 박트리아의 왕 메난드로스(Menandros, 인도명 Milinda)와 불교 교리에 대해 문답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 결과로서 편찬된 것이 『밀린다팡하(Milindapañhā)』(한역은 『나선비구경(那先比丘經)』)로, 본론에서의 인용은 이에 따른 것이다. 3명과 6통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7, 8해탈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29(p.1326) 참조.
19)
만약 일찍이 존재하였다고 하면 그것은 상견(常見)이며,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단견(斷見)이다. 여래는 상견과 단견의 두 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기 때문에 영혼의 유무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은 것이다.
20)
『잡아함경』 권제34 제961경(대정장2, p.245중).
21)
‘수미산과 같은 아견을 일으킬지라도 겨자씨만한 단견도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니, 아견을 일으킬 때에는 능히 온갖 선업을 닦기 때문에 그 허물이 가볍지만, 단견을 일으킬 때에는 온갖 악업을 짓기 때문에 그 허물이 무겁다. 그래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 것이다.’(『구사론기』)
22)
이는 경부사 구마라다(鳩摩邏多, Kumaralāta)의 게송으로 전해진다.
23)
이하 신명(身命)의 일(一)ㆍ이(異)를 제외한 세간의 상(常)ㆍ무상(無相), 세간의 변(邊)ㆍ무변(無邊), 여래 사후의 유ㆍ무에 대한 무기의 의미를 밝힌다.
24)
여기서 네 가지 언표란 세간은 영원하다,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며 영원하지 않다, 영원한 것도 아니고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고 하는 4구(句)를 말한다.
25)
손에 잡은 참새를 죽이겠는가 살리겠는가라고 물었을 경우, 죽일 것이라고 하면 놓아줄 것이고, 살릴 것이라고 하면 죽이려는 마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 같은 물음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는 예증.
26)
세간은 끝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으면서 끝이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끝이 없는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는 4구의 물음.
27)
『잡아함경』 권제34 제965경(대정장2, p.247하).
28)
세간의 모든 이가 출리하는가, 그 일부만이 출리하는 것인가? 이는 바로 세간의 무변(상)ㆍ유변(무상)과 동일한 문제로서, 세간에 끝이 없다(영원)고 하면 전부 혹은 일부의 세간도 출리하는 일이 없을 것이며, 세간에 끝이 있다(영원하지 않다)고 하면 저절로 출리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세간의 모든 이가 출리한다고 하면 출리하지 못하는 어떠한 이도 없어야 할 것이며(저절로 출리하게 될 것이며), 일부만이 출리한다고 하면 일부는 결정코 출리하는 일이 없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29)
『중아함경』 권제13 「설래경(說來經)」(대정장1, p.510중).
30)
『잡아함경』 권제30 제833경(대정장2, p.213하), “만약 성(聖) 제자로서 4불괴정(不壞淨)을 성취하면 목숨을 구하면 목숨을 얻을 수 있고……명종하여 천상에 태어나면 열 가지의 법을 획득한다.”
31)
즉 반열반에 들지 않았을 때에는 보특가라를 보았기 때문에 그것이 존재한다고 말하였지만, 반열반에 든 이후는 아직 보지 못하였기 때문에 여래 사후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는 뜻.
32)
이는 곧 열반에 들게 되면 온은 소멸하지만 자아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주장이기 때문에 ‘이온아(離蘊我)’의 상주론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33)
원문은 ‘제고(諦故) 주고(住故)’. 『바사』(권199, 한글대장경125, p.545)에서는 이를 실의(實義)와 법이(法爾)로 해석하고 있다.
34)
한역 『아함경』 중에서는 출처 불명. 『발지론』 권제20(한글대장경176, p. 497)에 이 같은 사실이 언급되고 있다. “유아(有我)라고 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상견(常見)에 포섭되는 것으로 견고소단이며, 무아(無我)라고 하는 것은 변집견 중의 단견(斷見)에 포섭되는 것으로서 견고소단이다.”
35)
상동『대비바사론』 권제199(한글대장경125, p.546).
36)
본권 주20).
37)
이에 대해서는 본권 주10) 참조.
38)
묘안(Sunetra, 혹은 善眼)에 대해서는 『중아함경』 권제2 「칠일경(七日經)」(대정장1, p.429);『대비바사론』 권제82(한글대장경121, p.159)를 참조할 것.
39)
지금의 온과 옛날의 온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온이 옛날의 도사였다고 설하는 것은 모순이라는 뜻.
40)
옛적의 나(묘안)가 바로 지금의 나(석가)라고 한다면, 그 때 ‘나’(즉 보특가라)는 상주하는 것이어야 하지만, 독자부에서 주장하는 보특가라는 제5의 법장으로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이기 때문에 찰나멸하는 것도 아니지만 상주하는 것도 아니다.
41)
‘이 불은 일찍이 그것을 태웠다’는 말은, 지금의 불이 바로 옛날에 그것을 태운 불이라는 말이 아니라 다만 그것과 동일한 상속상에 있는 불이라는 뜻이다.
42)
만약 진실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하면 부처도 역시 자아관념[我執]을 갖게 될 것이고, 자아관념을 갖는 한 ‘나의 것[我所]’이라는 관념과 그에 따른 애착을 갖는다고 해야 하며(이는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임), 스스로도 해탈도에서도 멀어지게 된다.
43)
부스럼이 몸을 훼손하듯이 독자부의 아견 또한 부처의 참된 성교(聖敎)를 어지럽힐 뿐이라는 힐난.
44)
첫 번째는 바로 독자부의 견해이고, 두 번째는 보광에 의하면 공견(空見)외도, 칭우에 의하면 중관론자의 견해(Madhyamaka citta)이며, 세 번째는 뒤에 설하는 수론(數論)과 승론(勝論)의 견해이다.
45)
어떤 사물에 대한 인식은 일찍이 보았던 것을 기억[憶念, smaraṇa]하여 재인식[記知, pratyabhijñāna, 구역은 更知]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된다. 그럴 때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상속된 기억의 주체는 무엇인가?
46)
즉 일찍이 경험하였던 것을 기억하는 생각들이 종자로서 마음상에 상속 전변하다가 공능의 차별을 일으킬 때 기억이라는 결과가 낳아지게 된다.
47)
천수(Devadatta)는 하늘에 빌어 얻었기 때문에 ‘천수’이며, 사수(Yājñadatta)는 제사를 지내 얻었기 때문에 ‘사수’이지만, 보통 ‘갑돌이’처럼 인명(人名)의 일반적 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48)
마음은 찰나멸하여 전후가 동일하지 않지만 동일한 상속신 중에 인과적 관계로서 상속하기 때문에 일찍이 전찰나의 마음이 본 것을 후찰나의 마음이 능히 기억하여 알 수 있다.
49)
즉 기억에 따라 어떤 대상을 파악하였다고 할 때 그것은 다만 기억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억하였던 작자에 의해 파악된다는 뜻.
50)
기억의 원인이 되는 심상속의 전변과 차별의 힘(즉 종자)이 후찰나의 기억으로 하여금 대상을 파악하게 하기 때문에 전찰나의 기억의 원인이 바로 작자가 된다.
51)
주인이 그에게 소속된 어떤 것을 부린다고 함은 이미 획득되었거나 생겨난 것에 대해서이지,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을 생겨나도록 하기 위해 부린다고 하는 말은 있을 수 없다는 힐난.
52)
기억과 그것을 통한 재인식은, 주체와 소유의 문제는 동일하며 단지 그 생기의 인연만이 다를 뿐이다. 즉 앞서 논설한 대로 기억은 그것(기억의 대상)을 조건으로 하는 작의(作意)와, 과거의 대상과 지금의 그것이 서로 유사하며 양자가 서로에게 소속된다는 생각 등을 갖고, 의지하는 몸이 차별되지 않으며, 근심과 산란 등의 인연에 의해 기억의 공덕이 손상되거나 괴멸되지 않은 마음의 차별로부터 일어난다. 그러나 재인식은 식(識)의 종자를 인(因)으로 삼고, 근(根)과 경(境)을 연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다.
53)
여기서 어떤 이는 보광에 따르면 수론(數論, Saṃkhya)이며, 칭우에 따르면 문법학자(Vaiyākaraṇa, 語典家)이지만, 사실상 앞서 독자부와의 대론의 연장이라 할 수 있다.
54)
찰나에 생멸하는 제온의 상속이 다른 처소에 생겨나는 것을 ‘간다’고 말하며, 그 원인이 되는 전찰나의 제온을 ‘가는 자’라고 이름할 뿐 제온과는 별도로 존재하는 실유의 자아(가는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55)
보리(결과)는 씨앗(원인)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으며 다만 그것에 따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이듯이 식(識) 또한 그것의 원인이 되는 대상에 따라 유사하게 생겨난 것일 뿐 그것에 대해 어떠한 작용도 하지 않는다. 즉 원인에 따르는 것이 결과의 작용은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식이란 다만 대상(色 내지 法)을 전체적으로 취[總取]하는 것으로(본론 권제1, p.30 주61 참조) 어떤 한 대상의 형상을 지각하고 표상 판단 확인 하는 등의 개별적 작용은 심소의 역할이다.
56)
능연인 식(識)상에 소연이 되는 색이나 향의 형상이 나타나는 것으로, 그것을 다만 ‘요별’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57)
3계 12심(욕계 선ㆍ불선ㆍ유부ㆍ무부무기의 4심과 상 2계 각각에 불선을 제외한 3심, 그리고 유학ㆍ무학심)의 상생(相生) 관계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7(p.346 이하) 참조.
58)
22심의 상생 관계에서 생겨나야 할 마음과 생겨나지 않을 마음은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에 항상 동류(同類)로서 상속한다.
59)
여기서 ‘닦은 힘[修習力, bhāvanābala]’이란 반복하여 익힌 힘을 말하는 것으로, 이를테면 습관력을 말한다.
60)
즉 이러한 주이(住異)의 상(相)은 닦은 힘이 강력한 마음을 억제하고, 그것에 의해 일어난 중(中)ㆍ하(下)의 힘을 지닌 또 다른 마음에도 수순하여 점차 미약하게 하기 때문에 닦은 힘이 강력한 마음이 항상 자신의 과보를 산출하는 것은 아니다.
61)
이 같은 겸양의 탄식은 본론 권제4(p.163)에서도 언급된다. “제(諸) 심ㆍ심소의 각기 다른 상은 너무나 미세하여 그 하나하나의 상속을 분별하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1찰나에 동시에 존재함에 있어서랴!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유색(有色)의 온갖 약을 색근(色根, 즉 舌根)으로 취하여 그 맛의 차별을 알기도 어렵거늘 하물며 어떤 구체적 형태도 갖지 않는 무색의 법을 오로지 각혜(覺慧, 관념)만으로 파악함에 있어서랴!”
62)
여기서 어떤 부류의 외도란 승론(勝論, Vaiśeṣika)을 말한다. 즉 그들은 세계를 해명함에 있어 실체[實, dravya]ㆍ속성[德, guṇa]ㆍ운동[業, karma] ㆍ보편[同, sāmānya]ㆍ특수[異, viśeṣa]ㆍ화합[同, samavāya]의 6범주[句義, padārtha]를 설정하고, 실체를 다시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허공ㆍ시간ㆍ방위ㆍ자아[我, ātman]ㆍ의식[意, manas]으로 분류하였다. 여기서 자아 즉 아트만이란 ‘나’라고 하는 관념의 주체가 되는 것으로, 지각이나 쾌ㆍ불쾌ㆍ욕구ㆍ혐오ㆍ노력ㆍ행(行, 잠재적 인상)ㆍ공덕ㆍ불공덕과 같은 속성의 기체(基體)가 된다. 다시 말해 그러한 속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트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의식(즉 마음)은 지각 등을 일으키는 하나의 조건이 될 뿐 지각의 주체는 아니다. 다시 말해 의식은 그러한 속성과 화합하지 않고서 지식을 일으키는 것으로(『승종십구의론(勝宗十句義論)』, 한글대장경250, p.587 참조), 이를테면 아트만이 감관과 화합을 통해 얻게 되는 우연적 성질로 간주된다. 예컨대 아트만이 신체로부터 분리되거나 깊은 수면 상태에 빠질 때에는 의식의 성질을 갖지 않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광(普光)은 “그러한 마음은 바로 자아의 속성[德]이기 때문이다”고 해석하고 있다.(『구사론기』 권제30, 대정장41, p.449중)
63)
앞서 수론이 불교의 무아 상속설에 대해 힐난한 것을 승론의 유아론에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다는 뜻.
64)
즉 전후 찰나로 상속하는 의식의 다양성은 자아와 의식의 ‘결합’의 다양성에 근거한 것이라고 한다면, ‘결합’이라는 존재의 실재성을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그 같은 논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뜻. 승론에 있어 결합[合, saṃyoga]이란 실체가 갖는 24속성 중의 하나로서, 서로 분리된 두 존재가 접하게 되는 것을 말하므로(『승론십구의론』, 앞의 책, p.589) 실재하는 자아와 의식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지만 불교에 있어 그 같은 자아와 의식 그리고 결합의 실재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참고로 6구의 중의 ‘화합(samāvaya)’이란, 예컨대 항아리는 이미 실체ㆍ속성ㆍ운동ㆍ보편ㆍ특수 등이 화합된 상태로서 지시되는 개물이듯이 단지 개념상으로만 분리될 수 있는 불가분리(不可分離, 즉 內屬)의 원리를 말한다.
65)
『승론십구의론』, 앞의 책, p.589.
66)
자아와 의식이 결합한다고 하는 것은 의식이 존재하지 않는 자아와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 의식이 결합한다는 말로서, 그것은 바로 자아의 변만성(遍滿性)을 부정하는 것이며, 이는 곧 그들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는 것이다.
67)
자아와 의식이 결합하였을 경우, 의식이 신체의 특정 부위의 감관으로 옮겨 갈 때 자아도 역시 옮겨 가야 할 것이고, 의식이 소멸할 때 역시 소멸해야 한다. 그럴 경우 자아는 운동을 갖지 않으며, 상주(常住)하는 것이라는 그들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
68)
즉 자아는 편재(遍在)하지만 전체적으로 결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결합한다고 할 경우에도 역시 자아는 단일한 실체로서 더 이상 부분을 갖지 않는다는 그들 종의에 위배된다.
69)
자아와 의식은 다 같이 단일 상주의 실재인데, 양자의 결합으로써 어떻게 전후 차별되는 다양한 의식의 생기를 해명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힐난.
70)
승론에서의 지각[覺, buddhi]은 24속성 중의 하나로, 그 같은 지각의 다양한 차별에 의해 의식이 다양하게 생겨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의식의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어떻게 다양한 지각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동일한 난점이 지적될 수 있다.
71)
승론의 24속성 중의 하나인 행(行, saṃskāra)은 말하자면 잠재세력과 같은 것으로, 여기에는 반복된 지식의 습득에 의해 생겨나는 인상(印象, bhāvanā)과 반복된 운동에 의해 생겨나는 타성(vega)이 있는데, 전자가 기억이 원인이 되는 행[念因]이라면 후자는 작용의 원인이 되는 행[作因]이다. 곧 이와 같은 다양한 ‘행’의 차별을 전제로 하는 경우, 자아의 설정 없이 의식만으로도 그것의 다양성을 충분히 해명할 수 있다는 것이다.
72)
즉 다양한 의식의 차별은 ‘행’에 의해 충분히 해명될 수 있음에도 여기에 다시금 자아를 설정하는 것은 약으로도 고질병을 충분히 치료할 수 있음에도 ‘보사하(phūṭ svāhā, 吉祥의 뜻)!’라는 주문을 별도로 외우는 것과 같다는 힐난.
73)
자아는 마치 그림을 지니는 벽처럼, 과일을 담는 그릇처럼 마음과 행을 능히 유지하는 소의(āśraya, 근거)가 된다고 한다면, 양자는 색법의 경우처럼 서로를 장애해야 할 것이며, 그림과 벽처럼 개별적 존재여야 한다. 그렇지만 자아는 어떠한 장애도 갖지 않으며, 편재하는 것이므로 그러한 비유는 적절하지 못하다.
74)
지(地)가 색ㆍ미ㆍ향ㆍ촉의 소의가 되듯이 자아 또한 마음과 행의 소의처가 된다는 뜻. 승론에 따르면 9실체 중의 지(地)란 색ㆍ미ㆍ향ㆍ촉의 네 속성을 갖는 것이다.
75)
예컨대 ‘수레에 바퀴 등이 존재한다’고 하는 것은 바퀴 등을 떠나 수레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바퀴 등이 바로 수레임을 이해시키기 위해 그렇게 설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세간에서 ‘목상신(나무에 형상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할 경우, 형상과는 별도의 나무가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형상의 재질이 바로 나무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76)
즉 자아는 단일하지만 행(行)의 다양한 차별에 근거함으로써 다양한 지식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면, 무엇이 장애하여 일시에 일체의 지식을 낳지 않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77)
행(行)에는 그 세력이 강력한 것과 미약한 것이 있어 강력한 것이 먼저 일어나 미약한 것의 생기를 장애하기 때문에 항상 일시에 일체의 지식(결과)이 생겨나지 않게 된다.
78)
강력한 작용(행)이 먼저 결과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항상 그것으로부터 결과가 낳아져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어느 때에는 미약한 작용으로부터도 결과가 생겨나게 되는 것인가 하는 물음.
79)
앞서 수론과의 대론에서 여인의 다양한 마음을 예로 들면서 그 같은 마음이 전후로 일어나는 것은 반복하여 닦은 힘[修習力]의 강도에 따른 것이라고 하였다.(주59 참조)
80)
즉 승론의 행(行, saṃskāra)은 반복된 인식과 운동에 의해 형성된 잠재세력으로(주71 참조), 그것에 의해 의식의 다양한 차별을 해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사실상 불교에서 말하는 반복된 업의 훈습력(vāsanā, 혹은 bhāvanā)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불교와 마찬가지로 자아를 별도로 설정할 필요가 없다는 뜻.
81)
여기서 ‘기억’은 속성의 범주[德句義, guṇa-artha] 스물네 가지 가운데 행(行)에 포섭된다. 즉 ‘행’에는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과 작업(作業)의 원인이 되는 행이 있는데(주71 참조),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이란 반드시 자아와 화합하는 것으로서, 그 밖의 실체 예컨대 마음은 기억의 조건이 될 뿐 주체(즉 所依止)가 아니기 때문에 기억과 화합하지 않는다.(주62 참조) 그리고 그러한 기억의 원인이 되는 행[念因]은 현량과 비량의 지식에 근거한 것으로, 자아와 의식의 결합을 원인으로 하여 일어난다.(『승종십구의론』, 앞의 책, p.602 참조)
82)
유부에 의하는 한 능히 자기만의 상[自相]을 갖는 개별적 존재 즉 법(dharma)은 모두 실체(dravya)로서 실유의 존재이다. 이를테면 기억[念]이란 대상을 명기하여 잊어버리지 않게 하는 작용을 갖는 실체로서, 열 가지 심대지법(心大地法)의 하나이다.(본론 권제4, p.163 참조)
83)
즉 예류과 등 네 가지 사문의 과보는 무루의 5온과 택멸무위를 본질로 한다. 참고로 기억[念]은 심소법으로 행온에 포섭된다.
84)
벽이 그림의 소의가 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자아가 기억의 소의가 되는 것은 아니다.
85)
즉 ‘자아’라고 하는 것은 다만 자아관념[我執]의 대상이 되는 것일 뿐 객관적으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86)
즉 ‘나’라고 하는 관념은 제온에 대한 애탐의 결과이며, 또한 반드시 제온에 대한 지각과 관계함으로써, 다시 말해 제온에 대한 지각과 동일한 공간[同處]에서 일어난다.
87)
승론에 의하면 자아는 희다는 ‘색’(24속성의 하나)의 기체(基體, 즉 소의)로서 그것과 분명히 차별되지만, 현실의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든 ‘나’ 즉 자아의 관념은 지각과 관계하여서만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실유의 존재가 아니라 가설적 존재[假有]이다.
88)
‘희다’는 등의 지각을 일컬어 ‘나’라고 하는 것은 다만 은유일 뿐 그것이 진실의 자아는 아니다. 예컨대 신하 등이 능히 왕을 지켜 줄 때 왕이 ‘그대는 나의 몸이다’고 말하지만, 그 때 ‘나의 몸’은 다만 은유의 수사일 뿐 신하가 바로 왕의 몸은 될 수 없다는 뜻.
89)
자아관념[아집]은 승론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 자체로서 실재하는 자아를 직접적인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몸 등의 5온을 대상으로 삼을 뿐이다.
90)
즉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원인(몸)과 결과(‘나’라는 관념)로서 서로 관계하지만, 다른 이의 몸에 대해서는 그러한 인과관계가 없다.
91)
이에 관하여서는 독자부와 ‘기억’의 주체에 대해 논란하면서 분별하였다.
92)
아집 즉 ‘나’라고 하는 관념은 염오심으로부터 낳아지는데, 그 같은 염오심은 무시 이래 선행된 아집에 의해 물든 것으로, 지금에 이르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하여 보다 강화된 새로운 아집을 낳게 되는 것이다.
93)
어떠한 고ㆍ낙수도 안(眼) 등 6근을 근거로 하여 생겨나기 때문에 고락의 근거는 실유의 자아가 아니라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意)의 6내입처라고 설한 것이다.
94)
여기서 ‘법상을 분별하는 자’란 비가라(毘伽羅, Vaiyākaraṇa), 즉 문법학자로서, 언어이론[聲明論]의 해석을 통해 제법의 성상(性相)을 분별하는 자를 말한다.
95)
앞서 논설하였듯이 후찰나의 식이 생겨나는 것은 감관과 대상, 혹은 전찰나의 식에 따른 것으로, 자아에 의한 것이 아니다.
96)
여기서 ‘비정처’(즉 非有情數)란 유정처에 상대되는 말로서 나무나 돌과 같은 감수작용을 갖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는 즉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유정 뿐만 아니라 그러한 존재에 있어서도 죄업이나 복업이 일어나야 하지 않는가 하는 물음이다.
97)
법(dharma)과 비법(adharma)은 승론의 24속성 중의 하나이다. 『승종십구의론』(앞의 책, p.592)에 따르면 법에는 능히 유전(流轉)하게 하는 법과 능히 환멸(還滅)하게 하는 법이 있는데, 전자는 자아와 화합하여 참으로 애호할 만한 신체 등의 즐거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고, 후자는 염오의 인연을 떠나 정지(正智)의 기쁨을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그리고 비법은 자아와 화합하여 참으로 애호할 만하지 않은 신체 등의 괴로움과 사지(邪智)를 초래하는 원인이 된다. 즉 승론에서는 업이 괴멸할 때 이러한 법과 비법이 자아에 의지하여 미래의 선악의 과보를 낳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본론 권제13(p.596 주22 참조)에서도 찰나의 상속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 법과 비법이 언급되고 있다.
98)
즉 자아와 법ㆍ비법의 관계는 세간에서 현견되는 그림과 벽 등의 관계와는 동일하지 않다. 주73) 참조.
99)
유부에서는 과거로 낙사(落謝)한 업, 즉 무표색(無表色)이 미래의 과보를 낳는다고 함으로써 업의 인과상속을 해명하였지만(본론 권제1, p.21), 논주 세친은 ‘종자상속의 전변과 차별’이라는 경량부의 설을 쫓아 이같이 설한 것이다.
100)
종자(bīja) 상속(saṃtati)의 전변(pariṇāma)과 차별(viśeṣa)에 대해서는 본론 권제4 , p.197 주115)를 참조할 것.
101)
이는 ‘차별’을 해명하면서 그렇다면 어떠한 업이 먼저 과보를 낳게 되는지에 대해 분별한 것이다. 여기서 유취식(sopādāna vijñāna)이란 ‘취’ 즉 번뇌를 갖는 식으로 유루의 식을 말한다. 즉 유루의 식으로써 명종할 때, 그의 색심(色心) 중에 능히 후유를 초래할 만한 다수의 업에 의해 인기된 훈습의 공능(즉 종자)을 지닐지라도 무거운 업(5역죄와 같은 업)과 목숨을 마치기 직전에 지은 업과 자주 익힌 업에 의해 인기된 종자가 명료하기 때문에 그 순서대로 먼저 과보를 낳게 되고, 그렇지 않은 업, 이를테면 가벼운 업과 일찍이 일어났던 업과 자주 익히지 않은 업은 지은 순서에 따라 나중에 낳게 된다.
102)
불염오성의 종자는 대치도가 일어날 때 능히 속박하는 성질은 끊어지지만 그 자체는 끊어지지 않고 여전히 여과(與果)의 공능을 일으키며, 그 후 무여열반에 들 때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103)
즉 숙변의 차별을 일으켜 싹을 틔우게 되는 종자와 유사하기 때문에 세간에서는 열매를 ‘종자’라고 하지만, 모든 열매가 종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즉 열매가 열매를 낳는 것이 아니라 숙변(熟變)의 차별을 일으켜 종자가 된 열매만이 열매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104)
열매로부터 또 다른 열매가 직접적으로 생겨나는 일이 없듯이(비유) 이숙과로부터 이숙과가 직접적으로 낳아지는 일은 없다(법).
105)
한 귀퉁이의 말씀[方隅]이란 광대한 아비달마 논 중의 극히 일부의 말씀이라는 뜻으로, 마치 독을 신체의 일부분에 바르면 그 기운이 몸 전체로 퍼지듯이 일부의 말씀으로 조그마한 지혜의 문을 열게 되면 그것은 바로 깊은 깨달음의 지혜로 번져 나가기 때문에 본론이 지혜의 독의 문을 열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106)
이상의 게송은 본론 전체(혹은 「파아품」)의 유통분(流通分)으로서, 제1송은 청정 열반의 원인이 되는 무루성도를 찬탄하고 외도의 악견을 버릴 것을 권유한 것이고, 제2송에서는 무아법성의 도를 찬탄하면서 우매한 외도는 이를 관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밝혔으며, 제3송에서는 다시금 광대한 아비달마의 한 단면에 불과한 이 논을 인연으로 하여 면학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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