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빛 물결 속에서, 뉴욕의 봄을 맞이하며
뉴욕의 겨울이 끝나고, 아직은 찬 기운이 감도는 3월. 하지만 거리에는 어느새 봄이 온 듯 초록빛 물결이 출렁인다. 세인트 패트릭의 날. 매년 3월 17일이면, 뉴욕은 마치 작은 아일랜드가 된 듯 축제의 도시로 변한다.
오늘은 나의 쉬는 날. 주말 근무를 마친 후, 오랜만에 느껴보는 여유로운 아침이었다. 테니스 코트를 향할 때는 비가 내려 촉촉한 공기가 감돌았지만, 퍼레이드를 보러 나설 즈음엔 보슬비가 잦아들었고, 맨해튼 거리는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마치 하늘마저도 오늘을 위해 준비를 마친 듯, 비는 서서히 멈추고,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봄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맨해튼 5번가를 따라 걷다 보면, 어느새 내 두 눈에는 거대한 초록색 파도가 넘실거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초록색으로 물든 사람들, 얼굴에 샴록(클로버) 문양을 그리고 거리로 쏟아져 나온 군중, 그리고 그들의 흥겨운 웃음소리, 뉴욕에서 가장 오래되고 큰 퍼레이드답게 행렬은 웅장하고도 정겨웠다. 1762년부터 이어져 온 세인트 패트릭 데이 퍼레이드는 단순한 축제를 넘어, 아일랜드 이민자들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살아있는 유산이었다.
나는 바리게이트 너머로 연주되는 음악에 귀를 기울였다. 저 멀리서 울려 퍼지는 백파이프의 중후한 선율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애잔하면서도 힘 있는 멜로디가 도심을 가득 채운다. 다양한 학교와 단체에서 참여한 밴드들이 각자의 전통 의상을 입고 북을 치고 피리를 불며 행진한다. 나는 순간, 뉴욕이 아니라 아일랜드의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뉴욕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도시다. 수많은 민족과 문화가 한데 얽혀 있지만, 오늘만큼은 모두가 ‘아일랜드인’이 된다. 이곳에서는 국적도, 언어도 중요하지 않다. 축제의 날에는 누구든 환영받고, 함께 웃고 즐길 수 있다. 거리에서 만난 낯선 이들과 가볍게 눈을 마주치며, 초록색 모자를 쓴 아이들과 장난을 치며, 나는 이 순간이야말로 뉴욕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퍼레이드 행렬이 길게 이어지는 동안, 나는 천천히 걸으며 5번가를 따라 펼쳐진 맨해튼의 스카이라인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초록빛으로 물든 도시, 즐거운 웃음소리, 그리고 여전히 차갑지만 어느덧 봄기운이 감도는 공기,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오늘의 뉴욕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고 있었다.
세인트 패트릭의 날을 기념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사람들은 거리의 아이리쉬 펍에서 아일랜드 전통 음악을 들으며 춤을 추고, 기네스 맥주를 마시며 흥을 돋운다. 하지만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저 퍼레이드의 흥겨운 분위기를 만끽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술잔을 들지 않아도, 아이리쉬 특유의 따뜻한 정서와 축제의 열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이런 축제의 진짜 묘미는 특정한 종교나 민족적 배경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함께 즐긴다’는 데 있다. 오늘은 서로를 축하하고, 모르는 사람과도 기분 좋은 인사를 나누며, 낯선 이들과도 같은 마음으로 하나 되는 날이다. 뉴욕은 늘 바쁘고 치열한 도시지만, 이런 날만큼은 모두가 잠시 걸음을 늦추고, 축제의 순간을 온전히 즐긴다.
나는 여러 번 이 축제를 경험했지만, 다시 찾고 싶은 이유는 늘 같다. 매번 새로운 사람들과의 만남, 새로운 추억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뉴욕은 결코 같은 모습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도시는 지루할 틈이 없다. 계절마다, 순간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나를 반겨주는 곳. 어느새 나의 고향이 되어버린 맨해튼에서, 나는 오늘도 이 도시가 주는 선물을 가슴 깊이 새긴다.
아일랜드인이든 아니든, 뉴욕에 사는 모든 이들이 이날만큼은 초록빛 축제 속에서 하나가 된다. 그리고 나는, 그 한가운데 서서 이 도시가 주는 기쁨과 감사를 다시금 느낀다.
오늘의 세인트 패트릭 퍼레이드는 나에게 또 하나의 소중한 추억을 선물했다. 초록색 물결 속에서 느낀 흥겨운 에너지와 사람들의 미소는 오랫동안 내 마음속에 남을 것이다. 뉴욕의 매력은 이런 순간들에서 더욱 빛나는 것 같다.
초록의 물결 속에서, 뉴욕의 봄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