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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당집 제15권[2]
[대매 화상] 大梅
마조의 법을 이었고, 명주明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법상法常이며, 양양襄陽 사람이다. 형주의 옥천사에서 공부를 한 뒤 계를 받자마자 뭇 경전을 두루 통달하여 대승과 소승의 경론을 강의하였으나 다문多聞이 말재주에는 보탬이 되나 정신을 깨닫는 일에는 헛된 짓임을 깨닫고, 제방으로 다니면서 도를 묻기 시작했는데, 강서에서 마조 대사가 학도學徒들을 제접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곧장 그 법연法筵으로 나아갔다.
그리하여 어느 날 다음과 같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니라.”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그대가 잘 보호해 가져라.”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법입니까?”
“역시 그대의 마음이니라.”
또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마조가 대답했다.
“그대의 마음이 그것이니라.”
“조사는 뜻이 없습니까?”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만 하면 갖추어지지 않는 법이 없으리라.”
선사는 이 말끝에 바로 현현한 진리를 활짝 깨닫고 곧 석장錫杖을 들고 행각行脚의 길을 떠났다. 대매산大梅山 자락에 이르러서 머물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약간의 곡식 종자를 얻어 한 번 깊은 산으로 들어간 뒤 다시는 세상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뒤 염관 화상이 출세出世한 무렵, 어떤 스님이 주장자감을 찾아 산을 헤매다 길을 잃었는데, 어떤 사람이 풀 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묶고서 작은 집에서 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선사는 그 스님을 보자마자 먼저 인사를 했으나 말을 더듬었다.
그 스님이 그 연유를 캐물으니, 선사가 말했다.
“마조 대사를 보았기 때문이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여기에서 얼마나 살았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몇 해인지는 모르나 다만 사방의 산이 푸르렀다가 다시 누래지고, 푸르렀다가는 다시 누래지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거듭하기 30여 차례나 된다.”
스님이 다시 물었다.
“마조에게 어떤 법을 얻으셨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마음이 곧 부처라 하셨느니라.”
그 스님이 산에서 나가는 길을 묻자, 선사가 개울 쪽을 가리키고는 자리를 떴다. 그 스님이 염관에게로 돌아와서 앞의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니, 염관이 말했다.
“내가 기억하건대 강서에 있을 적에 어떤 스님이 부처와 법과 조사의 뜻을 묻는 것을 보았는데, 마조가 ‘그대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니라.’ 하셨다. 그 뒤로 30년이 지난 오늘까지 그 스님이 있는 곳을 알지 못했으니, 행여 그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는 몇 사람으로 하여금 옛길을 따라 길을 뚫고 찾아가 만나거든 ‘마조 대사께서는 요즘은 마음도 아니요, 부처도 아니라 말씀하십니다’ 하라고 시켰다.
그 스님들이 염관의 분부대로 가서 물으니, 선사가 말했다.
“그가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라 한대도, 나는 여전히 마음이 곧 부처라 하노라.”
염관이 이 말을 전해 듣고 찬탄하여 말했다.
“서산西山의 매실이 익었으니,그대들은 가서 마음대로 따먹어라.”
이런 일이 있은 지 2, 3년도 되기 전에 대중이 몇 백 명에 이르렀고, 무릇 학자를 제접하는 대답이 흐르는 물과 같았다.
협산夾山과 정산定山이 대매산大梅山으로 갔다. 길을 걷다가 정산이 말했다.
“생사 속에 부처가 없으면 생사가 아니다.”
협산이 긍정하지 않고 말했다.
“생사 속에 부처가 있으면 생사에 미혹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서로가 긍정하지 않고 대매 화상을 찾아갔다.
협산이 물었다.
“우리 두 사람의 말 중에 어느 것이 가장 적절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하나는 적절하고, 하나는 엉성하니라.”
협산이 다시 물었다.
“어느 쪽이 적절합니까?”
협산이 자꾸 캐묻는 것을 보고 선사가 말했다.
“우선 갔다가 내일 오너라.”
협산이 다음날 와서 물었다.
“어제 화상께서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어느 것이 적절합니까?”
선사가 말했다.
“묻는 이는 적절하지 않고, 적절한 이는 묻지 않는다.”
어떤 사람이 염관鹽官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서쪽에서 오신 뜻입니까?”
염관이 대답했다.
“서쪽에서 오신 이는 뜻이 없느니라.”
그 스님이 선사에게 와서 이야기하니, 선사가 말했다.
“하나의 관 속에다 두 시체를 담을 수는 없느니라.”
선사가 임종할 때에 다람쥐들이 울부짖으니, 대중들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이 물건은 다른 물건이 아니다. 너희들은 잘 보호해 가져라. 나는 지금 떠난다.”
선사는 말을 마치자 방문을 닫고, 이내 열반에 들었다. 괄주括州의 자사 강적江勣이 비문을 지었다.
[영태 화상] 永泰
마조의 법을 이었으며, 휘는 영서靈瑞요, 성은 황黃씨며, 형양衡陽 사람이다. 11세에 남악南岳에서 출가하여 18세에 사미가 된 뒤에 대적大寂에게 법을 물어 심요心要를 가만히 깨달았다. 24세에 쌍봉사雙峰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다시 대적大寂의 법상으로 돌아왔다. 정원貞元 1년 병인년丙寅年에 청주靑州를 지나는데, 주목州牧인 장윤張胤이 용흥사龍興寺에 머물러 줄 것을 청하였다.
원화元和 때에 청주에 흉년이 들어 사람들이 모두 굶주려 많이 쓰러지니, 선사가 겨드랑이를 자리에 붙이지 않고 사람들 보기를 자기의 슬픔같이 여겨 부자들을 이끌어 보시를 행하게 하였다. 이로부터 ‘외로운 이를 돕는 사람’이라는 맑은 명성이 나자 사람들이 앞 다투어 몰려들었다. 선사가 왼쪽 팔에 살 고리[肉環]가 있어서 누울 때에 항상 오른쪽 겨드랑이를 땅에 대니,
점자占者가 말하기를,
‘이는 인간과 하늘의 스승이다’ 하였다.
나중에 상서尙書인 설평薛平이 스승으로 모셨다. 선사는 23년 동안이나 청사靑社 지방을 크게 교화하였으므로 청주靑州 화상이라 불렸다.
양양襄陽 지방을 지나는데, 염사廉使 우원익牛元翼이 존중히 예를 올리면서
“인간 가운데의 사자왕獅子王이로소이다” 하고는 감통사感通寺에 머물기를 청하였다.
또 형저荊渚에 이르니, 복야僕射 왕잠王潛이 영태사永泰寺에 머물기를 청하니, 금언金言을 펴 도법을 천명하여 교화를 크게 떨쳤다.
대화大和 3년 무자년戊子年 6월 3일에 입적하니, 춘추春秋는 69세였다. 다비茶毘를 하여 사리 5천여 개를 얻어 곽동郭東에다 탑을 세웠다. 유가劉軻가 비문을 지었고, 칙명으로 도경道鏡 선사라 시호를 내리고, 탑호는 보진寶眞이라 하였다.
[동사 화상] 東寺
마조의 법을 이었고, 담주潭州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여회如會이며,소주韶州 시흥始興의 곡강현曲江縣 사람이다. 대력大曆 8년에 국일國一 선사의 문하에 머물다가 나중에 대적大寂에게로 돌아오니, 대중이 모두 그 덕망을 흠모하여 숲같이 모여들어 평상이 부러졌으므로 사람들이 절상회折床會라 불렀다. 나중에 장사長沙의 동사東寺에서 살면서 거룩한 법을 크게 떨쳤다.
“대적大寂 선사가 세상을 떠나신 뒤로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기록만 하지 말을 떠난 뜻은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것 이외에는 다른 말씀이 없는 것으로 여긴다. 일찍이 선사를 스승으로 섬겨본 적도 없으면서 그저 그림자와 발자취만을 따른다. 부처가 어디에 머무르기에 마음 그대로라 하는가?
‘마음이란 환쟁이와 같다’ 했으니, 부처를 비방함이 너무도 심하구나.”
매일 통탄하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마음은 부처가 아니요, 지혜는 도가 아니다. 검劍을 잃은 지 오래인데, 이제 와서 뱃전에다 표시를 하는구나.”
이때부터 동사東寺를 선굴禪窟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승상承相인 최윤崔胤 공이 그 풍도를 높이 흠모하여 몸소 와서 선사에게 물었다.
“스님께서는 무엇을 얻고자 하십니까?”
“성품 봄[見性]을 얻고자 하였느니라.”
“스님께서는 성품을 보셨습니까?”
“성품을 보았느니라.”
이때 선사는 눈병을 앓고 있었는데,
공이 조롱하듯 물었다.
“성품을 보셨다 말씀하셨는데, 그 눈은 어찌된 것입니까?”
“성품을 보는 것은 눈이 아니니, 눈병이 무슨 방해가 되겠는가?”
공이 기뻐하며 절을 하였다.
또 어느 날 선사를 따라 불전佛殿에 갔다가 참새가 부처님 머리 위에 똥을 싸는 것을 보고,
상공이 물었다.
“저 참새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있다.”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부처님의 머리 위에다 똥을 쌉니까?”
“그에게 불성이 없다면 어찌하여 새매의 머리에다 똥을 싸지 않는가?”
상공이 이로부터 선사를 스승으로 예우하였다.
나중에 장경이 이 말을 듣고 말했다.
“험준하구나.”
선사가 남전南泉에게 물었다.
“요즘, 어디서 떠났는가?”
남전이 대답했다.
“요즘 강서에서 떠났습니다.”
“그러면 마조 대사의 진영이라도 하나 얻어 왔는가?”
“가지고 왔습니다.”
“가지고 왔거든 노승에게 보여 보라.”
“그저 이것뿐입니다.”
이에 선사가 말했다.
“등 뒤의 것이로구나.”
이에 남전이 그만두어 버렸다.
그 후에 장경이 말했다.
“화상은 마치 아무것도 모르시는 분 같구나.”
보복이 남전을 대신하여 말했다.
“하마터면 화상의 이 경지에 이르지 못할 뻔하였습니다.”
선사가 앙산仰山에게 물었다.
“어디서 떠났는가?”
앙산이 대답했다.
“광남廣南에서 떠났습니다.”
“듣건대, 광남에는 진해명주鎭海明珠라는 것이 있다는데, 사실인가?”
“그렇습니다.”
“그 구슬은 어떤 것인가?”
“보름께는 숨고, 그믐께는 나타납니다.”
“그 구슬을 갖고 왔는가?”
“갖고 왔습니다.”
“갖고 왔다면 노승에게 보여다오.”
이에 앙산이 대답했다.
“어제 위산에 갔더니, 위산 화상께서 저에게 이 구슬을 달라 하시기에 당장 대답할 말이 막혔었습니다.”
이에 선사가 한 번 껑충 뛰고 어루만지며 말했다.
“참 사자獅子 새끼로다, 사자 새끼로다.”
그리고는 또 말했다.
“부끄럽구나, 노승이 위산만은 못하구나. 그대는 위산의 제자이다.”
앙산이 계를 받은 뒤, 다시 와서 뵈려고 막 법당을 올라서는데, 선사가 말했다.
“이미 만나 보았으니더 이상 올라올 필요가 없다.”
“그렇게 만나서야 부당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법당으로 들어가서 문을 닫아 버렸다.
나중에 앙산이 이 일을 위산에게 이야기하니, 위산이 말했다.
“그대는 그게 무슨 마음씨였던가?”
선사는 장경長慶 계묘년癸卯年에 입적하니, 춘추는 90세였다. 이때 우물물들이 모두 마르고, 이상한 향기가 가득했다.
성남城南의 옛터에 탑을 모셨는데, 염사廉使 이호공李翶公이 성 근처의 탑을 모두 헐되 선사의 탑만을 남겨 두고 공고하기를,
“이 탑만을 남겨 두어서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를 분별하노라” 하였다. 유가劉軻가 비문을 지었다.
[등은봉 화상] 鄧隱峰
마조의 법을 이었으며, 건주建州의 소무현邵武縣 사람이다.
남전이 시중하여 말하였다.
“구리 병은 경계이다. 그 병 속에 물이 있는데, 내가 물을 요구하니 경계를 움직이지 말고 물을 가지고 오너라.”
이에 선사가 병을 들고 남전 앞으로 가서 물을 쏟아 버렸다.
선사가 오대산五臺山 금강굴金剛窟까지 가서는 굴 앞에서 거꾸로 서서 입적하니, 대중은 성스러운 굴에 방해가 된다고 여겨 자리를 옮겨 다비茶毘를 하려 했으나 끝내 옮기지를 못했다.
이에 앞서 그의 친누이가 출가하여 여승이 되었는데, 그 근처에 있었다. 그는 오라버니의 행적을 익히 알고 있었으므로 가까이 다가와서 꾸짖었다.
“사형께서는 평생 동안 사람됨이 법률에 의지하지 않더니, 죽은 뒤에도 역시 세상 인정을 따르지 않으시는구려.”
그리고는 손으로 밀어 쓰러뜨리니, 그제야 대중이 다비를 할 수 있었고, 탑을 북대北臺 꼭대기에 세웠다. 선사는 평생을 지내는 동안 게송 하나만을 남겼으니, 다음과 같았다.
외줄 거문고를 그대 위해 퉁기니
송백松栢은 길이 푸르러 추위를 겁내지 않네.
금金과 쇳돌[鑛]이 서로 섞였으나 성품은 본래 다르니
그대 앞에서 마음대로 가져 볼거나.
[귀종 화상] 歸宗
마조의 법을 이었고, 강주江州의 여산廬山에서 살았다. 선사의 휘는 지상智常이며, 성씨는 알 수 없다. 선사는 오랫동안 남전과 도반이었는데, 신채神彩가 기묘하고 이상하여 보는 이가 모두 “왕이 될 상호다” 하고 수군거렸으므로 드디어 독약을 눈에 쏘여 눈을 붉게 하니, 사람들이 ‘눈 붉은 귀종歸宗 화상’이라 부르게 되었다.
백白 사인舍人이 강주江州 자사刺史로 와서 사뭇 존경을 다하였다. 한번은 사인이 선사를 뵈러 왔을 때, 선사가 벽을 바르고 있다가 고개를 돌리면서 말했다.
“군자君子 유생儒生인가, 소인小人 유생儒生인가?”
백 사인이 대답했다.
“군자 유생입니다.”
이 말에 선사가 흙손으로 흙 판을 두드리니, 시랑侍郞이 흙 집게로 흙을 집어 선사에게 보내 주었다. 선사가 흙을 받고는 말했다.
“그대는 천재 백 시랑이 아닌가?”
“그렇기는 합니다만.”
이에 선사가 말했다.
“겨우 진흙이나 떠 주는 사람이로구나.”
이만권李萬卷이라는 사람을 백 시랑이 데리고 왔는데,
이만권이 선사에게 물었다.
“경전에서 말하기를,
‘수미산에다 겨자씨를 넣고, 겨자씨에다 수미산을 넣는다’ 하였는데,
수미산에다 겨자씨를 넣는 것은 사람들이 의심하지 않지만, 겨자씨에다 수미산을 넣는 것은 거짓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선사가 되레 물었다.
“국가에 어떤 공로가 있어서 출세를 하셨소?”
이만권이 소리를 질러 대답했다.
“화상께서는 제가 만 권의 책에 의해 출세한 줄 어찌 모르십니까?”
선사가 말했다.
“공은 어찌하여 거짓 말씀을 하시오?”
“제가 언제 거짓말을 했습니까?”
선사가 말했다.
“공의 몸체가 그 정도 크다고 치더라도 어디에다 만 권의 책을 두셨습니까?”
공이 이 말에 당장 절을 하고 스승으로 섬겼다.
이만권이 선사를 찬탄했다.
성곽을 나서는데 돈 보내니 싫어하며 받지 않고
도롱이 삿갓을 빗겨 들고 여산廬山으로 향하노라.
푸른 하늘 위의 학이란 말은 일찍이 들은 적 있지만
더 푸른 하늘이 있어 학보다 수승하다.
선사도 다음과 같이 송했다.
귀종歸宗에게는 사事와 이理가 끊겼나니
해가 바야흐로 한나절이 된 듯하니라.
사자처럼 자재하며
어디에도 의존하지 않는다.
4산山 꼭대기 위를 홀로 걸으며
3대大의 길거리를 가고 오도다.
입으로 부는 힘은 나는 새를 떨어뜨리고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뭇 짐승이 두려워한다.
고동을 세워 놓으니 화살이 미치기 쉽고
그림자가 없으니 손으로 잡기 어렵다.
드러내 보임이 재주꾼 같고
재단하고 끊는 데는 잣대와 같다.
기교 있게 만 가지 명성을 새기나
귀종歸宗에게는 도리어 한 줌의 흙이다.
말이 은밀하니, 음성이 끊겼고
이치가 현묘하여 말로 하기 어렵다.
귀를 하나 버리니 오히려 귀머거리가 되고
눈을 하나 얻으니 도리어 봉사가 되었도다.
하나의 화살로 세 관문 뚫으니
분명한 화살 뒤의 길이로다.
가엾다, 대장부는
선천先天으로 마음 조상을 삼네.
한번은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모자를 들어 보이면서 물었다.
“알겠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이에 선사가 대답했다.
“노승의 머리에 풍風이 있어 모자를 벗지 않음을 탓하지 말라.”
스님이 물었다.
“어떤 것이 부처님들의 현현한 뜻입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아무도 알 수 없느니라.”
“향하는 이는 어떻습니까?”
“향하는 곳이 있으면 벌써 어긋나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향하는 자가 없으면 어떠합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그러면 누가 현현한 진리를 구하겠는가?”
이때 스님이 말이 없자, 선사가 말했다.
“가거라. 그대가 애쓸 곳이 없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다.
“학인으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는 방편문이야 없을 수 있겠습니까?”
선사가 대답했다.
“있느니라.”
“어떤 것이 방편문입니까?”
“관음의 묘한 지혜의 힘은 세간의 고통을 구제할 수 있느니라.”
“어떤 것이 관음의 묘한 지혜의 힘으로 세간의 고통을 구제하는 것입니까?”
선사가 솥뚜껑을 세 차례 두드리고는 도리어 물었다.
“듣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듣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에게는 들리지 않는가?”
스님이 대답이 없으니, 선사가 때렸다.
이만권李萬卷이 물었다.
“대장경은 어떤 일을 밝힙니까?”
선사가 주먹을 일으켜 세우면서 도리어 물었다.
“그대는 알겠는가?”
이공李公이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선사가 말했다.
“이 이공이 주먹도 알지 못하는구나.”
이공이 말했다.
“저는 모르겠으니 화상께서 지시해 주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사람을 만나면 도중에서라도 전해 주지만, 사람을 만나지 못하면 세속 진리만 퍼지느니라.”
선사가 대중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선禪을 이야기해야겠으니 모두들 앞으로 가까이 오라.”
대중이 모두 가까이 오니, 선사가 말했다.
“그대들은 들어라. 관음의 행은 여러 방소에 잘 응하느니라. 큰 서원은 바다같이 깊어서 여러 겁을 두고 부사의하고, 천억 부처를 모시면서 청정한 큰 서원을 세웠느니라.”
그리고는 다시 물었다.
“어떤 것이 관음의 행인가?”
그리고는 손가락을 한 번 튀기고 물었다.
“여러분은 들었는가?”
대중이 모두가 들었다고 하니, 선사가 말했다.
“이 한 떼거리의 바보들이 여기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그리고는 모두를 쫓아내고 껄껄 크게 웃었다.
선사가 채소밭에 들어갔다가 한 포기의 채소를 보자 동그라미를 그려 에워싸고는대중에게 아무도 건드리지 말라고 하였다. 선사가 다시 왔다가 채소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을 보자, 주장자를 들어 마구 때리면서 말했다.
“이 떼거리들 중에는 지혜 있는 사람이 없구나.”
선사가 어떤 스님에게 말했다.
“어디서 왔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아무 곳에서 왔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왔는가?”
“가지고 왔습니다.”
“어디에 있는가?”
스님이 손을 정수리 위로 올려 선사에게 바치는 시늉을 하자, 선사가 손을 들어 받아 가지고는 등 뒤로 던지는 시늉을 하였다. 이에 스님이 대답이 없자, 선사가 말했다.
“이 들여우야.”
선사가 풀을 깎는데, 어떤 좌주가 선사를 뵈려고 찾아왔다. 이때 갑자기 뱀 한 마리가 나타나자 선사가 낫으로 베어 버렸다. 이를 본 좌주가 말했다.
“귀종歸宗의 명성을 들은 지 오랜데, 알고 보니 원래가 거친 사문이시군요.”
나중에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들어 장경에게 물었다.
“귀종이 낫으로 뱀을 벤 뜻이 무엇입니까?”
장경이 대답했다.
“틀렸다.”
명진明眞이 도瑫 암주庵主에게 이야기하니, 암주가 말했다.
“목숨을 가져오라.”
명진이 긍정하지 않으니, 석문石門이 대신 말했다.
“저는 암자 안에서 그저 나무나 패고 씨앗이나 심습니다.”
이때 강주江州 동림사東林寺에서 『유마경維摩經』과 『조론肇論』을 오랫동안 강하던 신건神建 좌주가 선사에게 물었다.
“어떤 것이 눈에 보이는 것 모두가 보리인 경계입니까?”
선사가 얼른 한 발을 들어 보이니, 좌주가 말했다.
“무례하게 굴지 마십시오.”
선사가 말했다.
“무례하지 않다. 세 가지나 눈앞에 벌려 있으니, 좌주 마음대로 골라 가지라.”
좌주가 알아듣지 못하고, 마침내 강주江州의 진론陳論 자사刺史인 이만권에게 진정서[狀:소장]를 내니, 이공이 다음과 같이 판결을 하였다.
“엎드려 생각건대, 3승乘의 지극한 교법과 일대 장경의 장엄스러운 내용에 실린 문장은 오직 불성을 궁구하니, 현상은 그윽하고 깊으며, 이치 또한 현현한 경지에 통하여 3교敎의 근원을 통괄하고 뭇 중생이 귀의할 대상이 되옵니다. 기왕에 부모와 세속을 하직하여 갈포褐布를 입고 경전을 강론하시니, 경에도 분명한 문장이 있고, 소疏 역시 다하지 않음이 없습니다. 만일 지혜와 변론이 뛰어나지 못하면 3신身을 잘못 판단하게 되고, 체험과 견해가 원만하지 못하면 8식識을 잘못 굴리게 됩니다. 지혜로 지혜를 변론하여도 헛공부를 한 것이고, 글을 가지고 글에 집착한다면 그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
하물며 스님께서는 『조론肇論』을 깊이 연구하시고 유마維摩에 환히 밝으시니,
『조론』에서 말하기를,
‘청청한 푸른 대나무 모두가 진여眞如요, 울울鬱鬱한 개나리꽃이 반야가 아님이 없다’ 하였고,
유마 대사는 말하기를,
‘보리는 장애이니, 모든 서원을 장애한다’ 하였습니다.
이 두 경교가 틀린 말씀이 아니지만 스님께서 보리를 분별하는 방법이 아직도 분명하지 못하시니, 울울한 개나리에서 어떻게 성품을 보리까?
이러한 견해로써 어떻게 경을 강의하리오. 높은 자리에서 소리 높여 외치나 중ㆍ하의 근기를 속일 뿐이니, 어찌하여 스스로가 현현한 진리를 끝까지 규명하지 않으십니까? 외람되이 어리석은 총명을 자신하여 때를 지닌 채 선을 묻고, 말씀하심이 진리답지 못하니, 존숙께서 마음을 내어 면전에서 드러내 보이시매 이치가 함께 통하는 것인데, 어찌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십니까? 그 세 개란 것이 법신法身과 무엇이 다르리까?
스님께서 감별하시어 반야가 없음을 깨달았다 하면, 어찌하여 순간에 깨달아서 무생無生의 이치를 보지 못하시는 것입니까? 형상에 의한 보리는 공연한 이름뿐입니다.진실로 법신이란 같은 한 근원이지만 모양을 고치기 때문에 범부들의 마음이 절로 어리둥절한 것입니다. 진심眞心은 분명하여 자字도 이름도 없거늘 또렷 또렷이 성품을 보면 무슨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스님께서 보리의 경지를 물으매 말로써 대꾸를 하셨다면 이는 달마의 발자국을 지워 버리려는 짓이며, 적묵寂黙으로써 조종을 삼는다면 유마 거사는 일생 동안 굴욕을 당해야 할 것입니다.
스님께서는 어찌 알지 못하십니까? 조공肇公은 네 가지 변하지 않는 이치를 말했고, 생공(生公:道生)은 여섯 가지 공하지 않은 이야기를 말했으니, 이로써 눈에 뜨이는 것 그대로가 진리라는 이치는 지혜에 관계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진리는 영원히 항하의 모래 같은 겁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본체는 유리琉璃 같고, 물질은 쪼아 다듬는 것과 같아서 크고 작음에 마음대로 따르는데 예쁘고 추함이 어디에 있으리까? 물질 그대로가 공空인데 무슨 말로써 대답하리까?
기이하여라. 공문空門의 제자들이 물질이 공함을 알지 못하고, 도리어 정장呈狀을 띄워 공정한 판단을 바라는군요. 저 유교儒敎에도 오히려 ‘문턱을 나서지 않고도 모든 일을 다 알고, 창을 엿보지 않고도 천하가 밝은 줄 안다’ 하는 말이 있는데, 분명하게 아는 것은 아는 것이요,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 또한 아는 것이니, 이 모두 다 지혜에 속하는 것입니다. 지혜를 변론하는 것도 이러한데 부처를 배우는 사람들이 어찌 불성佛性을 미혹하십니까?
스님의 외양을 보고 뜻하심이 드높아서 무생無生의 업을 쌓거나 대각大覺의 도를 펴신다고 여겼는데, 움직이는 작태를 뵙고 나니, 모든 것이 범부의 생각이어서 문장의 표현은 단지 비방하는 언사뿐이요, 입 밖에 내는 말씀은 전부가 성문聲聞의 행에 어긋납니다. 거듭 거듭 권하나니, 우선 조용히 스스로 생각해 보소서.
선지식善知識도 학도學徒에게 굽히는 일이 없거늘 진여가 어찌 언구를 따르리오. 참 견해는 형상이 없으나 그 형상은 분명하고, 진실한 들음에는 소리가 없으나 그 소리는 끊임이 없습니다. 이러함을 통달하면 일체 모든 것이 진리 아닌 것이 없습니다. 스님께서 긍정하지 못한 점이 있거든 다시 정장을 가지고 오십시오. 갑자기 관의 힘으로 마무리하려 한다면 반드시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애오라지 한 토막의 판결을 써서 현현한 진리를 간략히 서술하나니, 말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으면 바른 법을 변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라건대 이 판결을 가지고 절로 돌아가서 대중을 모아 종을 쳐서 진실을 말씀하십시오. 만일 믿을 수 없다면 다시 정장을 들고 오십시오. 만일 믿음이 확정되거든 혼자서 부처님께 백 번 절을 하시고, 이어 위의를 갖추어 선지식을 찾아가 절을 하고, 참회하면 모든 죄가 밝은 해 앞의 서리나 이슬 같아서 과거의 죄가 단번에 사라지리다.”
보자報慈가 이 일을 들어서 어떤 스님에게 물었다.
“어떻게 말하여야 옛사람을 굴욕되지 않게 할 수 있겠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그 스님이 정장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보자가 다시 물었다.
“어떠한 도리에 의거했는가?”
스님이 대답했다.
“만일 다른 사람이라면 함께 밥을 먹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