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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정도론 2권
10. 무색(無色)의 경지
10.1. 공무변처(空無邊處)
1. 거룩한 마음가짐(梵住) 다음에 설한 네 가지 무색의 경지(āruppa) 가운데이제 공무변처(空無邊處, ākāsānañcāyatana)를 닦고자하는 자는
“물질이 있기 때문에 몽둥이를 들고, 칼을 휘두르고, 말다툼을 하고, 시비하고, 분쟁한다.
그러나 무색의 경지에서는 절로 없다.
그는 이와 같이 숙고한 뒤 오직 물질을 역겨워하기 위해,
[물질에 대한] 탐욕을 빛바래게 하기 위해, 소멸하기 위해 도닦는다.(M.i.410)”라는 말씀 때문에,
몽둥이를 드는 등과 눈병, 귓병 등 수천 가지 괴로움을 통해 거친 물질에서 위험을 보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한정된 까시나를 제외하고 땅의 까시나 등 아홉 가지 까시나 가운데 어떤 하나에서 제4선을 일으킨다
2. 비록 그가 색계의 제4선으록 거친 물질을 초월했지만 까시나의 물질도 그 [거친 물질]과 비슷하기 때문에 그것도 또한 초월하고자 한다.
3. 어떻게?
예를 들면 뱀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숲 속에서 뱀에 쫓겨 황급히 도망하지만,
도망간 곳에서 다시 줄무늬가 그려진 야자 잎이나 넝쿨이나 밧줄이나 땅이 갈라진 금을 보고는,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그것을 쳐다보려하지 않는 것과 같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해로움을 끼치며 적개심을 품고 있는 사람과 함께 같은 마을에서 살던 사람이 그에 의해 매질을 당하고 묶이고 자기 집을 불태우는 등으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다른 마을에서 살기 위해 이사를 가지만,
그곳에서 만일 그에게 원한을 품고 있던 사람과 같은 형상과 소리와 행동거지를 가진 사람을 품고 있던 사람과 같은 형상과 소리와 행동거지를 가진 사람을 보면,
그는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그 사람을 쳐다보려하지 않는 것과 같다.
4. 이제 이것이 비유의 적용이다.
비구가 거친 물질을 대상으로 가지는 시기가 사람들이 뱀이나 원한을 품고 있는 사람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는 시기와 같다.
비구가 색계의 제4선으로 업에서 생긴 물질을 초월하는 때가 첫 번째 비유의 사람이 황급히 도망가는 것과 두 번째 비유의 사람이 다른 마을로 가는 것과 같다.
비구가 까시나의 물질도 업에서 생긴 물질과 비슷하다고 주시하면서 그것마저 극복하고자하는 것이 첫 번째 사람이 도망 간 곳에서 줄무늬가 그려진 야자 잎 등을 보면서,
또 두 번째 사람이 다른 마을에서 원수와 비슷한 사람을 보면서 두려워하고 공포에 떨며 쳐다보려하지 않는 것과 같다.
멧돼지에게 쫓긴 개와 도깨비를 두려워 한 사람의 비유도 적용 된다.
5. 이와 같이 그는 제4선의 대상인 까시나의 물질을 역겨워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고자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는다.
익숙한 색계의 제4선으로부터 출정하여 그 禪에 대해
‘이것은 내가 역겨워하는 물질을 대상으로 삼는다.’
‘이것은 기쁨을 가까운 적으로 가진다.’ 또
‘이것은 고요한 해탈보다 거칠다’라고 위험을 본다.
그러나 여기는[색계의 제4선과 마찬가지로] 구성요소(各支)들의 거친 상태가 없다.
색계의 [제4선이 평온과 심일경성이라는]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가지듯이 무색의 경지들도 그와 같기 때문이다.
6. 그가 이와 같이 그곳에서 위험을 보고 집착을 종식시킨 뒤 공무변처를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는 우주의 끝까지 혹은 그가 원하는 곳까지 까시나를 확장한 뒤,
그 [까시나의 물질]이 닿은 허공을 ‘허공(ākāsa), 허공’ 혹은 ‘끝없는 허공’이라고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색계 제4선의 대상인 땅의 까시나 등 물질을]제거한다.
7. 까시나를 제거할 때 그는 돗자리를 마는 것처럼 마는 것도 아니고, 솥에서 빵을 끄집어내는 것처럼 끄집어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것으로 전향하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반조하지 않고 오로지 닿은 곳을 ‘허공, 허공’하며 마음에 잡도리하면서 까시나를 제거한다.
8. 까시나를 제거할 때 [허공이] 나타나는 것도 아니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단지 까시나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허공, 허공’이라고 생각하기 대문에 제거했다고 하는 것이다.
가시나를 제거하면 남겨진 허공이 드러난다.
까시나를 제거한 뒤 남은 허공이라 하던, 까시나가 닿은 허공이라 하던, 까시나가 제외된 허공이라 하던 이 모두 같은 뜻이다.
9. 그는 그 까시나를 제거한 뒤 남은 허공의 표상에 대해 ‘허공, 허공’하면서 계속해서 전향한다.
추론(takka)으로 치고 일으킨 생각(尋)으로 친다.
그가 이와 같이 계속해서 전향하고, 추론으로 치고 일으킨 생각으로 칠 때 장애들이 억압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며, 근접삼매로 마음이 삼매에 든다.
그는 그 표상을 거듭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는다
10. 그가 이와 같이 계속해서 전향하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땅의 까시나 등을 대상으로 색계의 마음이 드는 것처럼, 허공을 대상으로 공무변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든다.
여기서도 앞의 단계에 속하는 세 번 혹은 네 번의 속행은 무색계의 것이다.
나머지는 땅의 까시나에서 설한 것과 같다.
11. 그러나 이것이 다른 점이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가마나 자루나 항아리 등의 입구를 푸른 천이나 노란색이나 빨간색이나 흰색 등의 어느 한 가지 천으로 막고서 그것을 쳐다보다가 강한 바람이나 다른 어떤 사람이 그 천을 벗겨버렸을 때 그는 [그 가마 등의 안에 있는] 허공만 쳐다보면서 서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무색계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비구는 전에 까시나의 원반을 禪의 눈(jhāna-cakkhu)으로 쳐다보면서 머물다가,
‘허공, 허공’하면서 준비의 마음에 속하는 마음에 잡도리함(作意)에 의해 급히 그 표상이 제거되었을 때[무색계 禪의 눈으로] 허공만을 바라보면서 머문다.
12. 이렇게 될 때,
“물질의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고 부딪힘(paṭigha)의 인식이 사라지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끝없는 허공’하면서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Vbh.245)”라고 한다.
13.
‘완전히’: 모든 측면에서 혹은 [인식들을] 전부, 남김없이라는 뜻이다.
‘물질의 인식’: 인식이란 제목 아래 설한 ① 색계선과 ② 그 대상을 뜻한다.
① 왜냐하면
“색계선에 든 자가 물질들을 본다(D.ii.70;111)”라는 등에서 색계선도 물질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는 밖의 아름답고 추한 물질들을 본다.(D.II.110)”라는 등에서는 그 대상도 [물질이라 불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색계선에 대한 인식을 물질의 인식이라 한다. 이와 같이 이것은 인식의 제목 아래 설한 색계선의 동의어이다.
② 이것은 물질이라 이름 붙였기 때문에 물질의 인식이다. [색계선의 대상은] 물질이라고 이름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이 이것은 땅의 까시나 등으로 분류되는 그 대상과 동의어라고 알아야 한다.
14. ‘초월하기 때문에’:
탐욕이 빛바래기 때문에, 소멸하기 때문에. 무슨 뜻인가?
[각각 다섯인] 유익한 것과, 과보로 나타난 것과, 단지 작용만 하는 것으로 열다섯 가지 禪이라 불리는 물질의 인식들(=색계선)과, 땅의 까시나 등 아홉 가지 대상이라 불리는 물질의 인식들에 대해 모든 형태로 남김없이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한다.
그것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고 소멸하기 때문에 그는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물질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극복하지 않고서는 여기에 들어 머물 수 없기 때문이다.
15. 대상에 대해 탐욕을 버리지 않은 자는 인식을 초월할 수 없다. 인식을 초월할 때에는 대상도 이미 초월했다.
그래서 『위방가』에서는 대상을 초월하는 것 대신 오직 인식을 초월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여기서 무엇이 물질의 인식인가?
색계 증득을 얻은 자나 그곳에 태어난자나 금생에 그곳에서 행복하게 머무는 자의 인식, 인식하는것, 인식된 것을 물질의 인식들이라 한다.
이 물질에 대한 인식들을 지나고 능가하고 초월하기 때문에 ‘물질의 인식을 완전히 초월하기 때문에’라고 한다.(Vbh.261)”
그러나 이 증득은 대상을 초월함에 의해서 얻어야 한다.
초선 등 처럼 동일한 대상에서 얻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대상을 초월하는 것으로 그 뜻을 설명했다고 알아야 한다.
16.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졌기 때문에’:
눈 등의 토대와 형상(색깔) 등의 대상이 맞닿아서 일어난 인식이 부딪힘의 인식이다. 이것은 물질의 인식 등의 동의어이다.
그래서 말씀하셨다.
“여기서 무엇이 부딪힘의 인식인가?
형상(색깔)의 인식, 소리의 인식, 냄새의 인식, 맛의 인식, 감촉의 인식을 부딪힘의 인식이라 한다.(Vbh.261)”
다섯 가지 유익한 과보와 다섯 가지의 해로운 과보인 이 열 가지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지고, 버려지고, 생기지 않는다. 그들을 일어나지 않게 한다는 뜻이다.
17. 물론 이들은 초선 등에 머무는 자에게도 발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초선에 머물] 때는 다섯 문을 통해 마음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이전에] 다른 곳에서 이미 버린 행복과 괴로움을 제4선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그 이전에 이미 버린 유신견 등을 세 번째 도(불환도)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이 禪에 대해 노력을 쏟게 하기 위해 이 禪을 찬탄하면서 이 [부딪힘의 인식 등을] 여기서 언급했다고 알아야 한다.
18. 혹은 비록 색계에 든 자에게도 [부딪힘의 인식들은] 발견되지 않지만 그것은 버렸기 때문에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색계 수행은 물질에 대한 탐욕이 빛바래도록 하지 않고 또 물질을 의지하여 그 [색계선]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무색계]수행은 물질에 대한 탐욕이 빛바램에 이르도록 한다.
그러므로 그들을 여기서 버린다고 말하는 것은 타당하다. 단지 말로만 그렇다고 할 뿐 아니라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는 것이 적절하다.
19. 이보다 이전에는 그들이 버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초선을 증득한 자에게 소리는 가시이다(A.v.135)”라고 세존께서 설하셨다.
오직 여기서 버려지기 때문에 무색계증득의 흔들림 없는 상태와 고요한 해탈의 상태를 설하셨다.
아울러 알라라 깔라마(Āḷāra Kālāma)가 무색계증득에 머물 때 500대의 수레가 바로 곁을 지나갔었어도 그것을 보지도 못했고,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고 했다.
20.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여러 가지 영역에서 일어나는 인식들, 혹은 여러 인식들. 갖가지 인식이라 불리는 것은 [다음의 두 이유 때문이다].
첫째, “여기서 무엇이 갖가지 인식인가?
증득을 얻지 못한자의 마노의 요소(意界)나 혹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意識界)에 포함된 인식과 인식하는 것과 인식된 것을 갖가지 인식이라 한다(Vbh.261)”라고,
여기서 의도하는 인식을 분별론에서 분석하여 설했기 때문에 갖가지 인식이라 한다.
증득을 얻지 못한자의 마노의 요소(意界)와 마노의 알음알이의 요소(意識界)에 포함된 인식이 형상(색깔)과 소리등 각각의 고유성질이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둘째, 8가지 욕계의 유익한 인식, 12가지 해로운 인식, 11가지 욕계의 유익한 과보로 나타난 인식, 2가지 해로운 과보로 나타난인식, 11가지 욕계의 단지 작용만하는 인식, 이 44가지 인식은 서로 다르고, 고유성질이 다르고, 서로서로 같지 않기 때문에 갖가지 인식이라 한다.
그러므로
‘그 갖가지 인식들을 전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전향하지 않고, 가져 오지 않고, 반조 하지 않는다.
그것들을 전향하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반조하지 않기 때문에 …’ 라는 뜻을 설한 것이다
21. 앞에 나타난 물질의 인식과 부딪힘의 인식은 이 禪으로 인해 [무색계 세상에] 새로 태어난 존재에게도 없다. 하물며 그 [무색계의] 존재에서 이 禪에 들어 머무는 때에야 말해서 뭣하겠는가.
그러므로 ‘초월하고’ ‘사라졌다’라고 두 가지 방법으로 그들의 부재를 설했다.
그러나 갖가지 인식들의 경우, 8가지 욕계의 유익한 인식과 9가지 단지 작용만하는 인식과 10가지 해로운 인식. 이 27가지 인식들은 이 禪으로 인해 새로 태어난 존재에게는 있다.
그러므로‘그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라고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도 이 禪에 들어 머물 때 그는 그들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 이 禪에 들어가서 머문다.
그러나 그들을 마음에 잡도리할 때는 [공무변처의禪에] 들지 못한다.
22. 간략하게 설하면,
여기서 물질의 인식을 초월하기 때문에, 구절은 ‘모든 색계의 법들을 버림을 설했고 부딪힘의 인식이 사라지고 갖가지 인식을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구절은,
모든 욕계의 마음(心)들을 버리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는 것을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23.
‘끝없는 허공’: 그것의 일어남의 끝과 멸함의 끝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끝없다(ananta)고 한다.
허공은 까시나를 제거한 뒤 남겨진 허공을 뜻한다.
여기서 끝없는 상태는 마음에 잡도리함을 통해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위방가』에서 설하셨다.
“그 허공에 마음을 두고, 고정시키고, 끝없이 가득 채운다. 그러므로 끝없는 허공이라 한다.(Vbh.262)”
24. ‘공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이것은 끝이(anto) 없기(na) 때문에 아난따(anata, 끝없는)이고, 허공이 끝이 없기 때문에 끝없는 허공(아까사-아난따, ākāsa-ananta)이고, 아까사-아난따가 바로 아까사-아난짜이다.
이 끝없는 허공(아까사-아난짜)은 이 禪이 그와 함께하는 [마음과 마음부수]법들과 함께 그곳에 머문다는 뜻에서 그 禪의 장소(āyyat)이기 때문에 아까사난짜야따나(ākāsa[공]-anañca[무변]-āya-tana[처], 공무변처)이다.
마치 데와아야따나(deva-āyatana)가신들의 머무는 장소이듯이.
‘들어 머문다’: 그 공무변처에 이르러, 그것을 일으키고, 그에 적절한 위의의 머묾으로 머문다.
이것이 공무변처의 명상주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10.2. 식무변처(識無邊處)
25. 식무변처를 닦고자하는 자는 공무변처증득에 대해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어야 한다.
그는 ‘이 [공무변처]증득은 색계선이라는 가까운 적이 있고, 식무변처처럼 고요하지 않다’고 공무변처에서 위험을 보고 집착을 종식시킨 뒤, 식무변처를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 허공을 가득 채우면서 일어난 알음알이(識)에 대해 ‘알음알이, 알음알이’라면서 계속해서 전향하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반조하고, 추론으로 치고, 일으킨 생각으로 쳐야 한다.
‘끝없다(ananta), 끝없다’라고 마음에 잡도리해서는 안된다.
26. 그가 이와 같이 그 표상이 [알음알이에] 계속해서 마음을 가져갈 때 장애들이 억압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고, 근접삼매로 마음이 삼매에 든다.
그는 그 표상을 거듭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는다.
그가 이와 같이 할 때 허공을 대상으로 공무변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들듯이 허공에 닿은 알음알이를 대상으로 식무변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든다.
본삼매에 드는 방법은 이미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27. 이렇게 될 때
“공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했기 때문에 ‘끝없는 알음알이’라 하면서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Vbh.245)”라고 한다.
28.
‘완전히’: 이것은 앞서 설한 것과 같다.
‘공무변처를 초월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禪도 공무변처이고 대상도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대상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끝없는 허공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첫 번째 무색계선의 대상이기 때문에 머문다는 뜻에서 장소(āyatana)다.
마치 데와아야따나(deva-āyatana)가 신들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래서 공무변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끝없는 허공은 [공무변처]禪이 생기는(sañjāti)원인이기 때문에 태어난 장소의 뜻에서 장소(āyatana)다.
마치 깜보자(Kambojā)가 말들이 [태어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래서 공무변처이다.
이와 같이 禪과 대상, 이 둘 모두를 일어나지 않게 하고 또한 마음에 잡도리 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한 다음이 식무변처에 들어 머물러야하기 때문에 [禪과대상]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공무변처를 초월했기 때문에’라고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29. ‘끝없는 알음알이’:
‘끝없는 허공’이라 하면서 이와 같이 [허공을] 두루 채우고 일어난 알음알이에 대해 ‘끝없는 알음알이’라 하면서 마음에 잡도리한다는 뜻이다.
혹은 ‘끝없다’는 것은 마음에 잡도리함과 관련하여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허공을 대상으로 하는 알음알이를 전적으로 마음에 잡도리할 때 ‘끝없다’고 마음에 잡도리하기 때문이다.
30.
“끝없는 알음알이라는 것은 수행자가 알음알이에 의해 닿은 그 동일한 허공을 마음에 잡도리하고 끝없이 가득 채우기 때문에 끝없는 알음알이라 한다.(Vbh.262)”라고 『위방가』에서 설했다.
그곳에서 알음알이에 의해(viññāṇena)라는 것은 목적격의 뜻으로 사용된 도구격이라고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주석서를 [지은] 스승(Aṭṭhakathā-ācariya)들이
‘그는 끝없이 가득 채우고, 그 허공에 닿은 그 동일한 알음알이를 마음에 잡도리한다’라고 그 뜻을 설명하셨기 때문이다.
31. ‘식무변처에 들어 머문다’:
여기서는 그러나 끝이 없기 때문에 끝없음(ananta, 아나따)이고, 아난따가 바로 아난짜이고, 알음알이(viññāṇa)가 끝이 없기(anañca) 때문에 윈냐나아난짜(viññāṇa-anañca)라고 말하지 않고 윈냐난짜(viññāṇañca)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것이 일상적인 용법이기 때문이다.
그 끝없는 알음알이(윈냐난짜)는 머문다는 뜻에서 그와 함께하는 [마음과 마음부수] 법들과 함께 禪의 장소이다.
마치 네와-아야따나가 신들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러므로 식무변처(viññāṇa[식]-añca[무변]-āyatana[처], 識無邊處)이다.
나머지는 앞서 [설한 방법과] 같다.
이것이 식무변처의 명상주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10.3. 무소유처(無所有處)
32. 무소유처를 닦고자하는 자는 식무변처증득에 대해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어야 한다.
그는 ‘이 [식무변처]증득은 공무변처라는 가까운 적이 있고, 무소유처럼 고요하지 않다’고 식무변처에서 위험을 보고 집착을 종식시킨 뒤, 무소유처를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는 식무변처의 대상이었던 공무변처의 알음알이의 부재, 비어버림, 멀리 떠나버린 상태를 마음에 잡도리해야 한다.
33. 어떻게?
그 알음알이를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없다, 없다’거나, ‘비었다, 비었다’거나, ‘멀리 떠나버렸다, 멀리 떠나버렸다’라고 계속해서 전향하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반조하고 추론으로 치고, 일으킨 생각으로 쳐야 한다.
34. 그가 이와 같이 그 표상인 [알음알이의 부재로] 계속해서 마음을 가져갈 때 장애들이 억압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고, 근접삼매로 마음이 삼매에 든다.
그는 그 표상을 거듭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는다.
그가 이와 같이 할 때 마치 허공에 닿은 고귀한 알음알이를 대상으로 식무변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들 듯이,
그 허공을 두루 채우고서 일어난 고귀한 알음알이의 비어버림, 떠나버린 상태, 부재를 대상으로 무소유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든다.
여기서도 본삼매에 드는 방법은 이미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35. 그러나 이것이 다른 점이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사람이 집회장 등에서 어떤 목적으로 비구 대중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는 다른 곳으로 갔다. 집회의 일이 끝났을 때 비구들은 모두 일어나서 나갔다.
그때 그 사람이 다시 집회장으로 돌아와 문에 서서 다시 그 장소를 쳐다볼 때 비어있는 것을 보고, 떠나버린 상태만을 본다.
‘이 많은 비구들이 다 죽었구나’라거나
‘이 많은 비구들이 다른 지역으로 가버렸구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이 비었구나, 떠나버렸구나’라고 없는 상태만을 본다.
이와 같이 그 본삼매가 일어날 때 그전에 허공을 대상으로 일어난 알음알이를 식무변처의 禪의 눈으로 보면서 머물고는,
[지금은] ‘없다, 없다’는 식으로 준비작업을 마음에 잡도리함으로 인해 그 알음알이가 사라졌을 때, 그는 그것의 떠남이라 불리는 부재만을 보면서 머문다.
36. 이렇게 될 때
“식무변처를 완전히 초월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없다’고 하면서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Vbh.245)”라고 한다.
37. 여기서도 완전히라는 것은 앞서 설한 것과 같다.
‘식무변처’:
여기서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禪도 식무변처이고 대상도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대상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끝없는 알음알이 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은 두 번째 무색계선의 대상이기 때문에 머문다는 뜻에서 장소(āyatana)이다.
마치 데와아야따나가 신들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래서 식무변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끝없는 알음알이는 [식무변처]禪이 생기는 원인이기 때문에 태어난 장소의 뜻에서 장소(āyatana)이다.
마치 깜보자가 말들이 [태어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래서 식무변처이다,
이와 같이 禪과 대상, 이 둘 모두를 일어나지 않게 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여 이 무소유처에 들어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禪과대상,]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식무변처를 초월했기 때문에’라고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38.
‘아무것도 없다’:
’없다, 없다’거나 ‘비었다,비었다’거나 ‘떠나버렸다, 떠나버렸다’라고 마음에 잡도리한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그 알음알이를 존재하지 않게 하고, 없게 하고, 사라지게 하고, ‘아무것도 없다’고 본다.
그러므로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Vbh.262)”라고 『위방가』에서도 설하신 것은 비록 [알음알이가] 부서짐으로 명상하는 것처럼 설하셨지만 다음과 같이 이 뜻을 보아야 한다.
그 알음알이에 전향하지 않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고, 반조하지 않고 오직 그 알음알이가 없는 상태, 비어있는 상태, 떠나버린 상태만을 마음에 잡도리하는 자를 두고
‘존재하지 않게 하고, 없게 하고, 사라지게 한다’라고 말한다.
다른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다.(ⅩⅩⅠ.§17참조)
39.
‘무소유처에 들어 머문다’:
여기서는 그러나 [첫 번째 무색계 알음알이가] 조금도(kiñcana) 없기(na) 때문에 아낀짜나(akñcana, 아무것도 없음)이다. 무너진 상태도 조금도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가 아낀짠냐(ākiñcañña,무소유)이다. 이것은 공무변처 알음알이가 떠나감과 동의어이다.
이 아무것도 없는상태는 머문다는 뜻에서 이 禪의 장소이다.
마치 데와아야따나가 신들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러므로 무소유처라 한다.
나머지는 앞의 것과 같다.
이것이 무소유처의 명상주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
10.4. 비상비비상처(非想非非想處)
40. 비상비비상처를 닦고자하는 자는 무소유처의 증득에 대해 다섯 가지 자유자재를 얻어야 한다. 그
는 ‘이 무소유처는 식무변처라는 가까운 적이 있고, 비상비비상처처럼 고요하지 않다’라거나,
“인식은 병이고, 인식은 종기이고, 인식은 화살이다 … 이것은 고요하고 이것은 수승하나니 그것은 곧 비상비비상처이다.(M.ii.231)”라고,
이와 같이 무소유처에서 위험을 더 높은 것에서 이익을 보면서 무소유처에 대한 집착을 종식시킨 뒤, 비상비비상처를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한다.
그는 그 부재를 대상으로 일어난 무소유처증득이
‘고요하다(santa), 고요하다’고 계속해서 전향하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반조하고, 추론으로 치고, 일으킨 생각으로 쳐야 한다.
41. 그가 이와 같이 그 표상인 [무소유처의 증득으로] 계속해서 마음을 가져갈 때 장애들이 억압되고, 마음챙김이 확립되고, 근접삼매로 마음이 삼매에 든다.
그는 그 표상을 거듭거듭 반복하고 닦고 많이 [공부]짓는다.
그가 이와 같이 할 때 마치 알음알이의 떠남을 대상으로 무소유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들듯이, 무소유처의 증득라 불리는 네 가지 무더기(蘊)들을 대상으로 비상비비상처의 마음이 본삼매에 든다.
본삼매에 드는 방법은 이미 설한 방법대로 알아야 한다.
42. 이렇게 될 때
“무소유처를 완전히 초월했기 때문에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문다.(Vbh.245)”라고 한다.
43.
‘완전히’:
이것은 앞서 설한 것과 같다.
‘무소유처를 초월했기 때문에’: 여기서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禪도 무소유처이고 대상도 그렇게 부른다. 왜냐하면 대상도 앞서 설한 방법대로 무소유이고 또 그것은 세 번째 무색계선의 대상이기 때문에 머문다는 뜻에서 장소이다.
마치 데와아야따나가 신들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래서 무소유처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무소유는 [뮤소유처]禪이 생기는 원인이기 때문에 태어난 장소의 뜻에서 장소(āyatana)이다. 마치 깜보자가 말들이 [태어나 머무는] 장소이듯이. 그래서 무소유처이다.
이와 같이 禪과 대상, 이 둘 모두를 일어나지 않게 하고 마음에 잡도리하지 않음으로써 초월하고는 이 비상비비상처에 들어 머물러야 하기 때문에 [禪과 대상] 이 둘을 하나로 만들어 ‘무소유처를 초월했기 때문에’라고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44.
‘비상비비상처’:
인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이 [禪]을 비상비비상처라 부른다.
이처럼 닦는 자에게 인식이 남아있다.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위방가』에서는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갖지 않은 것도 아닌 자”라고 설하시고는,
“무소유처를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고, 남은 상카라(行)들의 증득을 닦는다.
그로므로 인식을 가진 것도 아니고 인식을 갖지 않은 것도 아닌 자다(Vbh.263)”라고 설했다.
45. 앞의 인욕문에서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한다는 것은
‘이 [무소유처의] 증득은 고요하다. 왜냐하면 이것은 알음알이의 부재를 대상으로 존속하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禪이 고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대상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것이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는 것이다.
만약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면 어떻게 초월함이 있겠는가?
그것에 들고자하는 원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그것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지만 그에게는
‘나는 이곳에 전향하리라, 입정하리라, 머물리라, 출정하리라, 반조하리라’라는 관심과 생각과 마음에 잡도리함이 없다.
무슨 이유인가?
무소유처보다 비상비비상처가 더 고요하고 더 수승하기 때문이다.
46. 예를 들면, 대 왕권을 가진 국광이 아름답게 장식을 한 코끼리의 등에 타고 시내 거리를 순행하다가,
상아 등을 조각하는 장인들이 한 개의 옷을 몸에 꽉 끼게 입고 다른 천으로 머리를 감고 그들의 사지는 상아가루 등으로 뒤집어쓴 채 상아 조각 등 기교를 부리는 것을 보고서,
‘오, 능숙한 대가들이로구나. 이런 공예품을 다 조각해 내다니!’하면서 그들의 예술적 감각을 칭찬하지만,
‘나도 차라리 왕국을 버리고 저런 장인이 되어야겠다’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슨 이유인가?
왕국의 영광에 큰 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장인을 떠나 앞으로 나아가듯이, 비록 수행자가 그 [무소유처의] 증득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하지만,
그때 그에게
‘나는 이것에 전향하리라, 입정하리라, 머물리라, 출정하리라, 반조하리라’라는 관심과 생각과 마음에 잡도리함이 없다.
47. 그가 이것을 고요하다고 마음에 잡도리할 때 앞서 설한 방법대로 그 최고로 미세한 본삼매에 이른 인식을 얻는다. 그것 때문에 그는 인식을 가진 것도 인식을 갖지 않은 것도 아닌 자라고 이름 한다.
그는 남은 상카라(行)들의 증득을 닦는다라고 불린다.
남은 상카라들의 증득이란 극도로 미세한 상태에 이른 상카라들을 가진 네 번째 무색계증득이다.
48. 이와 같이 얻은 인식 때문에 이 [禪]을 비상비비상처라고 부른다. 이제 그 인식의 뜻을 보여주기 위해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비상비비상처란 비상비비상처를 얻었거나, 그곳에 태어났거나, 금생에 그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자의 마음(心)과 마음부수(心所)의 법들이다.(Vbh.263)’
이 가운데서 여기서 뜻하는 것은 그것을 얻은 자의 마음과 마음부수의 법들이다.
49. 이것이 단어의 뜻이다.
거친 인식은 없지만 미세한 인식은 있기 때문에 그와 함께하는 [마음과 마음부수]법들을 가진 이 禪은 인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이다.
그 비상비비상은 마노의 감각장소(意處)와 법의 감각장소(法處, āyatana)이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처이다.
50. 혹은 여기서 인식은 분명하게 인식의 역할을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식이 아니다.
남은 상카라(行)들의 미세한 상태가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이 아닌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이다.
그 비상비비상은 나머지 법들의 거처라는 뜻에서 장소(āyatana)이다. 그러므로 비상비비상처이다.
여기서 오직 인식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은 느낌도 ‘네와웨다나 나아웨다나(n’eva vedanā nāvedanā, 느낌도 아니고 느낌 아닌 것도 아님)’이다.
마음도 ‘네와찟따 나아찟따(마음도 아니고 마음 아닌 것도 아님)’이다.
감각접촉도 ‘네와팟사 나아팟사(감각접촉도 아니고 감각접촉 아닌 것도 아님)’이다.
이 방법은 나머지 함께하는 법들의 경우에도 적용된다.
인식을 선두로 하여 법을 설했다고 알아야 한다.
[발우에 칠한 기름의 비유]
51. 발우에 칠한 기름 등의 비유로 이 뜻을 설명할 수 있다.
사미가 기름을 발우에 칠하여 한쪽에 두었다. 죽을 먹을 때에 장로가 사미에게 발우를 가져오라고 하였다.
사미는
‘존자시여, 발우에 기름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장로가
‘사미여, 그 기름을 가져 오거라. 기름통을 채워야겠다.’라고 말했을 때,
‘존자시여, 기름이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발우] 속에 기름이 있기 때문에 죽과 함께는 적당하지 않다는 뜻에서 기름이 있다고 했고,
기름통을 채우는 것 등에 대해서는 기름이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이 인식도 그 역할을 명확하게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식이 아니고,
남은 상카라(行)들의 미세한 상태로 존재하기때문에 인식이 아님도 아니다.
52. 그러면 무엇이 여기서 인식의 역할인가?
대상을 인식하는 것과,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어 역겨움이 일어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불의 요소(火界)가 식은 물에서 데는 역할을 명확하게 할 수 없듯이,
여기서 [인식은] 인식하는 역할도 분명하게 할 수 없고, 나
머지 증득에서의 인식처럼 위빳사나의 대상이 되어 역겨움이 일어나게 하는 역할을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53. 비구가 일찍이 다른 무더기(蘊)들에 대해서 천착(abhinvesa)하지 않고서 비상비비상처와 관련된 무더기들을 명상하여 역겨움에 이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사리뿟따 존자나 사리뿟따 존자와 같이 위빳사나가 분명하여 큰 통찰지를 가진 자만이 가능하다.
그런 분도
“이와 같이 이 법들은 없었다가는 생겨나고 있었다가는 사라진다.( M.iii.28)”라고,
깔라빠를 통한 명상으로만이 할 수 있다.(ⅩⅩ.§2)
[감각접촉 등의 법을 분리하여] 따로따로 [직접 무상 등으로] 관찰함으로써는 할 수 없다.
이와 같이 이 증득은 미세하다.
[길에 있는 물의 비유]
54. 발우에 칠한 기름의 비유처럼, 길에 있는 물의 비유로도 이 뜻을 알 수 있다.
장로가 길을 떠났을 때 앞서 가던 사미가 물이 조금 있는 것을 보고서,
‘존자시여, 물이 있다면 욕의를 가져 오너라. 목욕을 하자.’라고 말하자,
‘존자시여, 물이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렸다.
단지 신발이 젖는다는 뜻에서 물이 있다 했고, 목욕한다는 뜻에서는 물이 없다고 했다.
이와 같이 이 인식도 그 역할을 명확하게 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인식이 아니고,
남은 상카라(行)들의 미세한 상태로 존재하기 때문에 인식이 아님도 아니다.
55.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적절한 비유로도 이 뜻을 알 수 있다.
‘들어 머문다’: 이것은 이미 앞에서 설했다.
이것이 비상비비상처의 명상주제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