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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경요집 제10권
18. 육도부(六度部)
[육도부에는 여섯 가지 편(篇)이 있음〕
18.1. 보시편(布施篇)
[보시에 따로 일곱 가지 연(緣)이 있음〕
18.1.1. 술의연(述意緣)
대개 보시(布施)의 업이란 곧 온갖 행(行)의 근원이다.
이미 육도(六度:六波羅蜜)의 맨 처음에 표방하였고 사섭(四攝)의 머리에 제(題)하였다.
그런 까닭에 급고독(給孤獨)의 집에서는 황금을 뿌려대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고
수달나왕(須達拏王)은 흰 코끼리를 보시하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않고 오히려 액난(厄難)을 구제하였다.
그러므로 살타[薩埵:菩提薩埵]는 제 몸을 던져 주리고 야윈 목숨을 구제해 주었고,
시비(尸毘)는 허벅지의 살을 베어 매와 새매의 먹이들 대신케 하였다.
이러하거늘 하물며 국토와 성과 처자를 어찌 족히 마음 속에 간직할 것이며, 보물이나 재물을 창고에 저축해 두고 마음 쓸 필요가 있겠는가?
속서(俗書)에서도 오히려 이렇게 말하였다.
“자기가 입었던 옷을 벗어 주고 자기가 먹으려던 음식도 미루어 주며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어루만져 주는 것과 수레ㆍ말ㆍ갖옷을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것은 다 재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음이 없고 의리를 소중하게 여기며 어질고 좋은 선비를 사랑한다는 뜻이다.
또한 재물이란 항상함이 없는 것이니 사람의 일과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마음을 괴롭혀 가며 쌓아둔다 한들 마침내 또 어디에 보시할 것인가?
네 가지 두려움이 번갈아 지져대고 다섯 집[家]에서 다투어 빼앗거늘 어찌 지혜로운 사람이 보배로 여기고 감상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요즘 범부들은 어리석어서 집안의 재물을 아끼고 인색하게 굴면서 전혀 버릴 마음이 없어 몸과 목숨까지 잃어버린다.
다만 생(生)만을 탐내어 늘 살아갈 수 없을까 근심하여 마침내는 처아(妻兒妻子)들로 하여금 눈을 흘기게 하고 형제들로 하여금 한 집안 안에서 싸우게 하며, 권속들이 서로 어기고 떠나가고 벗들과 멀리 떨어지게 하니,
진실로 간탐이라는 인(因)과 간탑이라는 연(緣) 때문이요 간탐이라는 법과 간탐이라는 업(業) 때문이다.
보살의 마음을 어기고 자비의 길을 방해하며 구호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오직 손상과 번뇌의 감정만을 일으키다면 이와 같은 허물은 곧 간탐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
18.1.2. 간위연(慳僞緣)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게송을 설하셨다.
세간엔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들 많아
굳게 지키고 인색하게 굴면서 보시하지 않네.
천만억(千萬億) 재물을 쌓아 두고서
이것은 내 것이라고 스스로 말한다.
그러다가 목숨을 마치려고 할 때엔
눈에는 사나운 귀신만 보이며
칼날 바람이 그 몸을 해체하면
다시는 들고 나는 호흡이 없네.
탐욕의 의식은 선함과 악함을 따라서
과보를 받아 심한 고통에 시달리면서
장차 죄 받을 곳으로 끌려가고 난 뒤엔
마음 바꿔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으리.”
또 『살차니건자경(薩遮尼揵子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탐욕 있는 사람 많은 재물 쌓아놓고도
그리고도 만족하는 마음을 내지 못하네.
무명예 가리워져 뒤바뀐 마음으로
항상 남의 재물 침탈하여 손상시킬 생각만 한다.
현재 세상에서는 원수와 미움만 많고
몸을 버리고 나면 악한 세계에 떨어지네.
그런 까닭에 지혜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재물을 아껴 보시를 행하지 않고
깊숙이 간직한 채 남이 알까 두려워하다가
몸을 버리고 나면 빈손으로 가서
아귀(餓鬼)세계 떨어져서 고통받는다.
굶주리고 목마름과 추위와 더위 등을
근심하고 걱정하여 항상 볶고 지지네.
지혜로운 사람은 재물을 쌓아두지 않나니
아끼고 탐냄을 깨뜨리기 위함일세.
『분별업보경(分別業報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큰 보시(布施)를 닦고 실천하면서도
성질이 급해 성냄이 많네.
바른 억념(憶念)에 의지하지 않으면
죽은 뒤에 크고 힘센 용이 된다네.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구걸하러 오는 사람을 보고 얼굴을 찡그리면 이 사람은 아귀 세계의 문을 연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느니라.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대승(大乘)을 장애(障礙)하는 네 가지 법이 있나니,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은혜 베풀어 보시하기를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보시를 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이며,
셋째는 보시하고 나서 그의 허물을 찾는 것이요,
넷째는 애써 보시한 마음을 기억해 주지 않는 것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욕망을 위해서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성냄 때문에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어리석음 때문에 보시하는 것이요,
넷째는 두렵고 무서워서 보시하는 것이다.
또 네 가지 법이 있다.
첫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제 손으로 보시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현재 세상에서 보시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남을 업신여기면서 보시하는 것이다.”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의 보시는 네 가지 악(惡)을 멀리 여윈다.
첫째는 계율을 깨뜨리는 것이요,
둘째는 의심의 그물이며,
셋째는 삿된 견해요,
넷째는 간탐하고 인색한 것이다.
또 다섯 가지 법을 여의어야 한다.
첫째는 보시할 때에 그에게 덕이 있고 없음을 가리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보시할 때에 그의 선악(惡)을 말하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보시할 때 그의 종성(種姓)을 가리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보시할 때 구하는 사람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 보시할 때 그에게 악한 말로 꾸짖지 않는 것이다.
또 보시하고 난 뒤에 뛰어나고 절묘한 과보를 얻지 못하는 것에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먼저는 많이 주려고 마음을 먹었다가 나중엔 조금 주는 것이요,
둘째는 나쁜 물건만 가려서 남에게 주는 것이며,
셋째는 이미 보시하고 난 뒤에 후회하는 것이다.
또 보시하고 나서도 최상의 과업을 성취하지 못하는 것에 여덟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보시하고 나서 그 보시를 받는 사람의 허물을 살피는 것이요,
둘째는 보시할 때에 마음이 평등하지 못한 것이며,
셋째는 보시하고 난 뒤에 받은 이에게 보답을 바라는 것이요,
넷째는 보시하고 난 뒤에 기뻐하면서 스스로를 찬탄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후세(後世:나중)란 없다고 말하면서 곧 주는 것이요,
여섯째는 보시하고 닌 뒤에 악한 말로 꾸짖는 것이며,
일곱째는 보시하고 난 뒤에 두 배로 갚기를 바라는 것이요,
여덟째는 보시하고 난 뒤에 의심을 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시주는 곧 모든 부처님과 현성(賢聖)을 만나지 못하는데, 만일 그 분들에게 빛깔ㆍ냄새ㆍ맛ㆍ감촉 등을 두루 갖추어 보시하면 이것을 청정한 보시라고 말하느니라.
만약 좋은 복밭만을 골라서 편벽되게 보시하고 항상 보시하기를 즐거워하지 않으면 이 사람은 미래에 과보를 얻을 때에도 은혜의 보시를 좋아해 않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보시하고 나서 후회하거나 만약 남의 물건을 겁탈하여 보시하면 이 사람은 미래 세계에 아무리 재물을 얻는다고 해도 항상 소모되고 쌓이지 않느니라.
만약 권속을 괴롭혀가면서 얻은 물건으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곧 미래 세계에 아무리 큰 과보의 몸을 얻는다 해도 몸에는 항상 병이 있어 고생하느니라.
만일 누구든 먼저 부모를 공양하지 않고 그 처자와 노비를 괴롭혀서 얻은 재물을 가지고 곤고(困苦)하게 보시하는 사람은 바로 악한 사람이라고 하며 또 그깃을 거짓 보시라 하고 또 의롭지 못한 보시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보시하는 사람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요 은혜를 갚을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나니, 그는 미래 세상에 아무리 재물과 보배를 얻는다 해도 늘 잃어버려 쌓이지 않기 때문에 꺼내 쓸 수도 없고 몸에는 병이 많아 고생하느니라.’
또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재물이 없는 사람은 스스로 재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 왜냐 하면, 일체의 물풀 같은 것은 누구든지 가지지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꼭 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요, 아무리 가난하고 궁색하다 해도 보시하지 못할 것은 없다.
왜냐 하면, 가난하고 궁색한 사람도 또한 먹을 몫이 있으며, 먹고 난 다음엔 그릇을 씻어 설거지물을 버리는데 그것을 받아 먹을 자에게 보시하는 것도 복덕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먼지 만한 밀가루라도 개미에게 보시하면 또한 한량없이 많은 복덕의 과보를 얻나니,
천하에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어느 누가 마땅히 이 먼지 만큼의 밀가루야 없겠는가?
또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라 해도 어느 누가 옷을 벗고 다닐 정도로 옷이 없겠는가?
만약 의복이 었다면 어찌 남에게 줄 실 한오라가와 바늘 하나가 없겠으며, 부스럼을 동여맨 한 손가락만큼의 재물로 등불 심지를 만들 수가 없겠는가?
선남자야, 천하 사람들 중에 누가 빈궁하다고 해서 그 몸까지 없는 사람이 있더냐?
만일 몸이 있다면 다른 이가 복을 짓는 것을 보면 몸소 그곳에 가서 도와야 할 것이니, 물 뿌리고 소제하는 것도 복의 과보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였다.
“한 염부제(閻浮提)의 승지(僧地)를 청소하는 것은 손바닥 넓이만한 부처님의 땅을 소제하느니만 못하다.”
또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발제성(跋提城) 안에 어떤 큰 거사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민다(琝茶)였다. 그 거사는 재물과 보배가 넉넉했고 큰 위력이 있어서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남들에게 물건들을 두루 보시하였다.
그는 창고에 큰 수레바퀴만한 구멍을 내놓고 쌀이 저절로 흘러나오게 했다.
그 부인은 여덟 되의 쌀로 밥을 지어 사부(四部)의 군사들과 사방에서 오는 사람에게 다 먹였으나 음식은 조금도 줄지 않고 그대로였다.
그 아들은 일천 냥의 금을 사부의 병사들과 사방에서 걸식하는 이들에게 주어 그들의 마음을 만족시켜 주었으나 오히려 다함이 없었다.
며느리는 한 봉지의 향을 사부의 병사들과 사방에서 밀려드는 걸인들에게 마음대로 주어서 그들을 만족시켜 주었으나 그 향 또한 다함이 없었다.
또 남자 종도 한 쟁기로 갈 만한 밭 일곱 이랑에서 나오는 쌀이 많았고, 여자 종은 여덟 되의 곡식으로 사부의 군사들과 말들에게 모두 먹였으나 그 또한 다 하지 않았다.
그러자 그 집안의 상전과 노비[良賤]들은 저마다 제 복 때문이라고 다투었다.
민다는 부처님께 가서 여쭈었다.
‘이런 것들은 다 누구의 힘 때문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희들 공동의 힘이니라. 옛날 왕사성(王舍城)에 어떤 방직공이 있었다.
그에게는 부인이 있었고 또한 아들이 있었으며, 그 아들에게도 또 부인이 있었고 한 사내 종과 여자 종이 있었는데 한꺼번에 같이 모여 밥을 먹고 있었다.
그 때 어떤 벽지불(辟支佛)이 그의 집에 와서 걸식하자 각자 자기 몫을 그에게 주려고 했다.
벽지불이 말하였다.
‘각자 조금씩만 덜어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당신들에게도 부족하지 않을 것이요, 저도 만족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그의 말을 따랐다. 벽지불은 밥을 다 먹고 나서 허공으로 올라가서 온갖 신통 변화를 부리다가 떠나갔다.
그 방직공의 권속들은 목숨을 버린 다음 사천왕천(四天王天)에 태어났고 그렇게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이르기까지 일곱 차례나 왕래하다가 남은 복으로 여기에 태어났으므로 그 과보가 다 똑같느니라.”
또 『정업장경(淨鄴障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보살이 간탐과 보시를 관찰하여 두 가지 모습을 짓지 않고 계율을 지키고 계율을 깨뜨리는 두 가지 모습을 짓지 않으며, 성냉과 인욕(忍辱), 게으름과 정진(精進), 난심(亂心)과 선정(禪定), 우치(愚癡)와 지혜(智慧) 등 서로 다른 두 가지 모습을 짓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업장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라고 한다.”
18.1.3. 재시연(財施緣)
『대보적경(大寶積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재물을 보시하는 데에는 다섯 종류가 있다.
첫째는 지극한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요,
둘째는 믿는 마음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때를 따라 보시하는 것이요,
넷째는 자기 손으로 보시하는 것이며,
다섯째는 법대로 보시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지지론(菩薩地持論)』에서 말하였다.
“온갖 보시를 간략하게 말하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안의 보시[內物:內施]요, 다른 하나는 바깥의 보시[外物:外施]이다.
보살이 몸을 버리는 것을 안의 보시라 말한다. 만약 토한 것을 먹는 중생을 위하여 먹고 난 다음 토해내어 보시하면 안팎의 보시[內外施]라고 한다. 위에서 말한 것을 제외한 나머지 것을 바깥 보시라고 말한다.
보살이 행하는 안의 보시[施]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하고 싶어하는 바를 따라 다른 사람의 힘이 되어서 자유롭게 몸을 버리는 보시이다.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옷과 음식을 위하여 남에게 얽매이고 소속되어서 다른 사람의 종이나 심부름꾼이 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보살은 이양(利養)만을 위해서가 아니요, 다만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보리(菩提)를 위한 것이며 중생들을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이며, 단바라밀(檀波羅蜜)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바라는 바를 따라 남의 힘이 되어서 자재롭게 몸을 버리는 보시이다.
또 다른 하나는 남이 필요로 하는 것을 따라서 팔 다리의 마디 등 온갖 것을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살이 실천하는 바깥 보시에도 또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그가 구하는 바를 따라서 수용하고 있는 쾌락의 도구를 기뻐하면서 베풀어 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를 받들어 섬기기 위하여 온갖 것을 버리는 마음으로 일체 것을 다 베풀어 주는 것이다.
보살의 안팎 물건에 차별이 없는 것이 아니어서 온갖 것을 보시하면서도 때로는 보시해야 할 것도 있고 혹은 보시해서는 안 될 것도 있다. 만약 중생들에게 즐겁기는 하나 편안하지 않은 것이든지 즐겁지도 않고 편안하지도 않은 것이면 베풀어 주지 않아야 할 것이며, 만약 중생에게 편안하긴 해도 즐거운 것이 아니거나 또한 편안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한 것이면 이것은 다 보시해야 하는 것이다.”
또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보살에게는 지혜를 구족(具足)하게 되는 네 가지 보시가 있다.
어떤 것이 그 네 가지인가?
첫째는 종이와 붓과 먹을 법사(法師)에게 주어서 그로 하여금 경전을 베끼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온갖 것으로 꾸며 장엄한 좋은 자리를 법사에게 보시하는 것이며,
셋째는 온갖 필요한 공양거리를 법사에게 받들어 바치는 것이요,
넷째는 아첨과 굽힘이 없는 마음으로 법사를 찬탄하는 것이니라.”
또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옷을 보시하면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얻고, 음식을 보시하면 더할 나위 없는 힘을 얻으며, 만약 등불을 보시하면 맑고 묘한 눈을 얻고, 만약 수레를 보시하면 몸의 안락함을 받으며, 만약 집을 보시하면 필요한 물건이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만약 깨끗하고 절묘한 물건을 보시하면 나중에 좋은 빛깔을 얻으므로 사람들이 보기 좋아하고 좋은 이름이 널리 퍼지며, 구하는 것마다 뜻대로 되고 으뜸가는 종성(種姓)으로 태어날 것이니, 이것은 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만약 자신을 위하여 의복이나 장엄하는 도구 등 갖가지 기물(器物)을 만들었을 때 다 만들고 나서 기뻐하면서 자신이 입거나 쓰기 전에 그것을 가져다가 다른 사람에게 주면 이 사람은 미래 세계에 여의수(如意樹)를 얻을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날마다 요긴한 서원을 세워 먼저 다른 사람에게 보시한 연후에 자신이 먹겠다고 했다가 요긴한 서원을 어기고 부처님께 물건 보내기로 한 것을 보내지 않으면 부끄러움이 생긴다. 만약 그 서약을 어기지 않으면 이것은 곧 미묘한 지혜의 인연이므로 이와 같이 보시한 사람은 보시 중에 으뜸으로써 이 사람도 또한 최상의 시주라는 이름을 얻으리라.
만약 처자와 노비(奴婢)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하면서 항상 불쌍하게 여기고 기뻐히는 마음으로써 주면 미래 세상에 한량없는 복덕을 얻을 것이다.
만약 또 밭아나 창고 안에 쥐와 참새가 많이 있어 곡식을 축내는 것을 보고 항상 가엾고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생각하기를 ‘이와 같은 쥐와 참새들은 나로 인하여 살게 된다’고 한 다음에 기뻐하면서 고민하는 생각이 없으면, 이 사람은 한량없이 많은 복을 얻는다는 사실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대보살장경(卿)n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얻기 위하여 다나바라밀다(陀那波羅蜜多:布施波羅蜜多)를 실천 할 때에 닦은 보시에도 또한 열 가지 칭찬할 만한 이익이 있다. 무엇이 그 열 가지인가?
첫째는 보살마하살이 가장 미묘한 다섯 가지 욕망을 보시했기 때문에 깨끗한 계(戒)ㆍ정(情)ㆍ혜(慧)의 덩어리와 해탈(解脫)ㆍ해탈지견(解脫知見)의 덩어리 를 획득하되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둘째는 보살이 가장 절묘하게 유희(遊戲)하는 악기(樂器)를 보시한 까닭에 청정하게 유희하는 법의 쾌락을 획득하되 두루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셋째는 보살이 원만하게 갖추어[具足]보시한 까닭에 원만한 법의(法衣)를 원 만하게 갖추게 되어 보리좌(菩提座)에 나아가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넷째는 보살이 손을 보시한 까닭에 원만하고 청정한 법의 손을 얻게 되어 중생들을 구제하되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다섯째는 보살이 귀와 코를 보시한 까닭에 모든 감관[根]이 원만하게 성취됨을 획득하되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여섯째는 보살이 팔ㆍ다리 등 사지를 보시하였기 때문에 청정하여 더러움이 없고 위엄이 있는 부처님의 몸을 획득하여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일곱째는 보살이 눈을 보시하였기 때문에 온갖 중생들을 관찰해 보는 청정한 법안(法眼)을 획득하여 장애가 없음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여덟째는 보살이 피와 고기를 보시하였기 때문에 굳고 단단한 신명(身命)을 획득하여 일체 중생을 거두어 보호하고 장양(長養)하는 정숙하고 진실한 선권(善權:方便)을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아홉째는 보살이 골수와 뇌(腦)를 보시하였기 때문에 원만하고 파괴할 수 없는 금강과 같은 몸을 획득하여 원만하게 갖추지 않음이 없느니라.
열째는 보살이 머리를 보시하였기 때문에 원만하고 삼계(三界)를 초월한 위없는 최상(最上)의 으뜸이 됨을 획득하여 두루 구족(具足)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사리자(舍利子)야, 보살마하살은 보리를 증득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보시를 실행하여 이와 같은 모습을 받았고 모든 원만한 부처님의 법으로 칭찬할 만한 이익의 으뜸가는 절묘한 공덕을 거둔 것이니, 모두가 다나바라밀을 만족하게 하기 위한 까닭이니라.’
그 때 세존께서 게송을 말씀하셨다.
보시를 실천하되 아름다운 몸과 재물을 구하지도 않고
또한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나기를 바라지도 않네.
내가 구하는 것은 위없이 뛰어난 보리(菩提)뿐이어서
보시가 적을지라도 곧 한량없는 복을 얻으리.”
18.1.4. 법시연(法施緣)
[自述] 이것은 재시(財施)와 법시(法施)를 서로 대비시켜 그 우세하고 하열함을 비교하여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시 중에는 법시가 제일이다.
왜냐 하면 재물의 보시는 한량이 있지만 법의 보시는 한량이 없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욕계의 과보를 얻지만 법의 보시는 삼계를 벗어나는 과보를 얻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번뇌를 끊을 수 없으나 법의 보시는 저 언덕에 청정하게 오르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다만 인간 세계와 천상의 과보를 감득(感得)하지만 법의 보시는 삼승(三乘)의 과보를 감통(感通)하기 때문이다.
재물의 보시는 지혜로운 사람이나 어리석은 사람이 다 할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오직 지혜로운 사람만이 할 수 있게 국한되었기 때문이요,
재물의 보시는 오직 보시한 사람만이 복을 얻을 수 있으나 법의 보시는 보시한 사람과 보시를 받은 사람이 통틀어 이익이 되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어리석은 짐승도 받을 수 있지만 법의 보시는 오직 총명한 사람에 국한될 뿐이기 때문이며,
재물의 보시는 다만 색신(色身)만을 이롭게 할 뿐이지만 법의 보시는 능히 마음과 정신까지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법의 보시는 탐욕과 질병을 증장시킬 수 있으나 법의 보시는 삼독(三毒)을 다 없앨 수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대집경(大集經)』에서 말하였다.
“아무리 많은 보물을 보시했어도 그것은 지극한 마음으로 한 게송을 외워 지니느니만 못하나니, 법의 보시는 가장 절묘하여 많은 음식을 보시한 것보다 우세하다.
또 『미증유경(未曾有經:未曾有因緣經)』에서 말하였다.
‘천제(天帝)가 야간(野干)에게 물었다.
음식을 보시하거나 법을 보시하면 어떤 공덕이 있습니까? 부디 설명하여 주십시오.’
야간이 대답하였다.
‘음식을 보시하면 하루의 목숨을 구제하고 귀중한 보배나 재물을 보시하면 한 생[世]의 궁핍함을 구제하지만, 그것은 다 계박[繫縛:집착]만을 더할 뿐이다.
법을 설하여 교화하는 것을 법시(法施)라고 하는데, 이것은 능히 중생들로 하여금 세간(世間)의 도를 벗어나게 한다.’
또 『대장부론(大丈夫論)』에서 말하였다.
“재물의 보시는 인간 세계에 있는 일이고 법의 보시는 큰 자비 가운데 있는 일이다.
재물을 보시하면 중생들 몸의 고통을 없애주고 법을 보시하면 중생들 마음의 고통을 없애준다.
재물의 보시는 애착이 많은 이에게는 재물과 보배를 베풀어 주지만 어리석음이 많은 이에게는 그 법을 베풀어 준다.
재물을 보시하면 그 행위로 인하여 다함이 없는 재물을 얻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다함이 없는 지혜를 얻으며,
재물을 보시한 사람은 몸의 안락을 얻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마음의 안락을 얻으며,
재물을 보시한 사람은 중생들에게 사랑을 받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세간의 존경을 받으며,
재물을 보시한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법을 보시한 사람은 지혜 있는 사람의 사랑을 받는다.
재물을 보시한 사람에겐 현재의 즐거움을 주고 법을 보시한 사람에겐 하늘 세계나 열반의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게송으로 말한다.
부처님의 지혜가 허공에 있을 때에
큰 자비는 빽빽한 구름이 되며
법의 보시는 마치 단비와 같아
음계(陰界)의 못에 가득 찬다.
네 가지 섭법(攝法)은 방편이 되고
안락(安樂)과 해탈의 씨앗이 되며
여덟 가지 바른 도를 닦고 다스리면
능히 열반의 과보를 얻을 수 있으리.”
또 『월등삼매경(月燈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어떤 보살이 법시(法施)를 실천하면 열 가지 이익이 있느니라.
그 무엇이 열 가지 이익인가?
첫째는 악한 일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능히 착한 일을 지으며,
셋째는 착한 사람의 법에 머무르고,
넷째는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이 하며,
다섯째는 도량으로 나아가고,
여섯째는 사랑하는 일을 버리며,
일곱째는 번뇌를 항복받고,
여덟째는 모든 중생들에게 복덕의 일부분을 베풀어 주며,
아홉째는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자비의 마음을 닦아 익히고,
열째는 법을 보고 기쁨을 얻는 것이니라.’”
또 『보살지지론(地持論)』에서 말하였다.
“보살은 저들이 삿된 견해로 법의 지혜를 구하는 것을 알면 그에게는 법을 주지 않고 경전도 주지 않는다.
만약 그의 성질이 재물을 탐하여 경전을 파는 사람인 줄 알면 그에게는 법을 베풀어 주지 않고,
만약 경전을 감춰두고 내어놓지 않으면 그에게도 법을 주지 않는다.
만약 그가 이치를 아는 사람이 아니면 그에게도 베풀어 주지 않고,
만일 그가 이치를 알고 이 경전에 대하여 이미 스스로 그 이치를 알면 곧 경전을 가져다가 그가 좋아하는 바에 따라 줄 것이다.
만약 그 뜻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꼭 닦고 배워야 하느니라.
또 다른 사람이 이와 같은 경전을 가지고 있는 것을 알면 그 대목의 뜻을 가르쳐 주거나 또는 베껴서 주느니라.
보살은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관찰하여 조금이라도 법을 아끼는 이가 있으면 법의 보시를 위해서라도 마땅히 경전을 가져다 주어야 한다.
나는 차라리 법을 보시함으로써 현재 세계에 벙어리가 될지언정 번뇌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래도 마땅히 보시해야 하겠거늘 더구나 그것이 장래에 지혜와 방편이 되는 것이겠는가?
또 『우바새계경』에서 말하였다.
“만약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가 사람을 잘 교화하여 계율ㆍ보시ㆍ다문(多問)ㆍ지혜를 원만하게 갖추거나,
혹은 종이와 먹으로써 사람들을 시켜 쓰고 베끼게 하거나,
혹은 여래의 바른 경전을 스스로 베껴 쓴 뒤에 남에게 보시하여 그로 하여금 읽고 외우게 하면
이것을 법시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법을 보시하는 사람은 미래 세상엔 천상에 태어나서 최고로 좋은 몸을 얻는다.
왜냐 하면 중생들이 그 법을 들으면 성내는 마음을 끊어 없애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에서 가장 좋은 몸을 얻는다.
중생들이 법을 들으면 인자한 마음으로 살생하지 않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긴 수명을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다른 사람의 재물과 보배를 훔치지 않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많은 재물과 보배를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마음이 열려 보시하기를 좋아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몸에 큰 힘을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를으면 모든 방일한 행위를 여의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계엔 안락한 몸을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성내고 어리석은 마음을 없애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걸림이 없는 말재주를 얻는다.
중생이 그 법을 들으면 믿는 마음에 의심이 없나니, 이러한 인연 때문에 미래 세상엔 믿는 마음이 밝고 또렷해진다.
계율ㆍ보시ㆍ다운ㆍ지혜도 또한 이와 같느니라. 그러므로 법을 보시하는 것은 재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뛰어나고 훌륭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문] 법을 보시하는 것이 재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우세하다는 것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도 현재의 중생들이 오직 법을 보시하는 것만 배우고 재물 보시는 실행하지 않는다면, 모르기는 해도 그래도 되는 것인가?
[답] 재물 보시하는 것을 진정 모르고 미혹한 마음으로 보시하여 구차하게 빛깔과 음성, 인간 세계나 천상의 즐거운 과보만 구하다가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져서 세간을 벗어나는 법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러울 뿐이다.
그러므로 성인들은 은근히 법을 찬탄하여 그들로 하여금 세 가지 일의 본체가 공(空)한 것임을 깨닫고, 재물을 보시하게 함으로써 속히 보리(菩提) 열반(涅槃)의 뛰어난 과업을 이루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계율과 인욕 등 육도(六度 :육바라밀)의 만행(萬行)은 다 지혜의 힘을 빌어 우세한 과업을 이룬다는 것을 개도(開導)한 것이다.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앞의 다섯 바라밀[度]은 비유하면 눈먼 사람과 같고 여섯 번째 반야바라밀의 일은 밝은 눈이 있는 사람과 같다.
만약 반야를 얻지 못하고 앞의 다섯 바라밀을 개도하면 곧 악한 세계에 떨어져서 세간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법을 보시하는 것이 재물을 보시하는 것보다 낫다는 설법을 듣고서 어리석은 사람은 곧 재물을 감추어 두고 오직 경전 읽기만 즐겨한다.
만일 이러한 법을 실행한다면 이는 어떤 사람이 마음으로 깨닫고 일 전의 돈을 보시하는 것만 못하다.
일 전이라도 보시하는 것은 미혹한 마음으로 백천만 권의 경전을 읽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여래께서는 해(解)와 행(行)에 뜻을 두라고 가르침을 베푸신 것이다.
만일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그 앎은 곧 공허한 것이요,
만일 오직 실천만 있고 앎이 없으면 그 실천은 곧 외로울 것이니,
아는 것과 실천을 모두 갖추어야 비로소 저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오직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눈만 있고 발이 없어서 멀리 건너갈 수 없는 것과 같으며,
만일 오직 실천만 었고 앎이 없다면 그것은 마치 발만 있고 눈이 없어서 길을 보지 못하고 마구 가는 것과 같다.
또 오직 알기만 하고 실천이 없으면 마치 헛꽃과 같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고,
또한 오직 실천은 하되 앎이 없으면 마치 종자와 같아서 꽃을 피우지 못하는것과 같다.
그런 까닭에 반드시 이해와 실천을 함께 행해야 비로소 부처님의 과업을 이룰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