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중(示衆)
13-1 수처작주(隨處作主)하라
師示衆云, 道流야 佛法無用功處요
祇是平常無事니 屙屎送尿하며 著衣喫飯하며 困來卽臥라.
愚人笑我나 智乃知焉이니라.
古人云, 向外作工夫는 總是癡頑漢이라하니라.
《해석》
임제 스님이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도를 배우는 벗들이여!
불법은 애써 공을 들여서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이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밥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나를 비웃겠지만 지혜로운 이는 알 것이다.
옛사람이 말하기를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 라고 하였다”
《강설》
우리나라 스님들은 임제 가풍을 너무 좋아한 나머지
사람이 죽었을 때 영결사나 조사나 추모사를 하는 자리에서도 ‘할’을 한다.
임제 가풍을 쓰고 싶어 몸살이 난 사람들이다.
몸살이 나지 않고서야 간절히 애도를 해야 하는 자리에서
그 같은 ‘할’을 할 수 있겠는가.
큰스님들의 영결식에 가서 보면 얼마든지 만나는 광경이다.
그런데 그 외의 불교에는 실로 거품이 너무 많다.
위와 같은 임제 스님의 올곧은 가르침은 어디 갔는가.
위의 글에서 불교가 무엇이라고 했는가.
“불교는 애써 공을 들여가며 공부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평상대로 일없이 인연 따라 살면 된다.
똥 싸고 오줌 누며, 옷 입고 밤 먹으며,
피곤하면 눕는 것이다.”라고 했다.
이제는 공연히 쉬운 불교를 어렵게 만들지 말고
정통 불교로 돌아가서 이와 같이 쉽게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불교의 지름길이자 성불의 지름길이다.
옛 사람도
“자신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모두가 어리석고 고집스런 놈들이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불교의 거품을 모두 걷어내고
바른 불교 쉬운 불교 간단한 불교로 가야 한다.
참으로 옛 것이 새로운 것이다.
한국불교가 기왕 임제 스님의 법을 이어 받았다면
이 임제록으로써 한국불교 개혁의 선언서로 삼았으면 한다.
기억해둬야 할 구절이다.
불법무용공처 지시평상무사(佛法無用功處 祇是平常無事).
불교를 아주 쉽고 편안하게 하는 가르침이다.
儞且隨處作主하면 立處皆眞하야 境來回換不得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하야도 自爲解脫大海니라.
今時學者는 總不識法하고 猶如觸鼻羊이 逢著物安在口裏하야
奴郞不辨하며 賓主不分이라.
如是之流는 邪心入道하야 鬧處卽入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이요
正是眞俗家人이니라.
《해석》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이 된다면
서 있는 곳마다 그대로가 모두 참된 것이 된다.
어떤 경계가 다가온다 하여도 끄달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묵은 습기와 무간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죄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큰 바다로 변할 것이다.
요즈음 공부하는 이들은 모두들 법을 모른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처럼
종과 주인을 가리지 못하며,
손님인지 주인인지를 구분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도[佛敎]에 들어왔다.
그러므로 이해득실과 시시비비의 번잡스런 일에 곧바로 빠져버리니
진정한 출가인 이라고 이름 할 수 없다.
그야말로 바로 속 된 사람[俗人]이다.”
《강설》
임제록에서 꼭 기억해 두어야 할 구절이다.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잊지 말아야 할 구절이다.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잃어버리지 말고 상황에 끄달리지 말고,
주체적 인간으로 살면 무엇을 하든 그 하는 일과 그 있는 자리가
모두 진실한 진리의 삶이다.
상황과 처지에 끌려 다니면서 자신을 잊어버리지 말고,
상황과 처지의 주체적 역할을 하라.
어떤 일도 주체적 역할을 할 때 그 일은 곧 온전한 내 일이고,
온전한 나의 삶이다.
이것이 철저히 살고 철저히 죽는 전기생 전기사(全機生 全機死)며,
대기대용(大機大用)의 삶이다.
실로 천고의 명언이다.
이 한마디로 임제는 저 넓은 태평양이고, 허공이다.
수미산 꼭대기고, 히말라야 정상이다.
비상비비상천이고, 수 만 광년 저 바깥이다.
그러나 백보 끌어내려서 이렇게 해석하면 어떨까.
“어디에 가건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자신의 자리다.
그러므로 현재의 위치가 아닌,
지금과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기를 바라고 꿈꾸지 말라.
지금 있는 이 자리가 어떤 상황이든 만족하고 행복하라.
자신이 가고 싶은 곳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현재 자신이 있는 곳에 초점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라.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에 초점을 맞추어
언제나 배고픈 아귀가 되지 말고,
자신이 갖고 있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
만족하고 넉넉하게 부자로 살아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되면
설사 옛날에 익힌 업장과 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즉 부모를 죽인 일나, 성인을 죽인 일이나, 부처님의 몸을 해치거나,
청정한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하는 따위의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저절로 해탈의 대해에 노니는 것이 된다.
설사 인간이 저지를 수 없는 극악무도한 일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그대로 해탈이라는 뜻이다.
어떤 상황에 있든 주인이 되라[隨處作主]는 말은
타인으로부터 어떤 취급을 받든
자신은 거기에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기도 하다.
타인이 나를 때리고 욕하고 비방하고 모함하고 저주하고 질투하고
내 것을 빼앗아 가고 큰 손해를 입히고
훼방하여 큰 곤경에 처하게 하더라도
그것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이고
자신은 그것에 동요하지 않고 의연히 대처하는 것,
타인이 하는 일에 끌려가지 않고 분노하지 않고
자신의 본심으로 주체자가 되어 있으면
어떤 상황에서도 다 행복하다.
그것이 진정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다.
자신에게 불이익과 손해가 돌아오고 비방이 돌아오고 하더라도
자신은 그것을 다 받아들이고 그것에 따라 반응할 필요는 없다.
예컨대 손님에게 맛난 음식을 잘 차려 대접하더라도, 비방과 손해를 가하더라도,
손님이 그 음식을 먹지 않으면
그 음식은 결국 음식을 차려 대접한 사람에게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런데 요즘 공부하는 이들은 이러한 마음의 법을 알지 못한다.
마치 양이 풀이고 나무고 가시고 간에 닥치는 대로 먹어치우는 것처럼
아무런 말이나 다 받아들인다.
삿된 말과 마구니의 말을 잘도 받아들인다.
비방과 손해와 때리고 욕하는 일들을 잘도 받아들인다.
분별력이 전혀 없다.
방편과 진실을 전혀 가리지 못한다.
정법과 사법을 전혀 모른다.
그 말 많은 불교를 잘 변별해서
이제는 거품을 걷어내고 적확(的確)한 불교를 공부할 때다.
진정견해가 참으로 요구되는 때다.
좀 더 부연해서 말한다면
이런 무리들은 삿된 마음으로 불교에 들어와 있다.
이해득실과 시시비비 등등
정치적이거나 불교 외적인 것들에 열을 올리고 빠져들어
가위(可謂) 박사가 되어 있다.
불교 외적인 일들을 열거하기로 하면 끝이 없다.
정치문제 사회문제, 경제문제 환경문제, 명성과 이익, 학위나 운동이나,
예술이나 문필이나, 먹을거리 마실 거리 등등 종류도 너무 많다.
이런 것들에 정신이 빠져 있으면서
불교를 운위하는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치 양이 코를 들이대어 닿는 대로 입안으로 집어넣는 것과 같다.
임제스님은 이런 이들을
“참다운 출가인 이라 할 수 없다.
참으로 속된 사람이며 저질이며 속물 그 자체다.”라고 말씀하신다.
아무리 높은 예술의 경지에 올랐다 하더라도,
또는 영웅호걸의 큰 그릇이라 하더라도
불법지견(佛法知見)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3-1 수처작주(隨處作主)하다
師示衆云(사시중운), 道流(도류)야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요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니
屙屎送尿(아시송요)하며 著衣喫飯(착의긱반)하며 困來卽臥(곤래즉와)라
愚人笑我(우인소아)나 智乃知焉(지내지언)이니라.
古人云(고인운),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하니라.
儞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境來回換不得(경래회환부득)하야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今時學者(금시학자)는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蓬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하야
奴郎不辨(노량불변)하며 賓主不分(빈주불분)이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邪心入道(사심입도)하야
鬧處卽入(요처즉입)이니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이요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니라.
수처작주(隨處作主), 이게 임제 스님의 법문 중에
무위진인, 수처작주, 이런 말이 아주 대표적인 말이죠.
‘師示衆云(사시중운), 道流(도류)야, 佛法無用功處(불법무용공처)요’,
불법이라고 하는 것은, 用功處(용공처), 공부할 것이 없다 이 말여.
참 좋지요, 편안하잖아.
애써서 공부해야 되고 용맹정진해야 되고 하면 힘들 텐데
불법은 공부할 게 없다.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겁니다.
불법은 공부할 게 없다.
‘祇是平常無事(지시평상무사)니’, 다만 평상대로,
욕심나거든 욕심 부리고 슬프거든 울고
화나거든 화 한번 내고 그냥 그렇게 생각해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크게 욕심낼 사람도 아니고 울 일도 없고 그렇습니다.
평상무사가 됩니다.
그래 여기 ‘屙屎送尿(아시송요)하며’,
뭐라고? 똥 누게 되면 똥 누고 오줌 누게 되면 오줌 누고,
‘著衣喫飯(착의긱반)하며’, 옷을 입기도 하고 밥을 먹기도 하고,
이게 그냥 일상사여.
‘困來卽臥(곤래즉와)라’, 피곤하면은 곧 누워서 잔다.
이게 그야말로 평상사죠.
평상무사의 일이지.
똥 안 누는 사람 어디 있고 오줌 안 누는 사람 어디 있으며
일어나면 그 상황에 맞춰서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식사 때 되면 식사하고 피곤하면 자고.
얼마나 평범하고 그야말로 보편타당한 것입니까.
진리는 보편타당한 것이거든요.
그래서 ‘愚人笑我(우인소아)나’,
어리석은 사람은 저 처지도 모르고
용맹정진하고 삼아승지겁을 닦고
정말 계율을 철저히 지키고 온갖 일과 다 하고 그래야 되는데
저거 천지도 모르고 저런다,
나를 비웃지마는 ‘智乃知焉(지내지언)이니라’,
지혜로운 사람은 이에 안다 말여.
‘古人云(고인운), 向外作工夫(향외작공부)는’,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는 것은
‘總是癡頑漢(총시치완한)이라하니라’, 밖을 향해서 공부 짓는 것은
모두 다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癡頑, 頑자는 완악할 완 자 거든요.
아주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
그 말을 치완한이라 그럽니다.
시골에서 더러 봤는데,
소를 잡으면 가죽을 약품 처리하면 아주 부드러운데
그걸 약품 처리 하지 않고 그냥 바싹 마르면 쇠보다도 더 강합니다.
쇠는 부러지기라도 하지, 이건 부러지지도 않아.
돌은 깨지지만 이건 깨지지도 않아.
완피달이라 그러거든요, 완피달.
그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게 그렇습니다.
사람이 마음을 열고 생각을 유연하게 가져 가지고
남의 생각도 들어보고
남의 소견도 좀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그래야 되는데
그 좁디 좁은, 좁아터진 소견,
그거 하나 지킨다고 탁 옴짝달싹 못하는 그런 거,
정말 그건 제도불능이거든요.
미륵이 천번 만번 출세한다 하더라도 제도하지 못하는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어리석음을 제일 경계하지 않습니까.
반면에 지혜를 제일 높이 숭상하고요.
총시치완한이라, 밖을 향해서 공부하는 사람은
정말 어리석고 어리석은 사람이다.
다른 신도들에게는 상황 따라서 또 근기 따라서
또 어떤 그 한국 불교적인 여러 가지 분위기 따라서
방편을 이리 쓰고 저리 쓰고 할 수는 있어요.
하지만 우리 프로는 이런 사실을 환하게 알고 있어야 돼요.
그러면서 방편을 활용할 수 있어야 된다, 그렇게 말씀드립니다.
‘儞且隨處作主(이차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하야’,
나는 이런 말 전부 저 염화실이라고 하는 카페에 다 올려놓으면
신도들이 다 들어.
또 글로 녹취를 해가지고 올려놓으니까 글로도 다 봐 버려.
그래서 이젠 비밀이 없어.
스님들끼리 뭔 소리를 했는지 환하게 다 안다고요.
좋은 일인지 안 좋은 일인지는 모르겠으나
세상은 그만치 드러나 버리는 그런 시대가 됐어요.
감출 수도 없고 감출 것도 없고.
그저 다 알고 지내는 거지.
그대들은 또한 隨處作主(수처작주)하면 立處皆眞(입처개진 )하야,
隨處作主 立處皆眞, 요게 완벽한 표현이죠.
곳을 따라서 주인을 짓는다.
밖을 향해서 공부를 짓지 아니하면 제자리에 있는 거죠.
수처작주가 되는 거지.
그러면 서 있는 그곳, 立處, 서 있는 그곳이 皆眞, 전부 진리의 세계다.
이 여덟 자가 임제 스님의 대표적인 법문이죠.
무위진인도 대표적인 법문이고.
‘境來回換不得(경래회환부득)하야’, 그 정도가 되면,
수처작주해서 입처개진이 될 거 같으면
어떤 경계가 오더라도 그 경계와 回換(회환), 바꾼다는 뜻입니다.
不得, 바꾸지 못한다.
뭐 천금 만금이 오더라도 거기에 까딱 않는다 이거여.
또 어떤 신기한 현상이 눈앞에 벌어지더라도
거기에 나를 빼앗기지 않는다.
회환부득해서, 바꾸지 아니해서,
‘縱有從來習氣五無間業(종유종래습기오무간업)하야도’,
비록, 從來, 과거부터 내가 익힌 업장 그리고 습기, 이것하고
五無間業, 무간지옥에 들어갈 다섯 가지 업,
습기하고 무간옥에 들어갈 그런 업이 있다 하더라도
‘自爲解脫大海(자위해탈대해)니라’,
무간지옥에 들어갈 그런 다섯 가지 업을 가지고 있는 그대로
解脫大海(해탈대해)야. 해탈의 큰 바다라.
그 업하고 아무 관계없다 이겁니다.
습기하고도 아무 관계없는 거여.
종래습기하고 아무 관계없어.
그래서 종래 습기와 다섯 가지 무간옥에 들어갈,
무간 지옥에 들어갈 업이 있다 하더라도 저절로 이것은 해탈대해다.
‘今時學者(금시학자)는’, 요즘 공부하는 사람들은,
‘總不識法(총불식법)하고’, 옛날에 전강 스님 밑에 내가 두 철 살았는데
전강 스님은 계속 우리 수좌들 보고 학자, 학자 그래.
어록에 보니까 이렇게 수행하는 사람들을 학자라고 그렇게 했어요.
지금 우리가 ‘학자’ 하면 무슨 학문하는 사람들,
문자를 가지고 어떤 學을 연구하고 하는 사람들을 학자라고 그러는데
진짜 공부하는 사람을 학자라 그랬어요.
마음 공부하는 사람을 학자라 그래요.
내가 그 때 들은 그 기억을 지울 수가 없어요.
‘猶如觸鼻羊(유여촉비양)이’,
양은, 염소는 시력이 약해 가지고 입에 닿기만 하면 뭐든지 먹는 거야,
가시고 나무고 풀이고 할 거 없이 무조건 씹어 먹는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마치 촉비양, 그런 양이,
‘蓬著物安在口裏(봉착물안재구리)하야’,
사물을 蓬著(봉착), 만나기만 하면,
口裏(구리), 입속에다 安在(안재), 갖다 집어넣는 거와 같아서,
금시학자는 그렇다 이 말이여.
이치를 알지 못해 가지고서,
‘奴郎不辨(노량불변)하며’, 종과 주인을 가려 내지 못하고.
그러니까 어느 도량이 영험이 있단다, 무슨 경이 좋단다,
무슨 진언이 좋단다고 하면 그만 뭐든지 취한다 이 말입니다.
마치 촉비양, 양이라고 했지만 시력이 약한 염소입니다.
입에다 뭐든지 갖다 넣는 것처럼
불법 좋다고 하면 이것도 해 봤다가 저것도 해 봤다가.
그리고 ‘賓主不分(빈주불분)이라’.
객인지 주인인지 나누지도 못하니라.
‘如是之流(여시지류)는’, 이와 같은 류는
‘邪心入道(사심입도)하야’, 邪心(사심)으로 入道(입도)라,
삿된 마음으로서 도에 들어가 가지고서
‘鬧處卽入(요처즉입)이니’, 아주 시끄러운 곳에 곧 들어가.
이게 출가와 속가의 차이점이라고 하는 것은
늘 내 중심에 있느냐 아니면 바깥 경계, 주변에 있느냐, 하는 차이죠.
불교 외적인 일들에 놀아나는 것이
요처즉입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不得名爲眞出家人(부득명위진출가인)이요’,
이름을 참다운 출가인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正是眞俗家人(정시진속가인)이니라’, 그게 속가인이다 이 말이여.
중이 돼 가지고 잡다한 세속적인 거,
물론 소질도 있고 취미가 있으면
꽃꽂이도 해 보고 글씨도 써 보고 그림도 그려보고
피아노도 해 보고 뭐 온갖 거 다 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런 거는 가지 좀 치고
특히 스님들은, 프로는 불교, 여기에 매진해야 돼요.
이 불교만 잘 알면 그것이 큰 재산이고 큰 무기라.
그런데 뭐 그림도 그리고 차도 하고 도자기도 해보고,
이런 세속적인 지식은 아주 파다하게 많아요.
그런데 뭐 하나도 쓸모 있는 게 없는 거야.
나는 그래요.
스님들은 무조건 불법, 거기에 매진하라.
그거 아주 철두철미하게 잘 해 놓으면
그 이상 큰 무기가 없고 그거보다 더 좋은 그런 재산이 없다.
우리 스님들은 불법에 올인하기가 너무 조건이 좋은 거요.
그래서 특히 우리는 경전과 어록 공부에
자기 소신을 세워 가지고 열심히 정진하는 것,
이것은 큰 무기가 되고 큰 재산이 되고
자기 자신을 버티게 해 주는 버팀목이 됩니다.
불법 이치를 깨달아서 안심미묘한 그런 차원은 놔두고라도
정말 자기를 버텨주는 훌륭한 버팀목이 되고 쓰일 데가 많아요.
요즘 불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요.
불교 공부 잘 해서 완전히 그 이치를 꿰뚫어 가지고
누가 와서 무슨 질문을 하더라도 척척 이야기해 줄 수 있는
그런 자신감을 갖게 되면 더 이상 좋은 일이 없죠.
오늘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라,
이 대목까지 공부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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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소서..광혜의하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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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행복하고 또 행복하소서 길상행님 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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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처작주(隨處作主) 입처개진(立處皆眞) - 머무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지금 있는 그 곳이 바로 진리의 세계이며 주인공임을 알기를 바랍니다
말씀이 굉장합니다
참된 주인공을 잊지말고 늘 깨어있으라는 말씀 명심합니다
우리불교가 쉬운불교, 생활불교를 거듭나기를 바라고 원합니다
쉽게 다가가는 불교가 절실히 필요하다 여깁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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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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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나무아미타불_()_
無比스님 講說 49 - 臨濟錄 - 示衆 - 13-1 隨處作主하라.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_()__()_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utmost heart that the holy and holy Buddha's robe and mercy light will shine on it.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