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리톤은 ‘낮다’란 뜻을 가진 그리스어 ‘바리토노스’에서 나온 말로서,
테너와 베이스 사이에 존재하는 남성 성악가의 성구를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가온 다음부터 한 옥타브 위의 내림 가음 사이의 음역을 포함한다.
여성의 중성역이 그렇듯 남성의 중성역도 역사가 그리 길지 않다. 성악예술의
체계가 잡힌 17세기 바로크 시대까지만 해도 남성과 여성의 목소리는 높은 성구와
낮은 성구, 여기 하나 더 보태 남성의 카스트라토 성부가 있었을 따름이다.
당시 남성의 낮은 성구는 이탈리아어에서 나온 ‘바소’, 즉 베이스라는 단어로
통칭했다.
하지만 다양한 배역이 저마다 개성을 뽐내는 오페라에서 남성 저역을 베이스
한 가지로 단정지을 수는 없는 일이다. 오페라 레퍼토리가 늘고 베이스와
다른 남성의 저성이 발견되면서 바리톤이라는 성부의 탄생이 절실했다.
바로크 오페라 가운데서도 라모의 ‘히폴리트와 아리시’ 중 테세우스
역을 들으면 베이스의 성질보다는 그보다 가볍고 밝은, 오늘날 바리톤의
기운이 더 많이 느껴진다. 바로크 시대에는 이처럼 인간적인 면을 많이
지닌 신(인간적인 면모가 적으면 정통 베이스에게 돌아간다)이나,
아예 인간 중에 인자한 노인, 매서운 적장, 무뚝뚝한 하인 가운데에는
바리톤의 성질을 지닌 가수에게 더 어울리는 배역이 많다.
바리톤이 베이스보다 높은 음역을 노래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의 차이가
단순히 물리적인 진동수 차이에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톤의 빛깔, 공명에
포함된 두성과 흉성의 비율, 성량 등 목소리의 이미지에 따라서도 바리톤으로서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러한 특징은 자연스럽게 배역의 성격을 바꾸어버린다.
이를테면 모차르트의 부파에서는 바리톤과 베이스 어느 쪽도 ‘바소 부포’
(우스꽝스런 캐릭터로 고전시대 남자 저성가수가 많이 담당했던 배역)의 주인공을
맡을 수 있는데, 만약 ‘돈 조반니’를 바리톤이 부를 경우 이 인물은
불한당보다는 기사도 정신을 가진 신사 쪽에 가깝게 묘사된다. 전체적인 음조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리트 발굴의 선구자 역할
그렇다면 바리톤을 가장 바리톤답다 말할 수 있는 더 구체적인 기준은 없을까.
광범위하게 설득력을 발휘하는 것은 바로 낭만주의 독일 리트이다. 지난 100년
동안 독일 리트는 하인리히 슐루스누스, 테너로 전향하기 이전의 장 드레즈케,
한스 호터·피셔 디스카우 등 전설 같은 독일 가수들에 의해 바리톤의 전유물이 됐다.
오늘날 유능한 바리톤이라면 오페라 무대 못지않게 리사이틀 홀의 활동도 소홀히
할 수 없다. 사람들이 바리톤을 독일 리트를 위한 성부로 여기는 까닭에는
여러 가지 있을 것이다. 일단 바리톤(혹은 베이스 바리톤)에 의해 수많은
레퍼토리가 발굴되고 그 진수가 전해졌기 때문에, 첫인상이 굳어졌을 수 있다.
또 하나 중요한 이유로 많은 이론가들은, 바리톤이 평소 말하는 톤에 가장 가깝다는
점을 든다. 큰 극장을 인공적인 소리로 채워야 하는 테너와 달리, 리사이틀 홀에서
들리는 바리톤 음성은 좀더 인간적이다. 시어를 읊는 표정이 정감있고 그래서 가곡
전체의 메시지가 더 뚜렷이 전달되는 것이다. 물론 프리츠 분덜리히나 페터 슈라이어와
같이 바리톤 못지않게 리트에 능숙한 테너도 있다. 하지만 어둑한 정서가 월등한 장르의
특질상, 대부분 테너들은 같은 급의 바리톤만큼 깊은 맛을 주는 이야기꾼은 되기 힘든
모양이다. 원래는 테너를 위해 씌어졌지만, 악보를 조옮김하면서까지 바리톤의 음성으로
더 자주 감상되는 슈베르트의 연가곡은 그 증거가 아닐지.
하지만 바리톤을 규정하기에 리트가 너무 협소한 장르인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최근 영미계 가수들이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지만, 언어가 중요한 표현요소인 만큼
리트는 분명 독일 가수들 차지이다. 무엇보다 가곡을 통해서는 성부의 특징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부르는 사람이 한정돼 있고 악곡이 ‘문어체’이다 보니,
천차만별인 개성을 맛보기 힘든 까닭이다. 이렇게 본다면 바리톤의 진면목을
알아보는 데는 오페라가 역시 최상의 장르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오페라에서도 바리톤은 낭만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이 시기 바리톤은 성격파 배우로서
음악을 더욱 풍성하게 가꾸었으며, 드라마를 더욱 공고히 했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제임스 앤더슨이 쓴 오페라 사전에 보면 국가별, 성질별로 나눈 바리톤의 종류는
무려 11가지에 이른다. 이처럼 다양한 하위성부는 19세기 작곡가들이 얼마나
가지각색의 취향과 기호를 바리톤을 통해 나타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주연 바리톤의 역할은 크게 세 가지 나누어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주인공 테너의 반동세력으로서, 극의 갈등을 일으키고 긴장을 형성하는 역.
베르디 ‘오텔로’ 중 이아고, 비제 ‘카르멘’ 중 에스카미요, 바그너 ‘로엔그린’
중 텔라문트 등이 여기에 속한다. 둘째는 주인공 테너의 친구나 친척으로 인간미를
불러일으키는 역. 베르디 ‘돈 카를로’ 중 로드리고, 푸치니 ‘라 보엠’ 중
마르첼로, 바그너 ‘탄호이저’ 중 볼프람 등이 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 조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당당히 주인공으로 나선 경우도 많다. 베르디의 ‘맥베드’
‘리골레토’ ‘팔스타프’, 도니제티의 ‘돈 파스콸레’, 푸치니의 ‘잔니 스키키’
등은 바리톤에게 과감히 타이틀 롤을 맡김으로써 극적 효과를 높였다.
역에 따른 바리톤의 종류는 이보다 훨씬 다양한데, 나라별로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뉘는 공통점이 있다. 가장 저역의 바리톤은 프랑스의 바스-테유, 독일의
베이스-바리톤, 이탈리아의 바소-프로폰도, 중역은 각각 바리통, 헬덴 바리톤,
바리톤-브릴란테, 고역은 각각 바스-마르탱, 호헤 바리톤, 베르디 바리톤 등으로
대별된다. 하지만 이런 분류는 배역이 갖는 연극적인 특질까지도 함께 고려되기 때문에
일괄적인 적용이 힘들다. 또 작곡가들이 직접 지정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늘날 수많은 바리톤을 가르기 위해 편의상 채택한 것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 싶다.
2001-11-14 오후 6:11:23
이재준 |음악 칼럼니스트
제목 : [바리톤] 세기의 바리톤들
20세기 전반까지 바리톤들은 리트와 오페라에 능한 팔방미인이었다. 하지만 각각의
레퍼토리가 방대해지면서, 두 장르에서 모두 두각을 나타내기란 어려워졌다.
더구나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지 않는 이상 비독일계 바리톤들에게 리트는 ‘그림의 떡’
일 수밖에 없다. ‘리트에 정통한 이탈리아 바리톤’은 그 말 자체로도 매우 어색하다.
리트
리트의 우수성을 처음 본격적으로 알린 이는 하인리히 슐루스누스와 게르하르트 휘시
이다. 1930년대 이들의 녹음(프라이저)을 들으면, 전자에는 베이스에 육박하는 깊고
풍부한 저성, 후자에는 벨벳과 같은 프레이징에 세련미가 가득하다. 그를 계승한
피셔 디스카우는 주지하다시피 말과 음표 사이의 상호작용에 관심을 기울이며 거의
모든 낭만 가곡을 높은 수준으로 집대성했다. 이후 등장한 헤르만 프라이는 저평가된
감이 있지만 슈베르트 등에서 시적 감흥이 뛰어난 해석을 들려주었다. 제라르 수제는
프랑스인이면서 리트에 능통했던 특이한 경우였는데, 80년대 이후에는 비독일인 가운데
훌륭한 리트가 많이 배출됐다. 미국의 햄슨, 영국의 킨리사이드·터펠 등이 대표주자
이다. 이에 맞서는 독일-오스트라아계 신진 그룹에는 괴르네·크바스토프·겐츠 등이
있다.
오페라
이탈리아-프랑스 레퍼토리와 독일 레퍼토리로 가수들의 장기가 확연하게 구별된다.
빅토르 모렐·바스콸레 아마토·마리오 앙코나 등은 베르디에게 직접 지도를 받은
세기 초 위대한 가수들이었다. 이후 티타 루포·주세페 데 루카·로렌스 티벳 등이
베르디 바리톤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후 레너드 워렌·셰릴 밀른스 등 미국 출신
가수들이 나왔다.
바그너로 대변되는 독일계 오페라에는 프리드리히 쇼르 등이 바이로이트를 오랫동안
점령했으며, 슐루스누스 역시 위대한 바그네리안이었다. 이후 ‘영원한 보탄’
한스 호터가 이들을 계승했다. 80대 이후 러시아 오페라 붐을 타고 등장한 러시아
바리톤들도 큰 매력을 준다. 대표격인 흐보로스토프스키·라이페르쿠스 등은
이탈리아 오페라에도 뛰어난 기량을 선보였으며, 러시아 가곡의 소개에도 적극적이다.
2001-11-14 오후 6:16:57
이재준|음악 칼럼리스트
제목 : [바리톤] 오페라 속의 바리톤
피가로에서 이아고까지, 인간을 노래한다.
오페라에서 바리톤의 역할은 생각보다 훨씬 중요하다. 가장 전형적인 오페라의 구도를
한번 생각해 보라. 타이틀 롤은 아마도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 비련의 소프라노일
것이고 상대역은 그녀의 연인인 테너일 것이다. 그럼 제3의 배역은? 베이스나 메조
소프라노가 아니다. 대개의 경우 그 자리는 바리톤이 차지한다. 너무 익숙해져 있는
구도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이런 형태는 오랜 오페라 역사를 통해
힘들게 형성된 결과이다. 일반적인 4성부 합창을 보자.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의
순서며 바리톤은 아예 빠져있다. 독자들도 경험하는 일이겠지만 성가대에서 바리톤의
음역을 가진 사람은 테너와 베이스중 더 어울리는 쪽을 선택해야 한다.
오페라를 제외한 종교음악 등 일반 성악곡의 솔로이스츠 구성을 보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베이스가 독창진의 일원인 경우는 많지만 바리톤이 그 자리에 들어가는
예는 드문 것이다. 따라서 오페라에서 바리톤의 부상은 당연한 결과가 아니라 오랜
실험과 실패의 반복 속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바리톤의 존재가치는 바소 부포를 통해 대두
옛 오페라에서는 바리톤의 음역을 일반적으로 사용했다고 볼 수 없다. 얼마나 엄격한
잣대를 적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견해도 있겠지만 어떤 음악학자는 오페라에서
바리톤이라는 성부가 구체적으로 지정된 것은 1840년 파리에서 초연된 도니제티의
오페라 ‘라 파보리타’의 알폰소 국왕 역이 최초라고 주장하고 있다. 18세기 오페라의
가장 잘 알려진 배역들인 모차르트의 피가로·알마비바 백작·파파게노·돈 조반니 등등,
오늘날 이런 역은 거의 바리톤이 부른다. 그러나 당대에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베이스
이면서 상대적으로 음역대가 높은 곳에 위치하는 가수가 부르는 것으로 생각했다. 드물게
테너 중에서 중간 음역대가 좋은 사람이 맡는 경우도 있었다.
어쨌든 현재의 관점으로는 바리톤의 음역이 오페라에서 돌파구를 찾은 것은 오페라
부파의 전성기인 18세기 중·후반으로 볼 수 있다. 오페라 부파에서 희극적인 베이스에게
부여한 바소 부포(basso buffo), 즉 광대같은 베이스라는 의미의 캐릭터가 그것이다.
일반적인 말투에서도 느린 것보다는 빠른 편이 재미있는 효과를 내듯이 희가극의 성공
요건은 대사나 노래를 ‘잽싸게 조잘거리면서’ 한편으론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요체라 할 수 있었다. 희극적인 느낌은 더욱 낮은 음역에서 유리하겠지만 ‘잽싸게’
라든지, 또는 희극적 효과를 강조하는 음정의 도약을 위해서는 진짜 베이스보다는
보통의 남성 음역이 더 잘 어울렸고 그래서 사실상 바리톤에 해당하는 유사 바소
부포가 맹활약하게 된 것이다. 부파 양식의 초기 형태를 마련한 발다사레 갈루피·
레오나르도 레오, 거의 완성된 단계로 다듬은 니콜로 피치니·도메니코 치마로사가
있지만, 역시 18세기 후반의 오페라 부파에서 남성 중저역의 활약을 극한까지 끌어
올린 사람은 모차르트였다.
모차르트 바리톤으로 가장 대표적인 역은 ‘피가로의 결혼’(1786)과 ‘돈 조반니’
(1787)의 타이틀 롤이다. 두 역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데, 우선 피가로는 자신의
약혼녀 수잔나에게 군침을 흘리는 영주의 음모를 막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인물이다.
힘없는 하인에 불과하지만 어떤 난관에도 희망을 잃지 않고 기지를 발휘한다.
귀족에 대한 서민 계층의 저항을 상징한다는 식의 해석은 너무 비약이라 하더라도
피가로같은 ‘꾀돌이형’은 원활한 입놀림을 지닌 바리톤 음역의 바소 부포에게는
최상의 영역이다.
반대로 돈 조반니는 시종을 데리고 다니는 귀족 신분이지만 항상 새로운 여성과의
일회성 쾌락만을 추구하는 방종한 인간이며, 그러고도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지 못해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천벌을 받는 악인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악역이기에 돈 조반
니는 바소 부포가 아니다’라고 단언할 수도 없다. 마치 ‘돈 조반니’가 오페라 부파도
아니지만 오페라 세리아라고 부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어쨌든 돈 조반니는 분명
베이스의 역할로 그려졌었지만 현재는 바리톤이든, 베이스든, 혹은 그 중간인
베이스바리톤이든 가리지 않고 음흉하지만 일방적으로 미워할 수도 없는 인간형을
살릴 수 있다면 성부의 제한을 두지 않는다. 다만 피가로는 밝은 음색에 쾌활한 성격의
바리톤, 돈 조반니는 그보다 훨씬 무거운 음색의 바리톤에게 어울린다.
젊은 바리톤으로서 모차르트를 가장 잘 소화하는 가수로는 두말할 것 없이 브린 터펠이
꼽힌다. 그는 피가로와 돈 조반니, 심지어 진짜 베이스인 레포렐로까지 모두 소화할 수
있는 타고난 모차르티안이다. 베이스바리톤의 묵직한 음색을 지녔지만 건강한 낙천성,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사랑스런 연기력으로 피가로까지 섭렵하는 것이다.
터펠만큼의 대중적 인기를 누리지는 못하지만 로드니 길프리·보 스코부스·루치오 갈로
또한 모차르트 오페라에서 맹활약 중인 젊은 바리톤의 리스트에 올라 있다.
베르디 바리톤으로 바리톤의 전성시대가 도래하다
이른바 벨 칸토 오페라의 3인방인 로시니·벨리니·도니제티. 그러나 이들이 바리톤의
발전에 기여한 바는 그리 크게 평가되지 않는다. 로시니와 도니제티의 바소 부포는
모차르트 등 고전주의 시대의 그것보다 성악적인 기교에 발전을 보였지만 극적인 비중이
증가한 것은 아니었고, 벨리니는 본질적으로 소프라노를 위한 오페라를 썼기 때문이다.
다만 로시니의 바소 부포는 ‘잽싸게 재잘거리는’ 가장 이상적인 유형을 창조했다는
점에서, 또 그의 마지막 그랜드 오페라 ‘빌헬름 텔’(1829)의 주인공에 이상적인
지도자의 상징으로 바리톤을 기용했을 뿐 아니라 극적·음악적으로도 테너(아롤도 역)와
확연한 차별화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도니제티의 경우도 오페라 세리아에서 바리톤에게 주역에 버금가는 비중을 두는 일이
드물었지만 음악적 스타일은 여러모로 베르디 바리톤을 연상시키는 부분들이 많다.
이를테면 ‘람메르무어의 루치아’(1835)중 엔리코 역이 그러한 예일 것이다.
로시니의 오페라 부파는 20대 중반 이전의 어린 나이에 작곡된 작품에 몰려 있는데
그의 바소 부포는 진짜 혀가 잘 돌아가야 한다. 어쩌면 입으로 모든 희극성을 해결해야
하는 경우가 로시니일 것이다. 중견급으로는 클라우디오 데스데리가 인상적인
테크니션이고, 최근 떠오르는 별로는 알레산드로 코르벨리를 가장 정통적인 바소 부포로
꼽아야 할 것이다. 그밖에도 최근 타계한 프랑스 오페라의 달인 루이 퀼리코를 부친으로
둔 지노 퀼리코(역시 프랑스 작품에도 능하다), 그리고 테크닉은 약간 떨어지지만
친근감 넘치는 가창력을 지닌 시모네 알라이모가 돋보인다.
그러나 역시 오페라 바리톤은 베르디에 의해 만개되었다. ‘베르디 바리톤’이라는
조어가 생겼을 정도로 베르디는 바리톤을 중요시했으며 테너의 맞상대로서 그에
필적하는 극적, 음악적 비중을 부여한 것이다. 그의 오페라중 ‘나부코’(1842),
‘맥베드’(1847), ‘리골레토’(1851), ‘시몬 보카네그라’(1857), 그리고 마지막
작품이자 부파인 ‘팔스타프’(1894)는 바리톤이 타이틀 롤을 차지했고 모두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신화적·자연적 또는 초월적 소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인간 그 자체를 탐구하는
데 열심이었던 베르디가 바리톤에게 요구하는 바도 인간 유형의 한 단면, 그것도
묵직한 음성에 어울리는 깊이있는 성격의 묘사였다. 그 가운데 가장 널리 회자되는
바가 부성(父性)이다. 리골레토·‘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시몬 보카네그라가
그 대표적 예인데, 여기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밖에서는 잔악한 모사꾼이거나 나약한
여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존재로서 결함을 지니고 있지만 결국은 아름다운 부성이
결함을 압도하고 마는 캐릭터로 그려진다.
다음은 악역인데 여기에는 맥베드와 ‘오텔로’의 이아고를 빼놓을 수 없다. 베르디는
타고난 악인은 없다는 너그러운 인간관을 갖고 있었지만 이아고만큼은 예외이다.
이아고는 악인인 대신 강철같은 의지와 물샐틈없는 전략가로 그려짐으로써, 치를 떨
수밖에 없는 극한적 악의 화신이라는 효과를 드높였다. 맥베드는 좀 다른 성격이다.
악인인 것은 틀림없지만 레이디 맥베드의 주도에 의해 죄를 지었다가 극심한 정신적
격통에 시달리는 한편으로 불쌍한 존재이며, 마녀들의 예언에 의지하여 겨우 삶을
지탱하는 나약하고 어리석은 인간상이다.
전통적으로 바리톤의 역할인 테너의 연적으로는 루나 백작(일 트로바토레)과 레나토
(가면 무도회)를 꼽아야 할 것이다. 악인에 대한 태도가 그렇듯이 베르디는 연적에
대해서도 여인을 빼앗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치사한 존재로 그리지 않는다.
베르디 오페라중에서 가장 박력 있으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노래가 주어진 바리톤인
루나 백작은 강인한 성격이지만 결국 친동생의 정체를 모른 채 그를 죽임으로써 여인을
쟁취하고자 한 대가를 혹독히 치르고 결국 비극적 인물이 되고 만다. 레나토 역시
여주인공 아멜리아의 남편으로 그려졌다는 점에서 드라마의 갈등을 증폭시키는 존재가
아니라 그 갈등의 희생양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끝으로 고귀한 남성상으로는 시몬 보카네그라와 로드리고(돈 카를로)가 있다.
시몬은 부성을 잘 그려내야 하는 것은 물론이지만, 그보다 앞서 지도력 있는
제노아 총독으로서의 카리스마, 정적을 포함한 인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로드리고는 가장 독특한 등장인물이다. 그는 스페인의 귀족
이면서도 식민지 네덜란드 민중들의 고통을 덜어주고자 힘을 다한다.
테너와 갈등 관계도 아니요, 악인도 아니며 오로지 고귀한 이상을 품은 인도주의자이다.
다른 배역과 비교하자면 일반적으로 베르디 바리톤을 ‘드라마틱 바리톤’이라고
정의하고 싶지만, 로드리고의 경우는 강하게 그려내든 유약하게 그려내든 간에
몽상가적 기질을 부여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베르디 바리톤은 깊이가 요구되기 때문에 젊은 나이에 소화하기가 어렵다. 따라서
가장 각광받는 가수들로는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의 현역인 레나토 브루손·조르지오
잔카나로·레오 누치의 이탈리아 3인방을 꼽을 수 있다. 다만 잔카나로는 워낙 당당
하고 기품있는 음성이기 때문에 악역은 좀체 맡지 않는다.
악역으로는 역시 50대 중견인 세르게이 레이페르쿠스가 돋보인다. 러시아 출신답게
바위처럼 단단하고 끈질긴 음성의 독보적인 존재이다. 또 한 사람의 러시아 바리톤인
블라디미르 체르노프는 거의 미국 중심으로 활약하고 있어 상대적으로 평가가 낮지만
베르디 바리톤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바리톤으로는 역시 러시아의 드미트리
흐보로스토프스키와 스페인 출신으로 최근 급부상중인 카를로스 알바레즈가 있다.
젊은 만큼 두 사람 모두 아직까지는 다른 역보다 로드리고를 부를 때 더욱 빛을 발한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필자는 베르디가 창조한 것이나 다름없는 드라마틱 테너라는 유형도
결국은 바리톤에 대한 동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베르디는 테너에게 미숙하고
젊은 남성상을 그려왔다. 연적에게 약속한 맹세 때문에 자살하는 에르나니, 진정한
사랑을 모르고 끝없이 여자를 찾아다니는 만토바 공작, 무모한 영웅심으로 죽음을
자초하는 만리코, 비올레타의 진심을 마지막 순간에야 알게 되는 알프레도가 그런 예이다. 그러나 ‘가면 무도회’(1859)부터는 테너에게도 완전한 인격, 또는 남성적인 성숙한
캐릭터를 부여하면서 어둡고 무거운 테너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리카르도(가면무도회)
부터 시작된 테너의 무게는 돈 알바로(운명의 힘), 라다메스(아이다)를 거치며 점점
무거워졌고, 드디어 ‘오텔로’(1887)에서는 바리톤을 연상시키는 드라마틱 테너가
탄생했다. 이는 베르디의 후기 오페라의 그림자를 밟고 있는 베리스모 오페라에도
이어져 ‘팔리아치’(1892)의 카니오 등의 사례에서 보듯이 바리톤적 테너가 자주
등장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과 프랑스 오페라의 바리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
베르디가 주름잡던 이탈리아와 달리, 다른 나라의 오페라에서는 바리톤의 비중이
크게 높아지지 않았다. 독일의 경우, 바그너 오페라의 대표적 저음역인 보탄
(니벨룽의 반지)이나 한스 작스(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는 바리톤과 베이스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볼프람(탄호이저)이나 쿠르베날(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중요도는
주역과 현저한 차이가 있다. 이러한 점은 바그너의 후계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오페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베르크의 현대 오페라 ‘보체크’(1925)는 바리톤의
오페라로 기억되어야 한다. 최근 리트계의 선두주자인 마티아스 괴르네가 현대인의
정신분열적 고통을 극명하게 잘 살려 ‘보체크’를 가장 잘 부르는 오페라 가수로도
인정받고 있다.
프랑스에서는 ‘바리톤 마르탱‘이라는 독특한 용어가 통용된다. 19세기 초에 실존한
바리톤의 이름에서 따온 것으로 오페레타나 오페라 코미크에서 주인공의 젊은 친구같은
역으로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음악적 비중은 낮다. 구노와 마스네의 오페라에 어울리는
바리톤은 부드럽고 서정적인 음색이 돋보이는 ‘바리톤 칸타테’이다. 발랑탱
(파우스트)이나 알베르(베르테르) 역으로 최고의 ‘바리톤 칸타테’는 토머스
햄슨일 것이다. 베르디의 오페라에서는 단지 로드리고로서만 호평을 받았을뿐
너무 나약하고 무엇인가 부족한 인상을 심어주었던 햄슨은, 그러나 프랑스
오페라에서는 기품과 서정성으로 최고의 노래를 들려주고 있다.
2001-11-14 오후 6:18:38
유형종|음악 칼럼니스트
제목 : [바리톤] 한국의 차세대 바리톤
이어지는 5세대, 바리톤의 영광은 계속된다
전세계적으로 볼 때 바리톤 인구는 테너보다도 월등히 많다. 이는 테너와 베이스
사이에 애매하게 자리잡고 있는 성부의 성격과 음역 때문일 것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국은 특히 ‘바리톤 강국’이라 불려도 좋을 만큼 바리톤의 위세가 강하다.
오현명·황병덕으로 대표되는 1세대와 김원경·김성길·박수길 등으로 대표되는
2세대에 이은 차세대 바리톤들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각종 국제 대회에서
우승의 신화를 이어가며 이를 증명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들이 특히 베르디의 작품에서 널리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은 베르디
서거 1백주년을 맞이한 올해 더욱 고무적인 일로 다가온다. 지금도 해마다 부세토와
파르마에서 개최되는 베르디 콩쿠르에서는 세계 무대에서 성장할 새로운 한국의
젊은 바리톤들이 수상자 목록을 갱신하고 있다. 승전보의 빈도수가 잦아지는 만큼
국내 무대 또한 세대교체의 속도가 빨라지는 것은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2001년, 베르디의 해를 맞이해 이들 신세대 바리톤들의 용틀임이 시작되었다.
해외무대를 개척한 트로이카-고성현·김동규·최현수
1990년대 초반, 한국의 오페라는 각 지방에서 많은 공연이 이루어진데 비해 서울은
국립 오페라단 이외에는 각 민간 오페라단이 한 편씩만 무대를 만들어 명맥만 유지하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렇게 지지부진한 한국 오페라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한 가지는 1993년 오페라계가 그토록 갈망하던 오페라하우스가
예술의전당 안에 문을 연 것이며 또 하나는 국제 오페라 무대에서 한국 출신의
성악가들이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친 것이었다. 조수미·홍혜경·신영옥 등 여성
소프라노들이 트로이카를 형성하며 미국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을 때 이탈리아 무대에
서는 최현수·고성현·김동규, 즉 한국 바리톤 3세대들이 유럽 무대를 중심으로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오현명이 “1백 년에 한번 나올까말까한 탁월한 목소리”라 극찬한 고성현은 이제
명실상부한 한국 오페라 바리톤의 지존으로 등극해 있다. 1987년 푸치니 콩쿠르를
필두로 1988년 질리 콩쿠르, ‘나비부인’ 콩쿠르, 1989년 밀라노 콩쿠르, 1990년
벨리니 콩쿠르 등 유럽의 주요 콩쿠르를 휩쓴 그는 1992년 푸치니의 고향인 루카에서
열리는 푸치니 페스티벌에 초청되어 ‘토스카’ 중 스카르피아 역에 캐스팅되면서
해외 무대에 본격적으로 발을 내딛었다. ‘토스카’ ‘오텔로’ ‘리골레토’ 등
푸치니와 토스카의 그랜드 오페라들을 주요 레퍼토리로 삼으며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해외 무대에서 활약한 그는 1993년 한양대 교수로 임용된 다음부터는 한국 오페라
무대에도 꾸준히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동세대 가운데, 최근 중앙 무대에서 모습을
감춘 김동규나, 독창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최현수에 비해 오페라 무대에 서는
횟수가 월등히 많아 ‘오페라 전문 가수’로서의 위상이 무엇인가 몸소 보여주고 있다.
‘노래하는 대포’라는 별명에 걸맞게 동양인에게는 기대할 수 없는 무시무시한 음량과
무대를 일순간 장악하는 그의 위압적인 카리스마는 몸집이 큰 서양 바리톤들과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다. 특히 주역들을 압도해야 하는 ‘토스카’의 카바라도시 역과
‘오텔로’의 이아고에서 최고의 매력을 선사하는 드라마티코이다.
바리톤 김동규는 엔터테이너 기질로 인해 미운털이 박힌 불운아이다. 그러나 대중적
이고 가벼워 보이는 이미지와 정반대로 그의 목소리는 전형적으로 진중한 ‘베르디
바리톤’을 타고났다는 평이다. ‘에토레 킴’이란 이름으로 1991년 베르디 콩쿠르에서
우승한 뒤 1995년 라 스칼라 극장 무대에 캐스팅되는 최초의 한국인 남성가수로
기록되었다. 그늘지고 무거운 목소리의 성격상 희극적이기보다는 비극적이고 암울한
운명의 배역에 더 적역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며, ‘리골레토’와 ‘일 트로바토레’
등을 더욱 잘 소화해냈다. 바리톤이라고는 하지만 테너와 견줄 정도로 고음이
매력적인 가수. 트레이드마크가 된 콧수염과 타고난 재치, 그리고 연기력으로 대중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지만 보수적인 성악계가 야한 색깔의 티셔츠에 스카프를 두르고
열린 음악회에서 크로스오버를 열창하는 그의 모습을 고깝게 여겼던 것도 사실이다.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는 그다지 자주 볼 수 없는 바리톤 최현수는, 그래서 오페라
가수라기보다 리트를 노래하는 ‘가객’으로서의 이미지가 더욱 굳어져 있다.
그러나 1986년 베르디 콩쿠르를 비롯 마리오 델 모나코 국제 콩쿠르, 칼리아나
비엔날레 콩쿠르(86년), 코센차 국제 오페라 콩쿠르(87년), 파바로티 국제 콩쿠르(88년)
등 무려 13개의 콩쿠르에서 우승한 그의 저력은 분명 오페라를 전제로 증명된 것이었다. 1990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메조 소프라노 이리나 아르키포바는
최현수의 목소리에 대해 “최현수의 예술은 내 일생을 통해 접하게 될 성악 예술 중
최고의 경험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는 오페라계와 콘서트홀에서 사라져버렸던 진정한
벨 칸토 스타일을 되돌려주었다”라고 평가했다.
귀국 후 1993년 그는 ‘돈 카를로’ ‘토스카’ 등을 공연한 뒤 오페라보다는
리트 위주의 독창회만 마련하여 주변을 의아하게 했다. 고성현·김동규보다 월등히
많은 음반을 녹음한 것도 그만의 특징인데, 이들도 한국 가곡과 서정적인 리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특히 그의 애창곡으로 굳혀진 레퍼토리는 토스티의 가곡들.
고음을 자주 동반하게 되는 이탈리아 가곡들에서 최현수는 테너에 가까운 음색을
과시하기도 한다. 오는 5월 글로리아 오페라단의 ‘리골레토’에서 타이틀 롤을
연기하며 다시 오페라 무대에 복귀할 예정이다.
4세대 바리톤의 선두주자 - 전기홍·우주호·유승공·최종우
해외 국제 콩쿠르의 우승 소식은 3세대 이후에도 이어졌다. 아니, 오히려 더 빈번해졌다.
아무런 배경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해외 무대를 헝그리 정신으로 개척하던 전 세대
선배들에 비해 이후 세대는 그들이 마련한 발판 위에서 비교적 안정된 환경을 누리며
음악을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6년 부세토 베르디 콩쿠르 우승자인 바리톤 전기홍은 4세대 가운데에서도 연배가 높다. 베르디 콩쿠르 우승도 참가 연령 상한선인 35세를 몇 달 남기지 않고 이루어낸 개가였다.
콩쿠르 경력 대신 그에게는 이탈리아 트렌토 국립음악원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악원, 프랑스 에콜 노르말, 이탈리아 오지모 아카데미,
로시니 아카데미, 부세토 아카데미아 등에서 수학한, 남보다 더 긴 가방끈이 있다.
아카데미컬한 기질로 인해 명징한 언어능력과 정확한 표현력을 트레이드마크로 삼고
있는 리리코.
1991년 스페인 사바델에서 ‘라 트라비아타’로 데뷔한 그는 모차르트·로시니·
푸치니 등 다양한 작곡가들의 오페라에 참여해왔지만 ‘진정한 베르디아노’를
최종 목표로 하고 있다.
“목청만 크다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베르디는 아니죠. 내면적이면서도 남성적이고
영웅심이 높고 의를 사랑하는 역할을 좋아합니다.” 지난해 잠시 주춤하던 기색을
보이던 그는 이번 베르디 페스티벌에서 한국 초연되는 ‘시몬 보카네그라’의 타이틀
롤을 맡고 마음이 들떠 있다.
1998년 10월 국립 오페라단이 몇 년 만에 무대에 올린 베르디의 오페라 ‘오텔로’
에서 한국의 오페라 팬들은 고성현에 버금가는 가능성 넘치는 두 명의 젊은 이아고
를 만나볼 수 있었다. 오로지 이아고를 연기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서둘러 귀국한
우주호와 최종우였다.
“당시 이아고는 로마에서 3년 동안이나 줄기차게 연습하며 기다렸던 배역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여건이 맞지 않아 이탈리아 공연은 불발되었지만 한국에서 그 기회를
만회했죠.” 이아고 역에 강한 자신감을 피력한 우주호는 한양대를 졸업한 뒤
이탈리아에서 칠레아 콩쿠르, 타란토 콩쿠르 등 이탈리아 유수의 콩쿠르를 휩쓸며
실력을 인정받았다. 의협심 많고 질퍽대는 바리톤의 배역에 매력을 느낀다는
그는 이번 ‘시몬 보카네그라’ 초연에 역시 타이틀 롤로 캐스팅되었다.
리리코의 전기홍에 비해 드라마티코에 더 가까운 그는 한국의 바리톤 가운데에서도
외향적인 캐릭터로 구분된다. 진실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는 ‘안드레아 셰니에’
의 제라르 역을 노래하고 싶어한다.
‘이 이상 더 나쁠 수 없다’ 싶을 정도로 간신배의 은밀한 내면세계를 충실하게
표현한 우주호와는 또 다르게, 최종우는 당당하고 신념에 찬, 왜 오텔로가 유일하게
이아고를 신임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증명하는 성실하고 인간적인 이아고의 모습을
연기하는 가수이다.
1996년 부세토 베르디 콩쿠르에서 전기홍이 우승하던 당시 준우승을 했으며 다음해
파르마 베르디 콩쿠르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에도 1998년 오스트리아 탈리아비니
준우승, 1998년 호세 카레라스 콩쿠르 우승 등 상복은 이어졌다. 내면연기에 강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는 유럽에서 ‘일 트로바토레’ ‘아이다’ ‘나부코’ ‘리골레토’ 등 베르디 오페라에서 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한국에서도 1997년 초연된
‘맥베드’의 주역을 노래했다. 2001년 1월 일본에서 오페라 ‘호월전’으로 데뷔한
그는 내년 1월 후지와라 오페라단과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을 노래할 예정이다.
이번 5월 공연되는 ‘리골레토’에서 최현수와 더블 캐스팅되어 타이틀 롤을 노래한다.
“여덟 번 리골레토를 노래했는데, 그동안은 강한 인물상을 그려왔어요. 하지만
이번에는 피아니시모의 리골레토를 시도해보려고 합니다.”
그 역시 우주호와 마찬가지로 ‘안드레아 셰니에’의 제라르 역을 욕심내고 있다.
1994년 부세토 베르디 콩쿠르는 여지없는 한국인의 잔치였다. 1위 입상자가 없는
가운데 상위 2·3위로 선정된 성악가 3명이 모두 한국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리톤 유승공은 바로 이 대회에서 테너 임제홍과 공동 2위를 차지했다.
베르디 국립 음악원과 파르마 오르페오 아카데미아를 졸업한 유승공은 베르디 콩쿠르
이전에는 벨리니 국제 콩쿠르에서 2위에 입상한 전적(1991년)을 가지고 있다.
가장 최근 일본에서 공연되어 화제를 모은 창작 오페라 ‘황진이’에서 벽계수 역을
노래한 그는 185센티미터가 넘는 우람한 신체조건을 가지고 있다. 거구임에도
그의 목소리는 매우 ‘부드러운 바리톤’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유학 이전에
연세대 재학 중에는 오페라가 아닌 독일 리트에 빠져들기도 했다.
1999년 ‘돈 카를로’와 2000년 한국 초연된 ‘루이자 밀러’에 출연하며
유감없는 베르디아노의 실력을 과시했다.
바리톤보다 낮은 바리톤-강병운·김요한·연광철
베이스 바리톤들은 위의 바리톤들과 또 다른 독자적인 계보를 형성하고 있다.
이들을 단지 ‘베이스’라고 분류해버리기에는 애매한 감이 있다.
바리톤이 테너와 베이스를 넘나드는 까닭에 베이스와 바리톤 사이의 영역 구분이
확실하지 않을 뿐더러, 대부분의 베이스 바리톤들이 일부 바리톤의 배역을 함께
소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활약하는 베이스 바리톤의 최고봉은 단연 강병운이다. ‘필립 강’으로 우리에게
더 잘 알려져 있는 강병운의 바이로이트 입성은 한국인으로서는 물론 동양인으로서도
최초의 스캔들이었다. 그는 1988년 바렌보임이 지휘하고 하리 쿠퍼가 연출한 ‘링’
프로덕션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 해마다 초대되어 하겐과 훈딩
역을 노래하고 있다. 단단하고 풍부한 저음과 매끈한 고음은 해외 언론들로부터
‘벨 칸토 베이스’라 극찬을 받은 바 있다.
한국에서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베이스 바리톤은 김요한이다.
1988년 서울 시립 오페라단의 ‘아이다’ 공연에 람피스로 출연한 이래 지금까지
무려 500여 회가 넘는 오페라를 소화해낸 리리코 프로폰도. 바르셀로나 비아니스
콩쿠르 등 다섯 개 해외 콩쿠르에서 입상한 바 있지만, 입상 경력을 내세우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이제는 중견의 위치에 자리잡고 있다. 지난해에는 로시니 오페라
‘모세’ 초연에 타이틀롤을 맡아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올해 후지와라 오페라단의
초청으로 일본에서 ‘멕베드’를 공연하고 돌아왔다.
“바리톤에 비해 마음을 쉽게 드러내지 않으며 전략가의 기질을 갖고 있는 것이
베이스”라고 말하는 그는 귀족적이고 표현적인 것보다 내면적인 심리극이라는 면에서
베르디의 오페라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배역은 ‘돈 카를로’의
필리포로, 변덕스러우면서도 냉정한 양면성이 잘 갖춰진 인간형으로 음역이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한다. 이번 ‘시몬 보카네그라’에서 피에스코 역을 열연한다.
고국에서는 무대에 몇 번 오르지 못했지만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베이스 바리톤
연광철도 우리에게는 충분히 주목할 가치가 있다. 헨델의 바로크 오페라에서 바그너
까지 소화하는 그의 잠재력은 국내 무대보다 유럽에서 더욱 인정받고 있다.
베를린 도이치 오퍼 소속의 그는 보통 크고 굵은, 둔탁한 쇠가 기대되는 것이
베이스임에도 밝고 가벼우며 고음 처리조차 자연스런 ‘바소 칸타빌레’의 목소리를
갖고 있다. 현재 주력 레퍼토리는 모차르트로, 지난해 우리는 그가 주역을 노래한
‘피가로의 결혼’을 만나볼 수 있었다. 최근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한 고음악
전문 지휘자 르네 야콥스의 신보 ‘크로에수스’에서 늙은 현자 솔론을 노래했다
(아르모니아 문디 프랑스).
고국 무대를 기다리는 5세대들
90년대 학번으로 대표되는 5세대들의 활동도 벌써부터 기대를 모으고 있다.
일찌감치 국내 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선두주자는 김동섭. 서울대 음대 출신으로
유학 경력이 아직은 없으며 해외 콩쿠르 경력도 미비하지만 그는 지난 1998년 예술의
전당 주최 오페라 페스티벌에서 윤이상의 ‘심청’ 중 심봉사 역을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소화해내 화제를 모았다. 난해한 윤이상의 음들을 육중하고
안정적인 저음으로 표현해낸 그는 본래 하이 바리톤이었으나 심봉사 역을 계기로
베이스 바리톤으로 전향했다. 지난 1999년에는 국내 초연된 베를리오즈의 오페라
‘파우스트’에서 메피스토펠레를 노래했다.
아직 국내 무대에 서지는 않았으나 해외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바리톤들도 고국의
데뷔 무대를 기다리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한명원과 강형규의 입상 소식이 연달아
들려와 한국의 오페라팬들을 즐겁게 했다.
한명원은 부세토 베르디 콩쿠르에서 우승함과 동시에 ‘최고의 베르디아노’로 선정,
이탈리아 베르디 극장에서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그는 1999년 이미 독일 노이어 슈팀멘 콩쿠르 특별상을 수상한 바 있으며 일본
하마마쓰에서 열린 시즈오카 국제 콩쿠르와 바르셀로나 국제 콩쿠르에서의 입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 그가 유학파가 아닌 국내 교육만으로 성공한 연주가이기에,
이들 승전보는 더욱 의미있는 가치를 지닌다.
바리톤 강형규 또한 기대되는 차세대 성악가이다. 경희대 음대를 거쳐 베르디 국립
음악원을 졸업한 뒤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는 강형규는 지난해 파르마에서
열린 마리아 칼라스 국제 콩쿠르와 스페인 빌바오 콩쿠르에서 연이어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전에 그는 파르마 콩쿠르와 바지올라 콩쿠르에 우승한 경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