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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종문인화가 소천 김천두
유천재 글 공부 외길 인생01
내 고향(故鄕) 장흥(長興) 평촌(平村)은 앞으로는 넓고 푸른 득량바다가 호수처럼 물결치고 있으며 또한 기암괴석으로 장식된 천관산과 서산봉은 뒤와 앞으로 병풍처럼 둘려져 있고 동편에 보이는 서선봉은 마치 도연명선생댁 문전의 남산과 흡사 하다.
이 가운데 교육의 중심이었던 유천재가 있다.
나는 소시부터 지금까지 이 유천재에서 시서화를 부단한 노력으로 연마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전남 장흥군 관산읍 평촌리에서 부친 김용문 모친 이애기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하였다.
본관 광산김씨 양간공 연 26세손 자는 자공(子公) 이요 호는 소천(小天) 이고 원명은 김석중(金石中) 이고
40세 이후로 천두(千斗) 로 예명을 정 하였다.
5세때 조부 무우당 김익수 에게 천자문과 한글을 배움
6세때 유천재 서당에서 위작천선생에게 한문을 배움 매일 한시간 서예를 학습 하였다.
7세댸부터 다초 위복량선생에게서 한문을 배우고
8셰대부터 이월초선생에게서 서예 정소산 선생에게 난 ,죽을 배웠다.
나의 학문의 원류는 율곡 이이 선생 제자인 사계 김장생 -송시열-권상하-윤봉구-존재 위백규-위영경-소석 김노현 -다초 위복량선생 으로 부터 학문을 전수 받았다.
그 이후로 다산재, 장천재, 유천재를 왕래 하면서 시문과 전통서화에 관심을 가지고 입문 하였다.
관산의 선비 길인 다산재, 장천재, 유천재를 자주 걸으면서 사색 하면서 학 처럼 걷는 습관이 붙어서 특별히
한 운동이 없고 평생을 매일 만보(萬步)를 걷고 산책 하는 것이 유일한 낙(樂)이 되었다.
선비는 항상 마음을 바로해서 착한 본성을 따라야 하며 정관위좌(正冠危座)하여야 하기 때문에 나는 화가 된 후에도 항상 외출 할때는 정장을 하고 행실을 조심 하였다.
유천재에서 다초 위복량선생으로 부터 처음에는 천자문을 배웠고 그 다음에는 동몽선습,소학, 근사록 학습 하였고 때때로 시(詩)를 쓴 법과 간찰 글 쓰는법을 익혔다.
전통 미학의 주류인 시설(詩說) 시지(詩誌) 즉 시(詩)는 인간 감정과 의지를 표현한 사상 이라고 확신 할 수 있다.
시는 인간의 정서와 의지를 느낄 수 있고 한 시대의 사람들의 감정 추세를 전달하는 것으로 시인은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내면의 감정을 잘 표출해 낼 수 있다.
시(詩)적 수련을 톻해 사람들은 온유돈후(溫柔敦厚)한 군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당나라의 시인 이자 화가인 왕유는
“시를 지으면 형상 없는 그림이 되고, 그림을 그리면 말하지 않는 시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 대개 품격이 빼어나고 정취가 높고 원대하다.”(王右丞 作詩爲無形畵 作畵爲不語詩 大都品格超絶 思致高遠也)
다초 위복량선생에게서 서예 공부 지도를 받았는데 보통 서예 하면 초서 행서 예서 하는 데 처음에 배운 서예는 해서를 배웠죠 정서는바르게 쓴는 법 이었다.
처음 큰 현판 글씨는 보게 된것은 유천재 편액 글씨로 명필인 극암 이기윤(01) 글씨 였고 소석 김노현선생의 시고 (小石 金魯鉉 柳川齋 詩稿) 필적 이었다.
또한 소석 김노현선생의 글씨는 양춘재와 오헌 고택을 가면은 볼 수 있다.
다산재(03) 글씨도 극암 이기윤 쓴 글씨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유천재 옆에 있는 석정 광산김씨 괴정처사김공 광흠비문을( 02)정노수 선생 글씨를 탁본을 해서 써 보기도 했다.
특히 방촌 마을과 (05)장천재에는 많은 시인 묵객의 필적 이 많이 남아 있는데 존재 고택과 오헌 고택 장천재에는 많은 시고와 돌에 새긴 금석문이 많이 남아 있다.
장천재(長川齋) 팔절서(八絶序)는 제일(第一) 청풍벽(淸風壁), 제이(第二) 도화량(桃花梁), 제삼(第三) 운영기(雲影磯), 제사(第四) 세이담(洗耳潭), 제오(第五) 명봉암(鳴鳳巖), 제육(第六) 추월담(秋月潭), 제칠(第七) 탁영대(濯纓臺), 제팔(第八) 와룡홍(臥龍泓)이다.
수많은 서체와 시고를 볼수 있어 글씨 공부 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성현인 공자님도 호학자(好學者) 즉 공부 하는 사람 이었다.
한국화는 서양화 달라서 기술적인 화가가 아니고 지적이고 철학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철학(哲學)는 바로 근본 원리와 삶의 본질 따위를 연구하는 공부를 뜻 한다.
다산 정약용선생은 강진 유배 시절 공부에 매진하여 자기 사상을 집대성 한 분 이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 글에서 유배로 가문이 망 했으니 공부 하기에 좋은 기회 라고 하셨다.
요즘에 부모들은 공부에 때가 있다고 한다. 요즘 부모들이 지어낸 말 이다.
공부에는 때가 없으며 모든 것을 항상 물으며 답을 구하라.
책을 읽으면 성인과 친구가 될 수 있고 귀신과도 톻한다.
공부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 하고 이치에 통달 한다.
재갈공명도 시골에서 밭을 갈다가 공부 했기 때문에 천하 이치를 깨닭아 공부 하여 출세 할 수 있었다.
요즘 개천에 용이 나오기 어렵다고 한다.
그래도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있는 확률은 공부 이다.
공부 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
출세 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 하다.
외부의 불행으로 부터 스스로를 지킬 수 있으며 공부는 재난,불행으로 부터 자신을 지키는 수단 이다.
새로운 삶을 원한다면 독서,공부가 중요 하다.
후손에게 수많은 재산을 남겨 주기 보다는 공부를 시켜서 스스로 자립 할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돈은 잃어 버릴 수 도 있고 빼앗 길 수 있다. 그러나 지식은 어느 누구도 나에게서 가져 갈 수 없다.
그래서 나는 아들에게 항상 독립정신으로 살아 가기 바란다.
나는 오늘도 유상곡수(流觴曲水)하며 청복(淸福)을 누리며 오늘도 그림을 그리며 남과 잘 지내고 겸손하고 공부 하기를 좋아 한다.
2016 유천재 서재 에서 소천 김천두서
남종문인화가 小天 김천두는…
1928년 전남 장흥에서 출생했다. 전통적인 명문 광산김씨 양간공연의 후예로 본명은 김석중이다. 향리인 천관산 기슭 유천재 서당에서 한서와 시·서·화를 수업했으며 한학의 대가인 다초 위복량 선생과 잠계 백형기 선생 문하에서 서예를 익혔다. 남화의 정상급 거목 남농 허건 등에게 산수화의 기법을 배웠고 월전 장우성에게서 인물, 화조 등을 사사 받아 개성있는 자기정신세계 표현을 위한 회화세계를 추구해 왔다. 저서로는 ‘소천 한 시집’ ‘시·서·화 삼절과 남종화 이론’ 등이 있다.
소천 김천두 가(家)는 3대가 화가의 맥을 잇고 있는 드문 가계를 형성하고 있다. 아들 김선두가 중앙대 미대 교수로 재직 중이며 김선일이 한국 산수화의 대표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또 김천두 옹의 손자인 김선두의 자 김중일(서울대 한국화과 대학원 졸업)도 동양화의 길을 걷고 있다.
산수화 사계 계절표현
봄 ;봄산은 웃는 듯이 아름답고 화사하다.
여름: 여름산은방을져 떨어질 듯 비취색으로 우겨져 있다.
가을: 가을산은 화장한듯 밝고 맑다.
겨울: 겨울산은 잠자는 듯 쓸쓸하고 담박하다.
East Wind. Korean Traditional. Paintings Academy.
한국의 한국화는 그 고졸한 멋에서 가히 한민족의 심성과 정신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가장 훌륭한 창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도 잊고 있는 한국과 우리 문화의 본질을 외국인에게 소개한다는 것은 따라서 스스로의 자존을 위한 것일 수 있습니다.
또한 일련의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한국 대중들에게도 우리 그림과 마음을 다시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한국화 수강생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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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과목
산수화
사군자
채색화
석채화
수묵화
화조화
민화
문인화
한국화 기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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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일화실 http://www.youtube.com/watch
<장천재 액호>05
<상위 : 18세 습독공 諱 由亨 配 宜人 평산申氏 동위 : 19세 통선랑공 諱 晉秀 配 宜人
광산金氏 서위 : 19세 강릉참봉공 諱 晉賢, 配 宜人 탐진崔氏 雙兆>
<22세 웅천현감공 諱 廷烈, 配 淑人 영광丁氏 雙兆 >
2) 장천재(長川齋) : 장흥군 관산읍 옥당리 산 92번지에 위치한다. 습독공(휘 유형, ~ ?)의 배(配) 의인(宜人) 평산申氏 묘각이다. 웅천현감공(휘 정렬, 1580~1656)이 타계하자 효자 휘 동식, 휘 동헌 형제분이 초가삼간을 지어 3년간 시묘(侍墓)하시다 상(喪)을 마친 후 문중에서 주변 영은암의 승사(僧舍)를 철거하고 구조와 규모를 확대해 짓고 기와를 이어 재각을 장천재라 재호(齋號)하였다.
<장천재 전경>
천관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장흥위씨의 상징적 제각(祭閣)이라고 할 수 있다. 울창한 숲과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듯 우람한 태고송(太古松) 그리고 사시사철 흐르는 계곡 등 주변의 풍광과 어울러 있 는 제각은 우리와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기록상의 1차 보수는 1705(乙酉)년 휘 세함공(1674~1716, 안항공 증손), 송와공(휘 세기, 1675~ 1747, 판서공 증손)의 주도로 堂을 넓혀 재실을 중수하였다. 이후 유림들이 학문을 탐구하고 기량을 연마하여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그 중에는 존재공(휘 백규)도 이곳에서 수학(修學)하고 학규(學規)를 지어 후세에 전(傳)하였다.
2차는 1724(甲辰)년 춘담공(휘 세린, 1673~1741, 안항공 증손), 쌍백당공(휘 명익, 1679~ 1767, 안항공 현손) 등의 주도로 규모를 새롭게 했다. 3차는 1747(丁卯)년 낙호공(휘 명래, 1693~1768, 판서공 현손), 명호공(1696~1773, 안항공 현손),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안항공 현손), 덕암공(휘 상겸, 1705~ ?, 청계공 5대孫), 등의 주도로 중수공사를 했다.
현 건물은 4차 중수로 1873(癸酉)년 다암공(휘 영복, 1832~1884, 안항공 7대孫), 행백당공(휘 석홍, 1818 ~1886, 청계공 9대손), 농포공(휘 송, 1832~1875, 판서공 9대종손) 주관으로 연인원 1만 명을 동원하여 ‘工’자 형태로 신축하였다. 대부분의 제각은 ‘ㄱ’자, ‘ㄷ’자,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장천재는 한문의 ‘工’자 형태다. 이는 어느 공간에서도 주변의 자연과 풍광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시인묵객이 많았던 모양이다.
1978(戊午)년 9월 21일자로 전라남도 지방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장천재는 제각이자 강학(講學)과 시회(詩會) 등 다양한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문중 어른들이 여름 한가한 때 피서를 겸해 시회를 연다. 시기는 유두, 칠석, 백중인데 농사에 장원한 집이 주관한다. 더구나 외지에서 다른 성씨의 선비들이 찾아오면 시회를 열어 접대한다. 이것이 외지의 선비를 접대하는 위씨들의 손님 접대방식이다.
<부계당>
<추원루>
<열락헌>
<즉휴루>
<청뢰문>
<풍호대>
<육각정>
장천재(長川齋) 당호(堂號) 편액을 비롯하여 부계당(俯溪堂), 추원루(追遠樓), 열락헌(說樂軒), 즉휴루(則休樓), 외문인 청뢰문(聽雷門), 풍호대(風乎臺), 풍호대의 별호(別號)인 육각정(六角亭) 등 8개의 액호(額號) 편액이 있다. 경내에는
(1)俯溪堂上樑文(부계당상량문)은 1873(癸酉)년 11월에 다암공(휘 영복)이 근서(謹書)하여 낙성일(落成日) 후 걸었다.
(2)부계당중건기사(俯溪堂重建記事)는 1873(癸酉)년 지월(至月) 10일 근기(謹記)하다. 1935(乙亥)년 옥호공(휘 명성, 1662~1723) 6대손 죽헌공(휘 계창)이 삼가 새긴다.
(3)즉휴루기(則休樓記)는 1883(癸未)년 다암공(휘 영복)이 기(記)하다. 1935(乙亥)년 옥호공 6대손 죽헌공(휘 계창)이 삼가 새기다.
(4)부계당판상서급운(俯溪堂板上序及韻)은 1793(癸丑)년 묵와공(휘 수택, 1739~1796, 판서공 6대손)이 경차(敬次)하다.
(5)근제부계당기(謹題俯溪堂記)는 1914(甲寅)년 가을 죽암공(휘 계문, 1865~1951, 판서공 10대종손)이 읍혈근고(泣血謹稿)하다.
(6)부계당중수기(俯溪堂重修記)는 1873(癸酉)년 호산공(휘 하조, 1809~1881, 안항공 8대손)이 근기(謹記)하다.
(7)부계당추기(俯溪堂追記)는 1898(戊戌)년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행주人, 1846~1916)이 근서(謹書)하다.
(8)계은당위대량모선사실기(桂隱堂魏大良慕先事實記)는 1949(己丑)년 중와공(휘 홍량, 1881~1961, 청계공 11대손)이 근서(謹記)하다. (9)부(附) 계은당(桂隱堂) 봉정문(奉呈文)은 1946(丙戌)년 습독공(휘 유형) 14대손 대량이 근정(謹呈)하다.
<제일 : 청풍벽 제팔 : 와룡홍>
<제이 : 도화량>
<제삼 : 월영담 (운영기)>
<제사 : 세이천 (담)>
<제오 : 명봉암>
<제육 : 추월담>
<제칠 : 탁영대>
(10)장천재(長川齋) 팔절서(八絶序)는 제일(第一) 청풍벽(淸風壁), 제이(第二) 도화량(桃花梁), 제삼(第三) 운영기(雲影磯), 제사(第四) 세이담(洗耳潭), 제오(第五) 명봉암(鳴鳳巖), 제육(第六) 추월담(秋月潭), 제칠(第七) 탁영대(濯纓臺), 제팔(第八) 와룡홍(臥龍泓)이다. 1792(壬子)년 가을 계항운민(휘 백규, 1727~1798, 안항공 5대손)이 식(識)하고, 사락산인(휘 백침, 1732 ~1797, 판서공 5대손)이 서(書)하다.
(11)팔영(八詠)은 팔경(八景)을 詩로 읊은 것으로 낭서과객이 근서(謹書)하다.
(12)존재선생 학규(存齋先生 學規)는 1874(甲戌)년 다암공(휘 영복)이 근서(謹書)하다.
(13)장천(長川) 팔경판상운(八景板上韻)은 지부(知府) 민치준(閔致駿 여흥人, 1839~ ?, 장흥부사 역임)이 고(稿)하다.
(14)열락헌운(說樂軒韻)은 부백(府伯) 서상조(徐相祖 대구人, 1830 ~1905, 판돈녕원사 등 역임)이 고(稿)하였다.
①차장천재운(次長川齋韻)은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은진人, 1836~1905)이 근서(謹書)하다.
②부계당근차잉여옹운(俯溪堂謹次剩餘翁韻)은 도천자(휘 세옥, 호(號) 간암, 1689~ 1766, 판서공 증손)경제(敬題))하다.
③근차장천재운(謹次長川齋韻)은 경수(耕叟) 기량연(奇亮衍 행주人, 1771~ ?)이 고(稿)하다.
④제부계당중수벽상(題俯溪堂重修壁上)은 잉여옹공(휘 명덕, 1683~1756, 판서공 현손)이 고(稿)하며, 불초고 행와공(휘 사급, 1717 ~1776, 판서공 5대손)이 추게(追揭)하다.
⑤근차장천재운배정(謹次長川齋韻拜呈)은 도곡(道谷) 송종운(宋鍾雲 은진人, 1792~1825)이 찬(撰)하다.
⑥장천재열락헌운(長川齋說樂軒韻)은 지부(知府) 송기로(宋綺老 은진人, 1830~ 1898 장흥부사 등 역임)가 고(稿)하다.
⑦장천재운(長川齋韻)은 1887(丁亥)년 지부(知府) 송기로가 고(稿)하다.
⑧근차장천재판상운(謹次長川齋板上韻)은 1881(辛巳)년 진사(進士) 이상구(李相九 인천人, ~ ?)가 찬(撰)하다.
⑨경차장천재판상운(敬次長川齋板上韻)은 신호(莘湖) 김록휴(金祿休 울산人, 1827~ 1899, 儒生)가 찬(撰)하다.
⑩즉휴루운(則休樓韻)은 1887(丁亥)년 지부(知府) 송기로가 고(稿)하다.
⑪장천재운(長川齋韻)은 1903(癸卯)년 이강재(연안人, ~ ?)가 고(稿)하다.
⑫무술춘배종연재선생유람천관산경차장천재운(戊戌春陪從淵齋先生遊覽天冠山敬次長川齋韻)은 눌와(訥窩) 윤자현(尹滋鉉 파평人, 1844 ~1909, 학자)이 찬(撰)하다.
(15)남유천관귀로낭음증위수재(南遊天冠歸路浪吟贈魏秀才) : 남으로 와 천관산에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부질없이 읊어서 위수재(魏秀才)에게 줌. ①우장천재(右長川齋), ②우상봉(右上峰), ③우구룡봉(右九龍峯), ④우포봉(右蒲峯), ⑤우석범(右石帆), ⑥우금수굴(右金水窟), ⑦우연대(右烟坮)를 관산과객(冠山過客) 죽농(竹農) 송철용(宋喆用)이 찬(撰)하다. 1884(甲申正月)년 계양공(휘 혁기, 1866~ 1944, 안항공 8대손)이 경지(敬識)하다.
(16)기재종형세연구화(奇再從兄世璉求和)와 (17)삼족당유고(三足堂遺稿)는 영이재공(휘 문덕, 1704~1784, 안항공 현손)이 읍혈서(泣血書) 병기(倂記)하다.
(18)장천재운(長川齋韻)은 원취당공(휘 도순, 1748~ 1816, 안항공 6대손)이 찬(撰)하고, 현손(玄孫) 계룡은 감읍서(感泣書)하다.
(19)부계당경차선고호산부군판상운(俯溪堂敬次先考壺山府君板上韻)은 춘파공(휘 관식, 1843~1910, 안항공 9대손)이 찬(撰)하다.
(20)부계당경차선자판상운(俯溪堂敬次先子板上韻)은 오헌공(휘 계룡, 1870~1948, 안항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21)부계당재중수후근차판상운(俯溪堂再重修後謹次板上韻)은 오헌산인(계룡)이 찬(撰)하다.
(22)제장천당(題長川堂)은 정헌공(휘 계후, 1905~1982, 안항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23)장천동세덕운(長川洞世德韻)은 낙청헌공(휘 형권, 1819~ 1899, 판서공 9대손, 유치면 단산리 태생)이 읍혈근고(泣血謹稿)하다.
(24)부계당근차연재선생판상운(俯溪堂謹次淵齋先生板上韻)은 춘헌공(휘 계반, 1848 ~1939, 청계공 10대손)이 근고(謹稿)하다.
(25)차부계당판상시급기(次俯溪堂板上詩及記)는 춘파공(휘 관식)이 찬(撰)하고, 1931(辛未)년 오헌공(휘 계룡)이 읍혈간(泣血刊)하다.
(26)근차장천재판상운삼족당공판상운(謹次長川齋板上韻三足堂公板上韻)은 계은공(휘 대량, 1884~1951, 청계공11대손)이 근고(謹稿)하다.
<장천재 경내 시운 편액 글>
장천재 경내에는 총 36개 시운 편액 글이 걸려 있어 선대(先代)의 진한 흔적이 남아 있는 등 장흥위문을 대표하는 사우이다. 매년 陰 10. 15일 의인(宜人) 평산申氏, 통선랑공(휘 진수, 1480 ~1564), 강릉참봉공(휘 진현, 1483~1564), 웅천현감공(휘 정렬, 1580~1656)등에 대해 제향 한다. 장천문중 소유다.
소석 김노현 <양춘재 액호>
소석 김노현 <일오헌>
02)
석정 광산김씨 괴정처사김공 광흠비(02)
글: 송사 기우만 비석 글씨 정노수가 씀
31광흠:처사,호:괴정
처사: 세파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
선비: 학식은 있으나 벼슬하지 않는 사람
광흠은 5,6세 재동으로 칭하고 10여세 때 자혜(自解) 3백수 하고 서(西)서 오(五)경을 해독함
3경:역경,시경,서경(주역,시전,서전)
4서:대학, 중용,논어,맹자
5경:역경,시경,서경,예정,춘추
7경: 시경,서경,예경,락경,역정,논경,춘추
7서:4서와 3경을 말함
괴화나무 현(現) 회화나무(천연기념물 315,316,317 등록)
회화나무(槐化)는 나쁜 기운을 몰아내고 행복을 부르는 회화나무는 중풍을 낫게 하고 온갖 지병(감초)에 신효한 신비의 약나무다. 나라의 경사 때 또는 큰 벼슬할 때 기념으로 심은 나무다.
괴화(槐化)=회화나무를 광흠의 호가 괴정으로 봐서 광흠이 심었다고 추측함
광흠의 유천재 팔경 詩 한 구절 소개
땅거미에 비내리니 산(山)이 희미한데
석촌(石村)의 십식여가(十食余家)가 모두 다 사립문이 잠겼구나
첫번째 수심 빛이 겨우 지난 뒤에 도리어 새벽에는
만문(萬文)의 햇빛을 대(對) 하리라
우는 돌정지의 저녁 때 내리는 비(석정(石亭) 초우)
광흠 광산김씨 석정파 31세
<극암 영정 >
01 ☞ 극암의 이력(履歷)
성명 : 이기윤(李基允), 생졸년 : 1891~1971, 본관 : 성산(星山) 자(字) 집중(執中), 호(號) 극암(克菴), 거(居) 성주(星州) 대포(大浦), 정현(廷賢)의 후손, 익희(益熙)의 자(子)로 장석영(張錫英)의 문인으로 독립운동가•유학자이다. 어려서 영민(英敏)하여 16세 성균관 박사가 되어 독서(讀書)하였고 스승의 항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왜정의 모든 행위에 대항하여 불굴의 뜻을 지켰다. 자질(子姪)의 유계에 규모의근졸(規模宜謹拙) 지기필각력(志氣必刻曆)하라 하였으며 서법(書法)이 경건(勁健)하여 초년(初年)에 청천(晴川), 회연서당(檜淵書堂) 편액을 수서(手書)하였고 이외의 당(堂), 루정(樓亭) 헌각(軒閣)의 글씨를 많이 남겼다. 문집 17卷이 전한다.
극암 이기윤서 유천재 현판
소석 김노현 필적 (小石 金魯鉉 柳川齋 詩稿)
소천 김천두 유천재 학습 시절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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