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사진 하나... 내게도 저런 시절이 있었구나!!! 32년전 요르단 현장 책임자로 근무하던 시절 -아마도 1985년 초쯤 아닌가 싶다. 34살짜리 지사장이 알면 무얼 얼마나 알았겠나? 열정하나를 믿고 따라와준 동료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내가 있다.
그 고마음을 새기며 책에도 썼다& <섹소폰메고 산막찾아준 30년전 동료들> -과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나? -청산은 내게.... 194 쪽
아 세월의 무상함이여.... 잠시 그 시절로 되돌아가 상념에 잠긴다.
깁니다 천천히 시간되시면 읽어보십시요
29. 색소폰 메고 산막 찾아준 30년의 동지들- 과연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었나? 꽃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30년 전 동지들이 색소폰 메고 산막을 찾아왔습니다. 제겐 정말로 기쁜 날입니다. 세월이 흘렀어도 영원히 변치 않는 우정과 사랑! 여러분들께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해 드리고 싶습니다.
모든 이에게는 추억이 있습니다. 가슴 짠하고 아련하고 가슴 뛰는 추억! 언제 누가 물어도 항상 이야기 할 수 있는 도전挑戰과 극복과 성취成就의 추억!
이제 이들을 만나니 30년 세월의 벽을 넘어 그 때 그 기억들이 새록합니다. 나에게 성취의 기쁨을 안겨 주었고 실패의 소중함도 함께 가르쳐 준 그 곳! 동지들을 만나고 형제애를 뛰어넘는 우정과 신념으로 서로를 다독거리던 곳!
이제 그들도 가고 회사도 갔습니다. 변치 않고 남아 있는 것은 그 때의 그 가슴 저린 추억 뿐! 세월과 세상사의 무상無常함을 다시 한 번 생각 해 봅니다.
제가 한보종합건설의 요르단 지사장으로 부임한 것은 1984년 1월, 당시 제 나이 34세 때였습니다. 물, 불 가리지 않는 젊음과 패기가 있었지만 경험은 부족했고 풀어야 할 난제들은 산적山積했습니다. 당시 우리가 수행하던 7개의 현장現場(Dam 2개, 상수도上水道 3개, Irrigation 1개, Infrastructure 1개)은 Jordan 정부政府의 재정난과 경험미숙 대처능력부족 등으로 인해 심각한 자금란資金難을 겪고 있었습니다.
자금이 부족하니 공사工事가 제대로 될 리 없고 공사工事가 제대로 되지 않으니 기성旣成이 부족하고, 기성旣成이 부족하니 다시 자금란資金難이 가중되는 악순환의 연속이었습니다.
당면한 최대의 과제는 자금란資金難의 극복이었습니다. 이것만이 공사工事의 성공적인 완수와 회사 신용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인식하에 지사支社와 현장現場의 전 역량을 총동원하여 분투노력한 결과 결국은 이를 극복하여 성공적으로 공사工事를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역정과 성과는 "고난과 영광, 그리고 교훈"(해외건설협회, 1991년 11월 3일)이라는 해외건설일화집海外建設逸話集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돌아가신 현대의 정주영 회장님, 당시 현대건설 사장이시던 이명박 대통령 등 여러 건설업계의 원로들이 소중한 글들을 남겨 주셨습니다. 고故 정주영 회장은 그의 회고록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 아래와 같은 취지의 글을 남겼습니다. “나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때 제일 힘들고 어려운 일 들은 건설 출신들로 감당케 했다. 건설 출신 특히 해외건설 출신들을 중용重用했다. 외국에서 갖은 고난을 극복하고 성공한 건설 직원이라면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이런 생각은 대부분 성공했다.” 해외건설의 어려움을 力說(역설)한 말로 크게 공감하고 있습니다.
40- 50도가 넘는 열사熱砂의 모래바람과 낯선 풍습, 언어, 문화의 장벽을 뛰어넘어 조국과 가족을 위해 그 모든 것을 희생했던 우리들의 아버님 형님 그리고 아우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전합니다.
어제 이곳에 와 하룻밤을 함께한 동지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살펴보자니 그 환한 얼굴들에 얽힌 수많은 이야기들이 줄을 섭니다. 현장에 얽힌 이야기, 가족들에 얽힌 이야기, 이 자리에 함께 못한 전우들의 이야기.... 이야기에 이야기는 끝이 없이 이어지고 이야기에 연하여 함께 못했던 시간의 공극空隙들이 차곡차곡 메워집니다.
지금껏 나름 성공이라는 현재의 모습을 그릴 때 마다 그 때 그 시절을 시련과 극복, 성취라는 자랑스러운 역사의 이름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늘 제 가슴을 떠나지 않았던 화두의 하나는 “그런데 나는 과연 그들에게 무엇이었나?”였습니다.
부하들의 고충苦衷은 아랑곳 않고 오로지 자신의 영달榮達만을 위해 희생犧牲을 강요하던 냉혹한 지휘자였을까요? 회사를 위해서라면 수단방법 가리지 않으면서도 부하들에게는 일체의 부정과 타협을 거부하며 원리원칙을 강조하던 고지식한 지휘자였을까요? 그 대답은 오롯이 그분들의 몫이겠습니다 마는 적어도 이 말 한마디는 꼭 하고 싶습니다.
“그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저 권대욱은 없었습니다.” 그 따뜻함이, 그 아름다움이 그리고 아직도 저를 믿어주심이 저를 목 메이게 합니다. 30년 만에 제 화두 하나를 깨뜨리며 찾아오신 그 분들에게 김춘수님의 '꽃"을 헌시獻詩로 증정贈呈합니다. 그분들은 제게 꽃이었으며 저 또한 그분들에게 꽃이 되고 싶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서로를 불러주니 우리 모두는 그 누구의 꽃이 되었습니다.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香氣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산막길 돌아가며 제게 보낸 메시지 하나가 이런 믿음을 더욱 확실히 합니다
Quote
안녕하세요? 주말에 문막에서 너무 즐겁고 감사했습니다. 귀경길에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뒤풀이로 커피한잔 하면서 참석자 모두 뜻있고 즐거운 시간 보내고 권회장님의 삶에 대하여 진정한 존경심을 갖게 한 시간이었습니다.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내외분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바로 아래 글의 주인공이신 서정대 사장이 보내 온 메시지입니다
무케이베의 英雄(영웅)들
1983년 7월 한보 요르단역사에 금자탑이 될 만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Mukeibeh-Adassiyah Emergency Canal Project의 수주受注가 그것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요르단은 농업기반, 특히 수자원水資源의 확보개발이 가장 큰 당면과제였으며 지표수地表水는 물론 지하수 개발地下水 開發에도 역점을 두고 있었습니다. 지표수 개발을 위해 댐을 쌓고 이 수원水源으로부터 운하와 파이프 라인을 통해 요르단 계곡 내 농경지에 스프링클러 灌漑 system을 구축하는 것이 요르단 계곡사업의 개요였던 만큼 우리의 요르단사업도 이 범주를 크게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요르단 정부 전체가 농업용수개발農業用水開發에 역점을 두고 있던 시점(1982.6.21)에 암만 북방 약 150km 무케이베 지역에서 약 3m3/sec의 온천수가 JVA 지하수 탐사팀에 의해 발견되었습니다. 대사건이 발생된 것이지요. 물이 귀한 나라에서 이 엄청난 양의 지하 온천수 발견은 요르단 국왕을 비롯한 조야朝野의 관심사였고 이 아까운 물을 버리지 않고 시급히 이용해야 하는 방안이 연구되어야만 했습니다. 특히 이 수원水源을 방치할 경우 이 물은 이스라엘과 접경하고 있는 얄묵강으로 방류되어 양국兩國의 수자원협정水資源協定에 따라 양국이 양분 이용하도록 되어있는 만큼 다음 연도수자원 재협정 시점인 1983년 3월까지 이 물의 진로를 요르단 쪽으로 틀어 전량全量을 요르단계곡 灌漑用水로 활용해야할 필요가 있었던 것입니다. 남은 기간은 7개월, 이 기간 내에 무케이베 수원水源에서 직선거리로 12km 떨어진 Adassiyah의 기존 EGMC(East Ghor Main Canal)까지 灌漑水路를 시공 완료해야 했습니다.
난공사였으나 요르단정부로서는 필히 완수해야만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였습니다. JVA본부에 비상이 걸리고 연일 긴급회의가 개최되었습니다. 세계유수의 건설업체 및 컨설턴트에게 타당성 및 설계가능기간을 타진하였으나 영국의 Wimphey, 현지의 Hud Hud Shand, 일본의 Nippon Koei 등으로부터 날아온 답신은 설계에만 4~6개월, 입찰준비 2개월, 시공에 최소 1년 6개월이 걸린다는 절망적인 회보였고 절망한 JVA 고위층은 마지막 희망으로 당사當社에 가능성을 타진하였습니다.
본사, 지사에 비상이 걸리고 연일 숙의에 숙의熟議가 거듭되었으나, 대체적 의견은 공기工期가 너무 촉박하여 어렵다는 쪽으로 기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 회장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러한 호기好機를 놓쳐서는 아니 되며, 본사本社의 가용자원可用資源을 총동원해서라도 이 일을 성사시킴으로써 요르단에 한국기업의 이미지를 굳건히 심어야 하겠다는 결심을 굳힌 것이지요. 회장의 추진지시에 본사기술진이 대거 현지 급파되고 지사 현장요원들도 프로젝트팀을 구성하여 발주청에 다음과 같이 제안, 수락을 받았습니다.
첫째, 시공기간 단축을 위해 설계시공 일괄방식設計施工 一括方式(turn-key)을 택한다. 둘째, 별도 공사 감독사를 지정치 않고 JVA가 직접 감리한다. 셋째, 전체노선의 선정과 시공방법, 품질관리는 전적으로 당사 의사에 따른다. 넷째, JVA는 본 공사 수행에 필요한 모든 지원과 협조를 한다. 다섯째, 공사비 계산은 단위당 가격에 의하여 물량전산物量精算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조건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건이 좋다고 좋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 엄청난 일을 공기 내에 마치기 위해서는 비상한 노력과 각오가 필요했습니다. 만일 성공치 못할 경우 회사의 위신추락은 물론 국제적 망신을 면키 어려운 중차대한 도전에 직면케 된 것이지요.
요르단 7개 현장에 긴급지시가 떨어지고 전全 가용可用 장비, 인력, 자재에 대한 비상동원령이 하달되었습니다. 다른 현장들도 한창 mob 또는 공정 피크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주로 인근의 와디 아랍 댐 및 얄묵 현장에서 차출하였습니다. 초기에는 각 현장소장들의 반발 때문에 거의 우격다짐으로 밀어 붙일 수밖에 없는 등 애로사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현장소장 서정대 부장(현 중용건설 대표)은 이렇게 회고합니다. ‘공사 초반기, 인력과 장비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계획과 실행의 공정 갭은 점차 커져갔으며, 주어진 여건 아래서 당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은 모든 인력과 장비의 최대 활용 및 24시간 突貫作業이라는 비상수단이었다.’ 전 임직원이 ‘하면 된다.’는 굳은 신념으로 뭉쳐 자신을 채찍질해가며 상호 협조하여 1인 2역의 업무를 분담하는 한편, 40%를 하회下廻하는 장비가동률을 80%선으로 상회시켰으나 장비의 절대부족 및 그나마도 대부분이 낡은 장비라 공정은 여전히 뒷걸음쳤다. 주지하다시피 본 수로공사는 토공작업土工作業이 대종을 이루기 때문에 장비의 적시투입 여하에 따라 공사성패가 좌우되는 만큼 장비의 절대부족과 낮은 가동률은 심각 이상의 문제를 야기 시켰다. 45도 이상의 한여름 폭염 아래서 하루 18시간의 고된 일과에도 불구하고 휴일 없는 업무의 나날, 산을 허물고 암절벽岩絶壁을 깎아내는 영화에서도 보기 힘든 가슴조이는 웅장한 발파작업, 밤이면 이스라엘군 진지에서 날아드는 불청객 조명탄 세례, 시간을 아끼느라 작업장에서 삼키는 점심식사.
11월 우기雨期로 접어들면서 몇 십 년만의 기록적인 강우로 40일 이상 작업을 불능케 한 악천후와의 고투, 업무협의차 또는 공정지연에 대한 대책과 공법의 기술적 타당성을 설명키 위하여 낡은 지프차에 실려 왕복 300km의 암만 지사와 JVA로의 빈번한 출장 등. 지난 그 모든 것은 마치 죽느냐의 전쟁과도 같은 극한상황에 처한 처참한 투쟁 그것이었다.
하지만 ‘불가능’을 ‘가능’으로 역전시킬 수 있었던 힘, 그 힘은 전 직원이 자신과의 투쟁에서 쟁취한 승리였으며 책임을 완수하겠다는 투철한 사명감 바로 그것이었다. 어려움 속에 보다 큰 성공에의 길이 있고 열심히 구하는 자만이 바라는 바를 구할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진리를 이 공사를 통하여 실감케 되었다.
비록 규모는 크지 않으나 공사 전반에 걸친 설계, 시공 및 감리 등을 순수 우리 기술진에 의한 턴키 조건으로 본 공사를 성공리에 준공하겠다는 전 한보 가족의 의욕과 집념, 또한 발주처發注處인 JVA는 말할 것도 없고 요르단 정부와 전 국민의 본 공사에 대한 지대한 관심과 한보에 대한 신뢰감 등은 우리들로 하여금 아득히 먼 이국의 밤하늘에 24시간 돌관작업突貫作業이라는 찬란한 기적의 횃불을 드높이 밝히게 하였던 것이다.
공사원가가 정상작업에 비하여 엄청나게 높은 돌관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턴키 및 단가계약조건單價契約條件의 장점을 충분히 활용하여 기술적 타당성을 근거로 하여 유리한 시공과 공기단축 및 공사원가가 절감되는 방향으로 설계하여 발주처를 납득시켰고, 계약체결 시 누락된 새로운 항목의 단가책정에 있어서도 충분한 자료를 첨부한 수익성 있는 단가單價를 제시하여 발주처發注處를 설득, 승인을 얻었으며, 또한 석산石山 발파장 근처의 군 작전용 지뢰지대와 얄묵강을 보호하기 위한 제방 축조, 발파 및 불도저작업으로 인하여 낙하한 기존 도로상과 도로변의 암석제거를 위한 day-work 등을 발주처로부터 승인받아 canal 본 공사 이외에도 수익성 높은 부대공사를 유도하여 수지타산은 실행대비 약 50%선을 유지하리라 예상되었다. 공사 역시 토공土工, 구조물, canal lining 등으로 분담하여 일사분란한 조직을 편제編制, 담당기사들이 헌신적인 솔선수범을 실천함으로써 한국인 기능직은 물론 연 투입인원의 70%를 차지하는 현지인 및 제3국인 노무자들까지도 사명감에 뭉쳐 물량을 하나하나 소화시켜 나갔던 것이다.
아무튼 우리는 모두 불가능이라 여겼던 대역사大役事를 한 치의 차질도 없이 준공하고 요르단 정부요인과 대사관요원 당사 임직원이 참석한 가운데 1983년 3월 3일 성대한 준공식을 갖고 이어 그 해 5월 3일 요르단 국왕으로부터 요르단왕국 최고훈장인 후세인 왕王 빈알리 훈장을 선물 받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현지에서 24시간 주야晝夜 3교대로 흙먼지와 바람, 폭염을 이겨내며 오로지 하면 된다는 신념 하나로 그 날의 신화를 창조한 우리의 자랑스런 건설역군들, 깎아지른 절벽을 내려가지 못하고 주춤거리는 불도저 삽날위에 뛰어 올라 ‘나를 따르라’ 외치던 용감했던 우리의 용사들, 그리고 측량기재測量機材를 둘러메고 험난한 산비탈을 누비던 우리의 기사들, 나는 감히 이들을 영웅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주: 바로 그 현장 소장이던 서정대 사장님이 일행들을 이끄시고 산막을 찾아 주었습니다.
와디 아랍댐의 회한悔恨 나의 가슴속 한 구석에 아직도 남아있는 고 이희영과장, 이 과장을 앗아간 와디 아랍댐 공사는 해외현장 시절중의 잊을 수 없는 공사입니다. 이 공사는 80년 11월 최저입찰사였던 대만의 Retser사와의 치열한 수주경합 끝에 네고(nego)없이 2위 투찰投札로 계약한 공사로 공사 초기단계에서부터 완공단계에 이르기까지 매우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진 모범적인 공사였습니다.
84년 11월 4일 당시 본 현장은 좌안左岸 커팅과 COFFER댐 및 우회터널이 완성된 상태에서 댐 구조를 위한 석산개발石山開發과, 중기重機의 점검 및 준비 작업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이었으며, 일요일 정례 소장회의가 이 댐 인근 현장에서 있었습니다.
전 현장의 소장과 공무, 자재, 총무담당자가 모여 지사장 주재 하에 주간공정週刊工程을 보고하고 현안문제 및 대책을 협의한 후,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암만 지사로 귀임하던 중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우기 중 흔히 있는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으나 강우의 강도가 Bentz 승용차 와이퍼를 전속으로 가동해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차를 일단 세우고 수행했던 지사요원들에게 현장 수방대책을 지시한 후 비가 그치길 기다려 지사로 귀임하였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취침한 시간이 12시경, 약 1시간 정도 경과했을까. 내 방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김 이사가 굳은 표정으로 돌처럼 서 있었습니다. 사고를 직감했습니다. “사고인가?” “예.” “ 어딘가?” “와디 댐 현장입니다.” “현장은?” “무전 교신 상태가 좋지 못해 상세히 파악은 안 되지만 대형사고 같습니다. 지금 현장으로 출발하여 재보고하겠습니다.” 앞이 깜깜했습니다. 즉시 지사원들을 깨워 사태파악 및 수습에 나섰습니다. 폭우로 인해 현장과의 교신이 어려웠지만 대충 파악한 사고내용은 심각했습니다. 우회터널과 COFFER댐 사이에 석산개발을 위한 가설도로架設道路가 계곡에서 갑자기 불어난 물을 감당치 못하고 터지면서 COFFER댐 밑에 야간작업을 위해 대기하고 있던 덤프, 페이로더, 도저 등 장비 다수와 중기 요원의 지휘소를 덮쳐 거의 모든 중기重機가 유실流失되고 아국인, 현지인 및 인도인 각 1명이 실종되는 대참사大慘死였습니다. 날이 밝자 본사에 사고내용을 긴급 타전하였으며, 대사관 및 발주처에도 이러한 사실을 보고하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제 눈앞에 펼쳐진 현장의 모습은 참혹했습니다. 기가 막혔습니다. 현장의 COFFER댐 전방으로 대형 호수가 하나 생겼고 뒤집힌 트럭의 뒷바퀴와 크레인 일부만 보일 뿐 온통 뻘 탕의 흙탕물 투성이었습니다. 중기도 중기지만 인명이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다행히 실종됐던 인도인과 현지인은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병원에 후송조치 되었으나 실종된 한국인 1명은 밤을 새워 수색을 해도 소재조차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시간과 상황으로 보아 생존 가능성은 희박했으나 사체死體라도 찾아야 했습니다. 전 현장 작업을 중단시키고 모터보트와 인명수색조를 편성하여 coffer댐 내의 바닥을 샅샅이 훑어 나가는 동시에 우회터널로 방류放流되었을 가능성에 대비 하류지역 현지 관공서와 경찰, 주민들에게도 전단을 뿌려 협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상황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수심이 3~4m정도 될 뿐 아니라 현지 지역의 특성상 뻘과 흙탕물로 시계視界가 나쁘고 수온이 매우 차서 30분 이상의 연속작업이 불가능했습니다. 본사와 현지 대사관에서는 상황을 걱정하면서도 독촉이 빗발치고 발주처에서는 공정부진을 염려하여 대책을 촉구했습니다. 전 직원은 물론 외국인들까지도 철야로 동원되어 수색작업을 펴고, 대형 펌프와 중기를 동원, 물빼기 작업을 하면서 에어 컴프레서로 호수바닥을 불어 이 잡듯이 뒤져 나갔지만 끝내 찾을 수 없었습니다.
직원들은 지치고 사기士氣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대책이 필요했습니다. 전 현장의 직원, 각 공구장, 반장, 새마을 대의원을 집합시키고 의견을 물었습니다. 사체死體를 찾을 때까지 전 공사를 중단하고 수색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견과, 수색작업을 계속하되 공사는 공사대로 수행한다는 의견으로 양분되었으나 후자 쪽이 우세했습니다. 결론을 내렸습니다.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다. 멀리 외국에까지 나와 이대로 좌절해서는 안 된다. 수색작업은 계속하되 공사도 진행해야 한다. 이것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 고인의 뜻이기도 하리라 확신했습니다. 전열을 가다듬어 물속에 처박힌 중기는 복구하고 작업을 재개했습니다. 물론 수색작업도 병행했습니다.
다행히 중기 손실은 예상보다는 경미했으나, 수리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보험사保險社와 발주처發注處에 천재지변天災地變으로 인한 보상과 대책을 협의하며, 대사관과 본사 현장으로 바쁘게 뛰어 다니는 과정에서도 항시 뇌리에는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는 고인의 얼굴이 떠오르곤 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요르단 한보가족 전부가 같은 생각이었습니다. 불안과 고통의 날이 계속되던 어느 날 꿈에 고인의 것으로 보이는 워커 한 짝이 우회터널 입구에 쌓인 잡목과 뻘 있는 곳에서 보여 깜짝 놀라 잠을 깨어보니 새벽 5시. 지사에 출근 하자마자 현장에 무선으로 지시했습니다. “우회터널 입구부분을 집중 수색하라.” “발견 즉시 보고하라.” 찾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초조히 기다리길 몇 시간, 지사장실 밖에 설치된 무선기가 왕왕 울렸습니다. “여기는 와디, 여기는 와디, 지사 응답하라 오바.” “여기는 지사, 보고하라 오바.” “금일 오전 9시 20분 우회터널 입구에서 사체발견, 이상.”
드디어 찾았습니다. 실종된 지 15일 만에 현몽現夢현몽하여 자신의 소재를 알린 고 이희영 과장, 왈칵 눈물이 솟았습니다. 현장에 빈소를 차리고 지사장支社葬으로 엄숙히 장례를 치렀습니다.
대사님과 발주처 공사감독, 전 현장 직원들이 애도하는 가운데 사우 대표의 조사는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대 머나먼 고국에 부모형제 처자식을 두고 이곳 요르단 오지에서 싸늘한 사체로 변했는가? 무엇을 위해 살고 무엇을 위해 죽는가? 이곳 와디 아랍댐이 완공되는 날 그대를 위해 눈물 흘리리라.’
영결식장永訣式場은 울음바다가 되고 멀어져가는 운구행렬을 바라보는 나의 눈가에도 어느덧 이슬이 맺혔습니다. 이후 직원들은 배전의 단결된 모습으로 늦은 공정만회의 결의를 다지며, 예정된 공기 내에 성공적으로 공사를 완공하였습니다.
사막의 오지奧地에 푸른 물이 가득담긴 요르단의 젖줄 와디 아랍 댐. 이곳에 깃든 한국인의 의지意志와 희생犧牲이 영원히 기억되길 바랍니다.
첫댓글 반갑고 감사합니다.
자주오셔서 좋은글 많이 올려주세요.
페북에 올린글 복사해서 올리셔도 됩니다.
음악회 한번해야죠.
일정 잡아보겠습니다.
저도 먹먹하네요~~현장의 그어려움 동료의 죽음 같이 있지 않으면 전혀 실감 할수 없는 어려움~~어려움에 처하면 정면 돌파가 답인것 같습니다~~그렇지 못하면 해결할수가 없겠지요~~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 분들의 희생과 노고로 지금의 발전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감동의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