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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15일
곡부의 아침 택견
呦呦鹿鳴 유유히 우는 사슴의 울음소리
食野之芩 들의 금풀을 먹도다.
我有嘉賓 내 아름다운 손님이 있어
鼓瑟鼓琴 비파를 타고 거문고를 타니
鼓瑟鼓琴 비파를 타고 거문고를 탐이여
和樂且湛 화락하고 또 즐겁도다.
我有旨酒 내 맛있는 술을 두어
以燕樂嘉賓之心 가빈의 마음을 안락하게 하도다.
-성백효 역주, <<시경집전(詩經集傳)>> 권9, <소아(小雅)- 녹명(鹿鳴)>
아침을 먹으러 시례당으로 내려갔다. 간밤에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었던 방 맞은편 식당이다. 정면에 ‘國風’, ‘甘棠’, ‘鹿鳴’ 같은 <<詩經>>의 편명과 제목이 붉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쓰였다. 네 사람이 앉은 사각 테이블의 가운에는 카네이션이 유리컵에 놓여 있다. 요순시대의 다사롭고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아침밥을 먹으니 마음은 포근하고 행복해진다. 오늘 아침에는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이 많다. 기름이 없고 담백하고 생기 넘치는 식단이다. 쌀로 빚은 찐빵, 좁쌀로 끓인 죽, 기름에 볶지 않고 뜨거운 물에 데쳐 주는 브로콜리, 양배추, 바나나, 귤, 방울토마토를 맛있게 먹었다.
행단호텔을 나서서 버스가 선 곳은 공부로 가는 작은 셔틀 차가 서 있고 입장권을 사는 곳이다. 미세먼지가 오늘도 안개처럼 자욱하다. 길거너 상점의 간판들 중에는 청색 바탕에 흰 글씨로 ‘SAMSUNG’이라고 쓰인 것이 또한 반갑다. 벽돌로 쌓은 공부의 성벽이 안개 속에서 보인다. 잠시 기다리는 사이에 둥그런 광장에서 윤현중 샘이 지도해주는 택견의 기본 동작을 배웠다. 손과 발을 춤추듯이 유연하게 움직이며 몸을 풀고 발 내지르기 기본 동작을 따라하였다. 박 단장님과 윤 샘이 시범으로 겨루기를 한다. 휘청하는 발동작이 순식간에 이루어지고 박 단장님은 넘어지고 만다. 정거장의 중국인 직원들은 제기차기로 아침 운동을 한다.
원형광장 주변에는 흰 벽에 금색의 예서체 붓글씨로 <<논어>>의 명언들이 쓰여 있다. 모두가 내가 좋아하는 구절들이고 익숙하니 반갑고 기쁘다.
‘有朋而自遠方來 不亦樂乎(<학이>)’, ‘四海之內 皆兄弟也(군자는 경건하여 실수가 없고, 사람들과 더불어 공손하고 예가 있으면 천하의 동포들이 모두 형제이니, 군자가 어찌 형제 없음을 근심하리오? <안연>)’, ‘己所不欲 勿施於人(<위령공>)’, ‘德不孤 必有隣(<이인>)’,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위정>)’, ‘子曰: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옹야>)’, ‘子曰: 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지 않으면 맹목적으로 되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위정>)’, ‘子曰: 黙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于我哉(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묵묵히 사물을 인식하고, 끊임없이 배우며 싫증내지 아니 하고, 사람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아니 하니, 나에게 또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술이>)’
곡부알성(曲阜謁聖)
놀이공원에서 볼 수 있는 바퀴가 작고 문턱이 낮아서 편하게 타고 내리는 차에 올랐다. 공부 성의 둘레에 나 있는 해자를 따라 잠시 이동하였다. 해자 가에는 입이 다진 버드나무가 열지어 서 있고, 해자의 맑은 물에 성벽과 버드나무가 어린다. 내려서 해자 가의 길을 잠시 걸어갔다.
멈춘 곳은 공부로 들어가는 성문의 옹성이다. 옹성 문 위에는 ‘萬仞宮牆’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돌이 박혀 있다. 옹성문 좌우에는 禮, 樂이라는 글자가 적힌 간판이 서 있고 옹성 위의 성가퀴에는 깃발들이 꽂혀 있고, 좌우에는 종과 북이 걸려 있다. 자공이 스승 공자의 경지를 표현한 대목이 <<논어>>에 나온다. 일만 길 높이의 궁궐 담장 안을 궁문으로 들어가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공자님의 문하에서 노닐지 않으면 그 경지를 짐작할 수 없다는 말이다. 태산에 당 현종 봉선 기념 마애비 옆에 ‘壁立萬仞’이라고 쓴 각자가 있었다. 만길 높이의 태산과도 같은 공자님의 경지를 표현한 청나라 건륭 황제의 글씨이다.
노나라의 실권자인 대부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조정에서 대부들에게 말하였다: “자공이 중니(仲尼)보다 낫다.” 공문에 호감을 지닌 중신(重臣) 자복경백(子服景伯)이 이 말을 자공에게 일러 주었다. 이에 자공이 말하였다: “비유컨대 부자와 나의 경지는 건물의 담장과도 같다. 나 사(賜:자공의 이름)의 담장은 어깨 높이 정도이다. 그래서 그 담 안의 건물들의 좋은 모습들을 힐끗힐끗 들여다 볼 수가 있다. 그러나 부자(夫子)의 담장은 여러 길이나 된다. 정식으로 그 대문을 찾아 들어가 보지 않는 이상, 그 안에 있는 종묘의 아름다움과 백관(百官)들이 일하는 건물들의 풍요로운 모습을 도저히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그 대문을 찾아 들어가는 자가 드물다. 숙손 부자의 잘못된 말씀이 또한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겠는가?
-김용옥, <<논어한글역주>> <자장>
해자를 건너서 궁문을 들어서니 다시 성문이다. 그 문을 들어서니 ‘금성옥진’이라고 쓴 웅장하고 붉은 글씨가 새겨진 석방(石坊)이 있다. 석방은 문이 셋이며 기둥머리에는 석사자상이 올려져 있다. <<맹자>>에 흩어진 하․은․주 삼대의 문물을 ‘집대성’한 공자를 칭송한 ‘금성옥진’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집대성이라고 하는 말에서 공자님을 모신 사당을 ‘대성전’이라고 하고, 공자님 묘소의 비석에도 ‘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작호가 새겨졌다. 해동의 공자라고 칭송되는 퇴계 선생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도산서원 유물전시각 이름도 ‘옥진각’이다.
맹자께서 다시 총평하여 말씀하시었다: “네 사람이 모두 성인라고 할 수 있겠지만, 백이는 성(聖)의 순결함을 구현한 자이고, 이윤은 성의 적극적 책임감을 구현한 자이고, 유하혜는 성의 물흐르듯이 자연스러운 조화를 구현한 자이다. 그런데 공자는 이 세 사람의 순결함과 책임감과 조화감을 때에 맞추어 모두 구현하는 시중(時中)의 성인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자를 집하여 대성하였다고 일컫는 것이다. 집대성(集大成)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아악(雅樂)에 있어서 쇠로 된 편종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옥으로 된 편경의 소리가 그 울려 퍼진 소리들을 품안에 다 주워 담는 것과도 같다.(金聲玉振)에서 振은 떨친다는 뜻이 아니고, 중용 26장의 ‘振河海而不洩’에서 황하와 황해의 드넓은 물을 품에 안듯이, 울려 퍼진 소리를 수렴한다는 뜻이다.) 금성(金聲)이라고 하는 것은 시작하는 조리(條理, 질서감)이고, 옥진(玉振)이라고 하는 것은 그 울려 퍼진 소리를 품에 안는 마무리의 조리이다. 시작하는 조리는 지혜의 사건이고, 마무리 짓는 조리는 성의 사건이다.
지혜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기교라 말할 수 있고, 성이라는 것은 비유하자면 기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지금 백 보 떨어진 곳에서 활을 쏜다고 해보자! 화살이 과녁이 있는 곳까지 힘차게 도달하는 것은 기력의 덕분이다. 그러나 과녁의 정중앙을 꿰뚫는 것은 기력의 덕분이 아니라 기교의 덕분이다. 그러니까 활을 쏘는 데는 반드시 기력과 기교가, 성과 지가 구비되지 않으면 안 된다. 공자께서는 이 양면을 다 구비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집대성자라고 일컫는 것이다.(孟子曰: “伯夷, 聖之淸者也; 伊尹, 聖之任者也; 柳下惠, 聖之和者也; 孔子, 聖之時者也. 孔子之謂集大成. 集大成也者, 金聲而玉振之也. 金聲也者, 始條理也; 玉振之也者, 終條理也. 始條理者, 智之事也; 終條理者, 聖之事也. 智, 譬則巧也; 聖, 譬則力也. 由射於百步之外也, 其至, 爾力也; 其中, 非爾力也.)
-김용옥, <<맹자, 사람의 길>> <만장>하
금성옥진방을 지나자 돌난간이 있는 다리가 있는데 반수교(泮水橋)이다. ‘영성문(櫺星門)’이라는 노란 글씨가 새겨진 석방이 있다. 세 개의 문 위의 상인방마다 기러기나 고니로 보이는 새가 새겨져 있고, 그 좌우에는 덩굴모양의 상서로운 문양이 두 개씩 새겨져 있다. 문 위로 높이 솟은 둥근 돌기둥 아래쪽엔 구름 문양이 새겨진 운석(雲石)이, 위에는 무사 석상이 올려져 있다. 삼문에는 붉은 칠을 한 나무 격자문이 달려 있다.
안내판을 읽어보았다. 이 문은 본래 명 나라 영락 13년(1415)에 목조로 세웠고, 청나라 건륭 19년(1754) 석주, 쇠들보(鐵梁)로 고쳐지었다. 영성문이라는 편액은 건륭제 친필이다. 영성(靈星)은 천전성(天田星)이라고 하는데, ‘선비를 얻는 경사를 주관하는’ 별로로 인식되었다. 고대의 제왕들이 천제를 지낼 때 영성에 먼저 하였다. 공자를 영성과 같이 존숭하여 이러한 이름을 쓴 것이다.
영성은 28수 중에 각수인데, 농사를 주관하는 별로 인식되어 <<삼국지>> <동이전>에는 고구려에서도 영성과 사직에 제사를 지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도 “입추 뒤 진일(辰日)에 본피촌(本彼村)에서 영성을 제사지낸다.” 연암 박지원이 안의현 현감으로 있을 때에도 네 개의 영성문(欞聖門)을 고쳐 세웠다고 한다(<安義縣社稷壇神宇記>).
영성문을 지나자 금성옥진방처럼 ‘太和元氣’라는 녹색 글씨가 새겨진 석방이 세워져 있다. 명나라 가정제 23년에 세웠고, 산동순무 증선(曾銑)의 글씨이다. 태화는 천지, 음양, 일월이 어울린 것을 말하고, 원기는 우주의 근원적인 기운을 뜻한다. 유가 사상이 세계만물의 원시의 근본을 구성하는 것을 표현한 말이다.
그 문을 지나자 붉은 전서체 글씨로 지성문이라고 새겨진 석방이 있다. 맹자는 아성, 안자는 복성(復聖), 공자는 지성(至聖), 주공은 원성이라고 부른다. 명나라 홍치13년(1500)에 처음 세웠을 때는 宣聖門이라고 하였고, 청나라 옹정 7년(1729)에 지성문이라고 고쳤다. 문 위에는 화표, 벽사 등의 장식물이 있어서 장중함과 위엄을 보인다.
그 문을 지나자 ‘聖時門’이라는 편액이 세로로 걸린 궁궐문이 있다. 중문 앞에는 두 마리의 용과 구름을 조각한 운룡문석을 계단에 세로로 설치하였다. 이 문을 지나자 넓은 마당에 노거수가 된 측백나무들이 열 지어 서 있는 마당이 나온다. 가로 세로로 열을 지어 도열해 있는 측백나무가 숲을 이루는데, 더 없이 신성하고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돌난간이 있는 화려한 벽수교(璧水橋) 돌다리를 지나서 붉은 바탕에 금빛 글씨로 쓴 홍도문 편액이 세로로 걸려 있는 문으로 들어섰다. 천정이나 들보에는 국화 그림이 그려져 있으나 오랜 세월에 낡았다. 단원 김홍도의 이름이 생각난다. <<논어>>에 나오는 말에서 이름을 지었다. “子曰: 人能弘道 非道弘人(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요,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은 아니다.(<위령공>)”. 명나라 홍무제 10년(1377)에 공묘(孔廟)의 대문으로 처음 건축하였고, 청나라 세종 옹정제가 가 <<논어>>에 근거하여 ‘홍도문’이라고 명명하고 직접 편액을 썼다.
홍도문을 지나자 다시 쭉쭉 곧고 늠름한 측백나무들이 도열한 마당이 나온다. 홍도문과 닮은 大中門이다. 김대중 대통령이 생각난다. 북송 시대에 공묘의 대문으로 처음 세웠고, 청나라 건륭제의 어필 편액이 걸려 있다.
대중문을 지나자 마당 가운데에 同文門이 보인다. 그 오른쪽 뜰에 ‘성화비(成化碑)’가 있다. 명나라 성화 4년(1468)에 세운 ‘御製孔子廟碑’ 이다. 성화제 헌종(憲宗) 주견심(朱見深)이 즉위 2년에 지은 비문이다. 비의 높이는 약 5미터이며 글씨가 아름다워 해서체 임모를 위한 체본으로 많이 쓰인다.
<어제공자묘비(御製孔子廟碑)>
어제중수공자사당비(御製重修孔子廟碑)
짐이 생각건대 공자의 도는 천하에 하루라도 없을 수가 없다. 왜 그러한가. 공자의 도가 있으면 강상이 바로서고, 윤리가 밝아지며, 만물이 각기 그 있을 바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단이 마구 일어날 것이고 사설이 분분하게 지어 질 것이다.
강상은 어디부터 바르게 되고 윤리는 어디서부터 밝아지며 천하 만물은 또한 어떻게 각기 그 있을 바를 얻는가? 이것은 백성의 기쁨과 근심과 매어있고, 국가의 질서와 혼란과 관계된다. 천하를 가진 자는 진실로 공자의 도를 하루라도 없을 수가 없다. 대개 공자의 도는 곧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도이며, 육경에 실려 있는 것이다. 공자는 이들 성군들의 도를 좇아 배우서 그들의 도를 밝혀서 후세에 알린 것이다.
그래서 말한다. 하늘이 장차 부자를 세상의 목탁으로 삼고 하늘이 공자를 낳지 않았다면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의 도는 후세에 어떻게 알려졌겠는가? 장차 마음이 어둡고 캄캄하여 꿈속과 다를 바가 없어서 이른바 만고의 기나긴 밤이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일로 보면 하늘이 공자를 낳은 것은 실로 천지가 마음을 바로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백성이 삶을 바로 세우도록 하기 위하여, 지난날의 성인들의 도를 후세에 잇도록 하기 위하여, 만세토록 태평성대를 열도록 하기 위하여서인 것이다. 그 도의 쓰임새의 크기는 천지와 같을 뿐만이 아니다.
아! 성대하도다! 진실로 사람이 생겨난 이래로 공자님 같은 분이 없구나! 제자들이 공자님의 그 성스러운 덕성을 형용하기가 같지 아니하지만 중용 한 책에 그 성스러운 덕이 남김없이 밝혀져 있다.
공자이후로 천하를 무려 10여 왕조가 차지하였지만 그 군주가 비록 현명하고 현명하지 못함과 지혜와 어리석음이 같지 않았지만, 누군들 공자의 도에 의뢰하여 나라를 다스리고, 공자를 존숭하는 예가 더욱 더 오래고, 현창하고, 멀리 가고, 성대하였으며, 한나라, 위나라 이래로 공자를 칭송하는 이름을 올리고 제후로 봉하고 드러내기를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우리 윗대 황제들도 학교 교육을 더욱 일으키고 제전을 더욱 융성시키며, 서울부터 천하의 고을들에 이르기까지 학교와 제전이 없는 곳이 없게 하였지만 공자님 마을인 여기 궐리에 대해서는 더욱 각별하게 하셨다.
그래서 태조 고황제께서 즉위한 처음에 제관을 보내 제사를 받들고 그 성대한 모습을 글로 지어 비석을 세우셨다.
태종 문황제께서 사당을 다시 수리하여 묘우를 새롭게 하였는데, 또한 글을 지어 그 사실을 기렸다.
짐이 황제 자리를 이어받고 직접 태학에 가서 공자님께 석전 제례를 올렸고, 이곳 궐리(闕里)의 사당이 세월이 오래되어 다시 점차로 피폐해져서 중수를 하기에 이르렀다.
중수공사 책임자가 공사가 끝났음을 보고하여 짐의 애타는 마음을 깊이 달래주었다. 공자의 도가 천하에 있음은 삼베와 비단 같은 옷감과 콩과 조 같은 곡식과 같아서 백성들의 생활에 잠시라도 없으면 안 된다. 그 깊은 인과 도타운 은택이 천하의 후세에 흘러넘치는 것이 진실로 무궁하다.
백성의 왕이 된 자로서 나는 장차 어떻게 그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으로 사당의 외관을 새롭게 지어서 공자님을 존숭하지만, 존숭한다는 것이 어찌 한갓 그러한 것뿐이겠는가? 그 도의 존속을 돕는 것이다.
그대들은 공자의 도가 늘 있도록 하여 멸망하지 않도록 하면 강상이 바르게 서지 않음이 없을 것이고, 윤리가 밝아지지 않음이 없을 것이며, 만물이 또한 그 있을 바를 얻지 않음이 없을 것이다. 지금 시대에 장차 이렇게 하면 태평성대의 나라가 될 것이고, 당우 하은주 삼대의 태평성대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오래 평안하고 길이 질서 있게 정치하는 책략의 단서는 이 도를 적용하는 데에 있다. 글을 지어 비석을 사당 뜰에 세워 우리나라가 유교를 숭상하고 공자의 도를 존중하는 뜻을 밝히노라.
이런 일을 시로 말한다.
하늘이 공자를 낳아서, 성인의 도를 잇는 성인으로 삼았다.
공자는 안빈낙도를 행하고, 인의와 중정의 도를, 교육하는 사도를 일으켰다.
따르며 공부하는 제자들 삼천인데, 요순의 도를 이었다.
도통은 흘러 공자에게 전해지고, 육경을 정리하여 도가 밝아졌다.
후세에 가르쳐, 삼강오상이 바로 섰다.
그 가르침 밝아서 소멸하지 않으며, 도와 덕은 높이 드날린다.
교화가 무궁하고, 제왕이 이로써 섰다.
천지와 같은 그 공력, 사람 난 이래 없었다.
우뚝하고 성대함이여! 요순의 심법을 굳게 잡고 집대성하였다.
실로 하늘의 명한 바이니, 천하를 얻은 자로다.
이를 받들고 이를 높이니, 성인의 도이네.
창성한 그 도를 감히 마루로 않으면, 나를 돌아보니 나는 애꾸눈일 뿐이네.
이 대업을 물려받아서, 성인의 가르침 생각는다.
마음이 이에 흡족하고, 그 도를 쓰서 치세의 도로 삼는다.
그 도로 억조창생을 평안하게하고, 성인의 은택 세상에 흘러넘친다.
만세에 새롭게 쓰서, 사전의 융성함을 알린다.
궐리에서는 더욱 추모하여, 묘우가 높고 높아라.
이 중수의 아름다움, 글로 지어 깨끗한 돌에 새기어, 전보다 빛난다.
목탁의 남은 울림, 여운이 천만년 울린다.
성화 4년(1468) 6월 11일
(朕惟孔子之道天下一日不可無焉 何也 有孔子之道則綱常正 而倫理明 萬物各得其所矣 不 然則 異端橫起 邪說紛//作 綱常何自而正 倫理何自而明 天下萬物 又豈能各得其所哉 是以生民之休戚系焉 國家之治亂關焉 有天下者誠//不可一日無孔子之道也 蓋孔子之道卽堯舜禹湯文武之道 載於六經者是已 孔子則從而明之以詔後世耳 故曰天//將以夫子爲木鐸 使天不生孔子則堯舜禹湯文武之道後世何從而知之 將心昏昏冥冥無異於夢中 所謂萬古如長//夜也 由此觀之則天生孔子實所以 爲天地立心 爲生民立命 爲往聖繼絶學 爲萬世開太平者也 其功用之大不但同//乎天地而已 噫 盛矣哉 誠生民以來之所未有者宜乎 弟子形容其聖不一 而是至於中庸一書 而發明之無餘蘊矣 自//孔子以後 有天下者無慮十餘代 其君雖有賢否智愚之不同 孰不賴孔子之道以爲治 其尊崇之禮愈久而愈彰愈遠//而愈盛 觀於漢魏以來褒贈可封可見矣 迨我//祖宗益興學校益隆祀典 自京師以達於天下郡邑無處無之 而在闕里者尤加之意焉 故//太祖高皇帝登極之初 卽遣官致祭 爲文以著其盛 而立碑焉//太宗文皇帝重修廟宇 而一新之 亦爲文以紀其實 而立碑焉 朕嗣位之日 躬詣太學釋奠孔子 復因闕里之廟 歲久漸弊 而//重修之 至是畢工 有司以聞深慰朕懷 嗚呼 孔子之道之在天下 如布帛菽粟 民生日用不可暫缺 其深仁厚澤 所以流//被於天下後世者信無窮也 爲生民之王者 將何以報之哉 故新其廟貌 而尊崇之 尊崇之者 豈徒然哉 翼其道之存焉// 爾使孔子之道常存 而不泯則 綱常無不正 倫理無不明 而萬物亦無有不得其所者 行將措斯世 於雍熙泰和之域 而//無異於唐虞三代之盛也 久安長治之術端 在於斯用是 爲文勒石 樹于廟庭 以昭我朝 崇儒重道之意焉 系以詩曰//
天生孔子 繼之爲聖 生知安行 仁義中正 師道興起 從遊三千 往聖是繼//
道統流傳 六經旣明 以詔後世 三綱五常 昭然不替 道德高亭 敎化無窮//
人極斯立 天地同功 生民以來 卓乎獨盛 允執大成 實天所命 有天下者//
是尊是崇 曰惟聖道 昌敢弗宗 顧予眇躬 承此大業 惟聖之謨 於心乃愜//
用之爲治 以康兆民 聖澤流被 萬世聿新 報典之隆 尤在闕里 廟宇巍巍//
于玆重美 文諸貞石 以光於前 木鐸遺響 餘千萬年//
成化四年六月十一日//)
그가 지은 비문의 내용과 달리 공자의 도를 따르기는커녕 이단을 따르고 악정을 저지른 어리석고 포악한 폭군이었다. 성화제는 부왕 정통제가 서부 몽골족, 오이라트에게 포로로 잡혀간 뒤에 황후의 명으로 황태자가 되었지만 숙부 경태제가 황제에 즉위하자, 황태자에서 폐위되었다. 돌아온 정통제가 유폐되어 있다가 그 일파가 쿠데타로 경태제를 폐위시키자, 천순제로 다시 즉위하였다. 성화제는 다시 황태자에 즉위하고 이름을 주견준(朱見濬)에서 주견심으로 고쳤다. 천순제가 죽고 1464년에 성화제가 즉위했다. 그는 처음으로 황실의 전답(皇莊)을 두었고, 권세가들이 한전(閑田)을 요구하자 농민의 토지를 빼앗아 그들의 전답(莊園)으로 만드는 것을 허락했다. 19세 연상의 만 귀비(萬貴妃)를 총애했는데 낳은 아들이 요절하자 패악을 저질렀다. 도술에 현혹되고 도사와 승려를 내관으로 임명하였으며, 환관을 기용하여 무고한 충신들을 살육하고, 매관매직을 자행했다. 치세 중에 타타르족의 침입을 받고, 유민들의 반란이 거세게 일어났으며, 즉위 23년에 병으로 죽었다.
성화비 옆에는 벽돌로 지은 비각 안에 높이가 5~6미터는 되어 보이는 ‘大明詔旨’비가 있다. 그 안쪽에는 살구색 무늬가 얼룩덜룩한 거대한 비석도 있다. 큰 비석들의 좌우면에는 손잡이처럼 튀어나온 부분이 2개씩 있는 것이 특이하다. 다시 규문각 뒤에도 벽돌 비각이 있고 청나라 황제들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강희 25년 2월 상정일에 강희제가 지은 비문을 새긴 ‘大淸皇帝御製闕里大成先師孔子廟碑’는 이수는 물론이고 비신의 테두리에도 온통 용이 새겨져 있다. 규문각과 대성문 사이의 마당에는 금대와 원대에 각 2개, 청대에 9개를 세워 13개의 비각이 있다. 비각 안에는 당, 송, 금, 원, 청 시대에 공자에게 시호를 내리고, 가봉하고, 사당을 수리하며 제사를 올린 일들을 기록한 비석 50여 개가 있다. 시안의 ‘비림’에 이은 제2의 비림이라 한다. 비들 중에는 <궐리도>를 새긴 비석도 보인다. 조선시대의 우리 선조들은 궐리도를 보면 공자님을 그리워하며 시를 짓기도 하였다.
규문각(奎文閣)은 본래 장서각이었다. 3층의 높고 웅장한 누각인 규문각은 정조가 설치한 왕실 도서관, 규장각(奎章閣)이 연상된다. ‘규’가 문장을 주관하는 별이라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이다. 북송 천희 2년(1018)에 처음 세웠고, 금 명창 2년(1191)에 중건하고, 명 홍치 17년(1504)에 확장하였다. 높이는 23미터이고 폭은 30미터이고 주춧돌은 석북이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들이 난입하여 소장된 수많은 소중한 전적들을 모두 불태웠다고 하니, 진시황의 분서갱유보다 더 심하다.
규문각 뒤쪽에는 측백나무가 있는 기이하게도 나무껍질이 용처럼 구불구불하게 솟아 있는 것도 있다. 규문각에서 오른쪽의 승성문을 들어가면 시례당(詩禮堂)이 있고, 그 마당에는 공자고택정(孔子古宅井)과 분서갱유 때 경서들을 숨겨 놓았던 그 벽을 기념하여 재현한 노벽(魯壁)이 있다. 공자고택에서 공자님이 물을 드셨을 그 유서 깊은 우물로 안내받지 못하여 무척 아쉽다. 안타깝지만 뒷날을 기약해 볼 수밖에 없다.
다시 대성문을 지난다. 운룡문을 새긴 석주가 세워져 있는 대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 가운데에 건륭제가 쓴 행단(杏亶)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이층의 지붕을 한 사각의 높은 정자가 있다. 대성문 뒤에는 키가 큰 노거수가 비스듬히 하늘로 높이 솟아있다. 그 옆에는 ‘先師手植檜’라고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공자님이 손수 심으신 회(檜)나무인데 죽고 살아나기를 반복하다가 지금의 나무는 청나라 옹정 10년(1732)에 재생한 것이라고 한다. 공자님의 체취를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어서 반갑다.
흥선대원군때 영의정을 지내고 강화도조약에 조선국 전권대사로 조인한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의 <<임하필기(林下筆記)>>에 이 나무와 관련된 일화가 나온다.
<회수도 이야기(檜樹圖說)>
중국 사람이 ‘궐리회수도(闕里檜樹圖)’를 주었는데, 그 기문에서 “조성(祖聖 공자(孔子)를 지칭함)께서 손수 심은 회나무는 영고(榮枯)의 이상함이 천지의 비태(否泰)와 일월의 박식(薄蝕)과 같다. 수령이 천년에 가까운데, 진(晉) 회제(懷帝) 영가(永嘉) 3년(309)에 말라 버렸다. 그 뒤 309년 동안 자손들이 서로 지키며 감히 훼손하지 않았는데, 수(隋) 공제(恭帝) 의령(義寧) 원년(617)에 다시 살아났고, 51년 뒤인 당(唐) 고종(高宗) 건봉(乾封) 2년(667)에 다시 말라 버렸다. 374년 뒤인 송(宋) 인종(仁宗) 강정(康定) 원년(1040)에 다시 번성하였고, 금(金) 선종(宣宗) 정우(貞祐) 2년(1214)에 병화를 만나 가지와 잎이 남은 것이 없게 되었다. 81년 뒤인 원(元) 세조(世祖) 지원(至元) 31년(1294)에 죽은 뿌리가 다시 무성해져 명(明) 홍무(洪武) 22년(1389)까지 모두 96년 사이에 높이가 세 길 남짓 되었고, 둘레는 네 자가 꽉 찼으며, 가지와 잎이 매우 무성하여 옛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다. 처음 마른 것은 진(晉) 북석호(北石胡)의 난리 때였고 그 뒤 살아난 것은 당나라가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룬 때였다. 다시 건봉 시대에 말라 무후(武后)가 나라를 훔친 조짐이 되었고, 강정 시대에 매우 번성하였으니 송나라의 구유(九儒)가 흥성하였던 때이다. 정우 시대에 불탔다가 지원 시대에 무성하였고, 74년 뒤에 명나라 문물의 성대함을 열었다. 성인의 수택(手澤)이란 강상 명교(綱常名敎)와 유관하여 사문(斯文)을 비호하고 모든 만물을 교도하는 것이니, 어찌 그 자손들이 번성하는 것일 뿐이겠는가. 장차 천지 국가와 함께 유구하게 전해질 것이다. 홍무 기사년(1389)에 공성(孔聖)의 53세손 전 한림검토(翰林檢討) 공경(孔涇)이 삼가 쓰다.” 하였다. 내가 삼가 한번 읽어 보고 외람되이 한마디 덧붙이기를, “이것은 문왕(文王)의 시초(蓍草)와 주공(周公)의 모목(模木)과 동일한 신물(神物)로, 모두 성인이 직접 심은 것이라고 한다.” 하였다.
행단
높은 행단 정자 둘레에는 돌난간이 둘러쳐져 있는 석단이다. 그 앞마당에는 어린 살구나무 세 그루가 좌우에 각기 심어져 있고, 금대에 만든 향로석이 있다. 한나라 명제가 공자고택을 방문하여 교수당(敎授堂) 터에 대전(大殿)을 세웠다. 송나라 건흥 연간(1022)에 대전을 뒤로 옮기고, 공자 45대손 공도보(孔道輔)가 그 터에 벽돌로 삼층의 단을 만들고 둘레에 살구나무를 심었다. 금나라 명창 연간에 처음 단 위에 정자를 세웠고, 학사 당회영(黨懷英)이 전서로 ‘행단’ 두 자를 쓴 행단비를 세웠다. 명나라 융경 3년(1569)에 겹처마의 정자를 세웠는데, 황색 유리기와를 올렸다. 지금의 편액은 건륭제가 썼다. 청나라 황제가 대성전에 참배할 때 왕공, 대신들의 예배처가 되었고, 평시의 석전 제사 때는 종과 북을 걸어두고 울렸던 곳이라고 한다.
행단은 나에게 친숙한 이름이다. 살구나무를 생각하면 나는 언제나 아련한 향수를 느낀다. 어린 날 봄이 오면 늙은 살구나무 가지마다 마을이 환하게 화사한 살구꽃이 피어났다. 여름이 올 무렵엔 아침마다 밤새 떨어진 주황빛 살구를 주워 먹으러 산비탈의 남의 집 울타리에 서 있는 큰 살구나무 아래로 갔다. 살구를 짜개어 타박하고 달콤한 살을 입에 넣으면 얼마나 맛이 있었는지 모른다. 어른이 되어서도 그 맛을 잊지 못하고 과일 가게에서 살구를 보면 반가운 마음에 사 먹으면 옛날의 그 맛은 도무지 맛볼 수가 없다. 공자님도 숲 속 살구나무 아래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거문고도 타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니, 행단이라는 이름이 더욱 친숙하게 다가온다. 이호우의 시조,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같다’나 <고향의 봄>이라는 노래를 여든 넷 연세의 장인어른께서도 즐겨 부르시는 것을 보면, 나만이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닐 것이다.
행단 정자 안에는 전서체의 ‘행단’ 두 대자를 새긴 오래된 비석이 서 있다. 글자의 획이 단순하면서도 둥글고 아주 고졸한 맛이 우러난다. 그 옆에는 건륭제의 어제 <행단찬> 어필 비석이 세워져 있다.
<행단찬(杏壇贊)>
기억하자니, 그 옛적 공자께서 임유의 숲, 행단에서 제자들에게 시(악), 서(예)를 가르치신 그 교육활동이 활발하였다. 복사꽃 지고 버들이 푸르러며 세월은 변하지만 넓고 두터운 땅의 덕과 높고 밝은 하늘의 덕과 같은 공자님의 가르침은 유구하다. 만세토록 세상을 다스리는 법도의 가르침을 받을 살구나무 숲은 어디에 있는가? 황제의 붓글씨.(憶惜緇帷 詩書授受 與有榮焉 軼桃轢柳 博厚高明 亦曰悠久 萬世受治 杏林何有 御筆)
찬문에서 황제가 복숭아꽃, 버드나무를 언급한 것을 보면 행단의 행은 살구나무라고 인식한 것을 알 수 있다. 정자 앞의 안내문에도 ‘송나라 때 행단을 만들고, 그 둘레에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를 심었다.’고 하였다.(The terrace was built in Song Dynasty, and apricot trees were planted here, the pavilion was built on the site of the terrace in the Jin Dynasty and rebuilt in the Ming Dynasty.)
우리나라에서는 행단의 ‘행’을 은행나무로 인식하고 향교, 서원, 성균관에 은행나무를 심었다. 우리나라에서는 행단의 행이 은행나무인지 살구나무인지를 두고 예나 지금이나 의견이 분분하다. 유교사회인 조선 선비들에게 이 문제는 큰 관심거리가 되었는가보다.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를 쓴 이덕무의 손자로 고증학적인 태도를 지닌 백과전서적 학풍을 가졌던 이규경(李圭景, 1788~?)은 1,417항목의 내용을 모두 변증설로 쓴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을 지었다.
이 책에 실려 있는, <행단변증설(杏壇辨證說)>에서 그는 ‘행(杏)은 도행(桃杏)의 행이 아니라, 바로 문행(文杏)의 행인데, 속칭 은행(銀杏)이라는 것으로 압각수(鴨脚樹)이다. 우리나라도 성묘(聖廟) 뒤 명륜당(明倫堂) 앞뜰에 빙 둘러 문행(文杏)을 심어 놓고 행단(杏壇)이라 일컫는다.’고 하였다. 금나라 학사 당회영이 쓴 행단비의 탁본으로 ‘행단(杏壇)’ 두 글자를 좌소산인(左蘇山人) 서유본(徐有本)의 집에서 보았는데, 글자의 직경이 한 자쯤 되며, 획(劃)이 매우 둥글고 고왔다고 하였다. 또 공도보(孔道輔)가 조묘(祖廟)를 감수(監修)한 데 대해, <<행로성전(幸魯盛典)>>에는 송 인종(宋仁宗) 천성(天聖) 연간, 고염무(顧炎武)는 <<일지록(日知錄)>>에서 송 진종(宋眞宗) 건흥(乾興) 연간에 있었던 일이라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를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 글에서 그는 <<청일통지(淸一統志)>>, <<공자가어(孔子家語)>>, <<장자(莊子)>> 등의 문헌들을 인용하였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은 <<임하필기(林下筆記)>>의 <행단도에 대한 논변((杏壇圖辨)>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단의 ‘행(杏)’을 세인들은 압각수(鴨脚樹-잎이 오리발처럼 생긴 은행나무)라고 한다. 내가 일찍이 문회서원(文會書院-황해도 배천군 치악산에 있으며, 이이, 성혼 등을 배향하였다.)에서 중국의 <행단도(杏壇圖)>를 보았는데, 바로 감행(甘杏)이었다. 공자가 여러 제자를 거느리고 나무 아래에서 강학(講學)하는데, 꽃이 선명하고 예쁘게 피었고, 수백 그루나 되어 강단도 그에 따라서 넓었으므로, 과연 장관이었다. 뒤에 문정공(文定公) 손가감(孫嘉淦)의 <남유기(南遊記)>를 보니, “곡부(曲阜)에 들어가 행단에 오르니 붉은 꽃이 한창 피었다.” 하였다. 이것을 가지고 본다면 감행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 반궁(泮宮-성균관)에 심어 놓은 것은 은행이니, 어째서인가.
대구시장, 경북지사, 내무부장관을 역임하고 식물과 꽃에 조예가 깊은 이상희 씨는 <<꽃으로 보는 한국문화(3)>>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의 <행단변증설>, 정선의 그림, <杏壇鼓瑟>을 보면 은행나무이다. 중국의 문헌인 <<사문유취>>, <<연감유함>>, <<시학전서>> 등과 우리나라 민요, <꽃노래>, <<심청전>> <화초가>의 사설, ‘칠십 제자 강론하니 행단 춘풍에 살구꽃’, <<변강쇠가>>에 '살구나무 베자하니 공부자의 강단', <공자성적도> ‘행단예악(杏壇禮樂)’ 그림에는 살구나무가 그려져 있다. 이로 보면 행단의 행은 살구나무로 보아야 할 것이다.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도 이상희 씨처럼 행단의 행은 살구나무이라고 하고, 식물학자인 경북대 박상진 교수는 식물학적인 특성으로 보면 은행나무였을 것이라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국어사전에도 행단의 나무는 은행나무라고 하지만, 여기 곡부의 공자고택에 있는 공묘의 행단에는 살구나무가 심어져 있다. 이유원이 문회서원에서 본 <행단도>는 내가 간밤에 묵은 ‘명좌행단빈관(銘座杏壇賓館)’의 로비에 복제되어 걸린 커다란 <행단도>일 것이다. 이규경이 서유본의 집에서 본 당회영 글씨의 행단 두 글자 탁본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행단 정자에 세워져 있는 바로 이 ‘행단’비를 탁본한 것이리라.
대성전
행단에서 청동 빛 측백나무 가지 사이로 대성전을 바라보니, 돌난간이 둘러쳐진 2단의 석단 위에 대성전이 바라보인다. 이층의 주황색 기와지붕이 웅장하고, 그 사이에 청색 바탕에 황금빛 글씨로 ‘대성전’이라고 쓰고 황금색의 화려한 테두리를 한 편액이 세로로 걸려 있다. 녹색과 청색과 금빛으로 단청을 입힌 처마와 여러 겹의 공포를 운룡이 새겨진 9개의 거대한 돌기둥이 떠받치고 있다. 처마 밑의 석주 안으로 붉은 칠을 한 벽과 기둥과 문이 보인다. 사당의 폭이 넓어서 행단의 정자에서 올려 보니 한 눈에 건물이 다 보이지를 않는다. 성스럽고, 웅혼하고, 장대하고, 서기 넘치고, 눈부시도록 빛나는 대성전이 내 눈 앞에 태산과도 같이 서 있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을 앞두고 자취방에서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목숨이 경각에 달렸던 그 시각에 휘황찬란하게 불이 켜진 공자님 사당에 갓 쓰고 도포 입은 수많은 선비들의 말석에서 절을 올리며 빙그레 웃음 지으며 일어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꿈에서 참배한 지 서른일곱 해가 지났다. 열일곱 살 때 꿈속에서 참배한 뒤로 내가 그렇게도 와 보고 싶었던 공자님 사당이 지금 내 눈앞의 현실 속에 있다. 감개무량하지만 나의 입에서는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성인이 지금 여기 계신다.
운룡문이 새겨진 석판이 박혀있고 계단이 다섯 개씩 있는 2단의 섬돌을 밝고 이층의 석단 위로 걸어 올라갔다. 마당에는 철로 된 검은 향로가 놓여 있고 향연이 자욱하다. 붉은 칠을 한 기둥 사이의 문 안에 금빛이 나는 용을 조각한 붉은 색의 화려한 닫집이 있다. 노란색 휘장 뒤에 홀을 잡고 앉은 면류관을 쓴 거구의 공자상이 모셔져 있다. 입술 사이로 큰 대문니가 하얗게 보이고 턱수염이 풍부하다.
<<사기>> <공자세가>에는 ‘공자는 키가 9척 6촌이어서 사람들이 모두 그를 키다리라고 부르며 괴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또 이런 대목도 나온다.
공자가 정 나라에 갔는데 제자들과 서로 길이 어긋나서 홀로 성곽의 동문에 서 있었다. 정나라 사람 누군가가 자공에게 말했다. "동문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 그 이마는 요(堯)임금과 닮았고, 그 목덜미는 요(陶-고요皐陶)와 닮았고, 그 어깨는 자산과 닮았어요. 그러나 허리 이하는 우임금보다 3촌이 짧으며, 풀 죽은 모습은 마치 상가(喪家)의 개와 같았습니다." 자공이 이 말을 그대로 공자에게 고하였다. 공자는 흔쾌히 웃으며 말하였다. "한 사람의 모습이 어떠냐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상가의 개'와 같다고 하였다는데, 그것은 정말 그랬었지! 그랬었구말구!"
공자상 앞에는 금색이 칠해지고 용이 투각된 화려한 위패에 ‘지성선사공자신위’라는 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 앞엔 작은 제기들이 놓였고, 바닥에는 향로와 오래된 놋쇠 제기들, 채색 제기들이 나열되어 있다. 공자상 왼편에는 큰 북, 작은 북, 금빛이 나는 종들을 매단 편종, 箏, 瑟, 柷 등의 악기가 진열되어 있고, 공자상 오른쪽에는 편경, 琴 등의 문묘제례악을 연주할 때 쓰이는 아악의 악기들이 벌려 있다. 사당 문 위에는 ‘生民未有’, 닫집 위에는 ‘斯文在玆’, ‘萬世師表’, 문 안쪽 상인방에는 ‘與天地參’, 닫집 좌벽에는 ‘德齊幬’, 우벽에는 ‘集大成’ 이라는 청나라 황제들이 쓴 황금색 글씨가 청색 바탕에 황금색 용들이 조각된 편액들이 걸려 있다. 닫집 좌우 기둥에는 ‘氣備四時與天地日月鬼神合其○’, ‘敎乘萬世繼堯舜禹湯文武作之○’이라는 대련 현판이 걸려 있다.
사당 문 앞에 서니 정면에 금빛의 우리나라의 스무 명 가량의 성균관대학 학생들도 참배를 하고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다른 사당들과 같이 여기에도 사람들이 사당 앞의 향로에 향을 피우고, 소원을 쓴 붉은 조각패가 시렁에 가득 걸려 있다. 나는 허리 숙여 공자님께 참배를 하였다.
사당 동쪽 지붕 아래로 돌아가니 역시 팔각기둥들에는 섬세하게 운룡문이 새겨져 있다. 대성전 뒤에는 공자님의 부인을 모신 침전이 있었다. 대성전의 좌우에는 우리나라의 종묘와 닮은 기다란 동무와 서무가 있고 안에는 공자 제자들의 신위를 모시고 있었다.
대성전 동쪽의 동무 앞으로 나오다가 대성문 동쪽의 금성문을 나서기 전에 기념품 가게가 보였다. 마음에드는 기념품이 있으면 하나 사고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진열된 서화들을 보았다. 책에서 많이 보았던 공자상 족자가 구석에 걸려 있었다. 중국말을 못하니 손짓으로 그것을 가리키며 “댜오샤오첸?”이라 하였다. 유리진열상자 위에 놓인 계산기로 보여달라고 하자 260위안을 찍었다. 나는 아무런 에누리도 없이 흔쾌히 지갑을 열고 돈을 지불했다. 중국에 오면 물건 값은 무조건 절반 이하로 깎아야 한다고 하였지만, 일행은 앞서가고 말은 통하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성인의 상을 구입하며 가격 흥정을 하는 것이 불경스럽고 야비하게 생각되었다.
공부(孔府)
벽수교를 지나서 동쪽의 출구인 쾌도문(快睹門)을 통하여 공묘를 빠져나가자 골목길이 나왔다. 길 양쪽에는 기념품 상점들이 줄지어 있다. 종이 걸린 벽돌로 쌓은 문루를 지났다. 다시 티켓을 검사하는 공부입구가 나왔다. 입구를 지나자 공부의 대문이다. 지붕을 올리고 검은색 기둥 사이로 세 칸 문이 나있는 대문에는 ‘성부’라는 편액이 세로로 걸려 있고, 대문 앞에는 암수 사자상이 좌우에 세워져 있다. 대문 안에 다시, ‘성인지문’이 있고 그 앞에는 노거수가 있다.
그 문을 지나자 담장이 없는 문이 마당에 세워져 있다. 황제 같은 귀빈만 이 지날 수 있다고 하는 솟을 대문인데, 명 세종이 하사한 문이다. ‘恩賜重光’이라는 편액이 세로로 걸렸다. 지붕 아래의 공포에는 청색의 아주 섬세한 단청이 입혀져 있다. 그 북쪽에 5칸의 큰 건물인 본당이 있다. 안에는 공부를 관장하는 연성공이 앉는 의자가 휘장 안에 있고 그 좌우에는 행차할 때 쓰이던 ‘회피’, ‘숙정’ 이라고 쓴 팻말, 운판, 일산 등이 진열되어 있다. 본당의 서쪽엔 장서청, 사악청, 백호청이 있고, 동쪽엔 지인청, 전적청, 관구청이라는 이름이 붙은 방이 있다.
본당과 그 뒤의 북쪽 이당은 남북으로 이어진 복도처럼 생긴 건물로 이어져 있다. 양편의 창문 아래로 툇마루처럼 기다랗게 나무의자가 있다. 거기에 두 줄로 마주 보고 앉아서 왕 사장의 설명을 들었다. 마당의 괴석이 내다보이는 문 위에는 건륭제가 쓴 ‘시서예악’이라고 쓴 편액이 눈에 띄고 그 위에는 ‘節幷松筠’이라고 쓴 오래된 현판이 또 걸렸다. 그곳에는 또 습봉되는 연성공 孔繁灝가 쓴 웅필의 ‘壽福’, 孔令貽의 ‘수’ 글씨 비가 있는데, 그들의 모부인이 작호를 받은 기념으로 쓴 비석이다. 서태후 崇熙태후가 1894년에 그린 송죽도를 새긴 비석도 있다. 마당에는 3~4미터는 될 큰 수석과 그 보다 작은 수석이 3 덩어리 있다. 그 동서편에는 몇 백년 수령의 우람한 측백나무가 서 있다.
삼당의 교실로 쓰인 건물 입구의 마당에는 빨래판처럼 줄이 파인 돌이 있다. 학생들이 벌을 설 때 꿇어앉게 한 돌이라 한다. 몇 분 선생님들이 꿇어앉아 손을 들고 싱글벙글 웃는 표정을 짓는다. 삼당을 지나자 샛길 모퉁이에 망루가 높이 솟아 있다.
내택문을 지나자 이제는 공부의 공자님 후손들이 사는 종가집이 있다. 앞쪽의 관아와 달리 사적인 공간이기에 외부인들의 출입을 금지하고, 경호를 엄격하게 하였다. 내택문에도 벽 밑에 사람들이 앉아서 기다릴 수 있는 긴 나무 벤치가 있다. 그곳에서는 집안을 볼 수 없도록 가림막을 문 안 마당에 설치하여 놓았다. ‘영벽(影壁)이라고 하는 가림막에는 전설상의 짐승이 그려져 있다. 머리는 용, 몸은 개, 피부는 비늘, 꼬리는 원숭이, 발굽은 소이다. 탐이라는 이 짐승은 욕심이 많아서 하늘의 해마저 삼키다가 타 죽는다는 짐승인데 ‘貪이다. 공자 집안사람들은 이 탐을 출입하며 탐욕을 경계하였다고 한다.
너른 마당이 있고 북쪽에 前上房이 있다. 안에는 손님을 응대하는 공간으로 보인다. 안에는 공이영이 쓴 수자 비 탁본 글씨가 걸렸고, 그 위에는 붉은 바탕에 금색으로 쓴 ‘굉개자우’라고 쓰인 편액이 걸렸다. 그 좌우에는 붉은 바탕에 쓴 대련이 있다. 옆방에는 ‘讀書不獨仁氣質且入精神’ 웅장하고 아름다운 예서체의 붓글씨 족자가 걸려 있다. 그 아래에는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고 탁자 위에는 장식용 도자기가 놓여 있다. 마당에는 황동으로 된 커다란 드므가 넣여 있다.
다시 좁은 벽돌 벽 사이를 지나 안채로 들어가니 前堂樓 이층 건물이 있다. 건물은 동서로 10칸 정도로 길게 지어졌다. 연성공의 사생활 공간이다. 76대 연성공 공영이와 부인 陶씨 및 측실 豊씨, 王씨 당시의 생활 모습을 그대로 보관하고 있다. 안을 보니 황동화로를 중심으로 정면 벽면 아래에 주인이 앉는 의자가 탁자 좌우로 놓여 있다. 그 앞의 좌우에 손님들이 앉는 의자로 보이는 작은 의자가 4개씩 놓여 있고, 의자 사이에는 역시 찻잔을 놓는 탁자가 놓여 있다. 정면 탁자 뒷벽의 머리 위에는 ‘松筠永春’이라고 쓴 편액이 걸렸다. 그 아래의 벽에는 송학도 족자가 걸렸고, 그 좌우에는 ‘天下文章莫大乎是, 一時賢者皆從之游’ 등의 대련이 걸려 있고, 그 아래의 긴 탁자 위에는 채색 도자기, 거울이 올려져 있다. 침실에는 화려한 색으로 수가 놓인 이불이 있고 휘장을 두른 침대가 있다.
벽돌 건물 사이의 좁은 통로를 빠져 나가자 커다란 괴석과 화초와 나무들이 있는 후원이다. 봄이 오고 여름이 되면 꽃이 피고 나무 그늘이 짙으지면 새가 지저귈 아름다운 정원이다. 다시 북쪽으로 걸어 나가자 아주 넓은 숲이 보이고 숲 사이로 학교 같은 건물도 보이고 온실도 있다. 겨울이라 다른 나무들은 잎이 지고 앙상한 가지만 있으니, 측백나무만 눈에 띈다.
후원에서 담장 사이로 난 길을 걸어서 나가는데 길가의 울타리로 심은 회양목 잎에 서리가 허옇게 내렸다. 서북쪽 문을 지나 공부 밖으로 나왔다. 길에는 돌을 깔았고, 자전거, 세 바퀴의 트럭, 작은 승용차, 오트바이나 자전거로 달리는 인력거들의 왕래가 빈번하고, 길가에는 기념품 가게, 식당 등이 이어져 있는 상가이다.
지성림(至聖林)
상가 끝에 공림으로 가는 셔틀 차를 타는 정거장이 있었다. 맞은편 길가에는 붉은색 담장이 있고 측백나무 숲이 보인다. 복성(復聖), 안연(顔淵)의 사당인 안묘(顔廟)이다. 그 앞에서 잠시 기다리며 제기차기를 하였다. 나도 찼지만 5번을 넘지는 못했다. 중국인들은 틈만 나면 운동과 놀이를 결합시킨 제기차기, 팽이치기, 춤추기를 한다. 팽이치기는 광장에서 노인들이 3~4미터는 되는 기다란 채찍을 휘두르며 커다란 팽이를 치는 모습을 여행 중에 몇 차례 보았다. 재미와 보람을 결합시킨 이런 운동은 우리도 받아들이면 좋을 문화이다.
비닐 포장이 쳐져 있고 타고 내리기가 편한 셔틀 차, 전병차(電甁車)를 타고 공자님의 묘소(墓所)가 있는 공림(孔林)으로 갔다. 옆자리에 앉은 박 선생님이 적십자에서 근무하셨다는 사모님의 말씀을 듣고, 나도 25년 전에 처음 교사가 되었을 때 청소년적십자 지도교사를 하였다고 말씀드렸다. 그러고 보니 박 선생님을 그때 몇 차례 뵌 일이 생각난다. 학생들을 데리고 적십자 사무실에서도 뵈었고, 캠프를 가서도 만났다. 그런 인연을 공자님 마을, 궐리에 와서 알게 되고, 다시 좋은 인연을 이어가니 더욱 반갑다. 사모님은 나처럼 역사교사이셨고, 두 분이 전원생활을 하시는 곳이 내 고향마을 산 너머에 있으니 더욱 반갑다.
차에서 내리니 공림 입구이다. 넓은 길 가운데로 측백나무 고목들이 두 줄로 도열해 있고 측백나무 밑에는 누운 향나무가 빽빽하다. 안개처럼 미세먼지가 부우옇게 끼어 길 끝이 보이지 않아 더욱 신비로운 분위기를 준다. 측백나무 아래의 돌판이 깔린 길을 10분 정도 걸어가니 ‘萬古長春’이라는 붉은 글씨가 새겨진 중앙문 좌우로 각기 2개의 문이 붙었고 돌로 조각한 지붕이 5개의 문마다 있는 석방이 웅장하게 서 있다. 석방에는 용들을 정교하게 가득 새겨져 있다. 만고장춘방을 지나자 다시 고색창연하고 고목이 된 우람한 측백나무들이 좌우에 도열해 있는 길을 걸어 들어가자 금빛 글씨로 ‘지성림’이라 쓰인 세 개의 문이 있는 패방이 있다. 청색 위주의 단청이 찬란하고 녹색 유리 기와지붕이다. 그 앞에는 역시 석판으로 포장된 광장이 있다.
문을 들어서자 좌우의 벽돌담 사이로 좁은 길이 나 있고, 길 끝에는 성문이 보인다. 길 좌우에는 크고 작은 측백나무가 72그루, 73그루씩 심어져 있다. 72는 공자님의 六藝, 곧 예, 악, 射, 御, 書, 數에 통달한 72제자, 73은 공자님의 수명을 나타내는 수이다.
至聖林이라고 쓰인 녹색 유리기와를 올린 이층 지붕의 문루를 지나자 봉분들이 측백나무무 숲 속에 수도 없이 많은 작은 무덤들의 봉분들이 봉긋봉긋하게 보이는데, 숲속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문루를 지나서 왼쪽 길로 접어들자 그곳에 ‘洙水橋’라는 붉고 굵직한 글씨가 새겨져 있는 석방이 있다. 수수는 아주 작은 시내인데 겨울이라 바닥에 흐르는 물은 얼어있다. 공자님을 상징하는 지명이 ‘洙泗’이고, 정자와 주자를 뜻하는 말이 洛閩이다.
수수교를 지나자 다시 3개의 문이 있는 기와지붕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서 30미터 앞쪽에 향전이 보인다. 향전으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향전 앞에 5~6미터 높이의 화표석주(華表石柱) 한 쌍이 서 있다. 화표는 팔각기둥이고 받침에는 복련이 柱頭에는 覆蓮과 仰蓮, 聯珠(구슬 띠)가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손잡이가 달린 항아리를 새긴 주두이다.
그 다음에는 사자처럼 앞발을 세우고 앉아 있는 석수, 문표(文豹) 한 쌍이 있는데, 살이 통실 통실하고 웃는 표정이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목이나 얼굴을 만져서 표면이 매끄럽다. 그 다음에는 외뿔 달린 괴수, 녹단(甪端)이 엎드려 있다. 몸은 돼지를 닮았고 머리는 개를 닮았는데 머리 위에는 외뿔이 나있다.
그 다음으로 석인상인 옹중(翁仲) 한 싸이 마주보고 세워져 있다. 서쪽은 무인석인데 손에 검을 짚었고, 동쪽은 문인석인데 손에 홀대를 잡았다. 키가 4미터는 되는 키다리들이다. 당대의 문신의 모습을 표현한 듯이 조각이 뛰어나서 인상 깊게 본적이 있는 포항 도음산 회재 선생 묘소의 문인석과 무인석이 생각난다. 옹중은 본래 진시황의 무장인데, 성은 완(阮)이고 키가 1장 3척의 거구로 흉노족을 정벌할 때 용맹을 떨쳤고, 사후에 함양궁 밖에 석상을 세웠는데 그 뒤로 옹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청나라 옹정제 때 원래의 것을 자사의 묘 앞으로 옮기고 새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향전 앞에는 큰 석재 향로가 놓여 있다.
향전은 붉은 기둥과 붉은 문의 5칸 건물이다. 내부의 벽에는 붉은 바탕에 금색 쌍룡이 그려진 목판이 붙었고, 그 아래에 긴 제탁이 있다. 제탁 위에는 작은 백자 제기 3개가 놓여 있다. 향전 안에는 측백나무 노거수가 열 지어 있고, 그 사이로 좁은 통로 끝에 공자님의 아드님인 공리의 무덤 묘비가 보인다. 서쪽 앞에는 <<중용>>을 지은 공자님의 손자, 자사의 무덤이 있다. 향전을 지나서 동쪽 담장 앞에 ‘子貢手植楷’라고 붉은 글씨가 새겨진 작은 표석이 있고 그 뒤에 벽돌 정자를 지어 사람 키 높이의 그루터기를 보호하고 있다. 강희연간에 나무는 벼락을 맞아 타 죽었고, 남은 그루터기를 벽돌로 보호각을 세워 보호하고, 나무의 본래 모습을 새긴 비석을 정자 안에 세워 두었다. 해(楷)나무는 황련수(黃連樹, Pistacia Chinesis)라고도 한다.
서쪽에 있는 자사의 무덤에는 ‘沂國述聖公墓’라고 붉은 글씨를 새긴 묘비가 세워져 있다. 그 뒤에는 작고 오래된 비가 있는데, ‘三世祖墓’라고 새겼다. 술성의 이름은 급(伋)이고 자는 자사이다. 자사가 지은 <<중용>>은 유학의 총론이라고 하는데, 정말 심오한 도덕과 덕성을 갈파하는 명저이다. 도올 선생이 지은 <<한글역주 중용>>은 정말 감동적인 고전이고 경전이었다. 그의 학문은 맹자에게 깊은 영향을 주어, 뒤에 思孟學派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안쪽에는 붉은 글씨로 ‘泗水候墓’라고 새겨진 묘비가 서 있는, 공자님 아드님, 리(孔鯉)의 묘가 있다. 그의 자는 백어(伯魚)이고 50세에 공자님보다 먼저 죽었다.
공리의 묘 바로 서쪽에 공자님의 묘가 있다. 묘비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라고 황금색 글씨로 새겨져 있고 이수에는 쌍용이 새겨져 있다. 3미터 가량 되는 높은 백색의 큰 묘비 뒤에는 높이가 1.5미터 남짓 되는 작은 묘비가 있는데, ‘宣聖墓’라고 새겨져 있다. 봉분은 우리나라의 어느 양반 관료의 무덤 정도 되며 그렇게 크지 않다. 묘 앞에는 낮은 벽돌담이 쳐져 있고 그 앞에는 태산에서 가져온 돌로 상석이 있다. 그 앞에는 석재 향로가 있고, 참배한 사람들이 올린 여러 개의 꽃바구니들이 놓여 있다. 공자묘 서쪽 곁에는 벽돌로 지은 작은 집이 있고, 그 앞에 ‘子貢廬墓處’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다. 육년을 시묘 살이 하며 심상(心喪)을 입은 제자, 자공의 애틋한 효심과 스승의 태산 같은 감화가 어떠했는지를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일행은 공자님 묘 앞에서 선채로 허리를 숙여 삼배를 올렸다. 사진을 촬영하다가 유명준 선생님과 나, 둘만 남았다 우리는 나란히 서서 무릎을 바닥에 대고 머리를 조아리며 공자님께 큰 절을 올렸다. 우리는 이번 여행에서 처음 만났지만 함께 공자님의 제자가 된 것이다. 공자님 묘소를 돌아 나오는 나에게 2,000년 전에 오늘 나처럼 이곳을 찾아왔던 사마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 다음해 자로(子路)가 위(衛)나라에서 죽었다. 공자가 병이 나서 자공이 뵙기를 청하였다. 공자는 마침 지팡이에 의지하여 문 앞을 거닐고 있다가 물었다. "사(賜)야, 너는 왜 이렇게 늦게 왔느냐?" 그리고 탄식하며 노래를 불렀다.
태산이 무너진다는 말인가! 泰山壞乎! 태산환후! 태산괴호!
기둥이 부러진다는 말인가! 梁柱摧乎! 량주최후! 양주최호!
철인이 죽어간다는 말인가! 哲人萎乎! 저인러후! 철인위호!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또 자공(子貢)을 보고 말하였다. "천하에 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아무도 나의 주장을 믿지 않는다. 장사를 치를 때 하나라 사람들은 유해를 동쪽 계단에 모셨고, 주나라 사람들은 서쪽 계단에 모셨고, 은나라 사람들은 두 기둥 사이에 모셨다. 어제 밤에 나는 두 기둥 사이에 놓여져 사람들의 제사를 받는 꿈을 꾸었다. 나의 조상은 원래 은나라 사람이었다."
그 후 7일 지나서 공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때 공자의 나이는 73세로, 그것은 노 애공 16년 4월 기축일(己丑日)의 일이었다. ......
공자는 노나라 도성 북쪽의 사수(泗水) 부근에 매장되었다. 제자들은 모두 3년간 상복을 입었다. 그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슬픔으로 3년상을 다 마치고 서로 이별을 고하고 헤어졌는데, 헤어질 때 한바탕 통곡하고 각자 다시금 애도를 다하였으며, 어떤 제자는 다시 머무르기도 하였다. 오직 자공만은 무덤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6년을 더 지키다가 떠나갔다. 후에 공자의 제자들과 노나라 사람들이, 무덤가에 와서 집을 짓고 산 사람들이 100여 가구나 되었으며, 이로 인하여 이곳을 '공자 마을'이라고 하였다. 노나라에서는 대대로 새해를 맞을 때마다 공자의 무덤에 제사를 지냈으며, 많은 유생들도 이곳에 모여서 예의를 논하고 향음례(鄕飮禮)를 행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공자의 무덤은 크기가 1頃이나 되었다. 공자가 살던 집과 제자들이 쓰던 내실은 훗날 공자의 사당으로 만들어져, 공자가 사용하던 의관과 거문고, 수레, 서적 등이 소장되었는데, 그것은 한나라에 이르기까지 200여 년 동안이나 그대로 있었다. 고황제가 노나라를 지나게 되었을 때 太牢로써 공자의 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 후 제후, 경대부, 재상이 부임하면 항상 먼저 공자의 묘를 참배한 연후에 정사에 임하였다.
공자는 이(鯉)를 낳았는데, 그의 자는 伯魚이다. 백어는 나이 50세에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백어는 급(伋)을 낳았는데, 그의 자는 자사(子思)이고, 62세까지 살았다. 자사는 일찍이 宋나라에서 고생을 하였고, <<중용(中庸)>>을 지었다. ......
태사공은 말하였다.
" <<시경>>에 높은 산은 우러러보고, 큰 길은 따라 간다(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말이 있다. 내 비록 그 경지에 이르지는 못할지라도 마음은 항상 그를 동경하고 있다. 나는 孔子의 저술을 읽어보고, 그 사람됨이 얼마나 위대한가를 상상할 수 있었다. 노나라에 가서 공자의 묘당, 수레, 의복, 예기(禮器)를 참관하였고, 여러 유생들이 때때로 그 집에서 예를 익히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는 경모(敬慕)하는 마음이 우러나 머뭇거리며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역대로 천하에는 군왕에서 현인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모두 생존 당시에는 영화로웠으나 일단 죽으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공자는 포의로 평생을 보냈지만 10여 세대를 지나왔어도 여전히 학자들이 그를 추앙한다. 천자, 왕후로부터 나라 안의 육예(六藝)를 담론하는 모든 사람들에 이르기까지 다 공자의 말씀을 판단기준으로 삼고 있으니, 그는 참으로 최고의 성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사기(史記)>> <공자세가(孔子世家)>
공자님 묘소에서 나와 향전 동쪽으로 나갔다. 벽돌이 깔린 길이 숲속으로 구불구불 나 있다. 숲은 떡갈나무와 측백나무가 섞인 숲속에는 수백 수천의 작은 봉분들이 빽빽하게 있다. 나무 아래의 그 무덤들은 벌초가 되어 있지만 떡갈나무의 누런색 낙엽에 덮여 있고, 묘비가 없는 무덤들이 더 많다. 갈색 낙엽이 묘지를 덮고 바람에 날리지만 그렇게 음산하지는 않고 나에게는 오히려 편안하게 다가온다. 마치 고향마을의 뒷동산 같다.
공자님은 내 나이에 천명을 알았다고 하지만, 나도 이제 공자님의 그 말씀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는가 보다. 이천오백 년 동안 얼마나 많은 공자님 후손들이 어머니의 품처럼 다사로운 이곳 洙泗의 고향동산으로 돌아왔을까? 그들에게 삶은 즐겁고 죽음은 편안하였을 것이다.
발걸음은 어느새 들어왔던 지성림의 문루 앞에 이르렀다. 문루 위로 비스듬하게 자란 측백나무의 늠름한 모습 아래에는 중화민국 13년(1924) 11월 9일에 臨時執政 孔廣彦과 처 李氏가 세운 ‘節勵松筠’ 이라고 웅필 글씨로 새긴 공림 예찬 비가 있다.
흙나팔, 훈
지성림 패방 앞의 너른 마당으로 돌아왔다. 마당 동서 편 가에는 기념품을 파는 난전들이 있고 그 뒤로도 가게들이 열 지어 있다. 이사장님을 따라서 나도 가격을 에누리하여 매화가 새겨진 훈(壎)을 하나 샀다. 가격은 비싸지 않지만 포장이 되어 있지 않다. 옷으로 말아서 가져왔는데, 여행 중의 충격으로 집에 돌아와서 보니 주둥이 부분이 조금 깨어져서 애석하다. 이런 악기를 길거리 난전에서 헐값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내가 공자님 마을, 궐리에 와 있음을 실감하게 한다. 역시나 예악을 회복하여 요임금, 순임금 시대의 평화롭고 다사로운 태평성대를 구가하고자 하였던 공자님 고향 마을답다.
한 가게 앞에는 털모자를 쓰고 돋보기를 낀 한 노인이 장갑을 벗은 손으로 붓을 잡고 기념품으로 파는 부채에다 글씨를 직접 쓰고 있기도 하였다. 여유가 있었다면 그 부채를 하나쯤 사 오고 싶었지만 사진에만 담아 와서 아쉽다.
흙으로 빚어 구운 훈은 팔음 중에서 토부의 공명악기이다. 오카리나를 닮았지만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전통 악기로서 문묘제례악에 쓰이며, 음색은 어두운 편이며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지녔다. 마주잡은 손아귀 속에 들어가는 항아리 모양이고 앞쪽에 대중소의 指孔이 좌우에 3개씩 있고, 뒤쪽에 좌우에 하나씩 있으며 위쪽에 吹孔이 있다.
<<시경>> <소아(小雅)> ‘何人斯’에 “백씨(伯氏)는 질나팔, 훈(壎)을 불고, 중씨(仲氏)는 젓대, 지(篪)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篪)”라는 구절이 있다. 훈과 목부의 관악기인 지의 합주를 형제의 우애에 비유한 말이다. 훈과 지는 잘 조화되고 항상 같이 편성되는 악기이다.
17~18세기 영천의 대학자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 지수(篪叟) 정규양(鄭圭陽) 형제는 훈과 지(篪)가 화음을 이루듯이 형제 우애가 깊었다. 갈암(葛庵) 이현일로부터 영남퇴계학의 학통을 이은 두 분 형제는 북송 시대의 도학자들인 명도(明道) 정호, 이천(伊川) 정이 형제를 닮았다. 훈지 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한 포항 기계의 용와(慵窩) 이홍리(李弘离, 1701~1778) 선생은 <<훈지양선생어록>>을 편찬하였다.
궐리빈사(闕里賓舍)
다시 전병차(電甁車)를 타고 공묘, 공부, 공림을 둘러싸는 명나라 때의 높은 벽돌 성벽 옆으로 난 길을 지나 궐리빈사(闕里賓舍) 앞에서 내렸다. 벽돌로 지은 이층 건물이 너른 터에 자리 잡고 있으며, 유리창을 시원하게 내어 현대 건축의 아름다움도 지녔다. 많은 명사들이 묵어간 이름난 호텔이다. 점심밥을 먹으러 들어갔다. 작은 방에서 ‘孔子家의 술’을 곁들여 깔끔하게 차려진 밥을 먹었다.
내 등 뒤에는 허연 수염에 웃는 얼굴을 한 신선이 영지, 사슴 등의 십장생이 있는 풍경 속에 앉아 있는 민화가 걸려 있다. 공자 77대 종손인 공덕성(孔德成)이 쓴 ‘東壁圖書 西園翰墨, 南華秋水, 北苑春山’이라는 대련이 그림 좌우에 걸렸다. 조선시대 우리 선조들은 공자님 마을, 궁궐처럼 웅장하고 번성한 궐리를 '궐리도' 그림으로 그리고 늘 성인이 사시던 마을, 궐리를 그리워하였다.
공덕성(1920~2008) 박사는 태어난 지 100일 만에 연성공(衍聖公)에 봉해졌고, 국민당 정부의 장개석이 1949년에 대만으로 모셔갔다. 1980년에 도산서원 원장으로 추대돼 퇴계 선생을 모신 상덕사를 알묘하고 '추로지향(鄒魯之鄕)'의 휘호를 남겼다. 도산서원 입구에는 그가 쓴 전서체의 추로지향비가 세워져 있다. 2012년 3월 7일에는 공자 79대 종손인 공수장(孔垂長) 부부, 맹자 76대 종손인 맹령계(孟令繼)가 도산서원 춘계 향사례에 참석하였다. 공수장은 퇴계 종택을 방문하고 퇴계 선생 묘소도 참배하였다.
2012년 가을 장모님 생신 때 처가 식구들이 청송 송소고택에서 하룻밤 묵었다. 다음날 가까이에 있는 기곡의 진성이씨 시조 묘소를 참배하고, 그 아래에 있는 기곡재암에 들렀다. 대청에 걸린 <岐谷齋庵記> 현판을 읽어 보았다. 장인어른에게 6대조가 되는 두릉공(杜陵公) 이제겸(李濟兼) 공이 지은 기문에는 시조공이 공자의 선조인 정고보(正考父)처럼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으며 덕을 쌓았기 때문에 후손에 ‘해동공자’, 퇴계 선생이 태어났다고 하였다.
송도어가
점심을 먹고 차는 하남성의 카이펑(開封)을 향하여 4시간 넘게 가야한다. 도로 주변에는 미루나무 가로수가 심어져 있고, 흙을 파헤치며 흐르는 냇물에는 물이 얼어 있다. 벌판에 있는 한 공장에서는 굴뚝에서 연기가 난다. 버스 속에서 박단장님의 요청으로 윤동진 선생님이 중국유학의 흐름을 설명해 주셨다. 나는 여행자료집에 실린, 공자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읊은 최후의 시를 중국말로는 어떻게 읽느냐며 한글로 적어달라고 왕 가이드에게 부탁하기도 하였다. 고속도로로 달리다가 차가 멈춘다. 교통사고 때문에 경찰이 출동하고 도로는 통제되었다. 고속도로 아래의 옛 도로로 우회하여 차는 또 달린다. 중간에 도로 주변에 상점들이 있는 시골마을을 지나고, 다시 고속도로로 올라간 버스는 밀밭이 끝없이 넓게 펼쳐진 평야를 달리다가 마침내 카이펑 교외에 접어들었다.
카이펑 시가지에 차가 들어갔을 때는 해가 지고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교차로의 중앙에는 용머리를 조각한 석재 들보로 연결된 직사각형의 석탑이 세워져 있고, 들보에는 ‘敬事自信’이라는 예서체의 금색 글씨가 새겨져 있다. 도로변 수리공장 앞에 정차하여 카이펑의 새 버스를 기다렸다. 다시 식당으로 향했다. 이곳에도 새로 짓는 아파트가 많다. 길거리에는 휴대폰을 든 젊은 아가씨들도 보인다. 버스에서 내리니 밤공기는 차갑고 몸은 춥다. 큰 식당에서 음식을 받았지만 목젖이 붓고 몸에는 열이 오른다. 여기서도 음식은 푸짐하지만 기름기가 많아서 내 입맛에는 맞지 않다. 옆자리에 앉은 오애란 선생님이 참기름을 주며 비벼먹으라고 한다. 또 멸치와 김도 상 위에 올려 준다. 박창순 선생님은 고추장이 들은 튜브를 주면서 입맛을 찾아보라고 한다. 제남과 곡부에서는 윤동진 선생님이 깻잎 장아찌를 챙겨와 맛있게 먹었다. 아! 얼마나 고마운 분들인가! 화장실에 갔다 오니 일행은 식사를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 앞의 인도에서 차를 갈아탔다. 이제까지 우리를 태워주었던 기사에게 ‘이 따끄, 싱쿨라!’라고 하며 작별을 하였다. 하남성 지역의 가이드는 홍용철 씨 이다. 수원에서 몇 년 동안 유학을 하였다. 새 버스는 특이하게도 차체 오른쪽 중간에 위아래로 열고 닫히는 문이 있다.
카이펑 시내에는 입구에 패방이 서 있는 ‘宋都御街’가 있었다. 패방을 지나서 넓은 도로 가운데로는 차량이 달리고 그 양쪽에는 가로수가 심어져 있고 그 바깥으로 좁은 도로가 있어서 작은 차나 자전거가 다닌다. 그 바깥에 인도가 있고 인도 가에 이층, 삼층의 누각 건물이 열 지어 있다.
이곳은 전국시대의 위(魏),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의 혼란기에 후량(後粱), 후진(後晋), 후한(後漢), 후주(後周), 북송, 금, 일곱 왕조의 도읍이었다. 황하의 범람으로 황토가 켜켜이 쌓이면서 송나라 시대의 궁궐과 도시와 성곽이 모두 약 10터 아래의 지하에 묻혔다고 한다.
송나라 시대의 길거리를 재현한 길거리에는 처마와 난간에 붉은 등이 주렁주렁 켜져 있어서 아주 볼만하였다. 왕안석, 사마광, 구양수, 소식과 소철 형제도 이 거리를 지나갔다. 오명(五明-불교학, 의학, 문학, 논리학, 기술과 예술)에 정통하여 인류 최초로 종두법을 창안하여 수많은 어린이들을 마마로부터 구해낸 무진(茂眞) 스님도 청두의 아미산 만년사에서 태종 황제의 초빙을 받아 980년에 궁중에서 강경설법을 하고 경전을 편찬하였다. 고려의 사신, 상인들도 여기 이 거리를 오갔을 것이다. 누각 건물 중에는 ‘高麗醫鋪’란 간판이 붙은 병원이 있는데, 조선인 의사 부부가 경영하는 소문난 피부과 전문병원이라고 한다.
아차! 배낭을 메고 트렁크를 끌고 나오며 식탁 위에 올려놓은 고추장 튜브 들고 오는 것을 잊었다. 버스를 오래타고 생전 처음 보는 이방에서의 여행으로 마음은 여유를 잃었고 머리는 어질어질하며 몸은 열이 올랐다. 버스는 우리가 하룻밤 묵어 갈 호텔, ‘開封黃河迎賓館’ 앞에 섰다.
호텔 로비에서 지금까지 우리를 친절하고 열성적으로 안내하고 설명해준 山東嘉華文化國際旅行社 부총경리 겸 한국부 부장 王雲來 가이드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여 제남으로 돌아가 직원들과 다시 제주도로 춘절 휴가를 떠난다고 한다. 성품이 호탕하고 인정도 많으며 두뇌도 총명한 사람이었다. 산동에 다시오면 또 만나고 싶은 사람이다.
오늘 묵을 호텔은 카이펑시의 동쪽 교외에 자리 잡고 있는 새로 형성된 시가지에 있다. 마당이 넓고 건물은 일이층이라서 안정감을 준다. ㅁ자형 건물의 내부 정원을 지나서 안쪽의 객실로 갔다.
공자화상
공묘에서 사서 하루 내내 들고 다닌 공자상 족자를 침대 위에 펼쳐 놓고 보았다. 폭은 70센티미터가 넘고 길이는 170센티미터 정도 된다. 폭이 넓어서 여행 가방 속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인물화에 능숙하였던 당나라 최고의 화가, 吳道子가 그렸다. ‘先師孔子行敎像’이라는 해서체 제목 아래에 제시(題詩)를 붙였다. 내 마음에 아주 흡족하다.
德侔天地 덕은 천지와 나란하시고,
道冠古今 도는 고금에 으뜸이시다.
刪述六經 육경을 정리하시어
垂憲萬世 만세토록 가르침을 드리우셨네.
공자 탄신 2471년(1920) 2월 28일에 퇴계 종손 이충호(李忠鎬)는 곡부의 공자가 종손 연성공에게 편지를 보냈다. 퇴계와 동갑인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의 후손인 이병헌 형제 등 그 지역 유림의 요청으로 합천 서당(培山書堂)에 봉안할 공자의 초상을 구해달라는 사연이었다. 공자 76대 종손 공영이가 세상을 떠나고 유복자로 공덕성이 태어난 직후였지만, 공덕성의 명의로 답신을 보내왔다.
“이십오헌(李十吾軒) 선생 펴보십시오
곡부 연성공부 비서처가 인편에 부침
이 달 12일에 진암(眞菴, 李炳憲) 이군이 그의 아우와 함께 산을 넘고 물을 건너기를 마다 않고 저희 집(曲阜 孔府)에 찾아 오셨으며 아울러 보내주신 편지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저는 초대원 공경석(孔慶錫)을 파견하여 그들을 모시고 사당에 배알하였으며, 이어서 해당 초대원을 통해서 보내오신 의견이, 오로지 구할 수 있는 성인의 초상을 요청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깊이 간직하고 깊이 간직하려는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습니다.
저희 집이 대대로 지켜 받들고 있는 것은 대성전에 있는 앞을 바라보는 초상 소장본뿐입니다. 그리고 세상에 유행하는 것은 오도자(吳道子)가 돌에 새긴 유교를 행하는 초상과, 후세에 그것을 본 따서 조각한 것입니다. 이를 제외하고는 별도의 유상(遺像)이 없습니다.
만약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주 어려워서 사진을 찍는 방법을 쓰더라도 집이 깊고 넓어서 손을 쓸 수 없습니다. 부득이 겨우 이 두 초상을 검토하여 이 군에게 주어서 가지고 돌아가게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독서를 하고 성교(聖敎)를 높이는 것은 그 중요함이 마음을 정성스럽게 하고 그 바탕을 소중히 여기는 것에 있는 것으로, 그 글을 소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며, 모습에서 강구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선생께서는 달인(達人)이시니 반드시 이 말을 가볍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2004년 10월 23일, 곡부의 대성전에서 우리나라 성균관 석전 의례에 준하여 사단법인 박약회(博約會, 회장 이용태)가 회원 556인이 참가한 ‘곡부치전(曲阜致奠)’ 행사를 하였다. 박약회는 퇴계 선생의 가르침을 배우는 모임이다. 의성 김씨로 영국에서 공부한 공학도이지만, 유학에도 밝았던 무은재 김호길 포항공대 총장과 퇴계학을 연구한 권오봉 교수가 의기투합하여 만든 단체이다.
초헌관 이용태, 아헌관 김호면, 종헌관 남효근 세분의 헌관과 대축 집례 등 다섯 집사는 찬란하고 위의를 갖춘 전통 금관제복(金冠祭服)을 입었다. 집사들은 모두 도포(道袍)와 심의(深衣)에다 유건(儒巾)을 착용했으며 참례자는 도포나 한복을 입었다.
이런 연유로 중국정부는 2005년부터 매년 9월 28일에 석전의식을 거행한다. 치제 이후에 공자 종가, 공부에서 77대 종손인 공덕성을 만나지는 못하였고, 궐리빈사에서 그의 재종고모인 공영인(孔玲仁) 여사의 축하를 받았다.
공덕성은 국공내전 이후 국민당을 따라 타이완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그는 이충호의 편지를 받은 지 한 갑자가 지난 1981년에 안동으로 왔고 도산서원에서 알묘했다. 이 때 ‘鄒魯之鄕’ 이라는 휘호를 남겼고, 지금 도산서원 앞에 이 글씨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그는 농암 이현보의 종손인 용헌(庸軒) 이용구(李龍九) 옹과 필담을 나누었다.
가토 기요마사의 좌선봉장으로 참전하였다가 조선의 유교문화에 감화되어 귀순한 김충선을 모시는 대구의 녹동서원(鹿洞書院)에서 1931년 9월 5일에 <<곡부성묘위안사실기(曲阜聖廟慰安事實記)>>를 발간했다. 1930년에 장개석군과 반장개석군 사이의 중원전쟁(中原戰爭)으로 대성전 지붕에도 포탄이 관통하고 규문각 등의 건물들이 모두 피해를 입었다. 전국 유림이 곡부 대성전 위안 행사에 호응해 보내온 통문이 279통이고 연명한 사람이 8,425명이며 유림 대표자만 508명이었다. 도산서원(陶山書院) 대표에 퇴계종손인 이충호(李忠鎬), 분강유소(汾江儒所) 대표에 농암 이현보의 종손인 이용구(李龍九)이었다. 조선 유림들은 대표단을 파견해 곡부 대성전에서 위안 告由 예식을 거행했고, 예를 마친 직후에 기념촬영도 했다. 이 책에 실린 1930년 12월 31일에 찍은 사진에는 조선 유림 대표인 박연조(朴淵祚)와 안승구(安承龜) 두 사람 사이 11살의 공덕성이 서 있다(서수용, <종가기행6> <<주간한국>>(2007)).
2012년 3월 6일부터 9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방문하는 공자 79대 종손 공수장(孔垂長, 37세) 공자 봉사관과 맹자 76대 종손 맹령계(孟令繼, 34세) 맹자 봉사관 일행 18명은 도산서원 춘계향사에 참여하였다.
작별의 밤
저녁을 먹고 씻고서 옆방으로 갔다. 왕 가이드, 이 사장님까지 전체를 부르는 술자리가 벌어졌다. 침대에 앉기도 하고 의자에 앉기도 하고 탁자에 기대기도 하며 술잔을 주고받았다. 옆자리의 왕 가이드에게 물으니 이십대에 평양에 유학하여 국제무역학을 공부하였다고 한다. 노래 부르기를 아주 어려워하여 절대 부르지 않는 왕가이드에게 이별의 정을 담은 시를 중국말로 읊어주면 어떠하겠느냐고 제안하였지만, 시가 기억나지 않는다며, 미안해한다.
내 입에서 중학교 시절 한문 시간에 배운 왕유(王維)의 시,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안서로 가는 원이를 보내며)’의 ‘객사청청유색신’이라는 한 구절만 맴돌고, 전체가 생각나지 않아서 부탁해보지는 못하여 나도 안타까웠다. 술을 입에 대지 못하는 나는 40~50도의 독한 술을 마셔야 교제도 할 수 있고 사업도 할 수 있는 중국에서 술을 못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우문을 던졌더니, 술을 못하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밤이 깊어갈 무렵에 나는 방으로 먼저 와서 ‘칠조고도(七朝古都)’ 변경(卞京)의 잠을 청했다.
渭城朝雨浥輕塵 위성(渭城) 아침 비가 촉촉이 먼지 적셔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의 푸른 버들 그 빛 더욱 새로워라.
勸君更進一杯酒 그대에게 술 한 잔을 다시 더 권하노니,
西出陽關無故人 서쪽 양관(陽關)을 나가면 친한 벗도 없으리.
-김달진(金達鎭) 해석, <<唐詩全書>>(민음사)
첫잠이 들었는데 잠결에 보니 룸메이트 와이 선생님이 그나하게 술에 취하여 다른 분의 부축을 받으며 방으로 들어왔다. 주신(酒神), 디오니소스는 힘이 셌다. 아뢰야식의 곳간을 지키는 와이 선생님의 슈퍼에고를 케이오시키고는 그 속에 갈무리된 기억들을 불러낸다. 만취하여 부르는 ‘비 내리는 고모령’, ‘전선야곡’ 같은 명곡이 심야의 객사에 메아리친다. ‘시바로마!’라고 하는 욕설도 들린다. “니치환르마(你吃饭了吗)?” 라고 왕 가이드가 첫날부터 아침마다 버스에서 마이크를 잡고 큰 소리로 호탕하게 웃으며 ‘욕’으로 인사를 하여 우리를 즐겁게 하였다. 이 중국어가 한국인의 귀에는 ‘이시빨로마?’로 들리고, 무의식 속에서 슈퍼에고가 술에 취하자 감시를 뚫고 밖으로 나온 것이다.
열린 방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는지, 이불을 뒤집어쓰고도 밤새도록 추웠다. 자리에 눕자 목젖은 부어 따갑고, 오른쪽 가슴 속이 아파서 몸을 뒤척이기조차 힘들다. 폐렴이 발생한 것일까,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것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제서야 원인을 인지할 수가 있었다. 감기가 온 것이 아니라, 미세먼지가 목에 염증을 일으키며 몸에 열이 오르고, 먼지가 허파에 들어와 통증을 유발한 것이다. 말로만 듣던 미세먼지 속에서 사흘이나 숨 쉬고 눈으로 보면서도 그것이 미세먼지인줄을 몰랐던 것이다. 나는 미세먼지에 대비하여 마스크를 세 개나 들고 왔지만, 답답하여 착용을 하지 않은 것이다. 그날 밤, 나는 불면의 밤을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