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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교회사 (62)
2024.08.14
<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12.8 -1870.9.20>
교황 비오 9세의 주도로 1869년 12월 8일부터 1870년까지 바티칸에서 개최된 가톨릭 교회 역사상 20번째 공의회이자 근대에 개최된 공의회다.
-1870년 4월 24일 창조주, 삼위일체, 천주 강생, 계시, 신앙, 신앙과 이성 등의 정통 교리를 제시하고 이러한 교리를 거부하는 유물론, 합리주의, 汎神論 Pantheism, 이신론(理神論, 영어: deism) 합리주의적 성서관, 자유주의 신학과 같은 사상들을 오류로 단죄하는 교의헌장이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1870년 7월 18일 교황이 전체 가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 가지는 권한인 교황수위권(敎皇首位權), 교황이 선언하는 신앙과 도덕에 관한 선언은 오류가 없다는 교황 특별교도권의 무류성(無謬性)에 관한 교의적 정의를 선언한 교회헌장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가 533대 2로 승인되었다. 이때의 무류성 선언에 대한 반발로 가톨릭 교회 내 일부 세력이 분리되어 새로운 교파가 생겨났는데, 그것이 바로 복고 가톨릭교회(Old Catholic Church)이다.
-그러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영향으로 공의회 진행이 방해를 받고 1870년 9월 교황령이 이탈리아 민족주의 세력에게 점령되어 이탈리아 왕국에 강제 병합되는 사건이 벌어져 공의회는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중단되었으며, 공식적인 1차 바티칸 공의회의 폐막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논의되지 못한 주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다루게 된다.
-공의회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당시 유럽 사상계에 판치던 반가톨릭적 사상, 반종교주의나 무신론, 반신론, 불가지론, 다원주의적 사상 등을 가톨릭 교회의 공식적인 공의회의 무오류적인 권위로 이단적 사상으로 단죄하는 데 있었다. 또한 그동안의 가톨릭 교회의 여러 가르침들을 다시한번 확실히 정의하고, 교황무류성 등의 교리를 정의하고 승인하였다.
-1870년 1월 6일의 2차 회기에서는 여러가지 이단적 사상들과 근대주의적 사상에 맞서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였다. 일단 니케아-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내용, 그리고 가톨릭 교회의 각종 전통들과 각 교황들의 법령들을 수용함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성경에 대한 참된 해석의 권리는 오직 가톨릭 교회만이 가지고 있음을 재확인했다.
-또한 7성사Sacrament(세례성사,견진(堅振)성사,혼인성사,성체성사 성찬식,고해성사,병자(病者)성사,神品성사)는 참된 그리스도교의 성사임을 다시한번 확인하였고, 19번째 트리엔트 공의회의 각종 결정 사항을 다시 한번 재확인하였다. 여러가지 이단적 사상에 맞서서 하느님의 완전성, 전지 전능성, 무궁무진함의 특성을 다시한번 강조하였다.
-가톨릭 교회가 신앙적으로 이단적인 내용을 담거나 교리적 오류가 있는 철학이나 학문들을 금지시킬 천부적인 권리가 있음을 확인했다.
- 신앙과 어긋나는 오류나 비진리, 이단, 죄 등을 가르치지 않는다면 예술과 인간적인 학문들에 대한 공부를 반대하지 않으며, 오히려 이러한 학문을 지지하고 격려한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1870년 7월 18일에 개최된 제 4차 회기에서는 교황무류성 교리를 재승인하였는데, 교황무류성 교리에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파문을 선포하였다.
1. 만일 누가 한분이시며, 참되고,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창조주이시며, 주님이신 하느님을 부인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2. 만일 누가 물질 이외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3. 만일 누가 하느님의 실체 혹은 본질이 만물과 하나이며 동일하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파문받아야 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962 -1965>
교황 요한 23세(1958-1963년 재위) 때인 1962년 10월 11일에 개최되어 교황 바오로 6세(1963년 6월-1978년 재위) 때인 1965년 12월 8일 폐회된 21번째 회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가 근대적 사상과의 대결을 제시한 데 반해 2차 공의회는 '시대에의 적응'을 내세워 교회의 보수적인 면을 탈피하고 교회 제도를 과감하게 개혁하며 성경을 재해석하여 교회에 새 바람을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는 교황청 개혁 및 교회의 현대화, 신앙의 자유, 세계 평화, 교회 연합과 일치 등이 논의되었다. 그 결과, 그동안 라틴어로만 봉헌되던 미사를 자국어로 사용하게 했고,
-1517년 종교개혁 이후 분리된 개신교를 형제로 인정했으며,
-1054년에 결별했던 동방정교회의 파문을 해제하여 근 10세기 동안 등져온 동서 교회의 화해를 모색하기도 했다. 또한 각국 주교단이나 신도의 역할을 강조하여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앙집권적이고 배타적인 제도를 완화했다. 또한 타교파나 타종파 교회의 선교 활동에 대해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이 자리에는 이례적으로 프로테스탄트 교파에서 60여 명이 참관하여 공의회 사상 유례 없는 열기를 보였다. 한국에서 신구교회가 연합하여 「공동번역 성서」를 발행한 것도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
-1939년 조선 가톨릭의 조상 제사 수용, 각국의 토착화된 성모상 등장, 미사 집전에서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 사용, 평신도의 역할 부각도 모두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재 승인하였다.
-또 공의회는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자유에 대한 인식을 깊이 할 것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사회 정의에 대한 참여, 가난한 이에 대한 관심, 정치 · 사회 · 경제적 피압박 계층의 자유 회복 등에 교회가 적극적 관심을 갖게 되었다.
<로자 루이스 파크스 Rosa Louise Parks 1913 – 2005>
1913년 미국 앨라배마 주에서 태어난 흑인 여성으로, 흑인을 차별하는 분위기로 인해 남편 레이먼드 파크스와 함께 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National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Colored People)에 가입했다.
-다른 미국 흑인들처럼 파크스 부부는 가난하여 몽고메리에서 여러가지 잡일을 하면서 사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파크스는 남편의 외조로 고등학교 교육을 받았고 NACCP 지부에서 간사와 서기를 맡을 정도로 나름 열성적인 흑인 민권 활동가였다.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 이전까지는 평범한 주부였다가 자리 이동 거부 사건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인권 운동에 뛰어들었다는 인상이 씌워져 있지만 실제로는 이전부터 이미 흑인 운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 사건은 1955년 12월 1일에 그녀가 일하던 백화점에서 집으로 가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던 중에 일어났다. 당시 버스 안에서도 흑백으로 나눠 좌석을 차별하는 법이 존재했다. 즉, 버스 기사는 반드시 백인이어야 한다. 흑인과 백인은 서로 지정된 좌석에서 격리된다. 버스 앞에서부터 네 줄은 반드시 백인들만이 앉아야 한다. 설령 버스 안이 비어 있어도 흑인은 앉지 못한다. 버스가 차면 흑인들은 백인들을 위해서 본인들의 자리를 비워야 한다.
-앨라배마는 지금도 보수적인 미국 남부에 위치하며 60년대에는 미국에서도 인종차별이 가장 심했던 곳으로 악명높았다. 전성기에는 KKK단이 대놓고 야간 행진을 했으며 도로 표지판으로 KKK 광고를 했을 정도다. 이로 인해 당시 인종차별 반대론자들은 미국 남부에서 활발히 행동했다.
-이 날 그녀는 버스의 흑인 전용 좌석에 앉아 있었지만 버스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백인 탑승객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마침내 백인들이 앉을 자리가 없어지자 버스 기사는 흑인들에게 버스에서 흑인 좌석을 양보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미 그녀가 흑인 좌석에 앉아 있었고 흑인 좌석에 앉은 자신이 백인에게 양보할 이유가 없다고 하며 양보를 거부했다. 이에 분노한 버스 기사는 그녀를 경찰에 신고했고 그녀는 경찰에 체포되는 처지가 되었다.
-이 사건은 흑인 사회의 공분을 불러일으켰고 흑인들은 이 사건으로 버스를 타지 않을 것을 결의하면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을 벌였다. 당국은 그녀에게 불법 보이콧을 했다는 명목으로 14달러라는 당시 흑인들의 경제력으로는 납부하기 어려울 정도의 벌금형을 선고했는데 이 결정은 오히려 버스 보이콧 운동에 불을 지피는 결과만 낳았다.
-결국 연방대법원이 버스 안에서의 차별을 철폐하라는 판결을 내리면서 380여 일이 넘는 버스 보이콧 운동은 막을 내렸으며 이 사건에서 자신감을 얻은 흑인들은 유색인종 차별 반대 운동을 더더욱 활발하게 벌였고 결국 1970년대 들어서는 흑인과 백인 사이의 법적 차별은 완전히 사라졌다.
-반면 당사자인 그녀는 이 사건 이후 계속되는 인종차별주의자들의 협박으로 몽고메리에서 살 수 없어져 디트로이트로 이주했다. 한편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민주당 하원의원 존 콘이어의 비서로 1988년까지 19년간 일했다.
- 그녀는 이 사건으로 20세기 중요한 인물 100인으로 뽑혔고 빌 클린턴 대통령으로부터 자유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 의회로부터도 메달을 받는 영예를 누렸으며 2005년 건강이 악화되어 9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 12명의 조카들이 그녀의 임종을 지켜보았으며 미국 역사상 최초로 미국 국회의사당에 이틀간(2005년10월 30~31일) 관이 안치된 여성이자 첫 번째 민간인이 되었다. 장지는 디트로이트의 우드론 묘지이였다.
- 그녀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내주지 않은 이유는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내가 그저 몸이 피곤했기 때문에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난 신체적으로 힘들지 않았으며, 힘들다 하더라도 그건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여느날보다 더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어떤 사람들이 종종 나에 대해서 떠올리는 것과 달리, 나이가 든 사람도 아니었다. 난 마흔두 살이었다. 내가 정말로 피곤함을 느꼈던 것은 바로 참고 굴복해야 하는 일 그 자체였다.”
- 그녀의 좌석 양보 거절사건은 현대 시민운동의 주요 유형 중 하나인 시민 불복종 운동을 보여준 사례로 꼽히고 있으며 미국과 전 세계의 차별의 벽을 허무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 Martin Luther King Jr. 1929 - 1968>
1929년 1월 15일 미국에서 가장 눈에 띄는 민권 운동 지도자였던 침례교 목사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조지아주 애틀랜타에서 태어났다. 그는 1955년부터 1968년 39세의 나이로 암살당할 때까지 활발하게 흑인 인권의 증진을 위해 힘썼다.
-오늘의 미국 흑인들의 민권 및 인권 증진은 오랜 투쟁과 저항의 결과이다. 1865년 12월 6일 노예제는 폐지됐지만 농장이 많았던 남부 주들은 그만큼 반발도 컸다.
-이후 1,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 자동차의 보급이라는 사회적 대변동이 농장에 분산돼 있던 흑인들을 고립에서 벗어나게 했다. 또 농업의 쇠퇴와 공업 발전은 수많은 흑인들을 도시로 끌어냈고 경제적 조건도 향상시켰다. 새로운 사회적 관계가 증가함에 따라 흑인들의 인식은 넓어졌고 더 나은 교육 기회를 누리게 됐다.
-킹 목사의 부친 이름은 원래 마이클 킹이었으나 1934년 독일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을 바꾸었다. 이에 따라 이들 부자(父子)는 마르틴 루터 킹 ‘시니어’와 마르틴 루터 킹 ‘주니어’(2세)가 되었다.
- 아버지는 애틀랜타에서 흑인 침례교회에서 목회를 하고있었다. 마틴 루터 킹 시니어는 아들에게 두가지를 가르쳤는데 첫번째는 기독교 신앙이었고 두번째는 흑인의 인권이었다. 마르틴 루터 킹은 5살 때부터 성경 구절을 외우고 찬송가를 불렀는데, 찬송가 부르는걸 좋아해서 커서는 주니어 성가대에 들어가기도 했다고 한다.
-어릴때부터 성경 구절을 외우게 한 아버지의 교육은 킹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킹은 성경을 통해 영어를 빨리 깨치고 영문학에도 관심을 보여 사전을 통해 자신의 문장력을 갈고 닦았다. 웅변가로 유명한 킹의 명성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의 조기 성경 교육 덕분이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킹은 고등학교에서 미국사와 영문학 과목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웅변으로 여러차례 상을 받았다. 그는 1944년 고등학교 3학년일 때 인종평등에 대한 주제로 일장연설을 해 웅변대회에서 우승했다.
-웅변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그는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라는 위협을 받았다. 킹은 분노해 자리를 비키지 않겠다고 했지만 동행하던 그의 선생님은 "악법도 법이니 체포되기 전에 자리를 비키자"라고 설득했다. 킹은 마지못해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했지만 이날의 기억을 "내 인생에서 가장 수치스럽고 화나는 날"이라고 회상했다.
- 마르틴 루터 킹은 1944년 15살 나이에 아버지 모교인 모어하우스대학에 입학해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 불복종’을 읽으며 비폭력저항주의를 접했다. 선에 협조하는 것뿐 아니라 악에 협조하지 않는 것도 도덕적 의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
-그는 처음부터 목사가 될 생각은 없었지만 모어하우스대학 학장인 메이즈 박사와 켈시 교수를 통해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무엇보다 부친의 영향력이 커서 숭고한 목회자상과 도덕적 이상형이 영향을 미쳤다.
-마르틴 루터 킹은 모어하우스 대학(1948 -1951 사회학 전공) 졸업후 목사가 되기위해 펜실베이니아주 크로저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의 지적 탐구를 시작했다. 그리고 보스턴 대학교(1954 – 1955)에서 공부한 후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 1954년, 킹은 코레타 스콧을 만나 결혼하는 기쁨도 있었다. 코레타 스콧과 마틴 루터 킹은 슬하에 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는 카를 마르크스 책도 읽었다. 많은 이들이 공산주의에 매혹되는 이유가 궁금해서였다. 그의 결론은 자서전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에 분명하게 기록돼 있다. 우선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해석을 받아들일 수 없었고 공산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또 공산주의가 가진 정치적 전제주의에 거부감을 느꼈다. 공산주의에서는 개인은 국가의 부속물에 불과했다. 인간은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이므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어야 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근본적으로 사악한 것이라 생각했다. 반면 빈부격차에 대한 인식, 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의 동기가 이윤 추구라는 점을 밝혀냈다는 점은 인정했다.
-킹 목사는 자본주의가 전파하는 실용적 유물론은 공산주의의 유물론만큼이나 해롭다고 생각했다.
-그는 마하트마 간디의 사상을 접하면서 그의 비폭력저항주의에 매료됐다. 그는 간디가 사랑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개인 간 단순한 상호관계를 넘어 강력하고 효과적인 대규모 사회적 역량으로 승화시킨 최초의 인물이라고 말했다.
-그는 라인홀드 니버 목사의 책을 통해 현실적 평화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평화주의가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였다.
-그는 보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공부하면서 자유주의 신학을 교정하기 위한 방책을 신보수주의 신학에서 찾았다. 그는 “나는 청년 시절 이미 영원하고 절대적인 것에 내 인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내가 인생을 바치려 했던 대상은 오늘 나타났다가 내일 사라져 버리는 하잘것없는 신들이 아니라 어제 오늘, 그리고 오랜 세월 동안 언제나 한결같은 하나님이었다”라고 고백하였다.
-첫 목회지는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의 덱스터 애비뉴 침례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뛰어난 설교로 지역의 흑인들에게 명성을 얻었다. 이것이 킹의 인생에 엄청난 파고를 몰고 올줄은 킹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이듬해 로사 파크스가 버스의 백인전용 좌석 뒷좌석에 앉았다가 백인 남성이 차에 오르자 뒤로 가라는 운전사의 말을 듣지 않아 흑백분리법률 위반 혐의로 체포됐다.
-당시 남부는 여전히 흑백 차별이 심했다. 몽고메리에서는 특히 심해서 버스운전사들은 흑인들을 ‘검둥이’ ‘검은 원숭이’ ‘검은 젖소’라 부르기도 했다. 이 일을 계기로 흑인들은 ‘버스 타지 말기’ 운동을 전개했고 킹 목사는 몽고메리 진보연합 의장으로 선출되며 보이콧 운동을 이끌었다.
-의회와 경찰, 백인들의 협박과 분열 책동, 폭탄 테러, 검사의 기소 등의 공격을 받았지만 킹 목사와 흑인들은 비폭력 저항으로 난관을 헤쳐 나갔고 1년 뒤인 1956년 11월 미 연방최고법원이 버스 내 흑백분리법률은 위헌이라고 선언하며 흑백통합버스 시대를 맞았다.
-킹 목사는 1957년 2월 남부지도자협의회 의장이 되었고 워싱턴 DC에서 열린 자유를 위한 순례기도회에 참석했다. 1957년 9월 리틀락의 센트럴 고교의 인종차별을 폐지하기 위해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공권력을 사용하겠다고 결정한다. 킹 목사도 이에 지지를 보냈다.
-1958년은 그에게 매우 힘든 해였다. 정신분열증을 가진 한 여성이 흉기로 암살 시도로 칼로 그의 가슴을 찔렀으나, 간신히 칼날이 대동맥을 비껴갔고 몇 시간에 걸친 수술 끝에 킹은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킹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공격한 이 여성을 용서했고 "그녀가 자유롭고 건설적인 사회의 구성원이 되기위해 사려깊은 사람들은 그녀가 필요로 하는 도움을 주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희망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그 후에도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위협이 거세졌지만 킹은 굴하지 않았다.
-1959년 그는 5년간의 앨라배마 활동을 정리하고 자신의 고향이자 아버지가 담임목사로 재직했던 애틀랜타 에버니저 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하게 된다.
-당시 조지아 주지사인 어니스트 밴디버(Ernest Vandiver)는 킹의 조지아 이사에 심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는 "킹이 있는 곳마다 폭력과 폭동, 범죄가 일어난다"며 킹을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했고, 킹을 감시하려는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의 시도에 적극 동조하였다. 그가 조지아 주로 이사한지 얼마 안가, 킹은 운전면허증을 소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소한 혐의로 또다시 감옥에 갇혔다.
-존 F. 케네디는 조지아 주지사에게 직통 전화를 걸어 킹을 석방하라고 압력을 넣었다. 킹목사는 케네디의 압력으로 불과 이틀만에 석방되었다. 킹은 케네디의 호의에 일부 의심을 품었지만 일단 감사를 표했고, 아버지와 함께 공개적으로 케네디를 지지하였다.
-킹의 영향으로 흑인들은 압도적으로 케네디에 투표했으며 케네디는 불과 0.1% 차이로 닉슨을 꺾고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사실상 킹이 대선 판세에 결정적 역할을 한 셈이 되었다.
-1960년 케네디 행정부에서 로버트 F. 케네디는 법무장관으로 발탁되는데, 그는 존 에드거 후버의 인종주의적 행보에 제동을 걸고 민권을 위한 여러 조치를 세워 킹의 지지를 받았다.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새로운 시민권에 대한 제안을 발표했으며 NAACP 지도자인 메드거 에버스가 암살됐다. 킹 목사는 케네디 대통령과 만났고 흑인의 고용과 자유 쟁취를 위한 워싱턴 행진을 시작하였다.
-1963년 8월 28일 ‘일자리와 자유를 위한 워싱턴 행진’에서 워싱턴의 링컨 기념관 광장에 25만여명의 군중이 모였다. 그는 이날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구절로 유명한 연설을 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조지아주의 붉은 언덕에서 노예의 후손들과 노예 주인의 후손들이 형제처럼 손을 맞잡고 나란히 앉게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이글거리는 불의와 억압이 존재하는 미시시피주가 자유와 정의의 오아시스가 되는 꿈입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내 아이들이 피부색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지 않고 인격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나라에서 살게 되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지금은 지독한 인종 차별주의자들과 주지사가 간섭이니 무효니 하는 말을 떠벌리고 있는 앨라배마주에서, 흑인 어린이들이 백인 어린이들과 형제 자매처럼 손을 마주 잡을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는 꿈입니다.
지금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고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게 될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입니다.”
-이 연설은 미국의 장래에 대한 희망을 노래한 것으로서 이사야 40장 4절(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과 아모스 5장 24절(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의 메시지를 인용 반영했다.
-1963년 8월 23일 워싱턴 대 행진에서 포크 가수 조안 바에즈가 부르던 “We shall overcome” 이 노래는 원래 찬송가로서 불렸지만 미국의 포크 가수 피트 시거가 포크 송으로 편곡하면서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다. 25만이 넘는 군중이 따라부른 것으로 유명해져 미국 인권운동의 성가로 자리잡았다. 이후 미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여러 나라에도 퍼져 인권 운동의 상징으로 불리는 곳이 많다.
“we shall overcome,
we shall overcome some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승리할 것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we'll walk hand in hand some day.
Oh, 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린 함께 손맞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함께 손맞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우린 언젠가 함께 손맞잡고 걸어갈 것입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we are not afraid today.
Oh,deep in my heart, I do believe.
we shall overcome someday.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금 전혀 두렵지 않습니다.
내 마음 속 깊이, 나는 반드시 믿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반드시 승리할 것이라고..
- 케네디 대통령의 우려와 달리 시위는 평화롭게 마무리 되었으며, 킹목사의 명성은 이보다 더 높아질 수 없었다. 킹의 투쟁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1963년 8월 행진 이후에도 메인, 뉴욕, 앨라배마 등 전국을 돌아다니며 흑인들의 열악한 실태를 파악하고 흑인들의 인권을 향상시키기 위한 행진을 기획한 것이다.
-킹은 이 과정에서 몇차례나 체포되며 구금되었지만, 주류 정치권은 민권법을 통과시켜야 한다는 합의점을 찾게 되었다.
-1963년 11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되었다. 많은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킹목사도 케네디의 죽음에 슬퍼했지만, 케네디가 추진하던 민권법이 린든 존슨에게 넘어온 것이었다.
-린든 존슨은 비록 개인적으로는 인종주의자였고 킹을 극도로 혐오하였지만, 철두철미한 전략가였고 흑인이 얼마나 민주당에게 이득이 되는 유권자 집단인지는 1960년 대선을 통해 똑똑히 알게 된 상태였다.
-그는 "깜둥이들이 앞으로 200년간 민주당을 찍게 만들것"이라며 민권 법안 통과를 밀어 붙였다. 존슨은 존 에드거 후버 FBI 국장과의 사적인 친분을 통해 국회의원들의 약점과 스캔들을 줄줄이 꿰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민권법 통과를 주저하는 상원의원들을 협박했고, 그렇게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이 압도적인 격차로 통과 되었다. 킹목사의 투쟁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런 가운데 알리바마주 버밍햄 식스틴스 스트리트침례교회에 다이너마이트가 터지면서 주일학교 흑인 소녀 4명이 사망하였다. 킹 목사는 폭파사고로 죽은 네 아이를 기리는 연설을 하였다.
-1964년 12월 킹목사는 역대 최연소의 나이로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65년 2월 킹 목사는 앨라배마주 셀머에서 흑인들의 투표권 쟁취를 위한 행진 시위를 했고 그리고 투옥되었다.
-킹의 사회적 활동은 옹호보다는 비난을 더 많이 받았다. 킹을 시셈하던 일부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들은 킹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할 욕심을 가지고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아니냐"며 비난했고, 백인들의 반응은 말할 것이 없었다.
-많은 백인들은 킹의 인종분리 반대를 지지했지만, 그것을 넘어서 구조적 빈곤 등을 지적하는 행보가 공산주의, 마르크스주의와 연관되어있거나 정치적 야심이 담긴 행보라고 확신했다.
-1966년 시카고 투쟁은 킹 목사에 대한 백인들의 적대감을 보여주었다. 킹 목사와 애버내시 목사는 배울만큼 배운 시카고의 흑인 중산층들이 정작 남부 백인우월주의자들보다도 킹 목사에게 더 적대적이라는 사실에 놀랐는데, 누가 창가에서 벽돌을 던져 킹이 다치기도 했다.
-킹은 행진에 반발하는 백인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리처드 데일리 시카고 시장에게 경호를 요청해야했다. 린든 존슨 대통령은 킹을 공산주의자라고 생각해 존 에드거 후버에게 강력한 감시를 지시했다.
-1967년, 킹은 마침내 오랜 침묵을 깨고 베트남 전쟁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킹은 베트남 전쟁을 린든 존슨과 미군의 "군국주의적 시도"라고 강하게 비판하고, 식민지를 잃기 싫어하는 구 제국주의 국가가 제3세계 국가를 수탈하려는 또다른 시도라고 칭했다.
-그는 미국이 베트남에서 무고한 어린이 수백만을 살해했고 북베트남의 토지개혁을 방해함으로서 베트남을 수탈하고자 하는 다국적 기업의 이익만을 도왔다고 주장하였다.
-킹의 베트남 전쟁 반대는 "실수"처럼 비추어졌다. 1967년~1968년에는 비록 베트남 전쟁을 지긋지긋해하는 여론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베트남 전쟁이 미국의 잘못이라고 말하는건 다수의 의견이 아니었다. 여전히 미국인 40%는 존슨의 베트남 전쟁을 지지했으며, 베트남에서 미군이 즉시 철수해야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비중은 겨우 20%에 불과했다.
-킹을 지지했던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킹이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며 공산주의의 편에 섰다며 킹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기에 이른다. 많은 노동조합, 언론사, 주류 정치가들이 킹과 거리를 멀리했다.
-1968년은 킹의 마지막 해이자 미국사에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한해로 지목되는 해이다. 미국 전역은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로 뒤덮였고 흑인들은 진정한 경제적 평등을 외치며 폭동을 일으켰다.
-킹은 무척이나 난처한 입장에 처했는데, 그는 성난 흑인들을 잠재우고 그의 비폭력 투쟁을 외칠 의무감을 떠안았고 또 한편으로는 베트남 평화운동과 민권 운동에 반발하는 대다수의 백인 중산층들에 맞서야했다. 킹을 싫어하는 인종주의자들은 그가 어떻게 비폭력 운동가냐고 반문했다.
-1968년 3월 마틴 루터 킹은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환경미화원들의 인권 개선을 위한 행진을 기획하였다. 멤피스의 흑인 환경미화원들은 보호법도, 최저임금도, 안전수당도 없이 일하고 있었으며 한달 전 환경미화원 두명이 쓰레기 압축 트럭에서 끔찍하게 죽는 사고가 일어나며 흑인 환경미화원들이 파업을 벌이고 있던 상황이었다.
-킹은 4월 3일 흑인 노동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I've been to the Mountaintop, 나는 높은 산 꼭대기에 다녀왔다" 로 시작하는 짧은 연설을 했다.
-1968년 2월 4일, 마틴 루터 킹은 고향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에버니저 교회에서 설교했다. 자기 죽음을 예견하기라도 한 것 같은 이 설교는 그 교회에서는 그의 마지막 설교가 되었다.
“내가 죽거든 나를 위해 긴 장례를 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긴 조사(弔辭)도 하지 말아 주십시오. 또 내가 노벨상 수상자라는 것과 그 밖에 많은 상을 탄 사람이라는 것도 언급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 날, 마르틴 루터 킹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려고 노력했고,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려 했으며, 전쟁에 대해 올바른 입장을 취했다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또 배고픈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입을 것을 주기 위해 애썼으며, 인간다움을 지키고 사랑하기 위해 몸 바쳤다는 것이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1968년 4월 4일 킹은 오랜 친구인 애버내시 목사와 함께 멤피스 로레인 모텔에 머물고 있었다. 오후 6시, 그는 시카고에서 민권운동을 이끌고 있던 젊은 흑인 목사 제시 잭슨과 대화를 나누었다. 제시 잭슨은 킹의 시카고 주택 투쟁의 유산을 이어받은 킹의 후계자 중 한 명이었다. 관계자들에 따르면 킹은 발코니 난간에 등을 기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오후 6시, 레밍턴 모델 760호에서 발사된 총알이 킹의 뺨을 관통했다. 결국 총격 한시간만인 오후 7시 5분 킹은 사망했다. 향년 39세.
-킹을 살해한 사람은 과격파 백인단체 소속의 제임스 얼 레이(James Earl Ray)인 것으로 드러났다. 제임스 얼 레이는 인종차별주의자였으며, 당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인종주의자 조지 월리스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킹의 사망은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고, 흑인들에게는 특히 큰 슬픔이었다. 킹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국의 100여개 대도시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폭동이 일어나지 않는 대도시는 2곳이었는데, 뉴욕과 인디애나폴리스였다.
-뉴욕에서는 존 린지 시장이 할렘을 찾아 킹을 추모하고 백인우월주의자를 비난하는 연설을 해 흑인들에게 환호를 받았고 소요사태가 일찍이 진정되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로버트 F. 케네디가 즉흥연설을 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형의 암살 이후 자신이 겪은 슬픔을 회상하며 킹의 비폭력 사상이 가지는 의의를 상기시키고 그의 유산을 위해 계속 싸우자고 흑인들을 북돋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연설에 감화된 흑인들은 자진해 시위를 해산했다.
-하지만 백인에 대한 흑인의 증오는 몇 연설로 막을 수 없는 것이었다. 볼티모어, 필라델피아 등 흑인의 비중이 높은 거의 모든 도시에서 흑인에 의한 약탈, 방화가 일어났다..
-킹의 장례식은 4월 9일 치러졌다. 총 30만명의 미국인이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장례식 중 하나였다. 공화당의 대권주자였던 리처드 닉슨은 장례식에 직접 참석했지만 흑인들에게 욕만 먹었고, 일부 흑인은 닉슨을 향해 침을 뱉기도 했다.
-로버트 F. 케네디는 이 장례식에 참석한 백인 중 유일하게 비난이 아닌 박수갈채를 받은 사람이었다. 안타깝게도, 로버트 케네디 역시 두달 후 암살당해 흑인들을 또다시 슬프게 했다.
-킹 목사의 무덤은 2006년 1월 30일에 향년 79세로 타계한 부인 코레타 스콧 킹 여사와 함께 안장된 합장 석관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그의 석관에는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의 마지막 문장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마침내 자유, 마침내 자유다. 마침내 나를 자유롭게 하신 전능한 하나님께 감사하라)"
-부인의 석관에는 고린도전서 13장 13절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hope and love.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묘비명으로 새겨졌다.
-미국은 매년 1월 셋째 월요일을 ‘마틴 루터 킹 데이’로 정해놓고 킹 목사의 삶을 되새기고 있다.
- 비폭력적 사랑을 통해 악에 적극적으로 저항한 킹 목사의 모범은 그의 생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영감을 주고 있으며, 그의 신학적 견해에 전부 동의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우리에게 확신과 영감을 줄 수 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