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성 겨울 바다 여행
'옵바위'에 오빠는 없지만, 멋진 일출은 있답니다
바다는 유독 겨울을 편애한다. 사람이 겨울 바다를 편애한다 바꿔 써도 좋겠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중 하나로 바다를 형용(形容)할 때 가장 입에 잘 붙는 조합이 겨울 바다다. 그 겨울 바다의 매력은 여름의 소란함 없이 시리도록 푸른 색을 바라보며 추위를 맑은 기운으로 바꿔내는 데서 온다.
겨울 바다를 보러 강원 고성군으로 갔다. 고성은 동해 최북단이다. 고성의 겨울 바다에서 뜻하지 않은 즐거움을 여럿 만났다. 무엇보다 그곳은 지금 새의 나라다. 갈매기는 물론 군데군데 겨울 철새들이 모여 쉬거나 하늘을 수놓았다. 평소엔 그저 까만 갯바위에도 바닷물이 하얗게 얼어 머물렀다. 그뿐인가. 도루묵과 도치, 양미리 등 제철 맞은 별미가 지천이었다. 이들을 잡아 오는 어부들의 삶도 가깝다. 사람과 새, 바다와 추위가 한데 어울린 고성 여행.
-
- ▲ 겨울, 동해는 시시각각 모습을 바꾼다. 동틀 무렵엔 빛을 튕겨내며 제 색을 비워내고, 해가 고도를 높일 땐 빛이 멀어지며 제 색을 찾는다. 그 색이 시리다.
◆겨울 바다의 입구 - 미시령~속초항
미시령 옛길로 접어들어 정상에 오르자 바람에 차가 들썩였다. 2006년 미시령 터널이 뚫린 이후로 인적 드문 길을 거센 바람이 왕래했다. 그 바람에 한쪽으로 몸을 일제히 기울인 나무 너머 시리게 푸른 바다가 하늘과 허리를 맞댔다. 순간 마음도 들썩였다. 그래, 겨울 바다를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고성군의 동해로 가려면 마땅히 옛길을 타고 넘어야 한다. 미시령 터널은 영동과 영서의 경계를 지운다. 부지불식간에 경계를 넘는다. 그 길은 편리하고 빠르되, 여행에 어울리는 길이 아니다. 경계 사이에서 휘몰아치는 바람은 거기 없다. 정상에서 바라보는 동해의 가슴 떨리는 전망도 없다. 고개를 넘는다는 행위의 의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 옛길에서만 확연하다.
미시령 넘어 바다를 향해 직진하면 속초항이다. 이맘때 이 부근 항구가 다 그렇듯, 속초항 역시 분주했다. 부둣가에 넓게 깔린 그물엔 여러 명이 달라붙어 양미리를 뗐다. 한편에선 양철통에 피운 난롯불에 어부들이 손을 녹였다. 먼바다를 날던 갈매기는 부둣가를 채운 창고 건물 위에 빼곡히 앉아 사람이 잡아온 물고기를 노렸다.
이 풍경에 가장 빠르게 동화하는 방법은 부둣가 포장마차에 들어서는 것이다. 포장마차 앞에선 동네 주민들의 흥정이 한창이고 안에선 일찌감치 벌인 술판이 한창이다. 안주는 동해 겨울 별미 양미리와 도루묵. 1만원에 합쳐 10여 마리를 내놓는다. 연탄불에 구워 꼬리와 머리를 잡고 뜯어 먹는다. 몸을 채운 알이 입 안에서 오도독 씹힌다.
-
- ▲ 고성 제일 항구, 거진항의 저녁은 새벽을 닮아 파랗게 젖는다.
◆고성 여행 전반전― 아야진항~문암항~공현진항
속초항에서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속초와 고성 해변에 점점이 박힌 항구를 나침반 삼아 해변을 따르는 길이다. 그 항구들의 이름은 발음할수록 달콤하거나 거칠다. 다섯 곳 정도만 염두에 두자. 아야진항과 문암항, 공현진항, 거진항, 대진항이다.
먼저 아야진항. 청간정(淸澗亭)과 천학정(天鶴亭)을 양옆에 끼고 있다. 관동팔경 중 한 자리를 차지한 청간정은 설악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청간천과 동해가 만나는 지점을 내려본다. 그 아스라한 경계에 오리 떼가 몸을 뉘었다. 관동팔경에 들진 못했으되 고성팔경 중 하나인 천학정은 주변을 감싼 소나무와 바다의 조화가 고풍스럽다.
다음은 문암항 방파제 옆으로 불쑥 솟은 기암괴석, 능파대(凌波臺)다. 청간정에서 천학정을 거쳐 능파대로 북진할수록 길은 날 것 그대로의 자연을 향한다. 인위(人爲)로 정취를 품었던 풍경은 인위를 지워내며 거칠어진다. 능파대의 바위산은 틈으로 파도를 받아 내며 높게 솟았다. 겨울, 틈 사이로 몰려온 파도는 물러서지 않고 자리에 그대로 남아 얼어붙었다. 물의 흔적으로 하얗게 빛나는 바위 사이에서 바다는 철썩이며 투명하게 제 몸을 비춰낸다.
공현진항은 높지 않되 길게 뻗은 옵바위를 품었다. 숱한 일출 명소를 품은 고성에서도 옵바위 일출은 제일 명소로 손꼽힌다. 옵바위 너머 문암 해수욕장은 갈매기의 나라다. 해변 가까이 갈매기가 북쪽을 바라보며 일제히 도열했다.
이쯤까지 올라왔다면 고성의 첫인상이 각인된다. 하얗게 언 파도를 얹은 거친 바위, 해변 가까이 진을 펼친 갈매기와 철새 떼, 사이사이 쉼표처럼 찍힌 논이 그 첫인상의 주된 요소다. 겨울 고성 여행의 전반전을 여기서 끝낸다. 후반은 거진항부터다. 풍경이 깊어지고, 그 깊은 풍경을 배경으로 바다에 기댄 어민의 삶이 빼곡하다.
-
◆고성 여행 후반전― 거진~화진포~진부령
거진항은 고성에서 제일 큰 항구다. 한때 전국 명태 어획량의 62%가 여기서 났다. 1970년대 주변 인구가 2만5000명에 달했고 1980년대에는 '거진항에는 거지가 없다'란 말이 돌았다. 한류성 어종 명태가 자꾸만 북쪽으로 향하며 명태잡이가 시들해진 지 오래지만, 그래도 여전히 거진항은 고성 제일 항구다.
거진항의 활기는 새벽에 확연하다. 거진항에서 일출보다 세상을 먼저 밝히는 건 오징어잡이 배의 집어등과 위판장의 백열등, 드럼통 위로 너울대는 모닥불이다. 사람이 지핀 붉거나 하얀빛 너머, 거진항 앞바다는 푸른 새벽으로 젖어 있다.
이맘때 바다에서 잡아오는 건 주로 오징어와 도치, 도루묵, 양미리다. 배가 들고 나는 시간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거진항의 새벽 풍경은 이런 순서다. 오전 6시 30분쯤 오징어가 첫 경매를 알린다. 활어와 그물로 잡은 고기가 뒤를 잇는다. 경매사가 자리를 옮길 때마다, 빨간 고무장갑의 아낙네와 장화를 높게 신은 상인들이 우르르 몰려든다. 옆 사람 못 보도록 몸을 숙여 입찰표에 암호 같은 숫자를 적는 순간부터 최종적으로 물고기 주인이 결정될 때까지, 모든 게 순식간이다. 사람들이 내뱉는 하얀 김도 순간 자욱하다 사그라진다. 그 풍경 위로 갈매기가 끼룩거리며 눈치를 살핀다. 고요한 활기가 거진항의 아침을 깨운다.
-
- ▲ 겨울 새벽이면 거진항에서 늘 볼 수 있는 경매의 풍경.
그 아침과 더불어 일어났다면 화진포로 향한 해안도로를 달려야 한다. 2005년 새로 놓인 이 길은 짧지만 매혹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거진항 포구를 지나쳐 등대 쪽에서 이 길에 오르면 오른편으로 바다가 바싹 붙는다. 길이 짧아 아쉽다면 중간쯤에 차를 세워두고 해안 맞은편 벼랑 위에 조성된 거진 등대 해맞이 공원에 오른다. 몸의 고도만 바꾸었을 뿐인데 바다색이 찬란하다. 동해는 빛을 튕겨낼 때 제 색을 비워내고, 빛이 멀어질 때 제 색을 찾는다.
마지막은 화진포다. 동해는 자주 제 옆으로 호수를 거느린다. 석호(潟湖)다. 바닷물이 퇴적물에 갇혀 생긴 호수. 바다가 기원이되 바다와 멀어진 호수들이다. 영랑호, 송지호 등 여러 석호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화진포는 제일 크다. 둘레 길이 16㎞. 해지는 서쪽에선 백두대간이 압박하고 해 뜨는 동쪽에선 바닷물이 넘실댄다. 산과 바다가 바싹 압박하나 스스로 안은 품이 넓어 여유롭다. 그 빼어난 풍경으로 숱한 권력자를 매혹했다. '김일성 별장'이란 이름이 붙은 '화진포의 성'과 이기붕 별장, 이승만 초대 대통령 별장이 모두 이 일대에 있다.
이젠 고성 여행을 마무리할 차례다. 미시령으로 넘어온 길을 진부령으로 돌아간다. 아쉽다고 자꾸만 뒤를 돌아보는 건 금물. 고갯길이 위험하다.
첫댓글 차거운 겨울바다에 파도를 보면서 온갖 시름을 날려 보네는데 제격 입니더
얼마전 대경님들과 감포 겨울바다를 만끽 하면서
싱싱한 자연산회를 많이먹고 왔답니다
열심이 먹으러 다니는일밖에없는데요 .........
둥지님! 정보는 감사합니다만
바빠서 가볼 수 도 없고 그냥 군침만 삼키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