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4일 대림 제2주일 인권 주일>
종말론적인 교회
정의와 해방된 세상을 외치다
그날이 오면 “정의가 그의 허리를 두르는 띠가 되고 신의가 그의 몸을 두르는 띠가 되리라. 암소와 곰이 나란히 풀을 뜯고 그 새끼들이 함께 지내리라. 사자가 소처럼 여물을 먹고 젖먹이가 독사 굴 위에서 장난하며 젖 떨어진 아이가 살무사 굴에 손을 디밀리라.”(이사 11:5-7)
그날이 오면 세상 모든 억압이 사라지리라. 약육강식의 자연계에서도 모든 억압이 사라지리라. 그야말로 세상 어디에도, 그 어떤 억압도 남아 있지 않고 모두 없어지리라. 가난한 이든, 못 배운 이든 할 것 없이 모두가 해방되고 자유로운 진정한 평화가 오리라. 이때 어떤 이가 괴로워 떨까? 해방과 자유 그리고 평화가 그들에게는 무엇이 될까?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성경에 미리 기록된 것은 우리를 가르치려고 기록된 것’(로마 15:4a)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에서 인내를 배우고 위로를 받아 희망을 간직’(로마 15:4b)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을 기꺼이 받아들이신 것처럼 여러분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기꺼이 받아들이십시오.’(로마 15:7) 그러나 서로 받아들이는 일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개인 내적 평화에서 시작하여 국가 간의 평화에 이르기까지 서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과제였다. 사자가 소를 받아들여 함께 풀을 뜯고, 어린아이의 장난을 독사가 그냥 그대로 보고만 있다고 생각해 보라. 다툼이나 억압이 없는 세상을 상상해 보라.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6)
인간은 나르시스적(자기애성) 욕구를 지닌 채 태어나는데 이는 생존을 위한 추동 에너지(본능 중 하나)로 보인다. 유아의 자기애성 욕구는 강력한 애착 대상을 통하여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것이 유아에게 있어서 절대적 환경이 된다. 어쩌면 인간은 출생 그 근본에서부터 무조건적이며 절대적인 하느님의 사랑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시작된 유아의 자기애성 욕구는 그다지 인간 부모에 의해 성공적으로 충족되지 못한다. 그리고 충족되지 못한 자기애성 욕구는 여러 형태로 변형되며 성장 발달 과정에 악영향을 끼친다. 여기에서 인간의 다양한 성격이 나타나는데 미성숙하고 비뚤어진 일종의 심리 기제들이다.
이러한 심리 기제는 다양한 성격으로 발현되어 세상 유혹에 쉽게 흔들리며 때로는 충족되지 못한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스스로 자신의 삶을 깊은 유혹의 수렁으로 밀어 넣게 된다. 그 결과 초래된 자기 소외는 타인의 소외를 필연적으로 동반하면서 여기에 갖가지 억압이 생겨난다. 어떤 의미에서 해방과 자유 그리고 평화는 진정한 자기 소외에서 자기 일치로 나아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자기 내적 일치는 너와의 일치로 그리고 하느님과의 일치로 나아가는 것으로 여기에 진정한 해방과 자유 그리고 평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충분히 채워지지 않은 ‘자기애성 욕구’는 우리 내면에 갖가지 형태의 성격 구조를 만들어낸다. 잔뜩 웅크리며 주변 사람의 심기를 살피는 사람, 사람들 앞에 서면 가슴이 너무 뛰어 숨이 차오르는 사람, 사람을 쉽게 믿고 의지하는 바람에 종종 사기를 당하는 사람, 반대로 사람을 믿지 못하여 혼자 고립되는 사람, 마음과 달리 엉뚱하게 행동하여 오해를 초래하는 사람, 자기 잘난 맛에 괴롭고 자기 못난 맛에 고통스러운 사람, 선뜻 나서지 못하고, 계속 계획만 세울 뿐 시작하지 못하고, 시작해놓고 끝내지 못하는가 하면 변명과 핑계로 모면하려는 사람, 지나친 책임감에 지쳐가는 사람, 사람, 사람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나온 뒤로 단 한 번 자기애성 욕구를 온전히 충족시킨 이가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이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자기애성 욕구를 충족시킨 사람이 되었을까? 성경에서 우리는 그 단서가 되는 부분을 들어 유추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사건(마태 4:1, 마르 1:12, 루카 4:1)이다. 예수님께서는 때가 되자 광야로 나가신다. 도시는 사람들의 삶의 장소라면, 광야는 그 어떤 생명체도 살기 어려운, 그래서 오직 하느님께 의지해야 하는 공간으로 여겨졌다. 그곳에서 예수님은 40일 동안 주야로 단식하시며 기도하신다. 이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성경이 전해주는 바는 없지만, 곧 이어지는 유혹사건이 40일 동안 예수님에게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암시해 준다.
40일 동안의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 사탄들에게 유혹을 받으시는데 무려 세 가지 유혹을 받으셨다. 세 가지라는 숫자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누구나 받을 수 있는 모든 유혹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겨진다. 어쨌든 유혹을 이겨냈다는 것은 내적으로 자신과 일치된 사람임을 나타내주고 그것은 더는 충족되어야 할 욕구가 남아 있지 않음을, 즉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아들임을 자각하는 데서 비롯되는 반응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기와 깊은 일치를 이루신 예수님에게서는 타인에 대한 어떤 소외도, 어떤 억압도 나오지 않는다. 충족되지 못한 ‘자기애성 욕구’로 인하여 갖가지 성격에 매여 구속된 우리에게, 그래서 갖가지 억압을 만들어내어 자신만이 아닌 타인에게까지 소외와 억압을 만들어내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길이시고 진리이시며 생명이신 분이다.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마태 3:6)
예수님께서도 이 세례를 받으셨다. 그리고 대림 제2주일을 지내는 우리는 지금 이 말씀 앞에 있다. 우리도 세례를 받았지만, 무엇을 찾아 사람들은 요르단강으로 가서 자기 죄를 고백하며 세례를 받았을까?. 사실 많은 죄가 우리 내면의 갖가지 욕구에서 비롯된다. 쉽게 유혹에 빠지거나 넘어지는 일도 내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내면의 욕구 때문이다. 어린 시절 우리의 부모님이 다 채워주지 못했던 그 욕구를 어떻게든 채우려고 하면서 우리는 유혹에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의 충족되지 못한 욕구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믿음으로 채워질 수 있음을 예수님께서 증명해 보이셨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
“주 너의 하느님을 시험하지 마라.”(마태 4:7)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마태 4:10)
이는 예수님께서 유혹을 받으실 때마다 사탄에게 응수하신 말씀이다. 조금의 망설임도 불안이나 걱정도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하는 모습도 아닌 내적 확신과 분명한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확신과 태도는 하느님 사랑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으로 ‘내적 충만’을 나타낸다.
그날이 되면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분께서는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12) 우리 내면에 충족되지 못한 자기애성 욕구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아마도 결핍된 자기애성 욕구를 스스로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도 없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그 사랑을 믿는 자는 자신과 일치는 물론 이웃과 일치하고 나아가 하느님과 하나가 될 것이다. 교회는 이러한 믿음과 자기 확신을 세상에 외치는 존재이며 모든 억압이 사라진 해방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그리며 살아가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종말론적 존재다.
종말론적 존재란, 궁극적으로 오게 될 ‘그날’, 그 어떤 억압도 사라지고 모든 이가 해방되고 자유로워지며 평화로운 하느님의 나라, 바로 그 나라, 그날을 ‘지금-여기’에서 ‘미리’ 보여주는 존재라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자신의 삶에서 ‘종말론적 의미와 가치’를 증거 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현세에서 미리 보는 ‘하늘나라’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줘야 한다. 대림 시기는 이러한 ‘종말론적 삶’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면서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날’을 세상에 선포한다.
그날이 오면 “늑대가 새끼 양과 함께 살고 표범이 새끼 염소와 함께 지내리라. 송아지가 새끼 사자와 더불어 살쪄가고 어린아이가 그들을 몰고 다니리라.”(이사 11:6)
첫댓글 그날이 오면 아둥바둥거리지
않아도 된다.
달리 살아갈방법은 없는가...
있다. 와웅
너자신이 아닌 복음을 믿어라.
귀 쫑긋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