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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Histoire de la philosophie),
브레이어(Bréhier, 1876—1952)
- 제5권. 18세기, Le XVIIIesiècle273-506
제11장, 18세기 중기(1740-1775) (연속) : 사회의 이론들: 볼떼르
- Deuxième Période (1740-1775) (suite): Les théories de la société: Voltaire 404-413
1절 생애와 작품들 – I. Vie et Oeuvres 404
프랑스와 마리 아루에, 볼테르(Voltaire, 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는 1694년에 중계인인 아버지로부터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파리에서 제수이트들의 학교에 학생이었다. 1726년[서른둘]에서 1729년까지 영국에서 체류[망명]해야만 했다. 그 체류시에 그는 그의 스승이될 로크와 뉴턴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에 대해 보고서로서 철학적 편지(Lettres philosophiques, 1734)를 섰으며, 1734년[마흔] 출판하였으며, 그 뒤에 파스칼에 관한 논평들(Remarques sur Pascal)을 덧붙였다. 철학적 편지가 단죄받아서 그는 파리를 떠나야 했다. 그는 로렌 지방에 있는 시레 성(le château de Cirey: Haute-Marne)에서 샤뜰레 후작부인(marquise du Châtelet, 1706-1749)[마흔셋] 가까이에 있었다. 그는 그녀를 위하여 뉴턴의 철학(Philosophie de Newton, 1738)을 썼다. 나중에는 빠리에서 명예가 절정에 이르러, 그는 역사기록관이자 왕의 일상 신사(gentilhomme ordinaire 평민 귀족)로 지명되었다. 그러고 나서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샤뜰레 후작부인의 사후에[1749], 1750년에 프리드리히 대왕/프레데릭 2세(Frédéric II 1712-1786) 측근으로서 베를린으로 은퇴하였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게 연금과 비서직(chambellan, 시종)을 부여했다. 그 당시 베를린 아카데미의 회장인 모뻬르뛰에 반대하는 그의 공격에 이어서, 프리드리히 대왕과의 불화로 그는 프러시아를 떠나서, 베네딕드파의 스논 수도원에서 몇 달을 보냈다. 그 수도원에서 그는 여러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을 작업하여 1756년[예순둘] 에 나타나게 된다. 제네바 가까이에 있는 델리스(Délices)에서 몇 년을 머문 후에, 1759년[예순다섯] 스위스 국경에 있는 프랑스의 프레네(Ferney: 지역 Auvergne-Rhône-Alpes)에 정착하였다. 거기서 전 유럽과 서신왕래가 이루어졌고, 그는 칼라스(Jean Calas, 1698 -1762, 화형) 법정소송사건, 시르방(Pierre-Paul Sirven, 1709-1777) 소송사건, 랄리(comte de Lally, dit « Lally-Tollendal », 1702-1766) 소송사건을 위하여, 그 유명한 캠페인(campagnes)을 벌였고, 관용론(Traité sur la tolérance, 1763)을 썼다. 그리고 그는 철학사전(1766)이란 이름으로 알려진백과사전에 관한 질문들을 썼다. 1778년[여든넷]에 파리에서 세상을 떴다. 바로 이전에 그의 드라마인 이렌(Irène, 1778)가 첫 상연되었는데, 이 상연에서 그의 흉상이 장면으로 올라왔다. (405)
사람들은 볼테르에게서 학술적 용어의 의미에서 철학적 학설을 발견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로크와 뉴턴에 만족하였다. 그는 이들을 마치 단호한 방식으로 인간 정신의 능력들과 경계석들을 표시하는 것처럼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의 폭넓은 저작에서, 그 저작이 거대한 영향을 미쳤기도 하고 그리고 매우 열광받기도 하면서도 매우 비난받기도 하였는데, 형식과 표면[현상]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어떠한 독창성도 없다는 결과가 나오는가? 볼테르의 저술들의 대부분은 그의 소설들과 많은 비극들을 포함하여, 편견에 반대하는 캠페인이며 새로운 정신을 위한 선전이었다. 그는 철학이 인간 정신을 이끈다는 관점과 대부분의 인간의 사유와 삶의 방식사이에 맹렬한 대조의 감정을 가졌다. 그런데 이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치 허접한 자체 무게(un poids mort, 헛수고)처럼 자신들의 편견들과 자신들의 믿음들을 끌고 간다. [대조에서] 한편으로 인간 정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태어나는 관용이 있으며, 경험에 모두가 서로서로 참조하는 정신들 사이에 일치가 있으며, 예술들과 과학들의 진보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 법률들과 풍습들이 정신의 성향에다가 보태어 놓은 강제적 수단들과 함께하는 불관용이 있으며,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주제들을 관하여 지지하는 개별적인 견해들로부터 오는 특히 끊임없는 불일치와 토론이 있으며, 결국에는 침체가 있다. 철학적 수준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사회적 삶을 산다는 것, 인간의 불행을 만드는 편견들로부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 이것이 볼테르의 야망이다. 그는 이러한 점에서 인간의 내적 변모작용들에 관해서가 아니라, 빛들에 관하여 고려하였다. 인간은 항상 자신의 이기주의와 자신의 정념들과 더불어 동일한 채 남아있다. 존재들의 층계에서 인간의 벗어날 수 없는 하나의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기주의와 정념들을 자신의 무지와 자신의 편견들 때문에 해로울 수 있다. 그러한 것이 “빛들의 세기 철학”에 대한 스승의 본질적인 주제이다. 그의 마치 스승 로크와 마찬가지로 그에 따르면 지성적인 것과 유용한 것 사이에 일종의 조화(l’harmonie)가 있다. 그가 무지한 철학자(Philosophe ignorant, 1776)에서 말하기를 “보편적 사용방식으로 될 수 없는 것, 인간들의 공통적 범위에 속하지 않는 것, 그것은 자기들의 사유를 가장 많이 훈련했던 이들에 의해 이해되는 않는 것, 그것은 인간 류에게 필수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철학자가 그가 거주해온 거리의 풍습들에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철학의 상당부분이 쓰잘 데 없다. (405)
2절 자연의 이론 – II. Théorie de la nature 406.
볼떼르 정신의 깊이[심층]에는, 중심적 감정이 있다. 그것은 사물들의 고정성에 대한 감정이며, 사물들을 변형 불가능성에 대한 감정이다. 그리고 또한 사물들에게 만족할 줄 모르는 인간들의 광기에 대한 감정이다. 그것은 학설이라기보다 산만한 사유인데, 우리는 이제 이것들의 몇몇 표현들을 주목해보자. (406)
“사람들이 나를 자연이라 부르고, 자연에게 말을 건다. 그리고 나는 전체가 기술(je suis tout art)이다.”우주를 시계와 동화시키는 인위주의(l’artificialisme)는 그의 가장 일관성있는 주제들 중의 하나이다. 그는 이로부터 목적인들에 의한 신의 현존에 대해 매우 자주 반복되는 자신의 증거를 끌어낸다. 왜냐하면 이런 기술 작품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볼 수 있는 조합들은 그것을 제작했던 “영원한 기하학자, 신”을 요청한다. 반대로 그는 세계의 우연성에 의해 신의 현존 증거를, 즉 로크와 클라크의 것을 전적으로 내버려 버렸다. 그는 이것을 자신의 형이상학 개론(Traitéde métaphysique)(1734년 작성)에서 주장했다. 그런데 시계의 이미지가 우주에게 일종의 엄밀성을 부여한다는 것에는 이의제기할 수 없다. 그런데 우주는 엄밀성 속에서 만족해한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신은 자연의 신이지, 인류의 신은 아니다. 우리는 신을 말하고자 하는데, 사람들은 신에게 이런 고정성을 보장해 주기를 요구하지, 위험에 처해있지도 않았던 인간을 구원하기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는 신속에서 인간에게 유용한 자연에 대해 현명한 주인만을 보고자 하는 자연 종교의 극한이다. 따라서 볼떼르는 데카르트만큼이나 에피쿠로스에 적대적이며,일반적으로 우주발생론을 마치 자연적 원인들의 연쇄의 결과처럼 탐구했던 모든 이들에게도, 말하자면 세계의 현실적 상태에서 유일하고 특권적 상태를 보지 않았던 이들에게도 적대적이다. 반대로 그는 뉴턴의 물리학에는 열광적이었다. 그의 물리학은 그에게 마음에 들게 하는 많을 것을 가졌는데, 물질의 양에 관한한, 별들과 행성들의 수에 관한 한, 월/일식에 관한 행성들의 축에 경사에 관한한, 이것들의 회전 운동과 이 운동의 속에 관한한 아무것도 포함하지 않았던 기계적인 법칙들과 더불어 그의 마음에 들게 하였다. 왜냐하면 특히 지구 위에 계절들의 분배와 동물과 인간의 삶에 가능성이 의존하는 것은 이런 상황들로부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계적 이유들과는 독립적인, 이 상황들은 신의 전지전능에 의해, 상황들이 생산한 결과들을 위하여, 선택되어야만 했다.이리하여 이것은 칸트와 라플라스 같은 이들에게서 뉴턴의 물리학에서 우주발생론적 새로운 탐구에 의해 채워야할 빈칸(une lacune)일 것이고, 볼테르에게서는 장점이며 결정적이고 영속적인 주장이다. 또한 볼테르는 이에 대해 라이프니츠에게 – 그의 충족이유율과 긔의 상대적인 시간과 공간과 더불어 – 신의, 전적으로 자유로운, 결심들에 여지를 남겨두지 않았기를 원했다. 그런데 이 신은 뉴턴에게서는 시간과 공간의 절대적 성격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407)
세계에 대한 볼테르 통찰의 세부사항에서, 지배하고 있는 것은 동일한 정신이다. 그는 살아있는 종들의 비변질성에 대한 그리고 또한 화학적 종들의 비변질성에 대한 단호한 옹호자이다. 또한 변질화과정(transmutation)은 겉보기 일뿐이다.그는 가끔 의심했는데, 특히 형이상학론(Traitéde métaphysique(1734년 작성)에서, 인간 종은 하나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인간 종족들은 실재적으로 여러 종들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유일한 종 가운데서 그러한 중요성에 대해 점진적인 세분화(différenciation)가 있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데 특히 어려움에 처했다. 그는 니댐(John Turberville Needham, 1713-1781)처럼 자연발생설(génération spontanée)을 증거하려고 탐구했던 자들을 줄곧 야유했다. (407)
볼테르는 전지구적인 물리학적 진화들에 대한 이론의 주제에서 회의적 태도는 지녔다. 그 이론은 특히 산악에서 발견된 바다생물의 화석에 관해서도, 또한 지축들의 이전에 관한 [프랑스 천문학자인] 루빌(Louville, 1671-1732)의 탐구에 관해서도 지지를 받았던 것이다. 게다가 볼테르는 [노아 시대] 대홍수를 증거 하고자 하는 그러한 이론들을 의문시하였고, 그리고 그는 그것들의 흔들리지 않는 종말론, 산맥의 아름다운 질서, 마치 생명수가 나오는 “고산의 수로들”과 같은 것처럼 동물들의 삶에 필수불가결한 산맥의 역할을 반대했다. (407)
그를 다음과 같은 믿음에로 이끈 것은 데카르트의 정신에 근본적으로 반대되는 정신이다. 그 믿음은, 우리에게 우리의 감관을 부여한 물질의 수많은 매우 작은 성질들로부터 출발하는 자연학/물리학의 역할은 추론에 의해 새로운 속성들, 즉 인력과 중력과 같은 속성들을, 발견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썼다. “내가 거기에 대해, 즉 뉴턴의 비의적 성질을 재도입했다고 고발했던 자들에 반대하여 반성하면 할수록, 나는 사람들이 새로운 원리를, 물질 속에서 새로운 성질을, 인정하기를 두려워 한다는 것에 더욱더 놀란다. 물질은 성질들을 아마도 무한히 갖는다. 아무 것도 그 다른 것[물질] 속에 서로 닮을 수 없다.”그리고 이런 관점을 양보하기보다 그는 “모든 것은 비의저 성질이다”라고 말하기를 선호했다. 이것은 여전하게도 고정되고 변질하지 않는 본질들을 다양화하려는 동일한 경향성이다. (408)
3절 인간과 역사 – III. L’homme et l’histoire
이 동일한 고정주의는 그가 인간에 대해 이루고자 하는 관념 속에서 재발견된다. 이 완전한 작가는 양태들에서 예를 들어 낯선 영향들에서 유래하는 피상적 변화들만을 감당할 뿐인 입말들의 거의 완전한 고정성을 믿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가 스타일의 순수성으로부터 어떤 정확하고 엄밀한 관념을 이루고자하는지를 안다. 만일 입말 그 자체가 고정되어있다면, 인간 정신의 다른 속성들이 얼마나 더 많이 고정되어 있는가. 우리가 생각해본다면, 크리스트교에 반대하는 볼떼르의 깊은 적대성의 중요한 원인이 거기에 있다. 크리스트교는 마치 빠스칼과 말브랑쉬에게서처럼 아우구스티누스와 보쉬에에게서 인간의 역사를 구축한다. 인간의 죄와 속죄는 전적으로 인간 자신과 더불어 그의 역량과 그의 행복의 조건들을 변형하게 하는 비판적 사건들이다. 크리스트교의 삶은 이런 종류의 변질화과정(transmutation)을 기다리고 원하고 준비하는데 있다. 그런데 볼떼르가 그의 크리스트교 의 공격에서 겨냥하는 첫째 반대는 빠스깔,말하자면 원죄 이후에 인간의 불행한 조건을 매우 검은 특징들로 묘사했던 빠스깔이다. 이 “탁월한 인간혐오”의 빵세(Pensées)속에서 그의 미묘한 기질, 그의 슬픈 상상력, 나쁜 정치체제가 반영되어 있다. 실재로 인간은 수수께끼가 아니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 행동하기 위해 정념들과 스스로를 통치하기 위해 이법을 갖추었다면, 동물들보다 상위로서 아마도 다른 존재들[천사들]에 하위로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빠스깔이이 주목한 소위 말하는 모순들은 그에게서는 필연적인 성분들이며, 그는 그 모순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타락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기심(amour-propre)은 사회들의 조건이다. 미래에 대한 선입관[몰두], 행동하려는 일관된 욕망, 비행동의 얽매인 지루함은 그만큼이나 선행을 행하는 선물들이며, 아니, 마치 빠스깔이 말하듯이 비참들이다. 우리 행동의 일관성 없음은 몽테뉴에 의해 종종 묘사되었듯이 인간적인 자연의 특징이다. 그러나 거기서 어떤 권리로 인간 안에서 이중적 자연의 표시(le signe)를 보아야만 하는가? (408)
빠스깔 사유들에 관한 논평들(Remarques sur les pensées de M. Pascal)에 의해서, 볼테르는 그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울 수 있었던 크리스트교의 변신론적인 종류를 내버렸다. 이런 종류의 변신론을 우리가 19세기 사상 속에서 다시 태어남을 볼 것이고, 이런 종류의 변신론은 크리스트교 신앙을 마치 인간 자연의 필수불가결한 요청처럼 생각한다. 이런 종류의 변신론을 동반하는 불안하고 불안정한 감정은 비변질적이고 인간적인 자연에 대한 볼떼르적인 감정에 더 많은 반감을 일으키는 것이었다. (409)
논평들이 빠스깔을 반대하였던 것처럼, 여러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시론(Essai sur les mœurs et l'esprit des nations, 1759)은 보쉬에의 보편사(Histoire universelle)과 아우구스티누스의 신국론(De civitate dei)에 대한 완전한 반감으로부터 형성되었다. 보쉬에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는 역사의 통일성, 현재와 과거의 연대성, 사건들을 관통하여 흐르는 동일한 신적 구도가 중요했다. 반대로 볼떼르는 역사 속에서 인간 정념들의 끊임없이 다시 새로워진 놀이만을 보고자 원했다. 그가 여러 나라들의 풍습과 정신에 관한 시론(1759)에 관하여 다르쟝딸(d'Argental, 1700-1788)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행이도 내가 말하지 않았던, 대략 12 전투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인간 정신의 역사를 썼지, 소문을 쓴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광대한 탐문에서 샤를마뉴(Charlemagne, 740-814)통치 이래로 루이 14세(Louis XIV, 1638-1715)까지 그의 목적을 끌고 갔으며, 그것은 역사적 사건들이 아니라 풍습들이며, 개인들이 아니라 상업, 재정, 과학들, 예술들을 포함하는 시대의 정신이다. 시대들의 각각은 과거와 연대 없이 거의 따로 떨어진 전체를 형성하고 있다. 볼떼르에게서 역사는 현재를 짓누르는 과거의 무게를 막는데 관심을 쏟고 있는 것 같다. “과거 시간들은 마치 시간들이 결코 있지 않았던 것 같다. 항상 사람들이 현재 있는점에서 그리고 국가들이 도래한 점에서 출발해야 한다.”우리가 고대인들을 계승할 수 있다고 믿지 말자. 그가 말하기를 “유대인들에 대해 말하면서 고대 세계 전체는 우리들의 세계와 매우 달라서, 사람들은 오늘날 품행의 어떠한 규칙도 끌어낼 수 없다.”그는 또한 그의 한 기자에게 보내는 충고들(Conseils à un journaliste, 1937)에서 “옛 사람들에게서는 호기심일 뿐인 것보다, 우리에게 필수적인 최근 시대의 역사에 더 많은 취향을 느끼는 젊은이에게 영감을 주십시오… 나는, 당신이 역사의 연구를 신중하게 시작하기를 특히 원하리라. 말하자면 샤를 깽트(Charles Quint, 1500-1558), 레온 10세(Léon X, 1475-1521), 프랑수아 1세(François Ier, 1494-1547)의 바로 앞서 진행한 역사를 말이다. 거기에서 마치 우리의 세계 속에서처럼 인간 정신 속에서 모두 변화했던 혁명이 이루어진 것이다.” (410)
또한 가끔은 그가 이런 새로운 시기의 시작을 보다 더 가까이 보고하였다. 그가 1765년에 그가 쓰기를, 유럽은 상비군들과 선량한 경찰에 의해 강화된 유럽의 정부들과 더불어, 그리고 풍습들의 완화와 함께 열광주의에 반대한 철학의 진보와 더불어, 근 50년 간 전면적으로 변했다 (410)
시간에서 불연속성에다가 공간에서 불연속이 결합되었다. 보편사속에서 크리스트의 성질과 다른 것이 현존하고 있고, 그러한 것을 준비하는 것이 현존한다. 아시아의 나라들 또는 아메리카의 나라들은 서양의 문명과 서로 나란히 하는 그들 나름의 독립적인 문명을 가졌다. 그리고 볼떼르는 보편사 속에서 이에 대해 또한 길게 말하는 첫째 철학자이다. (410)
새로운 불연속성이 있다. 동일한 시기에 이중 역사가 있다. [하나는] 공식적인 역사이며 자료들 속에서 첫째 지위로 나타나며,시민역사와 교회역사도 있으며 여기에서 사람들은 정념들과 복수들, 이익들에 완전히 매몰한 인간을 본다. [다른하나는] 덜 소란스럽고 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 역사가 있다. 수레, 배, 톱과 같은 인간에게 유용한 발명들의 역사이다. 그런데 발명의 정신은 매 시기마다 있었고, 공시적이고 무지한 박사들에 마주하여 “모호한 인간들, 예술가들이 있다. 이들은 찬탄할만한 사물들을 발명하는 우월한 본능으로 활동하는 인물들이다. 이런 발명된 사물에 관해 과학자들이 이어서 추론한다.”그것은 철학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들에게 있는 기계적인 본능이다.”이 인간들이 발명들을 생산했다. 그리고 볼떼르에 따르면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에서 기계들의 탁월한 사용법은 그들의 신앙들의 부조리와 대조를 이른다. (410)
이러한 관점들은 몽테스키외에 반대하여 원리에 대한 커다란 적대성을 가정하고 있다. 볼떼르는 몽테스키외에게 그의 방법의 결함에 관한 기술적 성격에 대해, 즉 “거의 모든 인용들”의 거짓에 대해 많은 비난을 했다. 그러나 그는 특히 종교들, 과학들, 예술들에 관한 기후[풍토]의 영향과 같은 소위 말하는 필수적 연관들의 가치를 부정했다. 종교의 확립에서는 자연적 필연성이라기보다 오히려 “우연들(hasards)”이 있다.볼떼르는, 몽테스키외가 프랑스에서 자유 군주제 이론을 기초하기 위한 세대들 간의 역사적 연대에 대해서는 많은 취향[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유주의자(un libéral)가 아니다. 그의 적들이란, 왕정에 대한 전통적 적들, 너무 과도한 권력을 갖는 성직자, 매관매직 제도에 기초한 행정부 등이다. 증가되는 권위를 가지고 빛의 시대의 철학에 영감을 받는 왕[군주] 만이 관용과 정의를 퍼트릴 수 있을 것이다. 빛의 시대의 전제주의(전제정), 즉 삐에르 르 그랑(Pierre le Grand, 1672-1725), 프레데릭 2세(Frédéric II de Prusse, 1712-1786), 카트린 1세Catherine Ire, russ. Екатерина I, 1684-1727)의 전제정이 있고, 그리고 중국의 황제에게 맞는 전제정은 사대부들[고급관리들]의 조언들에서만 결정된다. 이 사대부들은 이들의 학문과 이들의 능력에 따라서 선출되었다. 이러한 것은 볼떼르의 정치적 이상이었다.예술들, 과학들, 관용의 증가는 인류의 연속적이고 자발적인 발전의 결과가 아니라, 오히려 위대한 체제의 결과이며 선한 정부의 결과이다/
이리하여 볼떼르는 [역사를] 고정되고 안정된 부분들(en parcelles)로 분해하고 해체하였다. 역사는 인간적 의지들과 정념들이 그에게 부여한 것들과는 - 의지들과 정념들이 이법에 의해 다소 빛을 받게 됨에 따라서 - 다른 의미와 다른 방향을 가졌다. 감춰진 다른 실재성들은 없다.이것들은 실재성들을 인식하지 않고서 실재성들의 구도를 집해했을 것이다. (411)
자연과 인간에 대한 그의 개념작업에서, 볼떼르는 하나의 귀결과 주목할 만한 엄격함을 제시했다. 그는 사물들에 대한 하나의 통찰(une vision)을 가졌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우리는 단순화되어 있으면서도 간결하게 되어 있는, 일종의 딱딱한 경험론 또는 실재론을 말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 경험론과 실재론은 단호한 실재성이 없는, 즉 현실적으로 주어지고 현재 있지 않은, 모든 것을 공상물들(chimèeres, 괴물들)로 취급한다. 또한 이것들은 현재 속에서, 광대한 역사의 찰나가 아니라 오히려 안정되고 고정되고 사물들이 혼성되어 있는 요소들을 보기를 원한다. 거기에 18세기의, 즉 정태적 세기의 모든 사상가들의 공통적 특성들이 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사상가들은 특별한 정확성을 가지고 스스로를 드러냈다. (411)
4절 관용 – La tolérance
이들 사상가들을 통해서 사람들은 볼테르의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선전 활동들의 의미를 잡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활동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안다: 볼테르에게서 비관용이란 크리스트교의 고유한 사실이라는 것이다.동방의 나라들고, 로마인들도, 그리스 인들도, 심지어 유대인들도, 그에 따르면 종교적 비관용을 알지 못했다. 그것에 대한 이유는, 크리스트교가 시대적인 만큼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잘 지배하고자 원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정신적인 면의 정치적 우선성은 교황들의 중요한 주장이다. 그런데, “사회의 신체적이고 도덕적인 선”만을 생각함에 있어서, 사람들은 이런 주장이 인간과 시님에게는 연속적인 굴레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관용은 강한 정부의 조건이다. 이런 정부 없다면, 우리가 이미 보았듯이, 볼떼르는 가능한 진보를 생각하지 못한다.그리고 세금을 내지도 않 성직자와 더불어, 왕실 법정들 중에서 로마 교황청으로 보내진 많은 업무들을 추출해내는 성직자들과 더불어 함께하는 데는 강한 정부가 없다. 종교는 수도원들을 가지고 있어서, 나라에서 많은 활동하는 시민들을 뽑아내어, 그리고 독단[교리]에 관하여 거슬리고 이해할 수 없는 종교 논쟁들에서 국가의 편이 되고자 원한다. 게 하고자 한다. [종교에서] 가능한 경제적 생활은 더 이상 없다.볼떼르가, 영국에서 카톨릭 신자들이 누리는 권리들 만큼이나 적어도 프랑스로 되돌아갈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을 위하여 권리들을 요구한 것은, 특히 경제적 이익들을 생각하면서이다. 게다가 비관용에 반대하는 투쟁은 그 시대를 특징지우는 대규모 상업의 발전에 연결되어 있다. 그가 아이러니하게 쓰기를, “당신은 사람들이 해양의 위험들 속에서 행한 이익들을 유죄라고 한다… 당신은 이 상업을 폭리(usure)라고 부른다. 카딕스(Cadix)에서 그의 신하들이 상업 활동을 하는 것을 왕이 당신에게 못하게 하는 것이 새로운 강요이다. 자원이 없이 이미 기나긴 벌을 받고 있었던 영국인과 홀란드인들에게는 사탄의 작업으로 내버려 두어야 한다.”만일 종교가 모든 도덕론의 토대를 부정하는 데까지 간다면, 결국 가능한 도덕론은 없으며, 교황[클레멘스 11세]의 우니제니투스 칙서(La bulle Unigenitus)의 사건에서,다음 명제를 단죄함으로서 이다. 즉 교회 파문의 두려움이 자기 의무를 행하는 것을 막지 않아야만 한다.따라서 사람들은 소란스런 모든 사고들에서 볼떼르의 태도에서 깊이 있고 신중한 것을 본다. 그의 태도에는 인간의 자연[본성] 자체에 의하여 인간에게 제안되었던 목적들로부터 독립적인 생각이 있다. 이런 인간의 자연에 반대하는 어떠한 종교도 우월한 가치를 지닐 수 없다. (412) (8:03, 57O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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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ibliographie 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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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Bersot(1816-1880), La philosophie de Voltaire aux XVIIIe siècle, 8 vol., 1867-1876.
G. Lanson(1857-1934), Voltaire, Paris,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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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 Brandes(1842-1927), Voltaire, trad. allemande, Berlin,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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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Delbos(1862-1916), La philosophie française, 1919, p. 153-168.
J.-R. Carré(1887–1963), Consistance de Voltaire le philosophe, 1938; Réflexion sur l’Anti-Pascal de Voltaire,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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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ur ce chapitre et les suivants;
Pierre Janet(1859-1947), Histoire de la science politique, 2 vol., 3e éd., Paris, 1883. [착오, 쟈네(Paul Alexandre René Janet, 1823-1899)이다.]
J. S. Spink(1909–1985), French free thought, from Gassandi to Voltaire, Londres, 1960.
J. Touchard(1918-1971), Histoire des idees politiques, t. II, Paris, 1989, 2e éd., 1962 . (57OL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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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4 볼테르 (Voltaire, François-Marie Arouet, 1694-1778), 프랑스 작가, 시인, 드라마작가, 철학자. 백과전서파. 빛의 세기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인물이었다.
1816 베르소(Ernest Bersot, Pierre-Aimé Bersot, 1816-1880) 프랑스 도덕철학자, 기자.
1823 뽈 쟈네(Paul Alexandre René Janet, 1823-1899) 프랑스 철학자, 소르본 교수 Histoire de la science politique dans ses rapports avec la morale [archive] (seconde partie [archive]) (deux volumes, 1872)
1828 세게(Émile Saigey, 1828-1872), 프랑스 작가. Les Sciences au XVIIIe siècle (1873)
1842 브란데스(Georg Morris Cohen Brandes, 1842-1927), 덴마크 작가, 문학 비평가.
1852 뻴리시에(Georges Pellissier, 1852-1918) 프랑스 작가, 문학박사, 프랑스 문학 전문가.
1857 랑송(Achille Alexandre Gustave Marie Lanson, 1857-1934) 프랑스 문학사가, 문학비평가.
[1859 쟈네(Pierre Marie Félix Janet, 1859-1947) 프랑스 철학자, 심리학자, 의사. 1889년 샤르꼬(Jean-Martin Charcot)를 이어 살페트리에르(le laboratoire de psychologie de la Salpêtrière)의 소장이 되었다.]
1862 델보(Victor Delbos, 1862-1916), 프랑스 철학자, 역사가.
1887 까레(Jean-Raoul Carré, 1887–1963), 프랑스 철학자, 쁘와띠에 철학 교수.
1902 나브(Raymond Naves, 1902-1944) 프랑스 대학교수, 사회주의 운동가, 아우슈피츠에서 몰한 레지스탕스.
1909 스핑크(John Stephenson Spink, 1909–1985), 영국 대학교수,
1918 뚜샤르(Jean Touchard, 1918-1971) 프랑스 정치학자, 역사가. (57OLF)
(9:08, 57OM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