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인박해 시절 무명 순교자들의 묘
한 무덤에 여러 사람을 함께 묻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줄묘라고도 부른다.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천주교들을 탄압할 때 홍주감옥에서 순교한 교도들이 매장되어 있다.
총 37기가 있으며, 주로 가족 단위로 매장되어 있다.
주위에 없어진 10개의 인가 흔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주교 탄압 때 마을 전체가 화를 당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곳에 복음이 전파된 것은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 직후로 추정된다.
최양업 신부의 증조부인 최한일(崔漢馹)이 내포의 사도라 불리던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죽고 곧이어 박해가 일어났다.
그러자, 증조모인 경주이씨(慶州李氏)가 외아들 최인주(崔仁柱, 최양업 신부의 조부)를 데리고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이주하였다. 그러나 청양 지역에는 이미 그 이전에 복음이 전파되어 있었으므로, 신해박해 때에는
홍주(洪州)의 박취득(朴取得, 라우렌티우스)과 원베드로, 청양의 황바오로 등이 체포되기도 하였다.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장성한 뒤 이곳으로부터 오른쪽으로 약 700m 되는 골짜기로 이주하였다. 그뒤 신자들이 모여들면서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고,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라는 뜻에서 ‘새터[新垈]’로 명명되었다. 최양업 신부와 그의 아버지인 최경환(崔京煥, 프란체스코)은 바로 이곳에서 태어나 1830년대 초에 경기 안양의 수리산(修理山)으로 이주하였다. 그뒤에도 다락골의 신자들은 여러 차례 박해를 피해오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와 1868년 무진박해(戊辰迫害) 때 체포되었거나 피신하였다. 현재 이곳의 뒷산에 있는 30여 기의 줄무덤은 이때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병인박해 때 홍주나 공주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설과 해미나 보령(保寧) 갈매못에서 순교한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 당시 최양업 신부의 집안에서 이 줄무덤을 만들었는데, | |
박해가 두려워 천주교 신자들의 무덤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던 중 관아에서 이 사실을 알고는
마을을 불살라 신자들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고도 한다. 그후 대전교구와 청양성당에서 이곳의 줄무덤을 조사하여 그중 14기가 순교자의 무덤인 것을 밝혀냈다. 1982년 이곳에 무명 순교자비를 건립하고 사적지로 조성하였다. |
내포지방에 대한 박해의 손길은 이곳 다락골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포졸들이 포악하게 교우들을 잡아갈 때 어린 아이들이 무서워 울음을 터뜨리니 엄마가 "얘야, 지금 죽어야
천당간다."라고 달래어 함께 천당으로 데리고 갔다 합니다.
그 당시에 감영은 홍주, 그러니까 지금의 홍성에 있었습니다. |
866년 대원군에 의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치명자들의 묘소로 추정되는 37여기 묘가 이곳 다락골에서
줄무덤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묘들의 주인공들이 누구인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홍주와 공주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설과 해미나 갈매못에서 순교한 교우들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습니다.
다만 최양업 집안에서 이들의 유해를 순교지로부터 야음을 타 급히 옮겨다가 이 마을 뒷산인 이곳에
매장하였다는 증언을 이 마을 노인들이 전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님 집안들은 박해가 닥칠까봐 이 무덤이 신자들의 것이라는 사실을 숨기고 있었으나
몇 년 뒤 이 사실을 안 조정에서 이 마을을 불살랐고, 교우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오기선 요셉 신부님은 당신의 회고록인 '곡예사 같은 인생'에서 줄무덤에 대하여 두가지 증언을 하고 계십니다.
하나는 1952년 당시 청양 사람들을 통해 조사한 내용인데 박해를 목격하였던 최영천 노인을 직접 만나 증언을
들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1964년에 오 신부님은 이곳을 현지 답사하여 순교자들의 집터와 줄무덤 17기를
확인하셨습니다. 또 하나의 증언은 1920년대에 공주에 사시던 송 아오스딩 노인께서 "청양 고개너머에 숱한
치명자들의 묘가 있느니라."하시며 공주 감옥 뒤 황새바위에서 250여명의 교우가 치명당하셨는데 그 시체를
밤중 암암철야에 이곳 청양 산너머 외딴 비탈에 매장하느라 두 발가락이 다 문드러졌다고
오기선 신부님께서는 증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곳 줄무덤 안의 주인공들은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분들이다.
청양 성당에서는 이곳에 무명순교자 묘비를 세우고 1982년 11월 23일 묘비 제막식을 가졌다.
1986년 2월 16일 줄무덤에서 150년 된 십자고상과 묵주 1점이 출토되었다.
이로써 구전으로만 전해진 이곳 줄무덤이 순교자 1986년 3월 11일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의 성해 일부를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서 모셔왔다. 순교 후 147년 만에 고향에 환향하신 것이다.
가. 줄무덤 기수: 줄 묘는 3단으로 되어 있으며 하단 5기, 중단 8기, 상단 1기 총 14기로 되어 있다.
오 신부님은 17기라 하였는데 최상단에 묘를 새로 쓴 것으로 보아 최소한 3기는 파묘된 것으로 추정되며
그를 뒷받침할 만한 봉분 흔적이 있다. 신자들이 아닌 관계로 돌보는 이 없는 무덤이라 파묘해 내려오던
참이었다고 최충기씨는 말한다.
나. 현주소: 줄무덤이 위치한 곳은 정확히는 화성면 화강리 산 63-1번지이다.
다. 소유자: 崔忠基 외 3인 外 3인으로 등기가 되어있다. 지난 1984년 9월 최씨들로부터 무기한
사용승락서를 받아냈으며 소유자 명단이 나와 있다.
라. 토지사용승락서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토지사용승락서를 받아내서 한 부는 최충기씨가 소지하고 일부는 대전교구청에서
보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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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역화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방윤석 베르나르도 신부님 에 의해 이 마을의 구전과 사료를 수집하여 현지 답사를 계속한 끝에 1981년에 줄무덤이 한 군데가 아니고 세 군데임을 밝혀냈으며, 편의상 제 1,2,3 줄무덤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제1줄무덤은 14기로서 세 단계로 모셔져 있습니다. 오기선 신부님의 증언에는 17라는 하셨으나 지금은 14기가 있는데 비신자인 최씨들이 임자없는 무덤이라 하여 이장하는 바람에 아깝게도 3기가 파묘 유실되었습니다. 제 1줄무덤 서남쪽으로 밑으로 20m 쯤 떨어진 지점에 0기의 제2줄무덤이 있습니다. 제3줄무덤은 제1줄무덤에서 100m 떨어진 능선 너머에 위치해 있는데 13기가 있습니다. 이렇게 이곳에 있는 무명 순교자의 무덤 수는 모두 37기가 됩니다.
그러나 각 무덤에 몇 구의 유해가 들어있는지 확인되지 않았지만 개발당시에 무덤들이 100년이 넘었고 흙을 쌓지도 않았는데 유난히 봉분이 큰 것으로 보아 한 무덤 안에 여러 유해가 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1982년 대전교구에서는 이들 무명순교자들을 위한 묘비를 세워 기념하고 있습니다. |
줄무덤에 순교자들의 묘가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구전(口傳)에 의해 것이다.
1줄무덤에는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순교자들이 묻혔고,
2줄무덤에는 화숙공파가 아닌 다른 최씨들,
3줄무덤에는 다른 성씨의 순교자들이 묻혔다고도 하는데 이 또한 구전이다.
구전이라 하여 모두 신빙성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락골 교우촌의 특성과 위에 제시한 간접 자료들을
참조할 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간 전해진 구전이나 직·간접 자료들을 종합하여 연구한 적이
없으므로 학문적인 차원의 재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 |
[청양 다락골 줄무덤 성지 홈페이지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