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클죠의 바티칸 산책 52(끝), 교황님께 큰절을 드렸습니다.
<바티칸 3년, ‘광이불요(光而不曜)’를 보고 왔습니다>
실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제가 언제 다시 바티칸 사도궁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만날 수 있겠는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요! 작별 알현(면담)을 할 때 결례가 좀 되더라도 무리를 할까, 아니면 점잖게 덕담만 나누고 나올까.
임기(3년)가 다 되어 귀국을 준비하면서 바티칸 비서실에 교황님 알현을 신청할 때만 해도 코로나19 상황에서 과연 알현 기회가 주어질지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연락이 왔습니다. 10월 23일 금요일 12시! 알현 날짜와 시간을 통보받고 나서, 결단을 내렸습니다. 무리 좀 하자! 친필 메시지 두 장을 받자! 하나는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내용으로, 다른 하나는 김대건 신부 탄생 200주년을 축하하는 내용으로! 어떤 외교관도 교황님에게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무리’라고 표현했습니다. 한국은 여러 가지 면에서 교황님의 기도가 절실히 필요한 때입니다. 기도의 공감대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친필 메시지가 꼭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D 데이, H 아우어! 저희 부부는 일찌감치 사도궁에 도착했습니다. 익숙한 얼굴의 로드리코 몬시뇰(사도궁 부속실장)이 반갑게 인사하며, 저희 부부를 교황님 서재로 안내해 주었습니다. 교황님이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저희 부부에게 “어서 오라.”고 반겨주시더군요. 저는 저의 근황을 간략하게 설명드린 후 본론(?)으로 들어갔습니다. 아! 어찌된 일입니까. 저의 걱정은 완전 기우였습니다. 교황님은 저의 ‘무리한 민원’을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흔쾌히 받아 주셨습니다. 감동이 북받쳐 올라왔습니다. 주케토(교황이 머리에 쓰는 하얀 모자)를 선물로 드리자, 받아들고 한참 보시더니 썼다 벗었다를 두 번 반복하신 다음, 다시 저에게 선물로 주시었습니다. 주케토 안에 당신의 이름을 적어서!
교황님, 교황님, 우리 교황님! 저는 알현을 마치고 교황님 서재에서 나오면서 교황님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하나 했습니다. “교황님께 한국식 전통 예절로 작별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한국에서는 부모님이나 스승 등 어른과 헤어질 때 큰절을 드립니다. 저의 큰절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교황님이 순간 당황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이탈리아어 통역을 맡았던 한현택 신부(인류복음화성)가 한국의 예절을 자세히 설명해 주자, 의자에 앉아 저의 큰절을 받으셨습니다. 교황님은 베드로 사도의 후계자이고 예수님의 지상 대리인이십니다. 저는 한국 정부를 대표하는 대사로서, 그리고 평범한 가톨릭 신자로서, 최고 존경의 표시로 교황님께 큰절을 올린 것입니다. 교황님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기도 많이 해주시라고! 코로나19 상황에서 볼키스나 허그는 물론이고 악수도 할 수 없고, 그렇다고 주먹 부딪치기나 팔꿈치 부딪치기를 하는 것은 너무 경박스럽고…. 큰절로 저의 마음을 전달했습니다. 사실 거리두기를 하면서 할 수 있는 최고의 인사는 한국식 큰절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큰절을 받은 후 교황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귓전에 남아 있습니다. “대사님의 마음을 충분히 알았습니다. 한국 사람들의 따뜻한 정이 느껴졌습니다.”
교황님이 저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생각하면 큰절을 백번 천번 해도 부족합니다. 교황님은 한국에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고, 위로를 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판문점선언 2주년, 제주4.3사건 70주년, 5.18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밀양 대화재 사건 …. 특히 2018년 10월 사도궁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만났을 때에는 “북한에서 공식 초청장이 올 경우, 나는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사실상 방북요청을 수락해 주셨습니다. 교황님은 이날도 저에게 “문 대통령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유효하다.”고 강조하시더군요.
문 대통령의 신임장을 들고 로마행 비행기에 탑승한 2018년 1월 14일은 주일이었습니다. 그날의 복음 말씀이 로마 생활 3년 내내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와서 보아라!”(요한 1,39). 로마에 와서 뭘 보라는 것일까. 임기가 끝날 즈음에야 그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진면목을 가까이서 보고 가라는 의미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노자 도덕경의 광이불요(光而不曜)! 밝게 빛나지만 그 빛으로 남의 눈을 어지럽게 하지 않는 덕목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