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대하여
염정임
어린 시절에는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그리움이었다.
어디로 가는 모르게 끝없이 이어진 하얀 신작로, 밤바다에 오색 불빛을 드리우며 떠 있던 군함, 기차역을 떠나며 울리는 기적 소리……
소년 잡지에 실리던 어린 문사들의 빛나는 이름들. 방학 때면 만나던 이종사촌 언니와는 이별할 때마다 뱃머리에서 눈물을 흘리며 안타까워했다. 청춘 시절에는 멀리 있는 이성을 그리워하며, 그의 눈길이 닿을 강물과 그가 오고 갈 길까지 그리움의 대상이었던 것을.
먼 나라의 오래된 사원들과 언덕, 그리고 돌기둥만 남아 있는 폐허들을 얼마나 동경하며 그리워했던가. 그런데 요즈음의 나에게는 이다지도 그리운 것이 없단 말인가.
물기 어린 애틋한 감성의 마음 밭에 미세하게 일어나는 떨림을 느낀 게 까마득한 옛날인 것 같다. 하루하루 식구들의 안위와 건강을 위해, 그것만이 삶의 목적인 듯 식단을 짜고 시장 보기를 열심히 하다 보니 자신이 기계처럼 느껴진다. 은행의 이자율을 비교하고, 건강과 미용정보에 촉각을 세우고, 백화점의 바겐세일을 찾아다니는 도시적 삶이 나로부터 물기 어린 그리움의 세계를 빼앗아 간 것일까.
그날은 음력 섣달그믐이라, 길에는 설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었다. 선물 꾸러미를 들고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로 기차역은 혼잡을 이루고 있다고 뉴스는 시간마다 보도하고 있다.
고향을 찾는 마음은 어떤 것일까. 얼마나 가슴 설레며 보고 싶은 얼굴을 그려보며 만날 날을 기다릴까. 깜깜한 고속도로에 끝없이 이어질 자동차의 행렬들, 그 안에서 아이들은 잠에 골아 떨어지고, 젊은 부부는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며 귀향이 주는 포근함에 젖을 것이다.
고향을 떠난 지 수 십 년이 흘렀고, 고향에 찾아갈 사람이 남아있지 않는 나는 그들이 지니고 있을 생생한 그리움이 부럽다. 나는 할 수 만 있다면 그들의 그리움을 빼앗아 내 것으로 하고 싶은 시새움마저 느낀다.
저녁 무렵, 복사할 원고가 있어 아파트 상가에 있는 문방구를 찾았다. 복사를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무료하여 건너편 책방에서 책을 보기로 했다.
쌓여있는 월간 잡지들 중 한 권을 들고 책장을 넘기는데, 어느 만화가가 고향 이야기를 쓴 글이 눈에 들어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 글을 한 줄 한 줄 읽어가고 있었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내가 살던 동네 이름들이 다 나와 있었다. 한국동란이 끝난 직후의 살벌하고 궁핍하던 풍경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빗물이 줄줄 새던 가교사. 구두닦이 아이들, 허름한 판자집들. 특히 그곳에는 시장 근방 이야기가 자세히 그려져 있었다.
나는 가슴이 조금씩 설레고 있었다. 어린 시절 학교에 갈려면 언제나 시장 거리를 거쳐서 가게 되어 있었다. 그곳에는 좀줘 라는 미친 여자가 있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불쑥 손을 내밀고 좀줘, 좀줘, 하며 구걸을 했다. 까치집 같은 머리에 누더기를 걸치고, 입에는 무언가를 질겅질겅 씹으며 시장 바닥을 누비던 그녀의 모습은 지금도 선명하게 나의 뇌리에 박혀 있다. 장난꾸러기 사내애들은 좀줘만 보면 돌팔매질을 했다. 고향을 생갈할 때마다 오래된 상처의 흔적처럼 그녀의 얼굴은 기억의 저편으로 떠오르곤 한다. 그녀 가까이 가는 것은 무섭고 싫었지만 언젠가부터 그녀가 보이지 않았을 때 나는 그녀의 행방이 무척이나 궁금했다.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어딘지 일그러지고 어두운 모습을 한 존재들이 더 뚜렷이 기억됨은 이상한 일이다. 고향이 마산이라는 사람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녀를 알고 있는가 묻고 싶었다. 혹시 글쓴이가 좀줘를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나를 조바심 나게 했다. 나는 계속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좀줘 라는 글자가 내 망막에 들어왔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있는가 하면, 공유하고 싶은 추억이 있기 마련이다. 그녀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가슴이 벅차오름을 느꼈다. 그것은 반가움이란 말로 간단히 말해 버릴 수 없는 그 무엇이다. 마치 오랫동안 외롭게 어떤 신념을 지녀 온 사람이 마침내 한 동조자를 만난 것 같다고나 할까.
그러나 글을 읽어 가면서 내 마음은 슬픔으로 싸늘하게 식어 갔다.
좀줘는 어느 날 밤 부랑배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점점 불러오는 배를 감싸 안고 여전히 시장 거리를 헤매었다는 것이다. 몇 달 후 겨울 날 그녀는 몸을 풀다가 하혈이 심해서 죽고 말았다고 한다. 그 작가는 좀줘를 자신의 만화 주인공으로 삼은 적도 있다고 했다. 나는 갑자기 온 몸에서 힘이 다 빠져 나가는 것 같았다. 차라리 그 책을 읽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그녀가 미망에서 벗어나 행복의 양지에서 노닐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내 유년의 골목길에 희미하게 깜빡이던 추억의 등불 하나가 슬프게 꺼져가고 있는 것 같았다.
바깥은 어느덧 어두워져서 붉고 푸른 네온 등들이 명멸하고 있다.
섣달의 차가운 바람 속에 내 두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멀리 멀리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고향의 기억을 붙잡기라도 할 듯이 나의 오열은 쉽게 멈추지 않는다.
그때 내 마음의 바다에 떠올라 파도처럼 넘실대던 그것이 바로 그리움이었을까.
첫댓글 "그때 내 마음의 바다에 떠올라 파도처럼 넘실 대던 그것"은 살려고 몸부림치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연민이자 진짜 사랑인 것을 그래서 가슴 아픈 애련으로 남는 것을
"좀 줘"에게 가짜 사랑을 준 그 놈이 누군지 정말 궁금하다. 인간이란 동물은 과연 무엇인가?
염정임이란 작가에 대해서 기대하는 바가 큽니다.
이런 감성은 1도 없는 인간이 글판에서 서성이고 있어요. ㅠㅠ
그리운 것이 뭐가 있을까 생각다가 그리움은 오직 아버지 밖에 없는 사람이라
이런 작품을 읽을 때면 부러움이 일어요
별 그리움을 갖고 싶어집니다.
그녀 얘기를 읽다보니
6 . 25이후 나라사정이 어려웠던 시기 유독 거리를 헤메던 여인의 얘기가 많습니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고 기거할 곳조차 마땅치 않았을 처지라면
얼마나 무섭고 힘든 세상을 살았을까 싶네요 보호해줄 어떤 장치도 없었을테니까요
금달래를 보셨나요 등교길에 가끔 만났던 그녀 우리는 우루루 도망치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초등때 전교생이 사천오백명? 상상이 안되던 옛날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