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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력서
(1975년)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제1장 출생
* 생년월일 : 1928년 1월 2일 부자 3대가 계속 도쿄에서 살았던‘서울뜨기’ 에도시대부터 오모리 해변에서 김 체취업을 하는 어부의 자식
* 출생지 : 도쿄 오타구의 유아라이. 유년기는 고오지아에서 성장. 부친은 네노기치. 모친은 이치의 7남 1녀 중 다섯째 아들 당시 부친은 41세 1958년에 사망하셨고 완고하신‘고집장이 영감’ 모친은 32세 1975년 당시는 79세 상냥하고 자상하신 분
* 유년기 1) 2살 때 유아라이에서 고오지다니로 이사. 뜰에는 석류나무. 벚나무. 느티나무가 심어진 정원이 있었다. 2) 1934년 하네다의 제2국민학교 입학 이때‘인간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에 대한 생각을 했다. 소년기에 벚꽃에 대한 동경이 나중에 일련정종 총본산 대석사에 벚나무를 식수하는 구상으로 이어졌다. 키는 작고 망나니였으며 성적은 중간쯤으로 매우 평범한 소년 3) 큰형 기이치가 1937년 군에 입대 나중에 버마에서 사망 4) 국민학교 6학년부터 고등소학교 2학년까지 3년간 신문배달 장래희망은 신문기자나 잡지사기자 5) 둘째 형도 입대 6)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7) 1940년 국민학교 졸업하고 고등소학교(국민학교와 중학교 사이의 2년제)에 진학 8) 3학년 때 1941년 12월 8일 진주만 공습 당시 큰형 기이치는 4년만에 일시특별제대하고 1941년 7월 ~ 1942년 12월까지 집에 거주하다 전쟁 확대로 다시 전쟁터로 나갔고. 둘째 형과 셋째 형도 전쟁터에 나갔고 얼마 후 넷째 형의 입대도 시간문제 당시 나는 전쟁에 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없었고 단지 빨리 끝났으면 하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고등소학교 졸업 후 소년항공병이 되고자 했다.
9) 항공병을 지원했을 때 부모님은 극구 반대하셨고 큰형이 재차 입대할 때 ‘집에 남아서 양친을 돌봐야 할 사람은 너뿐이다. 양친을 잘 부탁한다’라고 그래서 단념했다. 얼마 후 넷째 형이 입대했다.
제2장 성장 * 청년기
1) 1942년 4월 셋째 형이 근무하던 가타마의 니카다 철공소에 입사 2) 1941년 12월 8일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공습으로 태평양 전쟁 발발 미드웨이 해전은 1942년 6월에 발발 3) 니카다철공소는 해군성의 선박본부로부터 기술장교 파견으로 군수공장으로 함선부분을 담당하게 되고. 사내에는 청년학교가 설치되어 입사자는 군대식교육과 훈련을 받고 5년간 수료. 신입사원은 A.B.C로 구분 하루 중에 절반은 각 학과공부. 절반은 공장실습으로 반년간 견습. 나의 실습공장은 제3공장으로 입사 시에는 2. 3천명이었으나 1945년에는 1만명 정도였다. 4) 1944년 여름. 가마다역 근처 공장에서 목총을 메고 다마가와 천(川)의 제방을 행진하던 중 나는 갑자기 쓰러졌고 혈담을 토하고 말았다. 1945년 시카지마의 결핵요양소에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였으나 1945년 4월 15일 가마다 대공습으로 실행되지 않았다. 5) 1944년 3월 중학교 근로동원 요강이 결정. 1944년 8월 학도근로령. 여자정신근로령이 발효로 인해 우리 공장에도 근처 애바라 중학생들이 학도동원으로 일하러 오고 그 중에 마음이 맞는 5. 6명의 친구와 쉬는 시간을 이용한 독서그룹을 만들었다. 당시 나의 주장은‘생명이라는 것은 소중하다’‘전쟁은 어떻게 될 것인가’이었다. 6) 1945년 도쿄공습은 더욱 심해지고 소년시절 놀던 고오지다니의 집 넒은 정원의 벚꽃나무도 베어지고 그 뒷자리에는 군수공장이 들어섰다. 공습으로 공장과 집은 모두 불탔고. 가마다로구 교(橋)에 가까운 사원(절)하나만 남아 있었다. 혼자 자주 거닐며 생각에 잠겼고. 살아남은 벚꽃나무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있었고. 문득 17세의 나이의 솟구치는 감정으로 시(詩)를 섰다,
제3장 인생결정
*청년기
1) 두 번째 종전기념일을 맞이하려는 1957년의 무더운 여름 날 밤. 국민학교 친구가 찾아와서‘생명철학’의 회합에 가자고 하였다. 생명의 내적 자발성을 강조한‘배르그송’의‘생의 철학’인가 했으나 그렇지 않다고 했다. 2) 그래서 1957년 8월 14일. 독서그룹의 두 친구와 함께 생명철학을 들으러 갔다. 목적지인 어느 집 현관에 들어서니 20명 정도 사람들이 모였고. 약간 쉰듯한 꾸밈없는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는 40대의 남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이마는 빛나고 있었고 돗수 높은 안경 속에 눈은 빛나고 있었다. 이 사람이 바로 나의 인생을 결정하고. 나의 인생의 스승으로 되신 도다 조세이(戶田聖城)이시다. 3) 도다 선생님은 웃으면서“몇 살이지”하고 물으셨다. 19세라고 대답하자 자신도 고향인 홋카이도에서 19세에 도쿄로 오셨다고 그리운 듯 말씀하셨다. “나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올바른 인생이란’‘진정한 애국자란’ ‘천황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의 세 가지 질문을 했다. 망설임 없이 간단명료하게 상실하게 대답해 주셨다. 나는‘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이 분이라면 믿을 수 있다 라고 생각했으며 그날 자신의 소감을 즉흥시로 “나그네여!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려 하는가 달은 저물어 간다. 해는 아직 뜨지 않았다 먼동이 트기 전에 혼돈에서 빛을 구하여 나는 전진한다 마음의 어두운 구름을 해치려고 폭풍우에도 흔들리지 않는 큰 나무를 찾아서 나는 대지에서 솟아나오려 하고 있는가” 밤 10시가 되어 그 집에서 나왔다. 그때 나 자신 종교로서의 불법에 대한 것을 납득한 것이 아니라 도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듣고. 그 모습을 보고 ‘이 사람이라면’하고 신앙의 길을 걸어갈 것을 결의한 것이다. 4) 이 도다 선생님이라는 사람은 전시 중에 저 무모한 전쟁에 반대하여 1943년 치안유지법 위반 및 불경죄로 검거되어 투옥되면서도 자신의 신념을 관철하셨다고 했다. 이것이 결정적인 요소였다. 1947년 8월 24일 일요일. 나는 나가노에 있는 일련정종 사원에서 수계를 받고 창가학회의 일원이 되었다. 5) 은사와 만난 후 1년 4개월 나는 도다 선생님이 경영하고 있는 출판사 일본정학관에서 일하게 되었다. 1948년 8월. 하계강습회에 참석하였고. 좌담회에도 야학관계로 시간이 없는 가운데 어떻게라도 시간을 만들어 참석했다. 나의 관심은 인간의 생과 사라는 사상의 근본적인 과제에 있었다. 1948년 가을. 도다 선생님께서‘출판사에서 일해보지 않겠느냐’라고 했을 때 두말없이“부탁합니다”하고 즉석에서 대답헸다. 그때까지도 가마다 공업회에 근무하였기에 마무리 시간이 필요했다. 6)1949년 1월 3일. 일본정학관에 첫 출근을 했다. 니시간다의 사무실로 8시에 출근. 사무실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다. 도다 선생님 앞으로 한 통의 전화가 왔으므로 나는 그것을 가지고 도다 선생님 지택을 처음 방문했다. 사무실은 2층건물로 1층은 사무실. 2층은 올라가는 중간에 중간 2층. 2층은 다다미 8장방 가운데로 하여 앞뒤에 다다미 6장짜리 방이 있었다. 편집실은 윗쪽 방. 가운데 8장 방은 선생님께서 계시면서 가운데 8장 방과 6장 방 앞뒤의 방을 합쳐 여기서 법화경 강의를 하셨다. 도다 선생님은 전쟁 전에도 시습학관을 경영하여 출판사업을 하고 있었다. 도다 선생님의 <지도산술>은 베스트셀러였고. 전후 재빨리 통신강좌의 출판. 입사한 무렵은 부인용 잡지 <루비>와 내가 편집한 소년잡지 <모험소년>을 발간 그러나 큰 출판사에 눌려 좀처럼 팔리지 않았다.
제4장 광선유포
*포교
1) 동분서주하는 날이 계속되었고. 몸 상태가 나빠서 극도로 피로한 날이 계속되었다. 아내가 자주 주사를 놓아 주었다. 이때의 일기에는‘등. 허리에다 불에 달군 철판 한 장을 넣은 것과 같다’ ‘불붙은 나무 하나가 가슴 속에다 집어 넣은 느낌이다’라고 1953년 일기에 쓰고 있다. 1954년 이런 상태가 계속. ‘몸 상태가 대단히 나쁘다. 심한 통증이 계속된다’(1954년 4월 5일에 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자기와의 타협은 못하는 성격이었다. 2) 지방에 나가는 횟수도 많아졌다. 홋카이도는 도다 선생님의 고향 내가 처음 지도세 공항에 내린 것은 1954년 8월 10일 선생님과 두 사람만의 비행기 여행이었다.
제5장 후계
*은사의 죽음
1) 2월 11일은 도다 선생님 탄생일 우리 집은 해마다 이날은 팥밥을 만들고 축하하고 있다. 4월 2일은 스승의 서거일. 1958년은 생애 잊을 수 없는 역산의 날이다. 2) 몸이 극도로 쇠약해지신 선생님은 총본산 대강당 낙경식전을 지휘하셨으나 4월 1일 후지노미야로부터 귀경하시어 일본대학병원에 입원. 4월 2일 저녁 때. 나는 시나노조의 구 학회에서 수뇌간부연석회의를 열고 있었다. 오후 6시 45분. 병원에서 선생님의 아드님 도시히사 군으로부터의 전화연락이 왔다.“이제 막 아버지가 별세하셨습니다”라고. 나는‘선생님 평안히 잠드소서. 너무나 피로하셨을 것입니다’라고 하직인사를 드렸다. 3) 4월 1일 오전 1시 40분 대석사에서 도쿄로 모셔올 준비. 오전 2시 숙방 2층에서 출발“선생님 제가 모시겠습니다”라고 말씀 드렸다. 오전 2시 20분 들것에 실려 차에 옮기고 부인과 의사가 동승했다. 오전 2시 45분 누마스역에 도착 오전 4시 14분 급행 이스모로 승차“선생님 이제 안심하십시오”라고 말씀 드렸다. “그래”하시면서 빙그레 미소를 지으셨다. 오전 6시 45분 도쿄역에 도착 바로 일본대학병원으로 직행 3) 4월 2일 나를 자택으로 여러 번 부르신 다음“나의 뒤를 전부 이어가도록” 하고 말씀하셨다. 1958년 3월 1일부터 나는 학회본부에 상근하며 그때부터 실질적인 지휘를 잡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7일 읊은 시에 “은사가 가시고 지용의 아들들의 선구를 나는 노도를 향해 오늘도 나아간다” 이 색종이는 지금도 자택에 걸어 놓고 있다. 5) 1947년부터 11년간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엄한 훈도를 받았다. 그 지도는 준엄한 것이었으며 나약함을 허용하지 않았다. 선생님은 늘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한. 두 시간 사색에 잠기셨다. 신로를 다하여 미래의 구상을 하시고 계셨던 것이다. 도다 선생님과 은사 초대 마키구치 선생님과의 불법이 맺어준 사제의 길은 강인한 영원의 기반이었다. 스승의 유지를 다하기 위해 단호하게 권력의 마성에 도전하신 것은 옥중에서 마키구치 산생님의 옥사를 듣게 된 때부터였다. 나도 은사의 죽음을 계기로 스승의 위대한 구상을 실천할 것을 맹세했다.
*제3대 회장 취임
1)‘내가 죽은 다음 뒷일을 부탁한다’는 유언에 가슴속이 소용돌이 치고 깊은 사색으로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룰 수 없는 날이 계속되었다. 1958년 6월. 창가학회 초대 총무에 학회건설을 위한 격무의 회전 속에서 나날의 투쟁의 연속이었고 포교와 조직확대를 위해 전국을 뛰었다. 2) 그리고 1년. 2년이 지나가려 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창가학회 3대 회장에 취임하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몇 번이고 거절했다. 1960년 당시 일기에“전 간부의 의향이다. 또한 또한 기숙하였으므로 3대 회장 취임을 희망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방자한 것 같으나 깨끗이 거절했다. 피로하다”(3월 30일) “오후 3대 회장 취임에 대한 여러 사람의 강한 소망이라는 전갈이 있었다. 나는 사절했다”(4월 2일) “본부에서 늦게까지 임시이사회를 개최. 3대 회장 추대를 결정했다는 뜻의 연락을 받음. 정중하게 사절했다”(4월 9일) 4월 14일 끝내 거절할 수 없어 승락하고 말았다. 이 날의 일기에 “만사 끝났다. 부득이 하고 부득이 한 일이로다”라고. 3) 1960년 5월 3일. 도쿄 조고쿠 일본대학 강당에서 제3대 회장 취임 회장이 된 이상 전 책무에 전력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인 몸이 어디까지 지탱할 것인가. 이날 출석하신 일련정종 총본산 제66세 호소이 닛다쓰 예하께 큰 기대의 축사를 받았다. 당시 32세. 그날 밤 자택에서 조촐하나마 팥밥이라도 지어주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았다.“오늘부터 우리 집에는 주인이 없어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케다(池田)집안의 장례식입니다”라고 아내는 말했다. 실제로 아내와 셋 아이들로서는 5월 3일은 장례식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인재육성
1)내가 회장이 되었을 때 학회본부가 있던 시나노쪼 근처에 살고 있던 전 총리 이케다 하야토 씨가 인사차 방문했다. 그는“회장님 되셨다지요. 이 동네의 청년회의 회장이십니까. 같은 이케다(池田)이니까 사이좋게 지냅시다”라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47세가 되었으나 평생 청년이라는 생각은 변함없다. 2) 나는 회장 취임의 날 도다 회장의 7년 기일(1964년)을 목표로 3백만 세대 달성. 대객전 건립. 종교계의 각성운동의 세 가지 목표를 발표하고 나는 3년 간이 승부라고 생각했다.
2년 간은 간사이를 필두로 일본 각지를 돌아 다녔다. 미군정 하의 오키나와로 날랐다. 활동을 시작한 학회의 주축이 된 것은‘좌담회’와‘교학’으로 활동 초창의 방식이었다. 2년 반 후인 1962년 10월에는 3백만 세대 달성하고 1964년 4월 대객전 완성. 3) 다음은 젊은 인재육성. 후계자를 육성을 하지 않으면 앞길은 반드시 막히고 마는 것이다. 결성 5년이 경과한 학생부의 <어의구전 강의>를 1962년 여름부터 시작 <어의구전>은 니치렌 대성인의 어서의 골수가 설해진 어서로서 법화경 문문구구를 대성인 스스로의 입장에서 강의하신 것을 제자인 닛코상인이 필독한 것이다. 그래서 학력에 따르는 일체의 치장을 제거하고 그 내오에 빛나는 인재육성을 시도하는 것부터 시작했고 매월 1회 년간 계속 5년간 일정한 멤버에게 실시했다. 4) 이것이 궤도에 오르게 되어 다시 다음 포석. 다음 포석으로 인재육성계획의 전진은 계속되었다. 1964년 6월. 고등부. 중등부 결성. 1965년 9월. 소년.소녀부 발족. 그 중에 봉추회. 미래회를 만들어 4반 세기를 위해 21세기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서로 이야기 했다. 미래에서 온 사자(使者)는 늠름하고 자유분방하게 키우고 싶다. 넘어져도 혼자 일어서는 것을 가르키고 남에게 의지하지 않는 자립심을 키우고 싶다.
제6장 왕불명합
*공명당 창당
1) 1962년 1월 <동양철학연구소> 설치. 동양의 학술. 사상. 철학을 중심으로 널리 아시아 문화연구를 목적으로 한 연구기관으로 강연회. 연구회를 하면서 연구지 <동양학술>을 발간 2)1962년 1월. 창가학회를 모체로 한 <공명정치연맹>을 창가학회에서 분리. 1964년 11월 <공명당결성대회>를 개최. 나는 당시 창시자였지만 독자성을 존중하여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책임 있는 공당으로 자리하여 영구히 학대 받는 서민의 편이 될 것을 염원했다. 1970년 언론문제를 계기로 정교분리를 명확한 개방정당으로 발전 3) 1963년 9월. 음악감상단체인 <민주음악협회>를 창립 1965년에 민주음악협회를 재단법인으로 인가 외국과의 문화교류의 일익을 담당
*교육기관 설립
1) 1968년 봄. 창가학원 개교. 도쿄 고다이라에 세워진 창가중학교. 고등학교 제1기생 입학 1973년 봄. 창가여중학교. 여자고등학교는 오사카에 창설 지금은 창가소학교. 창가유치원도 창설 2) 1971년 봄. 도쿄 하치오지에 창가대학교 개교. 1975년 4월. 창가대학원 개교 예정 나는 창립자로서 세 가지 건학의 정신을 “첫째. 인간교육의 최고 학부가 되라. 둘째. 새로운 대문화건설의 요람이 되라. 셋째. 인류평화를 지키는 요세가 되라” 라고 3) 대학과 학원 건립 시 환경을 중요시 했다.‘자연과 인간의 융합을 어떻게 도모해 가는가’에 중요한 조건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자학교는 고오노의 들판에. 남자학교는 고다이라의 조용한 숲에. 대학은 광대한 하치오지의 무사시노의 구릉에. 4) 전쟁 전 창가학회는 <창가교육학회>라는 교육활동에서 출발 초대 회장 마키구치 선생님은 시대를 초월한 <창가교육학설>을 수립하신 개혁적인 교육자이셨으며. 제2대 회장 도다 선생님도 교육계에 종사하셨다. <교육>이란 미래를 형성해가는 중요한 생명선이며. 미래를 응시한다면 일치하여 힘을 기울여야 하는 포인트가 <교육>이다. 5) 중국의 북경 대학. 페루의 센마르코스 대학. 홍콩의 중문 대학. 미국의 시카고 대학. 소련의 모스크바 대학과 교류를 추진
*소설 <인간혁명> 1) 1964년 12월 1일부터 3일간 회원 격려차 오키나와에 있었다. 2년만에 네 번째 방문 12월 2일. 소설 <인간혁명> 집필 시작. 본문의 처음 출발은‘전쟁처럼 잔혹한 것은 없다’라고. 1945년 7월 은사 도다 선생님께서 도요다마 형무소 출옥할 때의 장면이다. 일본 열도 가운데 가장 비참한 쓴맛을 뼈저리게 느낀 오키나와에서 써보고 싶었던 것이다. 2) 이 글의 주제는‘한 사람의 인간에 있어서 위대한 인간혁명은 머지않아 일국의 숙명전환까지도 성취하고 더 나아가 전 인류의 숙명전환까지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후세의 역사의 심판을 바라는 증거의 서(書)이며. 서민에 의한 평화. 문화의 드라마가 장절하게 쉬지 않고 전개해 온 궤적과 그 평화운동은 한사람 한사람 이름도 없는 민중의 인간변혁의 집적에 의해 유언과도 흡사한 가분으로 난 붓을 들었다. 은사의 7회기 법요인 1964년 석상에서 집필의 결의를 피력. 1964년 12월 14일 13회분의 원고를 넘겨 1965년 원단부터 세이코신문에 게재 8권까지 원고용지가 약 3,800매이며. 지금 후지 미술관에 보관. 1973년에는 영화로 제작.
*정본당 1) 1970년 언론문제 발생. 1969년 연말의 강행군에 의한 무리로 부득이 그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학회 운영면은 부회장제를 실시하여 일체를 맡기고 집필활동에 전념하기로 하여 1970년 1월. 총무회에서 부회장제 승인. 내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을 때. 예상하지 않은 곳에서 사건이 터졌다. 이것이 언론문제이다. 이 문제의 진상은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으나 그 본질을 추구해 갔을 때 이것은 창가학회의 체질에 관계되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1965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만은 꼭 해결해야 된다’라고 생각 1970년 5월 3일. 제33회 본부 간부회에서 창가학회와 공명당의 정교분리를 철저히 하고 지금부터는 질의 방향으로 전환하는 등 여러 가지 지침을 제시 이것을 계기로 견고한 창가학회에서 강인한 창가학회로 변전 2) 1972년 10월. 8백만의 열성에 의해 후지산 기슭에 <정본당>이 건립. 멀리 남쪽에는 스루가의 바다. 동쪽에는 후지산. 서쪽은 산. 북쪽은 태고의 문화를 간직한 세코바라가 펼쳐진 곳이다. 이 건축은 서민으로부터 생긴 서민의 시설이다. 종교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항구평화. 세계문화의 건전한 발전을 민중이 주체자가 되어 기원한 곳.공사를 시작한지 4년. 건립계획을 발표한지 8년만에 완공. 1964년 봄. 은사의 유훈에 의해 건립구상을 발표 건설위원회가 발족. 나는 그 위원장으로 추진을 도모했다. 건립자금은 4일간 350억 엔을 넘는 정재가 800만여 명으로부터 모여진 것.
제7장 세계광선유포
*해외여행
1) 1960년 가을이었다. 1960년 5월. 회장에 취임한 후 5개월 후 10월 2일. 미국 등의 9개 도시 주요목적은 세계로 확대된 해외멤버의 격려를 위한 것이었으며 일본이란 좁은 차원에서 세계의 광선유포의 첫발이었다. 처음은 하와이. 2)1975년 미국 방문. 뉴욕의 UN본부 방문. 발트하임 UN사무총장과 회담. 워싱턴에서 키신저 국무장관과 회담. 의회도서관에 1만권의 도서기증. 콜롬비아 대학. 시카고 대학과 교육교류. 시카고는 15년만에 방문 15년전 미시시피강(江) 호반의 거리에 도착할 때 마중 나온 멤버는 16명. 15년이 지난 지금은 7,000명. 3) 1975년을 기점으로 해외여행은 22회. 방문국은 36개국 4) 두 번째 방문국은 인도. 총본산 66세 닛다쓰 상인을 안내 우리는 석가 오달의 시각을 새겨 부다가야에서 법화경 방편품. 수량품을 독송하고. 기념의 원문을 경내에 매납 나는 신생의 출범을 생각했다.
*평화의 파장
1) 1974년 1월. 홍콩. 3월 북미. 중남미. 5월 중국. 9월 소련. 12월 재차 중국. 1975년 1월 미국. 지금까지 여행에서는 특히 교육교류를 목적으로 켐브리지 대학. 옥스포드 대학. 파리 대학. 센마르크 대학. 모스크바 대학. 북경 대학. 캘리포니아주립 대학. 바그레 대학. 로스엔젤레스 대학. 중문 대학을 공식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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