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물단지, 까치 신세
오늘 아침에도 시골 우리 집 대문 옆에 있는 석류나무 가지에 까치 두 마리가 날아와 꼬리를 아래위로 몇 번이나 움직여 중심을 잡으려 안간힘을 썼으나 약한 나무 가지에 앉을 수가 없어 그만 포기하고 튼튼한 이웃 집 감나무 위로 날아가 버린다.
아침에 까치가 찾아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온다는데 우리 집에 올 손님이 남의 집으로 가려는 겐가 ? 꿈 해몽처럼 신빙성 있는 말은 아닐 지라도 이른 아침에 듣는 까치 소리는 왠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기대감으로 잠시나마 기분이 좋은 게 사실이다. 이래서 까치를 발견하거나 까치의 울음소리를 듣는 날은 여느 때보다 상쾌한 마음으로 하루를 연다.
까치는 우선 생김새부터 까마귀와는 사뭇 다르다. 몸 전체가 검은 바탕에 배 위 부분과 목 주위가 하얀 털로 덮여 있어 더 깨끗하고 말쑥하게 보인다. 그리고 제비나 비둘기처럼 온순하게 보여 더욱 친근감이 간다. 전체가 새까만 까마귀와는 그 느낌부터가 사뭇 다르다.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는 까치를 길조(吉鳥)로 분류해 놓고 있다. 가을 추수를 하면 떡을 하여 담 장 위에 얹어 날짐승들에게 제공한 것을 하필이면 까치밥이라 칭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인간과 까치는 이렇게 친숙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나는 평소 까치를 다른 새보다 가까이 한다거나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그저 까치를 보면 남들보다는 다른 인연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시골에서 자란 나는 초등학교 시절, 꽃피는 봄이 오면 아침부터 해가 지도록 산과 들을 누비며 흙 속에서 뒹굴며 살아왔다.j 그러다 보니 산과 들에 있는 동식물들과 접하게 되는 기회가 많아지게 되었고 때로는 사물에 대한 궁금증도 생겼으며 어떤 때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는 그 신기함에 놀라기도 했으며 이를 그림이나 글로 표현해 보기도 했다. 특히 어릴 때부터 동식물 기르기를 좋아했던 나는 봄이 되면 학교 앞에서 병아리를 사와서 혼자 길러 보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던 일도 기억이 나고 아버지에게 졸라 토끼를 기르기도 했다. 이렇게 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들을 관심 있게 관찰하는 버릇이 생기게 되었고 별 것 아닌 동물이나 잡초 등에서 새로운 사실을 찾아내는 데 흥미를 가지는 별난 취미가 있었다고나 할까 ?
까치만 보아도 그렇다. 우선 알을 보자. 계란보다는 작고 메추리알보다는 큰 것이 예쁘기가 이를 데 없어, 깨지지만 않는다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가지고 놀고 싶을 정도로 예쁘다. 까치집은 어떤가? 다른 새들은 대개 다른 짐승이나 사람들의 눈을 피하여 깊고 으슥한 곳을 택하고 있지만 까치는 너무나 개방적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수 있는 높은 나뭇가지에 드러 내놓고 있다. 입으로 물고 온 진흙과 나뭇가지, 그리고 보드라운 지푸라기 등으로 엉성하게 짓는다. 톱이나 망치, 낫 한 번 사용하지 않고 못 하나 안 박고 그것도 사람 손이 미치지 못할 높은 나무 가지에 짓는데도 여름철의 긴 장마와 태풍에도 잘 견뎌 내며 북풍 몰아치는 겨울도 무사히 넘긴다.
어지간해서는 부서지지 않는다. 하늘이 환히 보이지만 비가 새지 않도록 설계되어 있다. 사람들은 컴퓨터로 설계를 하고, 엄청난 돈을 투자하고 좋은 재료와 최첨단 장비를 총 동원하여 건물을 짓는데도 무너지고 붕괴되는 부실 공사가 나오는데 나는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까치집이 무너지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했다.
어떤 수필가가 쓴 글을 보면 자기는 사랑채를 지을 때 꼭 까치집같이 소쇄한 맛이 나도록 성글게 지어 풍류 시인이 거처하는 방으로 만들겠다고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시인이 아니면 어떤가? 그저 자연을 벗 삼아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가 어울리는 풍류객이면 좋을 것 같은데 까치집은 겉과 속이 다를 바 없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대리석도 필요 없고 페인트칠은 더욱 어울리지 않는다. 못 쓰는 나뭇가지로 그냥 얽어 만든 것이다. 그런데 까치에게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음인지 며칠 전에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한 적이 있다. 까치 아파트를 목격한 것이다. 마을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스피크를 설치했던 폐조형물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까치들이 집을 지은 것이다.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똑 같은 모양으로 아주 질서 정연하게 지어 내려온 것이다. 분명 본능적으로 지은 집은 아닐 텐데 영락없는 까치 아파트다. 어찌 미물이라 평할 수 있겠는가?
다른 새들의 집은 장이라 하는데 하필 까치에게는 집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으로 보아도 까치의 둥우리는 그만큼 우리 사람들과 같은 맥락 차원으로 올려놓아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서울 근교에 까치집이나 제주도 바닷가, 경상도, 전라도에 있는 까치집의 크기나 모양, 생김새가 꼭 같다. 어떻게 의논도 없이, 교육을 받지도 아니하고 지은 집인데 어떻게 똑 같게 지을 수가 있을까 하는 것이다. 만물의 영장인 우리 인간은 능력에 따라 천태만상(千態萬象)의 집을 짓는데 말이다.
까치 사회에서는 빈부(貧富)의 차도, 권력의 상하(上下)도 없이 그야말로 가장 질서 있고 평등한 삶이 있을 뿐이다. 시기(猜忌), 질투(嫉妬), 중상(重傷), 모략(謀略), 권모술수(權謀術數)도 없다. 개나 돼지처럼 음식을 앞에 두고 서로 싸우지도 않는다.
이웃을 원망하거나 하늘을 탓하지도 않는다. 그저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눈이 오면 눈을 맞으며 산다. 춥다고 옷을 두껍게 껴입는 일도 없고 덥다고 옷을 벗는 일도 없이 더우면 더운 대로 추우면 추운 대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아간다.
늘 꼬리를 아래위로 흔들면서 즐겁게 살아가는 까치 ! 그래서 다시 태어난다면 까치가 되고 싶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하기야 불의(不義)한 사회에 환멸을 안고 슬픔과 한숨으로 힘겹게 삶을 지탱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쩌면 까치의 사회가 천국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심이 흉흉해지고 인정이 메말라 가는 요즈음 농작물에게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농민들에게 미운 애물단지 까치가 되어 학대(虐待)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살상용 총에 많은 까치들이 죽어가고 있어 안타깝기 이를 데 없다.
추석 명절을 앞두고
평소 자주 찾아보는 고향 산천이지만 오늘 느닷없이 부모님의 산소에 자그마한 톱과 낫 한 자루 들고 불쑥 찾아왔습니다. 왠지 저 혼자 오고 싶었습니다. 얼마 전에 동생이 사온 예초기가 있지만 시간을 느긋하게 잡고 천천히 그동안 멋대로 자란 잡초와 잔디를 손수 곱게 깎으며 감회에 젖어봅니다.
세상 돌아가는 일과 그동안 우리 가족과 친척들의 삶의 모습도 말씀 드리면서 시간을 보내려고 도시락도 준비했습니다. 생전의 아버님께서는 식사시간이 되면 밥 비비는 시간이 아까워 그냥 드신다고 하시던 말씀이 지금까지도 머리에 맴돌고 있습니다. 벌써 아버님이 하늘나라로 가신지 반세기가 지나갔습니다. 불효자식 이놈도 어느덧 시속 80Km를 달린다는 나이가 턱 밑까지 왔습니다. 뭐 하나 남길만한 흔적도 없이 그저 무의미한 삶을 살아온 것 같습니다. 아버님께서는 쉰을 겨우 넘기고 가셨지만 너무나 훌륭한 족적을 남기셨습니다. 학문이 깊으셔서 명심보감, 사서삼경을 통달하셨고 천자문을 줄줄 외셨으며 동지섣달 긴긴밤이면 마을 이웃들을 사랑방에 모시고 춘향전 홍길동전 심청전 장화홍련전 등 고담소설을 낭송하여 많은 감탄사와 박수갈채를 받으셨지요? 그런가 하면 마을 청년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치시고 붓글씨로 직접 쓰셔서 한 권씩 나눠주셨지요? 저도 그 틈에 끼어 한문께나 깨우치게 된 것이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큰 보탬이 되고 있습니다. 면단위 기초의원 의용소방대장 마을 이장 등 일인 오역·육역을 하시면서도 불평하시는 것 한번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오남매에게 매 한 대 때린 적이 없으셨습니다. 그런 아버님께서 그렇게 일찍 가셨으니 두고두고 한으로 남아있습니다. 생전에 손자 한번 품에 안아보는 것이 소원이라 하셨는데........일 년만 더 사셨어도 그 뜻을 이를 수 있었지만 천붕지탄의 한을 남기시고 떠나신 것이 지금까지 가슴이 저려 옵니다. 그래서 더욱 아버님이 그립습니다. 다행히 어머님께서는 여든을 넘기셨으니까 조금은 위로를 받습니다. 어머님께서는 학교는 문 앞에도 못가셨지만 야학으로 한글을 깨우치시고 우리 오남매를 기르시면서 손에 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고 동분서주하시던 아버님을 한마디 불평도 없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 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산 속의 바람소리 어둠을 타고 들려오면 강가의 빗소리도 함께 따라옵니다. 지금도 가끔 문 밖 낙엽 뒹구는 소리에 행여 마실 가셨던 아버님 인기척인양 어둠속을 걸어오시는 듯 시간이 거기에 멈춰 있습니다. 목 놓아 불러도 돌아올 수 없는 영원의 강을 건너신 아버님 아직도 가슴을 도려내는 아픔이 되어 이방인의 슬픔으로 저려옵니다.
해마다 같은 푸념이 되겠습니다만 ‘잘되면 내 탓, 못되면 조상 탓’이란 말처럼 출세하지 못한 탓을 조상님께 돌리기엔 면목 없는 짓이라 생각됩니다. 어떤 이는 20년, 아니 10여년의 직장생활에도 몇 십억, 몇 백억의 재산을 모아 돈 쓰기를 물 붓듯 하고 권력을 손아귀에 거머쥐고 매사를 떡 주무르듯 하면서 조상의 묘를 성역으로 가꾸기도 하고 궁전 같은 호화 별장을 지어 오가는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몇 개월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오십억을 받기도 하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40년 넘게 공직생활을 해온 불효자 이놈에게도 쥐구멍에 빛 들듯이 뭐 좀 변화가 올 줄 알았는데 역시 올해도 지지리 못난 모습으로 찾아뵙게 됨을 머리 숙여 사죄를 드립니다. 그러나 세상은 고르게 돌아가는 것도 같습니다. 권력으로 세상을 떡 주무르듯 하던 이들이나, 그 밑에서 갖은 아양과 호들갑을 떨어 엄청난 돈을 모은 졸개들, 전과 다른 세상이 올지도 모르겠습니다. 정말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좋은 세상이 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산 위에 올라서면 땅에 있을 때를 생각해야 된다.’는 아버님의 말씀이 생각납니다.
오래 전, 공직에 있을 때 나라의 덕으로 중국과 일본을 잠깐 다녀온 일이 있었습니다. 크게 보고 싶던 나라는 아니었지만 중국과 수교를 맞은 첫해이고 한 번은 봐야 할 것 같아서 호기심을 가지고 출발했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중국은 광대한 땅에 십사억이란 엄청난 국민이 다 잘 살지는 못하지만 찬란한 문화유산을 남긴 조상을 가진 것을 매우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여유와 낭만을 즐기고 긍지를 가지고 꿋꿋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의 영원한 적대국, 일본인 모습에서도 배울 점이 있었습니다. 모든 시설이나 기구들이 절약 차원에서 만들어져 있고 질서, 친절, 성실이 몸에 배어 있었습니다. 큰 도시에 교통경찰이 한 사람도 없는데도 교통질서는 물 흐르듯 순조롭게 지켜지고 있었으며 도로에 다니는 차들도 중대형차보다는 소형차가 훨씬 많고 집들도 아기자기하게 꾸며놓고 사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와 비교가 되었습니다. 어느덧 큰 고급 아파트를 선호하고 초등학생들까지도 중형 고급 외제 승용차정도는 장난감 차 다루듯 쉽게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몇 억 정도는 옆집 똥개 이름 부르듯 하는 세상이 되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런가 하면 ‘사람 있는 곳에 모임 있고, 모임 있는 곳에 콩고물 떨어진다.’는 말처럼 곳곳에 비리, 불의, 부정, 사기가 춤을 추고 있는 현실이 정말 안타깝습니다.
금의환향하지 못한 몸이지만 한편으로 조상님의 은혜에 정말 감사함을 드립니다. 천만다행으로 부정할 만한 자리에 앉지 못하고 그런 기회가 주어지지 못해서 콩고물을 못 묻혀 날랐지. 만약에 기회가 주어졌다면 한 바지가랑에 두 다리 집어넣을 놈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리 밑 거지가 부잣집 불타는 것을 보고 화재 당할 염려 없어 부모님 은혜 감사했다는 격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출세 못한 놈이 웬 말이 그리 많으냐고 꾸짖는 것 같습니다. 풀을 가지런히 베고 보니 한결 부모님 산소가 세수를 한 것 같이 깔끔해서 기분이 날아갈 뜻 합니다. 오늘 저녁밥은 아버님처럼 비비지 않고 그냥 먹어도 밥맛날 것 같습니다. 추석 전에 동생과 함께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편안히 계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