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돌이굼터 도체비
아침부터 구름이 잔뜩 끼어 흐린 날씨더니 기어코 비가 내린다. 제법 번개도 치고 멀리 북한산 쪽으로는 검은 구름이 산을 휘감았다. 도깨비라도 나올 만큼 공포가 느껴지는 분위기다. 아 그래 도체비...... 어스름 골목길에 밥 짓는 새벽 연기 희붐하게 깔리면 까닭 없이 도체비 찾아드는 날이 있었다. 어제 오일장 소 팔러 가셨던 영감님 사뭇 주정뱅이 몰골로 짚신짝 터덜거리시며. 그 많던 도체비는 다 어디로 간 것일까.
어린 시절 호롱 불이 밝혀지는 밤이 오면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진 아이들은 거의 도체비와 살았다. 눈을 비벼가며 듣는 도체비 이야기는 두레박줄을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해님 달님 이야기만큼이나 오달졌다. 잠투정처럼 졸랐던 옛날이야기가 정작 잠들 때쯤에는 무서움이 되어 할머니의 치맛자락을 움켜지고 방문을 열지 못했다.
오늘은 읍내 오일장이 서는 날이다. 쇠전이 열리는 큰장이다. 장날에는 인근 소장수들이 전부 모여들어 북적거린다. 쇠전이 열려야 떡장수나 엿장수, 난전꾼들과 각설이패들도 신이 난다. 소를 팔고 사야 구경하기 어려운 뭉칫돈이 풀린다. 소장은 대개 학생들의 입학금이나 월사금이 필요한 2월이나 7월에 크게 서고 간혹 농자금이 필요한 경우에도 소소하게 장이 선다. 그런 장날은 노름꾼, 소매치기, 점꾼들까지 설쳐댔다. 소장은 대개 이른 아침에 섰다가 일찍 파장이 된다. 소들이 도보로 장거리를 해동갑으로 이동해야 되기 때문이다.
송아지를 사다가 키운 소를 팔 때 소 주인은 서운하다. 소 판 뒤풀이는 특별하다. 서운해서 한 잔, 헐한 값에 화가 나서 한 잔으로 술타령을 한다. 읍내 가게마다 걸린 외상 빚을 갚다 보면 황소 값이 다시 송아지 값이다. 홧김에 투전판에 앉아 소 판돈을 몽땅 털리기도 한다.
뿐이랴. 외상값 갚겠다고 들린 술집도 소 판돈 노리기는 마찬가지다. 싸구려 박가분으로 주름을 가리고 눈웃음 살살 치는 주모는 전대 호리기 선수다. 외상값을 갚았으니 오늘은 공짜술이라는 꼬임에 빠져 작부가 부어주는 한 잔 두 잔에 금세 술자루가 된다.
술이 사람을 먹으니 앞에 앉아 술을 치는 이가 푸짐한 주모인지 해끔한 작부인지 아리송하다. 전대를 들었다 놓았다 하며 객기를 부린다. 소 팔아 전답 한 뼘이라도 늘리려던 아내의 정성은 도체비가 물어갔다.
장터 국밥집에서 시작한 술판이 끝난 것은 달개집 봉창 아래다. 어슬어슬 한기가 몰려들며 술이 깬다. 전대를 열어보니 송아지 살 돈은커녕 병아리 한 마리 살 돈도 남지 않았다. 엉뚱한 데서 찾아보겠다고 투전판에 어울려 땡전마저 털린다. 엎친 데 덮친다더니 부슬부슬 비까지 내리고.
일은 저질렀고 마누라 볼 면목이 없으니 도체비라도 만나야 한다. 도체비가 사는 곳은 하늘먼당 바로 아래 만돌이굼터다. 예전에는 마을 뒷산 대밭 근처에 살던 도체비가 읍내 오일장에 소전이 들어서면서 이곳으로 이사 왔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만돌이굼터 붙박이 도체비가 아님은 분명하다. 도체비 사달이 나는 것이 읍내 장날인 것을 보아서는 지리산가리산으로 싸돌아다니는 역마살 낀 도체비가 대장인 모양이다. 조선팔도에 소 판 돈만 노리는 이런 귀꿈맞고 고마운 도체비가 또 있을까.
비틀비틀 갈지자걸음으로 고갯마루를 지나 만돌이굼터로 들어선다. 흐릿한 안개비에 도체비 만나기 딱 좋은 날씨다. 오늘 같은 날 도체비를 만나지 못하면 큰일이다. 투전판을 나와 술집을 다시 지나는데 마치 비 맞은 수탉처럼 시르죽은 모습이다. 딱해 보였던지 가는 길에 마시라고 주모가 막걸리 몇 병을 챙겨준다.
만돌이굼터 바위에 앉아 도체비를 기다리며 막걸리를 마신다. 두 병째 바닥이 보이자 몸이 따뜻해지면서 알딸딸해진다. 도체비와 씨름해 이기지 못하면 지나갈 수 없다던 옆집 아재 이야기를 떠올리며 계속 술을 마신다. 드디어 도체비가 보인다. 산에서 내려오던 도체비가 옆에 서더니 말을 건다.
“아 그 귀한 술을 혼자서 그냥 마시나? 술 내기하자. 이기는 쪽이 술 마시는 걸로. 지면 이길 때까지 씨름을 해야 해.”
밤새도록 씨름을 했지만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이에 꾀를 내어 “어, 날이 새는구나!”라고 큰 소릴 쳤고 도체비가 움찔하자 얼른 자빠뜨렸다. 도체비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근처에 있는 나무에 바지 끈으로 꽁꽁 묶어 놓고 그길로 만돌이굼터에서 빠져나온다. 집에 오니 옷은 엉망이고 소 판돈은 한 푼도 없다. 다음 날 해가 뜨자 아내를 앞세우고 만돌이굼터로 갔지만 묶었다는 버드나무에는 몽당빗자루만 달랑 묶여 있다.
소 판돈을 빼돌릴 구실로 도체비를 만났다며 얼렁뚱땅한다고 생각했던 아지매는 묶여 있는 빗자루 몽둥이를 보고 기겁을 했다. 선 걸음에 용하다는 한약방으로 달려가 첩약을 사다 달이니 먹이니 난리다. 아재는 작년에 썼던 수법이 올해도 제대로 먹힌 것에 대하여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 겉으로는 짐짓 “도체비와 씨름하다 기가 빠진 거는 일반 한약으로는 안 되고 말고기하고 산삼을 쓰야 된다던데......”
오히려 능청을 떤다. 도체비가 말고기를 싫어한다고 옛날부터 전해져 온 말이 생각나서다. 도체비와 씨름하다가 기를 다 빼앗겼다는 핑계로 “백호야 날 잡아라!” 하면서 일주일 넘게 구들장만 멨다. 도체비란 놈은 참으로 가져다 써먹기 좋은 영물이다.
아이들은 도체비가 무서웠지만 어른에겐 능청맞은 이용물이었다. 도체비가 아니었으면 애지중지 키워서 판 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솟값을 어떻게 설명하냐고.
같은 소장수 진목지 배 서방, 한디골 박주사도 만돌이굼터서 지난가을에 도체비를 만나 소 판돈을 몽땅 빼앗겼다는 소문이다. 겨우 목숨만 구했지만 그 도체비를 찾는다거나 만났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참으로 감쪽같은 도체비 놀음이다.
도체비는 논리나 원칙과 전혀 다른 일을 해도 이해할 수 있는 존재로 인식했다. 시도 때도 없이 엄청나게 먹거나 아무 생각 없이 먹는다는 뜻으로 “어혈진 도깨비 도랑물 먹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낮도깨비 장마 비에 개울물 건너는 소리”라는 말은 이치에도 맞지 않게 혼자서 심하게 구시렁대는 것을 익살스럽게 표현한 것이다.
우리 선인들은 힘든 세월을 도체비와 살면서 여유와 멋을 부렸다. 어릴 때 도체비는 무서웠지만 따뜻한 이웃의 모습으로 꿈을 키우게 했다. 산속으로 숲속으로 들어가 자연을 느끼게 했다. 지금은 영화나 연극, 텔레비전이나 만화에 등장하는 미국산 슈퍼 영웅 캐릭터들이 아이들의 혼을 빼앗는다. 그들도 조금만 더 자라면 할머니가 해주는 전래의 도체비 가치를 알 것이다. 우리들의 희망이자 미래인 이 땅의 아이들을 족보도 없는 무지막지한 서양 귀신들에게만 맡겨 놓아야 할까.
그 멋진 만돌이굼터 도체비를 불러다 애들과 같이 놀게 해 주어야 한다. 할아버지 탕건 속이나 할머니 주머니 속에서 숨죽이고 있는 도체비를 살려내야 한다. 일본 도깨비 오니가 아닌 핀란드 요정 엘프가 아닌 국산 도깨비, 우리의 도체비를. 그래야 우리 후손들은 제대로 된 감성의 꿈을 꿀 것이다. 그들이 자랐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보다 훨씬 웅대하고 장쾌한, 스토리텔링이 있는 새로운 한류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우리 조상들이 꿈을 키워 온 도체비를 세계 방방곡곡에 가지고 가서 우리들의 익살스럽고 멋진 문화를 자랑하며 당당한 세계 제일의 민족으로 도약하는 꿈을 꾼다. 도깨비방망이를 들고 세계 문화를 호령하는 한류 도체비와 세계 최고의 감성 어린이를 키우는 것은 분명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달렸다. 사라진 도체비를 다시 이 땅에 살게 해야 한다. 그들을 불러 오징어 게임 마당에 함께 세워야 한다. 그 많던 도체비는 어디로 다 사라진 것일까. <끝>
* 만돌이굼터 : 읍내서 고향 집으로 걸어오는 길, 구룡 저수지 제방을 지나면 저승 고개고 그 저승 고개가 끝나는 도린결이 만돌이굼터다. 만돌이굼터에서 곧장 산꼭대기로 오르면 만나는 곳이 하늘먼당이다.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곳에 만돌이란 이름의 힘센 장사가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저수지가 만들어지고 난 후 도체비가 모여들면서 만돌이는 단봇짐을 싸서 떠났다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 내려온다.
첫댓글 소 판돈을 빼돌릴 구실로 도체비를 만났다며.// 예전엔 소팔면 다 그랬습니다. ㅋㅋ 그래서 막걸리가 더 취하기도 했나 봅니다./ 소 팔고 누에 고치 파는 날이면 주막거리 난정이가 흥이나던 때이기도 했지요.. 잘 감상하였습니다.
옛 기억을 되살리는 글 감명 깊었습니다. 더구나 사진은 전문가 솜씨를 느끼게 합니다. 거미줄에 아침 이슬이 맺인 모습은 쉽게 얻을수 있는 기회가 이닌듯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