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삶, 그리고 감각
나는 삶이다. 견디기 힘든, 요지부동의 삶! 저물어가는 가을녘은 어쩌면 이처럼 폐부를 찌르듯 감동적인가! 그리고 無限보다 더 예리한 송곳은 없다.(보들레르,『파리의 우울』)


김상환 시인
1. 말과 삶, 과정process으로서 시 - 몇 개의 사유와 모티프
1.1. 막스 피카르트의『인간과 말』(배수아 옮김, 2013, 봄날의 책)에 의하면, 인간이 말을 하기 이전에 말은 이미 인간 안에 주어져 있다. 말은 인간 안에 침묵하는 전체 언어로서 들어 있다. 사물의 응시에 대한 인간의 대답이 말이다. 이를테면, 그리움Sehnsucht에서‘h’에 의해 길게 늘어나는‘e’는 그리워하는 자와 그리움의 대상 간의 거리감을 나타낸다. 이는 곧 사이를 갈라 놓은 거리 너머를 응시하는‘먼 바라봄’이다. 인간은 말로 인해 비로소 현존한다. 정신에 내재해 있는 말은 공간을 창조한다. 특히 내부의 공간에선 멀고 가까움이, 이곳과 저곳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내부의 공간 속에서 인간은 모든 장소에 있게 된다. 시인은 이 내부의 공간에서 시를 쓴다. 시는 세계 자체이며, 가장 근원적인 세계다. 시인은 시에서 출발하여 현실로 진입한다. 현실의 세계와 시의 세계 사이에 시인은 거주한다. 시인은 고독하다. 한 편의 완전한 시를 보면, 마치 이 세상에 다른 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 같다. 세계는 한 편의 시로 가득차 있다. 시의 완전성은 인간의 것일 뿐 아니라, 언어의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삶에는 말을 위한 공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점이다. 하여 인간은 말로 인해 불멸이 된다. 말과 침묵의 관계에서 보면, 오늘날의 시는 더 이상 침묵과 연관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온갖 말들로부터 와서 온갖 말들에게로 옮아간다. 시는 침묵으로부터 나오며 또한 침묵을 동경한다. 진정한 말은 침묵의 반향反響이자, 침묵의 이면이다. 말과 침묵은 서로에게 속해 있다. 말은 침묵에 관해 알고 있고, 침묵은 말에 관해 알고 있다. 그런 점에서 시는 더 깊고 어두운 하나의 생명을 내포한다. 이와 관련하여 피카르트의 다음 에세이는 충분히 음미할 필요가 있다.
봄은 겨울로부터 오는 게 오는 것이 아니다. 봄은 침묵으로부터 온다. 또한 그 침묵으로부터 겨울이, 그리고 여름과 가을이 온다. 봄의 어느 아침, 꽃들을 가득 달고 벚나무가 서 있다. 그 하얀 꽃들은 그 나무에서 자라난 것이 아니라 침묵의 체에서 떨어져 나온 것 같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그 꽃들은 침묵을 따라 미끄러져 내려왔고, 그래서 하얀 빛이 되었다. 새들이 그 나무에서 노래했다. 마치 침묵이 그 마지막 남은 소리들을 흔들어 떨쳐버리기라도 한 듯이 그 침묵의 음(音)들을 쪼아 올리는 것이 새들의 노래인 것 같았다.
(막스 피카르트,『침묵의 세계』, 최승자 옮김, 1996/3쇄, 까치)



1.2. 문학의 특징은 우리가 인간적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않는 한 이해될 수 없다는 데 있다. 자아는 하나의것이 아니라 과정이다. 하여 시 읽기에서 여전히 중요한 것은 사물 보다는 그것에 내재해 있는 인간과 삶의 과정이다.
(제이콥 브로노프스키,『인간을 묻는다The Identity of Man-과학과 예술을 통해 본 인간의 정체성』, 김용준 역, 2007, 개마고원)
1.3. 쟈끄 마리땡의『詩와 美와 創造的 直觀』(김태관 역, 1985/중판, 성바오로출판사)에 의하면, 시와 예술은 불가분의 관계에 놓여 있다. 후자가 인간 정신의 창조적 ․ 생산적 활동이라면, 전자는 보다 일반적이며 근원적인 하나의 과정이다. 즉 사물과 인간 사이의 내적 관계이자 조응照應을 말한다. 시는 모든 예술 하나하나의 은밀한 생명이다.
1.4. 詩言志 歌永言(『書經』,「舜典」編). 詩者 志之所之也 在心爲志 發言爲詩(『毛詩序』)






2. 시와 감각
2.1. 시인은 형상과 이미지로 사유한다. 그랬을 때 “세상은 얼마나 황홀하고 감각적인가(......) 그것은 신비에서 시작되었고 신비로 끝날 테지만, 그 사이에는 얼마나 거칠고 아름다운 땅이 가로놓여 있는가.” 이렇듯 감각과 현실 세계 사이에는 거칠고 황량하면서도, 빛나고 아름다운 대지가 가로 놓여 있다. ‘광야曠野’가 바로 그것이다. 광야야말로 “생의 우선순위priority를 보는 장소”이자 자기 실존과 대면하는 토포스topos에 속한다. 광야나 공터는 새로운 감각과 눈을 요구하며, 그런 감각 경험과 구체적인 느낌만이 진정한 세계이자 실재reality임을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사물 하나하나(는) 진지한 것이고 유일무이한 것이고 또 비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상-사물에 자세히 몰입하여 관찰하고 관조하며 관심을 갖지 않고선 일상의 비일상화, 내지 시적 진리에 근접할 수 없는 까닭이다. 빛과 색, 향기와 말, 소리에는 표면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좋은 시는 혹자(박현수)의 말처럼 ‘너머-여기’의 사유를 추구함으로써 현실에 깊이를 부여하고 퍼스펙티브perspective를 제공하며, 자연과 사물의 숨은 조화를 발견하게 된다.
시가 인간 감정의 전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이라면, 시에 대한 이해는 사물의 전 영역-그 전경前景과 배후背後를 헤아리는 일이다. 시는 사물이 갖는 서로 다른 명암과, 명암 속의 작고 미묘한 뉘앙스, 그리고 그 움직임의 변화를 따라간다. 이렇게 따라가면서 존재의 흔적과 파문을 기록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시를 읽으며 사물이 변화하는 규칙과 이 규칙 속의 어떤 질서를 경험한다. 시는 살아있음의 자연성 또는 자연적 삶의 전체에 다가서게 한다. 자연의 거울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느끼고, 또 다르게 생각한다. 시를 읽으며 새로이 사물을 보듯, 우리는 우리 자신을 새롭게 조형한다.
(문광훈,『숨은 조화』, 아트북스, 2006)
“시가 인간 감정의 전 영역을 가로지르는 것이라면” 시작詩作에는 전체적인 감각과 감수성은 물론, 감각의 대비contrast와 깊이가 요구된다. 그것은 곧 “사물의 전경前景과 배후” 또는, “사물이 갖는 서로 다른 명암과 명암 속의 작고 미묘한 뉘앙스, 움직임의 변화”를 대비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이 경우 ‘전경’과 ‘배후’는『카메라 루시다』의 작가 롤랑 바르트의 ‘스투디움Studium’과 ‘푼쿠툼Punctum’에 비견될 수 있다. 텍스트에 대한 보편적인 시선과 해독이 스투디움이라면, 푼쿠툼은 개인의 특수한 시선과 해독, 즉 깊은 상처와 흔적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자 발견이다. 이런 “존재의 흔적과 파문(의) 기록”, 그리고 감각의 발견이 다름아닌 시(적)인 것이다. 우리가 한 편의 시를 쓰고 읽는 이유란 것도 기실은 “자연(이라는) 거울을 통해 우리 자신을 새롭게 느끼고, 또 다르게 생각”함이다. 자연과 사물이 그런 것처럼, 지금-여기, 살아있음의 황홀경ecstasy을 체험하고, 전체로서의 삶을 꿈꾸기 위함이 아니던가. 바로 여기에서 감각의 중요성과 우리의 지성-감성이 통합될 필요가 있다.
2.2. 감각은 서양의 경우 그리스 로마 시대부터 중요한 철학적 주제로 취급되었다. 감각은 육체와 관련되는 정도에 따라 근접 감각(미각․후각․촉각: 고통과 쾌락 유발. 열등. 부정적이고 여성적인 것)과 원격 감각(시각․청각: 객관적. 우등. 보편적 이성. 긍정적이고 남성적인 것)으로 나누어진다. 그리스 철학자들은 일찍부터 감각의 작동 방식, 즉 감각 기관이 정보를 받아들이고 그 정보들이 조직되고 통합되는 방식을 규명한다. 그들은 감각이란 어떤 대상이 감각 기관에 도달할 때 생겨나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하지만 시각과 청각의 경우, 감각 기관과 대상 사이에는 적잖은 거리가 있다. 시각과 청각은 감각 대상에 보다 집중하게 하며, 보편적 이성에 더 깊이 연루되어 있다. 특히 시각은 철학적 사고와 추상화에 활용된다. 하여 그들에게 있어 원격 감각은 근접 감각보다 인식론적, 도덕적, 미학적으로 우월하다. 감각에는 우월한 감각과 열등한 감각이 있다. 이런 감각의 위계에 대한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사람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플라톤은 모든 감각을 이성 보다 열등한 것으로 여기면서도, 시각을 감각 가운데 가장 고귀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고로 가장 명확한 지식은 시각에서 나오며, 인간은 시각을 통해 지식과 지혜를 얻게 된다. 그는 눈이 모든 감각 기관 가운데 태양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여긴다. 빛의 원천인 태양은 선善의 이데아와 결부되었으므로, 태양을 닮은 눈은 선의 이데아를 지향하는 신적 속성을 내포한 것이 된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시각을 최고의 감각으로 여긴다. 청각과 후각, 미각과 촉각이 그 뒤를 잇는다. 두 사람의 견해는 로마 시대를 거쳐 중세까지도 지배적으로 이어진다.
한편, 시각과 청각에 비해 열등한 것으로 지목되고 있는 미각이 새롭게 주목을 받은 것은 18세기에 이르러서다. 이때부터 ‘taste’는 미적 감각, 미적 판단력에 대한 비유로 사용된다. 미美, 즉 아름다움은 논리적 추론의 대상과는 거리가 있다. 미추에 대한 판단은 대상을 보는 순간 즉각적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미추를 판단하기 위해선 특별한 능력, 즉 심미안이나 감식력이 필요하다. ‘taste’가 바로 그런 미적 경험에 대한 비유에 해당한다. 이 때 ‘taste’는 어떤 대상의 뛰어난 부분, 즉 보편적 미를 미학적 원리나 관습으로부터 추론하지 않고 주관적 느낌만으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다른 한편으로, 인도 미학에서 ‘라사rasa’는 ‘예술의 영혼’을 의미한다. 즉 그것은 식물의 즙, 액체. 또는 고양된 기쁨, 오로지 영혼에 의해서만 경험할 수 있는 환희를 말한다. 라사는 서구의 개념과는 달리 지성과 감성, 정신과 육체의 이분법을 넘어선 개념에 속한다. 신인神人 합일의 경지. 예술의 전 과정을 포함하는 라사의 미적 경험은, 자아와 대상의 통일성 속에서 서로의 존재를 완성하게 되는 과정을 말한다. 라사의 궁극적 목적은 개인의 인격 전체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고대의 전통에서 맛의 비결을 아는 것은 우주 만물의 법칙을 아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리고 맛과 멋은 동일한 원리에 근거한다. 맛은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를 통합한 것이며, ‘라사’와 ‘맛’은 주관성을 초월해 어떤 보편적 성질을 지닐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소래섭,『백석의 맛』, 프로네시스, 2009, pp.135~149. 참조)





첫댓글 김상환 교장 선생님! 블렉홀로 빠져 들었다 나온 기분 입니다.
특강 잘 들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가끔 찾아주십시오.
참 행복한 시간
조금은 멀게 또 조금은 가깝게
시에게로 다가설 수 있었어요 함께 해주신 시인님과 동우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