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인·성질 도려내고 업 끊어야 한다”
<40> 이참정에게 보내는 대혜선사의 답장
[본문] 편지를 받은 뒤에 더욱 우러러 보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요즘 인연을 따라 거리낌이 없으며 뜻대로 자유자재하십니까? 행주좌와의 일상생활 속에서 번뇌에 시달리지는 않습니까? 잠이 깨었거나 잠을 잘 때에도 한결같습니까?
전례대로 사는 일에 바쁘게 행동하지는 않습니까? 생사하는 마음이 계속되지는 않습니까? 다만 범부의 생각만 없어졌을 뿐 특별한 성인의 견娩� 없습니다.(但盡凡情 別無聖解)
그대가 이미 한번 웃음에 바른 눈을 활짝 열어 생멸변화(消息)가 몰록 없어졌으니 힘을 얻고 얻지 못함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 의지한 참다운 방편
“피부 다 떨어져도 진실은 있어”
[강설] 앞의 편지에서 이참정이 공부의 효험을 세 가지로 정리해서 보냈다. 대혜선사는 다시 안부와 아울러 다섯 가지를 더 물어보면서 깨달음의 삶이란 어떤 것이라는 점을 밝힌 내용이다. 즉 “일상생활에서 어떤 인연을 만나든지 그 인연에 걸리지 아니하고 자유자재하며 뜻대로 되는가?
이제 더 이상은 번뇌에 시달리지는 않는가? 잠을 자나 깨어 있으나 참나에 대한 주제는 변함이 없는가? 예대로 살되 크게 바쁨을 느끼지는 않는가? 마음의 생멸을 벗어나서 참으로 불생불멸하는가?”하는 등이다.
다음 말씀이 중요하다. “다만 범부의 생각만 없어졌을 뿐 특별한 성인의 견해는 없습니다(但盡凡情 別無聖解)”라는 것이다. 이 말은 선시(禪詩) 선화(禪畵) 선서(禪書) 선차(禪茶) 등, 선의 정신에 의한 예술을 정의할 때 이 한마디로 표현한다. “범부의 생각은 없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성스러운 견해가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뜻이다.
이참정 그대는 이 불법에서 궁극적 경지를 터득하고 크게 한 번 웃었으니 이제 다시 무엇을 논하랴? 모든 문제들은 “마치 사람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운 것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라고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였다.
[본문] 그러나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마땅히 부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그 도와주는 원인(助因)을 제거하고, 그 바른 성질(正性)을 도려내며 그 드러난 업(現業)을 끊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공부하는 일을 다 마친 사람의 방편이 없는 가운데 참다운 방편이며, 닦아 증득함이 없는 가운데 참으로 닦아 증득하는 것이며, 취하고 버리는 것이 없는 가운데 참으로 취하고 버리는 것입니다.
고덕(古德)이 말씀하셨습니다. “피부가 다 떨어져 나가더라도 오직 이 하나의 진실은 존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마치 전단나무의 가지가 다 떨어져 나가더라도 오직 참다운 전단은 존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드러난 업을 끊고 도와주는 원인을 제거하고 바른 성질을 도려내는 극치입니다.
[강설] 대혜선사가 선불교를 통해서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확신하는 이참정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는 말은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의 가르침이다.
설사 확실하게 깨달았다 하더라도 드러난 업인 현업(現業), 즉 열 가지의 악한 행동이 철저하게 없어지게 하려면 그 열 가지 악을 도와주는 원인(助因)이 되는 부추, 파, 마늘, 달래, 흥거와 같은 오신채(五辛菜)를 끊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 오신채는 익혀서 먹으면 도려내야할 바른 성질(正性)인 음욕을 유발시키고 생것을 먹으면 화를 유발시킨다고 하기 때문이다.
요즘의 한국불교는 선불교 중에서도 간화선이 대세다. 다시 말하면 임제종의 법맥을 잇고 간화선의 창시자인 대혜선사의 가풍을 높이 드날리고 있다.
견성오도(見性悟道)하여 대장부가 할 일을 다 마쳤다는 이참정에게 간곡히 당부하는 이와 같은 가르침을 한국의 선불교 납자들은 좌우에 걸어두고 마음에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강원에서는 흔히 말하기를 증시랑은 깨달음을 얻지 못한 사람의 경우를 소개한 것이고, 이참정은 깨달은 사람의 경우를 소개한 것이라고 하였다.
[출처 : 불교신문 2012.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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