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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배경과 황극경세 紀年 체계의 이해
【국문초록】
이 글은 강절선생황극경세서동사보편통재(이하 통재)의 편찬
배경과 방법을 살피기 위해 신익성의 箚文과 2년 5개월 뒤 간행된통재의 범례를 비교ㆍ분석하였다.
차문에 따르면 통재는 신익성의 부친 신흠에 의하여 기획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하였고 신익성이10년에 걸쳐 3번 수정하였다.
신익성은 죽음을 예감하고 인조에게 이 책은 정치에 도움이 되는 중요한 역사서이니 교정하여 출간해주기를 청하였다.
신익성이 차문을 올린 4일 뒤 사망하기 때문에 통재의 범례는 신익성이 차문에서 ‘여러 사적을 모아서 진실한 사실을 밝혔다’는 내용과는 동떨어졌다.
즉 관료들에 의하여 수정된 통재는 기록을 전한다는 의미로 기존의 사서 고려사, 동국통감,박상의 동국사략에서 발췌하고, 사론은 이언적, 이황의 글만 쓴다고 하여 신익성의 고증 작업은 제외되었다.
그 가운데는 신흠이 원천석의 耘谷詩史를 본 뒤 우왕의 왕씨설을 뒷받침하는 고려말의信史로 평가하였고, 신익성도 松都記異의 발문에서 고려말 기사의 신빙성에 의심을 두었으므로 이 내용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론하였다.
송나라 이후 중국 역사의 전거자료 丘濬의 史綱은 世史正綱임도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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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재 편찬의 결정적 계기는 신흠이 소옹역을 연구하다가 중국에서 1606년에 출간된 邵子全書를 구입하여 보았는데, 이 책에는 性理群書句解, 性理大全에 빠진 皇極經世(권1-6)의 역사연표가있었기 때문이다.
신흠은 皇極經世 권5-6을 토대로 송나라에서 원나라 멸망까지의 중국 역사를 보완하고 중국사 다음에 한 칸 내려 단군으로부터 고려말까지의 東史를 보완하여 東史도 천인이 함께하는 역사임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아들 신익성이 이를 완성한 것이다.
황극경세 권1-2는 元會運世와 그 紀年 단위인 日月星辰의 일련번호 총수와 堯임금 21년으로부터 宋 仁宗 31년까지 30년 단위의 역사연표 구성 원리를 보여준 것이다.
권3-4는 開物하는 시기, 堯舜으로부터 송나라까지의 역사를 1년 단위의 60갑자로 국가와 왕명ㆍ연수 등으로 구성된 약연표, 그리고 閉物하는 시기로 구성되었다.
권5-6에서는 요임금 갑진년으로부터 송나라 이전의 자세한 인간 역사를 經世 기년 순서에 따라 1년 단위의 60갑자로 기년하여 서술함으로써 天道와 함께 인간사가 진행됨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기년체계는 元會運世를 日月星辰에 배당하여 1년 12월 30일 12시간의 구성 원리로 天地數 129,600년을 1원 日甲1에 배당한 뒤 日이 주관하는 10800년 단위의 經月之子1 經月之丑2 經月之寅3 ... 經月之亥12로 구성된 12회, 月이 주관하는 30년 단위의 經星之甲1 經星之乙2 經星之丙3 … 經星之癸360으로 구성된 360運, 星이 주관하는 12년 단위의 經辰之子1, 經辰之丑2, 經辰之寅3 ... 經辰之亥4320으로 구성된 4320世, 그리고 1세에 30년을 배당하여 60갑자로 1년 단위의 역사 기록을 서술하도록 구성되었다. 世가 30년 단위이므로 갑자년과 갑오년에만 국가명ㆍ왕명ㆍ연수(연호) 등을 기록하는 기년체계로 구성되었다.
【주제어】
소옹, 구준, 신흠, 신익성, 성리군서구해, 성리대전, 소자전서,
운곡시사, 사강, 세사정강, 황극경세, 원회운세, 일월성신, 기년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 배경과
황극경세 紀年 체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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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차 ====
Ⅰ. 머리말
Ⅱ. 강절선생황극경세서동사보편통재의 편찬과 邵子全書
1. 통재의 편찬 과정
2. 통재의 편찬 범례
3. 신흠의 황극경세 연구와 통재편찬의 계기 - 邵子全書
4. 신익성의 통재 편찬
Ⅲ. 황극경세 紀年의 구성 체계
1. 황극경세의 기년체계
2. 통재의 기년체계
Ⅳ.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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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머리말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10년에 걸쳐 3번 수정 보완한 강절선생 황극경세서동사보편통재1)(이하 통재로 약칭)는 1644년에 편찬되었다.
소옹(邵雍, 시호 康節: 1011-1077)의 저서 황극경세서의 중국역사에 우리나라 역사 즉 東史를 보완하여 함께 실었다는 의미의 책명이다. 17세기 중반에 조선에 이러한 역사서가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는 아직 본격적인 연구는 없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1)의 ‘황극경세서동사보편통재’ 항목에 개략적인 설명이 있으나 丘濬의 역사서 史綱의 정식
명칭인 世史正綱을 史記綱目이라 소개하는 오류를 범하는 등 미진하다.
그 뒤의 모든 연구나 소개 글에서도 이를 답습하고 있다.
성리학의 성립사에서 소옹의 역할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다.
1) 본 연구에 사용한 판본은 고려대 해외한국학자료센터에서 인터넷으로 이미지를 서비스하는 일본 오사카부립 나카노시마도서관 소장본(청구기호 韓4-27)으로 9권 7책이다.
권수제는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 표지제는 皇極經世書, 판심제는 經世書補編, 書根題는 經世書이다.
내사기가 있다. “內賜禮曹判書鄭太和(1602-1673) 皇極經世書東史補編一件 命除謝恩 左副承旨臣安(手決)” 이외에 국립중앙도서관(1책 결본), 규장각, 연세대 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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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희(朱熹,1130-1200)는 이른바 북송 5子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소옹, 장재(張載: 1020-1077),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의 주역과 음양오행론 및 이기론ㆍ성리설에 대한 여러 언설을 종합하여 성리학체계를 정립하였다.
그런데 성리학의 성립사를 지칭하는 용어 염락관민지학(濂洛關閩之學)에 대한 사전적 해설에서는 거의 대부분 주돈이ㆍ정호ㆍ정이ㆍ장재ㆍ주희만 언급하고 소옹이 누락되어 있다.
소옹의 중요한 업적인 황극경세서2)의 선천학이 도가계열과 연결되고 수리론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성리학의 정통계보에 넣기를 주저하는 계기가 된 듯하다. 그렇지만 채원정(蔡元定, 1135-1198)의 도움으로 이루어진 주희의 역학계몽은 소옹의 선천학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업적이다.3) 주역본의에 나오는 도상 또한 소옹의 선천학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와 같이 소옹은 성리학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에 소옹의 학설이 소개된 것은 性理群書句解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4) 그 뒤를 이어 1415년에 간행된 성리대전에 있는 황극경세서를 접하였다.
그러나 두 책 모두 元會運世로 구성된 역사연표가 누락되어 있다.
그러면 신익성은 어떻게 황극경세 기년 체계를 바탕으로 역사를 서술하였을까?
이 글은 이에 대한 의문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작성되었다.
본론에서 서술할 주요 내용은 첫째, 통재의 편찬 과정을 신익성이 인조 임금에게 올린 箚文과 통재의 범례를 중심으로 살펴보면서 이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주변 여건을 정리하여 편찬 동기와 목적을 살펴본다.
그리고 황극경세서는 난해한 글이어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이해는 16세기에 와서야 가능하였다.
5) 서경덕(徐敬德, 1489-1546)을 필두한 북인계열 및 이황(李滉, 1501-1570), 이이(李珥, 1536-1584) 그리고 평산 신씨 가문의 신흠ㆍ신익성ㆍ신경(申炅: 1613-1653)ㆍ신최(申最: 1619-1658)로 이어지면서 황극경세서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6) 이 글에서는 신흠의 황극경2) 판본에 따라 황극경세서 또는 황극경세 두 가지 명칭이 통용된다.
3) 심경호 역(廖名春ㆍ康學偉ㆍ梁韋弦 원저), 1994, 周易哲學史, 예문서원, 426-428쪽 참조.
4) 김윤제, 2000, 「性理群書句解의 내용과 편찬경위」, 규장각 23호, 서울대 규장각.
5) 金恒洙, 1981, 「16세기 士林의 性理學 理解 -書籍의 刊行·編纂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7.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 배경과
황극경세 紀年 체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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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세에 대한 평가를 정리하면서 통재가 출판된 배경과 사상사적 의미를 고찰한다.
둘째, 황극경세 기년 체계의 구성 원리와 통재의 서술 체계의 특징을 소개한다.
Ⅱ.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과 邵子全書
1. 통재의 편찬 과정
신익성은 통재를 완성하여 인조에게 올리는 차문에서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① 송나라 소옹은 「선천도」로써 천지의 시종에 대한 운수를 추산하였으며 역사를 기록함에 요임금 갑진년으로 시작하여 주나라 세종 기미년에 그쳤습니다. 先臣(신흠)이 일찍이 말하기를 “동방의 단군은 요임금 갑진년에 나라를 세웠는데 홍황의 시기이고 문헌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이후에는 약간의 근거할 만한 기록이 있어 황극경세의 기사 아래에 편입하여 [중국과] 거의같은 문화의 변화를 보려고 하였으나 끝내 이룩하지 못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신은 이를 홀로 마음 아프게 생각하였습니다. 신은 일찍이 재야에 있을 적에 아버님의 유업을 수습하여 東史는 삼국유사ㆍ고려사 및 제가의 설에서 흩
6) 박희병, 1997, 「申欽의 학문과 그 사상사적 위치」, 民族文化 20;
정호훈, 2001, 「17세기北人系 南人學者의 政治思想」, 연세대 박사학위논문;
정호훈, 2004, 朝鮮後期 政治思想硏究, 혜안;
조성산, 2001, 「17세기 후반 경기지역 서인 상수학풍의 형성과 의미」, 한국사연구 115, 한국사연구회;
손승철, 2002, 「象村 申欽선생의 생애와 사상」, 강원문화사연구 7;
김은정, 2005, 「樂全堂 申翊聖의 문학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신병주,2005.12, 「화담학과 근기사림의 사상」, 국학연구 7, 한국국학진흥원;
곽신환, 2014.10, 조선유학과 소강절 철학, 예문서원;
조성산, 「申欽의 학문형성과 古學의 영향」, 민족문화연구 65호;
전성건, 2014.11, 「신흠의 상수역학과 역사철학 - 邵易과 春秋를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65호;
조성산, 2014.12, 「16-17세기 북인학풍의 변화와 事天學으로의 전환」, 조선시대사학보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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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진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진실한 사적을 추려서 편찬함에 책이 이루어져 皇極經世書東史補編이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9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10년간 3번에 걸쳐 수정하여 완성하였습니다.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만 참월한 죄는 피할 곳이 없습니다.
② 소옹의 글은 圖書에 묘하게 부합하여 천과 인간이 서로 참여하여 함께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그 편년 기사는 실로 공자가 행사한 일의 의의에 비추어 취하였습니다.
주희가 깊이 체득한 춘추의 법에 대해 후대의 현인들이 중하게 여기는 것도 대개 이와 같습니다.
그 글을 대략 살펴봄에 일을 기록함은 심히 요약되어 마치 治道에 관련이 없는 듯하나, 한 글자도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모두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억누르고 찬양하는 사이에 훈계가 간곡합니다. 인군께서도 이를 알아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책은 본디 사사로이 간직하기에는 부당하므로 감히 이렇게 잘 베끼어 장정을 하여 올립니다.
③ 병세가 점점 심하여져 미처 교정에 이르지 못하여 오류가 반드시 많을것입니다. 바라건대 눈을 감기 전에 전하께 진달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 시간이 있을 때 읽어보시고 유신들에게 내리어 고증을 발휘하여 끊어진 학문[絶學]이 되지 않도록 드러나게 하여 주십시오.
④ 책이 완성되면 원컨대 한번 책을 품고서 등대하여 평생 집에서 들은 바를 갖추어 진술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홀연히 고치기 어려운 병을 만나 다시 임금님을 뵐 희망이 없습니다. 이 또한 數입니다. (중략)
⑤ 임금이 답하기를 “(중략) 올린 책은 마땅히 考訂을 거쳐 간행하도록 하겠다.” 이에 그 책을 옥당에 내렸다.
7) 樂全堂集 권8 箚 進皇極經世書東史補編箚. “①伏以宋邵雍因先天圖。推算天地始終之運。紀事始自堯之甲辰。止于周世宗己未。先臣嘗言東方檀君立國於堯之甲辰。則洪荒之際。文獻亡徵。然三國以後。有稍稍可據而書者。欲編入於紀事之下。庶成同文之化。竟不果焉。臣竊痛之。臣曾在草土中。收拾遺業。凡東史自三國遺事,高麗史及諸家之說。搜羅放失。摭撰眞實事蹟以爲書。目之曰皇極經世書東史補編。爲卷者九。十年之間。三易藁而成。用力不可謂不勤。而僭越之罪。無所逃矣。②邵雍之書。妙契圖書。參合天人。至於編年紀事。則實取仲尼見諸行事之義。朱熹以爲深得春秋之法。後賢之所推重蓋如此。驟而觀之。則紀事甚約。若無關於治道。而一字不苟。皆有深意。抑揚之間。訓戒丁寧。人君亦不可以不知此也。此書本不當私藏。故敢此繕寫粧䌙投進。③第病勢漸劇。未及校正。訛謬必多。而冀於未瞑之前。達於紸纊。伏願聖明。淸燕之暇。特賜乙覽。因下儒臣。攷證發揮。
俾闡絶學焉。④書成願欲一抱書登對。備陳平生所聞於家庭者。而忽遘難醫之疾。更無瞻天之望。此亦數也。臣粗辨死生之理。了無芥滯。而唯是恩恤之典。到死漸隆。感結于中。不知所云。取進止。⑤答曰。聞卿病重。深用憂慮。所進之書。當令儒臣考訂而刊行焉。仍下其冊於玉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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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익성의 箚文은 편찬 배경과 목적을 잘 보여준다.
①은 통재 편찬은 신익성의 아버지 신흠에 의하여 시작되었으나 완성되지 못하고 부친의 사후 신익성이 1634년경부터 10년에 걸쳐 3번 개고하였음을 알려준다.
이곳에서는 9권이라고 하였지만 그의 樂全堂集 「樂全居士自敍」에는 10권으로 되어 있으므로 마지막에 권수 변동이 있었던 듯하다.
8) 신흠의 통재 편찬목적은 소옹의 역사서술이 요임금 갑진년으로 시작하여 주나라 세종 기미년까지이므로 그 이후의 중국의 역사를 추가하고 그 아래에 東史를 보완하는 역사서를 편찬하여 중국과 같은 역사의 변화를 살펴보려는데 있었다. 그리고 東史에 대한 통재 전거 자료로는 삼국유사ㆍ고려사가 주요 참고자료였음을 밝힘과 더불어 제가의 설에서 흩어진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진실한 사적을 추려서 책으로 편찬하였다(諸家之說 搜羅放失 摭撰眞實事蹟以爲書)는 기술이 주목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통재의 범례와 비교하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추적하기로 한다.
②는 소옹의 원 저작 황극경세서에 대하여 그의 역사서는 도서와 묘하게 부합되어 천인이 통합되는 이치가 담겨있다는 평가이다. 그 글은 공자를 모범으로 하여 춘추와 같이 한 글자 한 글자에 깊은 뜻이 담겨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이 책은 개인이 소장할 책이 아니라 임금께서 정치를 하는데
도움이 되는 중요한 서적이므로 임금께 올린다고 강조하고 있다.
③은 이 자문을 올린 이유가 심한 병에 걸려 교정이 미흡하지만 급히 이책을 올리니 임금께서 읽어보시고 신하들에게 고증을 명하여 絶學이 되지않도록 청하고 있다. 이는 이 책 내용의 중요성과 서술에 대한 자긍심을 알수 있는 대목이다. 이 자문은 인조 22년(1644) 7월28일(계축)에 올렸다.9)
④는 책이 완성된 후 시간이 되면 책을 품고 임금 앞에 와서 집에서 즉부친으로부터 들은 것들을 모두 아뢰면 좋겠지만 자신의 數(운수)가 다 되어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고 체념하고 있다. 이 글은 앞서 언급하던 제가의 설에서 흩어진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진실한 사적을 추려서 책으로 편찬하였다는 말과 연관성이 있다.(후술)
8) 樂全堂集 樂全堂集序 樂全居士自敍. “先君嘗欲以東國事蹟補入於邵子經世書而竟不果。小子遂編摩成書十卷。”
9) 인조실록 22년 7월28일(계축) “東陽尉 申翊聖病甚 上箚, 仍投進所撰 皇極經世書東史補編九卷, 上答曰: "觀卿上箚, 予甚慮念。 所進新書, 實是殷鑑, 當令儒臣, 校正刊行。卿其善爲調理, 待差入來, 畢陳所懷。" 仍下其冊及箚子于玉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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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는 신익성의 요청이 인조 임금에게 받아들여져 이 책은 옥당에 내려져 교정하여 출간하게 되었음을 알려준다. 신익성은 이 글을 올린 뒤 자신의 예언과 같이 며칠 뒤 8월 2일에 세상을 떠난다.10) 승정원일기 인조 24년(1646) 12월 6일(무인)에 경상 감사 허적(許積: 1610-1680)이 통재를 진상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2년 5개월이 지난 뒤 출간되었다.11)
2. 통재의 편찬 범례
1646년에 출간된 통재의 범례는 다음과 같다.
⑥ 소옹의 황극경세서는 象으로 數를 일으키고 하늘을 미루어 합일하니 그 편년 기사의 법은 실로 춘추의 법을 취했다. 以元經會는 오로지 천도로써 수가 펼쳐지니 간지만으로 원회운세에 배속하여 천도의 소장하는 이치를 드러냈다. 以會經運은 천도를 미루어 인간사를 합하고 그 인간사를 대략적으로 적어 그 대강을 제시하여 천인이 서로 참여하는 묘함을 드러냈다.
以運經世는 인간사만을 다루며 그 대요를 기록하여 인간사의 막힘과 풀림의 기미를 드러내었다.
제가 편술한 것은 단지 이운경세의 법을 썼습니다.12)
⑦ 소옹의 기록은 주나라 세종 기미년 북쪽으로 거란을 정벌하였다는 사실에서 그치고 송 태조가 선양을 받은 이후는 기록하지 않았다.
신은 삼가 구준이 편찬한 史綱에서 그 目의 기록은 버리고 그 綱의 기사를 취하였다.
[중국의10)기사를 보완하였다는 의미]13)
春沼子集 권7 平山申最季良甫著 行狀 先府君行狀. “甲申春。在郊庄。微感寒疾。聞逆變甚急。疾入京。病遂谻。知不能痊。命子弟。呼箚藁。投進邵子皇極經世書東史補編。上優答。命下玉堂。校讐刊行。累遣御醫。賫藥診視。竟以八月初二日丁巳。終于南部明禮坊第。壽僅五十七。”
11) 승정원일기 인조 24년 12월 6일(무인) “姜栢年啓曰, 禮曹啓目, 慶尙監司許積上送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伊洛淵源·中庸或問等冊, 進上五件。館上五件外, 又有國用三十件,
令政院, 稟旨處置事, 允下矣。進上及弘文館上外餘件, 何以處之乎? 敢稟。傳曰。以下缺”
12)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 「凡例」. “邵雍皇極經世書 以象起數 推天合一 其編年紀事之法 實取春秋之義 以元經會 則專以天道布筭矣 只以干支配於元會運世 以見天道
消長之理 以會經運 則推天道而合人事 略其事實而只提其綱 以見天人相參之妙 以運經世則專以人事 紀其大要 以見人事否泰之機 臣之所編 只用以運經世之法”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 배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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⑧ 우리 동쪽 사적은 삼가 정인지 고려사ㆍ서거정 동국통감ㆍ박상 동국사략에 근거하였다. 논찬은 오로지 이언적ㆍ이황 등 제 선정의 설을 이용하고 감히 억측하여 판단하지 않음으로써 후세에 전한다는 의의를 중요시하였다.14)
⑨ 고려 말의 사실은 모두 본조 유신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찬정하여 여러 훌륭한 임금의 열람을 거친 것을 원안으로 하고 감히 제가의 설을 두루 인용하지 않는다.15)
⑥은 기년체계와 관련된 것이므로 3장에서 살펴본다.
⑦은 소옹의 역사 서술이 송나라 이전까지이므로 구준(丘濬: 1421-1495)의 史綱에 있는 綱의 기사를 선택하여 보완하였다는 뜻이다.16)
중국에서 관찬으로 편찬된 상로(商輅: 1414-1486)의 속자치통감강목(이하 속강목)을 배제하고 엄격한 화이론에 입각한 강목서법이 구현된 세사정강을 주된 근거 사서로 채택한 것은 주목된다.17) 통재의 중국사 하한선은 원나라 황제가 죽은[殂] 순제 2년 정미년까지다. 무신년 대명태조 홍무 원년이하는 고려사의 기록만 있다. 고려사 기록의 하한선은 임신년 공양왕이 손위하여 고려가 망하였다는 기록까지이다.
서론에서 언급하였듯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황극경세서동사보편통재’ 항목에서 구준의 역사서 史綱의 정식 명칭인 世史正綱을 史記綱目이라 소개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이는 世史正綱이 사고전서존목총서에 영인본으로 발간되기 이전에는 한ㆍ중 도서관목록에서 검색이 되지 않고
13)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 「凡例」 “邵雍所紀 止於周世宗己未 北征契丹 宋太祖受禪以下不祿 臣謹據丘濬所編史綱 舍其目而取其綱”
14)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 「凡例」 “我東事蹟則 謹據鄭麟趾高麗史 徐居正東國通鑑 朴祥東國史略 論贊則專用李彦迪李滉諸先正遺說 不敢臆斷以重傳後之義焉”
15)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 「凡例」 “麗末事實皆因本朝儒臣 奉敎撰定經截列聖睿覽者 爲案 不敢旁引諸家之說”
16) 구준의 세사정강의 綱이 어느 정도 채택되었는지는 별도의 연구가 필요하다.
17) 세사정강에 대해서는 다음 글 참조. 윤정분, 2004, 「世史正綱과 經世」, 韓國史學史學報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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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는 희귀한 책이어서 실물을 접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18)
그러나 유희춘의 일기에 1577년 중국으로 사신으로 가는 양응정(梁應鼎, 1519-1581)에게 부탁한 주요 구입 도서목록에 世史正綱이 있으므로19) 이 당시 유통이 가능한 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구준은 조선 중기에 그의 저술 대학연의보20)와 문공가례의절을 통해 조선에 널리 알려진 인물이어서21) 世史正綱도 같이 수입된 듯하다.
방증으로는 김우옹도 세사정강에서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이후에도 분주 기년을 하여 正統으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夷狄을 배척한 것에 자극을 받아 명나라에서 관찬으로 편찬된 상로의18) 윤정분의 세사정강 연구도 四庫存目叢書 史部 6책(1996, 중국 齊魯書社)이 발간된이후이다.
19) 眉巖先生集 권14 日記, “丁丑(1577) [1월] 二十七日。余以梁應鼎爲聖節使將赴京。理山來人蔘二斤。可買中國書冊。修簡送之。令景濂持人蔘。往謁託之。所最望者。皇朝名臣
編錄,歐陽公集,空同集卽李夢陽,致堂管見。其次待問會元,翰墨書,世史正綱,源流至論凡八種也。”
20) 윤정분, 1992, 「大學衍義補硏究: 15世紀 中國經世思想의 한 分析」, 연세대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 윤정분, 2002, 中國近世 經世思想 硏究: 丘濬의 經世書를 중심으로, 혜안.
21) 禹貞任, 2009.8, 「조선전기 性理書의 간행과 유통에 관한 연구」, 부산대 대학원 사학과박사학위논문, 73쪽 97-98쪽 105쪽 123쪽 151-2쪽 154쪽 181쪽 266쪽; 송정숙, 1996,
「大學衍義가 朝鮮朝 統治理念書 편찬에 미친 영향-中庸九經衍義와 洪範衍義를 중심으로-」, 書誌學硏究 12 참조.
세사정강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 배경과
황극경세 紀年 체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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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강목의 기년체계와 綱의 서술에 변화를 준 것으로 추측된다.
김우옹의 속강목은 정조가 세자로 있을 때 서연에서 교재로 채택되어 교정을 명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안정복이 이 책의 교정에 관여한 것으로 추측된다.22) 이는 장서각에 소장된 상로의 속강목 가운데 안정복의 장서인이 있는 판본이 있기 때문이다.23) 이 안정복의 수택본에는 상로의 강목기사 옆이나 앞에 김우옹의 속강목에 채택된 기사나 추가된 기록 또는 삭제된 기록을 표시하였다.
이곳에 史綱이라 표기한 부분이 있는데 이 또한 世史正綱의 약자이다.24) 이는 世史正綱의 사론을 보면 ‘史綱’이라고 약칭하고 있으므로 확실하다고 하겠다. 순암집에는 世史正綱의 필법에 논의한 글이 있으므로 적어도 필사본이나 초략본은 소장하고 있었다
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안정복이 ‘丘瓊山 史綱’이라 표현한 자료도 있다.
22) 정조실록 19권, 정조 9년 2월 10일 庚寅. “安東幼學金復建上言, 請贈判書金宇顒書院,賜恩額。 敎曰: "書院之毋得輕易賜額, 旣有先朝受敎, 不可輕議, 而贈判書金宇顒, 卽穆廟朝出入經幄之人, 聞亦師受於先正李滉云。 所編續綱目, 向年予在春邸, 取見原本, 仍令宮僚校正, 進講於冑筵, 不可無示意之擧。 遣禮官, 致祭于晴川書院。 亦有起感者, 一體致祭于文康公 張顯光 東洛書院。” 김우옹 속강목 「續資治通鑑綱目事略」에는 정조의 속강목에 대한 교서 3건이 실려 있다.
23) 속자치통감강목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K2-121.
24) 안정복이 속강목에 기록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打點者 出史綱下同 圓圖者 通鑑纂要 金東岡 續綱目選”
안정복 수택본 속강목(장서각, K2-121)
66 韓國史學史學報 35(2017. 06)
25) 화서학파가 편찬한 宋元華東史合編綱目 「書法」 正統 조에서도 방
손지ㆍ구준 등이 원을 정통이 아니라 무통으로 처리한 예를 따른다고 하였
다. 그러므로 조선 중기 이후 구준의 세사정강은 그의 저술 대학연의보
ㆍ문공가례의절과 더불어 조선사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범례의 ⑧⑨는 앞서 살펴본 신익성의 차문과 비교하면 미묘한 차이가 감
지된다. 이 차이의 의미에 대하여 상술하기로 한다. 신익성의 차문에서는
삼국유사ㆍ고려사 및 제가의 설에서 흩어진 자료를 모아 정리하여 진실
한 사적을 추려서 편찬하였다 하였으나 ⑧에는 차문의 삼국유사는 생략
되고 동국통감과 박상의 동국사략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사론은 오로
지 이언적과 이황의 설만을 채택하여 기록을 전하는데 의의를 둘 뿐이라고
하였다. 즉 감히 억측을 하거나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신익성의
차문에서 제가의 설을 모아 진실한 사적을 추려서 편찬하였다는 말로 비추
어 본다면 자료비판과 판단을 완전히 배제한 것이다.
⑨에서는 고려말의 사적에 대해 신하들이 정리하여 올린 기록을 조선의
선왕들이 친람하여 결재한 고려사의 기록을 따를 뿐 제가의 분분한 설은
인용하지 않는다고 더욱 엄격하게 새로운 사실의 추가를 배제하였다. 이는
신익성의 사후에 진행된 교정과정에서 신익성이 東史 서술에 추구했던 진
실한 사적 부분이 제외되었을 가능성을 알려준다. 그 가운에 고려말 우왕의
성씨에 관한 부분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보다 앞서(1603) 박동양(朴
東亮: 1569-1635년)은 원천석(元天錫, 1330-?)의 耘谷詩史를 발견하여
이의 서문을 쓰고 편집하여 책자의 형태로 정리하였으며, 나아가 간행하여
널리 배포하려 하였지만 한참 지난 뒤에야 간행되었다.26) 그렇지만 운곡
시사는 친한 사람들끼리 돌려보거나 필사를 한 듯하다. 그 가운데 신흠27)
25) 순암선생문집 9권 書, 「與鄭子尙書 甲午」. “續綱目。乃宣廟名臣金東岡宇顒所編。十分
簡嚴。較俗行本。優劣自辦。恨不能刊布流傳也。其大體以宋平太原後。始繼正統。此已有
定論。元雖統一。而分注紀年。斥爲無統之例。是亦攘夷之義。而前此 丘瓊山 史綱亦然矣。”
26) 정호훈, 2007, 「조선 후기 耘谷詩史의 영향과 高麗史 敍述의 변화」, 지방지식인 원천
석의 삶과 생각, 혜안, 57쪽.
27) 象村稿 권52 漫稿下 晴窓軟談 下. “元天錫者。高麗人。恭愍時不仕。居原州。與牧隱
諸老相往來。其遺稿中有直載當時事迹。後世所不能知者。以辛禑爲恭愍子者。此其直筆之
康節先生皇極經世書東史補編通載의 편찬 배경과
황극경세 紀年 체계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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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신익성28)은 이 책을 보고 우왕은 공민왕의 아들임이 분명하다는 인식을
지녔다.29) 그러므로 신익성이 차문에서 책을 품고 임금께 그동안 집에서
전해들은 이야기들을 펼쳐보고 싶어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즉 통재는
신익성의 편찬으로 알려져 있지만 동사부분은 그의 판단이 들어간 역사서
술은 교정 과정에 완전히 배제된 형태로 출간된 것이다. 그렇지만 통재
가 조정에서 출간된 중요한 요인은 성리대전에 소옹의 역사 서술 부분이
생략되어 있으므로 통재로 보완이 가능하고 또한 그 후대의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사를 보완하였기 때문에 국가에서 출판할 만한 역사책이라고 판
단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3. 신흠의 황극경세 연구와 통재 편찬의 계기 - 邵子全書
본 절에서는 조선에서 소옹의 사상을 접할 수 있는 서적의 서지사항과
내용을 분석한다. 그리고 통재 편찬의 동기가 된 신흠의 소옹 역학에 대
하여 정리한다. 소옹의 사상은 성리대전 외에도 그보다 앞선 송나라 시
대에 편찬된 성리군서구해라는 책을 통해서도 습득이 가능하였다. 성리
군서구해는 송각본도 있었으나 주로 전집과 후집이 함께 판각된 원나라
각본이 유통되었다.30) 성리군서구해의 소옹 관련 저작물은 성리대전과
尤者。(중략) 詩語雖質朴多不成語。而事則直書無隱。比之麟趾之麗史。不啻日星螮蝀之相
懸。讀之淚數行下。大抵麗之亡。由於戊辰之廢主。廢主之後。如牧隱儕流尙存。一脈公議
未泯。故其時道傳,紹宗等輩倡爲非王氏者爲忠。謂王氏者爲逆之論。簧鼓朝廷。眩惑人
心。遂得以魚肉士流。箝制口舌。僅五年而國亡矣。生乎其時而正直自樹者。其爲生辛苦顚
沛當如何也。然而人心未盡眩。人口未盡箝。草野之間。有此董狐之筆。豈非石壓筍斜出者
耶。” 象村稿 권46 外稿 5, 彙言 五. “禑昌之事。當以元天錫所紀爲信史。”
28) 이덕형. 松都記異, 부록. “後十年判府李公。示其分司時所編松都記異者。余受而卒業。
紀勝國遺事土風氓謠。直書革除間疑諱之蹟 皆有可据而辨者。尤致眷眷於花潭先生。窮理
牖蒙之業。俾後人有所觀感。此足爲舊都之文獻。而他日采入於太史之籍。不止爲矮巷巵言
爾。噫判府公以牧隱之裔。歷世曠遠。迺能採掇羣言。能明當日所不能明者。則非所謂紹述
亡墜者耶。遂撫卷三歎。而題之云。慕崇禎乙亥孟秋平山人申翊聖謹跋。”
29) 정호훈, 2007, 63-64쪽.
30) 원전 이미지는 다음 사이트에서 참조.
68 韓國史學史學報 35(2017.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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