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대 불교는 후주(後周) 세종의 폐불사건 이후 침체된 분위기가 송의 통일과 함께 왕실의 외호를 받으면서 대장경을 인쇄하는 등 불교 부흥에 진력하여 중국화한 불교로서 발돋움하는 시기였다.
특히 선종의 조사선 사상이 중국 고유의 사상과 결합하여 실천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생활 종교로 거듭남으로써 출가중심의 선수행이 점차 출가와 재가를 구분짓지 않는 경향으로 발전되어 갔다.
더욱이 사대부들 사이에서 참선이 유행함에 따라 당말 5대(唐末·五代(907-959) 이후 오가(五家)로 나뉘어 발전해 오던 선종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송초에 이미 위앙종(爲仰宗)은 그 맥이 끊어지고 법안종(法眼宗)도 5대(五代)와 송초(宋初)에 활약했던 영명연수(永明延壽) 이후로는 교세를 얻지 못하였으며, 조동종(曹洞宗) 역시 북송 때에는 부진하였다.
단 운문(雲門)과 임제(臨濟) 두 계통은 활발하게 세력을 키워갔는데 운문종이 5대말(五代 末)부터 북송 초기(北宋 初期)에 걸쳐 번창하였고 남송 이후로는 임제선이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임제종은 송대에 이르러 수산성념(首山省念 926-993), 분양선소(汾陽善昭 947-1024), 석상초원(石霜楚圓 987-1040)이 뒤를 잇고 초원(楚圓) 문하(門下)에서 황용혜남(黃龍慧南1002-1069)과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가 배출되었으며 혜남은 황룡파, 방회는 양기파를 세움으로써 5家에서 7宗이 되었다.
북송 대에는 황룡파가 우위를 점령하는 듯했으나 더 이상 두드러진 발전이 없었으며 남송대에는 양기파가 최전성기를 구가하였다. 남송 말에는 화북지방을 중심으로 조동선도 융성하여 결국 임제종의 양기파와 조동종만이 남게 되었다.
양기파의 제일인자인 원오극근(圓悟克勤) 문하에서 나온 대혜종고(大慧宗 1089-1163), 호구소융(虎丘紹隆 1077-1136)은 남송 초에 크게 활약하였으며 법맥도 번성하였다. 그러나 그 내부에서도 남송 초기에는 대혜파가 번성하였고, 남송 말엔 입장이 역전되어 호구파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호구파 문하 밀암함걸(密庵咸傑 1116-1184)에 이르러 그 법계에 파암 조선(破庵祖先 1136-1211), 송원숭악, 조원도생(松源崇岳, 曹源道生) 세분파가 나타났다. 그 중에 송원파나 조원파는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심한 대립 양상을 일으킬 조짐마저 보이며, 이 두 파는 모두 동방으로 활로를 찾게 된다.
그러나 파암조선을 계승한 무준사범(無準師範) 계통은 왕실의 신앙을 얻어 번영했다. 당시는 불교도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배불론(排佛論)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불(儒·佛) 조화의 사상도 이루어지고 있는 때였으며 무준사범이 정계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자 선정일치(禪淨一致)의 사상보다도 선유일치(禪儒一致)를 주장하게 되었다.
과거 대혜파가 국수주의적 선종 집단을 만들었으나 시대의 흐름 앞에서 결국 쇠퇴의 길을 걸었던 반면 그 반대파였던 호구파가 대두한 배경 뒤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특히 사범의 제자 설암조흠(雪巖祖欽 1216-1287)의 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경향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설암조흠은 유석(儒釋)의 조화를 설파하였는데 그의 제자가 바로 고봉원묘(高峯原妙)이다. 고봉 스님은 혜능 下 23대이며, 임제 18대 적손이다.
고봉의 생애
고봉 스님은 13세기 송말 원초의 선사로서 남송 건희2년(南宋 嘉熙2年) 무술년(戊戌(1238)年)에 소주 오강현(蘇州 吳江縣)에서 출생하였다. 속성은 서(徐)씨이고 위(諱)는 원묘(原妙)이며 호는 스스로 고봉(高峰)이라 하였고 사람들은 고불(古佛)이라고 불렀다.
고봉 스님이 태어난 1238년은 송나라가 몽고와 연합하여 금(金)나라를 멸망시킨 지 4년 뒤이며, 다시 송과 몽고의 대립 정국으로 돌입하여 수십 번의 크고 작은 규모의 싸움이 계속되는 불안한 때였다.
출가하게 된 직접적 동기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다만 유년시절에는 성격이 느긋하고 무게가 있으며 말과 웃음이 적고, 품행은 마른 학과 같이 고고하였다. 어려서부터 가부좌하기를 좋아하였고 스님들을 보면 합장하고 인사하는 것이 예법에 맞았다 한다.
15세(1252년) 교종(敎宗) 사찰인 가화현(嘉禾縣) 밀인사(密印寺) 법주(法住)스님에게로 출가하여 1253년(16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18세(1255년) 천태교학을 배웠다. 그러나 항상 마음 속으로 불입문자 교외별전(不立文字 敎外別傳)을 주창하는 달마종(達磨宗)의 가르침이야말로 일대사(一大事:인생의 큰 일)를 해결하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해에 항주(杭州)로 나와 제방의 여러 선지식을 찾아 행각(行脚)하였다.
20세(1257년) 마침내 선종 사찰인 정자사(淨慈寺)에 들어감으로써 교종(敎宗)에서 선종(禪宗)으로 출가 행로를 바꾸었다. 그 곳에는 단교화상(斷橋和尙)이 주석하고 있었는데 당대의 유명한 선장(禪匠) 무준사범(無準師範)을 이은 제자였다.
22세(1259년) 3년 사한(死限)을 정하고 참선하려고 곧 단교화상에게 법을 청하였다. 단교 화상은
"태어날 때에는 어디에서 오고 죽으면 어느 곳으로 가는가(生從何來 死從何去)? "
라는 화두를 내려주었다. 그러나 생각이 두 갈래로 갈라져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지 않았으며, 공부 방법도 분명히 알지 못한 채 일년 남짓의 세월을 보냈는데 마치 매일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과 같이 보냈다.
23세(1260년) 고명한 설암(雪巖) 스님이 북간탑(北磵塔)에 주석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갔다. 그러나 첫날은 법을 묻기도 전에 설암 선사에게 쫓겨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다시 찾아가자 설암 스님은 조주(趙州)의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하게 하였다.
이 때의 공부에 대하여 개당보설(開堂普說)에서 고봉스님은
"무자화두(無字話頭)를 참구할 때에는 3년 동안 두 때의 공양시간을 제외하고는 자리에 앉지 않았고, 피곤할 때에도 기대지 않았으며 비록 늘 경행(經行)하며 애를 썼지만, 항상 혼침과 산란 두 마(魔)로 더불어 섞여 한 뭉텅이를 지어서 온갖 재주를 다 부려도 물리치지 못했다. 이 '무자화두'에는 마침내 한 순간도 힘을 얻어 일념(一念)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스스로 결심한 후에 병의 근원을 생각하니 다른 것은 없고 다만 의심위에서 공부를 짓는 것이 아닌지라 들 때는 잠깐 있고 들지 않을 때는 곧 없으며, 설사 억지로 의심을 일으키려해도 일어나지 않았으며, 마음을 쉬고 의심을 해가더라도 다만 잠깐이요, 또 혼침과 산란의 두 막대기에 떨어짐을 면치 못하여 공연히 허다한 세월을 허비하며 허다한 신고만 먹을 뿐 작은 진취도 없었다."
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고봉 스님은 매일 아침 공부에 대해 점검을 받고자 설암 스님을 참문(參問)하였다. 그러나 설암 스님은
"누가 너의 시체를 끌고 왔느냐(阿誰拖 死屍來)? "
라고 묻고는 미처 대답하기도 전에 주먹으로 때려 쫓아버렸다. 이것을 타사시화두(拖死屍句話)라고 한다. 이렇게 하기를 매일 반복하니 약간 공부에 진취가 있었다.
24세(1261년) 설암 선사가 남명사(南明寺)로 떠난 뒤 고봉 스님은 곧 뒤따라가려고 하였으나 길이 멀다는 주위의 만류로 경산(徑山)의 쌍경사(雙徑寺) 선방에서 한 철을 지내게 되었다.
하루는 잠을 자는데 돌연 단교화상의 법문중 만법귀일 화두(萬法歸一話)가 문득 생각났다. 선방에 온 지 한달 만의 일이었고 이로부터 엿새(6일)동안 의정(疑情)이 돈발(頓發)하여 잠자고 밥 먹는 것도 잊어버린 채 오로지 화두에만 몰입하였다.
만법귀일 화두(萬法歸一話)는 무자 화두와는 달랐다. 애써 의심을 하려하지 않아도 곧 의정이 생겨 털끝만큼도 다른 생각이 나지 않았고 곧 무심삼매에(無心三昧)에 들어갔다.
3월 22일, 이 날은 달마대사의 기일(忌日)이었다. 3탑각(三塔閣)에서 대중과 함께 경전(經典)을 독송하다가 문득 고개를 드는 순간
"백년 삼만 육천 일을 반복하는 것이 원래 이놈이다.(百年三萬六千朝 反 覆元來是者漢)"
라는 오조(五祖) 법연의 진찬(眞讚:영정에 써진 글씨)을 보는 순간 타사시화두(拖死屍句話)에 대한 의심을 타파하였다. 이 때가 24세였다. 이때의 경지를 선요(禪要)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허공이 무너지고 대지가 꺼져서 나와 남의 차별이 모두 없어진 것이 마치 거울로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았으며, 백장야호(百丈野狐), 구자불성(狗子佛性), 청주포삼(靑州布衫), 여자출정화(女子出定話)를 차례로 빠짐없이 증험해 보아도 분명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고봉 스님은 이 첫 번째 깨달음에 대한 점검을 위해 그해 하안거(夏安居)를 마치고 곧장 설암선사가 있는 남명사로 갔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문답을 나누었다.
설암 "누가 너의 송장을 끌고 여기에 왔는가?"
고봉 " 억! "
설암 스님이 몽둥이를 집어들자 고봉 스님은 몽둥이를 붙잡고 말하였다.
고봉 "오늘은 저를 때리지 못하실 것입니다."
설암 "무엇 때문에 때리지 못한단 말인가? "
고봉 스님은 소매를 떨치고 휙 나가 버렸다. 그 이튿날
설암 "만법(萬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느 곳으로 돌아가는가?"
고봉 "개가 뜨거운 기름 솥을 핥습니다."
설암 "너는 어디에서 그런런 헛된 것을 배워왔느냐?"
고봉 "스님께서 의심하실 만합니다."
설암 선사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암 선사가 비록 여러 가지로 단련해줌을 받아 공안(公案)을 분명하게 밝혀내었고, 또 남의 속임도 받지 않았으나 말할 적마다 마음이 멍하여(茫然) 일상생활에서 자유롭지 못하였고 마치 남에게 빚을 진 것과 같았다. (禪要)
* 들고 있던 공안을 밝혀내고도 뭔가 미진함을 느꼈음을 술회한 내용이다. 한번 타파하여 1700개의 화두가 동시에 다 궤뚫어져야 하는데 단 하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아직 원통(圓通)한 것은 아니다.
25세(1262년) 남명사를 떠나 강심사(江心寺), 국청사(國淸寺), 설두사(雪竇寺) 등을 두루 행각하였다. 28세(1265년) 다시 설암 선사를 찾아가 도량사 그리고 천령사(天寧寺) 등에서 설암 스님을 시봉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설암이 다음과 같이 물었다.
설암 "날마다 일상사에서 주재(主宰)가 되느냐?
고봉 "네, 주재가 됩니다.
설암 "잠잘 때에도 주재가 되느냐?"
고봉 "주재가 됩니다."
설암 "잠잘 때에는 꿈도 생각도 없고 보지도 듣지도 못하거늘 주인공이 어디에 있는가?"
* 주재(主宰) : 매사 자기가 주인공이 되어 일상사를 자유자재로 끌고가는 것.
이 질문에 고봉 스님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암 선사는 다음과 같이 경책을 내려주었다.
"오늘부터는 부처를 배우려하지 말고 법도 배우려하지 말며 옛을 궁구 하거나 지금을 궁구하지도 말라. 그저 배고프면 밥 먹고 피곤하거든 잠 자고 잠이 막 깨거든 정신을 가다듬어 나의 한결같이 깨닫는 주인공이 필경 어느 곳에서 안신입명(安身立命:편안히 머물다)하는가 만을 생각하라."
29세(1266년) 임안(臨安) 용수사(龍鬚寺)로 떠나면서
"일생을 버리고 한낱 바보가 될지언정 결정코 이 일착자(一着子:주인공)를 아주 분명하게 들어내고 말리라."
라고 맹세를 하였다. 고봉 스님은 용수사에서 9년간 머물었다. 이 시기 는 대오(大悟)와 정진의 힘을 얻었던 중요한 시기였다.
34세(1271년) 용수사에서 5년을 지낸 어느 날 밤, 함께 자던 도반이 목침을 땅에 떨어뜨리자 덜그덕 소리가 났는데 그 소리를 듣고 문득 일착자(一着子) 의단(疑斷)을 타파하였다. 고봉 스님은 그 때의 느낌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사주(泗州)의 대성인(大聖人) 친견한 듯하고 떠난 객이 고향에 돌아온 것 같네.
원래 다만 옛 그 사람일 뿐 옛 행리처 바꾼 바 없도다.
如泗州見大聖 遠客還故鄕 元來只是舊時人 不改舊時行履處
24세 때의 첫 깨달음을 얻은 후 10년 만에 확철대오(確徹大悟)를 맞는 순간이며, 고봉 스님의 나이 34세(1271)였다. 이 해는 몽고가 국호를 원(元)이라 고쳐 역사상 원조(元朝)가 시작된 해이기도 하다.
고봉 스님은 그 뒤에도 4년 동안 더 용수사에 머물면서 보림(保任)하였는데 초라한 움막에서 한 벌의 납의(衲衣)만을 입고 솔잎을 먹으며 오로지 좌선삼매(坐禪三昧)로 일관할 뿐이었다. 또한 철저한 계행으로 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수행은 감히 누구도 따라갈 자가 없었다.
한 번은 폭설로 열흘동안 길이 끊겨 식량이 공급되지 않은 적이 있었지만 눈 속에서 편안히 선정에 들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고 많은 사람이 감명을 받기도 하였다.
인품 또한 자상하고 자비스러워 '약경'이라는 한 승려가 병이 나자 " 병환중에 인연을 끊고 지내는 것은 바로 공부하기 좋은 때이다. 너의 냄새나는 몸은 나에게 맡기고 다만 병마를 물리칠 것만 생각한다면 꼭 그렇게 될 것이다." 하고 그를 돌보았으며, 틈틈이 가르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이 승려가 식초가 먹고 싶다고 하자 직접 마을에 가서 구해 왔으나 식초가 아닌 술이었다. 이를 다시 바꾸기 위해 왕복 40리 길을 마다하지 않았다.
36세(1273년) 원(元)나라가 남송의 수도 임안(臨安)까지 위협하자 고봉스님은 그 다음해(1274)에 무강(武康) 쌍계봉(雙계峰)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해 7월 도종(度宗)이 죽고 공종(恭宗)이 즉위하였다.
고봉 스님의 명성은 더욱 알려져 암자가 비좁아서 수용이 어려울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운집하였다. 하지만 원나라 병사가 건강(建强), 임안(臨安) 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공제(恭帝)를 포로로 잡아가는 등 정국이 어지러워지자 학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1279년 남송이 멸망하고 이민족인 몽고가 중국을 병합하였다.
42세(1279년) 고봉 스님도 천목산 사자암(天目山 獅子庵)으로 거처를 옮겼으며, 다시 많은 대중들이 모여들자,
44세(1281) 사자암 서쪽 장공동(張公洞)에 토굴을 지어 사관(死關)이라는 현판을 걸고 입적할 때까지 15년 동안 이곳을 나오지 않았다.
사관은 사다리가 아니면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험한 곳이었다.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는 토굴이었지만 시봉도 마다하였다. 찾아오는 납자들에게는 다음 3관(三關:세 가지 관문)으로 입실(入室)제자들을 시험하고 공부 정도를 점검하였다고 한다.
3관(三關)은 다음과 같다.
"첫째 밝은 해가 하늘에 떠서 비추지 않는 곳이 없거늘 무엇 때문에 조각구름에 가리움이 되었는가? "
"둘째 사람마다 있는 그림자는 촌보도 옮기는 일이 없건만 무엇 때문에 밟지 못하는가?"
"셋째 온 대지가 불구덩이니 무슨 삼매를 얻어야 불에 타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 관문을 통과한 사람이 있으면 3관 외에 또 3관(三關)을 더하여 질문함으로써 철저히 점검하였다.
50세 세조(世祖) 정해(丁亥 1287)년 스승 설암 화상이 입적하였다. 입적하기 전 불자(拂子)와 법을 잇기를 부촉하는 게송을 보내왔다. 그 해 겨울 천목산 사자선사에서 설암 스님의 후계자로서 앞으로 대중을 지도하는 조실임을 알리는 절차를 밟게 되었다. 선요의 맨 처음에 나오는 [개당보설]이 바로 그때의 법문이다. 이로써 고봉은 남악下 22세이며, 임제下 18세 적손이 되었다.
도를 묻는 자가 끊이지 않았고 고봉의 간절한 법문을 듣는 자는 모두 감복하였다.
54세(1291년) 운부(運副) 학사(鶴沙) 구정발(瞿霆發)이 전장(田莊)을 보시하여 사자암과 10리쯤 떨어진 곳에 대각선사(大覺禪寺)를 건립하였으나 건립한 뒤에는 제자 조옹(祖雍)에게 일체를 맡기고 관여하지 않았다.
58세(1295년) 조그마한 계율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 세인(世人)의 존경을 받았고, 법도가 있으면서도 입실제자(入室弟子)들에게 자비함을 잃지 않았던 고봉스님은 명초(明初)와 조옹(祖雍)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나서 대중에게 영결문을 고하고 임종게(臨終偈)를 설하였다.
來不入死關 와도 死關에 들어온 일이 없으며
去不出死關 가도 사관을 벗어나는 일이 없네.
鐵蛇鑽入海 쇠로 된 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撞倒須彌山 수미산을 쳐 무너뜨리도다.
원나라 원정원년(元貞元年) 을미년(乙未)년 12월 초하루였다. 세수 58세 이며, 법납(法臘)은 43세이다.
고봉 스님에게 계를 받은 이와 가르침을 청한 자는 만여 명에 이르며, 제자는 백여 명쯤 된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현재 기록상으로 법을 이은 제자는 중봉명본(中峰明本), 단애요의(斷崖了義), 포납조옹(布衲祖雍), 공중이가(空中以假) 등 4人만 나타나 있으며, 그 중에서 중봉명본이 으뜸이다.
원(元)의 인종(仁宗)은 무오(戊午 1318)년에 보명광제선사(普明廣濟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 고봉화상에 대한 저서로는 개당보설[開堂普說], 고봉원묘선사어록(高峰原妙禪師語錄), 선요(禪要)등이 있다.
고봉 스님의 말씀 (- 禪要 중에서 -)
"부처님과 조사들이 도에 들어간 인연과 도를 깨달은 연유를 이끌어 표본을 삼아 만학(晩學)과 초기(初機)들에게 나아갈 수 있게 하나니 말해보라. 어떻게 나아갈 것인가? 보지 못했는가? 옛사람이 말하기를 만일 생사를 해탈하려면 조사관문(祖師關)을 뚫어야 한다 하였으니...."
佛祖 入道之因 及悟道之由 以爲標格 晩學初機 方堪趣向 且道 如何趣向 不見 古人 道 若要脫生死 須透祖師關
"먼저 평소 가슴속에 받아들였던 일체 선악의 물건을 몽땅 버리고 털끝만치도 남겨두지 말고 온종일 오뚝하게 앉아 바보같이 하여 어릴 때와 다름이 없게 하라. 그런 뒤에야 좌복에 고요히 앉아 정념(正念)을 굳혀 향상의 현묘한 진리를 정미롭게 궁구하고, 서래(西來)의 밀지(密志)를 참구하되 간절하게 꼭 잡고 놓칠까 조심조심하여 털끝만한 끊어짐도 없게 하며 동정(動靜)에 한결같아야 하느니라."
若要眞正決志明心 先將平日胸中 所受一切善惡之物 盡底屛去 毫末不存 終朝兀兀如痴 與昔 孩 無異然後 乃可浦團靜坐 正念堅凝 精窮向上之玄機 硏味西來之密旨 切切拳拳 兢兢業業 直敎絲毫無間 動靜無虧
"최상의 바른 눈을 활짝 떠서 공겁(空劫) 이전의 자기가 지금 환화색신(幻化色身)과 둘이 아니고 다름이 없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공겁 이전의 자기인가? 적(부적적)! 주장자를 한번 치고 말하기를 '금강이 쇠몽둥이를 맞으니 진흙 소의 눈에 피가 나도다.'"
直須廓頂門正眼 저破空劫已前自己 與今幻化色身 無一無別 且道如何是空劫已前自己 적 卓柱杖一下云 金剛喫鐵棒 泥牛眼出血
"말해 보라. 어떤 것이 진실하게 참구하고 진실하게 깨달은 소식인가? (조금 있다가) 남산엔 구름이 일고 북산엔 비가 내린다."
且道 如何是實參 實悟底消息 良久云 南山起雲 北山下雨
"바다 밑의 진흙 소가 달을 물고 달리고
바위 앞의 돌 범은 새끼를 안고 졸도다.
무쇠 뱀은 금강의 눈을 뚫고 들어가고
오랑캐가 코끼리를 타니 백로가 끌고 가도다.
海底泥牛啣月走
巖前石虎抱兒眠
鐵蛇鑽入金剛眼
崙騎象鷺노牽견
이 네 글귀 안에 능히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하고 놓아주기도 하고 빼앗기도 하는 한 글귀가 있으니 그것을 찾아내면 일생의 공부하는 일을 마쳤다고 허락하리라."
此四句內 有一句 能殺能活 能縱能奪 若檢點得 出 許與一生參學事畢
다음은 향상일로를 제시하는 고봉의 법어이다.
"불성을 분명하게 보았더라도 나의 점검에 의거해 본다면 아직도 생사 이 언덕의 일이다. 만일 향상일로를 말한다면 다시 청산 저 밖에 있는 줄 알아야 한다."
若據西峯 點檢將來 猶是生死岸 頭事 若曰向上一路 須知更在靑山外
"만일 이 일을 말하자면, 참구하려면 할 수 있고 깨달으려면 깨달을 수 있고…… 비록 그렇기는 하나 다시 30년을 기다려야 된다. 왜냐하면 두 뿔과 네 발굽은 모두 지나갔으나 꼬리는 아직 지나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若謂此事 參也參得 悟也悟得 說也說得 行也行得 來也來得 去也去得 然雖如是 更須三十年 始得 何故 兩角四蹄都過了 尾巴過不得"
"설령 분명하게 깨달았다 하더라도 서봉의 저쪽, 다시 저쪽에서 사람을 위함과 위하지 않는 일착자(一着子)를 보려면 아직 30년을 기다려야 한다."
要見西峰 那邊更 那邊 爲人不爲人一着子 且待三十年後
"어떤 사람이 딴 지방에 멀리 갔다가 차츰차츰 길을 돌려 집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으며, 쥐가 쇠뿔에 들어갈 적에 얼른 얼른 달려서 뾰죽한 막바지에 이른 것과 같으며…… 백척의 장대 끝에 머무른 것 같아서 한 생각이라도 어긋나면 신명을 상실할 것이니 구인(九刃)의 공을 이루더라도 아무쪼록 보임(保任)을 잘하여 온전히 이끌어야 한다."
遠行他方 漸漸回途 己至家 舍 又 如鼠入牛角 看看走至尖尖盡底 又如捉賊討贓 拷至情理俱盡 不動不退 無去無來 一念不生 前後際斷 卓卓巍巍 孤孤逈逈 如坐萬 崖頭 又若停百尺竿上 一 念 乖 喪身失命 將至功成九 切須保任全提
"이것을 얻지 못하면
저것을 어찌 얻으랴.
저것을 얻고 나면
이것을잊어버리네.
비록 그렇기는 하나 다시 이것이다 저것이다함은 다 거짓인 줄 알아야 한다. 정말 진실한 것은 적( )! 돌( )! 아지랑이와 허공 꽃이로다."
爭得那箇 旣得 那箇 忘却者箇 然雖如是 更須知道者箇那箇 總是假箇的的眞底 陽 空 華
"오고 감이 걸림 없고 묘용이 자재롭다. 설사 이러한 경지에 이르렀더라도 정녕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좇는 것이며 화(禍)를 이끌어 오고 재앙을 초래하는 짓이다. 말해 보라 어떤 것이 근본인가? 주장자를 던지고 말하였다. 전륜성왕이 세 치의 쇠를 던져버려도 분명히 온 세계는 칼과 창이리라."
從來無애 妙用縱橫 直饒親 到者裏 正是棄本逐末 引禍招殃 且道 如何是本擲主丈云 抛出輪王三寸鐵 分明 遍界是刀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물었다.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는데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조주화상이 말하였다. '내가 청주 땅에 있을 때 베옷을 한 벌 만들었는데 그 무게가 일곱 근이었다.' 했으니 아! 점잖은 조주 스님이 진흙을 들고 물에 뛰어 들었다. 특히 그 스님의 의심을 끊어 줄 수 없을 뿐 아니라 또한 천하 납승들을 속여 언설의 소굴 속에서 죽어 있게 하였도다. 나는 그렇지 않아 오늘 누군가가 '만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하나는 어디로 돌아갑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에게 말하기를 '개가 펄펄 끓는 기름 가마솥을 핥느니라.'하리라."
僧問趙州和尙 萬法歸一 一 歸何處 州 云我在靑州 作 一領布衫 重 七斤師 云大小趙州 拖泥帶水 非特不能 爲者 僧斬斷疑情 亦乃 天下衲僧 死在葛藤 裡 西峰則不然 今日 忽有人 問 萬法歸一 一歸何處 只向他道 狗熱油 信翁信翁 若向者裡 擔荷得去 只者 一箇 信字 也是眼中着屑
"불자로 ∴과 ≡을 긋고 말하기를 대중들이여, 알겠는가? 만일 이것을 알 면…… 열반이라 하겠지만……"
以拂子 ∴ ≡획 大衆還會마 若也會得 … 皆名涅槃
출처 : 좋은날 | 글쓴이 : 무한대
지도로 공부 하기
[ 지도 설명]
호남성을 상(湘) 이라고도 표기 하며(자동차 번호판), 모택동 고향이 바로 상담(湘潭)市 소산 입니다.
(위의 작은 지도에 표기: 상담시 ) 관광지로 유명한 장가계도 호남성에 있습니다.
- 복판의 산시성-시안시(서안) : 당나라때 즉, 혜충국사가 주석 하셨을 때의 당나라 서울(장안)
- 상하이의 남쪽 항저우(항주): 근처에 있는 "임안"에 고봉 스님이 주석 하시던 천목산 서봉이 있는곳
- 남쪽 광둥성의 위에 후난성(호남성) 창사시(長沙) 바로 밑에 상담(湘潭)(옛날에는 縣 이고 지금은 市),
후베이성(하북성)과 후난성(하남성) 의 접경구역 일대가 중국에서 둘째로 큰 담수호인 동정호 이며,
상강(湘江)은 광동쪽의 지류가 북으로 모여 상강(湘江)을 이루어 동정호로 유입 되는 강임.
- 지도를 보시면 알지만 여기서 어떻게 무엇의 남쪽이니 북쪽이니 고정된 방위를 말 하겠습니까.
* (지도에 표시 하려해 도 기술 부족 이라 표시가 않되네,,,)
출처 : 불지촌 우담화의 노래 | 글쓴이 : 寒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