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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잔디
전새벽
모니터에 떠 있는 하얀색 화면은 눈으로 뒤덮인 설원 같이 보이기도 했다. 동우는 언젠가 눈으로 뒤덮인 집 앞의 초등학교 운동장을 걸었던 것을 생각했다. 그땐 마치 몸이 손톱만한 크기로 줄어 우유로 만든 하얀색 케이크 위를 걷고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케이크의 끝자락에서 한가운데까지 걸어가 뒤를 돌아 봤을 때 거기에 자신의 발자국 밖에 없는 것이 몸서리치도록 외로운 날이었다.
동우는 화면 왼쪽 상단에서 깜빡이는 커서를 바라봤다. 그것은 설원에 한 곳에 반복해서 찍히는 발자국 같았다. 발자국의 주인은 사방이 온통 하얀 그곳에서 선뜻 아무 곳으로도 움직이지 못해 머무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동우는 최면에 빠져드는 사람처럼 그 나타남과 사라짐의 반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윽고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타자를 치기 시작했다.
‘영업 1팀 손실경위 및 대응방안 보고.’
일단 제목을 적고나니 그 뒤부터는 쉬웠다. 동우는 머릿속에 맴돌던 생각들을 육하원칙에 따라 문장으로 옮겼다. ‘영업 1팀 한동우 대리’가, ‘보고일자로부터 2주 전’에, ‘회사에 약 십억 원의 손실을 끼치게’ 된 경위는 ‘대금수취 전에 선하증권을 수요가에게 양도, 수요가가 최종 부도’했기 때문이며 이는 ‘평소 관계를 믿고 선결제라는 계약내용을 어겼기 때문’이며 ‘별도의 보고 없이 자체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내용이었다.
동우는 엔터를 치고 한숨을 쉬었다. 기껏 마음을 먹고 움직였더니 다다른 곳이 낭떠러지인 기분이었다. 낭떠러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동우는 출력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대충 훑어 오탈자가 있는지 확인한 뒤 인쇄된 종이를 결재판에 끼워 팀장에게 내밀었다.
“손실관련 보고입니다.”
“응. 내가 좀 보고 부를게.”
“네.”
대답을 하고 돌아서는 동우를 팀장이 “한 대리,”하고 다시 불렀다.
“생각 안 바뀌었나?”
“네.”
단호하게 대답하는 동우를 팀장이 애석하다는 듯이 쳐다봤다. 팀장이 아무 말을 하지 않자 동우는 살짝 목을 숙이고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정말로 눈 덮인 벌판을 헤매다가 온 사람처럼 몸이 차가웠다.
회사 건물의 로비를 돌아다니면서 동우는 휴대폰을 확인했다. 해주의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눈 온다는데, 우산 있어?
오늘 일기예보를 보지는 않았다. 오늘 눈이 올만한 날씬가, 그렇게 생각하며 바깥을 보자 과연 눈이 오고 있었다. 답장을 할까, 동우는 잠깐 망설이다가 휴대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담당임원이 동우를 호출한 건 지난주의 일이었다. 거래처의 부도는 분명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보고하지 않은 담당의 책임은 막중하다는 얘기를 임원은 아주 천천히 설명했다. 결국 ‘네가 책임을 지라,’는 그 얘기를 들으면서 동우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변명할 여지도, 발뺌할 의지도 없었다. 그러나 임원의 입에서 이어진 이야기에 동우는 완강히 저항했다.
영업팀에서 나와 지원부서로 가라는 얘기였다. 상무님!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젓는 동우에게 임원은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라며 흥분을 가라앉히라는 손짓을 했다. 말인즉, 사규를 어기고 회사에 막중한 손실을 입힌 것은 명백히 징계위원회 회부 대상이나, 동우가 그동안 이룬 성과를 감안하여 별도의 징계조치 없이 소속만 바꾸는 걸로 결정했으며 그렇게 되기까지 다른 임원들의 상당한 저항이 있었지만 담당 팀장과 임원의 강력한 의지로 관철시키는 데에 성공했다는 얘기였다.
동우가 알기로 회사에는 회사만의 언어가 있었다. 회사의 언어로 얘기한 임원의 말은 해석하자면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이라는 얘기였다.
“어느 팀 말입니까?”
동우는 고맙다는 말은 빼둔 채 물었다.
“좋은기업팀.”
동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짐작도 하지 못한 곳이었다.
“전부터 궁금했는데, 대체 거기는 뭐하는 팀입니까?”
“기업의 사회적 책임활동이라고 아나? 대학생들 데리고 봉사활동도 하고 임직원이 달동네 방문해서 연탄도 나르고, 고아원 후원하고, 그런 거.”
“압니다. 그냥 회사 이미지 좋게 포장하는 거 아닌가요?”
“맞아. 그런데 의도가 다른데 있다고 하더라도 사회에 분명 도움이 되는 일들이지.”
“영업 말고 다른 일을 해야 한다면, 그것도 재무나 기획도 아니고 그런 한직으로 가라면 회사에서 나가라는 얘기로 알고 퇴사하겠습니다.”
“한 대리.”
임원은 목소리를 나직하게 깔고 말했다.
“회사에서 기회를 준거야. 고맙게 생각하고 받아들여.”
회사 사람들은 흥분하면 회사 언어를 구사하는 것을 잊었다.
“상무님, 제가 의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영업업무 해온 걸 잘 아시잖습니까.”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동우는 본인의 목소리가 너무 커지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임원도 그것을 느꼈는지 조금 더 생각해보고 며칠 뒤에 다시 얘기를 하자고 했다. 동우는 꾸벅 인사를 하고 임원실을 빠져나왔다. 동우에게는 고마운 인물이었다. 반항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영업에서 지원으로 밀려난다는 것은 동우의 회사에서는 유배와 다를 바 없는 일이었다. 이제 막 동우가 단독으로 개발해 온 아이템의 첫 거래가 이루어지려던 참이었다. 유배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유배 선고가 내려진 것이 지난주 금요일, 그리고 오늘이 화요일이었다. 오늘쯤 다시 임원의 호출이 있겠구나. 동우는 산책로를 벗어나 회사 정문 처마 밑에서 눈이 오는 모습을 쳐다보며 생각했다. 그리고 회전문을 돌아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데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휴대폰을 꺼내보니 햇님보육원에서 온 문자였다. 올해도 햇님보육원에 쏟아준 관심과 애정에 많은 감사를 드린다는, 연말마다 보내는 의례적인 내용이었다. 햇님보육원은 회사에 취직하기 전에 반년 정도 자원봉사를 했던 곳이었다. 보육원에 다녔던 게 벌써 언제 적 일인가. 오년은 더 된 일일 것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버스를 타고 서울을 벗어나 한 시간 반쯤 가서 만났던 아이들, 이제 그 애들의 얼굴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동우는 회사에 들어왔던 첫해 겨울에도 이런 메시지를 받고 아, 새해에 꼭 애들을 보러 가야지라고 결심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두 번째 찾아온 연말쯤에도 이런 문자를 받았던가? 아마 받았을 것이었다. 그때부터는 문자를 보고 아무런 생각을 안했던 것 같다. 스팸메시지 취급을 하면서 삭제했을지도 모른다. 몇 년 동안 휴대폰을 바꾸지 않았는데 작년이나 그 이전에 온 메시지 기록이 없는 것을 보면 그랬을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정말 애들을 좋아해서 거길 다녔던 건가?
아니야,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동우는 고개를 저었다. 취업은 잘 안되고, 더 딸 자격증도 없고 해서 봉사활동 시간이나 늘려볼까 하고 시작했던 것이고, 그 뒤로는 해주를 보려고 갔던 것 같다.
처음 보육원에 갔던 날, 생전 처음 가본 C시의 시외버스터미널에 내려 주변을 살피던 동우의 눈에 해주가 들어왔다. 버스에서 거의 마지막으로 내린 해주를 보면서 동우는 자신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눈이 크거나 코가 오뚝해 미인 소리를 들을 만한 정도는 못되었지만 기품이란 게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상체를 꼿꼿하게 펴고 다니는 몸가짐과 온화한 표정에서 동우는 그런 것을 느꼈다.
동우는 터미널에서 걸어 나와 보육원에서 알려준 대로 국밥집 앞에서 시내버스를 기다렸다. 기품 있는 여자도 거기에 서 있었다. 동우는 그녀가 자신과 같은 정류장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훅, 하고 한 번 더 크게 숨을 들이쉬었고 그녀와 보육원 입구에 나란히 들어설 때 운동장에서 놀던 몇 명의 아이들이 흙먼지를 일으키며 뛰어와 “해주쌤!” 이라고 외치는 것을 들으면서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됐다. 음대 대학원생이라는 것은 보육원의 원장으로부터 들었다. 주말마다 이곳에 와서 아이들에게 노래와 악기를 가르친다는 것도 함께 들었다.
해주가 아이들을 데리고 강당으로 들어간 뒤 원장은 동우에게 앞치마를 내밀었다. 꽃무늬가 새겨진 작은 앞치마였다. 몇 시간 뒤 해주가 아이들을 우르르 데리고 식당으로 들어섰을 때 동우는 그 앞치마를 메고 커다란 밥솥을 휘저으며 김을 빼느라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맨 마지막으로 식당에 들어온 해주는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해주의 웃는 얼굴 보고 동우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다음 주에도, 그 다음 주에도 보육원에 계속 와야겠다는 것, 그리고 그러려면 꽃무늬가 아닌, 크기도 이것보다는 더 큰 앞치마를 하나 사야겠다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씩씩하게 밥을 먹고 운동장으로 나갔다. 뒷정리는 맡겨두고 좀 쉬라는 해주의 말을 듣고 동우도 아이들을 따라 나갔다. 몇 명 아이들이 담장 끝에 모여 기웃거리는 모습을 자세히 보니 아이들이 고양이에게 무언가를 먹이고 있었다. 반찬으로 나온 소시지를 조금씩 남겨 종이컵에 담아온 모양이었다.
“길고양인데 점심때면 늘 여기로 와요.”
돌아보니 원장이 서 있었다. 육십 정도 되어 보이는 원장은 머리는 하얗게 셌지만 모발이 풍성하고, 체구는 작았지만 강단이 있어 보이는 여자였다.
“이름이 있나요?”
동우의 질문에 원장은 아직 없다면서, 아이들과 함께 지어주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동우가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뒤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식사를 마친 아이들이 운동장으로 뛰어나오는 소리였다. 그 중에 몇은 저희들끼리 꼬집고 도망치고 하는 장난을 치는 모양이었다. 도망을 치던 아이 하나가 동우에게 뛰어와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었다. 숨겨달라는 뜻 같기도 하고, 같이 놀자는 뜻 같기도 했다. 동우의 허리까지 밖에 안 오는 작고 마른 남자이었다. 자신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는 아이를 동우가 번쩍 들어 안아 올리자 아이는 까르르 웃었다. 아이를 내려놓고 “뛰지 말고 놀아”라고 하자 아이는 아랑곳 않고 더 크게 소리를 지르며 고양이가 있는 쪽으로 뛰어갔다.
“아이들을 너무 안아주지 마세요. 가급적 스킨십은 하지 않는 게 좋아요.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는 괜찮지만.”
원장은 봉사자와 스킨십을 나눈 아이들은 봉사자들이 떠나면 급격히 우울해 한다고 덧붙였다.
“그 음악 선생님은요? 엄청 안아주던데요.”
원장은 동우가 해주의 이야기를 꺼내는 데에 다른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듯 한 의심스러운 눈길을 보내더니 선심 쓴다는 듯이 얘기를 꺼냈다.
“해주 씨는 칠 년째 여기에 오고 있어요. 저 애들 중 몇 명은 갓난아기 때부터 보기도 했고요. 아기 때부터 안아주던 아이들을 이제 와서 컸다고 못 안아주게 할 수도 없겠더라고요. 그리고 해주 씨는 봉사시간 때문에 몇 번 나오고 말 다른 봉사자들과는 달라서.”
원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동우를 쳐다봤다. 어쩐지 노려보는 눈길이었다. 동우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그래도 저는 남자니까 애들을 번쩍 들어 올려 줄 수도 있고, 다들 재미있어 하던데.......”
“안돼요. 봉사자들도 자기들이 즐거우니까 아이들과 신체접촉을 많이 하는데 지금 초등학교 일학년인 애들이 중학교 갈 때까지 꾸준히 올 자신이 없으면 저 고양이나 만져주세요.”
원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아이들과 몸을 맞대지 않고 어울리는 것은 불가능한 일에 가까웠다. 동우가 두 번째로 보육원을 방문하던 날, 초등학교 일학년인 쌍둥이 여자애들이 먼저 동우의 손을 잡았다. 늘 고양이를 위해 제일 많은 반찬을 남기는 아이들이었다. 일곱 살 아이들의 작은 손과 온기가 전해지자 동우는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세 번째로 방문했을 때 동우는 얘들아, 라는 말 대신 쌍둥이들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봉사를 시작한지 두 달 무렵에는 자원봉사자들과 거의 말을 섞지 않는 중학생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이름으로 불렀다. 세 달쯤 되자 봉사자들이 보육원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수많은 아이들이 동우에게 달라붙기 시작했고 동우는 원장의 눈을 피해 그들 모두를 안아주었다. 인기스타 자리를 내준 꼴인 해주는 그런 아이들과 동우를 멀리서 지켜보며 웃었다. 세 달 전에 동우가 그랬던 것처럼.
보육원에서 봉사를 시작한지 다섯 달, 동우는 지원했던 무역회사로부터 합격 소식을 들었다. 입사 전 마지막 주말에 그는 과자와 음료수를 잔뜩 사가지고 보육원을 찾았다. 탄산음료는 사오지 말라던 원장도 그날만은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은 원장의 시선을 아랑곳 않고 아이들을 번갈아가며 목마를 태우고 비행기를 태우고 간지럼을 태웠다. 입 주변에 과자가루를 잔뜩 묻혀가며 떠드는 쌍둥이를 보면서 동우는 신입사원 합숙 교육만 끝나면 다시 봉사를 시작하리라 마음먹었다.
회사에서의 첫해는 지독한 해였다. 팀에서 가장 오래 근무했던 직원 둘이 각자의 사유로 연달아 퇴사를 했다. 지침을 줄 사람도, 검토를 해 줄 사람도 없었다. 동우는 파트장들의 퇴사로 눈덩이처럼 불어난 일을 혼자 해치우고 있는 팀장에게 도저히 도움을 부탁할 수가 없어 거래처를 쫓아다니면서 일을 배웠다. 상대 회사의 담당자들을 형님,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인터넷 검색으로는 알 수 없는 무역실무에 관한 지식과 업계의 관행, 거래처 동향 같은 것들을 물었다. 대부분은 호의적이었지만 ‘이런 노하우는 지적재산인데 맨입으로 되겠냐’면서 너스레를 떠는 이들도 많아 저녁 술자리가 잦았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자 십이월 무렵에는 이미 업계에서 동우를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영업1팀은 그 해에 회사 영업부서 중에서 최고의 실적을 거뒀다. 보육원 얘기는 완전히 잊은 뒤였다.
보너스를 받은 날 동우는 팀장과 양껏 술을 마셨다. 그리고 토요일인 다음날은 늦게까지 자다 일어나 바깥을 산책했다. 그리고 슬슬 친구들과도 송년회 계획을 세워야겠다고 생각하며 휴대폰 연락처를 훑었는데, 일과 관련되지 않은 사람 중에 최근 일 년 간 통화를 해본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중에 해주가 있었다. 해주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어떨까 반신반의하며 전화를 걸었다. 해주는 반갑게 전화를 받아주었고 둘은 그 다음 주에 만났다. 여전히 기품이 있는 여자였다. 동우의 적극적인 애정공세로 둘은 그 다음 달에는 연인이 되었다가 그 다음해 십이월에는 부부가 되었다. 그게 삼년 전의 일이었다.
동우는 자리로 돌아와 앉았지만 뭘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사고에 대한 보고서를 다 쓰고 나니 딱히 할일이 없었다. 그래서 뭘 해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인터넷 창을 열었는데, 포털의 메인 페이지에 어느 기업의 연말을 맞아 달동네에 얼마치의 생필품을 제공했다는 기사가 올라와 있었다. 문득 좋은기업팀이 생각났다. 동우는 사내메신저를 통해 직원 명단을 살펴봤다. 짐작대로 좋은기업팀에는 안면 있는 직원이 있었다. 체육대회 때 한편으로 공굴리기인가를 했던 또래의 남자 직원이었다. 동우는 그에게 요새 어떤 추진하는 것 중에 어떤 일들이 있냐고 물었다. 어떤 일을 하는지 들어나 보자는 심정이었다. 잔디요, 라고 직원은 대답했다.
-잔디요?
-네, 학교 운동장에 잔디밭 깔아주는 거요. 그게 정서에 좋거든요. 교실에서는 밖을 보면 온통 녹색어서 좋고, 운동장에 나가서는 그 풀을 만지는 게 좋고. 아동시절에는 정서발달이 엄청 중요해요. 다만 회사입장에서 그럴싸한 일은 아니죠. 팀에서도 좀 특별한 거 하라고 하는데 화제를 일으킬 수 있는 건 대부분 일회성 행사에요. 잔디는 평범해 보이지만 계속 거기에 남잖아요. 학교 측에서 별도로 관리할 예산이 없으니까 몇 년 동안 회사에서 계속 지원을 할 계획이고요. 근데 이건 아직 제 선에서 추진하는 거고 경영진 승인받은 사항은 아니에요. 그런데 왜요?
동우는 그냥 궁금했다며 이유를 둘러댔다. 그리고 결심이 서는 것을 느꼈다. 좋은기업팀 따위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동우는 계속 바쁘고 싶었다. 앉아서 기획안이나 쓰는 한갓진 지원부서 말고, 전방에서 뛰어다니며 성과를 내고 싶었다. 잔디라니, 너무나 한가해 하품이 나올 것 같은 이야기였다.
이직을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한 동우는 채용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열었다. 그런데 인터넷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때 마침 누군가 “인터넷이 왜 안 되지?” 라고 말하는 게 들렸다. 누군가 어디에 전화를 걸더니 서버 긴급 점검 중이니 삼십분 정도 걸릴 거라는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누가 일층에 내려가서 커피나 마시고 올라오자는 제안을 했다. 그래서 사업부의 직원들 중 여섯 명 정도가 일층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한대리, 결혼한 지 삼년쯤 됐나?”
옆 팀의 차장이었다. 그는 최근에 둘째를 낳았다. 다른 직원들은 주식 얘기를 하고 있었다.
동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차장이 애는, 이라고 물었다.
“안 낳으려고요.”
“왜?”
“어휴. 있어봤자 골치잖아요.”
“골치라니, 얼마나 예쁜데. 제수씨가 낳기 싫대?”
“제가 갖지 말자고 했어요.”
“애기 엄청 좋아했잖아?”
“생각이 바뀌었어요.”
차장은 계속해서 왜 생각이 바뀌었는지, 나중에 후회할거라느니, 부모님이 크게 상심할거라느니 꼬치꼬치 말을 이어갔다. 그 모습이 꼭 ‘출산장려위원회’ 같은 데에서 나온 사람 같다고 동우는 생각했다.
“지난달에 둘째 태어난 거 알지? 이것 봐, 너무 예쁘지 않아? 둘째는 첫째 키울 때랑 또 다른 느낌이야. 첫째 때는 당황스럽고 힘들고 그래서 짜증도 많이 냈는데, 둘째는 다 예뻐. 밤에 깨서 울어도 예쁘고 똥 기저귀도 예쁘고 심지어 토를 해도 예뻐. 하나일 때도 좋았는데 둘이니까 집이 꽉 차는 느낌이야. 애들이 있다는 거, 정서적으로 굉장히 안정이 되더라고.”
그러고 나서 차장은 전화를 받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동우는 한숨을 쉬었다. 심장이 격하게 뛰고 있었다. 두근거림이 느껴지자 갑자기 분노가 치밀었다. 커피숍 밖으로 차장을 쫓아나가고 싶었다. 쫓아 나가서 만일 정말로 애가 갖고 싶어 죽겠는데 안 생긴다면, 그래서 검사를 받아보니 아내가 불임이라면 대체 어떡해야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혼이라도 할까요? 그리고 애 순탄하게 잘 낳을 것 같은 여자 데려다가 다시 살아볼까요? 상상 속에서 동우는 핏대를 세우고 그렇게 소리치다가 차장에게 달려들어 그를 넘어뜨렸다가 어느새 목을 조르고 있었다. 상상이지만 일이 그 지경이 되자 동우는 고개를 휘저었다. 나쁜 의도는 아니다. 그저 자랑하고 싶었겠지. 동우는 차장의 마지막 말을 떠올렸다.
‘애들이 있다는 거, 정서적으로 굉장히 안정이 되더라고.’
그러자 문득 좋은기업팀의 직원 얘기가 떠올랐다. 동우는 잔디를 보고 만지는 게 정말 정서적인 효과가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휴대폰을 꺼내 잔디, 정서, 영향이라는 세 단어를 검색창에 입력했다. 그런데 검색결과 중에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이런 내용이 담긴 어떤 블로그였다.
자연환경에의 노출은 분명히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창밖의 자연환경을 감상하는 것은 환자의 회복에 긍정적인 기능을 한다고 밝혀졌고 학교 운동장을 잔디로 조성하는 경우 체육활동을 위한 쾌적함은 물론 안전함까지 선사할 수 있다고 한다. 햇님보육원 운동장에도 잔디를 깔아주고 싶다.
글쓴이를 보니 해주의 아이디였다. 동우는 해주가 그 아이디를 가지고 인터넷에 가끔 글을 올린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들여다 본적은 없었다. 관찰당하는 느낌을 받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막상 해주의 글을 발견하게 되자 동우는 다른 글들이 궁금했다. 다른 몇 개의 글을 클릭해 보니 주로 좋아하는 작가의 신간이 나왔다느니 엄마가 고구마를 보내왔다느니 하는 대부분 동우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하나만 빼고.
불임이라니. 아이를 일찍, 많이 갖고 싶었던 나는 이제 이 사실을 가까스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오빠는 대체 어떤 기분일까. 어머니에게 어떻게 말하려는 것일까. 친구들에게는, 동료들에게는? 아이는 왜 낳지 않느냐는 주변의 질문들을 어떻게 받아드리게 될까? 나는 오빠를 떠나줘야 하는 게 아닐까?
동우는 마지막 문장을 속으로 되풀이 해 읽었다. 그러고 보니 불임소식을 알게 된 뒤 두 달 동안 해주와 제대로 된 얘기를 나누지 않았다. 병원에 다녀온 날 밤 해주는 동우의 품에 안겨 흐느꼈다. 동우는 일단 해주를 달래야겠다는 생각에 아이는 없어도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하며 해주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밤에 해주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손조차 잡지 않은 것 같다. 글은 일주일전에 올라온 것이었다. 해주는 나를 떠나려는 것일까. 동우의 몸이 떨려왔다. 동우는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화장실 좀, 이라며 커피숍을 나서는 동우의 뒤로 “한 대리, 우는 거야?” 라고 저들끼리 말하는 게 들렸다.
동우는 찬물로 얼굴을 씻으며 생각했다. 당장 해주에게 전화를 해야겠다고, 전화해서 우산 은 있다고,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밥은 먹었는지, 음악학원은 오늘 별 일 없는지, 정기연주회 준비는 잘 되어 가는지 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 근사한 저녁을 먹자는 말도 덧붙여.
동우는 휴대폰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전화를 걸어봤자 해주는 평소와 같이 상냥한 목소리로 다행이라고, 별 것 아니라고, 먹었다고, 별 일 없다고, 잘 되어간다고 답할 것이었다. 그런 목소리를 듣는다고 떨림이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았다. 동우는 곧바로 사무실로 올라가 급하게 좀 휴가를 쓰겠다고 말했다. 팀장은 동우의 다급한 얼굴을 보더니 그래, 라고 말하고는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저녁에 사장님이 직원들하고 저녁 식사하겠다고 하셨다는데 말이야, 사업부에서 젊은 직원들도 두세 명씩 데리고 했다는 것 같아. 거기 가 보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내가 참석할 수 있게 도와줄 거고.”
정말 동우를 위해서 하는 말일 것이었다. 동우는 고마움을 느꼈지만 고맙다는 말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팀장님.”
팀장이 얘기하라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저 지금 나가야 됩니다.”
팀장은 잠깐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시선을 모니터로 떨구었다. 칸막이 위로 어서 가라는 손짓이 보였다.
동우는 지하철역을 내려가고 차를 기다리고 환승을 하고 내려서 마을버스를 타고 해주의 음악학원까지 가는 시간을 버텨낼 자신이 없었다. 동우는 지나가던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행선지를 말하고 나서 동우는 생각에 잠겼다. 해주는 두 달 동안 어떤 마음으로 지냈을까. 겉으로는 괜찮다고 했지만 은연중에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었는지도 몰랐다. 불임이 해주의 탓이니 해주에게는 이 상황에 아픔을 느낄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해주는 분명 그것을 느꼈을 터였다. 그 얘기를 나눈 지 두 달, 동우는 사고가 터져 정신이 없다는 핑계로 거의 매일 밤 술을 마셨다. 주말에는 피곤하다며 하루 종일 자기만 했다. 낮에 겨우 일어나 차려주는 밥도 마다하고 라면을 끓여 먹고 다시 침대에 눕는 그를 보며 해주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택시가 방지턱을 넘으며 덜컹 거렸다. 아파트 단지로 들어온 모양이었다. 동우는 집근처에 있는 해주의 음악학원 건물을 보자마자 지갑을 꺼냈다. 택시가 멈추자 그는 쫓기듯 요금을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너무 일렀다. 회사의 인터넷이 고장 나는 바람에 일찍 퇴근했다고 하면 해주는 믿을까.
계단을 뛰어 올라 학원이 있는 층에 다다랐을 때 그때까지 쿵쾅거리던 동우의 심장은 더 크게 요동치게 시작했다. 학원이 닫혀 있던 것이다.
해주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동우는 바깥을 뚫고 나올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으며 집으로 걸었다. 눈은 마치 낙하산을 펴고 적진으로 침투하는 특수부대원들처럼 동우의 머리와 어깨 위로 내려앉았다. 동우는 머리 위로 눈이 쌓일수록 그것에게 공격을 받는 것 같이 심장이 더 옥죄는 것을 느꼈지만 우산을 꺼내 펼 수가 없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해주는 어디로 간 것일까. 학원에서 매년 주최하는 정기연주회가 코앞일 것이었다. 갑자기 학원을 쉴리가 없었다. 해주는 떠난 것일까.
동우는 연결되지 않는 전화를 계속해서 걸며 집 앞의 운동장을 걸었다. 방학 중인 학교는 고요했고 온통 눈으로 덮여 있었다. 거대한 설원 위에서 미아가 된 사람처럼 동우는 사방을 둘러보고 또 둘러봤다. 전화는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라는 멘트를 반복했다. 낙하산을 탄 특수부대는 끊임없이 내려왔다. 동우는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적의 공격을 온몸으로 맞으며 그곳을 맴돌았다.
삐비빅하는 소리에 깨어보니 침대 위였다. 눈 속을 걷다가 발이 얼어 집으로 들어왔던 게 기억났다. 그리고 현관문 닫히는 소리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거실로 뛰어 나가보니 해주가 젖은 부츠를 벗고 있었다. 동우는 방문 앞에 선 채 몸이 굳는 것을 느꼈다. 달려가면 이초면 잡힐 거리, 그 거리에 해주가 있었다. 그렇지만 해주를 꼭 붙들 자신이 없었다. 그 순간, 불안과 떨림을 누를 만큼 강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 해주의 품에서 뛰어 내렸다. 작은 고양이었다.
“어, 집에 와있네?”
해주는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놀란 기색과 반가운 기색이 전부 깃든 표정이었다. 동우는 머릿속에서 숫자를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생각들이 서로 먼저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붙들고 겨우 한마디를 꺼냈다.
“외근 나갔다가, 일찍 끝나서.”
“회사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해주는 벗은 부츠를 가지런히 모으면서 물었다. 해주의 품에서 뛰어내린 고양이는 동우를 아랑 곳 않고 거실을 지나 부엌으로 걸어갔다. 해주는 그 뒤를 쫓아다니면서 발자국을 지우려는 사람 마냥 고양이가 걸어간 길을 그대로 걸어와 동우의 앞에 섰다.
“오늘,”
동우는 말을 끊으며 해주를 콱 안았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던 것일까. 해주가 숨이 막힌다며 동우의 팔을 툭툭 칠 때까지 몇 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기도 하고 아주 짧은 순간이었던 것 같기도 했다.
“불임 판정을 받은 날, 오빠는 괜찮다고 돈 들고 힘든 거 안 하게 됐으니 오히려 잘됐다며 웃어줬지만, 사실 그날 한숨도 못잔 거 알고 있어. 다음날 오빠가 기운 없이 출근하는 모습 보고 마음이 무너졌어. 오빠 탓도 아닌데,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아빠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둘은 침대에 누워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해주의 말투는 차분했다. 너무 차분해 아주 일상적인 얘기를 하는 것처럼 들렸다. ‘이게 도고, 옆으로 주르륵 레미파솔라시도야. 검은 건반은 나중에 배우자.’ 라고 설명하는 것 같은 말투였다.
“오빠가 일이 많다며 회사로 가버렸던 주말, 혼자서 배게를 끌어안고 울다가 보육원에 갔어. 갑자기 아이들이 보고 싶어서 갔는데, 갑자기 화가 나더라. 거기 있는 아이들, 아예 부모를 모르는 애들도 있었던 것 알지? 제대로 키울 수도 없는 주제에 아이를 낳을 수 있는 그 사람들이 너무 미웠어. 돌아오는 길에 그 사람들을 저주했어. 그런데 나도 너무 미운거야.”
“나를 떠나려고 했어?”
해주의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지만 동우는 질문했다. 하지 않고 견딜 수 없었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보육원에서 봉사했던 거, 오빠는 나한테 잘 보이려고 애들이랑 잘 놀아준 거라고 했지만 난 알아. 오빠가 아이들이랑 노는 걸 진심으로 좋아했다는 걸. 그 생각을 하면 견딜 수가 없었어. 나라는 존재가 오빠의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렇지 않아.”
“길에서, 식당에서, 백화점에서, 아기들을 볼 때마다 괴로울 거야. 친구들이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그 애들의 돌잔치에 갈 때마다, 학교에 들어갔다는 소식, 졸업했다는 소식, 결혼한다는 소식, 손주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질 거야.”
“아니야.”
동우는 해주의 손을 꼭 쥐었다.
“길에서, 식당에서, 백화점에서 소리를 지르면서 뛰어다니는 애들을 볼 때마다 우리는 저런 골칫거리가 없어서 좋다고 말할 거야. 뉴스에서 미세먼지가 극심하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정치 스캔들을 접할 때마다 우리가 이런 세상에 자식을 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축복처럼 느껴질 거야. 친구들의 아이들이 학교에서 사고를 쳤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성적이 바닥을 치고 있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불량배들이랑 어울리면서 담배를 피운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다 커서 결혼도 못하고 궁상이라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장가갔다가, 시집갔다가 이혼하고 돌아왔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아이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깔깔거릴 거야.”
해주는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입꼬리가 더 이상 올라갈 수 없을 만큼 올라가자 그것이 어떤 신호라도 된 듯이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옆으로 누워있던 탓에 눈물이 옆으로 흘러 해주의 귀 쪽에서 떨어졌다. 동우는 해주를 일으켜 앉힌 뒤 자신도 다리를 접고 앉아 그녀를 마주보았다.
“먼저 고양이를 키워보자.”
해주는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울지 않으려고 호흡을 정리하면서, 한 글자 한 글자를 또박또박 내뱉었다.
“우리가 고양이를 잘 키워내는지 보고, 그때 아이를 키우자. 물론 고양이를 키우는 것과 아이를 키우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겠지만 아주 기본적인 연습이라고 생각해보자. 원장님이 그러더라. 우리는 입양 심사하는데 크게 문제없을 거라고.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해.”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늦지 않아.”
동우는 그렇게 말하고 나서 잊었다는 듯 ‘미안해’라고 덧붙였다. 그 말에 반응하듯 해주가 몸을 부르르 떨며 울기 시작했다. 동우는 닦이지 않는 얼룩을 문지르는 것처럼 해주의 등을 계속해서 쓸어내렸다. 어깨를 쓸고 내려간 손이 허리께에 닿을 때마다 미안해, 라는 말이 반복해서 새어나왔다. 목소리가 흐느낌과 섞여 누구의 목소리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흐느낌을 멈추고 눈가를 닦자 어느새 새로운 공간에 대한 관찰을 마친 고양이가 침대 옆으로 와 있었다. 팔뚝보다 작은 그 갈색 고양이는 온통 호기심으로 가득 찬 존재인지, 망설이는 기색도 없이 침대 위로 뛰어 올라왔다.
“이름을 지어 줘.”
해주가 고양이의 허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잔디.”
“잔디?”
“응. 만지면 기분이 좋아지는 잔디. 만지는 것은 물론, 바라만 보아도 정서에 도움이 되거든.”
“좋은 이름이야.”
해주는 그들의 옆에서 제 앞발을 핥고 있는 고양이를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곤 동우에게 안아보라는 시늉을 했다. 동우는 그것을 받아 품에 안고 이마께를 문질러 주었다. 고양이가 갸르릉 소리를 냈다.
“기분이 좋은가봐.”
해주가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다는 표시인가?”
“응. 동물병원에서 그러더라.”
“경계심이 전혀 없네, 이 녀석은.”
“아직 상처받은 적이 없으니까.”
“영원히 상처 같은 거 모르게 해주자. 세상에 아주 살만한 곳이라고 느끼면서 지내도록. 죽을 때까지.”
동우는 고양이를 내려놓고 해주의 얼굴에 손을 가져가, 눈물이 지나간 곳을 엄지로 쓸어내렸다. 동우가 팔을 올리는 것을 보고 놀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고양이가 일어나 동우의 팔에 앞발을 올렸다.
동우는 코트에 두 손을 찔러 넣고 바닥을 보면서 걸었다. 해주는 옆에서 아직 눈 위로 발자국이 찍히지 않은 곳을 골라 발을 내딛고 있었다. 뽀득뽀득 눈 밟히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마트에 들려 저녁장을 보기 위해 나온 참이었다. 해주가 고른 것은 생닭이었다. 그것을 손질해 닭볶음탕을 해주겠다고 했다. 해주는 채소 코너로 가 감자와 당근과 양파를 차례로 바구니에 담으면서 가서 고양이용 사료를 하나 사오라고 말했다. 새끼용 사료가 따로 있을 거라면서.
“어, 웬 케이크야?”
새끼 고양이용 사료와 커다란 우유 케이크를 들고 계산대로 걸어오는 동우를 보고 해주가 물었다.
“며칠 전부터 먹고 싶었거든.”
동우는 가지고 온 것을 계산대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
“식구가 새로 생겼으니 파티도 할 겸.”
그러자 해주는 “식구라고 하니까 좋다”라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보고 동우는 두 가지를 결심했다. 고양이를 잘 돌봐줘야겠다는 것과, 그러려면 고양이가 내는 소리의 의미부터 공부해야겠다는 것.
집을 향해 걷는 길, 동우가 해주에게 물었다.
“십억이 생기면 뭐 할 거야?”
“복권에 당첨 되면 말이야?”
해주가 눈을 밟으며 되물었다.
“응. 어디서 현금이 가득 담긴 가방을 주운 것이 아니라, 복권이 당첨돼서 누군가에게 돌려줄 필요가 없는 십억이 생기면.”
“글쎄. 평생 다 쓸 수나 있을까?”
“오늘 우리가 산 게 얼마치지?”
“사만 원 조금 안될걸.”
“그럼 다 못쓰겠다, 십억.”
“그럼 기부해야지. 보육원에 책도 사주고, 입양 프로그램 홍보물도 제작해주고.”
“그런데 그거, 십억이 없어도 할 수 있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면 지금부터 하자.”
해주가 고개를 돌려 동우를 바라봤다. 동우는 웃고 있지 않았다. 중대한 결심을 한 표정이었다.
“그러자.”
삐비빅 하고 현관문을 열리고 두 사람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해주가 바스락거리는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부츠를 벗는 동안 동우는 운동화를 휙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섰다. 그리고 무엇을 찾는 듯 이곳저곳을 살피더니 여기 있었구나, 라며 식탁 밑에서 무언가를 안아 들어올렸다. 동우의 두 손이 감싼 새끼 고양이가 앞발로 동우의 손을 할퀴어보려고 버둥버둥 댔다.
“다녀왔어.”
동우의 목소리를 듣고 고양이는 갸르릉, 하는 소리를 냈다.
창밖으로 보이는 초등학교 운동장은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아파트에서 내려다보이는 그곳은 발자국 하나 없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끝없는 설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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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밌게 읽었네. 별안간 고양이를 키우고 싶은 마음이 드는군 ^^
불임부부의 감당할 수 없는 고뇌와 사랑의 이름으로 헤쳐 나가고자 하는 마음을 단단하게 그려내었군요..
고양이는 그들이 사랑하는 아이요, 잔디는 아이의 요람이겠지요..
동식물이든 아이든 '기른다', '키운다'의 의미는 같겠지만,
이렇게 치환하여 꿋꿋하고 치열하게 잘 살아가는 불임부부는 얼마나 될지~~
그들의 슬픔이 가슴을 진하게 울립니다.
출세 지향의 동우는 이제 흔쾌한 마음으로 한직인 좋은기업팀에 지원하겠군요.. 기르고 키운다는 마음으로~
하얀 설원 위에 찍힌 사랑 한 점이 영원하길 바랍니다..
한줄의 미학은 긴글에도 있군요
잘 보았습니다
건필 이어가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