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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2일 (수)
새벽 2시. 잠이 깼다. 그제 밤 앵커가 30미터 가량 끌린 후, 영 잠자리가 편하지 않다. 자다가 끼익 앵커에 힘 받는 소리만 나면 깨어 확인 한다. 깊이 5.5미터의 물에 40미터 가량 앵커 쇠사슬을 내렸으니, 배는 최대 30~35미터 (114Ft)를 움직인다. 밤새 배가 움직인 나비오닉스 궤적을 보니 반경 50Ft로 거의 끝에서 끝으로 움직였다. 이게 일직선으로 쭉 100FT 이상 움직이면 앵커가 끌린 것이다. 미국 선장 윌리엄이 더 큰 앵커를 선물로 주어 교체하지 않았더라면, 일이 커질 뻔했다.
그러구선 잠이 오락가락 하는데, 새벽 5시쯤에 짧은 소나기가 왔다. 일어나 해치들을 닫고 소변을 보니, 비가 그쳤다. 2~3일에 한 번씩 있는 일이다. 외장 SSD하드로 카메라의 영상들을 옮기고, 생각난 김에 핸드폰의 사진과 영상들로 모두 저장한다. 언제 이런걸 다 찍었지? 하고 사진을 보다, 새벽이 왔다. 아우들이 보내준, 문학 작품 몇 개의 텍스트를 다운한다. 알사탕 빨 듯이 천천히 음미하며 읽어야겠다.
오늘은 된장국에 감자밥, 계란 후라이다. 무말랭이 김치가 좀 남았다. 한 끼에 겨우 몇 조각이니 한동안은 큰 문제없다. 나는 반찬 투정 하는 성격이 아니다. 어떻게든 먹으면 된다. 부상 때마다 농담처럼 밥 먹으면 다 나아라고 했는데, 이스마일리아에 우박 내릴 때 다쳤던 왼쪽 발가락도 조금 둔하기는 하지만 괜찮다. 아산의 배에서 내리며 발이 미끄러져 제네시스에 급하게 매달리면서 오른팔에서 허리 중간까지 찌리릿 근육통도 사라졌다. 진짜 밥 먹으면 다 낫는다.
일중행사처럼, 윈디를 열어본다. 스스로 급한 성격을 누구러뜨리려, 아예 역풍이 7~8노트 미만일 때만 출항하기로 결심했지만, 역풍의 틈은 계속 노리고 있다. 금요일부터 9~11노트로 잠시 느려지지만, 월화에 다시 15~17노트까지 올라간다. 그사이에 아덴만 끝까지 갈 수 있을까? 바람의 틈을 찾아 거기까지만 가면, 크로스홀드나 빔리치를 받아 살랄라 까지는 문제없는데. 노트북에 코를 박고 있다가, 에이~ 하면서 몸을 펴고 앉는다. 회항의 쓰린 기억을 되살린다.
어둠속에서 배가 공중으로 쑥 솟구친다. 잠시 후 펑! 하고 펀칭 소리가 나고, 좌우현으로 파도가 하얗게 부서지며 뒤로 쑥 멀어진다. 선실 안에, 뭔가 구르는 소리가 난다. 속도는 3.0노트에서 2.1노트로 떨어진다. 촥! 하고 파도가 콕핏을 덮친다. 등에 파도를 맞고, 테이블의 핸드폰 등 전자기기에 파도가 튄다. 얼른 수건을 들어 대충 닦는다. 이틀 동안 호두나, 땅콩, 물과 우유만 먹으니 왠지 주변 환경에 현실감이 떨어진다. 나도 멀미가 있나? 헛, 기름 냄새다. 갑판을 보니 좌현 기름통이 두 개나 넘어져 있다. 어둠 속, 파도가 들이치는 험한 바다. 나는 저기까지 나가 기름통을 잘 세우고, 무사히 돌아올 수 있을까?
좌우를 단단히 붙잡고 파도가 덮치지 않기를 바라며 엉금엉금 좌현으로 나간다. 젖은 갑판에 앉아 간신히 몸의 균형을 잡으며 기름통을 다시 단단히 맨다. 이게 계속 잘 버텨줄까? 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길게 할 여유가 없다. 파도에 쓸리면 큰일이다. 다시 엉금엄금 콕핏으로 돌아온다. 순간 배가 공중을 솟구쳤다. 펑! 소리와 함께 포말이 뒤로 쭉 빠져나간다. 절묘한 타이밍이었다. 여기까지 회상하고 나는 고개를 젓는다. 두려운 밤이었다. 이런걸 다시 며칠씩이나 계속하며 항해할 수는 없다. 기다리자.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생명을 보존할 것이라. 어쩌면 나는, 여기서 길을 잃은 것은 아닐까? 항해와 인생 모두? 두려움 뒤엔 불안이 엄습한다. 한국 돌아가면 여기저기 병원에 좀 들러봐야겠다. 낡은 내 몸도 점검해야지.
오후 12시 7분. 그나저나 어제 오후 1~2시까지 1시간, 6시~8시까지 2시간. 총 3시간을 발전기로 충전했다. 16시간이 지났는데, 아직 12.1 DCV 다. 여러 자료를 찾아보니, 자동차 시동 배터리로는 11.3 DCV 까지 사용 가능하고, 요트, 캠핑카 등의 서비스 배터리로는 11.7 DCV 까지 문제없단다. 굳이 11.3 DCV까지 쓰자면, 24시간 사용이 가능 할 것도 같다. 그러나, 12.0 DCV 가 되면 다시 충전하자. 배터리 수명에 관련된 거다. 배터리 3대의 병렬연결 실험은 성공적. 한국 가서 큰 냉장고 팬을 수리하고, 전원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부분 점검과, 220V 육전 충전기와 인버터를 국산으로 확 바꾸자. 국산이 최고다!
오후 3시 30분. 동풍이 점점 강해진다. 앵커 윈치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 앵커 쇠사슬과 연결한 밧줄에서 뚝뚝 소리가 난다. 혹시라도 앵커가 끌려 배가 밀릴까, 계속 나비오닉스를 들여다본다. 24시간 배에서 약풍과 서풍을 기다리고 있다. 무료하다가도 근본 없는 불안감에 시달린다. 나는 혼자다. 시간이 흐르면 바람은 바뀐다. 지부티 앵커리지는 안전하다. 하루 종일 몇 번이고 이 세 가지 조건을 되뇌이며 기도한다. 수단 수아킨에서 만난 윌리엄 영감님이 생각난다. 그는 21년간 혼자였다. 나는 이제 겨우 며칠. 그가 존경스럽다. 나는 왔스앱으로 그에게 질문한다. 오랫동안 혼자 바람을 기다리게 되면 어떤 생각과 행동을 해야 하나?
윌리엄은 곧 답을 주었다. 길고 정성스러운 답변이었다. 요약하면,
1. 네가 회항한 것은 잘 결정한 것이다.
2. 나는 탄자이나에서 오만항해 할 때 Seychelles까지 45일 걸렸다. (헉 45일!)
3. 아덴만은 바람이 항상 동풍이라, 신중한 선장들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항해한다.
4, 너는 “fetch” 라는 단어를 알아둬라, 알아두면 좋을 거다.
5. 네 앞에 아직 4~5천마일이 남아 있고, 네 배는 장거리 항해에 적합한 배는 아니다. (역시, 내가 생각하던 바를 그대로 짚어준다) 윤태근 선장님의 타야나 37 (TAYANA 37). 같은 모델이 세계일주 항해에 적합한 모델이다.
6. 우리는 수아킨에 부는 25~30노트 바람 속에 모두가 앵커를 (혹시 끌리나) 주시하며 웅크리고 있다. (수아킨에서도 다들 강풍 때문에 꼼짝도 못하고 있나보다.)
나는 William, thank you for your advice. But what does the word "fetch" mean? 라고 다시 질문했다. 그는 나 스스로 공부해서 찾으면 더 의미 있을 거라고 한다. 윌리엄 영감은 깐깐하다. 나는 [뜻밖의 장소에 도착했다.] 라는 의미를 찾았다고 하고, 나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다. 라고 답을 했다. 시인 임대균 선장은 [바람이 이끄는대로], 라고 다소 시적인 표현을 골라준다. 윌리엄은 이번 금요일 이탈리아로 가서 전에 내게 보여주었던 ‘1970 Southern Ocean Shipyard Gallant 53’을 계약한다고 한다. 나는 그에게 다시 한 번 축하한다. 그는 배를 고르는 건, 새로운 여자를 고른 것 같다며, 이 배를 고르는데 어려웠다. 자기는 여자 고르는데 서툴다고 한다. 나는 여자 잘 고르는데, 결과적으로 늘 실패라고 말해준다. 여성명사인 배를 대상으로 하는 선장들의 농담이다.
미국 시애틀 사는 여동생에게, “fetch”를 물어보니, 전체적인 의미로 ‘제네시스호는 세계일주항해에 적합하지 않은 배’라는 의미란다. 그렇구나. 나는 “fetch”- 적합지 않은 배로 장거리 항해 중이다. 어쨌거나 인도양을 건너, 랑카위까지만 가면, 나머지는 단거리 구간이라 조금 쉬워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쨌든 그렇게 되길 소망한다.
내가 지부티에서 하염없이 바람을 기다리는 과정은 정말로 지루하다. 24시간 혼자 배에서 소일해야 하는 거다. 같은 코스로 내 뒤에 오는 선장들은, 시간을 어떻게 잘 소모하는지도 연구해야 할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와서 책만 주야장천 읽고 있다. 여동생이 말한다. 거기서 건강하게 인도양 항해를 준비하라는 신의 한수가 아닐까? 그렇기를 정말 소망한다.
5시 20분. 텐더를 타고 폰툰으로 간다. 일부러 사람들이 없는 먼 곳에 텐더를 댄다. 얼굴만 보면 돈과 먹을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어서다. 잠깐 걸으니 사와디 몰이다. 시계를 보니 5시 40분. 피자헛 아가씨에게 Visa 카드 되냐고 물으니 된단다. 지금 주문해도 되는데 식당 내에서 먹으려면 오후 6시에 와야 한단다. 오케이. 그럼 장보기 먼저. 쏘세지, 오이, 양상추를 사려는데, 양상추는 없다. 혹시 하고 보니 감자도 없다. 희한하다. 감자 없는 마트라니, 하긴 포트 수단에서도 메가마트에 다 말라비틀어진 감자 몇 알 밖에 없어 안 샀다. 누런 쌀이 한 봉투에 300 지부티프랑(2,220원)이다. 한번 사본다. 야채랑 오렌지 주스, 과자 몇 개 집었는데, 5만원 돈이다. 진짜 황당하다.
6시 15분이 되어 피자헛으로 간다. 버거킹을 갈까? 하다가 일단 피자헛에 먼저 들어가 주문한다. BBQ 치킨 피자 중짜와 콜라 한 병을 시킨다. 2,200 지부티프랑(16,280원) 이상하게 피자헛에서는 인터넷이 안 된다. 핸드폰에 노 서비스라 표시된다. 잠시 후 나온 피자는 그야말로 ‘치킨 바비큐 맛 피자’였다. 닭고기는 구경도 못하고, 피자 빵 위에 약간의 치즈와, 치킨 BBQ 맛 검은 소스만 뿌려진 황당한 피자다. 한국의 동네 마트 피자만도 못하다. 말이 피자지 피자의 개념도 모르는 것 같네. 어떻게 피자헛 정식 대리점이 이런 피자를 팔 수 있을까? 버거킹도 아마 비슷하겠지. 그 작은 중짜를 반도 못 먹고 헛구역질난다. 돈이 아까워 꾸역꾸역 먹다, 결국 2/5를 남겼다. 나는 지부티 입맛이 아닌가 보다.
6시 50분. 텐더를 타고 돌아오다, 텐더에 노를 싣지 않은 것을 알았다. 출발 전 휘발유는 확인하고 꽉 채웠는데, 어째서 노를 싣지 않았을까? 이러다 엔진이 꺼지면 어둠 속에 바다로 떠내려가는 거다. 등골이 써늘하다. 갑자기 아주 조심스럽게 조정을 하여 제네시스로 돌아온다. 줄을 묶고 내리는데, 지부티 코스트 가드가 온다. 그들은 영어를 잘 못한다. 나는, 내 에이전트는 아산이다. 아산에게 연락하라. to call the agent Asan! 고 외치니 그냥 돌아간다. 혹시나 싶어 아산이 내게 남긴 문자를 다시 확인한다. But I have already explained the authority your situation. (나의 상황을 당국에 이미 설명했다.) 라고 내게 보냈으니 뭔가 문제가 생기면 아산의 책임이다. 나의 무료 에이전트 아산은 3일 째 약속을 어기고 오지 않는다. 안 와도 별 상관은 없다. 책임은 아산이 질 것이고, 나는 배에서 고립 생활을 그런대로 잘 이어가고 있다. 텐더에 노부터 잊지 않고 싣는다.
갑자기 1시간 이내에 아산이 온다고 한다. 과연? 기다려 보자. 달리 할 일도 없으니.
오후 7시 30분. 아산이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고 한다. trinity호의 캡틴 Simon 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간단다. 내일 오전에 한번 방문해 봐야겠다. 아산은 오늘 늦을 것 같다고 해서, 내일 오전 10시 이후에 다시 만나자 한다. 10시가 돼봐야 알겠지만 굳이 아산을 늦은 밤에 만나고 싶지는 않다. 혼자 편안한 저녁을 맞고 싶다.
첫댓글 출 퇴근길 열심히 읽고있습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많이 슬프겠지만 묵묵히 헤처나가는 모습이 멋지네요~
강릉까지 행운 가득한 안전 항해를 기도드리겠습니다.
화이팅~!!
응원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이탓인가, 감정기복이.. ㅜㅜ
선장님의 모험을 응원 합니다.
계속해서 읽게 되는 중독성 강한 글이네요.
안전항해를 기원드립니다.
부족한 글을 일독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