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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참어머님 신부 확정과 참부모님 성혼
개 요
천주평화의 여왕 천지인 참어머님이신 한학자 여사께서는 1943년 2월 10일, 음력 1월 6일(寅時, 4시 30분)에 외가인 평안남도 안주군(安州群) 안주읍(安州邑) 신의리(信義里) 26번지에서 부친 한승운(韓承運) 선생과 모친 홍순애(洪順愛) 대모(大母)님 슬하 외동따님으로 탄생하셨다.
부친 한승운 선생은 일찍이 사립육영학교, 탁영공립보통학교, 만성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생활을 하셨다. 특히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에 몸담고 초기 중견간부로써도 일하셨다. 대모님은 본래 평북 정주에서 독실한 신앙 가문 가운데 태어나 19세까지 장로교 신앙을 하셨다. 그 후 황국주 전도사 일행과 순회전도를 하셨고, 1933년 이후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 김성도 씨의 성주교단, 허호빈 씨의 복중교를 거치면서 수년간 재림준비신앙의 정수를 전수하셨다.
한승운 선생과 홍순애 대모님은 새예수교 시절인 1934년 3월 5일에 하늘의 축복 가운데 혼인하셨다. 그 후 대모님은 성주교와 복중교를 거치면서 9년간의 기다림 끝에 1943년 2월 참어머님을 출산하셨다. 참어머님께서는 줄곧 외가에서 자라셨다.
한승운 선생은 1946년 4~5월 경 공산당국에 의한 피해를 우려하여 월남하신 후 서울과 경기도 일원에서 교편생활을 하셨다. 41년 넘는 연륜(年輪)을 열다섯 곳의 학교를 거치면서 농촌 어린이 교육과 후생에 헌신하셨다.
참어머님 외가는 7대 독자를 거쳐 조씨 할머니와 대모님과 참어머님께서 외동딸로서 3대 신부기반을 이뤄 나오셨다. 참어머님 4세경, 허호빈 씨 모친이 참어머님께 “하늘의 신부가 되실 분”이라고 축복함으로써 모든 신령역사의 정성기반을 승계하셨다.
세 모녀 분은 1948~9년 경 공산당국의 탄압정세 하에 사선(死線)을 헤치고 남하셨다. 그 후 대모님 남동생 홍순정 선생을 상봉하고 서울 효창동에서 기거(寄居)하셨으며, 참어머님께서는 효창초등학교에 입학하셨다. 그 무렵 6ㆍ25전쟁을 맞아 피란(避亂)하시고 군인가족피란수용소에서 머무셨다. 9ㆍ28 서울수복 후 귀경(歸京)했다가 1951년 1ㆍ4후퇴 때 다시 대구로 내려가셨다. 그때 성주교 정석천 씨 가족을 만나 이후 4년간 이웃하여 지내셨다.
그 후 제주도로 건너가 9개월을 지내셨는데, 참어머님께서는 서귀포 효돈초등학교 5학년에 전학하셨다. 그러던 중 홍순정 선생의 편지를 받고 춘천으로 나오셨다. 참어머님께서는 1955년 2월 춘천 봉의(鳳儀)초등학교에 전학해 이듬해 졸업하셨다.
1955년 12월에 대모님께서는 대구의 정석천 씨의 안내로 청파동 전본부교회에서 드디어 참아버님을 뵙고 입교하셨다. 그 후 춘천에서 개척전도를 하셨는데, 안수기도사건으로 누명을 쓰고 옥고를 치르기도 하셨다. 그 무렵 참어머님께서는 홍순정 선생의 주선으로 1956년 4월 서울의 선정(善正)중학교에 입학하시고 신당동에서 통학하셨다. 1959년 3월 졸업 후엔 성요셉간호학교(가톨릭대학교 간호대학 전신)에 입학하시고 기숙사에 들어가셨다. 학창시절 참어머님께서는 마치 수도녀(修道女)와도 같은 신앙심으로 정결한 생활을 하셨다.
참어머님께서는 일찍이 만 13세 때인 1956년 3월, 초등학교 졸업 직후 전본부교회에서 대모님 소개로 처음 참아버님께 인사를 올리셨다. 그리고 만 17세 때인 1960년 2월에 인류의 참어머니 자리에 최종 확정되셨다. 한 달 후 3월 27일, 음력 3월 1일 새벽 4시 전본부교회에서 참부모님 양위분 가약식(佳約式)이 거행됐는바 이날이 바로 참부모의 날이었다. 곧이어 4월 11일, 음력 3월 16일 오전 10시에는 전본부교회에서 역사적인 참부모님 성혼식이 거행(擧行)됐다. 한국 해방 후 14년 탕감노정 끝에 인류의 참부모님께서 완성기 출발의 심정적 터전을 마련하고 지상 착륙하셨다. 이로써 참부모님 중심의 공식적 섭리노정이 비로소 본격 출발될 수 있었던 것이다.
1. 참어머님 탄생과 가문 배경
1) 부친 한승운 선생
참어머님의 부친이신 청주 한씨 승운 선생은 1909년 1월 20일에 평안남도 안주군(安州群) 대니면(大尼面) 용흥리(龍興里) 99번지에서 부친 한병건 선생과 모친 최기병 여사 슬하 5형제 중 맏아들로 태어나셨다.
한승운 선생은 1919년(11세)에 평안남도의 만성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해 4학년 때인 1922년(14세)에 중퇴하셨다. 이듬해인 1923년(15세) 사립육영학교(育英學校)에 입학해 1925년(17세)에 졸업하셨다. 그 후 보통학교 교원검정시험에 응시해 합격하셨으며, 1930년(22세) 8월부터 1939년(31세) 6월까지 모교인 사립육영학교 교사로 재직하셨다. 1945년 11월부터 1946년(38세)까지는 모교인 만성공립보통학교의 교두(‘교감’에 해당)로 재직하셨다.(21)
성품은 치밀하고 알뜰하셨으며, 체격이 건장하고 체력도 뛰어나셨다. 어느 날엔 길을 지나가시다가 사람들이 논 가운데 있는 큰 바위를 치우는데 힘겨워하는 것을 보고는 자원해 들어가 번쩍 들어내셨을 만큼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공부도 잘 하셨다고 하며, 기독교 신앙이 돈독(敦篤)하셨다. 충직한 교편생활과 신앙 활동으로 집 안에 머무는 시간이 많지 않으셨다고 한다.(22)
특히 한승운 선생은 이용도 목사의 새예수교에도 몸담고 신앙생활을 하셨으며, 초기 중견간부로서도 활약하셨다. 1933년 8월 1일에 안주예배당에서 평안지방회가 열려 서기(書記)에 보임됐다. 그해 9월 3일 개소된 고향 ‘용흥기도소’의 담임자로 임명돼, 주위의 핍박 가운데 20 여명의 신자들을 이끄셨다. 당시는 사립육영학교 교사로 재직하시던 때로서 그렇듯 교회활동에도 헌신하셨던 것이다. 그래서 참어머님께서는 “한씨 아버지는 새예수교의 독실한 신앙인이셨어요. 이용도 목사, 이호빈 목사 그들을 따라 대모님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셨습니다.”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그 무렵 홍순애 대모님은 모친 조원모 여사와 함께 안주 새예수교회를 주 근거지로 신앙생활을 하셨다.(22)
2) 생모 홍순애 대모님과 외가
참어머님의 생모이신 홍순애 대모님은 1914년 음력 2월 22일 평안북도 정주에서 출생하셨다.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양친 남양홍씨(南陽洪氏) 유일(唯一) 선생과 영변조씨(寧邊趙氏) 원모(元模)(1889. 음11.7~1962.9.3) 여사 슬하 1남1녀 중 맏따님으로 태어나셨다.(23)
참어머님 회고에 의하면, 홍유일 선생은 키가 훤칠하고 친근감이 있는 미남이셨다. 한학을 공부한 식견 있는 분이셨으며, 그 시대에 집안 여자들에게 하이힐을 사다 줄 만큼 개방적이셨다고 한다. 참어머님께서는 옛날 외할아버지와 모습이 꼭 닮고 인상(人相=얼굴생김새)도 같았기에 생소하거나 어렵지 않으셨다고 회고하셨다.(24)
조원모 여사는 작고 예쁜 용모에 부지런하고 활동적인 신여성이셨다. 재봉틀 상회를 운영하셨으며, 수금하면서 고장 난 재봉틀을 수리하는 일도 하셨다. 1919년 3ㆍ1운동 때는 당시 만 5세 된 대모님을 업고 만세대열에 참가하시기도 했다. 대모님은 이러한 모친의 열성적 신앙생활의 영향 가운데 19세까지 장로교에서 신앙을 하셨다. 이름도 교회 담임목사가 지어줬다고 한다.(24)
모친 조씨 집안은 옛날 정주의 이름난 부자였다고 한다. 그 조상 중 한 분인 조한준 선생이 나라의 발의에 호응해 사재(私財)를 털어서 중국(中國)사신(使臣)의 용이한 왕래를 위해 달래강에 큰 돌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때 엽전(葉錢) 서 푼을 남겨 다리 준공식에 신고 갈 짚신을 샀는데 그만 그것이 조건에 걸려서, ‘천자(天子)를 보낼 집안이었는데 공주를 보낸다.’라는 몽시(夢示)가 있었다고 전해진다.(24)
대모님 가족은 일찍이 정주를 떠나 청천강을 건너 평안남도 안주군 안주읍 신의리로 이사하셨다. 대모님은 고향 시절 안주보통학교를 졸업하셨다. 그리고 그 후 1936년 4월에는 평양성도학원(平壤聖徒學院)을 졸업하셨다.(27)
3) 한승운 선생의 남하와 그 후 행적
대모님의 양친은 사위인 한승운 선생을 데릴사위로 삼으실 의사가 있었는데 선생은 이를 완강히 물리치셨다. 한씨 집안 장손으로서, 특히 당시는 멀리 황해도 연백에서 교편생활을 하고 계셨기에 처가에 머물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더구나 대모님은 신앙적 열성으로 거의 집을 비우셨기 때문에 서로 함께하시기도 좀처럼 쉽지 않은 상황이어서 결국 따로 지내시게 됐다. 이런 상황 가운데 참어머님께서는 외가(外家)에서 탄생하셨으며, 줄곧 외가 식구들의 보호 아래 성장하시고 또 신앙을 배우셨다. 대모님의 양친(兩親)은 참어머님을 한승운 선생 편에 맡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28)
한승운 선생은 그 후 1945년부터 만성공립보통학교로 옮겨 재직하시던 중, 1946년 4~5월경에 공산당국의 위협을 피해서 부득이 월남하셨다. 참어머님의 기억에 따르면, 바로 이 무렵 즉 참어머님 4세경에 부친이 집에 돌아오셔서 대모님께 함께 떠나기를 간청하셨다고 한다. 그렇지만 대모님은 그때도 역시 주님 맞이할 신앙 길을 완강히 고집하시며 부군의 길을 따르지 못하셨다. 한승운 선생은 부군(夫君)으로서 마지막 도리와 애정을 다하시고자 했다. 그러나 하늘의 냉엄한 섭리적 경륜은 끝내 그런 인륜의 평화로운 행보(行步)를 허락(許諾)지 못했던 것이다.
한승운 선생은 남하 후 서울과 경기 일원의 초등학교에서 봉직(奉職)하셨다. 1947년 경기도 광주시 실촌면 곤지암초등학교에 근무 중 같은 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지희선 여사와 혼인하셨다. 그리고 이듬해 1948년 3월 1일에 장남 위일(偉逸) 씨를 얻으셨다. 지희선(池姬善) 여사는 1926년 1월 3일 출생한 분으로, 한승운 선생과 혼인한 후로는 한 두 곳을 제외하고는 줄곧 같은 학교에서 근무했다. 1ㆍ4후퇴 당시인 1951년 2월 20일에 충북 음성에서 차남 위용(偉勇) 씨를 얻으셨다.(29~31)
한승운 선생이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미원초등학교에서 교장으로 재임 중 교사로 재직했고, 설악면 위곡1리가 고향이고, 1990년 정년퇴임한 이광헌(1925) 선생은 당시 한승운 선생과 지희선 여사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했다.
“한승운 선생의 음성은 상당히 예리하고 분명한 특징이 있었다. 자신의 의사와 맞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는 당사자를 불러다가 진지하게 설득하셨다. 또 지역 기관장(機關長)이나 유지(有志)들과 두터운 친분을 갖고 대외관계(對外關係)에 성심을 기울이셨다. 특히 문학적인 면에 소질과 관심이 많아 간혹 자작원고(自作原稿)를 잡지사나 신문사에 기고하셨다. 그리고 지희선 여사는 대단히 차분하고 온화한 이미지에 소탈한 성격을 갖고 계셨다. 특히 대인관계가 원만하고 분위기를 조화롭게 하는 뛰어난 덕성을 지닌 분이었다.”(32)
1971년 9월부터 1974년 2월까지 오늘의 인천시 부평구 갈산동의 부평북초등학교로 전근돼 봉직하시다가 2월 28일 부로 정년퇴직하셨다. 선생은 이처럼 41년 넘는 연륜(年輪)을 모두 열다섯 곳의 학교를 거치면서 온전히 교육계에 투신하셨다. 그런 가운데 특히 경기도 일원을 중심으로 농촌 어린이 교육과 후생에 헌신하셨던 것이다.(34)
4) 농촌 어린이 교육의 등대
장남 한위일 선생은 1997년에 뜻길에 들어온 이후 1998년, 1999년 등 부친의 추모예배와 2002년, 2003년의 몇 차례 인터뷰에서 부친과 관련된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그 생애에 대해 간증해 줬다. 또 한승운 선생의 수제자 격으로서 현재 서울 상도동 성대장로교회 원로목사인 장기택 목사도 2000년 3월 15일에 선생의 교훈적 삶에 대해 자필(自筆) 증언(證言)을 남겨 줬다. 두 분의 증언을 종합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승운 선생은 애국사상(愛國思想)이 투철하셨다. 자신의 가족보다 늘 나라와 민족이 먼저였다. 남북 분단을 통탄해 하시며 통일을 위해 기도하셨다. 전근(轉勤)해 가는 곳마다 계몽강연(啓蒙講演)을 하신 것이 무려 500여 회에 이르렀다. 우렁찬 음성과 출중한 언변으로 많은 감동을 주셨다. 이미 새마을 운동의 모델이 되셨다. 생활비를 그 경비로 쓰시다 보니 언제나 가정살림은 궁핍했다. 그 모습을 본받아 교직원들은 지방순회 계몽강연을 계속하면서 애국운동에 헌신했다.(35)
둘째, 교회 개척에 헌신하셨다. 선생은 독실한 기독교 장로로서 본 되는 신앙생활을 하셨다. 학교 관사 한쪽에 항상 작은 기도실을 만들어 놓고 매일 새벽 4시에 기상해 기도하셨고, 저녁에도 명상과 기도를 하셨다. 기도는 큰 소리로 하셨는데 구절구절 짜임새가 있었다. 기복(祈福)적인 내용보다 하늘의 영광을 송영(誦詠)하고 창조세계를 찬미(讚美)하는 내용으로 일관하셨다. 특히 찬송가는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371장)을 애창하셨다.(35)
선생은 교회가 없는 곳에 부임하시면 교회를 지으셨다. 교회는 있는데 목회자가 없는 곳에 가시면 어떻게든 목회자를 초빙하려고 노력하셨다. 교회는 흙벽돌로 짓되 목수(木手)와 인건(人件)은 주민들의 호응을 얻어 성사시키셨다. 어느 선교사나 부흥사나 목사 이상으로 지역선교에 공헌하신 것이다.(36)
셋째, 교육자로 공헌하셨다. 당시는 6ㆍ25전쟁으로 학교 건물이 모두 불타 잔디밭에 앉아 수업을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고보조가 부족해도 학부형들의 협조를 받아 여러 군데 학교를 재건(再建)하셨다. 선생은 특히 정의와 진리를 수호하시고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셨으므로 다른 교장들에게 시기(猜忌)와 모함(謀陷)을 많이 받으셨다. 유독 시골 학교로만 전근하셨던 것은 바로 그 강직한 성품과 소신 때문이었다. 뛰어난 재능과 인품을 갖고 계셨지만 부패한 관료들과 동참하기를 단호히 거부하시고 가난하고 어려운 농촌 어린이들을 위해 교육하고 봉사하는 일을 천직(天職)으로 알고 헌신하셨다.(36)
넷째, 후생사업과 장학사업에 헌신하셨다. 교사(校舍)를 짓고 후생기구(厚生機構)를 만드는 등 학교 발전에 온 힘을 경주하셨다. 박봉(薄俸)을 털어 고아원을 돕기도 하셨다. 새벽기도 후에는 인분(人糞) 지게를 지고 채소, 감자, 토마토 등을 재배해서 그 소출(所出)을 후생을 위해 활용하셨다. 가난한 집안 학생들에게 식량과 장학금을 주셨다. 어린 학생들을 마치 자식처럼 사랑하셨다. 행색(行色)이 청결치 못한 아이들을 데려다가 씻기고 머리를 깎아 주기도 하셨다. 그때는 유독 부스럼 있는 아이들이 많았는데, 그들을 데려다가 약을 발라 주기도 하셨다.(36)
장기택 목사는 스승 한승운 선생을 ‘한국의 페스탈로치와 같고 가나안농군학교 교장과 같은 분으로서, 우리 농촌사회를 일으켜 세운 숨은 농촌운동가였다.’고 지칭했다. 그러면서 ‘곧은 신앙을 바탕으로 농촌 어린이를 사랑하고 교육하는 일에 전념해, 해방 후 가난하고 어려웠던 우리 농촌에 등대와 같은 표상(表象)적 삶을 사셨다.’고 추모(追慕)했다.(37)
선생은 그런 헌신적인 삶으로 인해, 1954년 3월 1일 용인 남사초등학교 재직 당시 경기도지사 표창을 수상하셨다. 또 1960년 1월 1일 가평 미원초등학교 재직 당시에는 녹조근정훈장(제3144호)을 수훈(受勳)하셨다. 그리고 부평북초등학교 재직 당시인 1973년 11월에는 대통령 공로배지(功勞badge)를 수상하셨다. 1974년 1월 28일에는 대한교육연합회장 공로표창장을 수상하셨으며, 그해 2월 28일 정년퇴임일 자로 국민훈장 동백장(제775호)을 수훈하셨다.(37~38)
1974년 정년퇴임 후에는 오늘의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판교동 276번지로 옮겨 농장을 가꾸시고 자택에서 조용히 독서와 사색을 하면서 지내셨다. 그러던 중 1978년 3월 18일 새벽 1시경에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평화스러운 모습으로 승화하셨고 분당의 남서울공원묘지에 모셨다.(3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