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감사할 이유가 있어야 감사하지요(2276.2024.11.추수감사주일설교)
살후1:3-4
할렐루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오늘도 주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하늘의 위로와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혹시라도 삶의 현장에서 상처와 상한 마음을 가지고 오셨으면 말씀 듣다가 위로와 치유함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질병과 싸우는 중이라면 치료의 하나님을 만나서 치료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힘들고 지쳐서 오셨다면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은 새힘을 얻는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무엇인가 계획하고 기도중에 있는 것이 있다면 응답받는 은혜가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이 해결되고 성령이 충만하여 기쁨과 감사와 웃음이 넘치나는 유쾌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올해 추수감사주일은 쌀로 강단을 장식하고 이것을 모아서 성탄절쯤해서 우리 동네에 어려운 이웃을 도우주고 싶었는데 올해는 여러분 모두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잘 협조해줘서 실행에 옮기고자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도 어려운 것은 알지만 그래도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로서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에 다라서 실천에 옮겹봅니다. 경제도 어려운 시기이지만 이렇게 준비해줘서 불우한 이웃을 도울수 있게 되어서 감사를 드립니다. 사실 가을 심방하면서도 식사 대접하는 것을 하지말고 말씀 받는데 집중하라고 한 이유도 심방이라도 대접하면 돈많이 들어가고 또 이웃을 위해서 쌀을 하려면 힘들 것 같아서 그리 했습니다.
지난 1년 365일 내내 감사하는 삶이 구원받은 영혼, 크리스찬의 생활입니다. 오늘은 특히 감사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면서 한 해를 감사함으로써 결산합니다. ‘감사합시다’누군가가 이렇게 얘기하면, 속으로 생각합니다. ‘무얼 감사하지’ 합니다. 오늘 추수감사주일로 예배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은 어떤 것을 감사의 첫째로 생각합니까? 2024년 지난 10개월동안 어떤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까? 오늘같이 추수감사주일이 없었더라면 감사해야 할 일을 되새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도 오늘 추수감사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지난 1년을 돌아왔습니다.
지금 이 시간, 잠시 눈을 감고 지난 1년을 돌아봅시다. 어떤 감사할 일이 있었습니까? 그냥 평범한 것 말고요, 이를테면 ‘지금까지 건강주신 것 감사합니다’,‘하루하루 지내온 것 감사합니다’ 이런 것 말고요! 눈을 잠시감고 찾아보십시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분명히 작년에 비해서 감사해야 할 것이 있을 겁니다. 찾았습니까? 모두 눈 감았으니 찾으신 분은 조용히 오른 손을 가슴높이로 들어보십시오. 추수감사절은 우리에게 감사할 일이 있었음에도 그냥 지나칠 것을 되새기게 해 줍니다. 사람들은 감사한 것을 기억하기보다는 불만족스러운 일, 억울한 일을 기억합니다. 서운한 일, 억울한 일을 되새겨보라 하면 줄줄 나옵니다. 그러나 감사한 일을 되새겨보라 하면 한참 걸립니다. 저도 감사한 일 뭐가 있었나, 한 참 생각하고 찾아냈습니다. 추수감사주일이니 감사한 일을 되새기고 거기서 행복을 찾아내어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는 데살로니가 교회는 설립된지 얼마되지 않은 교회였지만, 신앙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한 교회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소속된 성도들이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드러낸 모습에 대해 칭찬 하였습니다. 바울이 선교하면서 개척하여 세운 교회들이 여럿 있었지만, 그 어떤 교회보다도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에게 있어서 기쁨이었고 자랑이었습니다. 자신이 개척하여 세운 데살로니가 교회를 자기 입으로 자랑하는 것이 덕이 되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자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이 모두들 고귀한 덕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성도들도 추수감사절기를 맞이해서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님들처럼 하나님의 기쁨이 되고 자랑이 되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비듯이 우리도 감사할 건디기가 있어야 감사하지요.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옛 어른들이 많이 쓰시던 속담입니다. 어린 시절 소를 바라보면서 드는 생각은 많습니다. 소는 연신 꼬리를 휘둘러서 소 등에 앉은 파리를 쫓습니다. 그런데 꼬리가 온몸을 다 커버하지 못합니다. 꼬리가 닿지 않는 곳에 앉은 파리는 어떻게 쫓아낼까? 소는 그래서 외양간의 기둥에 대고 비비기도 합니다. 소가 가려운 부분을 긁어야 하는데, 허공에 대고 비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언덕이 있으면 거기에 대고 비빕니다. 언덕이 있으니 소에게는 참 다행입니다. 소를 보면서 사람들이 속담을 만들어냈습니다.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드리시는 여러분도 목사님 ‘감사도 감사할 건덕지가 있어야 감사하지요’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우리가 설교이든 아니든 하는 말이 ‘무조건 감사하자’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 하면서 오죽, 감사를 하지 못하면, 설교하는 목사님이, 대놓고~‘무조건 감사하자’라고 하실까? 물론 그 설교에 우리는 ‘아멘’으로 받음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사실은 감사해야 옳지만 감사할 조건이 전혀 없다면 결코 감사가 안 됩니다. 문제는 우리가 감사해야 할 이유 소로 말하자면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비는 것처럼 나에게도 감사할 건더기가 있어야 감사하지요 할 것입니다.
그런데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감사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소가 등이 지금 무지하게 가려워요, 어디 서까래 기둥이라도 있으면 비비겠어요. 그런데 소 등 바로 위에 비비기 딱 알맞은 서까래가 있어요. 그런데 소가 거기에 ‘비빌 언덕’이 있는 것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냥 가려운데도 끙끙거리면서 참습니다. 감사해야 함에도 감사하지 않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비빌 언덕이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이 엄청난 핍박 가운데서도 자신들의 믿음은 오히려 더 성장하고 서로의 사랑도 더 커져 간 것을 말하며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환란과 핍박이 있다고 하여서 신앙이 퇴보하는 것은 아님을 말합니다. 우리는 어떠한 시련 가운데서도 우리의 믿음이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같이 더 성장할 수 있는 믿음을 갖고 감사함을 드리는 비빌 언덕입니다.
3절‘형제들아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지니 이것이 당연함은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 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함이니’데살로니가교회에 대해 살펴 봅시다. 빌립보교회를 든든하게 잘 세운 바울과 실라와 디모데가 다음 목적지로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 당시 데살로니가는 바다를 인접한 항구도시로 무역이 왕성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큰 도시였습니다. 게다가 유럽을 통일하고 호령하였던 알렉산더 대왕을 배출한 곳이 데살로니가였기에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자부심이 매우 강하였던 곳입니다.
행17:1절‘그들이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이미 유대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던 데살로니가지역에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개종하면서 기독교로 넘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헬라인들 중에서도 복음을 받아들이고 교회에 나오는 이들도 많았습니다. 이렇게 데살로니가교회에 모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본 바울이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항상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것은 너희 믿음이 자라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 풍성하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데살로니가교인들을 볼 때마다 항상 감사하는 것이 두 가지라고 말합니다. ‘너희 믿음이 더욱 자라기 때문에 감사한다’저는 이 말을 뼈 속 깊이 공감합니다. 교회를 맡아 목양하는 목회자의 입장에서 가장 기쁜일은 함께 신앙 생활하는 교회의 성도들이 가진 믿음이 성장할 때입니다. 어린아이처럼 투정을 부리면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성숙하게 되어 하나님 앞에서 든든히 서가는 모습을 볼 때, 이것이 목회자가 누리는 가장 큰 기쁨입니다. 사례비를 많이 받는다고 기뻐한다면 그 사람은 삯꾼입니다. 바울은‘믿음이 더욱 자라고’라고 말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이 말은 작년의 믿음보다 올 해의 믿음이 성장하고, 올 해의 믿음보다 내년의 믿음이 계속 성장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성장합니다. 살아 있으면 꽃을 피우고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으면서 변화를 합니다. 하지만 죽은 것은 절대 변화하지 않고 도리어 썩어버립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모두가 더욱 자라는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또 하나는 ‘각기 서로 사랑이 풍성하기 때문에 감사합니다’,‘너희가 다 각기 서로 사랑함이 풍성하다’라고 바울은 말합니다.‘각기 사랑함이 풍성하다’는 말은 서로 서로가 사랑하고 사랑 받으면서 사랑을 나누는 것에 조금도 부족하거나 모자람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으로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받은 사랑이 중요한가? 아니면 주는 사랑이 중요한가?’를 구분하는 모습이 있습니다. 참으로 쓸모없는 구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받는 사랑도 중요하고 주는 사랑도 모두 중요합니다. 내가 사랑을 받아야 할 때는 내가 사랑을 받으면 됩니다. 그리고 내가 사랑을 주어야 할 때가 오면 그저 사랑을 나누어 주면 됩니다. 사랑을 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나쁜 사람이 아니고, 사랑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대단한 품성을 가진 거룩한 사람이 아닙니다. 사랑이란 그저 주고 받고 나누면서 서로 함께 할 때에 가장 건강한 모습이 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사랑을 나누고 베풀고, 사랑을 주고받는 모습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습을 바울이 보고서는 하나님 앞에 늘 감사한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이 풍성할 때 그 교회가 좋은 교회요 훌륭한 교회입니다. 각각 성도들이 서로 사랑하는 일이 많아질 때 그 성도들이 좋은 성도입니다. 상주감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이번 추수감사지일에 쌀을 모아서 불우한 이웃을 돕겠다고 하는데 우리도 한번 해보고 싶은 이웃사랑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잘했다 할 것입니다. 부족하지만 우리들도 어렵지만 남을 돕자고 말만 했는데 이번에 실천에 옮겨보는 것입니다. 주는 사랑도 기쁠 것입니다. 기쁨으로 나누었으면 합니다.
반대로 사랑이 없으면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신 주님처럼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십니다. 그러기에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사랑함이 더욱 풍성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의 사랑이 풍성했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살전4:9절 이하에 보면 그들은 서로 사랑하였습니다. 서로 사랑할 뿐 아니라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에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했습니다. 말하자면 마게도냐의 형제들까지도 사랑하고 물질적으로 후원을 했다는 말입니다. 이제 개척된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입니다. 많은 핍박과 어려움에 처한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다른 교회를 사랑으로 도와주었다는 것입니다.
2.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주시고 ‘감사하라’고 하셨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이 약화되면 불만과 원망과 불평의 마음부터 우러나옵니다. 이것들은 감사의 ‘싹’을 자르는 요소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오래도록 신앙생활을 했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원망과 불만과 불평을 안고 살아갑니다. 기뻐하고 감사하고 만족할 줄 아는 신앙인들 보다는 매사에 세상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이 약화되어서 그렇습니다.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시는 여러분이 만약 여러분의 마음속에 감사보다는 원망과 불평이 더 많다면 ‘아! 내 믿음이 좀 떨어졌구나, 내 믿음이 식었나’그렇게 생각하면 틀림없을 것입니다. 믿음이 성숙하고, 신앙과 영적인 풍성함을 유지하고 살아갈 때 그 마음에는 언제나 감사가 넘치게 되는 법입니다.
그래서 찬송가‘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 나라’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오직 그 풍성한 축복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믿음의 열매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거친 들도 초막도 천국이 됩니다. 참으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충만한 사람들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참으로 감사하는 마음은 믿음의 열매요, 그의 신앙을 증거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감사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마음입니다. 아무나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산다면 그는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주셔야 그런 마음을 가질 수가 있고 그것을 표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에 원망과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입만 열면 불평 불만이 튀어나옵니다. 사람들과 대화하다 보면 감사나 만족함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적습니다. 감사보다는 불평과 불만의 목소리가 많습니다. 그래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은 축복 받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무엇에 감사해야 하는가? 구원받은 것을 감사해야 합니다.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감사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축복을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먹고 마시고 입고 누리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입니다. 내가 지금 살아있는 모든 것에 감사해야 합니다. 하루에도 수십명이 죽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고 생명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우리는 은혜를 깨닫는 것이 감사의 출발점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깨달을 수 있는 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모든 것을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욥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할 줄 아는 거룩하고 신실한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래도 목사님 감사도 감사할 이유가 있어야 감사할 수 있다고 저는 생각을 합니다. 감사할 이유가 없는데 감사하는 것은 모순아닙니까라고 질문 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조건 감사하라고 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을 먼저 주시고 ‘감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기독교는 감사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감사가 아닙니다. 감사할 이유가 있는 감사입니다.
오늘 설교하는 제가 감사할 이유는 무엇일까요? 목사가 되었으니 감사하고, 이렇게 설교할 수 있으니 감사하고, 안정적으로 35년째 목회하게 하셨으니 감사하고, 좋은 성도들을 만났으니 감사하고, 아내가 있으니 감사하고, 자녀들이 있으니 감사하고, 비록 질환이 있으나 그럭저럭 일상생활 할 만큼의 건강이 있으니 감사하고, 매일 북천을 달리기 할 수 있어서 감사하고, 이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이유가 충분합니다. 그러니 저는 감사함이 옳습니다.
그런데요, 감사하려고 보니, 감사 못 할 조건도 만만치 않아요. 감사보다 불만족, 불평할 것들이 훨씬 더 많습니다. 감사할 것과 감사하지 못할 것을 대립시켜 탕감시키고 나면 불평이 더 많습니다. 사람들은 그래서 감사하지 못합니다. 감사할 수 없는 것들은 외면하고, 감사할 수 있는 것만으로 억지로 감사하라고 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못마땅한 것은 못마땅한 대로 기도해봐야 합니다. 하나님,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감사할 수도 없고요, 매우 못마땅합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하실까요? ‘그래도 무조건 감사해야 해’이렇게 하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못마땅한 것을 하나님께 아뢸 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불평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공감해 주십니다. ‘아, 그랬구나, 마음이 아팠구나, 속이 상했구나, 그 말 들으니 나도 마음이 아프다’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의 불평에 먼저 공감해 주시고, 이어서 위로를 해 주십니다. ‘내가 너를 위로한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내가 너의 아픔을 기억한다’ 하나님이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에게 해 주시는 ‘공감과 위로’ 이것을 체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울도 하나님께 불평을 했습니다. 이를 ‘신원’이라 합니다. 고후 2:7-9절‘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탄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만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가게 하기 위하여 내가 세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왜 없겠습니까? 바울은 육체에 가시가 있었습니다. 신학자들은 바울이 평생 안질을 앓았다고 합니다. 시력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3번이나 고쳐주십사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고후2:9절‘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했습니다. 오늘 상주감리교회에서 예배하는 저와 여러분도, 이렇게 하나님께 신원하고 응답받아야 할 줄 믿습니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이유를 찾아서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고 나면 그때부터 하나님께 자연스럽게 감사가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은 후에 나오는 감사라야 진정한 감사로서 의미를 띠게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감사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2-3절 본문에서 바울이 감사한 것은 무엇입니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믿음이 자란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가 서로 사랑함이 풍성한 것을 감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우리는 내 문제, 나에게 주어진 조건 안에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바울은 그러나 감사의 조건을 자기 밖에서 찾아서 감사합니다. 자기가 개척한 데살로니가 교회,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의 믿음과 서로 사랑! 이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내 문제만 가지고 신원하고, 내 문제로 감사할 뿐 아니라, 사도 바울처럼 이렇게 자기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내 문제가 아닌 ‘너’의 문제로 감사하는 감사가 수준 높은 감사입니다. 특히 자신이 전도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이 쑥쑥 자라감을 보면서 하는 감사! 감사 중에서도 고차원 감사입니다.
사람들은 한평생 살아가는 중에, 나, 나의 가족, 나의 피붙이로 인한 감사에 갇혀 있습니다. 그나마 늙어가면서 피붙이 감사도 시들해집니다. 자식에 대한 감사도 시큰둥해집니다. 나중에는 아내에 대한 감사도 없습니다. 오직 자기 밖에 모릅니다. 이것이 늙어가는 서러움입니다. 우리가 늙어가되 이렇게 되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나이들어갈수록 내 문제로 인한 감사는 물론, 이웃을 위한 감사를 해야 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그 중에서도 내가 전도하여 구원받은 성도의 신앙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감사해야 합니다. 이 감사가 감사 중에서도 가장 큰 감사인 줄 믿습니다. 내가 전도한 성도로 인하여 감사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3.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도 박해와 환난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박해와 환난이 없어진다는 것은 절대 사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 때문에 없던 환난이 더 생길 수 있습니다. 신앙 때문에 없던 박해가 더 생길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박해와 환난이 생기는 신앙생활을 왜 해야 합니까? 박해와 환난 이후에 있게 될 최고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이 약속하신 최고의 축복을 얻기 위해서 환난과 핍박을 참고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얻기 위해서 광야 40년의 생활을 참아야 했듯이 새 예루살렘과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서 이 세상에서의 박해와 환난을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런중에도 감사한 마음으로 신앙생활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4절은 참 의미심장 합니다. 4절‘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사도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로 인하여 감사를 한다고 해놓고 4절에서 무얼 말합니까?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지금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에게 가해지는 박해와 환난, 멈추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음으로써 받는 핍박이 더욱 거세지고 있습니다. 이 핍박은 나중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예수 믿다가 목숨을 잃을 수가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께 감사를 말한 다음에 ‘박해와 환난’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중에도 박해와 환난은 여전히 지속됩니다. 박해와 환난이 감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해집니다. 데살로니가 전서가 쓰여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제국이 그리스를 정복합니다. 로마 제국의 기독교 탄압은 역사적으로 유명합니다. 예수 믿는 성도를 잡아서 사자 먹이로 줍니다. 그것도 사람들의 구경거리로 제공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믿음과 사랑을 주 안에서 자랑합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박해받고 환난 중에 있으나 감사는 줄어들지 않습니다.
더 자세하게 말씀 드리면 이런 것입니다. 4절‘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향해서 가장 극심한 핍박과 박해를 가했던 자들은 유대인들이었습니다. 바울과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유대인들의 박해는 행 17장에 잘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서 ‘예수가 바로 그리스도다’라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자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미쳐 광부하면서 복음전하는 바울을 죽이려 합니다.
유대인들은 거리에 있는 불량배들을 매수하여 바울 일행을 잡아 그들이 생각한 방식대로 처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바울 일행이 몸을 숨기자, 유대인들은 데살로니가교회 신도 중 한 사람인 야손의 집을 습격하여, 야손과 신도 몇 사람을 잡아서 관원에다가 고발해 버립니다. 고발하는 죄목은 ‘로마 제국과 황제에 반대하는 자들을 따르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로마황제에 반하여 반란과 쿠데타를 일으킨다는 엄청난 죄목으로 고발합니다.
바울에 대한 너무나 집요한 박해가 이어지자 바울은 잠시적으로 데살로니가 교회를 떠나 다른 도시로 거처를 옮기기도 합니다. 이들은 이처럼 집요하고도 잔인하게 박해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암울한 데살로니가교회의 상황을 아는 바울이었기에 ‘너희가 박해와 환난 중에서도 인내와 믿음으로 잘 견디고 승리하는 것을 내가 여러 교회에 자랑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믿는 개인에게도 환난이 찾아 오듯이 믿음의 가정에도 환난과 어려움이 찾아 옵니다. 하나님의 몸 된 교회에도 환난과 어려움이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에 어떤 모습으로 환난과 역경을 견디고 이겨내야 할까요? 바울은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도에게 주신 사랑하는 행동이 역경을 극복하게 만듭니다. 가정에 문제가 발생하게 되면 가족 구성원간에 서로 사랑하는 모습에서 가정의 어려움은 극복되어집니다. 그리고 인내하는 모습으로 서로를 믿고 견디면 고난은 지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이 찾아 올 때 사랑 안에서 사랑을 주고받으며 나누고, 믿음 안에서 서로를 신뢰하며 견디어 나가는 인내가 고난에서 승리하게 만듭니다. 상대를 비난하고 한사람을 타켓으로 삼아 공격하는 것은 결단코 해서는 안 될 행동입니다.
세계적인 대부흥사였던 빌리그레함목사님의 부부묘 사진입니다. 의(義)라는 한자가 적혀져 있는 것이 아내였던 수르 벨 그레함 사모님의 묘비이고 오른 쪽이 빌리 그레함 목사님의 묘비입니다. 루스 그레함 사모님의 묘비 하단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묘비문이 적혀있습니다. ‘The 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공사 끝! 그 동안의 인내를 감사함)
너무나 획기적인 묘비명입니다. ‘공사 끝’이라는 말은 자신의 인생을 세워 나가는 공사가 이제 멈추었다는 말입니다. 내 인생을 세워 나가는 공사는 끝났어도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인내라고 말합니다. 부족한 인생을 살았지만 늘 자신을 향해 베풀어 주시고 나타났던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에 감사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상주감리교회 모든 성도님들에게도 이런 감사의 고백이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나같이 부족한 사람에게 한없이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우리에게 찾아온 역경을 사랑과 인내로 너끈하게 승리하는 여러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모든 사람에게는 두 개의 지갑이 있습니다. 하나는 돈지갑입니다. 또 하나는 마음지갑입니다. 돈지갑에서는 돈을 꺼내서 씁니다. 마음지갑에서는 마음을 꺼내서 씁니다. 돈을 꺼내서 어디에 쓰는가가 중요하듯이 마음을 꺼내어 어디에 쓰느냐는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지갑에서 마음을 꺼내어 어디에 주로 쓰십니까?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노여움’ ‘분노’ ‘화’를 삽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슬픔’ ‘비통’을 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즐거움’을 사들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꺼내어 ‘기쁨’을 사들입니다. 역순으로 말했습니다. 히로애락입니다. ‘희로애락’은 달리 표현하면, 마음지갑에서 마음을 꺼내어 ‘희로애락’을 산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귀중한 것 하나가 빠졌습니다. 마음을 꺼내어 ‘감사’를 구입해야 합니다. 마음지갑에서 꺼낸 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진 것이 ‘감사’마음으로 살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비싼 것, 그것이 ‘감사’입니다. ‘마음을 꺼내어 감사를 구매합시다’
지금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이 신앙 때문에 어떤 어려움과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기쁨으로 참으시고 즐거움으로 견디시기 바랍니다. 소망을 가지시고, 약속하신 축복을 기다리면서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딤후4:7-8절‘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되니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 인내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인내하지 않고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없고 인내하지 않고 달려갈 길을 마칠 수 없고 인내하지 않고 믿음을 지킬 수 없습니다. 인내하는 자만이 신앙의 경주를 완주할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절기를 맞이해서 지난 한 해동안에 상주감리교회 성도들의 사랑은 얼마나 풍성해졌습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인내하며 믿음의 경주를 잘 달려왔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을 바라보시는 주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를 칭찬하신 것처럼 여러분들을 칭찬하시겠습니까? 특별히 상주감리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여러분, 절대 나는 나이가 들었다고 이제 성장하는 것은 틀렸다고 말하지 않기 바랍니다. 육적으로는 성장할 수 없지만 영적으로는 얼마든지 성장할 수 있고 성장해야 합니다. 우리의 초점을 주님께 고정시킬 때 주님의 도우시는 은혜가운데 성장하게 될 줄 믿습니다.
감사는 미래를 여는 열쇠입니다. 미래의 행복을 원하신다면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풍성한 구원의 축복과 삶의 축복을 허락해주신 주님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늘 감사우선의 삶을 살아가는 감사비결의 삶을 배울 수 있기 바랍니다. 감사를 회복하는 상주감리교회 성도여러분들이 복 된 삶이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