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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 순교성지 -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 |
전동 순교 성지의 중심이 되는 전동 성당 터는 조선시대에는 풍남문 밖이었다. 박해시 순교자들은 풍남문 밖에서 처형되고 효수되었기에 전동 성당은 풍남문 성지와 따로 볼 수가 없다. 따라서 전동 성당과 풍남문은 전동 순교성지로 묶어 봐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풍남문에서 순교한 초기 순교자들의 순교 행적과 영광은 전동 성당과 같이한다.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없애고 신주를 불태움)로 야기된 진산(鎭山) 사건으로 1891년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이 순교하고(신해박해), 10년 뒤 1801년 신유박해 시에는 ‘호남의 사도’로 불린 유항검(柳恒儉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동생 유관검(柳觀儉), 윤지충의 동생이면서 대박청래(大舶請來, 북경 주교에게 박해를 피하기 위해 큰 배를 보내달라고 요청함) 사건을 일으킨 윤지헌(尹持憲, 프란치스코), 김유산(金有山, 토마스, 1761-1801)이우집(李宇集) 등 많은 순교자가 이곳에서 나왔다.
전동 성당의 설립
전동 성당은 1889년 봄에 설립이 되어 초대 주임으로 보두네 신부(Baudounet,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859-1915, 한국명 尹沙勿 윤사물)가 부임하였다. 보두네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1884년 사제서품을 받고 1885년 한국에 와서 충청도와 경상도 등지에서 한국의 풍습과 언어를 익힌 뒤 전주에 부임한 것이다.
당시 전주부(全州府)는 외국인이 자유롭게 올 수 있는 개항지가 아니었고 전라도 감영이 있을 뿐 아니라, 부중에 신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배경집 베드로 회장의 안내로 우선 완주군 소양면 대성동(일명 대승리)에 정착하여 전주 북쪽 지역을 관할하였다. 이것이 전주 본당, 즉 지금의 전동 본당의 시작이었다.
보두네 신부는 인구가 많은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하기 위해 무한이 노력하여 약 2년 뒤인 1891년 6월 23일에 전주 남문 밖에 있는 영저리(營低吏, 지방의 향리) 집을 매입하여 거처를 옮겼다. 보두네 신부는 매입한 집의 안방을 자신의 침실로, 맞은편 방을 개조하여 여자 교우실로 사용하고, 방과 방 사이의 마루인 어간(御間)에는 제대를 설치하였다.
대성동에서 전주 부중으로 본당을 이전한 보두네 신부는 연령회(煉靈會, 오늘의 위령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과 권상연의 순교 100주년이 되던 1891년 봄에야 현재의 자리에 본당의 터전을 마련하여 호남 지역의 모태 본당이 되었다.
성전의 건립
성스러운 순교 1번지에 걸맞는 훌륭한 성전의 건립은 매우 당연하면서도 절실했다. 보드네 주임신부는 그간 부지로 매입한 5,000평의 대지에 교우들이 낸 성당 신축기금과 자신이 타고 다니던 말까지 팔아서 모은 돈, 그리고 안원오(프란치스코) 회장과 김찬일(아우구스티노) 회장이 기부한 돈을 모두 합쳐 5만원이라는 거액으로 공사를 시작하기로 했다. 전동 성당이 지금까지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받는 것은 그 건축물의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보두네 신부와 신앙 선조들이 쏟았던 정성에 기인한다.
설계는 당시 서울 명동대성당 건축에 참여했던 프와넬(Poisnel) 신부가 맡아 1908년에 드디어 착공을 했다. 사실 처음 보두네 신부는 성당 부지를 전주 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언덕의 오목대(梧木臺)로 옮기려 했지만, 지역 유림들과의 마찰을 우려한 뮈텔 주교가 현재의 자리에 세우도록 명하여 지금의 자리에 세우기로 했다고 한다.
보두네 신부는 당시 일제 통감부가 전주에 신작로를 닦으며 풍남문 성벽을 헐자 이 성벽 돌과 흙을 사용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풍남문 성벽 돌을 가져다 성당 주춧돌로 사용했다. 유항검을 비롯한 전동 성당 터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의 목을 효수했던 성벽의 돌을 성당 주춧돌로 사용함으로써 이곳이 순교지일 뿐 아니라 신앙의 요람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중국인 벽돌공 100여명이 동원돼 전주성을 헐은 흙을 사용해 벽돌을 직접 굽고, 석재는 전북 익산의 황등산에서 캔 화강석을 말 네 필이 끄는 마차로 운반해 왔으며, 목재는 오늘의 치명자산을 매입해 벌목하여 사용했다. 공사 기간 동안 전주 시내에 사는 신자들은 물론 진안, 장수, 장성 등지에 사는 교우들까지 밥을 지어 먹을 솥과 양식을 짊어지고 와서 손마디와 손바닥에 굳은살이 박히고 어깨에 혹이 생기도록 자원 부역을 했다.
이러한 신자들의 희생적 노력 끝에 공사를 시작한 지 만 7년 만인 1914년에 내부 제대를 제외한 성당 외부공사를 모두 마쳤다. 그런데 불행히도 초대 주임 보두네 신부는 성당 완공을 못보고 1915년 5월 이질에 걸려 57세로 선종했다. 그래서 성당 내부 공사는 제2대 본당 주임인 라크루 신부에게 맡겨졌다. 라크루 신부는 193평에 달하는 성당 내부공사를 17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묵묵히 진행하여 마침내 1931년 6월18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당시는 전주지역이 대구교구 관할이었음)의 주례로 성전봉헌식을 거행했다. 이처럼 전동 성당은 착공에서 성전봉헌까지 23년이라는 대역사 끝에 완성된 성당이다.
유지 과정의 손상과 보수
1937년 4월 13일 전주 교구가 설립되면서 주교좌성당으로 승격된 전동 성당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군이 트럭 정비소로 사용하기 위해 제대와 성당 내부를 파괴해 첫 수난을 겪었다. 전동 성당은 한국전쟁 이후 1955년, 공산군에 의해 파괴된 십자가의 길 14처 복구공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보수 공사를 해왔다. 1973년에는 성당 마룻바닥을 철거하고 인조석으로 개조를 했으며, 1975년에는 유리창을 개수하기도 했다. 이후 전동 성당은 1988년 10월에 일단의 괴한에 의해 방화사건이 발생, 성당 동편 2층 회랑이 전소되는 두 번째 수난을 당했다. 1988년 화재사건 이후 제22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한 김봉희 신부는 1992년부터 대대적 전동 성당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성당 바닥은 대리석으로, 부식된 벽돌은 새 벽돌로 교체됐다. 성당 양측 벽면 18개의 창문은 유리로 단장했고, 화재로 전소됐던 2층 회랑을 복원했다. 또 성당 담을 허물고 그 자리를 꽃길로 조성해 시민들이 언제든지 찾아올 수 있도록 개방해 놓았다.
그런데 전동 성당의 상징인 종이 사라질 위기도 있었다. 프랑스인 마리아 앙리에트가 봉헌한 전동 성당 종은 1915년 8월 24일 대구교구장 드망즈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갖고 종탑에 설치된 것이다.
1942년 일제가 전동 성당 종을 공출하려 하자, 당시 오기선 신부가 “만일 적이 공습했을 때 전기나 통신이 끊어지게 되면 성당 종을 쳐서 사람들에게 알릴 수 있고, 또 매일 울리던 종이 울리지 않으면 사람들이 불안해할 것”이라고 말해 위기를 모면했다. 나바위와 수류 성당을 비롯해 전주 관내 개신교회의 종은 모두 공출당했으나 신부의 임기응변으로 전동 성당 종만 공출을 면할 수 있었다. 이후 매 주일 오전 교중미사 때면 전동 성당의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학교와 교회의 종은 전시품이 된 지 오래다. 종은 하나님의 섭리와 우리의 신앙을 선포하는 복음적이고 선교적인 기능도 있다. 종소리는 인간이 얼마나 하나님과 가까이 있는지를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종소리의 회복’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렸을 때 교회의 종소리를 들었을 때 신자가 아니라도 거부하지 않았다. 요즘은 너무나 민감하여 종을 친다는 것은 어림도 없다. 성덕대왕 신종 소리가 불자들에게만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니다. 이처럼 우리는 ‘종(鍾)을 잃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전동 성당의 순례는 한옥마을에 들어오는 때부터 이미 시작이다. 성당 인근 경기전 광장에서는 신혼부부들을 중심으로 남녀가 삼삼오오 짝을 지어 우아한 한복 복장을 하고 신혼을 만끽한다. 우리가 경주 황리단길이나 교촌마을에서 익숙히 보던 광경이다. 이처럼 경주와 전주는 비슷한 면이 있다.
정문에 이르니 주말이라 방문객이 매우 많다. 그런데 성당 안마당에는 차단막을 치고 문화재 발굴 조사 중이어서 어수선하다. 그래서 그런지 관리소에서는 방문객과 차량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순례 목적임을 말하고 정문안에 들어서자 예수님은 누구나 다 들어오라는 뜻으로 두 팔을 벌려 맞이하신다. 예수님 발밑에는 큰 책이 펼쳐져 있고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성구가 적혀 있다. 그리고 그 뒤로 성전의 위용이 나타난다.
▲당신은 내 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등불이오이다. (시편 119,105)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전동 성당은 서울 명동 성당과 대구 계산 성당과 함께 3대 아름다운 성당으로 손꼽힌다. 전동 성당은 정면 중앙 종탑부와 양쪽 계단에 비잔틴 풍의 뾰족 돔을 올린 로마네스크 양식 건물이다. 특히 12개의 창이 있는 종탑부와 8각형 창을 낸 좌우 계단의 돔은 전동 성당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대표적 상징물로 꼽히고 있다. 또 페인트칠을 하지 않은 성당 내외벽은 적색과 회색의 벽돌색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색채의 조화가 인상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다.
성당 정면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돌리면 한국 천주교 순교 1번지라고 새겨진 돌이 있다. 여기에 새겨진 글은 전주교구 가톨릭 미술가회 지도 신부인 현유복 신부가 썼다.
그 옆에 초대 주임 보드네 신부의 흉상이 있다. 보드네 신부는 오늘의 전동 성당을 있게 한 대부요 공로자이다.
그리고 조금 더 가면 성심여자중고등학교와 접한 성당 왼편 담장 쪽에는 한국 천주교회 첫 순교자인 윤지충 · 권상연의 순교 동상이 있다. 1993년 3월에 건립된 이 순교자상은 윤지충이 십자가를 들고 서 있고, 권상연이 목에 칼을 차고 십자가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방주 모양의 좌대 위에 설치돼 있다
다시 성당 옆으로 가면 성모 마리아 모자상이 서있고 조금 뒤에 레지오 마리에 성모님 상이 우뚝 서있다. 그리고 조금 더 뒤쪽으로 가면 피에타 상이 있다.
이 레지오 마리애 성모상은 2011년 파티마의 모후 레지아에서 세웠는데 뒷면에는 1955년 전주교구 최초로 레지오 마리애 쁘레디시움 ‘치명자의 모후’가 탄생된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피에타 상은 미리내 천주성삼 성직수도회에서 제작한 것이다.
성당 뒤편 왼쪽, 발굴 부지 뒤로는 건물 몇 동이 있는데 맨 앞이 사제관, 그 뒤가 순교자 기념전시관과 유치원, 맨 뒤가 수녀원이다.
전동성당 사제관(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 178호)은 1926년 2대 신부인 라크루 신부가 지었다. 1937년에 전동성당이 주교좌성당이 되면서 전주교구청으로 사용되었다. 1960년 교구청이 이전한 뒤에는 주임신부와 보좌신부의 생활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제관 중앙에는 2층 현관으로 올라가는 주 출입구가 있으며1층의 출입구는 건물의 남측 면에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건물의 사면에 배치한 창은 모두 반원보다 작은 원호형 아치로 되어 있다. 난간은 십자형으로 공간을 띄운 무늬 쌓기로 정교하게 꾸몄고 지붕의 네 곳 중앙에 작은 창을 설치하여 조형적으로 매우 아름답다.
안내문에 의하면 이 사제관은 르네상스 양식을 바탕으로 하여 로마네스크 양식이 합쳐진 근대 건축물로 아름다운 겉모습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건축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그냥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르네상스 양식이란 14-16세기 유럽에서 발달한 고전주의적 경향의 건축 양식.
*로마네스크 양식이란 10세기말-12세기 중엽에 발달한 서유럽식 양식
발굴지 앞으로는 성모동산이 있는데 1977년에 제작된 루르드의 성모님이 모셔져 있다.
지금까지 성전 바깥을 순례했는데 이를 도식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제 성당내부를 볼 차례다.
성전 내부성당 내부에 들어가면 우선 호화롭고 장엄한 아름다움에 눈이 휘둥래질 정도다. 마치 성당의 본 고장 유럽의 어느 성당에 온 것이 아닌지 의심이 간다. 제단에는 2층 높이에 성 요셉 성인과 성모님이 좌우에 계시고 위로는 궁륭 천장에 좌우로 가지런한 감실에 불빛이 부드럽다
낮은 제대 뒤 중앙 감실에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형상으로 빛나는 상이 멀리서볼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낮은 제단 좌우에는 청의와 홍의의 천사들이 시립하고 있다. 성당을 받치고 있는 기둥 행렬이 좌우 행랑을 가르고 벽면에 십자가의 길이 배치되고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이 아름답다.
제대에 가려 보지 못할 수도 있는 중요한 부분이 있다. 바로 성인들의 유해 성광(聖光)들(사진 황색타원 안)이다. 복자 윤지충(바오로), 권상연(야고보), 윤지헌(프란치스코)의 유해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 앵베르 주교, 성 모방 신부, 성 샤스탕 신부 유해와 함께 영구 안치되어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윤지충, 권상연, 윤지헌의 유해가 안치된 것은 불과 얼마전의 일이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인 이들이 순교한 뒤 실묘가 되어 애석했는데 2021년 3월 11일 초남이 성지의 유항검의 일가의 원래 묘지터인 바우배기(전북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69-17)에서 이들의 유해가 발굴되었다. 곧 바우배기를 성지로 개발하기 위해 무연고 분묘를 개장하는 과정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의 이름이 적힌 백자사발 지석과 유해가 출토된 것이다. 순교사에서 볼 때 대단한 발굴이었다. 전주교구 김선태 주교가 전주 전동성당에 이들 복자 유해를 모시는 예식을 집전한 것은 지난해 2022년 12월 8일이었다.
전동 성당의 내부 공간은 서울 명동 대성당과 똑같이 공중 회랑과 많은 창으로 만들어 육중한 벽체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은 자연 채광으로 내부 공간이 밝도록 꾸며놓았다.
특히 전동 성당 양측 벽면 18개 창 가운데 신자석을 감싸고 있는 12개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전주교구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창에는 103위 한국 순교 성인 중 전주 숲정이와 서천교에서 순교한 한원서 베드로, 손선지 베드로, 이명서 베드로, 정문호 바르톨로메오, 조화서 베드로, 조윤호 요셉, 정원지 베드로 7명의 성인과 본당 주보인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1801년 순교한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와 유관검, 그리고 동정부부 순교자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본당 초대주임 보두네 신부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또 제대 주위에는 예수의 탄생과 수난, 부활, 승천, 성령강림, 성모승천을 보여주는 색유리가 설치돼 있다.
교회 건축물 전문가인 김정신 교수(단국대 건축공학과)는 “전동 성당은 전체적으로 종탑부 돔이나 석조 기둥 등 비잔틴 요소를 혼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당으로 외관의 세부 기법, 따뜻한 느낌을 주는 내부 공간 등 여타 유명 성당을 능가하는 건물”이라고 평했다.
건축은 '인간을 담을 그릇을 빚는 작업'에 흔히 비유되고 있다. 아름다운 건축물들은 그 생김새가 서로 달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는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인간과 자연 그리고 건물 공간이 서로 거슬리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교회 건축물 중에서 이런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전주교구 전동 성당이다. 이러한 역사적, 미학적 건축적 요소를 갖춘 전동 성당은 1981년 9월 25일 국가문화재인 사적 제288호로 지정되었다.
전동 성당은 2006년부터 성당 보수사업을 시행했고 이어서 전동 성당 사적공원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사적공원화 사업의 첫 단계로 2011년 12월 11일 사제관 뒤편 새로 매입한 부지에 한국 최초 순교자기념관을 건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2개 동으로 건립된 기념관 내에는 전시실과 성심 유치원, 회합실, 소성당 등이 들어섰다. 전동 성당은 계속하여 현 사제관을 이전한 후 보수하여 유물전시관으로 사용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성당 바로 옆에 위치한 성심여중 이전 사업이 완료되는 대로 건물 철거에 착수해 주변 전체를 사적공원화하는 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이렇게 사적공원화 사업이 다 이루어지면 전동 성당은 인근의 풍남문(보물 제308호)과 경기전(사적 제339호)을 비롯해 한옥마을, 오목대와 한벽루, 치명자산 성지까지 연계되는 성지순례와 역사문화의 체험장이 될 것이다.
꿈 버리지 않으면 (전동 성당에서)
피 어린 풍남문 밝아 있고
곁에는 향내 나는 전동성당
죽어서 살아나면
영원히 죽지 않는 법입니까
눈 부시게 다가오는 생명들
돌아와 햇살되는 생명들
정녕 죽음보다 완벽한 삶 없는 것입니까
내 만 겹의 허물 벗으며
죽음에 닿는 법 익힐까요
나는 비둘기 날아드는 '순교터'에 서서
스스로 목 매달아 하늘 바라봅니다
누구라도 꿈 버리지 않으면
설렐 수 있는 것입니까
가까이에서도 충만한 거리
멀리에서도 충만한 거리 (김영수)
5시 20분경 전동 성당을 나오면서 성당 관할 성지 안내도를 보니 풍남문과 초록바위, 서천교가 20-30분 안에 다 돌아올 수 있는 곳에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인근에 있는 풍남문을 거쳐 오늘 마지막 코스인 초록바위와 서천교를 걸어가기로 했다.
전주 풍남문(보물 제38호) - 최초의 순교자 나오다 |
풍남문은 조선시대 전라감영의 소재지였던 전주를 둘러싼 남쪽 출입문이다. 전주성에는 동서남북에 각각 출입문이 있었으나. 지금은 이 문만 남아 있다. 1389년(고려 공야왕 1년)에 관찰사 최유정이 처음 세웠으며, 정유재란 대 화재로 불타버렸고, 영조 44년(1768)에 전라감사 홍락인이 다시 세우면서 풍남문이라 이름하였다.
풍남(豊南)이란 ‘풍패(豊沛) 의 남쪽’이란 뜻이며, ‘풍패’란 중국 한(漢)나라 고조가 태어난 곳으로, 조성왕조의 발원지인 전주를 ‘풍패지현’이라 하여 그 곳에 비유한 것이다. 풍남문의 뒤쪽 현판이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이라 한 것도 전주가 호남 고을의 으뜸이라는 뜻이 있다. 건물은 장중하고 우람한데 성문 위에 세운 누각 위층의 기둥이 아래층의 기둥과 하나로 연결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도심에 자리한 단아한 성문에서 예 전주성의 모습을 엿 볼 수 있다.
이러한 풍남문은 천주교 박해시대에 한국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 그리고 호남의 사도 유항검 아우구스티노 등 초대 전주 지방 천주교회의 지도급 인물들이 처형된 곳이다. 호남의 사도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과 그의 동료들이 복음 전파에 온 힘을 쏟고 있던 1790년경, 조선의 천주교인들에게는 처음으로 큰 시련이 닥쳐왔으니, 소위 ‘진산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진산사건은 천주교의 전례와 유교 의식간의 충돌이라 할 수 있는 제사 문제로 인해 발생한 사건으로 이로 인해 한국 교회의 순교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관아에서는 풍남문 밖에서 처형을 받았던 죄인들의 목을 그 풍남문 위에 걸어 두어 지나다니는 이로 하여금 두려움에 떨도록 했다. 지금은 전주 지역 시민들에게도 잊혀 가고 있는 평온한 풍남문은 당시 순교자의 목을 걸어야만 했던 무시무시한 역사의 뒤안길이다.
윤지충(尹持忠, 1759~1791, 바오로)은 고산 윤선도(尹善道, 호 孤山, 1587~1671)의 6대손으로 전라도 진산에서 태어났다. 25세에 진사에 급제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선비였다. 그는 진사에 급제하고 이듬해 서울에 갔다가 명례방 김범우 토마스의 집에서 서학을 접한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정약용 형제들의 지도로 열렬한 신자가 되고 다시 그의 외사촌인 권상연에게 전교한다.
권상연(權尙然, 1751~1791, 야고보)은 안동이 고향으로 문학과 윤리를 공부하다가 고종 사촌인 윤지충에게서 교리를 배워 충실히 실천하기를 그치지 않았다.1789년에 이어 두 번째로 1790년 9월 중국 북경에 파견된 윤유일 바오로는 선교사 파견에 대한 북경 구베아 주교의 약속과 함께 조상 제사 금지라는 회신을 갖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소위 '진산 사건'으로 알려진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사가 시작됐다.
1791년(신해년) 여름, 진산에 살던 진사 윤지충이 모친상을 당했다. 그는 외사촌인 권상연과 상의한 후, 모친의 유언과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전통 의식인 유교식 장례와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웠다.
이는 숭유정책(崇儒政策)으로 유교가 국교이다시피 하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양반가를 유지하는 골격을 이루는 사회에서 폐제분주(廢祭焚主: 제사를 폐하고 신주를 불태움)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킴으로써 우리 역사에 커다란 충격을 몰고 왔다.
전통 사상을 거스르는 이 행위는 천주교 박해의 구실이 되었고, 그해 12월 8일(음력 11월 13일) 윤지충과 권상연은 전주 옥에서 나와 풍남문 밖으로 끌려 나가 참수형을 받았다. 이로써 윤지충과 권상연은 한국 교회 최초의 순교자로 기록되었다.
참수된 그들의 목은 9일 동안 전주 풍남문에 내걸렸다. 정조 임금은 그들이 순교한 지 9일만에야 시체를 거두어 가도록 허락하였는데 12월 혹한에도 응고되지 않은 선혈로 이때 흘린 그분들의 숭고한 피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리는 등 많은 기적과 일화를 남겼다.
당시 윤지충이 전라 관찰사에게 적어 올렸다는 '공술서(供述書)'는 한국 교회사에서 천주교에 대한 최초의 공식 변론으로 기록 되고 있다. 그는 공술서에서 “하느님을 알고부터는 덕을 쌓고 하느님을 섬기는데 충실할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견고한 신앙을 조목조목 정연하고 조리 깊게 적은 이 변론은 훗날 신도들의 영적 독서로 읽혀졌고, 정약종 아우구스티노의 아들로 기해박해 때 순교한 성 정하상 바오로 가 쓴 "상재상서(上宰相書)"의 뼈대가 되었다.
그리고 신유박해 때인 1801년 9월 17일에는 전라도에 처음 복음을 전파한 유항검과 그의 아우 관검(柳觀儉, 1768~1801, 세례명은 미상), 윤지헌(尹持憲, 1764~1801, 프란치스코)이 이곳에서 능지처참형을 당하였고, 김유산(金有山, 1760~1801, 토마스)과 이우집(李宇集, 1762~1801, 세례명 미상)은 참수형을 당하였다. 특히 정부는 유항검의 목을 풍남문 누각에 매달아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갖도록 하였으니, 풍남문은 이들의 신앙혼이 서린 곳이다.
그 후 90년 만에 그 처형 자리에는 전동 성당이 자리를 잡아 초대 교회의 굳건한 신앙을 기리고 있다. 이곳에서 순교한 이들 중에서 윤지충과 권상연, 유항검, 윤지충의 동생 윤지헌은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다.
초록 바위 - 바람에 떨어진 순백의 꽃잎들 |
전주시 완산구 동완산동 산1-9에 있는 초록 바위는 병인백해 때 서소문 밖에서 초록바위 순교한 성 남종삼 요한의 14세 된 아들 남명희(明熙)와 순교자 홍봉주 토마스(洪鳳周, ?-1866년)의 아들이 순교한 곳이다. 둘 다 어린 나이였다.
당시는 모반이나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형벌을 받은 집안은 연좌제로 온 가족이 처형되거나 귀양을 가고, 성인은 노비가 되고 가산을 몰수당하는 등 혹형을 받았는데 이 두 집안의 두 아들도 이에 따랐다. 단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당시의 관례대로 전주 감옥에 수감했다가 나이를 채워 이 바위에서 전주천으로 밀어 넣어 죽였다. 비록 어리다 하여도 흉악한 종자(種子)는 자라게 하면 안 된다는 취지였다.
남종삼(南鍾三, 요한 1817-1866)은 정약용의 학통을 이은 남인계의 농학자(農學者)이며 충주 부사를 지낸 부친 남상교(南尙敎)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22세 때인 1838년에 문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서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영해 현감(寧海縣監)을 지냈고 철종 때에 정3품 승지(承旨)가 되어 국왕을 보필했다. 한국 교회사 안에서 가장 높은 벼슬이었다. 고종 때에는 그의 학덕으로 말미암아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한 바 있다.
천주교가 들어오자 신자가 되어 홍봉주(洪鳳周), 이신규(李身逵) 등과 전도에 힘쓰는 한편, F.C.리델 신부에게 한글을 가르치고 선교사 S.F.베르뇌를 홍봉주에게 소개하여 그 집에서 유숙하게 하였다. 러시아의 세력이 침투해 들어오자 선교사를 통해 영국·프랑스와 교섭하여 러시아의 세력을 꺾는 대신 천주교를 공인받으려고 대원군과 면담, 성사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척신(戚臣)의 압력, 선교사와의 연락 지연, 중국 베이징[北京]으로부터의 선교사에 대한 박해 오보(誤報) 등으로 대원군의 태도가 돌변하여, 오히려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가장 혹독한 박해로 기억되는 병인박해를 낳게 되었다.
결국 프랑스 선교사 9명과 함께 체포되어 의금부로 연행된 남종삼은 홍봉주, 이선이, 최형 베드로, 정의배 마르코, 전장운 요한 및 베르뇌 주교, 다블뤼 부주교 등과 함께 문초를 당하고 그 해 3월 7일(음력 1월 21일) 홍봉주와 함께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되었다.
가족도 모두 비참하게 되었다. 부친 남상교 아우구스티노는 공주 진영으로 잡혀가 80대의 나이로 순교했고, 장남인 남명희는 전주 진영으로 잡혀갔다. 처 이조이(李召史) 필로메나는 경상도 창녕에, 9살, 7살 두 딸은 각각 산청현과 영산현에 보내져 여종이 되고, 4살짜리 막내아들 규희는 의령현에 보내어져 종이 되었다. 유항검의 가족처럼 멸문이 되었다.
유배지 창녕에서 노비 생활을 하던 이조이 역시 9년 후 옥리에게 목 졸려 치명하고, 당시 14세의 어린 나이에 붙잡혀 갔던 남명희는 전주 감옥에 수감한 뒤 나이가 차기를 기다려 1867년 가을 이곳 초록바위에서 전주천에 밀어 넣어 수장시킨 것이다. 어쩌면 이리도 참혹한가?
조선왕조가 병인박해 때 이들에게 가한 모반부도(謀叛不導)의 죄는 1885년의 복권조치와 갑오경장으로 해소되었다. 이에 따라 남종삼은 1968년 10월 시복(諡福)되고 1984년 5월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어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그리고 그의 어린 자녀들도 종의 신분에서 풀려나 자유인이 되었다.
홍봉주(洪鳳周, 토마스 1814- 1866)는 충청남도 예산 출신. 1801년 신유박해 때 순교한 홍낙민(洪樂民) 루카의 손자이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한 복자 홍재영(洪梓榮) 프로타시오의 아들이다. 어머니 정소사(丁召史)는 초대 명도회장(明道會長)이며 역시 신유박해 때 순교한 정약종(丁若鍾)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로 기해박해 때 남편 홍재영과 함께 순교했다.
1839년에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러나 부친 홍재영과 아내 심 바르바라는 순교했지만, 본인은 배교로 석방되어 충청도 예산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다. 그 이후로도 그는 외국 사제를 국내에 인도하는 등 교회 일을 보았다. 1956년 재혼한 처가 죽자 서울로 이주하여 본격적으로 베르뇌 주교의 일을 도왔다. 그는 남종삼과 함께 러시아를 막는 방법을 대원군에게 전하는 등 외교적인 일에 관여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변심으로 별다른 성과를 보이지 못한 터에 1866년 2월 23일 베르뇌 주교와 함께 잡혀 3월 7일 남종삼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어 순교하였다. 그리고 이름 모르는 어린 아들도 남종삼의 아들 남명희와 함께 초록바위에서 순교하였다. 홍(洪) 소년과 남명희는 각각 두 집안의 4대 순교자와 3대 순교자였다.
전주교구에서는 삼대와 사대에 걸친 두 순교자 집안의 순교정신을 현양하고자 2006년 5월 싸전다리 부근 전주천변 도로 옆에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싸전다리를 통해 전주천을 건너면서 초록 바위를 바라보니 그냥 평범한 낮은 산이다. 바위는 볼 수 없고 그 대신 시멘트로 토사가 무너지는 것을 방지한 사방공사 옹벽만 보였다.
곤지산(坤止山) 초록 바위
곤지산은 전주천변에 위치한 산봉우리다. 곤지산보다는 초록 바위로 더 알려진 곳이며 전주천 좌안 도로가 뚫리면서 심하게 잘려나간 곳이다. 북쪽의 건지산(乾止山)에 대응하는 남쪽의 봉우리라는 의미의 곤지산(坤止山)으로 불렸으며 전주부성의 북문과 풍남문을 잇는 선상에 위치하고 있어, 곤지산에 올라보면 전주부의 중심축을 조망할 수 있다.
초록 바위 앞 전주천변은 전주 역사에 회한의 아픔을 담고 있는 곳이다. 초록 바위가 전라 감영의 형장으로 유명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초록 바위 벼랑에는 옛날에는 북풍에 시달리며 굽어 자란 소나무가 몇 그루 서 있었고, 그 소나무의 북쪽 가지들은 다른 가지에 비해 눈에 띄게 길이가 짧았으며, 참형당한 죄인들의 머리를 소나무가지에 효수하여 천변에 모인 수많은 구경꾼들에게 전시했다고 한다.
산 밑에 이르니 돌을 세로로 세운 곤지산 안내비가 있고 또 하나 돌판을 비스듬히 눕힌 초록 바위 안내 표지판이 있다.
먼저 곤지산 안내비는 다음과 같다.
곤지산은 전주의 남동방향으로 뻗어나가다 멈춘 봉우리이다. 전주부성을 에워싼 산세 가운데 건저산과 대응되는 산이다. 곤지산은 슬픈 역사를 안고 있다. 이 산에는 전주천에 깊숙하게 내리뻗은 지형으로 깎아지른 절벽과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있었고 빛깔이 푸르스름하여 이름이 붙여진 초록바위가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죄인을 효수하던 곳으로 조선후기 천주교 신자들이 처형되었던 순교지였으며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개남 장군이 참형당한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곤지산은 희귀종인 이팝나무의 군락지로 5월이면 이팝나무의 하얀 꽃이 피오른다.
다음은 초록 바위 안내 표지판의 내용이다.
곤지산 끝자락이 전주천과 만나는 곳, 싸전다리 남서쪽 남부시장 건너편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이팝나무의 무성한 속에 초록바위가 숨어 있다. 1936년 홍수로 제방공사를 하면서 상당부분이 깎여서 현재로서는 당시의 바위의 모습을 알 수가 없다. 기록에 의하면 초록바위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으로 그 산세가 갈마음수(渴馬飮水, 목마른 말이 물을 마시는 형상) 격으로 말이 풀밭을 많이 찾는다는 의미에서 초록바위로 명명했다고 한다. 5월마다 200살이 넘은 이팝나무 24그루의 하얀 꽃구름에 덮이는 이 바위는 조선시대에는 죄인들의 형을 실행했던 형장이었다.
이팝나무 꽃과 천주교도 처형장이라는 점은 같다. 단 다른 점은 초록 바위라는 이름이 붙여진 유래가 다르다. 하나는 그냥 바위가 푸르스름해서 붙인 이름이라고 했고 하나는 풍수적으로 설명했다. 그냥 천변에 있어 이끼 같은 것이 있어 초록바위로 불렀을 것 같다. 풍수적으로 색깔을 설명한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아닌가 한다. 그리고 또 하나 아픔의 자리라는 것은 동학농민군 지도자 처형장이라는 사실이다. 동학과 서학(천주교) 모두 다 당시에는 집권층에서는 반국가, 반윤리로 인식되어 탄압을 받았던 공동 운명이었던 것이다.
피곤하였으나 계단 산책길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다보니 결국 끝까지 오르고 말았다. 꼭대기는 비교적 넓은 공간을 이루었는데 둘레에 설명 그대로 이팝나무가 많고 높은 봉우리라서 전주 시가지 조망 경치가 아주 좋다. 바로 앞에 전동성당, 풍남문 일대가 다 보인다.
맷돌 모양 둥근 돌이 있길래 가 보니 동학농민군과 관련이 있는 조형물이었다. 즉 동학 간부들이 당시 작성한 통신문에는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가담자의 이름을 사발모양으로 둥글게 쓴 것이다. 이를 지금도 사발통문(沙鉢通文)이라고 부른다.
저 순결한 백색의 이팝나무 꽃도 머잖아 흰 눈 되어 휘날려 떨어질 것이다. 하지만 해마다 5월이면 순교자의 영혼처럼 다시 피어날 것이다.
내려와서 다시 서천교를 향했다. 모자이크 순교화는 한 면은 참혹하고 한 면은 영광스럽다.
가장 중요한 것 알면 (초록바위에서)
아무리 나이 어려도
가장 중요한 것 알면
세상쯤은 가소로운 것입니까?
간절히 하늘 바라보던 소년들
바위 끝에서 전주천 물속으로 떠밀린 곳엔
지금도 나무들 무성합니다.
나는 철없이 어른된 부끄럼으로
휘어진 가지 하나 멋적게 잡아봅니다.
나는 무엇으로 소년이 될까요?
내가 하늘 설레는 눈빛으로
먼 추억의 동요 부르면서
거룩한 약속 기억하면서
초록바위 오르는 날, 내 안에도
마침내 소년 하나 눈 뜰까요?
숲이 평화로운 것은
나무들이 저마다 깨어
하늘을 숨 쉬고 있음입니다. (김영수)
서천교 - 야만의 시대 야만의 형벌 |
전주시 완산구 서완산동 1가 351-1에 있는 서천교는 병인박해 때 성 조윤호 요셉(趙(1848-1866)이 처참하게 순교한 곳이다. 조윤호는 1848년 현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동에서 태중 교우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돈독한 신앙생활을 익혔다. 1864년 부친 성 조화서(베드로)를 따라 전주 근처의 교우촌인 성지동으로 이사한 후 교우 이 루치아와 결혼하여 부모와 함께 살았다.
부친 성 조화서(베드로)는 1815년에 경기도 수원에서 태어났다. 1939년에 기해박해로 그의 아버지 조 안드레아가 순교하자, 충청도 신창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교우 한 막달레나와 결혼했고, 둘 사이에 아들 조윤호 요셉을 두었다. 그 무렵 그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복사로 봉사하였다. 1864년 그는 전주의 성지동으로 이사하여 농사일을 했다. 그는 아내가 죽자, 교우 김 수산나와 재혼하였다.
그는 신천주교 신자로서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독실한 천주교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이해해 주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었다.
1866년 12월 5일 성지동을 습격한 포졸들에게 그의 아버지 조화서가 몇몇 교우와 함께 체포되어 심문받고 있을 때, 그는 아버지를 찾아 왔다. 처음에는 조화서가 집안의 대를 잇기 위해 윤호에게 도망치라고 말했지만, 윤호는 거절하고 아버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후부터 부자(父子)는 그들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서로를 격려하였다. 다른 교우들의 이름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는 포졸들에게 자신은 조부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웠을 뿐 그 누구도 알지 못하며 또한 어떠한 천주교 서적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관리들은 그에게 배교를 강요하며 극심히 고문했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그의 아버지와 성 정원지, 성 이명서등의 교우들과 함께 전주 감영으로 압송되었다.
전주 감영에서도 부자(父子)는 여러 차례에 걸친 신문과 형벌을 받았으나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며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그들은 혹독한 고문과 배교의 강요 속에서도 서로 격려하며 오직 진리만을 말하기로 다짐했다. 옥에서 아버지는 아들 윤호에게 "네 마음이 변할까 염려된다. 관장 앞에서 진리대로 말하여라." 하고 격려했고, 이에 아들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아버님께서도 조심하십시오."라며 죽음의 두려움보다는 배교의 유혹에 넘어가지 말 것을 서로 독려했던 것이다.
그 부자는 감옥에서 여러 교우를 만났다. 조화서는 동료 수감자들이 순교를 각오토록 그들을 격려하였다. 그런 행위는 그가 다른 죄수들 보다 더 가혹한 고문을 받도록 만들었다. 조화서는 정문호 바르톨로메오에게도 그가 배교치 않도록 격려하였다.
조화서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천국에서 풍부한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아들에게도 천국에서 함께 만날 것을 다짐하였다. 그는 후손이 끊어지는 것을 염려하는 체하며 배교를 권유하는 관장의 유혹을 물리쳤고, 교우들을 배신할 것과 그가 읽은 서양서적들을 부정할 것을 강요받으며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지만, 모두 거부하며 이겨내었다.
조화서가 전주 숲정이에 있는 사형장에 다다랐을 때, 그는 경건한 자세로 천천히 십자성호를 그으며 망나니에게 하느님을 믿으라고 말했다. 1866년 12월13일 그곳에서 그는 성지동과 대성동에서 체포된 5명의 교우들과 함께 5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았다.
조윤호 역시 오랜 문초와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확고부동하게 그의 부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렬하게 자신의 신덕을 용감히 증거하면서 “내가 살고 죽는 것은 당신들의 권한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 달렸으니 그런 말은 아예 그만 두어라”고 당당하게 대답하였다. 그보다 먼저 사형장으로 끌려 나아가는 그의 부친을 보고 마지막 헤어질 때 "아버님! 아버님은 영복소로 떠나십니다. 거기에 가시더라도 저를 잊지 마십시오."라고 하자 그의 부친은 “물론 나는 영복소로간다. 그러나 너도 마음을 단단히 다져먹고 곧 나를 따르도록 하여라”고 격려했다. 전주 감사는 조윤호를 다시 한번 배교시켜 보려고 갖은 유혹을 다하였다. 하물며 형장에 끌려가는 도중에서까지도 혹심한 구박을 했고 또 사형이 집행되기 직전까지도 배교를 요구하자 그는 “당신은 어떤 사람의 부모가 죄를 범하여 그 아들이 대신 잡혔을 때 재판관이 ‘네 부모가 아니라고 말해라’라고 한들 그 아들이 ‘내 부모가 아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하물며 나는 만선미호(萬善美好)하신 천주님을 알았고 그 것을 따랐습니다. 어떻게 해서 그 교를 거짓이라고 하며 버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말은 절대로 할 수가 없으니 나를 곧 죽여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처형에 있어서도 몇 가지의 원칙이 있었다. 참수를 하는 죄인에게는 하루 전에 쌀밥과 고기반찬을 주며 이승에서의 마지막 잔치상을 차려주기도 하고 참수 후 사흘 간은 누구도 그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는 법도 있었다. 또 다른 당시의 관례는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부자를 처형하지 않도록 되어 있어 아무리 대역죄인도 부자의 관계에 있다면 몇 일간에 여유를 두고 처형을 하였다. 조윤호 요셉도 그런 경우이다.
순교의 월계수 참혹한 죽음
조윤호 역시 당시의 관례에 의해 부친이 참수된 지 열흘이 지난 12월 23일 인근의 서천교 밑에서 순교했다. 따라서 조윤호와 그의 아버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까지 3대가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조윤호 성인이 받았던 처형 방법은 참으로 참혹한 것이었다. 다름 아닌 서천교 밑에서 빌어먹던 거지들에게 조윤호 요셉의 목을 감은 끈을 서로 당겨 조르게 한 것이다. 결국 거지들에게 죽임을 당한 그는 후에 아버지 조화서와 함께 시성되는 영광을 얻었다. 당시 거지들은 순교자들의 시체를 질질 끌고 다니며 거렁뱅이 짓을 하곤 했는데 이들의 시체가 하도 처참해서 거지가 끌고 가면 누구든지 겁에 질려 밥을 주었다고 한다.
그의 시신은 서천교 너머 용머리 고개에 묻혔다가, 그 후 교우들이 시체를 소양면 유상리 막고개에 있는 아버지 묘 옆으로 이장하였다고 한다. 다른 증언록에는 시신을 용머리에 갖다버렸고 시신을 찾지 못했다고 한 점으로 볼 때 유상리 막고개로 조윤호 시신이 이장되지 못하고 아예 처음부터 시신을 찾지 못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현재는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이렇듯 굳건한 믿음으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 부자는 1968년 10월 6일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위에 올랐고, 이어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 200주년 기념을 위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전주교구는 2006년 5월 서천교 인근 순교 터에 조윤호 성인 순교 기념 모자이크 벽화를 설치했다
숙소에 돌아오니 7시 경. 걸어다녀서 많이 피곤했다. 남부시장을 거쳐 숙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남부시장 하면 야시장이 유명한데 특히 먹거리가 풍부하기로 이름이 났다. 그래서 오늘 저녁에는 이곳에 와서 막걸리라도 한잔 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와서 의견을 모아보니 아예 경비도 절감할 비싼 식당을 이용하지 말고 겸 남부시장 야시장에 가서 저녁식사도 때우자고 했다. 바로 인근에 있어서 가기도 쉽다. 온갖 전을 구워 파는 전 거리에 먼저 가서 모듬 전을 시켜서 맛보고 순대집에 가서 순대국밥을 한 그릇을 비우고 나니 배가 불러 더 먹고 싶지가 않았다. 업소마다 사람들이 넘치는데 물론 대개가 젊은 사람들이다. 찌지고, 볶고, 굽고, 찌는 거의 모든 즉석 먹거리가 넘쳐난다. 몇 시간 동안이라도 남녀노소 구별없이 이렇게 낯선 곳에서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 수 있음이 또한 여행의 묘미인 것 같다. 거의 10가 넘어 숙소에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