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원류를 찾아서] 45. 아! 바미얀, 바미얀 大佛이여!
거대한 바미얀 석불 파괴된 잔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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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미얀 계곡과 석굴> |
사진설명: 바미얀 석굴 맞은편 군부대에서 촬영한 바미얀 계곡 전경.왼쪽이 높이 55m 대불(바미얀 서대불)이 있었던 곳이고, 오른쪽은 높이 38m 부처님(바미얀 동대불)이 계셨던 곳이다. |
토르크함에서 잘랄라바드까지는 길이 평탄했다. 아스팔트 포장이 손상되지 않은 채 잘 깔려있었다. 20년간 내전에 시달린 나라의 도로 치고는 괜찮은 편이었다. 도로 주변 사정도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코 ‘살벌’하지 않았다. ‘난민촌’과 ‘양귀비 꽃밭’이 도로변에 번갈아 나타났다. 때때로 총 든 민간인과 군인들이 검문했지만 “코리아에서 왔다”고 하자, 별 탈 없이 보내주었다. 그런데 잘랄라바드 시내를 벗어나자 도로 사정이 급변했다. 포장 안 된 것은 물론이고, 움푹 파인 구덩이가 도로 곳곳에 있었다. 심지어 도로가 없기조차 했다. 한 마디로 엉망이었다. 머리를 차 천장에 수 없이 부딪혔다. 그렇게 달리기를 8시간.낭떠러지 사이로 길이 난 험난한 카불고개를 넘어서니 저 멀리 카불 시내가 보였다. 카불 입구에 있는 검문소를 지나 시내에 도착하니 오후 4시. 그 때가 2002년 4월25일이었다. 토르크함을 출발한 시간이 아침 8시, 장장 8시간을 달린 끝에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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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미군의 폭격으로 파괴된 카불 시내. |
‘아프가니스탄’과 ‘카불’이 어떤 곳인가. 해발 2000m의 고지대인 카불은〈미린다왕문경〉의 주인공 메난드로스왕이 지배한 곳이었다. 특히 기원 전후부터 근대 이전까지, 실크로드를 따라 동서무역이 활발하고 동서 문화가 서로를 탐하던 시절, 아프가니스탄은 동서 문명이 만나는 ‘요충지’이자, 남북무역통로가 마주치는 ‘십자로’였다. 실크로드 대상들 대부분은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중국과 인도, 서방으로 갔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 한국 일본으로 전래된 통로도 아프가니스탄을 거치는 중앙아시아의 실크로드였다. 인도와 중앙아시아 출신의 여러 구법승들은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 도착해 포교와 역경에 일생을 바쳤다. 한국과 중국에서 출발한 구도승들 역시 아프가니스탄을 지나 인도에 들어갔다. 아프가니스탄 곳곳에 아직도 수많은 불교유적이 남아 있는 것도 이 때문이며, 바미얀 대불도 그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슬람원리주의자들에 의해 2001년 3월말 파괴된 것이다. 인터콘티넨탈 호텔에 몸을 풀고 곧바로 카불박물관으로 갔다. 탈레반 육군본부 옆에 위치한 이유로 미군폭탄이 떨어져, 박물관은 엉망이었다. 건물은 파괴되고, 유물은 제대로 수습되지 않은 상태였다. 허물어진 박물관을 석양 속에서 바라보니 ‘전쟁과 평화’ 등 무수한 생각들이 떠올랐다. 수백 년간 이어온 유물들이 한 방의 폭탄에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됐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철저히 파괴
카불 시내를 둘러본 뒤 호텔에 돌아왔다. 호텔도 폭격을 받아 부서지긴 마찬가지였다.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창문 너머로 커다란 보름달이, 카불 시내를 비추는 보름달이 휘영청 떠있었다. 그렇게 카불에서의 첫 밤이 지나갔다. 다음날(2002년 4월26일) 새벽 5시 호텔을 나섰다. “꿈에서도 그리던” 바미얀 계곡으로 출발했다. 카불에서 바미얀까지 평화 시엔 비행기가 운행됐으나, 내전이 격화된 이후 사라졌다고 안내인이 설명했다. 게다가 아프가니스탄은 산과 산맥이 너무 많아 철도 부설마저 불가능한 나라. 바미얀까지 갈려면 어쩔 수 없이 자동차를 이용해야만 했다. 카불시내와 인근의 도로 사정은 괜찮았다. 힌두쿠시 산맥 초입에도 도로는 그런대로 양호했다. 포장이 안됐다는 점 이외 흠잡을 곳 없는 도로였다. 그러나 힌두쿠시 산맥이 본격화 된 지점부터 도로상태가 서서히 악화되기 시작하더니, 산맥 속에서는 길인지 산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가 됐다.
그래도 차는 힘껏 달렸다. 파괴된 바미얀 대불이라도 친견하고 싶다는 일념이 너무 강했다. 힌두쿠시 산맥을 가로질러 달리기 무려 8시간. 바로 앞에 붉은 색을 띠는 거대한 산이 나타났다. ‘식스브리지마운틴’이라고 안내인이 설명했는데 나무와 풀은 보이지 않고, 붉은 흙과 바위들만 가득했다. 마치 화염이 타오르는 듯 했다. “저 산만 돌아가면 바미얀 계곡이 펼쳐진다”고 안내인이 덧붙였다. 점심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달려, 의욕을 잃은 상태였는데 “거의 다 왔다”고 하니 갑자기 힘이 생겼다. 가슴도 두근거렸다.
식시브리지마운틴을 돌아가니 탱크 한 대가 길 가운데 서있었다. 부서진 기관총도 길옆에 버려져 있었다. 탱크 옆을 조심스레 지나, 백양나무 우거진 길을 달리니 저 멀리 사진에서만 보았던, 거대한 절벽에 무수하게 조성된 ‘바미얀 석굴’(15,000여 개로 추산)들이 보였다. 순간 가슴이 울렁거렸다. 석굴 속에 있어야 될 거대한 부처님은 보이지 않았다. 파괴된 것이 틀림없었다. 차안에서 석굴 쪽으로 몸을 돌려 합장 배례했다. 감았던 눈을 뜨고 다시 쳐다보니 거대한 석굴이 이미 눈앞에 서 있었다. 차에서 내려 높이 55m 부처님(바미얀 서대불)이 계셨던 석굴 쪽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석굴 앞 땅바닥에 엎드려 삼배를 올렸다. 부처님은 아니 계시지만, 마음속엔 여전히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인사드리고, 석굴 앞으로 다가갔다. 파괴된 잔해가 석굴 안에 가득했다. 부처님이 서 계셨을 석굴 안에 들어가 돌아다녔다. 이 곳 저 곳 돌아다녔다. 부서진 흙덩이를 보호하기 위해 덮어놓은 포장을 걷고 흙을 살폈다. 산산이 부서진 흙덩이 속에서 ‘불상의 흔적’을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55m 대불에서 동쪽 방향으로 4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38m 대불(바미얀 동대불)이 서있었던 석굴로 갔다. 그곳에도 역시 부처님은 아니 계셨다. 허전한 마음 달랠 길 없어 석굴 옆에 난 통로를 따라 올라갔다. 석굴에 살고 있는 아이들이 나를 따라 왔다. 그들과 함께 올라가니 작은 석굴들이 무수하게 있고, 그 속에 불화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대개는 훼손된 상태였는데, 무엇을 그린 그림인지는 알 수 있었다. 씁쓸했다. 작은 석굴에 앉아 바미얀 평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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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바미얀 계곡으로 향하는 힌두쿠시 산맥 속의 길. |
현재 인구 15만을 자랑하는 바미얀은 해발 3000m에 있는, 힌두쿠시 산맥 속에 위치한 거대한 ‘분지’이자 ‘오아시스’다. 분지를 둘러싼 힌두쿠시 산맥들이 위용을 보이는 가운데, 분지 가운데엔 산맥의 만년설이 녹아 만들어진 강이 흐르고, 군 데 군 데 백양나무 숲이 우거진 참으로 멋진 곳이었다. 경치도 좋고, 물과 공기도 좋아 자연스레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리라. 무역의 중개지로 발전하여 바미얀국이 형성됐는데, 3세기부터 8세기 사이 이곳에서 특히 불교가 융성했다.
이곳을 방문했던 당나라 현장스님이 남긴〈대당서역기〉에는 이렇게 나온다. “동서 2000여 리, 남북 200여 리로 설산 중에 위치한 바미얀국에는 수십 개의 큰 사원과 수천의 스님들이 있다. 동북방에 서 있는 석불이 있는데 높이가 140여 척이고,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또 그 동쪽에는 큰 가람이 있는데 가람 동편에도 서 있는 석불이 있고, 높이는 100여 척이나 된다. 성의 동쪽으로 2∼3리 떨어진 곳에 있는 가람에는 부처님의 입열반와상이 있는데, 길이는 1000여 척에 달한다.” 혜초스님(719∼723년 인도 순례)도 〈왕오천축국전〉에서 “삼보를 크게 공경하여 절과 스님도 많으며,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함께 행해지고 있다”고 적었다.
이슬람 침공으로 바미얀국 멸망
그러나 혜초스님이 순례한 뒤 이슬람 침공으로 바미얀국은 멸망하고 만다. 이 지역을 장악한 이슬람은 사찰과 불상을 철저히 파괴하고, 스님들을 쫓아버렸다. 거대한 불상의 얼굴에 있던 눈과 코도 깎아 버렸다. 이슬람 세력은 대신 이곳을 새로운 교역시장으로 발전시켰고, 이름도 샤레·이·그루구로 바뀌어 버렸다. 페르시아어로 샤레는 ‘도시’, 그루구는 ‘떠돈다’는 의미. 그만큼 이곳은 상업지역으로 번영을 누렸다. 그러다 1221년 징키스칸의 몽고군에 점령되면서 바미얀 지역은 완전히 폐허로 변했다. 바미얀 전투 중 손자 도모간을 잃은 징기스칸이 “바미얀지역을 적막한 계곡으로 만들 것”을 지시했던 것. 징기스칸 침공에 활력을 잃고, 바다를 통한 해양 실크로드가 활성화되자, 바미얀 지역은 이후 다시는 활력을 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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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카불 근처에서 양을 몰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어린이들. |
바미얀 계곡에 도착한 다음날(2002년 4월27일) 바미얀 석굴 맞은 편 언덕에 서서 일출에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바미얀 평원을 내려다보았다. 밭과 백양나무, 그 사이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을 내려다보며 있는 무수한 석굴들이 차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바미얀 사람들은 참으로 온순했다. 밖에서 듣던 아프가니스탄에 관한 인상이 모두 허구임을 바미얀 사람들은 몸으로 보여주었다. 그들은 전혀 호전적이지 않았고, 이방인에게 무례하게 굴지도 않았다. 오히려 친구마냥 다정하고 편안하게, 심지어 식구처럼 대해주었다. 다만 석굴만 덩그러니 서 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석굴 속에 부처님이 계시고, 지금도 옛날처럼 불교가 숭상되고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부질없는 상념이 아침의 찬바람과 함께 온 몸을 감아왔다. 사람과 자연은 그대로인데, 이곳에서 흥했던 불교와 석굴의 대불(大佛)은 왜 사라졌단 말인가. 쌀쌀한 아침 공기 속에 1박2일 간의 짧고도 긴 바미얀 일정을 정리하고, 발걸음을 카불로 돌려야만 했다.
아프가니스탄 = 조병활 기자. 사진 김형주 기자
[출처 : 불교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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