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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광수 교수의 '다산의 생애와 작품 해설'
제가 가지고 있는 도서출판 하서의 배제대 류광수교수가 역해하신 <목민심서> 뒷부분에 있는 해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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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약용의 생애
조선시대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은 1762년(영조 38년) 6월 경기도 광주 초부면 마현에서 출생하였다.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송보, 호號는 다산, 사암, 여유당, 자하도인, 탁옹, 태수, 문암일인, 철마산초 등이다. 아버지 정재원은 여러 고을의 수령을 역임하고 벼슬이 진주목사에 이르렀다. 간 곳마다 치적을 남긴 명관이었으며 학자였다. 어머니는 해남 윤씨로서 시조작가로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며 그림으로 이름이 드러난 공재 윤두서의 손녀다. 이와 같이 부계와 모계의 훌륭한 혈통을 받고 태어난 다산은 나면서부터 총명하고 뛰어난 소질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7세 때에 이미 시를 짓기 시작하였으며, 10세 때에는 그의 시문을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시집을 내기에 이르렀다. 삼미자는 그의 어릴 때의 호號다. 천재 소년 정약용은 자라면서 아버지의 훈도 속에 학문은 놀라운 진경을 보여 14-15세 때에느느 이미 사서육경과 제자백가에 능통하였다. 1776년(영조 52년), 그의 나이 14세 되던 해에 호조좌랑인 아버지를 따라 상경하여 남인의 명사들과 교유交游하였으며, 다음해에 이가환 및 매부 이승훈을 통하여 성호 이익의 유고를 얻어 읽고 그의 학문에 깊이 공감하여 드디어 그를 사숙하게 되었다. 여기까지를 다산 정약용의 소년기라고 한다면, 이 기간은 훗날의 대성을 위한 면학의 시기며, 준비의 시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783년(정조 7년)에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며, 1789년(정조 13년)에는 식년문과에 갑과로 합격하였다. 장원 급제한 청년 정약용은, 그때 글을 좋아하고 인재를 소중히 여기던 영명한 임금 정조의 총애와 신임을 한몸에 받게 되었다. 그는 가주서에 임명되고 이듬해에는 검열이 되었으며, 규장각에 출입하면서 내장 서적을 마음껏 종람할 수 있어서 그의 학문의 세계를 더욱 넓힐 수 있었다. 정조 19년(1795년)에는 서학에 관련이 있다는 혐의를 입고 금정도찰방으로 좌천되었으나, 그해 12월에 다시 중앙으로 들어와 병조참지, 우부승지, 좌부승지를 역임하였으며, 정조 12년에는 잠시 곡산부사로 나갔으나 23년에 다시 들어와 형조참의에 승진하였다. 그러나 이때 당쟁은 격화일로에 있고 세태는 험악하므로 그는 결연히 벼슬을 떠나 고향에 내려가 있었는데, 정조는 곧 불러오라고 소명을 내리곤 하였다. 그가 과거에 장원 급제한 때로부터 약 10년 동안은 약간의 기복은 있었으나 그에게서는 실로 성주와 현신이 제회한 행복한 시기라고 말할 수 있다. 그를 지극히 총애하고 아끼던 정조 임금은 정조 24년(1800년) 6월에 드디어 승하하였다. 순조 원년, 즉 1801년에는 신유사옥이라는 천주교도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났다. 이때 그의 삼형제 약전, 약종, 약용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 옥사의 결과로 그의 중형 약종은 참형에 처해지게 되고, 그와 백형인 손암 약전은 각각 장기와 신지도로 유배되었다. 그런데 이 해 10월에 황사영의 백서사건이 일어나 그와 손암은 또다시 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의 형제는 무구에 걸린 것이 드러나서 감형된 결과 그는 강진으로, 손암은 흑산도로 정배되었다. 정약용은 여기에서 1801년부터 1818년(순조 18년)까지 19년이란 긴 세월을 귀양살이로 보내게 되었다. 처음 7년 동안은 강진읍내에 머물다가 순조 8년에 강진 귤동에 있는 윤박의 정자인 다산초당으로 옮겨 가서 저서와 제생의 교육으로 즐거움을 삼았다. 그의 호 다산을 그때 지은 것이다. 그의 호한한 저서는 대부분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이 기간은 인간 정약용의 불행한 시기이기도 하였으나 그로 하여금 학문에 불후의 업적을 남기게 한 소중한 기간이었다. 한편, 나라의 사정은 모든 것을 폐허로 만든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참담한 전쟁을 겪은 뒤로 아직 그 상처가 아물지 않았으며, 흉년은 자주 들어서 민생은 피폐하고 이산하여 기아와 절망에 울고 있는 상태였다. 그 위에 관리는 부패하고 횡포하였으며, 아전들은 간악하여 잔약한 백성들에게서 침탈을 일삼았다. 애국, 애민의 마음이 철저한 다산 정약용은 이러한 사회상을 바라볼 때 분격한 마음과 연민의 정을 금치 못하였을 것이다. 이것이 그의 학문과 사고와 저서에 자극이 되고 반영이 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정약용은 한국의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의 태두적 존재다. 근세 한국의 학문은 유학의 기초 위에 두 줄기의 학통이 있으나. 하나는 성리학이고 하나는 실학이다. 성리학은 퇴계, 율곡에 이르러 대성하고, 실학은 다산의 손에서 대성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실학이란 영정시대에 일어난 경세택민, 실사구시의 학풍을 가리킨 말이다. <경세택민>이란 세상을 잘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한다는 뜻이고, <실사구시>란 문헌적인 고증의 정확을 존중하는 과학적. 객관적 학문의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과연 정약용은 정치 경제학자일 뿐 아니라 문학의 대가다. 그의 방대한 저서로 보아 실학을 집대성한 가장 위대한 학자로 평가된다. 어릴 때부터 시재에 뛰어나 사실적이며 애국적인 많은 작품을 남겼으며, 그의 애국주의적 사상은 한국의 역사. 지리 등에도 특별한 관심을 보여 주체적 사관을 제시했고, 그의 합리주의적 과학정신은 서학을 통해 서양의 과학지식을 도입하기에 이른 것이다.
2. <목민심서>에 대하여
<목민심서>는 1821년(순조 21년) 다산의 유배지인 전라도 강진의 다산초당에서 완성된 저서다. 지방의 고을을 맡아 다스리는 수령들이 반드시 지켜야 할 일들을 조목을 들어 자세하고도 예리하게 지시하고 있다. 그가 이 저서를 내기까지에는 많은 경험과 실지의 견문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기에 내용이 공허한 설교에 그치거나 추측이나 억지로 갖다 붙인 헛된 논리에 흐르지 않았다. 어느 조목이나 절실하다. 그는 일찍이 수령을 지내는 아버지를 따라다니면서 실정을 보았으며, 또 정조의 어명으로 경기도 암행어사가 되어 농민들의 고통을 직접 살펴본 일도 있다. 또 강진의 유배생활 중에서 지방관리의 횡포와 무능과 아전의 농간과 농민의 억울하고 가엾은 사정을 많이 보고 들을 수 있었다. 이런 것이 이 책을 쓰게 하였을 것이다. 먼저 <목민심서>의 저작 동기와 내용의 윤곽은 자서에 잘 나타나 있다. 군자가 학문하는 목적은 자신의 수양을 위함이 반이고, 백성 다스리는 일을 배우는 것이 반이다. 백성을 다스린다는 것은 백성을 편안하게 살도록 보살피는 일이다. 그런데 당시의 수령들은 사리사욕에만 급급하여 백성을 보살필 줄 몰랐다. 백성들은 피폐하고 곤궁하고 병들어 줄을 지어 구렁텅이에 쓰러져 죽었다. 그렇건만 수령된 자는 호의호식으로 저 혼자만이 살찌고 있으니 슬픈 일이었다. 그래서 이 <목민심서>를 지었는데, 모든 것을 경험과 직접 견문한 것을 토대로 하였으며, 옛날의 문헌을 참고하여 실례를 들었다. 그럼 그 내용이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살펴보기로 하자.
부임육조 부임이란 말은 임지에 간다는 뜻이다. 수령이 임명을 받고 임지에 가서 처음으로 사무를 처리하게 되기까지 명심해야 할 일들을 여섯 가지 조항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목민관이란 성스러운 임무를 바로 눈앞에 그리면서 수령으로서 정신 자세와 처음을 바르게 출발하기 위한 준비태세를 갖추게 한 것이다. 아직 미지의 세계인 수령의 길에 오르는 몸이니, 차분히 마음의 준비를 갖기 않으면 책임은 중하고 사무는 복잡하고 간사하고 닳아빠진 아전들 속에 뛰어들어 당황하게 될 것이다. 또 처음의 출발을 바르게 하지 못하면, 그리하여 첫발을 잘못 디디어 약점을 잡히면 끝까지 부정의 노예가 되고 말 것이다. 부임전의 준비태세가 얼마나 소중한 것이겠는가.
율기육조 율기라는 말은 몸을 단속한다는 뜻이다. 자기 자신을 바르게 관리하는 것이다. 자기의 몸을 바르게 관리하지 않고 남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율기는 아전에게 위령을 세우고 백성에게 신망을 얻는 제1의 요건인 것이다. 저자는 율기의 조목으로서 칙궁과 청심과 제가 등을 들고 있다. 칙궁은 몸의 위의, 즉 몸의 자세와 의관의 매무시를 엄숙하고 정제하게 한다는 뜻이다. 매일 아침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서 의관을 정제하고 몸을 바른 자세로 마음을 고요하고 공경스럽게 하여 단정하게 앉아서 정신과 기운을 침착하고 밝게 하여 오늘의 할 일을 생각하고 처리할 순서와 처리 방안을 마음 속에 정돈하라고 하였다.
봉공육조 봉공이라는 말은 공무를 받들어 시행한다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수령이 가장 초보적인 그러나 기초적인 복무 기율을 말하고 있다. 첨하는 임금의 조칙을 받는 예절, 수법은 국법을 지키는 것, 예제는 예제는 예의 바르게 교제하는 것, 보문은 보고문서의 처리, 공납은 세금과 공물을 받아 바치는 일, 왕역은 수령 고유의 직무 이외에 특별한 임무의 명령을 받았을 때의 복무를 설명한 것이다.
애민육조 수령이 백성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새삼스레 논의할 여지가 없다. 적어도 자기 치하에 있는 백성이라면 누구든 모두 보살피고 길러서 편안하게 살게 하는 것이 목민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한 애민은 많은 백성들 중에서도 특별히 돌봐 주어야 할 대상에 대한 특별한 조처를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양로, 자유, 진궁, 관질 등을 지적하고 있다. 양로는 늙은이를 존경하고 받들어 기른다는 뜻이고, 자유는 어린이를 사랑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고아를 보살펴 양육하는 것을 힘쓰라는 것이다. 수령된 자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진궁이란 말은 곤궁하여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자를 붙들어 주어서 떨치고 일어나게 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궁'이라는 한 것은 소위 사궁을 말한 것이고, 고나질은 폐질, 독질에 걸려 제 힘으로 먹고 살아갈 능력이 없는 자들에게 살아갈 수 있도록 너그럽게 돌봐 주라는 것이다.
이전육조 우리 나라의 모든 제도는 국법에 여섯 가지로 나누어 규정하였다. 그것이 이른바 육전이니 이전, 호전, 예전, 병전, 형전, 공전이 그것이다. 이조에서는 이전에 규정한 사항을 분담하여 문관의 인선, 훈봉, 고과 등 주로 인사에 관한 사무를 처리하였다. 지방의 고을에서도 이에 따라 육방을 두었으니 이방, 호방, 예방, 병방, 형방, 공방이 그것이다. 이 육방에서는 육전에 규정된 사항으로서 군현에서의 해당 사무를 분담한다.
호전육조 여기에서는 호전에 규정된 사항 중에서 군현에 관계되는 중요사항들을 논술하고 있다. 전정, 세법, 곡부, 호적, 평부, 권농의 육조로 구분되어 있다. 백성을 생업에 안착하게 하여 부유하게 하고 편안하게 하고 은성하게 하는 일도 여기에 있고, 백성을 도탄과 기아와 이산의 고통 속으로 몰아 넣는 일도 여기에 있다. 수령들의 온갖 부정과 횡포와 침탈의 죄과도 여기에서 생기고, 아전들의 모든 협잡과 농간도 거의 여기에 있다. 수령된 자가 이 호전육조에서 말하는 일들을 제대로 바르게 처리한다면 만사가 잘 될 것이다.
예전육조 예전육조는 국법의 육전 중에서 예전에 규정된 사항으로서 군현에 관계되는 중요 사항들을 논술하고 있다. 그것은 제사, 빈객, 교민, 흥학, 변등, 과예의 여섯 조목이다. 제사라는 것은 군현에서 제사할 수 있는 삼단일묘의 제사를 엄숙히 거행하라는 것이다. 빈객은 군현의 오는 빈객의 대우를 예의 바르게 하라는 것이고, 교민은 백성의 교화를 힘쓰라는 것이며, 흥학은 학교 교육을 진흥시키고 학문과 아울러 예와 악을 가르치라고 하였다. 변등은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른 구분을 분명히 하여 기강을 세우라고 한 것이며, 과예는 과거 보는 재예를 권장하는 것이다.
병전육조 병전은 군정과 군사에 관한 일체의 사항을 규정한 법전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첨정, 연졸, 수병, 권무, 응변, 어구 등에 대하여 논하고 있다. 그 중 첨정에 대하여서만 이야기하기로 하겠다. 첨정이란 것은 병역 의무자를 조사하여 병적에 기록하는 것이다. 병적에 기재하고 나면 군포라는 것을 징수한다. 군포란 병역 의무가 있는 자에게 현역에 복무하지 않는 대신 베를 바치게 하는 것이다.
형전육조 형전육조에서는 청송에 성의를 다할 것이며, 공정하고 정확한 판결을 내려야 하고, 형벌을 신중히 조심할 것이며, 죄수를 가엾게 여겨 돌봐 주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특히 형벌의 시행에 대하여는 따로 <흠흠신서>를 저술하였다.
공전육조 공전육조에서는 산림, 천택, 영선, 수성, 도로, 기물의 제조 등의 행정에 대하여 논술하였다.
진황육조 진황육조는 흉년의 빈민의 진휼을 논한 것이다.
해관육조 해관육조는 수령이 체대되어 돌아갈 때의 태도와 그 뒤에 남긴 치적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수령은 이 최후의 순간을 더욱 깨끗하게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것을 종용하고 있다.
그럼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왜 <목민심서>를 읽어야 하는가. 이 책은 그 내용의 가르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인격수양과 교양에 교훈을 주는 점과 오늘에도 그대로 받아들여 배워야 할 점이 많다. 그런 의미에서도 이 <목민심서>를 읽기를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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