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성
Fremdheit / otherness
타자의 다름 즉 타자가 나와는 진정 다른 존재라는 것, 그런 의미에서 타자가 타자임을 타자성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현대철학에서 타자성을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사고하여 문제의 소재를 밝힌 철학자 중 한 명이 리투아니아엥서 태어나 프랑스에 귀화한 유대인 레비나스이다. 레비나스의 사고를 따라가며 이 문제를 생각해보자.
이해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
하이데거가 주도면밀하게 분석했듯이 존재자와의 관계는 그 존재자를 '이해'하는 것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이 이해 속에서 존재자는 그 존재자로서 존재지어진다. 가령 망치와 관계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먼저 망치를 손에 쥐고 그것이 손에 맞는지 확인하고 그것으로 못을 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망치는 '손에 있는 것'으로 장소를 할당받고 도구적인 존재자로서 존재지어지게 된다.
타자 또한 확실히 '이해'된다. 타자는 가령 남자나 여자로, 적이나 아군으로, 경관이나 학생으로 이해된다. 타자들은 그런 한에서만 나와의 관계에서 적당한 가까움과 거리를 두고 이해될 것이다. 하지만 '타자와의 관계'는 그러한 이해 밖으로 흘러넘친다. 이해한다는 것이 - 망치가 손에 맞는 도구로, 특정한 타자가 내 편으로 이해되는 경우처럼 - 어느 정도 내가 '포괄'하는 것이라면, 타자는 결코 내가 포괄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자를 이해할 때 나는 이미 타자가 타자임을, 타자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을 벗어나는 존재자임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모든 존재자와의 관계가 이해로 귀결되는 존재론적 사고는 이 때문에 타자와의 관계, 결코 내가 포괄할 수 없는 이 '윤리적 관계'를 앎의 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시도와 다름없다. 그러므로 하이데거적인 존재론은 레비나스에게는 일개 '부정의 철학'에 지나지 않게 된다. 타자 역시 나의 앎을 통해 소유하고자 하는 철학인 것이다. 레비나스가 존재론의 우위에 이의를 제기하고 오히려 윤리학이야말로 제일차적인 철학임을 주장하는 것은 그러한 연유에서이다.
무한으로서의 타자
타자는 이해되지 않는다. 혹은 이해를 통해 완전히 음미될 수 없다. 이해가 앎을 통한 소유를 의미한다면, 타자는 소유되지 않는 자이다. 나는 나와는 완전히 다른 것 혹은 절대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것을 소유할 수 없다. 타자란 우선 나와 절대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것, 나와의 절대적인 차이, 즉 나와는 단적으로 다른 것을 의미한다.
타자가 나와의 차이인 한 "타자는 타자에 관해 내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관념에서 언제나 흘러넘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타자를 '욕망'한다고 레비나스는 말한다. 타자는 결코 '욕구'되지 않는다. 하지만 타자는 무한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왜인가.
욕구되는 것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가령 과실은 그것을 나뭇가지에서 따는 손에 의해 점유되고 소비된다. 즉 먹히고 음미된다. 이에 반해 욕망하는 것은 결코 소유할 수 없다. 그렇기에 소유에 의해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하는 것 자체가 오히려 욕망을 점점 더 자극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불러일으킨다. 욕망하는 것이 나에게서 한없이 벗어나는 것, '타자, 즉 무한한 것'이기 때문이다. 타자는 내 손 안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는다. 타자란 즉 나에게 '무한'한 것이다. 그리고 레비나스에 따르면, '내 안에 있는 타자의 관념을 넘어서 타자가 현전하는 방식', '욕망에 의해 측정되는 측정 불가능한 것'이 '얼굴'이다. 하지만 왜 얼굴일까. "얼굴은 말한다. 얼굴의 드러남은 이미 담론이다." 게다가 레비나스에 따르면 얼굴은 결코 보이는 법이 없다. 얼굴은 시가의 대상이 아니다. 왜인가.
먼저 목소리와 비교하여 생각해보자. 목소리는 우선 음인 것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목소리는 음향으로서 들리고 공기의 밀도로서 청각을 자극한다. 하지만 목소리가 목소리인 것은 그것이 음이라는 형태를 가진다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그것이 언어적으로 유의미한 음성이라는 사실로도 충분치 않다. 목소리는 언어음이기 이전에 나를 촉발하는 비명이자 알아듣기 힘든 한숨일 수도 있다. 그때 목소리는 '맥락 없이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얼굴이 얼굴인 것은 시각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정적이 무언가를 의미할 때 정적 자체가 무음에 대해 잉여를 가지고 있고, 희미한 한숨이 날숨과의 차이를 분명히 보여주듯이, 무언의 얼굴은 시각으로부터 잉여를 가지고 있다. 얼굴 또한 그 벌거벗은 형태도 "맥락없이 의미하고 있다" 그때 오히려 '귀'야말로 얼굴의 말을 읽어내게 된다. 즉 맨얼굴이 이야기하는 "살인하지 말라"라는 말을 듣고 있는 것이다.
흔적으로서의 타자
하지만 타자가 ‘얼굴’로 현전한다는 표현은 몇 가지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우선 타자가 나에게 절대적인 타자라면 그러한 타자가 어떻게 '나'와 관계를 맺게 되는가라는 문제가 생긴다. 또 하나는 타자가 '현전'한다면 타자 또한 결국은 나의 '현재'에 속하게 되고, 따라서 또 나에 의해 어떠한 형태로든 소유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다. 이 두 가지 논점은 데리다가 자신의 첫 레비나스론에서 제기한 물음과도 이어진다고 할 수 있다.
<존재와는 달리 혹은 존재의 저편에서>에서 레비나스는 이러한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이 몇 가지 키워드를 변용하고 있다. 첫째, 타자는 이제 현전하지 않는다. 타자는 매번 이미 지나가버려서, 우리의 현재와는 단절된 형태의 '흔적'으로서 문제시된다. 둘째, 그러나 그러한 타자가 나에게는 '기억불가능한 과거'로 부단히 나와 관계를 맺게 된다. 나라는 자기동일성이 뜯어지는 곳에서 '같음에서의 다름'으로 엮이게 되는 것이다. 나와의 절대적 차이이면서 동시에 나와는 단적으로 격리되어 있는 타자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 때문에 끊임없이 '나'와 관계하고 있다. 레비나스의 사고는 그러한 역설, 그러나 실제로 성립되고 만 역설을 그려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시도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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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행외견 꿈책형 36번
우리는 자유주의 사상의 자기중심성과“닫혀 있음”을 극복하기 위하여“환대”라는 개념을 활용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환대는 칸트가 주장한 환대가 아니라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주장한 환대를 가리킨다. 칸트의 환대 개념은 원래“이방인을 자기 땅에 맞아들이는 자의 의무인 동시에 누구든 낯선 땅에서 적대적으로 대우받지 않을 권리”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근본적으로“내가 손님이 될 때를 염두에 둔 대칭적 상호성 원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환대는“충돌과 갈등을 자기 관전에서 조정하고자 하는 하나의 허울”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그것은“타자와 공동체 내부의 차별성”을 전제하면서 단지“배척되지 않을 소극적 권리”만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칸트의 환대 개념은 자유주의 사상의 자기중심성과“닫혀 있음”을 벗어날 수 없다.
자유주의의 그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칸트의 환대 개념으로부터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환대 개념으로 나아가야 한다. 데리다와 레비나스가 제시하는 환대 개념은 상호적 권리로서의 환대가 아니라“무조건적이고 유보 없는 확대”를 의미한다. 그것은“어떠한 상호적 방식의 제약도 부과하지 않는 비대칭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라서 그 개념은 나와 공통된 것만을 받아들이고 타자를 자기화하려는 동일화의 지배 논리는 넘어서며, 이 점에서 자유주의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결국 우리는 권리 체계 이전에 타자가 있음을 보여주는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철학에 기반을 둘 때, 권리를 출발점으로 삼는 자유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렇게 자기 자리를 내어주는 타자에 대한 비대칭적 수용으로서의 환대야말로 자본주의적 교환 관계와 자유주의적 이념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최소한 비판할 수 있는 새로운 유토피아의 원리의 토대를 제공할 수 있다.
“나는 약자인 타자에게 나의 자리를 내주며 타자를 대접한다. 그럼으로써 나는 타자를 돕는 것이지만, 그 타자는 내가 그러한 행위를 통해 나의 경계를 넘어설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나를 나의 경계 밖으로 이끌어 준다. 나보다 더 부족한 존재인 타자가 오히려 나를 돕는 것이다.”이러한 환대 개념은 봉사자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일방적으로 돕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통해 봉사자 스스로가 행복을 얻고 변화할 수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사회봉사의 이념이 될 수 있다. 헤겔의 “주인과 종의 변증법”이라는 개념을 빌어 말하면, 우리는 그것을“주인과 이방인의 변증법”, 또는“봉사자와 도움 수요자의 변증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ㄱ. 데리다와 레비나스의 환대 개념 역시 자기중심성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칸트의 개념과 큰 차이가 없음을 밝힌다.
ㄴ. 상호적 방식의 제약이 완전히 제거된 비대칭성에 근거한 환대는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개념임을 밝힌다.
ㄷ. 헤겔이 주장한 “주인과 종의 변증법” 개념은 레비나스와 데리다의 환대 개념과 직접적 관계가 없음을 밝힌다.
ㄹ. 진정한 사회봉사 이념에 반드시 비대칭성이 요구되는 것은 아님을 밝힌다.
ㅁ. 대칭적 상호성 원리에 기반을 둔 환대 개념은 자유주의의 적극적 자유를 보장할 수 없음을 밝힌다.
① ㄱ, ㄴ ② ㄴ, ㄹ
③ ㄷ, ㅁ ④ ㄱ, ㄴ, ㄹ
⑤ ㄷ, ㄹ,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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