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비신자 교리(14-17주) 은총의 샘인 성사.
1. 들어가기.
우리가 거리를 안전하게 건너갈 수 있는 것은 거리마다 횡단보도가 있고 또 신호등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신호등은 우리 인간의 "안전을 위한 상징"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과 같이 우리들 삶 안에는 이와 같은 유사한 상징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삶은 거리의 신호등은 교통경찰이 없어도 약속된 신호에 의해서 서게도 하고 길을 건너가게도 하는 것과 같이 누군가가 고개를 끄덕이면 동의(同意)의 표시로 알아듣고 행동하며 옆으로 가로 저으면 부정(不定)의 표시로 알아들어 행동을 하지 않는가 하면 손동작으로도 상대의 의사를 알아듣고 행동하는 것 같이 보이지 않는 언어를 대신해서 보이는 언어로 의사를 소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상징입니다.
상징은 한 마디로 보이지 않는 것을 대신해서 보이는 언어로 드러내는 열려있는 언어로서 인간의 삶 안에서 글과 말로써 표현하지 못하는 부분을 행위로서 의사 소통을 시켜주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또 이렇게 드러내는 상징은 하느님과 이루는 관계 속에서도 마찬가지로 작용하고 있습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146항)
2. 성사란?
성사란 조금 전 상징에 대한 이야기와 같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가식적인 행위로 인하여 보이는 하느님으로 드러내는 것을 성사라고 합니다. 좀더 쉽게 이야기하자면 하느님께서 인간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지 않고서는 잘 믿지 않으려는 심성을 깨닫게 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질 수 있도록 제정하신 하느님의 사랑이자 은총입니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거룩한(聖) 은총을 보이는 것(事)을 통해 베푸시는 것이 성사(聖事)이고 성사의 말뜻과 같이 "거룩한 일" 또는 "거룩한 거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의 구약의 시대에는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역사 속의 사건을 통해서 당신 자신을 알려주셨지만, 인간을 극진히 사랑하셨던 하느님께서는 보다 많은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인간의 역사(歷史)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셨습니다.(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수 그리스도는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수난과 부활을 통해 당신의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 주는 성사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던 하느님을 "보게" 해주셨고, 하느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하느님의 사랑으로 손으로 "만지게" 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죄 많은 인간이 죄의 구덩이에서 벗어나 구원을 성사를 통해서 받게 해 주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자신은 하느님의 성사인 것입니다.(히브 1,1-2: 요한 14,9: 계시헌장 4항 참조)
3. 성사의 기초가 되는 세 가지의 원리.
가톨릭교회는 성사의 중요성을 성사성의 원리와 매개의 원리 그리고 성찬의 원리에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3-1. 성서성의 원리.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 아우구스티노의 설명을 따라서 "성사는 보이지 않는 은총(신적인 현존)의 보이는 표징"이라고 설명해왔습니다. 즉 보이는 그 무엇 안에 보이지 않는 신적 은총이 깃들여 있다는 사실, 이 사실을 우리는 "성사성(聖事性)의 원리"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이 원리에 입각해서 인간(人間) 안에서 신적(神的) 존재를 보며, 유한(有限) 안에서 무한(無限)을, 물질(物質) 안에서 영(靈)을, 내재(內在) 안에서 초월(超越)을, 역사(歷史)안에서 영원(永遠)을 봅니다.
이 세상 만물은 성사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즉 만물 속에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현존이 스며들어 있다는 이야기이고, 그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느끼고 볼 수 있게 됩니다.
3-2 매개의 원리.
매개의 원리는 첫째 원리와 맞물려 있습니다.
가톨릭 교회의 성사관(聖事觀)과 개신교와 차이를 보이는 대목은 개신교회에서는 성사는 단지 상징적인 의미만 지닌다고 강조하는 바로 매개의 원리에 대한 입장입니다. 일 예로 개신 교회에서는 성체성사의 빵과 포도주는 주님의 몸과 피를 상징할 뿐이지 실제적으로 몸과 피가 되지는 못한다고 주장하지만 가톨릭 교회는 성사는 그저 표징에 지나지 않고 그 표징에 나타내는 실재, 즉 구원의 은총을 실제로 베풀어준다고 믿는 차이입니다.
이를 우리는 매개(媒介)의 원리라고 부르는데 개신교에서는 이 매개를 마술의 위험이 있다고 지적합니다. 즉 판에 박은 성사 행위를 통해 하느님이 쨘~하고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모님과 함께 기도 드리는 묵주의 9일 기도 역시 횟수만 채우면 된다는 식의 기복적인 믿음의 소지가 있다며 허례허식의 행위로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개신교가 이러한 지적을 하고있는 것은 성사의 제정자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과소 평가하는 데서 연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왜냐하면 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이며 명령이고, 시대를 초월해서 나약한 인간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예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제도적 보장책이 바로 성사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기념하여 이 예식을 행하여라"(루가 22,19) 이 말씀은 당신이 시키는 대로 행하면 당신께서 늘 새롭게 현존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이나 다름없는 말씀입니다.
3-3. 성찬의 원리.
앞에서 먼저 사물이 지니는 성사성을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가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과 다음으로 교회가 성사를 집전할 때, 그 성사 거행은 단지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할 뿐 아니라 실재로 매개한다는 두 가지의 원리도 확인했습니다.
이 두 가지는 모든 성사에 기초가 되는 중요한 원리인데, 여기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원리가 "성찬의 원리"이며, 성찬(聖餐)의 원리는 바로 성체성사(聖體聖事)의 중심이 되는 원리입니다. 그러나 이 원리는 성체성사에만 국한되어 작용하지 않고 모든 성사에 스며있는 원리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성찬의 원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살과 피를 우리를 위한 양식으로 내어 놓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사랑을 하느님과 이웃에게 나눈다는 원리로서 사랑의 나눔과 사귐까지 즉 사랑을 나누며 일치와 친교를 이루는 것을 성찬의 원리로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4. 칠성사.
4-1. 칠성사의 자리 매김.
칠성사는 입문성사에 속하는 세 가지의 성사, 세례(洗禮)성사와 견진(堅振)성사 그리고 성체(聖體)성사와 치유성사에 속하는 두 가지의 성사, 고해(告解)성사와 병자(病者)성사와 친교에 봉사하는 두 가지의 성사, 신품(神品)성사와 혼인(婚姻)성사의 일곱 가지 성사를 일컬어 칠성사라고 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113항).
칠성사는 개신교와의 대치 속에서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년)를 통해 공식적인 구원의 통로로 선언되었고 이후 제1차 바티칸공의회(1869-1870년)를 통하여 이 입장이 더욱 공고하게 확인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이 칠성사를 구원을 위한 유일한 통로라는 말로 완화하게 되었는데 이는 개신 교회와 오랜 대화와 일치운동을 추구해온 결과였습니다.
허지만 확실한 것은 이러한 관점의 변화로 칠성사의 중요성이 약화되지 않았다는 점이고 가톨릭 교회 밖에서 그 상황에 맞게 다른 방식으로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정하기 위해 종래의 독점적인 자세를 약간 수정했을 따름이며, 여전히 가톨릭 교회에서는 중요한 은총의 수로로 받아드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4-2. 칠성사의 효력.
우리는 성사의 은총을 사효적(事效的)효력과 인효적(人效的)효력으로 구분하고 있는데 사효적 은총은 성사 집행 자체에 보장되어 있는 은총을 말하고, 인효적 은총은 개인의 심적, 영적준비 상태의 여하에 따라 내려지는 은총을 말합니다.
칠성사는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행위이기 때문에 가톨릭교회는 칠성사를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성사 거행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진다고 가르칩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128항) 즉 교회의 이름으로 성사의 에식이 거행되면 거룩한 상징과 집전자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고 행동하게 되며, 이것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행동이기 때문에 이런 성사 집전을 통해 구원과 은총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식 자체의 힘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렇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성사의 사효적 효력이라고 합니다.
4-3. 성사 집전 시 질료와 형상.
성사는 보이는 일(事) 즉 사물이나 행위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은총(聖)을 받게 해주는 것인데 이 성사에는 반드시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즉 보이는 그 무엇(事)을 질료(質料)라 하고, 보이지 않는 어떤 은총(聖)을 형상(形相)이라고 하며, 질료와 형상이라는 말은 본래 이 세상 삼라만상의 존재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철학(哲學)에서 쓰는 말로써 쉽게 말하면 이 세상의 만물은 그 재료가 있고 모양새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재료 곧 질료는 사물을 구성하는 원료를 말하고, 모양새 곧 형상은 사물의 존재형식과 의미를 말합니다.
이처럼 성사에도 질료와 형상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세례성사에서는 물과 기도문이 질료가 되고 세례의 은총이 형상이 됩니다. 즉 물(질료)를 부으면서 기도문(질료) "나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에게 세례를 줍니다".라고 외워 세례의 은총(형상)을 받게 하는 것이며, 혼인성사에서는 두 사람의 지향과 의도 그리고 사제의 축복 기도문이 질료가 됩니다.
4-4. 개신 교회의 성사관.
개신교에서는 가톨릭 교회와 달리 세례성사와 성체성사의 일부 요소만을 인정하는 다른 성사관을 가지고 있으며, 나머지 다른 성사들은 예수님이 회복시킨 하느님과의 관계를 부정하는 교리라고 여기고 이것을 우상숭배의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개신교에서도 특정 일에 성찬예식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개신교에서는 성체성사의 경우, 성변화와 성체 안의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 현존에 대한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으므로 개신교의 관점에서 성체성사는 "최후의 만찬"을 단지 기념하는 차원으로 지낼 뿐이지 하느님께 바치는 제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으며, 밀떡과 포도주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몸과 피로 변화한다는 것도 믿지 않고 있으므로 개신교에서는 성체성사가 아니라 단지 성찬예식(성만찬식)으로 기념하고 있는 것입니다.
5. 준성사.
5-1. 준성사란?
준성사는 한 마디로 어느 정도 성사들을 모방하여 영적 효력을 교회의 간청으로 얻기 위해 이를 표시하는 거룩한 표징들이며, 이를 통하여 사람들은 성사들의 뛰어난 효과를 받도록 준비되고, 생활의 여러 환경이 성화되는 것입니다(가톨릭교회 교리서 1667항).
준성사는 비록 칠성사에 속하진 않지만 성사의 특성을 지니는 거룩한 상징(행위)를 지니고 있으므로, 준성사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성사들의 본래의 효력을 받도록 준비되고 생활이 성화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성사는 본질적으로 변할 수 없는 것이지만 준성사는 가변적이고 고칠 수 있는 것입니다.
준성사에는 축복과 축성 그리고 구마가 있습니다.
1) 축복(祝福)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