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6년을 보내며.
책을 읽다가 ‘존 탑’이란 사람이 했다는 말, “나는 한 해를 보내고 나이를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생각한다.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낭비란 사랑하지 않은 것이다”를 보았다. 12월이 되면서 사랑을 강조하는 이야기를 많이 보고 들었다.
지금 출석하고 있는 명성제일교회 제직회 수련회에서 강사로 온 목사가 마태복음 22:36-40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
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
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의 말씀을 본문으
로 하고 설교를 하면서, 사랑의 기본은 부부간의 사랑임을 강조하면서, 사랑의 방법으로 상대방에게 질문 을 하라고 했다. 원하는 것
이 무엇이냐를 물어 보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했다. 부부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도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
가를 계속 질문하라 했고, 자녀들에게도, 이웃들에게도 원하는 것을 물어 보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사랑의 방법이라 했
다.
컴퓨터를 통해서 본 높은뜻 정의교회의 목사는 에배소서 5:1-2 (그러므로 사랑를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의 말씀을 본
문으로 하고 설교를 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을 해야 된다고 했다. 사랑을 위해
서 자신을 희생하기까지 해야 된다고 했다. 실천하기 어려운 사랑 이야기 같았다.
김 동길씨의 책 ‘나이 듦이 고맙다’에서는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랑이라고 하면서, 지금까지 이 땅위에 우리의 생명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사랑하라고 한 것이라고 했다. 우리의 남은 날 동안 우리에게 삶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땅을 사는 동안 더
불어 살도록 허락하신 형제들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 천국을 향한 내일을 위해 우리가 준비할 수 있는 전부라는 것이다.
2016년 한해를 사는 동안 나는 얼마나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을 가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가족사랑은 그런대로 많이 했을 것 같
다. 하지만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많이 보살피지 못했다. 우선은 가족외의 사람들과 접촉이 아주 적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생활도
소극적으로 할 수밖에 없는 처지이고 보니 더욱 그러하다. 늙으면 아무 힘이 없다고 한탄 하시던 어머니의 말씀이 자주 연상되기도 한
다. 10년이 훨씬 넘게 월드비전에 월 10만원씩 후원 하고 있고, 월 3만원씩 굿 네이버스를 통한 후원을 하고 있는 것이 대외적인 것의
전부라 할 수 있겠다.
새벽에 잠이 깨서 지나온 교직생활을 한동안 생각해 보았다. 초등학교 4년 생활을 하면서, 4학년을 2년하고 한 학기, 3학년 1년, 6학년
여학생반 한 학기를 담임 하고, 전남대학교 중등교원 양성소에 가서, 4개월 정도 교육을 받고, 중등교원 수학과 2급 정교사 자격증을
받아 중등학교로 옮겼었다. 그리고 중학생을 8년 동안 가르쳤다. 1학년 2번, 2학년 1번, 3학년 2번 담임을 했고, 교무주임 2년을 포함
해서 비담임도 3번 했다. 1번은 연구주임을 하면서 1학년 담임을 했었다. 백수중학교에서 5년을 근무한 때가 내 교직생활의 전성기였
다. 교무주임 2년과 연구주임 1년을 했고, 여학생 반을 2학년 때부터 담임해서 3학년까지 2년 연속 했었다. 그 때 아이들이 가장 기억
에 남는 아이들이고, 내 나이도 34세 때부터였고, 담임을 하면서 학급신문도 만들고, 학급 노래도 만들어 부르면서 아주 즐겁게 생활
했었다. 그 때 제자들이 가끔 찾아주기도 한다. 광주 번성교회 권사인 이 00가 그 교회 목사에게 추천해서, 담양에서 목회 할 때에,
번성교회에 가서 학생헌신예배 설교도 했었다. 수원으로 이사한 것을 안 김 00이와 장 00이가 찾아와서 밥을 사주기도 했다. 2년 동안
실장을 했던 00이는 충장중학교에서 그 아들도 담임하는 상황이 되기도 했다. 1학년 담임을 맡았는데, 입학식에 온 00이가 내가 담임
이 된 것을 알았고, 특이한 인연이 되어, 그 후 00이를 가끔 만나게 되었다. 같이 무등산 주변을 드라이브 한 적도 있다. 어느 날에는
두 차례에 걸쳐 양복 두벌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춘추복과 동복이었다. 하나는 아들 몫이고, 또 하나는 자기 몫이라는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에는 맥주를 사달라고 나를 불러내기도 했다. 술집을 하면서 살기가 힘들다고 했다. 마치 나를 만난 다음에, 가서 죽을 것 같은
이야기를 했다. 다음 날 돈 백 만원을 그 애의 통장에 넣어 주었었다. 다음에 꼭 갚아 주겠다는 전화를 받은 것 같은데, 그 후로는 만나
지 못한 것 같다.
고등학교 교사로 21년간 생활했다. 1학년 5번, 2학년 10번을 담임했고, 비담임을 6번했다. 2학년 담임을 하면서 학년주임도 한 번 했
다. 주임교사를 하려면 사전에 부탁도 하고 교제도 해야되는데, 그런 것 없이 주임을 했으니, 불쌍해서 시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능력
은 있는데, 너무 제외시키기만 한 것이 관리자들에게 부담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학교를 옮기면 첫해는 언제나 비담임이었다. 고등학
교에서는 3학년 담임을 한 번도 못했다. 3학년 담임은 서로 하려고 하는, 경쟁이 어느 정도 있었다. 나는 그러한 경쟁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고 3담임을 하면 대학 입시 준비 때문에 일요일에도 많이 학생들을 등교시키고 교사도 함께 근무를 해야 했다. 나는 교회 장
로라는 것 때문에 3학년 담임에서 배제되기도 했다. 3학년 수업은 많이 했지만, 3학년을 담임하지 않으면 제자가 없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고등학교 때 가르친 아이들은 모두다 거리가 멀다. 1, 2학년 담임을 많이 하다보니 수학여행을 많이 다녔다. 경주와 설악산이 수
학여행의 주된 코스였기에 10여차레 이상 다녔다. 설악산을 향해 갈 때에는 동해 바다를 보는 것이 참 좋았었다. 동해 바다를 보면서
넓은 마음을 학생들에게 강조했고, 내 자신도 넓은 마음의 소유자가 되자고 많이 다짐했었다.
잠이 오지 않아 이 생각, 저 생각하다가 결론으로, 나는 참 시지비지한 선생 이였구나 하고 쓴 웃음을 웃었다. 결국 나만을 위한 생활
을 한 것 같다. 노후대책이 잘 되었기 때문이다. 교사생활 33년과 군대생활 4년 3개월로 인해 지금 3백만 원이 넘는 연금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시지비지한 생활로 나와 아내의 노후대책은 완벽하게 한 것 같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한 생활은 아니었는데, 지나고 보
니 지혜롭게 노후대책을 한 것 같다. 분명 내 삶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의 기도를 드린다.
2016년 3월 30일에 이사를 했다. 수원의 화서2동에서 영통동으로 이사했다. 해지와 함께 이사를 해야 했기에 부담이 되지만 이사를 했
다. 화서2동 25평 아파트에서 4년 살고, 영통동의 33평 아파트로 이사를 한 것이다. 25평을 2억 9900만원에 팔고, 그동안 아내와 함께
모아둔 돈 5천여만원을 합해서 3억 8800만원 주고 집을 샀고, 수리하는데 3000만 원정도가 들어갔다. 부족한 돈 7000만 원 정도는 해
지가 대출을 받아 대납해 주었다. 앞으로 해지에게 조금씩이라도 갚아 주어야 할 문제로 남았다. 영통으로 오니 생활수준이 조금 높아
진 것 같다. 신도시로 개발한 지역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주민들의 생활수준도 높은 지역인 것 같아서이다. 재래시장은 없고, 대형마
트가 가까이에 있어서 많이 이용하게 된 것이다. 공원 조성도 잘 되어 있고, 낮은 산이 주변에 있어서 산책하기에도 좋다. 무엇보다 교
육 환경이 좋다. 해지가 이곳을 이사지역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가 모두 집 근처에 있기 때문이다.
민채와 은채 교육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지하철 청명역이 가까이에 있는 것도, 지하철을 많이 이용하는 나에게 아주 좋은 조건이다.
미국에서 7월에 며느리와 두 손주들이 다녀갔고, 동생가족은 3월에 다녀갔다. 동생 가족은 이사와 겹쳐서, 우리 집에 와서 하룻밤만
자고 가고, 식사를 같이 한 번 했을 뿐이다. 며느리와 손주들은 주로 며느리 친정에 있으면서, 주말을 기해 몇 차례 집에 와서 지냈다.
의왕 왕송호수에 가서 레일바이크로 즐기고, 서천 국립생태원으로 하루 여행을 같이 했었다.
미국은 거리가 멀고 자주 만날 수 없어서인지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느낌이다. 어디에서 살든지 그저 잘 살기만을 바랄 뿐이다.
2016년에도 산행, 도보여행을 많이 했다. 주로 손주들에게서 해방되는 토요일에는 멀리 다녔고, 평일에는 가까운 청명산, 독침산, 도
란길 산책로를 많이 걸었다. 토요일에 먼 곳을 다니면서 써 놓은 산행일지, 도보여행일지가 45회이고, 광주에 두 번, 2박 3일과 1박 2
일의 여행, 충남 지역의 2박 3일 여행일지도 써 놓았다. 병원에는 거의 가지 않았고, 많이 걸을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한 것이 큰 복이라
하겠다.
만 77세기 된 2016년도 잘 살았다. 세월이 빠르다는 느낌은 많이 받았지만, 그런대로 내 삶은 주님 주신 복을 받고 잘 살았다는 생각이
다. 언제 죽어도 후회는 없을 것 같다. 아내와 함께 잠시 장례 문제를 이야기 한 때가 있었다. 죽었다고 여기저기 알리지 말고 가족끼
리 간단하게 장례를 치루면 좋겠다고 했다. 나 죽으면 산에 다니기 좋아했으니 화장해서 아무데나 가까운 산에 뿌려주라고도 했다. 장
례 문제에 대해 유언장이라도 하나 써 놓을 가 했더니, 아내가 죽으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니, 산 사람들에게 그냥 맡기라고 했다. 점
점 가까워지는 죽음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도록 대비를 잘 하는 것도 앞으로의 삶에 중요한 문제가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