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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처럼 만우절(2013. 4. 1.)에 세상을 떠난 가수
박상규(1942년 7월 20일 ~ 2013년 4월 1일)는 대한민국의 가수 겸 방송 진행자이다. 종교는 개신교다.
인천에서 태어남. 1961년 인천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국문과에 다님.[1] 1966년 김상국, 장우와 함께 트리오 '송아지 코멧쓰' 음반 발표.[2] 이후 김상국이 솔로로 독립한 뒤 박상규와 장우는 한국 최초의 남성 듀엣으로 불리는 '코코브라더스' 활동을 시작함.[3]1969년 그룹 '포다이나믹스'를 결성해 장우, 차도균, 김준과 함께 활동. 1970년대 '조약돌', '친구야 친구' 등의 히트곡을 발표. 1970~1990년대에는 MBC에서 방송진행된 '올스타 쇼', '일요큰잔치', '토요일 토요일 밤에', '트로트 청백전' 등 프로그램의 MC로 활약했고, 2002년부터 2005년 1월 둘째주 까지 ABN 아름방송에서 진행된 '쇼! 가요토크'를 진행했었다. 2013년 4월 1일 뇌졸중으로 사망. 향년 72세.
2013년 4월 1일은 만우절. 그 어떤 거짓말을 한다 해도 유머로 수용되는 특별한 날이다.그런데 절대로 수용하고 싶은 않은 거짓말같은 현실이 벌어졌다. 그러니까 여의도에서 라디오 방송녹음이 끝나가던 시간부터 한동안 내 핸드폰에 불이 났다. 가수 박상규선생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에 대해 평가해 달라는 일간지 음악담당기자들의 인터뷰 요청 퍼레이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지난 달 한 종편방송에서 박상규선생 다큐를 제작하겠다고 해 자문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기에 처음엔 선생의 사망소식이 만우절의 농도 강한 거짓말인가 싶었다.
그런데 진짜였다. 선생은 생전에 유쾌하고 코믹했던 입담과 연기에 어울리는 만우절을 택해 정말 거짓말처럼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나이가 71세이니 요즘 같은 장수시대에 70-80년대를 풍미했던 멀티플 재능이 너무 아까웠다. 사실 고인은 10여 년 전에 뇌졸중이 발병해 그동안 병마와 싸워왔다. 회복과 발병을 거듭하면서도 몸을 추스릴 정도가 되면 방송에 나와 병마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피력해 찐한 감동을 시청자들에게 안겼다. 지난 달 종편방송을 통해 병마로 고통스러워하면서도 노래를 끝까지 놓지 않으려 했던 마지막 모습이 떠올라 마음이 찡하다.
사실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가수, 영화배우, 방송진행자 등 멀티플레이어 재능을 뽐낸 박상규선생의 음악업적은 다재다능한 예능 능력에 가려 정당한 평가를 받아오진 못했다. 그의 화려했던 멀티플레이어 여정을 정리하는 이유는 이번에 어김없이 잘못된 팩트가 공공연하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아카이브를 보존하지 못한 한국대중음악계의 척박한 현실로 인해 과거의 중요 대중문화인들의 부고때 황당한 팩트가 난무하는 악순환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재현되었다.
1942년에 인천에서 태어난 선생은 인천고와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혹은 중퇴)를 했다. 문제는 포털과 언론의 부고 기사들을 보면 ‘1965년(2일 새벽 네이버는 1963년으로 수정) KBS 1기 전속가수’라는 팩트가 무한 반복되는데 이는 명백한 오류다. KBS 그러니까 해방이후 서울중앙방송국은 1948년부터 왜색 가요 일소와 우리 가요 보급을 위해 작곡가들에게 의뢰해 신작가요들을 발표했고 전속가수를 모집 시스템을 도입했다. ‘홍콩아가씨’로 유명한 금사향선생, ‘아내의 노래’로 유명한 심연옥, 이갑돈이 바로 KBS 전속 1기 가수들이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중앙방송국은 전속 가수를 내지 못했고 휴전이후 1955년 전속 2기를 선발했는데 안다성선생등이 그때 데뷔했다. 그리고 1956년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한 권혜경선생등이 전속 3기 가수로 선발되었다.
1963년 KBS 6기 전속가수들 기념사진@최규성
이 사진은 박상규선생이 KBS 1기 전속가수였다는 1963년의 진짜 KBS 전속가수들의 입사후 첫 기념사진이다. 그런데 KBS는 1963년에 1기가 아닌 6기 전속가수들을 선발했고 ‘개여울’의 오리지널 가수 김정희선생과 ‘내 이름은 소녀’로 유명한 조애희선생이 동기생이다. KBS의 전속가수 제도는 1964년 7기를 마지막으로 없어졌다가 1970년 자매듀엣 유리시스터즈에 의해 잠시 변형된 형태로 재가동되었다. 그런데 박상규선생이 1965년(혹은 1963년) KBS 1기 전속가수가 되었다면 1964년에 7기를 끝으로 사라진 KBS 전속가수 제도가 어떻게 이듬해에 부활했다는 지 모르겠다. 만약 부활했다면 8기가 되어야지 어떻게 1기로 둔갑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나저나 도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박상규선생의 프로필에 '1965년 KBS 1기 전속가수'란 황당무계한 소스가 사실인양 통용되어왔는지 황당하다. 전화인터뷰때 한 기자와 그 부분을 지나가듯 잠깐 언급했던 것 같은데 그 결과, 그 기자는 '1965년 KBS 1기 전속가수'란 오류를 범하지 않았지만 '1963년 전속가수'로 명기했다. 그런데 위에 올린 1963년 KBS 6기 전속가수들이 입사후 사옥 앞에서 모두 한자리에 모여 촬영한 기념사진 어디에도 박상규선생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부분 기자들이 이 팩트를 내게 확인하지 않은 것은 포탈 프로필에 올라있는 팩트를 아무 의심없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거의 중요가수들이나 배우들이 세상을 떠날때마다 속절없이 반복되는 이 같은 오류는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모두가 대중음악 박물관 하나없는 아카이브 부재에서 오는 폐해다.
송아지 코멧쓰 노래 2곡이 실린 1966년 음반
박상규선생의 진짜 데뷔시절 가수 활동이 어땠는지 살펴보자. 나 역시 이 부문은 '내가 하는 한'이라고 해야할 것 같다. 그리고 자료로 확인되지 않고 구술로 전해들은 이야기는 어느 정도의 오류는 필연적임을 감안하자. 1960년대 초에는 ‘극장쇼’와 더불어 더 하위 개념의 ‘순회공연단’이 존재했다. 지방에서는 ‘뻐꾸기 단체’라고 불린 천막을 치고 공연을 했던 공연단이다. ‘뻐꾸기 단체’란 뻐꾸기 소리가 들리는 시골의 골목골목은 물론이고 산골마을까지 찾아간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떠돌이 공연단체 이름이다. 이 뻐꾸기 단체의 천막공연 무대에서 통기타 노래가 불리어졌다. 3인조 ‘송아지 코멧쓰’는 바로 뻐꾸기 단체와 비슷한 성격으로 지방을 누비며 활동했던 무명의 통기타 보컬그룹으로 보시면 될 것 같다. 그렇담 멤버는 누구일까? ‘송아지 코멧쓰’는 박상규, 김상국, 장우로 구성된 남성 트리오였다. 통기타를 치며 코믹송을 부른 통기타 보컬그룹이었던 이 팀은 독집을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1966년 2곡을 음반으로 공식 발표했었다. 60년대 인기가수 이상열의 ‘천리타향’ 음반에 수록된 ‘수양버들 나무밑’과 ‘천수삼경’이란 노래다. 춤추듯 부드럽게 이어지는 멜로디가 참 인상적인 ‘수양버들 나무밑’은 음악 연구가들 사이에 한국 최초의 창작 포크송으로 회자되는 의미심장한 노래다. ‘천수삼경’은 불교가요라도 해도 좋을 정도로 종교적 색채가 강한 노래다.
미국에서 록큰롤의 기원을 이야기할 때 흔히 1955년 B.헤일리와 코메츠(Comets)가 발표한 노래 《Rock around the Clock》을 떠올린다. 그해 6월 전미 인기차트 1위에 오르게 되면서 로큰롤 선풍은 전 세계에 퍼지기 시작한 노래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송아지 코멧쓰>는 헤일리와 함께 ‘Rock around the Clock’을 부른 미국그룹 코메츠의 이름에다 한국적 이미지가 진동하는 송아지를 합체했던 것 같다.
Comets는 ‘혜성들’이란 뜻이니 한국말로 풀면 ‘송아지 혜성들’이 되는데 혜성과 같이 등장한 송아지들 쯤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이를 미뤄 박상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1961년 이후 대학에 진학 한 후 교사의 꿈을 접고 연예계로 진로를 튼 것은 교내 축제에서 노래를 하고 연극 활동 통해 대중문화인이 되려는 꿈을 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집을 뛰쳐나와 지방을 도는 순회공연단 활동에 참여했다고 보는 것이 정황상 맞다. 이후 김상국선생이 솔로가수로 독립하면서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으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트리오 <송아지 코멧쓰>는 자동 해체가 되었다.
박상규, 장우의 코코브라더스
자연스럽게 박상규, 장우 두 사람은 듀엣 시스템으로 전환해 한국 최초의 남성듀엣으로 회자되는 <코코브라더스>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장우선생은 ‘코코장’이란 애칭을 얻게 된다. 여기서 코코브라더스는 1972년에 활동을 시작했다는 언론기사가 있는데 정확한 팩트를 정리할 필요는 있다. 여하튼 1969년 혜성처럼 등장해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던 펄씨스터즈 공연에 박상규, 장우는 남성사중창단 <쟈니브라더스> 출신 김준과 록밴드 <키보이스>와 <가이스&돌스>출신 차도균과 함께 출연한 것이 계기가 돼 노래동아리를 결성했다. 팀명 <포다이나믹스>는 당시 방송PD이자 평론가로 활동했던 이백천선생이 작명했다. 당시 미국의 유명한 4중창단 브라더스 포(Brothers Four)가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내한공연을 했을 때 이들은 구경하러 갔다 사진을 찍으며 ‘우리는 한국의 멋쟁이 가수들이다’라고 소개했는데 그 모습을 본 이백천선생이 ‘포다이나믹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때론 각자 솔로로 듀엣으로 4중창단으로 따로또같이 활동했던 이들은 1969년 TBC 남자신인가수 후보에 선정될 정도로 인기를 구가했고 팝과 소울, 재즈, 통기타 음악을 넘나들며 서구의 다양한 음악장르를 한국대중음악에 이식했다. 그런 점에서 박상규선생이 한국대중음악의 발전에 기여한 음악적 공로는 선명하다.
<포 다이나믹스>는 1970년대 들어 TBC 음악프로그램 ‘쇼쇼쇼’ 고정멤버로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박상규선생이 솔로로 독립해 당시 ‘청년문화’란 이름으로 뜨거운 열기를 뿜어낸 통기타 가수로 변신해 포크의 대중화에 앞장 섰다.
이에 포 다이나믹스는 트리오 체제로 전환해 1974년 지구레코드를 통해 트리오 개편 기념앨범을 발표했었다. 박상규선생의 솔로 독립이후에도 포 다이나믹스는 프로젝트로 뭉쳐 무수하게 방송활동을 했고 1988년 아세아레코드를 통해 처음으로 4명 멤버 모두가 참여한 정규앨범을 발표했고 2007년에는 미주 한인회 창립 45주년을 축하 콘서트를 함께하며 40여년에 이르는 우정을 과시하기도 했다.
1985년 영화 방황하는 별들
1970년대 들어 타고난 입담을 무기로 스탠딩 개그맨으로도 명성을 구가했던 박상규선생은 영화배우로도 활약을 시작했다. 1974년 남진과 릴리시스터즈가 주연한 영화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와 1975년 신상옥감독의 연출하고 신중현선생이 음악감독을 맡았던 영화 '아이 러브 마마'와 1985년 영화 ‘방황하는 별들’에 출연했다.
그가 일약 스타덤에 오른 것은 대표곡으로 회자되는 ‘조약돌’의 빅히트 때문이다. 1974년 당시 ‘조약돌’이 수록된 앨범은 100만 여 장이 넘게 팔렸다고 전해진다. 1973년 결혼식을 올린 이듬해의 일이었다. 또한 그해 한국일보 주최로 열렸던 제 1회 한국가요제 본선에 진출해 ‘베스트10'에 선정되는 성과를 올렸다. 이후 ‘친구야 친구’ ‘둘이서’등 무수한 히트곡으로 75년과 76년 2년 연속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며 가수로서 전성기를 구가했고 1986년까지 ‘역마’ 등의 노래를 잇달아 히트시켰다.
1980년대 이후 박상규선생은 가수보다는 텔레비전과 라디오 프로그램의 단골 사회자로 활약했다. 게스트들을 편안하게 해주면서도 재치와 유머로 웃음을 자아내는 그의 코믹하고 구수한 진행 솜씨는 발군이었다. 그를 영입하려는 방송사들의 경쟁이 치열했던 것은 당연했다. 이 시기에 그는 방송진행자로 끼니를 제대로 챙겨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박상규선생이 진행했던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그램은 “일요큰잔치”. MBC가 가족 시청자를 겨냥해 일요일 낮에 방영했던 오락 게임 프로그램 ‘일요큰잔치’는 선생을 방송 사회자로 각인시킨 대표작이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만들어진 1987년부터 10여년간 혼자서 진행했다. 당시 한 사람이 방송 프로그램을 그렇게 오랫동안 진행하다는 것은 경이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김상국, 조영남이 그랬듯 박상규선생 역시 장르를 넘나드는 멀티플레이어 활동 때문에 폭넓은 인지도를 획득했지만 그로인해 선구적인 실험음악과 서구 음악장르를 국내에 이식했던 가수로서의 의미심장한 업적이 희석되어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게 한 주범으로 작용했다.
박상규선생은 가수생활을 포기할 위기도 있었다. 1990년대 중반 목사안수를 받으면서 일부 교계인사들로부터 “목사가 됐으니 더 이상 세상음악을 하면 안 된다”는 압박을 받았기 때문. 외환위기가 닥쳤던 1997년 선생은 ‘일요큰잔치’의 진행에서 물러났고, 이후엔 교통방송 개국 프로그램 등을 진행했지만 인기가 예전과 같지 않다는 것을 실감하면서 라디오 방송 진행과 해외교포 위문공연 등에 최선을 다했다. 2000년엔 예기치 않게 병마를 만나 쓰러지는 불운을 겪어야 했으나, 그는 투병을 하면서도 무대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았고 지난
2004년에는 제 1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공로상을 받았다. 고인은 지난달 한 종편 프로그램에서 뇌졸중 투병 생활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언어장애에도 불구하고 “힘내서 일어나겠다”고 주먹을 불끈 쥐어 시청자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인터뷰에 응한 신문기사들
한국일보 기사
'조약돌', '친구야 친구' 등의 노래로 1970년대 가요계를 풍미했던 가수 겸 방송진행자 박상규씨가 1일 오전 11시 20분 인천 자택에서 뇌졸중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고인은 2000년 쓰러진 뒤 방송에 거의 출연하지 않았지만 간간이 공연 무대에 오르며 연예계 활동을 이어갔다. 2008년 병이 재발한 뒤엔 연예계를 떠나 재활 치료에 힘써 왔다. 당시 몸의 반쪽을 사용하지도 못할 정도로 상태가 악화했던 고인은 꾸준한 운동과 강력한 재활의지로 2년 만에 완치 단계에 이르기도 했다. 2010년 한 TV 프로그램에 출연해 "뇌졸중 판정을 받고도 8년간 거의 매일 술을 마셨는데 그게 재발의 원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후에도 가끔 TV에 출연해 투병 과정에 대해 이야기할 만큼 병세가 호전됐지만 최근 뇌졸중이 재발했다.
그는 가수, 연기, 코미디, 방송 진행 등 여러 분야에서 재능을 보인 '원조 멀티엔터테이너'였다. 가요평론가 최규성씨는 "코믹송부터 포크, 솔, 서정적인 노래까지 두루두루 뛰어난 보컬리스트였고 서구 음악 장르를 한국적 정서에 접목하려는 선구적인 시도도 많이 했는데 방송 진행자나 배우로서 이미지가 강해 가려진 부분이 없지 않다"고 말했다. 최씨는 "'노래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며 최근까지 공연을 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놓지 않으려 했던 분"이라고 덧붙였다.
1942년 인천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를 졸업한 고인은 65년 KBS 전속가수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했다. 66년 가수 김상국, 장우와 함께 트리오 '송아지 코멧츠'를 결성해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다. 송아지 코멧츠는 통기타 반주에 코믹한 노래를 불렀는데 이듬해 김씨의 탈퇴로 '코코 브라더스'로 재편됐다. 주로 외국곡을 번안해 부르던 코코 브라더스를 해체하고 69년엔 차도균, 김준과 함께 '포 다이나믹스'를 결성했다.
고인은 70년대 들어 '조약돌', '웃으며 보내마', '친구야 친구' 등의 히트로 전성기를 보냈다. 75년과 76년 2년 연속 MBC 10대 가수에 선정될 만큼 절정의 인기를 구가했다. 말솜씨가 좋아 TV 프로그램이나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다. 가수 남진과 함께 출연한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74),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아이 러브 마마'(75) 등의 영화에서 연기력을 뽐내기도 했다.
70년대 후반부턴 방송 진행자로 유명세를 떨쳤다. MBC '이 밤을 즐겁게', '토요일 토요일 밤에', '일요큰잔치' 등 인기 예능 프로그램에서 재치 넘치는 입담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4년 제11회 대한민국 연예예술상에선 공로상을 수상했다. 고인과 함께 활동했던 가수 김상희씨는 "재주꾼인데다 친화력이 매우 좋았고, 순발력이 뛰어나 예능 프로그램에선 따라갈 사람이 없었다"고 애도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영애씨와 아들 종희, 종혁씨가 있다.
동아일보 기사
‘만능 엔터테이너’ 원조 박상규씨 별세 14년 전부터 뇌중풍으로 투병
가수 겸 방송 진행자로 활동한 박상규 씨(사진)가 1일 뇌중풍(뇌졸중)으로 별세했다. 향년 71세. 박 씨의 처남인 한모 씨는 이날 “고인이 14년 전부터 뇌중풍으로 투병해왔다”며 “뇌중풍이 세 번째 재발해 오전 11시 20분 세상을 떠났다”고 밝혔다.
인천 출신인 고인은 1965년 KBS 1기 전속 가수로 데뷔했다. 1966년부터 가수 김상국 장우와 함께 트리오 ‘송아지 코멧츠’를 결성해 전국을 누비며 해학적인 포크송을 불러 인기를 모았다. 이후 고인은 듀엣 ‘코코 브라더스’, 4인조 그룹 ‘포 다이나믹스’를 거쳤고 1970년대 ‘친구야 친구’ ‘조약돌’ ‘웃으며 보내마’를 히트시키며 솔로 가수로서 전성기를 맞았다.
1970∼90년대 라디오 DJ와 TV 예능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깊은 족적을 남겼다. 라디오 ‘싱글벙글 쇼’, TV ‘토요일 토요일 밤에’ ‘일요일 밤의 대행진’의 진행을 맡아 친근한 이미지와 재치 있는 입담으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2004년 대한민국 연예예술상 공로상을 받았다. 1990년대 이후 뇌중풍이 발병하면서 고인은 방송가의 조명을 등지고 투병에 전념했다.
최규성 대중음악평론가는 “가수 배우 진행자로 활약한 고인은 요즘엔 일반화된 ‘전방위 연예인’의 선구자였다. 그로 인해 음악적 평가를 제대로 받지 못한 측면이 있다”고 했다. 그는 가수로서의 고인에 대해 “‘송아지 코멧츠’와 국내 창작 포크송의 시류를 일궜고 ‘포 다이나믹스’에서는 보컬그룹에 흑인음악을 도입했으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흥겨운 곡과 우수에 찬 곡을 모두 잘 소화한 탁월한 음악인이었다”고 평가했다.
고인의 생전 모습은 지난달 6일 채널A ‘그때 그 사람’을 통해 마지막으로 TV 전파를 탔다. 빈소는 2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가톨릭대 서울성모병원에 마련된다. 유족으로는 부인 한영애 씨와 아들 종희, 종혁 씨가 있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조선일보 기사
[추억人] 71세… 꽃잎이 바람에 떨어지듯 떠나다
정지섭 기자
가수·방송인으로 40여년… '국민MC' 박상규
친근한 이목구비가 돋보이는 젊은 시절 앨범 재킷 속의 고(故) 박상규.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제공 "꽃잎이 한잎 두잎/ 바람에 떨어지고(…) 내 마음은 조약돌/비바람에 시달려도/둥글게 살아가리/아무도 모르게" '조약돌'을 부르는 박상규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가수와 방송인으로 40여년간 국민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던 박상규(71)가 1일 오전 11시 지병인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국 포크음악의 초창기 멤버였고, 활발하고 우렁찬 입담으로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MC였다.
지난 2000년 처음 뇌졸중이 발병한 뒤, 그는 서서히 잊혀 갔다. 2008년 뇌졸중이 재발했으나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던 그는 세 번째 뇌졸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연세대 국문과를 중퇴한 박상규는 스물두 살이던 1964년 작곡가 전석환에게 발탁돼 '코코넛 트리오'의 일원으로 가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가 불렀던 노래들은 군사정권 시대 분위기와는 다른 코믹하면서도 발랄한 이른바 '캠프송'들이었다. '코코브라더스' '포다이내믹스' 등 젊은 남성 보컬그룹 멤버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던 박상규는 거친 듯 애잔한 음성과 구슬픈 멜로디가 돋보이는 1975년 노래 '조약돌'이 대 히트 하면서 솔로 남자 가수로 입지를 굳혔고 2년 연속 MBC 10대 가수에도 선정됐다. 1980년대 최고의 방송MC로 활약한 그는 87년부터 10년간 방영된 MBC '일요큰잔치'로 시청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 탓인지 박상규의 음악에는 후한 평가가 따르지 않지만, "통기타 음악이 가요계의 큰 흐름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 "서구 색채가 짙던 재즈와 블루스를 전통 가락과 접목했다"(대중음악평론가 최규성)는 평가도 있다. 박상규는 최근까지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자신을 불러주는 무대를 찾아 마이크를 잡았다. 이제 노래 솜씨와 입담을 과시할 무대를 천상(天上)으로 옮겼다. 유족은 부인 한영애씨와 2남. 발인은 4일 서울성모병원. (02)2258-5940
[출처] 박상규 부고만큼이나 안타까운 그에 대한 기록의 오류|작성자 절판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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