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 전경, 이천시 대월면 초지리(관장- 한영제 장로, 부관장-이덕주 교수)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2층 전시실
평양 장대현교회 복원모형
돌로 조각된 포도접시
오르간
한옥 예배당 십자가 문양
길선주 목사 친필 병풍
영계(靈溪) 길선주(吉善宙, 1869-1935) 목사는 젊어서 선도(仙道) 수행을 하다가 기도하던 중,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는 하늘의 음성을 듣고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1907년 평양 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고 최초 장로교회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이후 평양의 모교회인 장대현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하였고 <해타론>, <만사성취>, <말세학> 등 저술을 남겼다.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난 대부흥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하였고 1920-30년대에는 '재림신앙'을 강조하는 부흥사로 활동하다가 강서 고창교회에서 열린 평서노회 사경회를 인도하던 중 쓰러져 별세하였다. 민족운동과 관련하여, 1911년 선천 신성중학교 교사로 있던 그의 맏아들 길진형이 105인사건 연루자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았고 결국 그 후유증으로 1914년 세상을 떠나는 슬픔을 겪었다. 1919년 삼일운동 때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참여하여 1년 반 옥고를 치렀는데 같은 시기 둘째 아들 길진경 역시 만세 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체포되어 함께 옥고를 치렀다. 길선주 목사는 독립운동과 목회로 가족과 떨어져 있는 시간이 많았던 관계로 가족을 그리워하는 심정을 담아 한시를 남겼다.
길선주 목사 병풍
길선주 목사 병풍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길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길
대진경교유행중국비 탁본
당나라 때(635 A.D.) 중국에 들어온 네스토리안 계통의 기독교로 경교로서 경교가 번성하였던 781. A.D에 대진사에 세워진 것으로 중국 내 선교역사와 교리 내용을 적은 비문이다. 후에 탄압으로 땅속에 묻혀있다 1635년 예수회 신부들에 의해 발굴 1907년 현재 비림에 보관되어 있다. 자세한 내용과 사진은 본 블러그 "숭실대박물관"을 참조 하십시요.
양피지 성경(앞면), 14세기 낱장 양피지 성경사본
양의 내피를 얇게 갈아 붓으로 짖접 쓴 라틴어 성경이다. 영국 윈체스터에서 필사되어 "윈체스터 성경" 이라고 불리우는데 내용은 시편이다. 장이 바뀌는 첫 글자는 금으로 칠했다
가족성경, 1870-80, 미국에서 인쇄된 성경들
본문은 흠정역(KJV)으로 성경외에 지도, 연대표, 사진, 성경인물 및 지명 등이 첨부되어 있다. 앞면에 조상들의 사진을 붙일 수 있도록 하여 "가보 성경"의 기능을 하고있다
기리시단 성화, 19세기 일본 성화
일본의 기독교 역사는 16세기 예수회 신부인 에스파냐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의 전도로 시작 되었다. 기리시단은 일본의 카톨릭 신자를 부르는 이름이다. 처음 50년 동안은 번성 하였으나 도요토미, 도쿠가와 시대에 핍박으로 수천 명의 순교자를 낳았다. 이후 19세기까지 숨은 기리시단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는데 이때 지방의 기리시단들은 불교도로 위장하여 혼합적 종교로 살아남게 되었다. 이 그림 역시 불교의 보현 보살(십자가 바로 아래 그림)에다 십자가와 예수의 라틴어 머리글자 "IHS" 를 새겨 놓고 예배시 사용 하였다. 십자가 부분에 그리스도의 모습이 숨겨져 있다. 이 그림은 일본 남부 시고쿠 지방 츠시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십자가 부분
척사윤음, 기해년 박해(1839년) 시 천주교 배척 이유를 설명한 정부 발행의 책
조인영이 저술한 이 책은 13장의 겹장으로 되어있고 한문과 한글 병용하여 내려쓰시로 되었있다. 당시 기독교를 "무군무부의 종교" "패륜의 종교" 로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척사윤음, 병인년(1866년) 병인교난 때 천주교를 배척하는 이유를 설명한 정부문서
함경도 단천부사에게 전달된 왕실본으로 겹장 19장으로 되어있다. 대원군의 대대적인 천주교 박해를 보여주고 있다.
치명일긔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뮈텔 주교가 저술한 것으로 병인교난(1866-67) 때 순교한 당시 조선 교구장 베르뇌 주교 등 877명의 사적을 정리한 책이다. 순교자 중 24명이 1968년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예수 성심 그리스도상, 1930, 작자미상, 대나무를 배경으로 그림
ㄱ자 모양교회 모형
우리나라에 복음이 처음 들어왔던 시절, 부부가 아니면 남자와 여자가 얼굴을 맞대고 한 자리에 있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예수 믿고 교인이 되었음에도 한 자리에서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 같은 봉건적 유교의 가르침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교 초기에는 남성과 여성 교인들이 다른 건물에서 따로 예배를 드리다가 복음 안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가르침에 용기를 얻고 남 · 녀가 함께 예배드릴 수 있는 예배당 건물을 마련하였다. 그렇게 해서 나타난 것이 ㄱ자 예배당이다. 본래 ㄱ자 형태 건물을 한국 전통 가옥에서 '고패집'이라 했다. 교인들은 고패집 형태로 예배당 건물을 지어 남 · 녀 좌석을 구분하였다. ㄱ자의 꺾어진 모서리 부분에 강단을 설치하고 강단 앞에 휘장을 쳐서 강단 좌우 날개 부분에 앉은 남성과 여성들이 예배 시간 중에 서로 볼 수 없도록 하였다. 물론 출입문도 다로 냈다. 이렇게 하여 교인들은 '한 지붕 아래서'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도 서로 대면하지 않음으로 사회의 비난을 피할 수 있었다. 평양 장대현교회, 전주 서문교회, 원산 중앙교회, 춘천 중앙교회, 선천읍교회 등 1890년대 이후 한국 교인들이 지은 예배당 건물들은 대부분 이런 ㄱ자 형태를 취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이후 예배당 건물이 서양식 1자 형태로 바뀌면서(가운데 휘장은 1920년대까지 남아 있었다.) ㄱ자 예배당 건물은 사라졌다. 현재 남아 있는 것으로는 김제 금산교회와 익산 두동교회 예배당 건물이 있는데 모두 도지정 문화재로 보호를 받고 있다.
신의주 입안교회 개광기념 놋대야, 1904년 창립된 교회로 1926년 창립기념으로 만든 놋대야이다
언더우드 타자기, 1910 미국 언더우드 타자기 회사에서 제작한 영어 타자기
1885년에 내한한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버지와 형은 타자기 회사를 경여 하였다. 따라서
언더우드는 이들의 선교 후원을 많이 받게 되었고 일찍부터 타자기를 사용 하였다. 1930년대에 한글 타자기를 생산 하였다.
민족 저항시인 윤동주(1917-1945) 는 북간도 용정 명동촌 출신으로 어려서 부터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났다. 이 기와는 그의 조부 윤하원이 명동촌에 기와집을 지으면서 지붕 기와를 십자가 문양을 넣어 특수 제작하여 사용 하였다. 이 기와는 2002년 윤동주 생가 답사 중 옥수수 밭에서 발굴한 것이다.
유득윤 장로 필사성경, 한글, 일본어, 중국어 필사성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