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불교와 여행을 사랑하는 사람들 원문보기 글쓴이: 관문
영어 공부와 불서 읽기의 묘미 - 불기 2558년(2014년) 4월 3일 후기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22)
서울경기강원지역방 2839번 글 http://cafe.daum.net/altlovebuddha/PEK/2839
의 후속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스물두 번째로 읽었습니다. 오늘 불서읽기에는 효주 법우와 저 관문, 이렇게 두 명이 참석했습니다.
오늘도 지난번에 모였던 장소 ‘Cafe 57th’에서 모임을 가졌습니다. 이곳은 지하철 3호선 안국역 1번 출구에서 나와 80 미터 가량 직진하신 후 풍문여고를 오른 쪽에 끼고 돌아서 약 60 미터 가면 보이는 곳입니다. 모이는 때는 매주 목요일 오후 7시입니다.
오늘은 우리의 교재 <Thich Nhat Hanh,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 중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Chapter Twenty-Five The Six Paramitas 를 읽었습니다. 관문이 가지고 있는 책으로 202페이지 밑에서 15째 줄부터 213끝까지입니다.
<틱낫한 스님의 The Heart of the Buddha's Teaching>을 읽는 동안의 후기는 저희가 그 날 읽은 부분의 영어 본문과 그 번역서인 <진현종 옮김, 틱낫한 스님의 아! 붓다, 반디미디어> 의 번역을 올리겠습니다.
PART THREE Other Basic Buddhist Teachings
제3부 기타 불교교리
CHAPTER TWENTY-Five The Six Paramitas
25장 육바라밀(六波羅蜜)
The first disciple I ordained was a monk named Thich Nhât Tri. Brother Nhât Tri went with Sister Chân Không and me on many missions to rescue flood victims in central Vietnam, and he spent many months in a poor hamlet because I had asked him to. We were setting up the 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 and we needed to learn the real situation of the people in the rural areas. We wanted to find ways to apply nonviolence and loving kindness to help poor people improve their standard of living. It was a beautiful movement for social improvement. Eventually, we had 10,000 workers. The communists said our Buddhist movement was pro-American, and the mass media said that we Buddhist monks were disguised communists trying to arrange a communist takeover. We were just trying to be ourselves, not aligned with any warring party. In 1967, Brother Nhât Tri and seven other social workers were kidnapped by a group on the extreme right, and he has not been heard from since then.
내가 처음으로 정식 제자로 삼은 이는 틱낫찌라는 비구였다. 틱낫찌는 찬콩 비구니와 나와 함께 중부 베트남의 홍수 피해자들을 구하는 일에 여러 차례 나섰는데, 내 부탁을 받아들인 그는 초라한 오두막에서 여러 개월을 보냈다. 사회봉사를 위한 청년 학교를 세우고 있었던 우리는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처한 실제 상황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생활수준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돕기 위해 비폭력과 자비를 적용할 길을 찾고자 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사회 개선운동이었다. 마침내 우리와 함께 한 일꾼들이 10,000명에 달했다. 공산주의자들은 우리의 불교운동이 친미성향을 가진 것이라고 했고, 대중 매체들은 우리 불교 승려들을 공산주의자들의 접수를 준비하고자 하는 변장한 공산주의자들이라고 매도했다. 우리는 교전 당사자인 어느 무리의 손도 들어주지 않고 묵묵히 우리가 하고자 하는 일을 할뿐이었다. 1967년 어느 극우 단체가 낫찌와 일곱 명의 사회 운동가를 납치했는데, 그로부터 그에 관한 소식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One day, Nhât Tri was walking on the streets of Saigon, when an American soldier standing on a military truck spit on his head. Brother Nhât Tri came home and cried and cried. Being a young man, he was tempted to fight back, and so I held him in my arms for half an hour in order to transform that feeling of being deeply hurt. I said, "My child, you were not born to hold a gun. You were born to be a monk, and your power is the power of understanding and love. The American soldier considered you to be his enemy. That was a wrong perception of his. We need 'soldiers' who can go to the front armed only with understanding and love." He stayed on with the 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 Then he was kidnapped and probably killed. Thich Nhât Tri is a big brother of the monks and nuns at Plum Village. His handwriting looked almost exactly like mine. And he wrote beautiful songs for buffalo boys to sing in the countryside.
언젠가 낫찌가 사이공의 거리를 걷고 있는데, 군용 트럭 위에 서있던 한 미군이 그의 머리에 침을 뱉었다. 낫찌는 집에 돌아와서 대성통곡을 했다. 젊은 그로서는 미군과 싸우고자하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깊은 상처를 받은 그를 변화시키고자 나는 그를 30분 동안 껴안아 주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말했다. “얘야, 넌 총을 잡으려고 태어난 게 아니란다. 넌 스님이 되려고 태어났지. 네가 가지고 있는 힘은 이해와 사랑의 힘이란다. 그 미군은 널 적으로 생각한 게 분명하다. 물론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와 사랑만으로 무장한 채 전선에 나가는 ‘군인’이란다.” 그는 계속해서 사회봉사를 위한 청년학교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서 납치를 당했고 아마도 죽은 게 분명했다. 틱낫찌는 플럼 빌리지에 있는 비구와 비구니들의 대선배다. 그의 필적은 내 것이나 거의 다름없이 보였다. 그는 시골에서 소를 치는 소년들이 부를 법한 아름다운 노래를 여럿 지었다.
How can we wash away that kind of injustice? How can we transform the injustice received by whole nations? Cambodians, Bosnians, Palestinians, Israelis, Tibetans, all of us suffer from injustice and intolerance. Instead of being brothers and sisters to each other, we aim guns at each other. When we are overtaken by anger, we think that the only response is to punish the other person. The fire of anger continues to burn in us, and it continues to burn our brothers and sisters. This is the situation of the world, and it is why deep looking is needed to help us understand that all of us are victims.
어떻게 해야 그런 종류의 불의를 없앨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모든 민족이 받고 있는 불공평한 처사를 바꿀 수 있을까? 캄보디아인, 보스니아인, 팔레스타인 사람들, 이스라엘인, 티베트인을 비롯한 우리 모두가 불의와 편협함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대신에 우리는 총을 겨누고 있다. 분노에 사로잡히면, 상대방에게 화풀이하는 것이 유일한 대응책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분노의 불길이 우리 안에서 계속 타오르는 한 그것은 우리의 형제와 자매를 계속해서 태워죽이고 말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세계가 처한 상황이다. 우리 모두가 희생자라는 사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얻으려면 깊숙이 들여다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I told Brother Nhât Tri, "If you were born into a family along the coast of New Jersey or California and if you read the kinds of newspapers and magazine articles that those soldiers read, you would also believe that all Buddhist monks are communists, and you would spit on the head of a monk, too." I told him that American G.I.s were trained to look on all Vietnamese as enemies. They were sent here to kill or be killed. They are victims, just like the Vietnamese soldiers and Vietnamese civilians. The ones who hold the guns and shoot at us, the one who spit at you, they are not the makers of the war. The war makers are in comfortable offices in Beijing, Moscow, and Washington, D. C. It was a wrong policy born of a wrong understanding. When I went to Washington in 1966, I met with Robert McNamara, and what I told him about the nature of war was entirely true. Half a year later, he resigned as Secretary of Defense, and recently he wrote a book and confessed that the war in Vietnam was a terrible mistake. Perhaps I helped plant some seeds of understanding in him.
나는 낫찌에게 말했다. “네가 만일 뉴저지나 캘리포니아 해변에 사는 가족의 일원으로 태어나서 미군들이 읽는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것과 같은 기사를 읽게 된다면, 너도 모든 불교 승려들이 공산주의자라고 믿게 될 것이고, 그래서 승려의 머리에 침을 뱉게 되었을 것이다. ” 나는 그에게 미군들은 베트남 사람들을 모두 적으로 여기는 훈련을 받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죽이거나 죽임을 당하기 위해 베트남에 온 것이었다. 그들은 베트남 군인들과 민간인들과 마찬가지로 희생자이다. 손에 총을 들고 우리를 쏘는 사람들, 그리고 너에게 침을 뱉은 사람, 그들은 이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이 아니다. 전쟁을 일으킨 사람들은 북경, 모스크바, 워싱턴 D. C.의 편안한 사무실에 앉아있다. 그것은 잘못된 이해에서 비롯된 잘못된 정책이다. 나는 1966년 워싱턴에 가서 로버트 맥나마라를 만난 자리에서 전쟁의 진상을 알려주었다. 6개월 후 그는 국방방관 자리를 사임했고 최근에 쓴 책에서 베트남전은 끔찍한 실수였다고 털어놓았다. 아마도 내가 그에게 이해의 씨앗을 약간이나마 심어준 듯하다.
A wrong perception was responsible for a wrong policy, and a wrong policy was responsible for the deaths of many thousands of American and Vietnamese soldiers, and several million Vietnamese civilians. The people in the countryside could not understand why they had to die like that, why the bombs had to fall on them day and night. I was sleeping in my room close to the Buddha Hall on the School of Youth for Social Service campus when a rocket was fired into that hall. I could have been killed. If you nourish your hatred and your anger, you burn yourself. Understanding is the only way out. If you understand, you will suffer less, and you will know how to get to the root of injustice. The Buddha said that if one arrow strikes you, you'll suffer. But if a second arrow hits you in the same spot, you'll suffer one hundred times more.5 When you are a victim of injustice, if you get angry, you will suffer one hundred times more. When you have some pain in your body, breathe in and out and say to yourself, "It is only a physical pain." If you imagine that it is cancer and that you will die very soon, your pain will be one hundred times worse. Fear or hatred, born of ignorance, amplifies your pain. Prajña paramita is the savior. If you know how to see things as themselves and not more than that, you can survive.
잘못된 생각에서 잘못된 정책이 비롯되었고 그 정책 때문에 수만 명의 미군과 베트남군 그리고 수백 만 명의 베트남 민간인들이 죽음을 당했다. 시골 사람들은 자기들이 그렇게 죽어야 하는 이유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리 위로 폭탄이 떨어져야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한번은 사회봉사를 위한 청년 학교의 교정에 있는 법당 옆의 내 방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로켓탄이 법당에 날아들어 폭발했다. 나는 거의 죽을 뻔했다. 증오와 분노를 품는다면 스스로를 태워죽이고 마는 법이다. 이해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이해하면 고통을 덜 겪게 될 것이고 불의의 뿌리에 이르는 법을 알게 될 것이다. 부처님은 화살 한 대를 맞으면 아플 엇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런데 그 자리에 화살 한 대를 더 막으면 그 아픔이 백배에 달하게 될 것이다. 불의의 희생자가 화를 낸다면 그 아픔은 백배에 달하게 될 것이다. 몸의 어느 곳이 아프면 호흡을 하면서 이렇게 혼잣말을 해보라. “그냥 몸이 아플 뿐이야.” 그것이 암이라서 곧 죽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면, 고통은 백배에 달하게 될 것이다. 무지에서 비롯된 두려움과 증오는 고통을 심화시킨다. 그래서 만야바라밀을 구원자라고 하는 것이다. 사물을 그 이상이나 이하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보는 법을 알게 되면 살아남을 수 있다.
5 Samyutta Nikaya V, 210.
I love the Vietnamese people, and I tried my best to help them during the war. But I also saw the American boys in Vietnam as victims. I did not look at them with rancor, and I suffered much less. This is the kind of suffering many of us have overcome, and the teaching is born out of that suffering, not from academic studies. I survived for Brother Nhât Tri and for so many others who died in order to bring the message of forgiveness, love, and understanding. I share this so they will not have died in vain.
나는 베트남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래서 전쟁 중에 최선을 다해서 그들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나는 베트남에 왔던 미국 청년들도 희생자로 본다. 적의 없이 그들을 바라보자 고통이 훨씬 덜해졌다.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이겨낸 고통으로 그 가르침은 학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그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다. 내가 살아남아 있는 것은 용서, 사랑, 이해의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죽어간 수많은 사람들과 낫찌를 위해서이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나도 이렇게 그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Please practice deep looking, and you will suffer much less from disease, injustice, or the small pains within you. Deep looking leads to understanding, and understanding always leads to love and acceptance. When your baby is sick, of course you do your best to help him. But you also know that a baby has to be sick a number of times in order to get the immunity he needs. You know that you can survive, too, because you have developed antibodies. Don't worry. "Perfect health" is just an idea. Learn to live in peace with whatever ailments you have. Try to transform them, but don't suffer too much.
깊숙이 들여다보는 수행을 하면 질병, 불의 또는 우리 몸의 소소한 아픔에서 비롯된 고통이 훨씬 줄어들 것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해에 이르게 되고 이해는 반드시 사랑과 수용에 통하게 된다. 아기가 아프면 당연히 아기를 돌보려고 최선을 다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면역력을 갖추려면 아기는 여러 번 아파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도 안 된다. 우리도 항체를 길러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염려할 것은 없다. ‘완벽한 건강’이란 이상에 불과한 것이다. 무슨 병을 가지고 있건 간에 그것과 평화롭게 지내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되 너무 고통스러워할 것까지는 없다.
During his lifetime, the Buddha suffered too. There were plots to compete with him and even to kill him. One time, when he had a wound in his leg and people tried to help him, he said it was only a small wound, and he did his best to minimize the pain. Another time, five hundred of his monks went off to set up an alternative Sangha, and he took it very much in stride. Finally, the difficulties were overcome.
부처님도 생전에 고통을 겪으셨다. 부처님에게 대항하려 하거나 심지어 시해하려는 음모가 여러 번 있었다. 한 번은 발에 상처를 입으셨을 때 사람들이 도우려 하자 부처님은 그저 작은 상처에 불과하다고 하시면서 아픔을 최소화하려고 최선을 다하셨다. 또 한 번은 오 백 명의 비구가 새로운 승가를 세우려고 떠ㅗ나버렸는데, 부처님은 그 상황을 손쉽게 헤쳐 나가셨다. 결국 곤경을 극복하신 것이었다.
The Buddha gave very concrete teachings on how to develop inclusiveness — maitri (love), karuna (compassion), mudita (joy), and upeksha (equanimity).6 If you practice these Four Immeasurable Minds, you will have a huge heart. Because bodhisattvas have great compassion, they have the capacity of receiving, embracing, and transforming. Because they have great understanding, they don't have to suffer. This is a great gift for the world and for the people we love.
부처님은 포용을 기르는 법을 매우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셨는데, 그것은 바로 자(慈, 사랑), 비(悲, 연민), 희(喜, 기쁨), 사(捨, 평정심)이다.(주6) 이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四無量心(사무량심)]을 닦으면 커다란 마음을 갖게 된다. 보살들은 커다란 자비심이 있기 때문에 받아들이고 껴안고 변화시키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 보살들은 커다란 이해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통을 겪을 필요가 없다. 이것은 이 세상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커다란 선물이다.
6 See chap. 22 on the Four Immeasurable Minds.
주6) 네 가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에 관해서는 22장을 보라.
∽
The fourth petal of the flower is virya paramita, the perfection of diligence, energy, or continuous practice. The Buddha said that in the depth of our store consciousness, alayavijñana, there are all kinds of positive and negative seeds —seeds of anger, delusion, and fear, and seeds of understanding, compassion, and forgiveness. Many of these seeds have been transmitted to us by our ancestors. We should learn to recognize every one of these seeds in us in order to practice diligence. If it is a negative seed, the seed of an affliction like anger, fear, jealousy, or discrimination, we should refrain from allowing it to be watered in our daily life. Every time such a seed is watered, it will manifest on the upper level of our consciousness, and we will suffer and make the people we love suffer at the same time. The practice is to refrain from watering the negative seeds in us.
네 번째 꽃잎은 정진바라밀, 즉 부지런함, 힘 또는 끊임없는 수행의 완성이다. 부처님은 장식(藏識), 즉 아뢰야식(阿賴耶識)의 깊은 곳에 분노, 망상과 공포의 씨앗 그리고 이해, 연민과 용서의 씨앗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긍정적인 씨앗과 부정적인 씨앗이 들어있다고 말씀하셨다. 이 씨앗 중 적지 않은 것들이 조상들을 통해 물려받은 것이다. 부지런함을 수행하려면 이 씨앗 하나하나를 인지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것이 부정적인 씨앗, 즉 분노, 공포, 질투 또는 분별 같은 번뇌의 씨앗이라면, 일상생활을 통해 그것에 물을 주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그런 씨앗에 물을 줄 때마다 그것은 의식의 상층부에 떠오르게 될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고통을 겪게 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고통을 겪게 만들 것이다. 이 수행은 우리 안에 있는 부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것을 막는 것이다.
We also recognize the negative seeds in the people we love and try our best not to water them. If we do, they will be very unhappy, and we will be unhappy, also. This is the practice of "selective watering." If you want to be happy, avoid watering your own negative seeds and ask others not to water those seeds in you. Also, avoid watering the negative seeds in others.
또한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 있는 부정적인 씨앗을 인지하고 그것에 물을 주는 일이 없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물을 주게 되면 그들은 불행해 질 것이고 우리 역시 불행해 질 것이다. 이것을 일러 ‘선택적인 물주기’ 수행이라고 한다. 행복해지고자 한다면, 자신의 부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일을 피하고 남들에게도 우리 안에 있는 그건 것들에 물을 주는 일이 없도록 부탁해야 한다. 또한 다른 사람들 속에 있는 부정적인 씨앗에 물을 주는 일도 피해야 한다.
We also try to recognize the positive seeds that are in us and to live our daily life in a way that we can touch them and help them manifest on the upper level of our consciousness, manovijñana. Every time they manifest and stay on the upper level of our consciousness for a while, they grow stronger. If the positive seeds in us grow stronger day and night, we will be happy and we will make the people we love happy. Recognize the positive seeds in the person you love, water those seeds, and he will become much happier. In Plum Village, we practice "flower watering," recognizing the best seeds in others and watering them. Whenever you have time, please water the seeds that need to be watered. It is a wonderful and very pleasant practice of diligence, and it brings immediate results.
우리 안에 있는 긍정적인 씨앗을 인지해서 그것들을 잘 보살핌으로써 그것들이 의식의 상층부에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식으로 일상생활을 하려고 해야 한다. 그것들이 잠시 동안 의식의 상층부에 나타나 머무를 때마다 그것들은 더욱 더 강력해진다. 우리 안에 있는 긍정적인 씨앗들이 밤낮에 걸쳐 더욱 강력해지면, 우리는 행복해 질 것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 속에 있는 긍정적인 씨앗을 인지해서 물을 주면 그 사람은 훨씬 더 행복해 질 것이다. 플럼 빌리지에서는 ‘꽃에 물주기’라는 수행을 하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 안에 있는 최상의 씨앗을 인지해서 물을 주는 것이다. 시간이 날 때마다 물을 줄 필요가 있는 씨앗에 물을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은 훌륭하고도 매우 유쾌한 부지런함의 수행으로 즉각적인 결과가 뒤따른다.
Imagine a circle divided in two. Below is the store consciousness and above is mind consciousness. All mental formations lie deep down in our store consciousness. Every seed in our store consciousness can be touched and manifests itself on the upper level, namely our mind consciousness. Continued practice means trying our best not to allow the negative seeds in our store consciousness to be touched in our daily life, not to give them a chance to manifest themselves. The seeds of anger, discrimination, despair, jealousy, and craving are all there. We do what we can to prevent them from coming up. We tell the people we live with,"If you truly love me, don't water these seeds in me. It is not good for my health or yours." We have to recognize the kinds of seeds not to be watered. If it happens that a negative seed, the seed of an affliction, is watered and manifests itself, we do everything in our power to embrace it with our mindfulness and help it return to where it came from. The longer such seeds stay in our mind consciousness, the stronger they become.
위아래로 나누어진 원을 상상해 보라. 아래쪽은 장식(藏識), 즉 아뢰야식(阿賴耶識)이고 위쪽은 의식(意識)이라고 해보자. 모든 정신적 형성은 장식(藏識)의 깊은 곳에 들어있다. 장식 안에 있는 모든 씨앗은 그것을 건드릴 때 위쪽, 말하자면 의식에 나타나게 된다. 수행을 계속한다고 하는 것은 장식 안에 있는 부정적인 씨앗이 일상생활을 통해 자극 받는 일이 없도록 그리고 그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얻지 못하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뜻이다. 분노, 구별, 실망, 질투와 갈망의 씨앗이 보두 거기에 있다. 우리는 그것들이 싹을 틔우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함께 사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보자.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내 안에 있는 이런 씨앗에 물을 주지 마세요. 그렇게 하는 것은 나나 당신의 건강을 위해서 좋지 못한 일이예요.” 우리는 물을 줘서는 안 되는 종류의 씨앗을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 혹시라도 부정적인 씨앗, 즉 번뇌의 씨앗에 물을 주는 바람에 그것이 나타나는 일이 벌어지면, 있는 힘을 다해 알아차림을 통해서 그것을 껴안음으로써 그것이 본래 있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러한 씨앗이 의식에 오래 머물수록 그것들은 더욱 더 강력해질 테니까 말이다.
The Buddha suggested a practice called "changing the peg." When a peg of wood is not the right size or is rotting or in disrepair, a carpenter will replace it by putting another peg on exactly the same spot and driving the new peg into the old one. If you have a mental formation arising that you consider to be unwholesome, one way to practice is to invite another mental formation to replace it. Many seeds in your store consciousness are wholesome and beautiful. Just breathe in and out and invite one of them to come up, and the other seed will go down. This is called "changing the peg."
부처님은 소위 ‘말뚝 갈아 끼우기’라는 수행법을 가르쳐주셨다. 말뚝이 크기가 적당하지 않거나 썩었거나 파손되었다면 목수는 옛것이 있던 바로 그 자리에 대신 새로운 말뚝을 박아 넣을 것이다. 건전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지는 정신적 형성이 일어날 때 할 수 있는 수행의 하나는 다른 정신적 형성을 불러일으켜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다. 장식 속에는 건전하고 아름다운 씨앗들이 무척 많다. 다만 호흡을 하면서 그 중 하나를 불러일으키면 다른 씨앗은 잠잠해질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말뚝 갈아 끼우기’라고 한다.
The third practice is to touch as many positive seeds in your store consciousness as you can so that they will manifest in your mind consciousness. On a television set, if you want a certain program, you push the button to bring you that program. Invite only pleasant seeds to come up and sit in the living room of your consciousness. Never invite a guest who brings you sorrow and affliction. And tell your friends, "If you love me, please water the wholesome seeds in me every day." One wonderful seed is mindfulness. Mindfulness is the Buddha in us. Use every opportunity to touch that seed and help it to manifest on the upper level of your consciousness.
세 번째 수행은 긍정적인 씨앗이 의식에 나타날 수 있도록 장식 속에 있는 긍정적인 씨앗을 될 수 있도록 많이 자극하는 것이다. TV에서 원하는 프로그램을 보려고 한다면, 그 프로그램에 해당되는 단추를 눌러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의식이라는 거실에 앉아 유쾌한 느낌을 주는 씨앗만 불러들여야 하는 것이다. 슬픔과 고뇌를 가져다주는 손님을 초대해서는 절대 안 된다. 친구에게 이렇게 말해보라. “날 사랑한다면, 매일 내 안에 있는 건전한 씨앗에 물을 주렴.” 훌륭한 씨앗 중의 하나는 알아차림이다. 알아차림은 우리 안에 있는 부처이다. 기회가 잇을 때마다 그 씨앗을 자극해서 의식의 상층부에 나타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The fourth practice is to keep a wholesome seed as long as possible once it has manifested. If mindfulness is maintained for fifteen minutes, the seed of mindfulness will be strengthened, and the next time you need the energy of mindfulness, it will be easier to bring up. It is very important to help the seeds of mindfulness, forgiveness, and compassion to grow, and the way to do this is to help them be present in your mind consciousness as long as possible. This is called transformation at the base — ashraya paravritti. This is the true meaning of virya paramita, the perfection of diligence.
네 번째 수행은 일단 나타난 건전한 씨앗을 될 수 있는 한 오래 지키는 것이다. 15분 동안 알아차림이 유지되면, 알아차림의 씨앗은 더욱 더 강력해져서 다음번에 알아차림의 힘이 필요할 때에 그것은 훨씬 쉽게 나타날 것이다. 알아차림, 용서와 연민의 씨앗이 자라날 수 있게 돕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그것들을 의식에 가능한 오랫동안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근본적인 전환’이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정진바라밀의 참뜻, 즉 부지런함의 완성이다.
∽
The fifth crossing-over is dhyana paramita, the perfection of meditation. Dhyana is pronounced zen in Japanese, chan in Chinese, thien in Vietnamese, and son in Korean. Dhyana, or meditation, consists of two aspects.7 The first is stopping (shamatha). We run our whole life chasing after one idea of happiness or another. Stopping is to stop our running, our forgetfulness, our being caught in the past or the future. We come home to the present moment, where life is available. The present moment contains every moment. Here we can touch our ancestors, our children, and their children, even if they have not been born yet. Shamatha is the practice of calming our body and emotions through the practice of mindful breathing, mindful walking, and mindful sitting. Shamatha is also the practice of concentrating, so we can live deeply each moment of our life and touch the deepest level of our being.
다섯 번째 건너가기는 선정바라밀, 즉 명상의 완성이다. 선정, 즉 디야나(dhyana)는 일본어로는 젠(zen)이라 읽고, 중국어로는 찬(chan), 베트남어로는 티엔(thien), 한국어로는 선(son)이라고 읽는다. 선정 또는 명상은 두 가지 양상으로 이루어져 있다.(주7) 첫 번째 것은 멈춤[止(지), shamatha]이다. 우리는 평생 동안 행복이나 다른 이상을 뒤쫓아 뛰어다닌다. 멈춤은 그렇게 뛰어다니는 일과 부주의, 과거나 미래에 사로잡히는 일을 멈추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집에 있다. 지금 이 순간에는 모든 순간이 들어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조상과 아이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설령 그들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멈춤은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 걷기, 앉기 수행을 통해서 심신을 안정시키는 수행이다. 멈춤은 또한 집중하는 수행이기도 한데, 그렇게 함으로써 인생의 순간순간을 철저하게 살아갈 수 있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부분을 접할 수 있게 된다.
7 See chap. 6.
주7) 6장을 보라.
The second aspect of meditation is looking deeply (vipashyana) to see the true nature of things. You look into the person you love and find out what kinds of suffering or difficulty she has within herself and what aspirations she holds. Understanding is a great gift, but your daily life conducted in mindfulness is also a great gift. Doing everything mindfully is the practice of meditation, as mindfulness always nourishes concentration and understanding.
명상의 두 번째 양상은 사물의 참된 본질을 간파하기 위해서 깊숙이 들여다보는 것[觀(관), vipashyana]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그 사람이 어떤 곤란 또는 고통을 겪고 있는지 그리고 무슨 바람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된다. 이해는 커다란 선물이고, 알아차리는 일상생활 역시 커다란 선물이다. 알아차림은 언제나 집중과 이해를 강화시켜주므로 만사에 알아차리는 것이 바로 명상 수행이다.
∽
The sixth petal of the flower is prajña paramita, the perfection of understanding. This is the highest kind of understanding, free from all knowledge, concepts, ideas, and views. Prajña is the substance of Buddhahood in us. It is the kind of understanding that has the power to carry us to the other shore of freedom, emancipation, and peace. In Mahayana Buddhism, prajña paramita is described as the Mother of All Buddhas. Everything that is good, beautiful, and true is born from our mother, prajña paramita. She is in us; we only need to touch her to help her manifest herself. Right View is prajña paramita.
여섯 번째 꽃잎은 반야바라밀, 즉 지혜의 완성이다. 이 지혜는 최상의 것으로 모든 지식, 개념, 관념, 견해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반야는 우리 안에 있는 불성(佛性)이다. 그것은 우리를 자유, 해방, 평화로 이루어진 피안으로 건네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깨달음이다. 대승불교에서 반야바라밀은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로 그려지고 있다. 선하고 아름답고 진실한 모든 것은 모두 반야바라밀이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것이다. 그 어머니는 우리 안에 있다. 그 어머니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돕고자 한다면 어머니를 살짝 어루만지기만 하면 된다. 정견(正見)이 곧 반야바라밀이다.
There is a large literature on prajña paramita, and the Heart Sutra is one of the shorter discourses in that collection. The Diamond Sutra and the Ashtasahasrika Prajñaparamita (Discourse in 8,000 Verses) are among the earliest discourses in that collection. Prajña paramita is the wisdom of nondiscrimination.
반야바라밀에 관해서는 방대한 문헌이 있는데, 반야심경은 그 문헌 중에서 짧은 경전에 속한다. 금강경과 팔천송반야(八千頌般若)는 그 문헌 중에서 가장 초기의 경전군에 속한다. 반야바라밀은 곧 무분별지(無分別智)이다.
If you look deeply into the person you love, you'll be able to understand her suffering, her difficulties, and also her deepest aspirations. And out of that understanding, real love will be possible. When someone is able to understand us, we feel very happy. If we can offer understanding to someone, that is true love. The one who receives our understanding will bloom like a flower, and we will be rewarded at the same time. Understanding is the fruit of the practice. Looking deeply means to be there, to be mindful, to be concentrated. Looking deeply into any object, understanding will flower. The teaching of the Buddha is to help us understand reality deeply.
사랑하는 사람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사람이 겪고 있는 고통과 곤란은 물론 가장 은밀한 바람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런 이해가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우리를 이해해 줄 때 우리는 아주 행복한 느낌을 갖게 된다. 우리가 다른 이를 이해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은 참된 사랑이다. 이해를 받는 사람은 꽃처럼 피어나게 될 것이고 동시에 우리도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해는 수행의 결과물이다. 깊숙이 들여다본다는 것은 그곳에 있는 것, 알아차리는 것, 집중하는 것을 뜻한다. 어떤 대상이라 하더라도 깊숙이 들여다보면 이해심이 피어날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실재를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Let us look at a wave on the surface of the ocean. A wave is a wave. It has a beginning and an end. It might be high or low, more or less beautiful than other waves. But a wave is, at the same time, water. Water is the ground of being of the wave. It is important that a wave knows that she is water, and not just a wave. We, too, live our life as an individual. We believe that we have a beginning and an end, that we are separate from other living beings. That is why the Buddha advised us to look more deeply in order to touch the ground of our being, which is nirvana. Everything bears deeply the nature of nirvana. Everything has been "nirvanized." That is the teaching of the Lotus Sutra. We look deeply, and we touch the suchness of reality. Looking deeply into a pebble, flower, or our own joy, peace, sorrow, or fear, we touch the ultimate dimension of our being, and that dimension will reveal to us that the ground of our being has the nature of no-birth and no-death.
바다의 표면에 넘실대는 파도를 한번 보자. 파도는 파도이다. 파도에는 시작과 끝이 있다. 파도는 높은 것도 있고 낮은 것도 있으며 멋있게 보이는 것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것도 있다. 그런데 파도는 동시에 바다이기도 하다. 바다는 파도가 존재하기 위한 근거이다. 파도는 자기가 그저 하나의 파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바다라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 역시 개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각자의 삶에는 시작과 끝이 있으며 우리는 다른 생물과 분리되어 있다고 믿고 있다. 바로 그 때문에 부처님은 우리 존재의 근거, 즉 열반을 접하려면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볼 것을 권하셨던 것이다. 만물은 깊숙한 곳에 열반이라는 본질을 품고 있다. 만물은 ‘열반으로 귀결된다.’ 이것이 법화경의 가르침이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우리 존재의 궁극적 차원을 접하게 되는데, 그 차원은 우리 존재의 근거가 태어나지도 죽지도 않는[不生不死(불생불사)] 본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줄 것이다.
We don't have to attain nirvana, because we ourselves are always dwelling in nirvana. The wave does not have to look for water. It already is water. We are one with the ground of our being. Once the wave realizes that she is water, all her fear vanishes. Once we touch the ground of our being, once we touch God or nirvana, we also receive the gift of non-fear. Non-fear is the basis of true happiness. The greatest gift we can offer others is our non-fear. Living deeply every moment of our life, touching the deepest level of our being, this is the practice of prajña paramita. Prajña paramita is crossing over by understanding, by insight.
우리는 따로 열반에 이르려 할 필요는 없는데, 그 까닭은 우리는 언제나 열반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파도는 바다를 따로 구할 필요가 없다. 파도는 이미 바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존재의 근거와 하나이다. 파도는 일단 자신이 바다임을 알게 되면 모든 두려움이 사라진다. 일단 우리 존재의 근거를 접하게 되면, 즉 일단 신이나 열반을 접하게 되면 우리도 두려움 없음이라는 선물을 받게 된다. 두려운 없음은 참된 행복의 토대이다.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커다란 선물은 우리의 두려움 없음이다. 삶의 각 순간을 철저하게 살아가는 것 그리고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층을 접하는 것, 이것이 바로 만야바라밀 수행이다. 반야바라밀은 깨달음, 즉 지혜를 통해 피안으로 건너가는 것이다.
Perfect understanding is present in all the other perfections. Perfect understanding is like a container. If the container is not baked well in the kiln, there will be cracks, and the liquid in it will flow out. Prajña paramita is the mother ofall the paramitas, the Mother of All Buddhas. Prajña paramita is like the wings of the bird that can carry it anywhere. Without Right Understanding, none of the other paramitas can go very far.
완벽한 지혜는 다른 모든 완성, 즉 바라밀 속에 들어있다. 완벽한 지혜는 그릇과도 같은 것이다. 그릇이 가마 속에서 잘 구워지지 않았다면 그 그릇은 금이 갈 것이고 그 안에 들어있던 물은 새버릴 것이다. 반야바라밀은 모든 바라밀의 어머니, 즉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다. 반야바라밀은 어느 곳이건 간에 날아갈 수 있게 해주는 새의 날개와도 같은 것이다. 올바른 지혜[正見(정견)]가 없으면 그 어느 바라밀도 훌륭한 성과를 올릴 수 없다.
∽
These are the practices of the Six Paramitas offered by the Buddha. Each of the six contains the other five. Understanding is giving, meditation is giving, continued practice is giving, inclusiveness is giving, and mindfulness training is giving. If you practice giving deeply, you are also practicing understanding, meditation, and so on. In the same light, we see that giving is mindfulness training, understanding is mindfulness training, meditation is mindfulness training, continued practice is mindfulness training, and inclusiveness is mindfulness training. If you practice one paramita deeply, you practice all six. When there is understanding and insight, meditation will be true meditation, continued practice will be true continued practice, inclusiveness will be true inclusiveness, mindfulness training will be true mindfulness training, and giving will be true giving. Understanding increases the quality of the other five practices.
지금까지 말한 것들이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6바라밀 수행이다. 여섯 가지 하나하나에는 나머지 다섯 가지가 들어있다. 지혜는 베푸는 것이고, 명상은 베푸는 것이고, 끊임없는 수행은 베푸는 것이고, 포용은 베푸는 것이고 알아차림 훈련도 베푸는 것이다. 철저하게 베푼다면, 그것은 곧 지혜와 명상 등등을 수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와 마찬가지로 베푸는 것은 알아차림 훈련이고, 지혜는 알아차림 훈련이고, 명상은 알아차림 훈련이며, 포용도 알아차림 훈련임을 알 수 있다. 한 가지 바라밀을 철저하게 수행하면 여섯 가지 바라밀을 모두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지혜와 통찰이 있을 때 명상은 참된 명상이 되고, 끊임없는 수행은 참된 끊임없는 수행이 되며 포용은 참된 포용이 되고, 알아차림은 참된 알아차림이 되고 베푸는 것도 참된 베풂이 된다. 이렇게 지혜는 나머지 다섯 가지 수행의 질을 높여준다.
Look into your situation and see how rich you are inside. See that what you have in the present moment is a gift. Without waiting any longer, begin to practice right away. The moment you begin to practice, you'll feel happy right away. The Dharma is not a matter of time. Come and see for yourself. The Dharma can transform your life.
자기가 처한 상황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자기가 안으로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바로 선물임을 알아차려야 한다. 따라서 더 이상 기다리지 말고 당장 수행을 시작해야 한다. 수행을 시작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행복해질 것이다. 불법(佛法)은 시간을 문제 삼지 않는다. 직접 와서 확인해 보라. 불법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When you are caught in your sorrow, your suffering, your depression, your anger, or your fear, don't stay on the shore of suffering. Step over to the shore of freedom, non-fear, and non-anger. Just practice mindful breathing, mindful walking, and deep looking, and you will step onto the shore of freedom and well-being. You don't have to practice five, ten, or twenty years to be able to cross over to the other shore. You can do it right now.
슬픔, 고통, 우울, 분노 또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더 이상 그 고통의 차안(此岸)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두려움도 없고 분노도 없는 자유로운 피안(彼岸)으로 건너가야 한다. 마음을 집중하는 호흡과 걷기, 깊숙이 들여다보기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자유와 행복이 가득한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다. 피안으로 건너갈 수 있는 능력을 얻기 위해서 5년, 10년, 20년을 수행할 필요는 없다. 지금 당장 건너갈 수 있다.
첫댓글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