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0~90년대 조선학교에 대한 일본사회의 인지, 각 방면으로의 차별시정
JR통학정기권 할인율 차별의 시정
1970년대말부터 80년대에 걸쳐 일본정부는 외부의 압력에 의해 국제인권규약과 난민조약을 비준하고 인권상황의 개선에 마지못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특별영주권> 취득이나 각종사회보장에 따른 국적조항의 철폐 등 재일조선인의 법적지위도 일정정도 향상되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에 걸쳐서 여러가지 분야에서 조선학교에 대한 차별적 처우가 시정되어가고 있었다.
80년대 후반에 부상한 것이 JR통학 정기권 할인율 차별을 둘러싼 문제였다. 같은 학생이면서도 왜 조선학교 학생의 통학정기권은 일본학교보다 비싼 것일까. 구 국철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었던 이런 격차의 시정을 요구하는 운동은 국철이 분할, 민영화되어 JR이 탄생된 87년, 치바 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회로부터 시작되었다.
JR의 학생 할인 운임제가 마련된 것은 국철시대인 6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학교교육법>에 기초한 운임이 설정된 결과 1조교와 그외의 학교 사이에 격차가 생긴 것이다. 통학정기운임은 어른을 100으로 했을 때 고교생은 그 10%, 중학생은 20%, 소학생(초등학생)은 65%가 할인되었지만 당국은 조선학교의 학생에 대해서는 12세 이하를 어른 취급하여 할인율 제로, 그 미만의 아이들은 50% 할인했던 것이다.
87년 5월26일, 치바조선초중급학교 어머니회 대표가 학교 관계자와 함께 JR신케미가와 역의 역장에게 시정을 요청했다. 그러나 JR측으로부터 돌아온 회신은 “조선학교는 1조교가 아니므로 같은 할인율은 적용할 수 없다” 라는 것이었다. 그 후에도 보호자들은 현 내의 주요역에 요청을 계속했으나 그 당시에는 성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치바로부터 날아온 목소리를 받아 이 운동을 계속한 것은 가나가와 어머니회 어머니들이었다. 현내의 각 역의 운임 차액을 조사하여, 자료를 만들어 정리하고 그것을 각방면에 배포했다. 이렇게 문제를 가시화 시켜 해결에 이르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가나가와의 접근법이 이 운동에 커다란 도움이 되어 JR노선의 이용율이 높고 원거리 통학 학생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지역을 중심으로 운동이 일본전국에서 일어나기 시작했다.
92년에는 히로시마 어머니들이 5만 5,000명의 서명을 받았으며, 94년에는 도쿄 어머니들이 11만 6,000명의 서명을 제출하였다. 그 외에도 오사카, 교토, 와까야마, 아이찌, 군마에서도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JR본사와 지사에 요청활동도 매일같이 벌였다. 모은 서명용지의 총 수는 60만명을 넘어섰다. 국회의원, 지방자치체의 수장, JR총련(총연맹), 시민단체 등 일본사회 전체의 지지 지원도 한 몫을 했다.
94년에 드디어 이 문제는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다.
2월 21일, JR 그룹 6개사는 일부의 전수학교와 외국인학교 학생의 통학정기권 운임 할인율을 일본학교와 동등하게 할 것을 결정한다. 같은 해 4월부터 이 할인율은 전국 전수학교와 각종학교 초중고생에게 적용되었다. 조선학교 학생들도 마찬가지로 적용되었다.
스포츠계에서도 같은 무대에 서다 _ 조선고교의 고체련(고등학교 체육연맹) 가맹
조선고교는 긴 시간 동안 일본 고교 스포츠의 총본산인 전국고등학교체육연맹(고체련)이 주최하는 모든 공식시합에 출전하지 못하고 있었다. 고체련이 가맹자격을 1조교로 한정했고 각경기 단체도 그것을 그대로 따라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고교의 고체련 가맹문제는 1990년 5월, 오사카조선고급학교의 여자 배구부를 둘러싸고 일어난 하나의 사건이 발단이 되어 주목받게 되었다.
같은 해 3월 이 배구부는 오사카부 고체련에 신규가맹을 인정받아, 오사카부 춘계대회에 참가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이후 1차 예선을 돌파한 이 팀에게 고체련이 “조선고교는 고체련에 가맹할 수 없다. 본선에도 출장할 수 없다”는 연락이 오게 된다. 일단 참가를 인정받아 예선에서 1승을 올리기까지 했는데 도중에 그만두게 된 것이다.
같은 해 6월부터 8월에 걸쳐 전국의 조선고교 12개교가 각 도도부현 고체련에, 조선고교 교장회가 중앙 고체련에 각각 가맹 신청서를 제출했다.
“우리는 일본에 사는 같은 고교생입니다. 우리는 억울한 심정이지만 후배들에게는 이러한 상처를 주고 싶지 않습니다.”
오사카 조고 배구부 주장 조일순씨 (72년생 당시 고3)은 고체련의 간부들 앞에 이렇게 호소했다.
조선고교의 고체련 가맹을 향한 움직임은 전국으로 번지게 된다.
“오사카에서 돌파구를 열자. 우선은 여론에 호소하자. 매스컴에 호소하여 지지해주는 일본학교 교원들도 움직이게 했습니다. 오사카 고체련에 몇번이나 찾아갔어요. 이사장에게 부탁하니 “스포츠에 국경은 없다. 함께 합시다” 하고 말해줘서 아주 기뻤어요”
당시 오사카조선고교의 부교장으로서 이 운동에 종사한 유기봉 씨(41년생)의 회고다.
같은 해 11월에는 오사카부 내의 대회에 한정하여 조선고교 참가를 인정하게 되었고, 도쿄와 효고도 뒤를 이었다. 지역 차원에서는 점점 문호가 개방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11월의 전국고체련 이사회는 조선고교의 가맹과 대회참가 둘다 종래와 같이 인정하지 않는다고 결정한다. 이에 대해서 도쿄, 이바라기 양 조선학교 축구부 감독이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부당한 차별”이라며 일본변호사 연합회(일변연)에 인권침해 구제 신청을 하게 되었다. 92년 10월 일변연은 조선고교의 가맹을 인정하고 각종경기에 출장할 수 있도록 지도,조치를 요구하는 권고를 문부성에, 요망서를 고체련에 제출했다. 한편, 91년 3월에는 고체련에 앞서 고야련(일본고교야구연맹)이 외국인학교에 문호를 개방했다.
운동은 그 후에도 활발히 이어졌다. 조선고교생의 서명운동에 일본학교 학생이 협력해 준 것은 물론, 일교조(일본교직원노조)는 독자적으로 2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했다. 이렇게 내외의 여론에 밀린 고체련은 93년 5월 이사회에서 조선학교를 포함한 전수, 각종학교를 전국고교종합체육대회(인터하이)에 참가할 수있도록 승인하고, 같은 해 11월의 이사회에서 정식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체련 가맹은 인정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특별조치”로서의 취급일 뿐이었다. (지방 차원에서는 94년 히로시마현 고체련이 독자적으로 히로시마조선고교의 <준가맹>을 인정하고 있다)
조선학교가 공식대회에 참가하게 된 <인터하이> 원년인 94년에는 권투 종목에 12명의 조선고교 선수가 출장하였고, 96년까지 고체련 주최의 전경기대회에 참가가 가능하게 되었으며 현재까지 축구, 럭비 등 많은 종목에서 조선고교 선수가 좋은 성적을 얻었다. 한편 중체련(중학체육연맹)도 97년부터 외국인학교의 전국대회 참가를 인정했다.
한편, 한반도 정세가 긴장될 때 마다 조선학교 학생에 대한 혐오발언이나 폭력이 빈발하게 일어나 사회적 문제가 된 것도 이 시기였다. 94년 북한의 핵개발 의혹을 둘러싸고 정세가 긴박하게 돌아갈 때 등학교하는 조선학교 여자 학생의 치마저고리 제복이 칼로 찢기는 사건이 일본 각지에서 발생한다. 98년에도 북의 인공위성 발사를 둘러싼 <대포동 소동>으로 조선학교 학생에 대한 폭언, 학교에 걸려 오는 무언, 협박 전화 등이 이어졌다.
(다음 이야기는 2,000년대 들어서의 민족교육 차별극복의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