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절기의 유래
인간이 월력(月曆)을 만든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계절의 변화를 알기 위해서였다.
특히 농경사회에서는 계절의 변화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농사를 짓기 위하여 씨를 뿌리고 추수를 하였기에
가장 좋은 날씨를 알아야 했던 것이다. 음력의 24절기도 바로 이런 연유에 근거하고 있음이다.
이러한 24절기는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에 각각 여섯 개 씩 자리 잡고 있으며, 각각의 절기는 앞뒤 절기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가지며 1년을 구성하고 있다.
24절기는 태양의 운동에 근거한 것으로 춘분점(春分點, 태양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해 적도를 통과하는 점)
으로부터 태양이 움직이는 길인 황도를 따라 동쪽으로 15˚ 간격으로 나누어 24점을 정하였을 때, 태양이 각
점을 지나는 시기를 말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천구 상에서 태양의 위치가 황도가 0˚ 일 때 춘분,
15˚ 일 때 청명,... 300˚ 일 때 대한으로 한다는 것이다.(24×15=360)
[조선 시대의 천문도 황도남북항성도(黃道南北恒星圖)]
절기는 이처럼 음력을 쓰는 농경사회에서 필요에 따라 양력과 관계없이 만들었지만, 태양의 운동을 바탕으로
한 탓에 결과적으로 양력의 날짜와 일치하게 된다.
실제로 달력을 놓고 보면 24절기는 양력으로 매월 4∼8일 사이와 19∼23일 사이에 온다.
이처럼 절기와 절기 사이는 대부분 15일이며, 경우에 따라 14일이나 16일이 되기도 한다.
이는 지구의 공전 궤도가 타원형이어서 태양을 15도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똑같지 않기 때문이다.
■달력 문화의 확산
음력은 원래 중국 주(周)나라 때 화북지방의 기상상태에 따라 제작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인데, 이러한
중국력법은 달의 위상변화를 기준으로 하여 역일(曆日)을 정해 나갔기 때문에 오차가 존재했다.
달의 운동에 근거하여 만들어졌기 때문에 달의 변화는 잘 나타내 주지만 태양의 움직임은 잘 나타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계절의 변화는 태양의 운동에 의하여 결정되므로 음력 날짜와 계절의 변화는 잘
일치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음력에서는 계절의 변화, 즉 입춘, 우수, 경칩 같이 태양의 운동을 표시하여
주는 24절기를 도입하여 같이 사용했는데, 이것을 일컬어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이라 한다.
우리가 흔히 음력陰曆 이라 말하는 것은 원래 '太陰太陽曆'의 준말로서, 여기서 '陰'은 '달'을 뜻하고
'陽'은 태양을 뜻한다. 즉 달(태음)과 해(태양)의 운동을 모두 고려하여 주는 역법이란 뜻이다.
이러한 절기는 대략 15일 간격으로 변하고 그것에 따라 농사의 처음과 끝을 모두 아우르는 스케줄이 정해지기
때문에, 실제 농경사회의 농민들에게는 1년의 역법보다 더 큰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으며, 시간과 계절에
순응하면서 생활했던 것이다. 이처럼 농사가 중요했으니 국가에서도 그것을 도외시 할 수 없었기에 월력과
관련된 여러 기록들이 문헌에 자주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달력의 유래를 살펴보면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백제(百濟)가 중국에서 들여온
송(宋)나라의 원가력(元嘉曆)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조선에 들어와 세종대에 일종의 태음력인
칠정산 내편(七政算內篇)과 외편(外篇)의 역법을 만들었는데, 칠정(七政)이란 역목(曆目), 태양(太陽),
태음(太陰), 중성(中星), 교식(交食), 오성(五星), 사여성(四餘星)의 7개 천문을 일컫는 것이다.
실제의 달력을 사용한 것은 조선조 효종(孝宗) 4년(1653년)에 청(淸)나라에서 수입된 서양천문학에
영향 받은 시헌력(時憲曆)을 채용한 때부터이고, 현재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태양력(太陽曆:양력)은
고종(高宗) 32년(1895년)이 시초라고 전해진다. 이러한 기록들을 살펴보고 있노라면 날짜 관념에 대한
조상들의 시행착오가 장구한 세월을 이어 오며 차근차근 발전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다.
■24절기의 유래와 세시풍속
입춘에서 곡우까지 주로 봄철에 해당되는데, 입춘, 우수, 경칩, 춘분, 청명, 한식, 곡우 등의 절기가
포함되어 있다. 과거 농경사회에서는 농사일을 준비하고 씨를 뿌리는 계절이었는데, 이를 나타내는 날도 있었다.
식목일은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한 677년(문무왕 17) 2월 25일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조선 성종이 세자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동대문 밖의 선농단에 나아가 제사를 지내고, 왕실의
의례나 제례에 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임금이 농사를 짓던 토지를 직접 논갈이란 날인 1343년(성종 24년)
3월 10일에 해당되는 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