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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복음의 의미 안에 들어있는 0과 1이라는 디지털 기호를 코드로 성경말씀을 풀어내는
태승철의 오늘의 번제 <콜롬부스>의 줄거리:
콜롬부스가 세척의 배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의 헤라클레스 기둥을 지나 항해해 가던 바다가 검은바다로 불리었던 대서양입니다. 저 검은바다 어딘가에 지구의 끝인 절벽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 지구의 끝을 넘어 신대륙이 있을 것으로 믿었던 콜롬부스의 믿음은 그대로 기독교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믿는 사람은 누구나 또 하나의 콜롬부스여야 합니다.
콜롬부스
(막11:1-10)
1. 그들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와서 감람 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을 때에 예수께서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2.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3.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4. 제자들이 가서 본즉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는지라 그것을 푸니
5. 거기 서 있는 사람 중 어떤 이들이 이르되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하매
6.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7. 나귀 새끼를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어 놓으매 예수께서 타시니
8.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또 다른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를 길에 펴며
9.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10.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콜럼버스>라는 제목의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여러분, 다 아시는 대로 1492년에 스페인의 여왕 이사벨라가 콜럼버스의 후원자가 되어서 콜럼버스에게 배 세 척과 선원 88명을 제공을 하게 됩니다.
니나 호, 핀타 호, 그리고 산타마리아 호, 이 배 세 척을 끌고 스페인에서 출발해서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갈 때, 이 배에 달았던 이사벨라 여왕의 기(旗)가 있습니다.
그 깃발에 뭐라고 쓰여 있었는가 하면 라틴어로 ‘네(Ne) 플루스(Plus) 울트라(Ultra)’ 영어로 번역하면 ‘no more ahead’ 라고 하는 말입니다.
무슨 뜻인가 하면 ‘더 이상 앞으로 나가서는 안 된다’는 얘깁니다.
‘no more ahead’, 더 이상의 땅이 존재하지 않는다, ‘ne plus ultra’
그러면 이사벨라 여왕의 그 깃발에 왜 이러한 모토가 쓰여 있었겠습니까?
이 말은 ‘이사벨라 여왕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땅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no more ahead, 더 이상 나가서 발견할 땅이 없다, 이사벨라 여왕의 통치력이 세상 끝까지 지배한다.’
스페인의 여왕이 이러한 생각을 할 수 있었던 이유가 뭐겠습니까?
왜냐하면 스페인의 서쪽 끝과 아프리카의 북쪽 끝이 거의 맞닿을 만큼 가까운 해협이 지브롤터 해협입니다.
이 지브롤터 해협은 아프리카 북부와 유럽의 남부, 그리고 지금의 터키가 있는 근동으로 둘러싸여 있는 지중해와 대서양의 경계가 됩니다.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는가 하면 이 지중해의 서쪽 끝인 지브롤터 해협, 불과 스페인과 북 아프리카와의 간격이 13km밖에 안 되는 지역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해협을 빠져나와 대서양으로 나가게 되면 대서양 어딘가에는 지구의 절벽이 있다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절벽이 있기 때문에 밑도 끝도 알 수 없는 곳으로 떨어져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 대서양을 ‘검은 바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니까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가면 안 되는 거예요.
지브롤터 해협을 넘어서 대서양으로 들어가면 반드시 지구의 끝인 절벽에 다다르게 되고, 거기서 떨어져 죽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고 돌아와서 이사벨라 여왕에게 ‘우리가 no more ahead, 더 이상 땅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검은 바다라고 불렀던 대서양을 서쪽으로 서쪽으로 항해하다 보니까 새로운 땅이 거기에 금은보화가 가득한 땅이 있었습니다.’라고 보고하자 이사벨라 여왕이 자기의 깃발에서 ‘Ne(영어의 no)’자를 빼버립니다.
그래서 ‘Plus Ultra, more ahead, 앞으로 더 전진하자, 새로운 땅이 있다’ 그런 뜻으로 more ahead로 깃발을 바꿨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뭡니까?
모든 세상 사람들은 ‘Ne Plus Ultra’ 'no more ahead',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심지어는 기독교인조차도 예수님 믿고 산다고 하는 것은 이 세상 밖에는 다른 세상이 없기 때문에 이 세상 안에서 살면서 다른 사람처럼 직장 구하고 결혼하고 누가 으뜸이 되느냐 이런 경쟁이 지배하는 이 세상에서 그냥 살 수밖에 없다고, 다른 세상은 없다고 생각하고 예수를 믿어도 이 세상 안에 머물면서 믿는 거예요.
마치 no more ahead라고 하는 모토 아래서 지중해를 중심으로 한 세계 말고는 다른 세계가 없는 줄로 알고 살았던 사람들처럼 아메리카 대륙이 없는 걸로 알고 살았던 것처럼 그렇게 예수를 지금 이 구시대에 속해 있는 자로서 믿으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거 안 된다는 거예요.
예수 믿는다는 것은 지금 눈에 보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살면서 예수를 믿는 게 아닙니다.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 바깥에 있는 신대륙을 발견해내고 살아가는 게 예수 믿는 거예요.
똑같이 이 세상에 살고 있어보여도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8장에서 빌라도에게 재판을 받으시면서 빌라도와 대화를 하시는 가운데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다, 만약에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여기서 이 세상, 내가 직업을 구해야 되고, 돈을 많이 벌어야 되고, 높아져야 되고, 권력을 가져야 되고, 일등 해야 되고… 하는 그런 부담과 책임을 안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속해 있는 게 아니라는 얘깁니다.
만약에 그런 것이었다고 그러면 ‘나의 부하들이 유대인들이 나를 넘겨주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나라 왕을 고구려가 잡아가려고 할 때, 당나라 사람들이 고구려 사람들에게 저항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나라에 속했다는 게 그 말이에요.
우리가 미국을 공격하려고 하면 미국에서 방어를 하지 않습니까?
이런 나라에 속한 것이라면 치고 박고 싸울 필요가 있는데 예수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싸울 필요가 없다는 얘기에요.
그 이야기를 예루살렘 입성을 통해 해주시는 겁니다.
새끼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내가 왕이다’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천명하시는 사건입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길이 바로 십자가사건이라는 거예요.
십자가사건을 일으키시기 전에,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모든 자들에게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 무엇과 같은가 하면,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향하여 항해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십자가를 받아들이게 될 때,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이미 신대륙을 살게 될 것이고, 나귀새끼를 타고 입성하는 왕이 다스리는 그 새로운 나라, 새 왕국에서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신 사건이 예루살렘 입성 사건이라는 얘깁니다.
이런 얘기에요.
보통 왕은 말을 탑니다.
특히 정복하고 승리를 이끌어낸 왕이 타는 말이 백마에요.
이렇게 말을 타든지 아니면 말이 끄는 마차, 황금마차를 타든지 그래서 이사벨라 여왕의 깃발처럼 깃발을 달고 창검을 번쩍거리면서 보무당당하게 위용을 나타내면서 걸어가는 게 이 세상 나라의 왕입니다.
그런데 힘과 정복을 상징하는 말이 아닌 나귀새끼를 타고 가셨다는 것은 나귀새끼를 타도 왕이 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가 지금 이 땅 위에 임할 거라는 얘깁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바로 그런 나라, 나귀새끼를 탄 자가 왕이 될 수 있는 그런 나라, 다시 말하면 말을 타고 왕이 된다는 것은 힘과 경쟁과 정복과 싸움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귀새끼를 탄다는 것은 그런 싸움이 없고 경쟁이 없는 나라라는 거예요.
예수님을 믿게 되면 종말에 임하게 될 메시아왕국이 아니라도 이미 이 땅 위에서, 아직 예수님이 재림하시지 않았다 할지라도 새로운 나라를 살게 될 것이라는 얘깁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경쟁이 없는 나라, 나를 해치려는 원수가 없는 나라, 그런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그리고 이 세상 것들에 대해서 갖고 싶어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그런 나라, 돈, 황금, 명예, 인기 높은 자리, 이런 것에 대해서 마음이 그걸 갖고 싶어 할 필요가 전혀 없는 그런 나라가 살고 있는 동안에 임한다는 겁니다.
이게 바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이 사건의 의미라는 거예요.
새로운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우린 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베드로나 열두제자, 그리고 스테반이나 빌립집사 같은 분들을 보면서 성령 받아서 그들이 개인적으로 인격이 변했다,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이게 완전히 맞는 생각이 아니에요.
개인이 변한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다른 나라에 들어갔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열두제자가 모두가 다 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당시 중국에서 인도에서 행한 것과 똑같은 가치관을 가지고 누가 영의정이 되고, 좌의정 우의정이 되느냐, 이걸 놓고 싸웠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는 죽을까봐 무서워서 다 도망갔어요.
그러니까 세상 사람과 다를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을 계기로 급격한 변화를 일으키게 됩니다.
열두 사도와 열두 사도에 의한 초대교회, 예루살렘교회의 형편이 어떻게 되었느냐?
유무상통 합니다.
그렇게 돈, 돈, 하며 살던 사람들이 오순절 사건이 지나면서 자기 지갑을 열어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이 다 똑같이 살게 돼버립니다, 이거 무서운 변화죠.
그리고 그렇게 무서워서 다 도망갔던 제자들 중에 베드로가 내일 목 베임을 당할 것이 분명한데도 발로 옆구리를 차도 깨지 못할 정도로 깊은 잠에 빠지는 평강을 누리며 살아갑니다.
스테반 집사님이 죄 없는 자기 자신을 돌로 치는 사람들을 향하여 원망 한 마디, 분노 한 마디를 드러내지 않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를 하고 용서를 합니다.
이 모든 변화가 우리는 그 사람들 개인들이 성령 받아서 변화를 받은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아니라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게 되고 왕으로서의 선언을 하신 이유는 무엇이냐?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믿게 되는 사람마다 바로 이러한 왕국에 살아간다는 얘깁니다.
경쟁이 없는 세상, 그 전의 세상은 돈이 좋고, 황금이 좋고, 인기가 좋고, 많이 모아야 좋은 이런 세상을 살았었는데, 이제 예수님을 믿으면서 전혀 그런 경쟁과 다툼과 원수, 이런 게 없는 나라가 된다는 거예요.
물론 사도들은 다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러니까 세상눈으로 보기에는 원수가 있는 겁니다만, 그들이 순교를 당할 때 베드로나 스테반이 죽음 앞에서 보였던 그 태도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육체를 죽인다고 해서 그들이 빼앗아가는 게 아무것도 없고, 스테반과 베드로가 자기가 목 베임을 당한다고 해서 마음에서 자기가 잃어버리는 게 무엇이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는 얘깁니다.
상실감 제로가 된다는 겁니다.
내가 이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잃어버릴 게 아무것도 없어요.
심지어 내 목을 쳐도 그들에 의해서 내가 잃어버릴 게 없어요.
상실감이 있을 수가 없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원수도 없지요, 내 몸을 죽일 수는 있지만 내 마음에서 그가 내 원수가 될 수는 없어요.
내 마음에서는 그에 대한 원망이 전혀 안 생깁니다, 그에 대한 분노가 전혀 안 생깁니다.
내가 목숨을 잃어도 내가 무엇을 잃어버리고 빼앗긴다, 억울하게 상실한다는 느낌과 생각이 전혀 안 드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 나라가 지금 현재 교회의 눈에 가려져 있습니다.
전부 ‘Ne Plus Ultra', no more ahead 의 생각을 갖고 살아갑니다.
예수를 믿지만 우리가 현실은 현실이다, 열심히 벌어서 먹고 살아야 되고 취직해야 되고, 취직 잘하려면 좋은 대학을 들어가야 되고, 좋은 대학 들어가려니 공부 열심히 해야 되고, 회사에 들어가서도 누가 과장으로 빨리 승진하느냐 싸워야 되고, 사업을 하려면 같은 업종에 종사하는 업체들끼리 경쟁을 해서 이겨야만 되고…
이 세상에서 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를 암만 잘 믿어도 ‘no more ahead’, 지금 눈에 보이는 이 세상 말고는 다른 세상이 없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이 나귀 타시고 입성하신 이유는 맨 마지막에 이런 말이 있잖아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다윗의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자, 그러면 어떻게 이 나라로 콜럼버스가 산타마리아호를 타고 신대륙을 향해 항해를 했던 것처럼 항해를 해 들어갈 것입니까?
어떻게 이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겠습니까?
바로 십자가를 붙잡는 것이에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것을 바라보면서 내가 예수님과 함께 죽었다고 고백합니다.
더 이상 몸과 묶여서 사는 내가 없고 내가 주님과 함께 죽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세상이 끝납니다.
지중해 중심의 세상이 끝나버리는 거예요.
콜럼버스가 지브롤터 해협을 빠져나갔을 때 지중해 중심의 세상이 끝나버린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십자가를 붙잡을 때 내 마음은 세상에 대해 죽는 거예요.
세상이라는 것은 내 가정을 말합니다, 내 가족을 말합니다, 내 직장을 말합니다, 내 인생과 미래를 말합니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내 마음이 죽은 거예요.
죽은 것이 뭡니까?
무덤 속으로 들어간 거예요.
죽었으니까 관심이 있을 수가 없는 겁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에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성령님께서 오셔서 내 마음이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천국을 현실로 느끼게 해줍니다.
내 마음의 첫 번째 현실이 됩니다.
그 천국에 계신 하나님아버지가 내 아내보다 남편보다 자식보다 부모보다 먼저 앞서서 첫 번째 관계의 대상이 됩니다.
천국이 첫 번째 현실이 될 때에 내 마음은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없는 안전한 충족감으로 빠져들게 됩니다.
자, 이럴 때 몸은 남아있어요, 이제 십자가에서 내 마음이 세상에 대해 죽고 하늘나라 안으로 들어간 상태에서 내 몸으로 이 세상을 삽니다.
마음은 하늘나라에 가 있어요.
몸으로 이 세상을 살 때에 몸으로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다윗의 나라가 임한다는 거예요.
이 다윗의 나라는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아버지가 계시는 그 천국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임하게 되는 메시아의 왕국, 신천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2012년 대한민국 땅, 혹은 미국 뉴욕 땅, 아니면 호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삶의 현장에 다윗의 나라가 임한다는 겁니다, 십자가 항해를 할 때.
십자가 항해를 통해서 내 마음이 이 세상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나라로 마음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들어가 버리게 되면, 그런 상태에서 이 몸으로 이 세상을 살 때 베드로처럼 내일 목 베임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도 걱정이 안 되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거예요.
내가 아무 잘못 없이 돌 맞아 죽어도 나를 돌로 쳐 죽이는 사람에게 전혀 미움이 생기지 않는 그런 나라로 들어간다는 겁니다.
당장 내일 먹을 끼니거리를 살 돈이 없는데도 걱정이 하나도 안 되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마라, 하늘아버지가 다 있어야 될 줄을 안다’는 그런 나라로 들어간다는 얘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정말 내게 무일푼이라도 당장이라도 백 억짜리 천 억짜리 일이라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이기만 하면 무엇이든지 될 수 있는, 뜻이 아니니까 돈도 없고 일도 안 되는 것이지요.
뜻이 아닌 것은 이룰 필요도 없고 이루고 싶어 할 필요도 없는 것이죠.
이런 나라가 임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기존의 세계는 으뜸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세계입니다.
여기서 승자가 있고 낙오자가 있고 우등생이 있고 열등생이 있습니다.
으뜸경쟁, 모든 분야에서 으뜸경쟁을 향해 치닫고 있는 이 세상에서 몸담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믿는 게 아
이 세상 말고는 어차피 우리가 살아야 될 게, 몸을 갖고 있는 동안에는 다른 세상이 없다, no more ahead, Ne Plus Ultra, 이 생각이 잘못된 것이라는 겁니다.
분명히 몸으로 이 세상을 살고 있는 동안에 다른 세상이 옵니다.
말 탄 자가 왕이 되는 세상이 아니라 새끼나귀를 타신 예수님이 왕이신 나라, 으뜸경쟁이 전혀 없는 나라, 원수가 있을 수 없는 나라, 전혀 걱정이 없는 그런 나라, 예수 믿으면 온다는 거예요.
그 나라로 들어가는 항해가 주님의 십자가사건을 내 사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라는 것이지요.
영적으로 콜럼버스가 되지 아니하면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새로운 나라로 들어가서 이 몸이 살아있는 동안에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믿음의 믿자도 아직 맛을 못 보고 있는 것이라는 이야깁니다.
콜럼버스가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그저 으뜸경쟁으로 특징지어지는 이 세상만이 예수님을 암만 잘 믿어도 유일한 세상인 줄 알고 몸으로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 너머에 몸으로 살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게 해주셔서, 십자가 항해를 통하여 우리 모두가 다 그 신대륙을 발견하는 영적 콜럼버스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버지! 십자가 항해를 통하여 영적인 콜롬버스가 되어 신대륙인 그리스도의 나라를 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