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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대 다대포항 전경
1983년도 다대포해수욕장 전경
1960년대 다대포 전경
2009년 다대포 전경
동백아가씨 (한산도 작사 / 백영호 작곡 / 이미지 노래)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오.
동백 꽃잎에 새겨진 사연 말 못할 그 사연을 가슴에 안고
오늘도 기다리는 동백아가씨 가신님은 그 언제 그 어느날에
외로운 동백꽃 찾아오려나.
"동백아가씨 이후에 이미자 있고 이미자 이후에 트롯트 있다" 고 할 정도로
우리 가요사에 있어 동백아가씨 (작사 한산도. 작곡 백영호. 노래 이미자)
만큼 헤일 수 없이 많은 사연을 그 속에 보듬고 있는 노래도 드물다.
그 자체로 곡절 많은 현대사의 일부가 되어버린 노래. 군사정권 하에서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묶여야 했던 생채기를 간직한 노래. 해금으로
사회에 불기 시작한 민주화바람을 실감케 했던 노래. 동백아가씨 가 떠올리게
하는 단상들이다. 또 이 노래는 어려운 가정을 끌어가던 아미자 씨가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취입한 노래다. 1964년9월에 나온 이 노래는 이듬해까지 무려
1O만장이 넘는 베스트셀러를 기록했다.
당시의 1O만장은 지금의 1백만 장 보다 더 놀라운 수치다. 하루 몇 백 장에서
많게는 몇 천장까지 수요가 몰렸지만 수동식기계로 하루에 3백~5백장을 겨우
찍어내던 지구레코드로서는 더 이상 감당할 수가 없었다. <동백아가씨〉때문에
다른 가수의 음반이 팔리지 않자 레코드점에선 끼워 팔기도 성행했다.
<동백아가씨〉 하나를 구하기 위해서는 다른 가수의 음반을 같이 구입해야만
가능했던 것이다. 당시 가요계엔 〈밤안개>〈노란샤쓰의 사나이〉〈맨발의
청춘〉등 서구풍의 발라드와 재즈가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백아가씨〉의 등장으로 그 자리를 다시 트롯에게 물려줘야만 했다.
<동백아가씨〉가 공전의 히트를 누리게 된 것은 우선 그녀의 노래가 우리 민족
의 정서에 잘 어울린 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녀의 노래는 가창 양식과 가사와
선율 화성 등 여러 면에서 한국화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 국내에 유입된 일본 엔카는 단순히 노랫말만
바뀐채 불려졌다. 그러나 〈동백아가씨〉는 국내 작곡가에 의해 만들어졌으며
게다가 우리의 전통민요나 판소리 같은 가창양식 을 자연스럽게 도입 우리
민족의 한과 정서를 잘 표현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트롯의 원류가 일본 엔카니 아니니 의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음악전문가들의 책상 위에서나 다루어질 문제일 뿐 노래를 듣고 즐기는
서민들에겐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대중음악은 말 그대로 대중의 슬픔을 대신, 혹은 함께 울어주고 대중의 기쁨
을 함께 웃어주면 만이다. 유행가를 앞에 두고 예술성이 떨어지느니 상업성에
너무 치우쳤느니 갑론을박하는 건 지식의 사치일 줄 모른다 〈동백아가씨〉는
그런면에서 대중적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성공한 셈이다.
이 노래를 부른 이미자는 또 어떤 가수인가 우선 그녀는 잘생긴 외모도 아니다.
그렇다고 매너가 세련된 것도 아니다. 어쩌면 노랫가락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게 간단한 몸짓도 좀 보이련만 그것마저도 없다.
그러나 그녀의 외모에는 삶에 대한 갖가지 애환과 그 애환에서 배어나는 애잔한
연민 같은 것이 자리잡고 있다. 슬픈 듯 따뜻한 눈빛, 부끄러운 듯 다소곳하게
움직이는 입술. 바로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 떠나버린 남자를 그리워하는
여인, 부모를 그리는 효심, 부모 잃은 동생들을 돌보는 누님의 모습이다. 그녀
얼굴엔, 그녀 목소리엔 가장 서민적이면서도 가장 적절한 삶의 편린들이 하나
가득,그리고 잔잔히 고여있다.
〈동백아가씨〉가 아마도 요즘처럼 tv며 콘서트며, 게다가 ·CD까지 판을 치는
세상에 태어났다면 그만한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이미자의 얼굴
덜 세련됨으로는 말이다. 이미자의 목소리는 무기다. 목소리의 위력이 가장 잘
살아나는 건 역시 라디오다. 이미자의 〈동백아가씨〉가 나오기 직전 민간
라디오방송이 한꺼번에 모습을 드러낸것도 결국<동백아가씨>인기를 부채질했다.
당시 영화 "동백아가씨" 울릉도 로케 촬영을 보도한 경향신문 기사 (1964년7월)
'64년 7월 동명영화 (감독 김기. 주연 엄앵란 신성일)의 주제 음악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였던 동백아가씨 는 부산과도 각별한 인연을 간직한 노래로 기억된다.
작곡자 백영호씨는 부산 서대신동이 고향이고, 작사자 한산도씨는 함경북도 청진에서
출생(1932년)하여 어린시절 일본에서 잠깐 체류하였다가 해방후 부산 사상구에 정착하여
학창시절을 보냈으며 한국전쟁이 끝난 후 부산 부평동에 기거하면서 해운대 엘레지(58년)
를 백영호씨와 같이 작업하여 발표했으며, 영화 동백아가씨도 부산 다대포에서 촬영을
시작하였으며 울릉도에서도 3개월 동안 로케촬영을 진행했다고 한다.
동명의 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섬 처녀인 그녀는 약초를 캐러 서울에서 내려온 한 대학생과 사랑을 맺고
임신까지 하게 된다. 그녀는 그를 찾아 서울로 올라간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그가 외국유학을 떠난 뒤였다. 거리를 전전하던 그녀는 자살을 기도하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아 동백빠아의 여급으로 나가면서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도 잊지 못해 하던 옛 애인을 만난다. 하지만 그는 이미 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여 지금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여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아이를 그에게 넘겨주고 다시 섬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제목이 말해주듯 다대포에는 동백이 많이 피었다고 한다. 날이 좀
더 추워져 두터운 외투차림의 한겨울이 오면 동백은 핏빛 보다 진한 그 농염
하고도 뇌쇄적인 빛깔로 흐드러지게 핀다. 어째든 이런 동백꽃이 피어 밟힐
정도로 많았다던 다대포는 참으로 수려한 자연경관을 간직한 부산의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절경이자 생태자원의 보고였다.
대부분 꽃은 질 때 꽃잎이 한장 씩 떨어지나 동백꽃은 꽃 전체가 통째로
떨어져 버린다. 그래서 짓밟힌 순결을 상징하며 노래처럼 사랑에 배신당한
비련의 여인과 비유되기도 한다.프랑스 뒤마의 소설 춘희(椿姬)는 원래제목이
"동백꽃을 들고 있는 부인"이다. 베르디의 오페라"라 트라비아타"로 너무나
유명해진 비올레타가 비극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으로 보아 서양인들에게도
동백은 역시 비극의 꽃이었다.
동백나무는 따뜻한 기후를 좋아하는 늘푸른나무로서 다른 나무들이 활동을
멈추고 겨울넘기기에 여념이 없는 1-2월에 벌써 진초록 바탕에 타는 듯 붉은
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래서 동백꽃은 예부터 시조나 노래가사의 단골메뉴
이었다. 멀리는 동국이상국집에 동백화(冬栢花)라는 제목의 詩가 실려있으며,
고려 충숙왕 때는 채홍철이란 이가 동백나무 노래를 지어 죄를 면하였다 한다.
조선왕조 때는 동백 혹은 산다화(山茶花)라 하여 뭇 시인과 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근세에는 미당 서정주와 신석정의 시에서 동백꽃이 상징하는 슬픔
과 아픔을 읽게된다.
동백섬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30년이 넘게 생활의 터전으로 삼았던 고향
의 정서가 노래 속에 녹아있음을 작곡가 백씨도 부인하지 않는다. 30년이
넘게 그렇게 오랜 동안 우리 가슴에 머물고 있는 노래이지만 동백아가씨 의
작곡에 걸렸던 시간은 놀랍게도 2시간 남짓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 동백아가씨의 김기 감독이 한산도 씨에게 작사를 의뢰한 것은 64년 4월.
영화의 줄거리를 압축한 가사가 퇴고를 거쳐 작곡가 백씨에게 넘겨지는 순간
영화제작사에서 곡을 받아든 백씨는 거침없이 악보를 오선지에 옮겨놓기
시작했다. 몇 차례 기타를 튕겨 보면서 떠오르는 악상 그대로를 정신 없이,
그러나 만족스럽게 완성시켜놓고 보니 2시간만에 옥동자 동백아가씨 가 완성
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곡을 발표하기도 전에 제목이 촌스럽다며 우려를 나타내던 작곡가 선배들의
예상대로 지구레코드사에서 판을 내놓은 이 노래는 처음에는 별 빛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지구레코드사에서 발매한 음반에서도 동백아가씨 는 타이틀
곡을 최무룡이 부른 영화주제가 [단둘이 가봤으면 ]에게 넘겨주고 뒷면에
자리하게 되었다.
작곡가 백씨가 직접 레코드 5장을 옆구리에 끼고 다방을 돌아다니면서 DJ
에게 애걸복걸하면서 한번씩 틀던 이 노래는 그러나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
하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급격히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서울 명보극장
에서 별 반응을 얻지 못하고 간판을 내려야 했던 영화 동백아가씨도 을지
극장으로 상영장소를 옮겨가면서 노래와 더불어 매진사례를 거듭해 나갔다.
당시 화폐가치로 3백30원이라는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었지만 동백아가씨
L.P판은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레코드사 앞에는 2일이 넘게 기다
려서야 겨우 한장의 L.P판을 구입하고도 만족스럽게 돌아서는 사람이 부지
기수였다.영화와 음악이 동시에 상승작용을 일으키면서 빅히트를 기록하던
동백아가씨 음반이 몇 장이나 팔려나갔는지는 정확히 집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당시의 지구레코드사 사장 임정수 씨가 최근 KBS 일요스페셜 에서
밝혔듯이 2백만 장은 훨씬 넘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90년대 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있는 김건모의 음반이 2백만 장이 넘게
팔려 공식적으로 한국최고의 음반판매량으로 기록되고 있는 현실에 비추어
본다면60년대 당시 동백아가씨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실감할수 있다.
그러나 거칠 것 없이 인기의 최정점에 자리하던 동백아가씨는 음반발매
2년만인 66년에 곡이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방송금지를 당하게 되고 70년
에는 판매금지까지 당하는 아픔을 겪게된다. 가요관계자 4명과 클래식
음악전공자 6명으로 구성된 당시의 심의위원회가 판매금지의 명분으로
내세운 것은 실로 다양했다.
처음에는 가수 이미자의 창법이 소위 굴리는 식의 왜색이라고 했다가 이어
가사가 저속하다는 이유로,급기야는 군사정권 당시의 최대무기인 색깔논쟁
을 도입하기 시작했다. 클래식음악전공자들의 대중가요 천시와 동백아가씨
의 거침없는 독주에 타 레코드사가 담합한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사건은 어쨌든 불후의 명곡을 방송금지 이후 21년 동안이나
공식적으로 접할 수 없는 불행한 시대의 사생아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면
여기서 왜 방송금지를 당했는지 직접 이미자 본인에게 들어보자
가수 이미자씨 인터뷰
『「동백 아가씨」가 세상에 나온 지 불 과 일년만에 십만 장이라는 당시
로서는 상상도 못할 大히트를 치는 도중에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 저는
놀랐어요. 어떻게 이 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리둥절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1967년에 「섬마을 선생님」이 묶인 데 이어 1969년「기러기 아빠」
까지 금지곡으로 묶였을 때는 「아,날 더러 노래를 하지 말라는 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죽고싶은 마음이었습니다.방송도 금지되고, 음반 제작과
판매도 금지되고…. 누군가가 목줄을 죄는 기분이었어요.
몇 달 동안은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 지 않았습니다. 가장 한심한
것은 금지 이유가 분명하지도 않고 사리에 맞지도 않다 는 점이었어요.
비록 저의 노래 중 가장 크게 히트한 노래 세 곡이 모두 금지곡으로
묶이기는 했으나 무대에서는 여전히 저의 인기가 上終價(상종가)였습니다.
무대에 서 면 가는 곳마다 이들 금지된 곡들을 부르라고 성화예요
저는 걸리거나 말거나 불렀습니다. 교포들이 와서 판을 구해달라, 아니면
녹음테이프에 복사라도하게 해달라고 졸라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어요.
이렇게 잊지 않고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수의 생명을
끊을 수도 있는 딱지를 달고서 도 지금까지 저는 노래를 부르면서 살아올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가수들의 생명은 의외로 短命(단명)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22년 만에
해금된 「동백 아가씨」를 들고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으로 세종문화회관
무대에 서니 그 많은 팬들이 기립하여 함께 노래를 불러 주셨어요.
팬들이 있는 한 노래는 사라지지 않고, 가수도 죽지 않습니다. 그 때
저는 「이 힘으로 내가 살아왔구나」 하는 것을 절실하게 느꼈습니다』
─동백 아가씨가 금지곡으로 묶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일설에 의하면
당시 정 부가 경제개발 자금 마련을 위하여 국민들 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일회담을 성사시키고, 그에 대해 격렬한 반대 데모가 일어나 자 反日
(반일)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그 희생양을 찾던 중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李美子씨의 애조 띤 노래들에 대해 「왜색」이라는
올가미를 씌웠다고들 합니다만.그런 얘기들도 합니다만 사실과 달라요.
그것은 모든 문화적 현상과 사건을 정치적 음모의 시각으로 보는 데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갖다 붙인 추측일 뿐입니다. 그 증거로 정부 고위층
에서는 「동백 아가씨」가 금지된 곡인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朴正熙 (박정희)대통령은 후쿠다 일본수상을 초청한 자리에서「동백
아가씨」를 청해 듣기도 했어요. 만약 이노래를 「왜색」이라는 이유로
금지한 사실을 국가원수가 알고 있었다면 일본 수상 앞에서 이 노래를
부르게 했겠어요? 다른 정부 고위층도 비슷했어요.
[여기서 우리는 박대통령 앞에서 노래를 부른 사람은 이미자 본인
자신이라는 것을 어렵사리 짐작할 수 있다]
「섬마을 선생님」은 1967년 홍종철 문공부장관으로부터 작곡상,
가창상을 받은 작품이었어요.「동백 아가씨」 뿐만 아니고 「섬마을
선생님」「기러기 아빠」등 전성기의 제 노래 세곡이 히트할 때마다
재갈을 물린 것은 「정치적」인 이유가 아닌 상업적인 이유, 즉
지구레코드사 의 대중가요 시장 독점을 시기한 다른 레 코드업계의
장난이었어요. 한 마디로 라이벌 회사들의 꾸밈이었지요.
금지는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방송윤리위원회 같은
공공기관의 이름으로 행해졌습니다. 이러한 음모가 때 마침 불었던
한일회담의 역풍을 타고 「왜색」이라는 도금칠을 한 거지요.
지금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그런 식으로 일을 꾸미는
것이 통하는 시대였어요』
─방송과 레코드 제작 판매를 일시에 모두 금지시킨 것입니까?
『처음에는 방송만 금지하고 레코드제작 판매는 금지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방송을 금지해버리면 노래가 죽을 줄로 알았는데 레코드
판매 열기는 더 뜨거워져 가니 추 가 조치로 레코드 판매까지
금지시켜버린 거예요』
─음반 제작업계의 라이벌社(사)라고 했는데 어느 회사인지 말씀
하실 수 있습니까?
『알고는 있지만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와서 그런 것을 새삼
스레 들출 필요가 없으니까요. 얼마 전 일본 NHK에서 한일 문화
개방에 앞서 한국 대중문화를 소개하는 40분 짜리 다큐멘터리
프로를 만들면서 저 에게 와서 인터뷰를 해간 일이 있어요.
그 사람들이 집요하게 묻는 것도 「동백 아가씨가 한일회담의
逆(역)작용으로 정치적 희생을 당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이었
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대답해 주었지요』
─「동백 아가씨」를 「왜색」으로 모 데는 그럴만한 개연성이
있다고 보십니까?
『일본의 엔카와 닮았다고 하는 게 그 이 유인데, 원래 태생적
으로 우리나라의 대중 가요, 그 중에서도 트로트는 일본 엔카와
끊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독립적인 특징을 가지고 성장해 온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엔카 와 닮았다면 우리나라 트로트 전체가 닮았다고 할 것이지
그 중에서 유독 李美子의 「동백 아가씨」만 닮았다고 우기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노래라는 것은 국경을 넘는 언어인데
서로 닮기도 하고 영향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특히 이웃 나라일
경우 더하지요. 새삼스레 왜색을 문제삼는다면 오늘날 넘쳐나 는
「洋色(양색)」들은 다 어떻게 물리칠 작정입니까. 늑대가 양을
잡아먹을 구실을 만들 때처럼 구실을 위한 구실이었습니다』
─「섬마을 선생님」이나 「기러기 아빠」 는 무슨 구실로 금지
당했습니까.
『「섬마을 선생님」은 표절이라는 이유였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네 소절 이상 유사하면 표절로 판정하는데 이 노래는 끝 부분이
일본의 「국민 가수」라 할 만큼 유명했던 미조라 히바리의 무슨
노래를 표절했다는 거예요. 이 곡은 朴椿石 선생님의 곡이었는데
朴선생님은 일본에 가서 미조라 히바리 에게도 여러 개의 곡을
주어 취입할 정도로 한일 양국에서 왕성한 활약을 할 때였어요.
문제가 된 이후 朴선생님이 일본에 가서 찾아본 결과 미조라
히바리가 부른 곡과 세 소절이 유사하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런데 문제는 미조라 히바리가 그 노래를 부른 시점이 저의
「섬마을 선생님」보다 뒤였어요. 그러니 표절 시비를 하려면
미조라가 표절했다고 할 것이지 「섬마을 "선생님」을 표절작
이라고 하는 것은 본말이 거꾸로 된 논리 아니겠어요?
그러나 이런 소명 자료를 아무리 내놓아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기러기 아빠」는 한창 재건 국민운동으로 「잘 살아보자」며
씩씩한기상을 돋우고 있을때「너무 비탄적인 노래는 안되겠다」
는 것이 이유였어요. 이 런 식으로 당시 저의 노래는 빅 히트할
때마다 재갈이 물리고 손발이 묶여 사형선고 를 받았습니다』
─가장 인기 있는 세 곡을 금지 당하고도 李美子씨의 당시
인기는 정상이었지요. 방송에서 상도 많이 받지 않았습니까.
『무지하게 많이 받았어요. 民放(민방)인 MBC가 연말 결산으로
실시한 10대가수상 이 당시 가요계의 최고 권위였어요.
저는 이 상이 시작되던 해부터 11년 간 계속 10 大가수에
선정됐고, 그중 세 번은 가수왕으 로 선정됐어요. 1973년에는
특별상을 수상했고요. TBC의 가요대상도 여러 번 탔어요.
저의 몇몇 노래를 금지해버리면 가수의 생명도 단절될 줄로
기대했겠지만 팬들의 사랑이 저를 버리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은 거예요.
가수왕이 되었는데도 정작 제 노래는 인기 차트에서 빠져버리는
기이한 일이 해마다 반복됐지요. 진짜 올라야할 노래는 빠지고
사람만 가수왕이 된 거예요. 아무리 밟아도 죽지 않으니 마침내
저들도 손을 들고 말더군요.
명분상 노래를 해금해 주지는 못해도 더 이상 밟지는 않았습니다.
남들은 한두 번도 견디기 어려운 일을 세번이나 겪었고,게 다가
개인적인 일(이혼과 재혼, 전 남편과 의 사이에 난 딸 정재은 씨
와의 관계 등을 말하는 듯) 로 황색신문 같은 주간지들의 악의에
찬 흥미위주 보도에 참기어려운 고통을 참아내면서 살아 나왔습
니다』
─그 생명력은?
『물론 팬들의 사랑이에요. 그것 없으면 당 장 죽고 마는 것이
가수의 운명이에요』 87년부터 불어닥치기 시작한 민주화의 열기
는 가요계에도 파급되어 당시한국공륜윤리위원회(위원장 이영희)
는 6.29 선언이후 첫 문화해금조치로 국내 가요 금지곡 3백82곡
가운데 1백86곡을 해제시켜 동백아가씨 가 국민가요로 복귀하는
길을 터놓았다.
노래가 복권되자 판권을 소유하고 있던 지구레코드사측은 재 발매
에 들어가 전쟁의 상흔이 채 가시지 않은 60년대 초 서민의 삶을
구슬려 달래주면서 대중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던 동백아가씨 의
향수를 다시 불러일으켰다.
무명에 가깝던 가수 이미자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고 작곡가
백영호를 한국을 대표하는 작곡가로 올려놓은 동백아가씨 는
이렇듯 수많은 아픔과 사 연을 뒤로하고 민족의 노래로서
굳건히 우리들 곁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2004. 9. 26. 매일신문)
출처 : 네이버 블로그 "정연이네 집" "청도인"님 글
위 글은 네이버 블로그 "정연이네 집" "청도인"님 글 가져왔으며
위와 아래 사진들은 우리카페와 인터넷에서 가져온 것 입니다.
1977년 왼편 다대포항 방면, 오른편 다대포 해수욕장 전경, 뒤편은 몰운대
2017년 왼편 다대포항 방향과 우측 다대포해수욕장
2017년 다대포해수욕장 장림 방향
2017년 다대포해수욕장 전경
2019년 다대포해수욕장 전경
2020년 왼편 다대포 해수욕장과 오른편 다대포항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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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홍깨"님의 정체가 궁금하다. 우째, 이런 장문을 작성 할 수가 있노, 나는 몬 한다, 죽어도, (✯◡✯)
용심님 제가 쓴글은 극히 일부입니다.
다른데서 가져왔다고 쓰 놓았는데요,
@홍깨 그렇네요,끝까지 읽어보지 못한 것 결국 탈로 나버렸네요,ㅋㅋㅋ
그렇치 만, 이런 장문의 기고문을 편집, 포스팅한것에 대하여서는
보상은 받지 못해도 칭찬은 받아 마땅하다고 사료 되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