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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Paul의 3차 선교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몰아붙이셨습니다. 강권하셨습니다. 순종하여 올라가는 과정에서 도시를 지날 때마다 예루살렘에 결박 곧 감옥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실제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도는 자신을 죽이려고 작정한 사람들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에 출입이 금지되어 있던 부정한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갔다는 누명을 쓰고 붙잡혔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그때부터 공식적인 재판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동시에 베스도가 가이사랴 총독으로 부임했습니다.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소송들이 잔뜩 밀려 있었습니다. 그는 정직했습니다. 성실했습니다. 산적한 문제들을 원칙대로 해결했습니다. 사도의 소송만큼은 달랐습니다. 원칙대로 처리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를 처벌하라는 지역 유지들의 압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마침 인사차 찾아온 아그립바Agrippa 왕에게 도움을 구했습니다. 청문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도에게 자신을 변론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무죄와 억울함에 대해서는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습니다. 풍성하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해서 고백했습니다.
자신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었는지, 자신이 핍박하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찾아오셨는지,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를 체험한 이후 자신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진술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 죽음과 부활, 승천이 역사적인 사실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결박과 환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자기 변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진술이 아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한 간증이었습니다. 순간, 총독이 마치 봇물 터지듯 거침없이 자신의 경험을 쏟아내던 사도의 간증을 끊었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많은 학식이 너를 미치게 만들었다.”(행26:24b)라고 외쳤습니다. 이는 총독이 사도의 폭넓은 지식과 지극히 논리적이면서도 막힘이 전혀 없는 달변達辯에 깊은 감명感銘을 받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사도의 간증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지만 절대로 그렇게 되고 싶지는 않았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아무튼, 사도는 이렇게 미쳤다는 말을 들어야할 정도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신과 자신에게 주어진 소명에 대한 철저한 헌신으로 무장하고 있었습니다.
미쳤다는 총독의 외침을 마음에 새겨두거나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청문회를 주재主宰하고 있던 왕에게 온전히 집중했습니다. “왕이 이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제가 거리낌 없이 말씀드릴 수 있었습니다. 이 일은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에 어느 하나라도 왕이 모르실 리가 없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왕이여! 선지자들의 말을 믿으십니까? 믿으시는 줄 압니다.”(행26:26-27)라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셨던 수없이 많은 일들은 유대 땅 어느 한쪽 구석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들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소식을 듣거나 관심을 가진 사람들은 누구나 다 똑똑히 지켜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행하셨습니다. 팔레스타인 주변 지역 사람들도 알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 역사에 밝은 왕 역시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사도의 간증을 통해서 유대인들이 사도를 죽이려는 이유가 종교적인 갈등 때문이라는 사실도 이미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재판하는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왕만큼은 소송의 쟁점과 사도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가 “혹시 총독은 모를지라도 왕 당신만큼은, 내가 말하는 내용들이 역사적인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순간, 왕은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문제는 왕은 정치인이었습니다. 사도의 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사도를 미쳤다고 생각하는 총독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전적으로 부정한다면 지켜보고 있는 유대인들의 눈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정치적인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네가 그토록 적은 말로 나를 설득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행26:28b)라는 말로 복음을 외면하고 말았습니다.
마음에 정치적인 야심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었던 그도 역시 총독과 마찬가지로 자신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습니다.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모습니다. 당장의 이익을 위해서 충분히 알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어쩔 수 없는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변명할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때 사도는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왕을 향해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기도합니다.”(행26:29)라고 외쳤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 미치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또 기도하고 있다고 외쳤습니다. 얼마나 뜨겁고 감동적인 장면인지 모릅니다. 그날, 왕이 주재하는 청문회에는 지역의 내로라하는 고관대작들이 거의 빠짐없이 집결해 있었습니다. 청문회장은 왕의 권위에 맞도록 다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반면, 그들 앞에 혼자 서 있는 사도의 모습은 상대적으로 왜소했습니다. 초라했습니다. 거기다 사도는 사슬에 매여 있었습니다. 벌써 2년째 미결수 신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고관대작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사도는 그런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았습니다. 오히려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권세 잡은 자들을 향해서 자신의 마음에 가득 담고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를 거침없이 전했습니다. 마음속에 가득 채워져 있었던 하나님의 비전을 드러냈습니다. 사도에게 있어서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채워져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의 마음속에 깊이 새겨져 있었던 하나님의 비전은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장 탁월한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을 기꺼이 포기할지언정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가장 위대한 가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는 자신의 형편과 처지는 물론 안전을 전혀 개의치 않은 채 고관대작들이 몰려와 있던 왕이 주재하는 청문회장에서는 물론 마침내 목이 잘려 순교하는 순간까지도 최선을 다해서 주어진 사명에 충성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로 거듭난 찐 그리스도이라고 한다면 감동할 수밖에 없는 위대한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기억하십시오. 누가 되었든지 하나님께는 마음에 채워져 있는 바로 그것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마음은 과연 어떻습니까?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입니까? 로마의 초대 황제Caesar Augustus는 제국을 다스리는 탁월한 통치 능력의 소유자였습니다. 점령한 나라들을 무력으로만 다스리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부분적이지만 지방자치를 인정해 주었습니다. 전해 내려오는 고유한 문화와 종교는 물론 전통을 인정해 주었습니다. 심지어 로마법에 비춰볼 때, 무리가 되지 않다고 판단될 때는 속국의 법률까지도 인정해 주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문화와 예술과 건축 등을 장려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책과 통치를 바탕으로 로마에는 오랫동안 평화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비로운 정치가요, 로마의 대부代父라는 칭호까지 들을 수 있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승원장, 대제사장 등 모든 종교의 최고 자리까지 독차지했다는 사실입니다. 거기다 피살된 외증조부Gaius Julius Caesar를 신격화했습니다. 기념하기 위한 사원을 웅장하게 건립하기 위해서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습니다. 로마에 속한 모든 백성들에게 정성을 다해서 섬기라고 명령했습니다. 이렇게 그는 무수히 많은 업적을 세운 탁월한 정치인이요 행정가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께는 다시는 돌이키기 어려운 가증스러운 죄를 지은 우상 숭배자들 가운데 수괴首魁에 불과했습니다.
그가 자신의 통치하에 있는 나라들이 무질서하다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부족한 군인을 징집하고, 제국을 운영할 세금을 거둘 필요성까지 대두擡頭되었습니다. 로마를 비롯해서 로마 속한 모든 나라들 곧 지중해 전역의 유럽과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인구 조사를 실시하도록 칙령을 내렸습니다. 요셉은 임신해 이미 만삭이었던 마리아와 함께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너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들 가운데 가장 작을지라도 너로부터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나를 위해서 나올 것이라.”(미5:2a)라고 증거 합니다.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떡집 곧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실 것이라고 증거 합니다. 황제의 칙령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고 증거 합니다. 만에 하나, 그가 인구 조사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면, 내렸어도 로마 제국 내에만 내리고 식민지에는 내리지 않았더라면, 예수 그리스도의 베들레헴 탄생은 불가능했다고 증거 합니다. 나사렛에서 베들레헴까지는 약128km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당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걷는 것이 교통수단의 전부였습니다. 황제의 명령이 아니었다면 요셉이 만삭인 마리아를 데리고 베들레헴까지 갈 이유가 없었습니다.
만약 황제가 조금만 빨리 그 명령을 내렸었다면, 마리아와 요셉은 호적을 등록한 후에 다시 나사렛으로 돌아와서 아기 예수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조금 늦게 내렸다면 역시 나사렛에서 아기 예수를 낳고, 베들레헴으로 가서 호적을 등록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모든 환경, 모든 상황, 모든 조건, 모든 사람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황제는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인구조사를 명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당신의 거룩하고 위대한 뜻을 이루는 방편으로 사용하셨습니다.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① 먼저, 하나님께서 인구조사의 때를 정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로마 황제가 인구조사의 때를 정한 것 같습니다. “정한 때가 이르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보내시고 여자에게서 나게 하셨습니다.”(갈4:4a)라는 증거에 따르면, 실제로는 하나님께서 그 때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절대 주권으로 결정하셨습니다. 인류 역사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께서 주관하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의 인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② 또 하나님께서 당시 세계를 호령하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이름 없는 요셉과 마리아를 주목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만약 당시가 오늘날처럼 매스미디어가 발전한 세상이었다면, 황제가 인구 조사를 위한 칙령을 내렸다는 소식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의 온갖 신문, 포털, SNS 등에 도배되었을 것입니다. 인적을 찾을 수 없는 외딴 지역이 아니라고 한다면 누구나 다 알 수 있도록 떠들썩했을 것입니다. 인구조사로 국고가 얼마나 늘어나고,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징집되고, 또 인구 조사에 응하지 않았을 때는 어떤 될 불이익을 당하게 될지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설명되었을 것입니다. 반면, 마리아와 요셉이 아기 예수를 낳은 것은 가십거리조차도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혹 몇 줄 기사화 되었다 할지라도 거기에 관심을 기울일 사람은 거의 없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인구조사가 자기 나라의 정치와 경제에 미칠 영향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일 가능성이 훨씬 높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르셨습니다. 로마 황제에게 집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일하지 않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집중하셨습니다. 그들과 함께 일하셨습니다. 당신의 거룩한 역사에서 마리아와 요셉은 주연으로 쓰셨습니다. 로마의 탁월한 황제는 엑스트라로 쓰셨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변방에 속하는 갈릴리 나사렛 벽촌僻村까지 그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그들만큼은 당신의 뜻을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비록 찢어지게 가난하고, 소외되어 있는 볼품없는 사람들이었지만,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믿음으로 반응할 유일한 사람들이라고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후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의 뜻으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한 순간도 하나님의 뜻을 잊지 않았습니다. 황제가 칙령을 내린 현재까지도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하를 호령하고 있던 로마 황제가 아니라 벽촌에 살고 있던 이름 없는 요셉과 마리아에게 집중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 사명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반드시 이루어 줄 것이라고 믿으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벽촌에 사는 그들을 찾아가셨던 이유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그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 때한 당신의 믿음대로, 당신의 뜻에 믿음으로 순종하고 있던 그들을, 당신께서 인류에게 생명의 떡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주겠다고 약속하셨던 바로 그 떡집으로.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당신의 절대 주권과 섭리를 통해 이끌어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인류 역사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가십니다. 저와 여러분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안타깝게도 해산할 날이 다가왔을 때 보잘것없는 젊은 부부에게 주어진 공간은 객실이나 여관이 아니었습니다. 가축 우리였습니다. 그곳은 곳간Cave일 수도 있고, 집이나 사관의 일부분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곳에 놓여 있었던 구유위에 태어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철저하게 소외되셨습니다. 철저히 낮아지셨습니다. 그것이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황제나 총독, 위대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당연히 달랐겠지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대우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전승에 따르면, 동방으로부터 별을 따라온 박사Gaspar, Melchior, Balthasar들이 막 세상에 나타나신 아기 예수를 방문했습니다. 경배했습니다. 각자가 준비해 온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 가운데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부자였습니다.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아기 예수께 경배하기 위해서는 선물을 가져와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깔끔하게 포장된 상자를 꺼냈습니다. 순금 덩어리들을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물은 주는 사람 자신을 보여주는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는 가브리엘의 말에는 자신이 준비한 것이 바로 그것이라며 자신만만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기 예수께 내민 두 손에는 황금이 아니라 크고 흉측한 망치가 들려져 있었습니다. 그는 당황했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돌아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서 휘둘렀던 탐욕의 망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가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드러나자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오려고 했습니다. 천사가 그를 막았습니다. 선물을 드리지 않고는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망치를 드릴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아기 예수는 그것을 들어 올릴 수도 없을 것이라고 외치듯 말했습니다. 천사는 “그분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탐욕의 망치를 그대로 가지고 간다면 그것이 당신을 (반드시) 멸망시킬 것입니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부자가 허둥대면서 나감과 동시에 도착한 사람은 학자였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왔느냐고 묻는 천사에게 신비한 왕국의 향수인 유향을 가져왔다고 대답했습니다. “선물은 당신 영혼의 가장 소중한 것이어야 한다.”는 천사의 말을 들은 그는, 가져온 은 호리병을 꺼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내민 손에 들려진 병은 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거칠고 얼룩진, 투박한 토기 병이었습니다. 뚜껑을 열고 냄새를 맡아본 그의 얼굴은 심하게 일그러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유향이 아니라 식초였기 때문입니다. 천사는 그에게 “그것은 당신의 마음을 아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당신의 마음에 사무친 비통함과 분노와 화가 이것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지식을 추구했던 당신의 삶은 독소로 채워졌습니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실망한 학자 역시 부끄러워서 병을 감추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천사는 반드시 그것을 두고 가야한다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그 수치스러운 것을 두고 가겠느냐, 또 어린 아기의 입에 닿기라도 하면 어떡하겠느냐”라고 말하는 그에게 “염려는 하늘에 맡겨야 합니다. 식초도 쓰일 때가 있습니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가 나감과 동시에 들어온 사람은 재판관이었습니다. 놋쇠로 테를 장식한 상자를 내놓았습니다. “가장 용감하게 싸운 전쟁에서 얻은 가장 귀한 전리품인 몰약을 가지고 왔다.”라고 말했습니다. 천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그것이 너의 본질이냐?”라고 물었습니다. 용감한 전사였던 그가 내민 손에는 날카로운 창이 들려져있었기 때문입니다. 순간, 그는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이럴 수가! 원수들이 저주했구나.”라는 말이 신음처럼 튀어나왔습니다. 그때, 천사는 “그렇습니다. 수천 명의 원수들이 당신에게 저주를 퍼부어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만들었습니다. 당신이 일으킨 전투는 또 다른 전투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이제까지) 정복하며 살아온 당신이 (지금은) 정복당한 것입니다.”라고 가르쳐주었습니다. 또 “창은 아기가 찔릴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기 때문에 가져가겠다.”는 그에게 “두려움은 하늘에 맡겨야 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져왔었던 선물이 왕, 제사장, 선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왕과 제사장과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의 마음속에 작은 틈도 없이 가득 채워져 있었던 흉측한 망치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식초로 변해버린 쓴 포도주를 맛보셨습니다. 날카로운 창에 찔리셨습니다. 죽으셨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다리는 대림절待臨節 절기 두 번째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지혜는 “무엇보다 네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 마음으로부터 흘러나오기 때문이다.”(잠4:23)라고 외쳤습니다. 마음은 인격 활동의 중심입니다.
마음을 잘 지키는 것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크고 최우선적인 과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가득 채워진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영원 전부터 떨어질 수 없는 완벽한 하나였던 예수 그리스도를 값없이 선물로 허락해 주셨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내놓을 것 하나 없는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을 마음에 가득 품었습니다. 함께 사랑을 나눴던 소중한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고 또 철저하게 외면을 당하는 것은 물론 자칫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목숨까지 포기해야하는 위험에 몰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선물로 드렸습니다.
사도는 마음에 가득 채워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삶 전체를 거룩한 산 제물 곧 선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저와 여러분 역시 마음에 채워져 있는 것대로만 예수 그리스도께 선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마음이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지 솔직하게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버려야할 것은 무엇이고, 채워야할 것은 무엇인지 깨달아 알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새롭게 찾아온 2024 성탄 절기에는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아주시는 최상, 최대, 최고의 선물을 올려드리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