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소산성과 사비강 주변
구드래’는 ‘구들돌’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구드래에 대한 유래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백제 왕이 배를 타고 왕흥사에 예불을 드리러 갈 때 먼저 사비수(백마강) 언덕에 있는 10여 명이 오를 수 있는 바위에 앉아 부처님을 향해 망배를 하였다. 그러자 왕이 앉았던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져서 이곳을 구들돌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구들돌이 다시 구드래로 변하여 오늘날의 지명이 되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구다라’라는 어휘를 많이 사용한다. 어떤 물건의 품질이 좋지 않을 때 ‘구다라나이(쓸모없다)’라는 말을 상용어로 널리 쓰고 있다. 구다라는 큰 나라, 즉 백제를 의미하는 단어로 ‘구다라나이’를 직역하면 ‘백제의 것이 아니다’는 의미라고 한다. 백제가 아니면, 또는 백제의 것이 아니라면 모두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일본인들이 백제를 ‘구다라’로 부르게 된 것은 백제를 내왕한 일본의 배들이 백제 왕도의 포구 이름인 ‘구드래’를 국명으로 불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구드래나루터는 사비시대 백제 도성의 포구로 중국이나 일본의 배가 드나들던 곳이다.
구드래 둔치에서 바라본 부산과 구드래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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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래는 부여읍의 서쪽으로 흐르는 백마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백마강은 공주를 지나온 금강이 부여를 지나가는 한 구간을 말한다. 부여읍 정동리 앞에 위치한 범바위에서부터 부여읍 현북리 파진산 모퉁이까지의 16km 구간을 보통 백마강이라고 한다. 옛 문헌에 사비강(泗泌江), 사비하(泗泌河), 백강(白江), 백촌강(白村江)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부여의 옛 지명은 소부리(蘇扶里) 또는 사비(泗泌)였는데 이에 따라 백마강도 소부리의 강, 사비의 강이라 불렸다. 이것은 오늘날의 이름으로 바꾸면 ‘서울의 강’으로 풀이될 수 있다. 백마강은 부여 북쪽에서 흘러와 서쪽, 남쪽을 감돌아 흐르는데 그 모양이 반달과도 같아 반월성(半月城)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구드래는 부소산 서쪽 기슭의 백마강에 있는 나루터 일대를 말한다. 부여를 지나는 백마강에는 아름다운 경승지가 많다. 국가지정 명승인 ‘부여 구드래 일원’이 백마강을 중심으로 좌우측의 경승지를 포함하고 있다. 부소산에 접한 백마강 일대와 조룡대(釣龍臺), 부산성(浮山城), 나성(羅城), 대재각(大哉閣), 수북정(水北亭), 자온대(自溫臺), 왕흥사지(王興寺址) 등이 속해 있다.
수북정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로 1984년 충남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되었다. 광해군 때 김흥국이 세웠는데 정자 이름은 자신의 호인 수북정을 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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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 상류에는 겨우 한 사람 정도 앉을 수 있는 크기의 바위가 하나 있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蘇定方)이 용을 낚았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는 조룡대다. 소정방은 조룡대에서 용을 낚을 때 용이 좋아하는 말을 미끼로 썼는데 백마를 미끼로 용을 낚은 강이라 하여 백마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러한 전설은 《신증동국여지승람》 부여현 고적조에 실려 있다.
조룡대에서 조금 내려오면 부소산에 자리한 고란사(皐蘭寺)와 낙화암(落花岩)을 볼 수 있다. 낙화암은 백제 멸망의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바위다. 660년(의자왕 20) 백제가 나당연합군의 침공으로 함락되자 궁녀 3,000여 명이 이 바위 위에서 백마강으로 투신하여 죽었다고 한다. 궁녀들이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꽃이 지는 모습 같다고 해서 낙화암이라 이름 지은 것이다. 절벽 아래에는 1929년 당시 부여군수가 쓴 ‘낙화암’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고란사, 일제시대에 찍은 부소산 기슭의 고란사의 사진이다. 뒤로 백마강과 부산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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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암 건너에는 왕흥사지가 위치하고 있다. 왕흥사는 백제 법왕 2년(600)에 창건된 국찰이었다. 《삼국사기》에는 “절은 물가에 임하여 채색과 장식이 장엄하고 화려했으며, 왕은 매번 배를 타고 절에 가서 향불을 올렸다(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入寺行香)”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당시 매우 웅장하고 아름다운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과거 왕흥사의 위치에 대해서 여러 논란이 있었다. 그러다 1943년 ‘왕흥’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그곳이 왕흥사 자리임이 밝혀졌다.
낙화암과 왕흥사지가 마주 보고 있는 곳에서 강을 따라 조금 더 내려오면 부소산이 끝나는 지점에 현재 백마강 유람선을 타는 곳이 있다. 이곳에서부터 하류 쪽으로 백마강 기슭에는 길고 너른 평지가 펼쳐진다. 부소산 아래에 형성된 퇴적사면이다. 사실 옛날의 구드래나루 위치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사비성으로 진입하기 쉽고 나루로 이용하기 좋은 장소라면 이 부근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 퇴적사면의 상단부에 ‘구드래조각공원’이 조성되어 있고, 강의 둔치에는 넓게 잔디밭이 만들어져 체육공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체육공원이 위치한 곳의 강 건너에는 둥그렇게 생긴 산이 있다. 백마강변에 외따로 솟아 있는데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부산(浮山)이라 한다. 부산은 높이가 107m로 그다지 높지 않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산은 고성진(古省律)의 북쪽 언덕에 있다”고 하였다. 《1872년 지방지도》에도 강가에 그려진 부산이 나타나 있으며 그 아래로는 대재각과 부산서원(浮山書院)의 옛터도 함께 묘사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에도 규암면 진변리에 흐르는 백강의 강변에 작은 산을 묘사하고 그 이름을 부산이라 기록하고 있다. 부산의 기슭에 자리한 대재각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 잡혀갔던 이경여(李敬輿)가 낙향하여 거처하던 곳에 그의 손자 이이명(李頤命)이 세운 정자다. 깎아지른 석벽 위에 자리한 대재각은 부산을 배경으로 매우 청아한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곳에서는 길게 펼쳐진 시원한 백마강의 풍광이 널리 조망된다.
부산의 전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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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래 일원의 하류 지역에는 현재 부여읍에서 규암면사무소 방향으로 백제교가 놓여 있으며, 바로 아래 백마강 서안에는 수북정이 위치하고 있다. 수북정은 규암나루의 조그마한 언덕 위에 양주목사를 지낸 김흥국(金興國, 1557~1623)이 인조반정을 피해 이곳에 살면서 지었다고 한다. 수북정에 오르면 백마강이 상류 방향으로 길게 조망되는데 동안으로는 구드래 둔치와 부소산이, 서안으로는 부산이 강을 중심으로 서로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펼쳐진다. 지금은 백제교가 근경을 가로막아 조망 경관이 다소 훼손되었지만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수북정에서 바라보는 백마강의 모습이 더욱 아름다웠을 것으로 생각된다. 수북정이 있는 강쪽 절벽에는 ‘자온대’라는 우암 송시열의 글씨가 각자되어 있다.
부여의 백마강변에 위치한 명승 구드래 일원에는 이렇듯 다양한 경승지가 많다. 이외에도 정림사지, 궁남지, 부여 왕궁 유적 등 백제를 대표하는 수없이 많은 문화유산이 분포되어 있다. 부여는 역사도시로 일컬어지는 경주, 공주, 익산 등의 도시보다 도시화의 과정을 덜 겪어 개발의 상처가 비교적 적은 곳이다. 앞으로는 부여를 한반도 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찬란한 백제문화를 다시 살려내는 도시로 가꾸어야 한다. 아울러 구드래나루는 백제문화를 자랑하고 실어 나르던 사비도성의 항구로서 옛 영광을 되찾을 수 있는 명승으로 승화되어야 할 것이다.
구드래의 옛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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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드래의 옛 전경,
1,부산 기슭에 위치한 대재각,
2,소정방이 용을 낚았다는 조룡대,
3, 백마강에서 바라본 부소산, 낙화암, 수북정과 자온대,
4, 부산의 모습이다. 한국전통문화대학교 김영모 교수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