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언덕 외 4편
- 양산을 든 여인*
김군길
정처 없는 날이면 언덕에 올라 그녀를 본다
가난이란 수식어에 묻어버린 그녀 머리카락을 생각한다
이제 기억 속으로 떠나버린 손길과 오직 내 숨 속에 들끓는 눈빛과 시간의 경계에서 날개를 파닥이는 바람의 뿌리가 되어
햇살가닥 실핏줄처럼 퍼져오는 솜사탕바람이 좋아서 파라솔의 배를 타고 그녀가 온다
여기저기 몰려드는 표현될 수 없는 영혼의 몸짓들이 그녀 품속에 얼굴을 부빈다
자작나무 손가락을 가진 그녀 무릎에 나를 눕히고 스카프며 치마 주름 사이 묻어있는 내 눈물을 펴려한다
구름은 그녀 눈빛 속에서 오랜 어머니 품을 끄집어내고 그녀는 내 눈망울에 새겨진 간곡한 편지를 펼쳐든다
오로라가 숨 쉬는 그녀 시선은 끝내 시간의 바늘을 붙잡는다
그녀 입술 위로 열 겹 무지개가 떠간다
그녀 손가락에 숨 쉬는 것들의 맥박을 끼워준다
나의 눈물
나의 불꽃
젖은 시간은 그녀 볼을 스치듯 쓰다듬어 그녀를 위해 살아있는 모든 생명 위에 풀잎과 들꽃으로 쌓은 빛의 기둥을 세운다
언제나 쓰러지지 않는 이 언덕을 지나 나를 끌고 온 봄빛과 허공에게 묻는다
바람을 놓으면 그녀 숨결은 어디로 가는지 언제까지 그녀 그림자를 바라보게 될는지 아무것도 소유할 수 없는 언덕에서
사랑이여 나는 울지 않는다
* 양산을 든 여인 : 클로드 모네의 작품으로「산책, 까미유 모네와 그녀의 아들 장(양산을 든 여인)」(1875년)과 「양산을 든 여인」(1886년)이 있다.
내가 눈이라면
가만, 뜻밖의 선물처럼 찾아오겠다
산뜻한 소식과 화면발로 깜짝 등장하겠다
어두운 골목 구석구석
햇살담장 들썩이는
그런 풍경으로 자리하겠다
춥고 배고픈 노숙과 소외를
깃털이불로 덮어주겠다
길거리 나무들과 팔 벌려
흰 치아 솟구치는 이야기 나누겠다
연인들 팔짱 사이
꽃으로 와장창 피어나겠다
거짓과 탐욕은 쏙 빼낸
사랑, 희망이란 씨앗 신명나게 물어 나르는
노래조차 가벼운 새가 날게 하겠다
때로는 거친 바람이 찾아와도
마을 한가로이 밥 짓는 저녁연기로 맞이하겠다
더 이상 과외 길에 붙잡히지 않은 아이들과
복슬강아지 불러 모아 뛰어놀게 하겠다
약속하겠다 약속 지키겠다
떠날 때는 광휘로운 세상만 놓아두고
훌훌 떠나가겠다
봄, 편견을 위한 보고서
3월 달력을 넘겨보다가 어느 현상수배범 얼굴인가
청노루귀 사진 한 장 본다
죄목은 조금 모호해서 음- 은밀스런 봄빛처녀 행사를 몰래 몰래 훔쳐본 죄 라나, 부엽토 아래 어둠의 코드를 만천하에 공개하여 비밀정보를 불법 유포시킨 혐의라나
범인은 주로 3월 초경부터 양지바른 풀숲에 출몰 의뭉스레 노루귀를 닮은 외양에 파랗거나 흰색 티셔츠 등을 즐겨 입는 언제나 갸우뚱 순해빠진 눈동자로 쳐다보는 얼굴이 투명한 털 또는 광휘로 뒤덮일 것으로 예상되는
너무 자유로운 영혼과 천진스런 행동으로 인내, 믿음 그런 현혹된 말을 지껄여 주변 이웃을 힘들게 한다는
풍문에 동물적인 눈살을 피해 고향 수몰지역 인근 산쯤에 몸을 감추었을 거라는 그 양심 그 자유 그 녀석
이 자를 발견하여 신고한 분에게는 로또 당첨보다 어렵다는 금빛 햇살 벼락을 맞아죽을 만큼 퍼부어줄 거라는
YesMan
꽃잎을 매단 가지조차 바람의 힘에 나부끼면서 흔들리면서도 아니라고 아니 된다고 손을 내저을 줄 안다
무한긍정無限肯定이라는 말도 있어 두 말은 서로 오해되거나 아니 오해하고 싶지만
봄이 오려면 칼바람을 막거나 멈춰 서게 해야 할 것으로
그런 기술이 없는 그런 용기도 없는
적어도 No라고 한마디조차 던져 주지 못하는 나를 그저 얼간이라 매도해도 좋겠지만
사실 No라는 말은 알겠고
사표辭表처럼 몇 번을 삼키어 온 때가 있는데 개나리 노오란 울음으로 환장할 가슴으로 먼 산을 돌아온 적 있는데
동작불가動作不可의 자리라고 주저앉고 저당 잡혀
No라는 자존심 버젓이 던질 그때를 잠마다 벌떡벌떡 일으켜세우는데
충격이다
Yes라는 부호만 입력된 로봇처럼 똑딱거리며 걸어온 나에게
눈 오는 밤에
아득한 고요가 두근거린다
물일까 불의 몸짓일까
막막함 또는 스쳐간 그리움마저도 안개꽃 지천인 파스텔화 속으로 밀어 넣는 희디 흰 소매 끝
누구 참회일까 깨달음을 향한 갈구일까
춤은 어느 눈물을 야무지게 건너왔는지 손끝을 열고 발끝을 치들어 수많은 생의 곡선을 피워낸다 아무리 삭히고 삭혀도 풀리지 않는 실핏줄 욱신거리는 춤사위
춤의 허리를 부여잡고 열길 창문을 열고 뛰쳐나오는 어둠 모자를 눌러 쓴 나무들
아 이 밤엔 날개 있는 것만 숨 쉬어야 한다
마지막 발자국 하나까지 쇠박새 되어 날아가는 자정, 흔적의 빈자리 비틀거리는 적막은 가슴 깊은 포효
좌절의 체온을 견뎌온 이 악문 춤선들
그 비명 가득한 몸짓들이 동그랗게 녹아들어 면면히 타오르는 숨결
그 중심에 얼굴을 묻는 모든 춤의 뼈들 재가 되어 날린다
다시 여백의 시작이다
■ 응모자 프로필
- 성명 : 김군길
- 1959년 전남 나주 출생
- 광주고등학교 졸업, 한국방송통신대학 국문과 졸업
- 1983년 강진세무서 초임발령
- 2016년 현재 여수세무서 개인납세과 개인3팀장으로 근무
- 국세청문우회 회원(현재 총무)으로 활동하며 10년 이상 습작해옴
- 수상경력 : 「2013년 국세가족문예전」문학부문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