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여름호를 펴내면서
문제들
최병근
마천루가 피뢰침에게 물었다
너, 내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음모들을 알아?
피뢰침이 대답했다
하늘의 음모는 알고 있지
마천루의 뿌리는 지하주차장
늘 지상보다 어둡다
모든 음모는 구름 위에 있고
지하주차장에 있다
지상을 살아가는 착한 영혼들은
그걸 모른다 마치
자신의 고향이 하늘인 걸 착각한 듯이
아니면 돌아갈 곳이 지하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체하는 듯
사막화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시작되었다
----애지문학회 사화집 김정웅 외 {북극 항로}에서
인간 사회는 공동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사적인 개인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언어도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이고, 부모형제와 친구와 이웃들의 관계도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이다. 도덕과 법률도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이고, 사유재산과 조세제도도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이다. 아이를 낳고 가르치는 교육제도도 공동체 사회가 제공하는 것이고, 국가의 목표와 그 정책을 제시해 주는 것도 공동체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개인은 가족 속에 구속되어 있고, 가족은 사회 속에 구속되어 있다. 사회는 수많은 조직과 조직들 속에 구속되어 있고, 수많은 공동체 사회는 국가라는 대집단 속에 구속되어 있다고 할 수가 있다. 인간은 무리를 짓는 동물이며, 어느 누구도 자기 자신이 속한 국가를 벗어나서 존재할 수는 없다.
자본주의 사회는 사회적 동물, 즉, 국가에 반하는 개인주의 사회이며, 만악의 근원인 탐욕을 신성시 하는 사회라고 할 수가 있다. 티벳인들과 몽고인들은 개인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 수많은 이웃들과 공동체 사회를 위해 기도를 한다고 한다. 빵 한 조각이나 한 뼘 담장을 두고 다툴 일도 없고, 무엇을 사고 팔아도 매매계약서를 작성하거나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다툴 일도 없다. 모두가 이웃이고, 한 가족이며, 동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믿어 의심하지 않는 공동체 사회를 구성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있고 내가 있는 것이지, 내가 있고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느덧 티벳인과 몽고인들마저도 그 사회 의식이 퇴화되고, 만악의 근원인 탐욕, 즉, 자본가의 마수가 그 자유롭고 행복했던 전통 사회마저도 다 파괴시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본주의 사회는 전통적인 가족제도를 파괴시켰고, 공동체 사회의 마을과 그 역사를 파괴시켰다. 소도시와 대도시를 파괴시켰고, 국가와 민족의 개념마저도 파괴시켰다. 국가와 민족보다도 사적인 개인을 우선시 했고, 공동체 사회로부터 ‘인간 해방’이라는 기치 아래, 사유재산제도를 신성시 하고, 돈 많은 부자들을 탄생시켰다. 돈이 곧 권력이 되고, 대형은행과 국책은행들마저도 자본가들의 사적 금고가 되고, 군대와 경찰마저도 자본가들의 사조직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목표와 정책을 좌우하는 것도 자본가이고, 대통령과 장관과 국회의원들의 목숨을 좌우하는 것도 자본가이고, 모든 국민들이 생산과 소비의 두 축을 담당하는 노예가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첫째도 돈이고, 둘째도 돈이고, 이 ‘네것’과 ‘내것’의 싸움으로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다 파괴되고 말았다고 할 수가 있다. 부모형제 사이에도 소송전이 난무하고, 아내와 남편 사이에도 소송전이 난무한다. 친구와 친구 사이에도 소송전이 난무하고, 국가와 국민 사이에도 소송전이 난무한다. 소송이란 민사소송과 형사소송, 그리고 행정소송 등을 통해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또는 집단과 국가 간의 이익 다툼을 판사의 주재 아래, 법원이 판결해 주는 법률적 행위를 말한다. 소송전은 상호간에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제로 섬 게임’이며, 절대로 패소하면 안 되는 사생결단식의 싸움이라고 할 수가 있다. 돈은 경제적 힘이며, 이 경제적 힘은 군대와 경찰은 물론, 모든 국가 기관을 장악할 수 있는 힘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는 무차별적인 소송전으로 공동체 사회를 약화시키고, 이 자본가들의 이익을 위하여 이 세상을 아비규환의 지옥으로 이끌고 나가게 된다.
피뢰침은 마천루의 호위무사가 되고, 마천루는 전제군주와도 같은 자본가가 된다. “마천루가 피뢰침에게 물었다/ 너, 내 안에서 무성히 자라나고 있는 음모들을 알아?” “피뢰침이 대답했다/ 하늘의 음모는 알고 있지.” 하지만, 그러나 피뢰침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판단력의 어릿광대에 불과한데, 왜냐하면 “마천루의 뿌리는 지하주차장”에 있고, 이 “지하주차장”과 “하늘의 음모”는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모든 음모는 구름 위에 있고/ 지하주차장에 있”지만, “지상을 살아가는 착한 영혼들은/ 그것을 모른다.” “마치/ 자신의 고향이 하늘인 걸 착각한 듯이”, “아니면 돌아갈 곳이 지하라는 걸/ 알고도 모른 체하는 듯”이----.
마천루는 바벨탑이고 자본가가 천사의 탈을 쓰고 있는 곳이고, 지하주차장은 지옥이고 자본가가 천사의 탈을 벗고 악마가 되는 곳이다. 자본가들이 모든 국가기관을 다 장악하고 “식민제도, 국채제도, 조세제도, 보호무역제도”(마르크스)와 군대와 경찰을 동원하여 무차별적으로 인간 사냥을 하고 그 모든 것을 약탈했듯이, 이 자본가들이 천사의 탈을 쓰고 뜬구름 속의 음모를 주재하는 한편, 이제는 악마의 탈을 쓰고 지하주차장의 음모를 주재한다. 만병통치약의 개발은 장수만세의 음모론—천사의 음모론--이 되고, 만병통치약을 통한 천문학적인 이익은 지하주차장의 음모론—악마의 음모론--이 된다. 챗 GPT를 통한 문명생활의 편리함은 마천루의 음모론의 되고, 챗 GPT를 통한 천문학적인 이익은 지하주차장의 음모론이 된다.
고전주의, 낭만주의, 현실주의, 공산주의, 낙천주의 등, 모든 사상과 이론은 우리 자본가들의 음모론으로 통합되었으며, 따라서 생명공학과 자연과학, 또는 만병통치약과 챗 GPT를 통해 우리 인간들의 자유와 주체성과 심지어는 인간성까지도 다 박탈당하고 말았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인류의 역사는 돈(경제)의 역사이며,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부모형제와 친구들과 이웃들의 관계마저도 다 파괴시키고, 너무나도 자랑스럽고 기쁘게 돈의 충복이 되었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돈은 천지창조주이며, 모든 인간들은 돈 앞에서 평등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육체까지 다 바쳐 돈을 찬양하고 있지만, 돈의 은총을 받기에는 넓디 넓은 사막 속의 어린 양과도 같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깊이 있게 공부하고 잘 질문한다는 것이 모든 시인들의 근본명제라면, 최병근 시인의 [문제들]은 그의 오랜 성찰과 탐구의 결과라고 할 수가 있다. ‘문제들’은 인간이 인간을 이용하고 적대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음모론이며, 이 음모론은 천사의 탈을 쓴 자본가와 악마의 탈을 쓴 자본가들이 그들의 탐욕, 즉, 무한한 자본의 축적을 위해 확대 재생산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일자리를 창출하여 고용을 확대한다는 것은 가장 골치 아픈 일이 되지만, 그러나 저출산을 통하여 소비시장이 위축되는 것은 자본의 축적에 반하는 가장 사악하고 나쁜 최악의 사태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산업현장마다 자동화 시스템을 통하여 일자리를 빼앗으면서도 대량생산의 소비자들을 양산해내야 한다는 이중의 과제 앞에서 가장 극적으로 대두된 것이 ‘저출산과 고령화 현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따라서 인간의 생명은 더없이 소중하며, 이 지구상의 천국과 같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모든 재산을 다 쓰고 죽어가야 한다는 것이 우리 자본가들의 음모론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렇다. 이제 실버산업은 자본주의 사회의 최고의 수익사업이 되었고, 모든 젊은이들이 다 죽고 전인류가 똥오줌을 싸는 늙은이들로 구성된다고 해도 날이면 날마다 자본의 축제가 벌어질 것이다. 꿈도, 희망도 필요가 없고, 오직 오늘에 살고 오늘을 즐기며, 자본만 축적할 수 있으면 된다.
모든 음모론은 구름 위에 있고, 지하주차장에 있다. 최병근 시인은 이러한 자본의 음모론을 꿰뚫어 보고, 모든 사막화는 자본의 음모에서 비롯되었다고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최병근 시인의 언어는 가장 날카롭고 예리한 칼날이 되고, 이 언어의 칼날은 자본의 음모를 도려내는 철학적 의사의 칼날이 된다. 돈은 모래이고, 모래폭풍이고, 인간과 모든 생명체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최병근 시인의 언어는 자본가의 음모를 파헤칠 만큼 가장 날카롭고 예리하지만, 그러나 인간의 죽음과 모든 생명체들의 죽음을 의미하는 자본가들의 음모와 싸워 이길 수는 없다.
사막화, 사막화----, 과연 어느 누가 이 최후의 종말과도 같은 자본의 음모론과 싸워 이길 수가 있단 말인가? 최병근 시인은 이 [문제들] 앞에서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하고, 불가능하기 때문에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사마귀’처럼 그의 목숨을 걸고 그만큼 무모한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막화, 사막화----, 불의를 보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할 말은 해야 하는 것이 시인의 사명이듯이, 모든 인간과 생명체의 죽음 앞에서 왜, 무엇 때문에 그 ‘당랑거철螳螂拒轍의 사마귀’가 될 수 없단 말인가?
장엄하고 섬뜩하고 비장하다. 최병근 시인의 [문제들], [문제들]은 문화적 영웅의 최후같은 비장함으로 우리 자본가들의 음모를 겨냥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기획특집: 논쟁문화의 장’은 아흔 두 번째로 반경환의 명시감상과 ‘애지문학회’ 회원들의 시를 내보낸다. 애지문학회 사화집인 {북극 항로}에서 21편의 시를 골랐으며, 매우 뛰어나고 아름다운 시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다 내보내지 못함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번 호의 ‘애지의 초대석’에는 김기택 시인과 김연종 시인을 초대했다. 김기택 시인의 [한가한 숨막힘]과 김수이의 작품론 [고요히 폭발하는 명상, 현대세계의 숨통 뚫기], 김연종 시인의 신작시 [뼈를 묻다] 외 4편과 황치복의 작품론 [절제와 균형, 혹은 건강한 삶을 위한 조건]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애지의 초점: 이 시인을 조명한다’에서는 양안다 시인과 김석돈 시인의 시들을 내보낸다. 양안다 시인의 [천사를 거부하는 우울한 연인에게]와 임지훈의 작품론 [온전히 말해질 수 없는, 온전히 향할 수 없는], 김석돈 시인의 [가을 받는 날] 외 4편과 황정산의 작품론 [자연스럽다는 것]을 다 함께 읽고 감상해주기를 바란다. 본지는 이번 호에도 [전복] 외 4편을 응모해온 백지 씨와 [풍문 1] 외 4편을 ‘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자’로 내보낸다. 김새하의 시집 [도망칠 수 없다면,], 박방희 유고시집 {누란의 미녀}, 홍영택의 {오상五常}, 반칠환의 {웃음의 힘}의 개정판이 포켓북으로 출간되었다. 애지문학회 열일곱 번째 사화집인 {북극 항로}가 출간되었고, 2023년 5월 13일 토요일 오전 10시 유성문화원 2층에서 출간기념회를 가질 예정이니 많은 회원들과 독자 여러분들이 참석해 주셨으면 한다.
매우 어렵고 힘든 이 시기에도 계간시전문지 {애지}와 편집진은 너무나도 분명하고 확고한 걸음으로 애지의 창간 이념과 목표에 따라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비판만이 위대하고, 또 위대하다. 비판은 당신의 존재증명이다.
당신은 누구를, 무엇을 비판할 수 있는가?